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가야(가라) 고고학 (7)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본문
■ 창녕 송현동 고분군 15호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2007년 12월 22일 개최한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은 올해 조사된 유적 중에서도 대형급 무덤에 속하는 15호분 구조가 횡구식(橫口式) 석실분(石室墳)인지, 아니면 수혈식(竪穴式) 석실분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습니다.
석실분이란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을 말한다. 석실 위에는 거의 예외 없이 흙이나 돌을 쌓아 봉분(封墳)을 만들기 마련이다.
이런 석실분을 학계에서는 외부에서 석실 무덤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 문을 무덤방 한쪽에 마련하되, 거기로 통하는 통로가 있으면 횡혈식(橫穴式)이라고 하고, 그런 별도 통로가 없이 문만 덩그리니 있는 형식을 횡구식이라 한다. 반면 문이건 통로건 없으면 수혈식이라 한다.
15호분은 발굴 조사 결과 원형 봉토 중심부 지하에서 남-북 방향으로 중심축을 마련한 단면 사다리꼴, 평면 장방형 석실이 확인됐다. 규모는 길이 8.56m, 너비 1.70m, 높이 2.25m, 면적 14.5㎡였다. 남북 방향 장축과 동서 방향 너비 비율은 5대 1.
이미 식민지시대에 도굴이 이뤄져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석실 남쪽 벽 부근에서는 이 무덤 주인공 시신(혹은 그를 넣은 관)을 놓았던 단인 길이 2.70m의 시상(屍床)이 드러났고, 그 반대편(북쪽 벽)에서는 순장자 4구의 시신과 토기를 비롯한 관련 부장품 일부가 발견됐다.
특이한 대목은 석실 남쪽 벽 가까운 곳에 놓였던 주(主) 피장자는 머리를 남쪽, 다리는 북쪽으로 둔 데 비해 그 반대편 순장자 시신 4구는 모두 석실 너비 방향으로 배치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순장자는 한결같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 아쉽게도 도굴 과정에서 순장자들은 대체로 두개골과 발뼈만 남긴 채 몸통 부분 인골은 파괴돼 버렸다.
순장자 4구 중에서도 석실 북쪽 벽면에 바로 붙어 발견된 인골 왼쪽 귀에서는 금귀고리 1점이 발견됐다. 이 순장자는 인골 출토 상황으로 보아 석실 천장, 즉, 하늘을 바라보며 '一' 자형으로 누워 있었다. 시신을 구부려 매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거의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들 인골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기획과 서민석 박사가 감정을 했다. 치아 발육상태나 그 숫자, 무릎 연골쪽에 있는 성장판, 골반뼈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20-30대 여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15세 이후가 되면 닫힌다는 성장판은 닫혀 있었으며, 치아상태로 보아 성인으로 밝혀졌다. 또 골반뼈를 통해 여성이라는 점도 입증됐다.
그렇다면 이 성인 여성 키는 얼마일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줄자로 측량한 조사단은 135㎝를 기록한 눈금에 놀랐다. 머리나 다리쪽 피부를 고려한다 해도 137㎝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 고대인들의 신장이 현재보다 작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고고학 증거로 확인됐으나, 그래도 성인 여성 신장 치고 135㎝는 너무 단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석실은 암반을 파내고 바닥을 편평하게 조성했으며, 동서남북 네 벽면은 깬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천장은 대형 판석 8장을 덮어 조성했다.
이런 구조를 관찰한 자문위원들은 북쪽 벽면을 외부와 연결하는 문 즉, 횡구(橫口)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신경철 교수와 김두철 교수 같은 부산대 고고학과 팀은 북벽이 횡구로 볼 만한 특징을 지니긴 했지만, 축조 상태로 보아 나중에 그것을 다시 열고 닫기 위한 구조가 아닌 점으로 보아 횡구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표출했다.
그렇지만 동아대 고고학과 박광춘 교수는 "북벽을 보고도 어떻게 횡구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지난해 조사한 같은 송현동 6-7호분 조사에서도 횡구식 석실분임이 명백히 밝혀졌다"고 반박했다.
이런 논란이 오간 이날 자문회의에서 다소 의외인 점은 석실 전체 구조가 완연한 맞배지붕형 건물인 점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5호분은 전체 석실 중 3분의 1 가량이 외부로 완전 노출되어 공개됐다. 그 결과 석실 내부 구조 뿐만 아니라 그 천장 위 구조까지 완전히 드러났다. 그 결과 석실은 사다리꼴 몸통을 마련하고 그 위는 대형 판석 8장으로 천장을 얹고는 다시 그 위에는 단면 정삼각형으로 깬돌을 쌓아 올린 모습이었다.
이는 누가 봐도 맞배지붕형 건축물을 본 뜬 형식이었다.
가야문화재연구소 박종익 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초가집 형식이라고 본다"면서 "이런 독특한 석실 구조는 국내에서는 명확한 실물로는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출처; 창녕 송현동 고분 석실은 맞배지붕형 : 한겨레 (hani.co.kr)2007-12-2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2007년 12월 20일 유적 보존 정비 차원에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을 발굴조사한 결과 봉분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 2기를 비롯해 중형 고분 2기, 소형 석곽묘 6기, 제의(祭儀)와 관련된 매납 유구 2기, 묘역 조성과 관련된 주변시설 등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서울=연합뉴스) 귀고리를 찬 1500년전 가야 사람 인골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서울=연합뉴스) 귀고리를 찬 1500년전 가야 사람 인골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됐다. 도굴로 인해 유물 상당수가 도난당했음에도 각종 토기류가 다수 발견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가야문화재연구소 창녕 송현동 고분조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귀고리를 찬 1천500년 전 가야 사람 인골이 발굴됐다.
1500년전 각종 금제품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 출토 각종 금제품.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대형 고분인 15호분은 도굴로 인해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무덤 주인공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장자 4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1500년전 동물 문양 토기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 출토 동물 문양 새김 토기.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이 중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순장자 1구의 인골은 금귀고리(지름 2㎝)를 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토기의 동물문양과 같은 무늬를 새긴 토기편 등이 고배(굽다리접시)를 비롯한 다른 토기류와 같이 수습됐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이 외에도 15호분에서는 금동관 파편과 금반지, 금구슬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마구류 등이 일부 수습돼 이곳이 왕릉급 무덤임이 확인됐다.
1500년전 가야인 금반지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된 금반지.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15호분은 무덤방 한쪽(북쪽)에 입구를 마련한 횡구식(橫口式) 석실분(길이 856㎝, 너비 170㎝, 높이 225㎝)로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면까지 회칠을 해서 내부를 마감했다. 8장 천장 뚜껑돌 바깥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을 쌓고 점토를 발라 밀봉함으로써 내부 석실을 보호한 적석 석실묘(積石石室墓) 구조로 밝혀졌다.
봉토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고 외곽에는 호석(護石.두름돌)을 설치했으며 , 묘역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주변 경사면에 석축단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조사됐다.
(출처; 귀고리 찬 1천500년전 가야인 인골 발굴 | 연합뉴스 (yna.co.kr)2007-12-20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현)가 2008년 12월 29일 6세기 중반 가야 무덤인 창녕 송현동 15호분 출토 순장 인골을 분석, 복원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3D 스캐너 작업으로 무덤의 매장 상황을 살폈으며 인골을 컴퓨터단층촬영(CT), 형태를 3차원적으로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서울=뉴시스】
무덤의 주인공과 종속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묻는 고대 순장(殉葬) 풍습이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됐다.
무덤에는 입구를 기준으로 여-남-여-남의 성별로 인골이 배치돼 있었다. 무덤 입구 쪽 여성의 인골만 온전하게 발견됐다. 금귀고리를 하고 있는 이 여성 순장자는 키 155.7㎝인 17세 전후 여성으로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나머지 순장자들은 20대로 확인됐다. 유전학적 연구에서 남성 순장자들은 동일 모계혈족이었으며, 조·기장과 같은 잡곡보다는 쌀 등이 주식이었다. 특히 네 번째 위치의 남성은 육류 섭취가 많았던 것으로 확인돼 순장자의 신분구성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여성들의 관계, 여성들과 남성들의 관계 등은 추후 조사 후 밝혀질 예정이다.
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09년에는 순장자의 사망원인과 질병, 운동능력 등에 대한 추가연구뿐만 아니라 정밀한 유전학적 연구가 진행될 계획"이라며 "최근 외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바흐·코페르니쿠스·네안데르탈인 등의 얼굴복원 연구처럼 복제된 뼈 모델을 기반으로 근육과 피부를 붙여 고분 출토 순장인골의 인체 전신 복원모형을 제작·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출처; 창녕 고분 순장자 매장자세, 3D 스캔 복원 (daum.net) 2008. 12. 29. )
■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21기 새롭게 확인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박왕희)는 2015년 9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 고분 21기를 새롭게 확인했다고 3일 밝혔습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발굴조사 지역 전경.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217기(2014년 기준)에 달하는 고분이 분포한 비화가야(非火加耶) 최고 집단의 묘역으로 알려져있다. 발굴조사 대상 지역에서는 고분 3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져왔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4월부터 발굴조사를 시행한 결과, 봉토분 6기와 돌덧널무덤 15기를 추가로 확인했다. 총 24기에 이르는 고분의 성격과 시기를 규명하고 그 원형을 밝히게 된 것이다.
48호묘 전경:눈썹형 도랑.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유구나 유물로 미뤄 볼 때 새롭게 확인된 고분들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하는 시기(5세기 중반경)의 고분이다.
돌덧널 벽체 사이사이에 나무 기둥을 세운 방식, 고분 가장자리에 눈썹형 도랑을 판 방식, 봉분 2개를 연결해 쌓은 방식 등 그동안 창녕 지역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고분 축조 방식이 확인됐다.
또 둥근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과 화살촉(鐵鏃), 재갈과 말띠드리개(杏葉)와 같은 마구(馬具), 굽다리접시 등 다양한 토기 등이 출토됐다.
둥근고리자루큰칼 출토상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고분군의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고 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앞으로도 지속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처; https://v.daum.net/v/20150903095910892 헤럴드경제. 2015. 9. 3.)
■ 창녕 교동 63호분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도굴되지 않은 교동 63호분을 2019년부터 발굴한 성과를 2020년 10월 28일 발표했습니다.
경남 창녕 교동 고분에서 금동관 등 신라 장신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굴단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밝혔지만, 피장자의 몸을 감쌌던 장신구 일체는 모두 신라 유물이라 고분의 성격을 둘러싸고 향후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높이 21.5㎝의 금동관을 비롯해 관 좌우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인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1쌍, 유리 구슬 목걸이, 은반지 4점, 은허리띠 등 ‘머리에서 허리까지’ 장신구 일체가 나왔습니다.
연구소는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지난 9월 화제가 됐던 경주 황남동 신라 귀족 여성 무덤과 판박이 구성”이라고 했습니다.
창녕 교동 고분 조사 지역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소는 “장신구는 신라계 유물이지만 무덤 구조는 전형적인 가야 양식”이라며 “비화가야 지배세력이 신라에서 받은 위세품(威勢品·왕이 지방세력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을 묻었거나, 당시로선 가장 선진문물이었던 신라 스타일을 모방해 직접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선 “금동관 등 장신구를 착장한 방식이 신라 무덤 양상과 일치한다는 건 창녕 일대가 이 시기에 이미 신라에 확실하게 편입됐다는 증거”라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이한상 교수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학계에서 가야냐 신라냐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왔는데, 이번 발굴로 신라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며 “무덤 양식은 가장 보수적인 것이라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 지역 고유의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야인가 신라인가. 경남 창녕 교동 고분에서 금동관 등 신라 장신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발굴단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밝혔지만, 피장자의 몸을 감쌌던 장신구 일체는 모두 신라 유물이라 고분의 성격을 둘러싸고 향후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서 도굴되지 않은 교동 63호분을 지난 1년간 발굴한 성과를 28일 발표했다.
높이 21.5㎝의 금동관을 비롯해 관 좌우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인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1쌍, 유리 구슬 목걸이, 은반지 4점, 은허리띠 등 ‘머리에서 허리까지’ 장신구 일체가 나왔다.
창녕 교동 63호분 금귀걸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소는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지난 9월 화제가 됐던 경주 황남동 신라 귀족 여성 무덤과 판박이 구성”이라고 했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장신구 일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신라 유물로 치장한 비화가야 수장?
교동 63호분은 봉토 지름 21m, 높이 7m의 대형 봉토분으로 남북이 약간 긴 타원형이다. 이 일대 고분군에서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흔치 않은 사례다.
경주 고분은 돌무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도굴꾼이 팔 수 없는 구조인 반면, 창녕 고분은 맨 위 뚜껑돌만 열면 빗자루로 쓸어담을 수 있는 구조라 일제강점기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다행히 63호분은 나중에 축조된 39호분 봉토에 가려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창녕 교동 63호분 및 주변 고분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금동관은 맨 아래에 너비 약 3㎝의 관테가 있고,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3개를 세운 형태. 관테 아래 곱은옥과 금동구슬로 이뤄진 금동 드리개를 늘어뜨렸고, 관테 양 측면에는 원통형 금동막대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금동관”이라고 했다. 금동관 내부에는 관모(冠帽·모자)로 추정되는 직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덤 주인공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도 6점 확인됐다.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아직 흙더미인 상태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치아만 6점”이라며 “허리에 큰 칼을 차는 대신 작은 손칼 2점이 나왔고, 굵은 고리 귀걸이가 나온 점 등으로 볼 때 여성으로 추정된다.
목관의 꺽쇠 위치 등으로 보아 키는 155㎝ 정도”라고 했다.
순장의 흔적도 나왔다. 무덤 주인공의 발치 바닥을 약 40㎝ 낮춘 공간에 순장자 2명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금동제 가는 고리 1점, 항아리 2점, 쇠도끼 2점과 쇠낫 1점이 출토됐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유물 노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계 “이미 신라에 편입됐다는 증거”
연구소는 “장신구는 신라계 유물이지만 무덤 구조는 전형적인 가야 양식”이라며 “비화가야 지배세력이 신라에서 받은 위세품(威勢品·왕이 지방세력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을 묻었거나, 당시로선 가장 선진문물이었던 신라 스타일을 모방해 직접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학계에선 “금동관 등 장신구를 착장한 방식이 신라 무덤 양상과 일치한다는 건 창녕 일대가 이 시기에 이미 신라에 확실하게 편입됐다는 증거”라는 반론이 나왔다.
이한상 교수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학계에서 가야냐 신라냐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왔는데, 이번 발굴로 신라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며 “무덤 양식은 가장 보수적인 것이라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 지역 고유의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출처; 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daum.net)2020. 10. 28.)
2019년 11월 28일 지금까지 한 차례도 도굴되지 않아 원형이 보존된 약 1천500년 전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 내부가 오전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 (창녕=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28일 오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이 공개되고 있다. 2019.11.28 home1223@yna.co.kr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5세기 중반부터 후반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63호분 뚜껑돌 7개 중 2개를 이날 들어 올렸다.
대형 크레인을 활용해 끌어올린 뚜껑돌 무게는 각각 2.8t과 3.8t. 길이는 2m가 족히 넘었고, 너비는 1m, 두께는 80㎝에 달했다. 나머지 뚜껑돌 5개는 일단 그대로 뒀다.
비화가야 뚜껑돌 (창녕=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28일 오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 뚜껑돌을 들어올리고 있다. 2019.11.28 home1223@yna.co.kr
봉토 지름이 21m, 높이가 7m인 63호분이 그동안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까닭은 지름 27.5m의 39호분과 인접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래 63호분을 조성한 뒤 39호분을 만들었는데, 본래는 각각 쌓은 봉토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짐작된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 있는 무덤 약 250기 가운데 도굴 흔적 없이 나타난 사례는 63호분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경사지에 있는 63호분은 높은 지점의 암반은 깎고 낮은 지점은 흙을 쌓아 올려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을 먼저 했다. 이후 작은 깬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점토를 발라 시신과 부장품을 두는 매장주체부를 만들었다. 규모는 길이 6.3m, 폭 1.4m, 깊이 1.9m다.
거대한 뚜껑돌은 매장주체부 천장에 해당한다. 7개를 얹고 사이를 깬돌로 메운 뒤 점질토를 발라 밀봉했다.
연구소는 사전에 소형 카메라로 내부를 조사해 큰 항아리인 대호(大壺)와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뚜껑이 있고 목이 긴 항아리) 같은 토기를 확인했다.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 (창녕=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28일 오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이 공개되고 있다. 2019.11.28 home1223@yna.co.kr
1천500년 넘게 잠들었다가 이날 햇빛을 본 63호분에는 실제로 토기가 가득했다. 땅을 일구거나 논에 물꼬를 틀 때 사용하는 농기구인 살포로 추정되는 철제 유물 2점과 마구(馬具)로 보이는 물건도 모습을 드러냈다. 남쪽 벽면은 붉은색 주칠(朱漆) 흔적이 뚜렷했다. 주칠은 벽사가 목적으로 추정된다.
정인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굽다리접시를 깔고 연질 발을 위에 올렸으며, 가장자리에는 장경호를 놓았다"며 "점렬문(點列文)과 검은빛이 도는 색상을 보면 전형적인 창녕식 토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장주체부는 남쪽부터 북쪽으로 토기, 피장자, 토기, 순장자, 토기 등 5개 공간으로 나뉜다"며 "순장자 공간 넓이를 봤을 때 2명 정도 순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 연구사는 "정확한 유물 점수는 발굴해 봐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데, 매장주체부 조사에는 두 달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며 "인골 유무도 아직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뚜껑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63호분은 남동쪽에 길이 2.7m, 폭 0.6m, 깊이 0.8m인 소형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가 존재하는 점도 특징이다. 창녕 비화가야 무덤은 보통 봉분 하나에 매장시설 하나를 설치했다고 정 연구사는 강조했다. 이 무덤도 길이 1m가량 판석 10∼11개를 놓고 점토로 감싸 마무리했다.
사적 제514호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 최고 지배자 묘역으로, 목마산과 화왕산 기슭에 무덤을 조성했다. 비화가야는 창녕을 거점으로 삼은 가야 세력이다.
연구소는 2014년부터 고분군 미정비 지역 학술발굴을 진행 중이다. 2016년 이후에는 동쪽 상단부에 있는 63호분과 39호분, 봉토 지름이 약 8m인 38호분과 62호분을 발굴했다.
비화가야 고분 축조기법 드러났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위쪽 중앙이 39호분, 아래가 63호분. 63호분 옆은 각각 38호분과 62호분. 2019.11.28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습니다
돌 올리자 토기와 흙으로 채워진 무덤방, 무덤 돌벽은 진흙 바르고 빨간 주칠 흔적 인상적, 주칠 흔적은 귀신 쫓는 벽사 의미로 추정
5세기 가야소국인 비화가야 권력자의 큰 무덤이 1500년만에 처음 열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오전 11시께 경남 창녕읍 교리 산 5번지 교동기야고분군에서 최근 도굴되지 않은채 발견된 대형무덤인 63호분의 덮개돌(개석)을 들어내고 길이 6m가 넘는 묘실 내부를 취재진과 학계 전문가들에게 내보였다.
무게 2.8톤, 3.8톤의 개석 2개를 기중기가 걷어올리면서 드러난 묘실 안은 목긴항아리(장경호)와 뚜껑 달린 굽다리접시(장경호) 등 특유의 창녕식 토기들이 벽에서 흘러내린 흙과 섞인 채 바닥 공간을 가득 채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토기들 사이로는 신분 높은 무덤주인의 상징물로 묻는 농기구 일종인 살포와 철화살촉, 말갖춤 등으로 추정되는 금속제 유물의 조각들도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덮개돌 안쪽으로는 토기가 없는 여백 공간도 보였는데, 순장자가 몯힌 구역으로 추정된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또다른 관심거리인 무덤주인 인골이 남았을지에 대해서는 겹겹이 쌓인 토기들과 흙층을 수습하고 물체질해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작고 각진 돌들을 쌓아 만든 묘실 사방벽도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진흙을 전면에 펴바른 뒤 빨간 주칠을 한 흔적이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 있어 취재진과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개석을 들어내기 전 내시경을 넣어 사전 조사하는 작업에서도 확인된 주칠 흔적은 63호분 발굴 작업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으로 꼽히는 성과다.
다른 어느 고분보다도 주칠 범위가 넓고 흔적도 뚜렷하다고 한다. 연구소 쪽은 고대인들이 삿된 귀신을 망자한테서 내쫓는 벽사의 의미로 무덤벽 사방에 빨간 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무덤방 벽에 숱하게 주칠한 흔적이 발견되는 고대 일본 열도의 고분 축조 양식과도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발굴현장 아래 임시 진열대에는 63호분 인근의 62호분에서 출토된 등잔형 상형토기가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전화 수화기 혹은 천칭 모양의 몸체에 2개의 등잔 모양을 균형감 있게 얹은 이 상형 토기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비화가야 장인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뽐냈다. 박종익 연구소장은 “대형가야고분이 전혀 도굴되지 않고 매장 당시의 상황을 유지한채 발견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비화가야의 장묘의례와 생활사를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묘실 바닥에 두껍게 겹을 이루어 쌓인 토기들과 흙층을 걷어내면 인골과 금관, 귀고리, 말갖춤 같은 중요유물들이 다수 출현할 가능성도 상당하다는게 연구소 쪽의 전망이다. 양숙자 학예실장은 두어달 정도로 예상되는 묘실 수습작업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처; 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다 : 한겨레 (hani.co.kr) 2019-11-28 )
창녕 가야 무덤서 금동유물 '와르르'..신라 귀족여인 판박이
도굴꾼 손 안 댄 '0.1% 확률'의 가야 무덤금동관·은허리띠 등 지배층 차림 원형 출토"키 155cm 여성 가능성" 순장자 2명 흔적도문화재청 "비화가야 성격 풀어줄 것" 기대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은 희귀한 가야 무덤으로 관심을 모았던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63호분에서 금동관‧은반지‧은허리띠 등 1500년 전 유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비화가야 최고지배층이었을 무덤 주인의 생전 화려한 차림새 그대로다. 지난 9월 ‘호화 황천길’ 차림으로 큰 화제가 됐던 경북 경주 황남동 신라 고분 발굴에 이어 고고학계의 단비 같은 성과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지연)는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교동 Ⅱ군 6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비화가야 지배자의 꾸밈유물인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일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가야 고분 구조상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을 확률은 “0.1%에 불과”(정인태 연구사)한데 이처럼 피장자의 꾸밈유물 일체가 온전히 확인된 것은 창녕 일대 비화가야 고분에선 처음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63호분에서 발굴된 비화가야 지배층의 착장 유물(왼쪽)과 지난 9월 경주 황남동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120-2호분에서 나온 장신구 유물은 형태나 구성이 거의 같다. 비교 이해를 돕기 위해 문화재청 제공 사진을 나란히 합성했다. [중앙포토]
유물은 높이 약 21.5㎝의 금동관, 관에 드리운 금동 드리개, 금동 막대장식, 굵은고리귀걸이 한 쌍, 유리구슬 목걸이, 은반지, 은허리띠 등을 아우른다. 은장 손칼도 두 개 나왔다. 지난 9월 경주 황남동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적석목곽묘) 120-2호분에서 나온 장신구 유물과 형태나 구성이 거의 같다. 금동신발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황남동 고분의 주인은 유물 착장에 근거해 키 170㎝ 내외의 장신 귀족 여인으로 추정됐다.
이번 발굴조사를 담당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양숙자 연구관은 “부장품을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남자 무덤의 특징인 대도(큰 칼)가 출토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번에도 여성의 무덤으로 보인다”면서 “키는 155㎝ 정도로 아담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지름 21m의 창녕 교동 63호분은 후대에 축조된 39호분(지름 27.5m)에 가려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흔치 않은 가야 무덤이다. 맨 위 뚜껑돌만 비집고 들어가면 유물을 훔칠 수 있는 구조라 창녕 고분은 일제시대 발굴된 이래 숱한 도굴꾼의 표적이었다.
문화재청은 2014년부터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 묘역 가운데 미정비지역(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산5 일원)을 조사해오다 63호분을 발견했다. 지난해 11월 석실을 덮은 대형 뚜껑돌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면서 1500여년 전 조성된 피장자의 사후 공간이 원형 그대로 드러났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63호분 및 주변 고분.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전체 석곽은 길이 640㎝, 너비 130㎝, 깊이 190㎝ 규모로 피장자의 머리는 남쪽으로 뒀다. 무덤 내부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피장자의 머리 위쪽에 토기 등 부장품이 쌓여 있고 발치 아래엔 40㎝ 가량 낮게 조성된 순장자의 공간이 자리했다.
이번 조사에선 순장자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도 나왔다. 양 연구관은 “순장 공간 곳곳에서 관에 쓰이는 꺽쇠가 다수 나온 걸로 봐서 순장자도 목관에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같은 사례가 이례적이라고 덧붙였다.
63호분 석곽 내부는 부장 공간, 피장자 공간, 순장자 공간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사진 가야문화재연구소]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63호분에서 발견된 유물 중 금귀걸이.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황남동 고분은 신라가 세력을 뻗어가던 6세기 전반에 조성됐고 이번 교동 고분은 그보다 이른 5세기 후반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두 무덤의 부장품이 비슷한 것은 이 시기 지배층 사이에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양 연구관은 “창녕 고분은 축조 양식이 신라와 다르고 이른바 창녕식 토기라고 일컬어지는 굽다리 접시 등 특징적인 부장품이 있는데, 이번 꾸밈유물에서 보듯 위세품(지위를 알려주는 물건들)은 신라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말했다.
삼국시대 장신구 전문가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는 “장식 유물만 보면 신라와 판박이”라면서 “창녕 일대 지배층이 신라 영향권에 있거나 그러한 관계를 과시하려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이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복잡‧다양한 문화가 나타나는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다음달 5일 유튜브를 통해 이번 발굴조사에 참여한 단원들이 실시간 댓글로 답변하는 온라인 발굴조사 설명회를 연다.
(출처; https://v.daum.net/v/20201028093044319 중앙일보. 2020. 10. 28.)
2021년 11월 30일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상남도 창녕군에 소재한 사적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 주인공의 매장 공간 앞에서 순장견(殉葬犬)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새롭게 확인된 많은 자료 중 눈길을 끄는 점은 고분 주인공 매장 공간의 출입구 북서쪽 주변에 길이 1m 내외의 별도로 마련한 작은 공간에 개를 매장한 점이다.
39호 고분은 출토 상태가 양호하지 못해 정확한 매장 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상태가 양호한 63호 고분에선 온전한 상태의 개 세 마리가 나란히 포개어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 세 마리 중 크기를 확인한 것은 1개체로, 어깨높이는 약 48㎝로 진돗개와 비슷한 체격으로 추정한다.
63호 고분에선 온전한 상태의 개 세 마리가 나란히 포개어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 문화재청 제공
교동 7호분에서도 출입구에 다수의 개를 매납한 사례가 있는 등 교동 고분군에서는 무덤 출입구에 개를 매장한 사례가 드물게 확인된 바 있으며, 교동 14호분에서도 개의 뼈를 길이로 모아서 입구부 안쪽에 놓아둔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 보아 교동고분군 안 개 매장 위치는 매장 주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곳으로 보인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는 '송현이'로 대표되는 사람 위주의 순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부 유적에서 공희의 제물로 매납된 소나 말 등이 확인된 사례는 있으나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개를 순장한 사례는 흔치 않다.
무엇보다 이번에 확인된 순장견은 무덤의 입구에 자리하며 바깥을 향하고 있어 백제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석수의 사례처럼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의 신상)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장송의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출처; https://v.daum.net/v/20211130113015644 뉴스1. 2021. 11. 30.)
2023년 1월 31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문화재보존과학센터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출토 금동관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 이 장식에 부착된 반구형 장식과 원통형 장식이 직물로 추정되면서 이 장식을 꼬아서 연결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
사적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에서 5~6세기 창녕 지방에서 자체로 제작된 근거로 볼 수 있는 특성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비화가야 지배계층의 무덤군이다.
이 고분군 중 63호분에서 2020년 10월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약 22㎝, 둘레 길이 약 47㎝가 넘는 금동관이다. 순수 구리 표면에 금·은 합금을 수은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해 제작됐다.
수은아말감 기법은 고대 도금 방법으로 귀금속을 수은과 결합해 물체에 바른 다음 수은을 증발시켜 도금하는 방법이다.
이 유물은 '출(出)'자형 세움장식의 도금이 앞뒤 모두에서 확인되지만 몸체인 관테에는 바깥 면에서만 확인돼 도금 부위를 최소화하면서 시각적 효과는 최대화한 금동관이란 평을 받고 있다.
관테에 연결된 세움장식은 머리가 둥근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관테 아래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이 있다.
[서울=뉴시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출토 금동관 관 장식 (A: 모식도, B: 엑스선 이미지, C: 사진)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01.3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금동관 안쪽 면에 견직물은 고대에 사용했던 경금(經錦)으로 색실을 사용한 이중조직의 두께감과 광택으로 금관의 장식성을 강조했다. 이는 금동관 안에 받쳐 쓰는 천으로 만든 고깔모양 모자로 추정된다.
[서울=뉴시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출토 금동관에 쓰는 경금(經錦)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01.31. photo@newsis.com [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금은 직물의 날실에 선염한 색실을 사용해 이중 조직으로 짠 비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천마총과 미륵사지 석탑에서 확인됐다. 중국 한나라 사람 유희가 지은 '석명(釋名)'에는 이 직물 제작이 너무 힘들어 금처럼 값어치를 지닌 비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금동관은 사슴뿔 모양 장식이 없는 세 줄기의 '출(出)'자형 세움장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5~6세기에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특성을 보여준다.
[서울=뉴시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금동관 출토 상태 및 금동관 안에 쓰는 고깔모양 모자 추정범위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01.3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연구소는 도금층 두께가 얇고, 표면 색상이 균일하지 않은 점도 확인돼 창녕 내 수공업 집단이 금동관을 자체 제작했을 가능성의 근거를 확보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분석 결과는 당시 신라와 창녕지역 비화가야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향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출처; https://v.daum.net/v/20230131101518873 뉴시스. 2023. 1. 31.)
■ 창녕 교동 10호분, 창녕 계성 A지구 1호분, 창녕 송현동 7호분
이한상교수는 2023년 7월 31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조영 주체를 비화가야로 설명하는 연구가 많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데, 고대 창녕에 웅거한 정치 주체가 비화가야인지 혹은 일찍이 신라에 복속된 지방 세력인지를 확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남 창녕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 교동 10호분은 규모가 비교적 작았지만 대가야 왕족들의 전유물인 용봉문환두대도(위쪽 사진)가 출토됐다. 계성 A지구 1호분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화려한 금귀걸이(아래 사진)가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일본산 녹나무 목관과 소녀의 인골
창녕 지역 고분군이 재차 조명받은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그해 4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교동 고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리 상태가 좋지 않은 송현동 고분군을 정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굴에 나섰다.
대상은 6호분과 7호분인데, 마치 경북 경주의 황남대총처럼 두 기의 무덤이 연접돼 표주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발굴을 마무리하기까지는 2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두 무덤 가운데 늦은 시기에 축조된 7호분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창녕 송현동 7호분 석실 바닥에서 출토된 길이 3.3m의 목관. 일본산 녹나무로 제작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되고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무덤 바닥에 오랫동안 물이 고이면서 펄이 조성돼 있었기에 나무로 만든 유물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출토 유물 가운데 조사원들의 눈길을 끈 것은 길이가 3.3m나 되는 길쭉한 목관이었다. 목관을 뒤덮은 펄을 모두 제거하니 그것은 녹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것임이 드러났다.
후속 연구에서는 일본산 녹나무로 만든 배가 목관으로 전용된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목관 주변에서는 밤, 참외씨, 복숭아씨 등이 수습됐는데, 무덤 속에 제물로 과일을 넣었음이 밝혀졌다.
조사단은 6호분과 7호분 발굴을 마무리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년 계획으로 15호분과 16호분 발굴을 시작했다. 두 무덤 역시 표주박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15호분은 여러 차례의 도굴로 내부가 교란된 상태였다.
무덤 안에서 남녀 2인씩 모두 4인의 순장자 인골이 드러났다. 3구는 훼손이 심했지만 여성 인골 1구는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발굴이 끝난 후 고고학, 유전학, 법의학 전문가들이 공동연구를 진행해 인체를 복원하고 그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연구를 통해 ‘송현’의 키는 153.3cm, 나이는 만 16세로 추정됐고 사망 원인은 중독사 또는 질식사라는 결론이 도출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고대 창녕, 가야인가 신라인가
가장 큰 논점은 이른바 ‘창녕양식 토기’를 독자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지역을 가야로 볼 것인가, 혹은 그것을 신라 토기의 지방 양식으로 보면서 창녕을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신라양식 금속공예품을 신라 왕이 지역 유력자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볼 것인가, 혹은 비화가야 지배층이 자국의 생존을 위해 신라에 손을 내민 결과로 볼 것인가 하는 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출처; https://v.daum.net/v/20230731233313360 동아일보. 2023. 7. 31.)
<자료출처>
귀고리 찬 1천500년전 가야인 인골 발굴 | 연합뉴스 (yna.co.kr)2007-12-20
창녕 송현동 고분 석실은 맞배지붕형 : 한겨레 (hani.co.kr)2007-12-25
창녕 고분 순장자 매장자세, 3D 스캔 복원 (daum.net) 2008. 12. 29.
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daum.net)2020. 10. 28.
https://v.daum.net/v/20191128140630488 연합뉴스.2019. 11. 28.
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다 : 한겨레 (hani.co.kr) 2019-11-28
https://v.daum.net/v/20211130113015644 뉴스1. 2021. 11. 30.
<참고자료>
빨간 고무대야에 빵봉지까지…1500년전 가야 무덤에서 보이는 도굴의 흔적 - 경향신문 (khan.co.kr)2019.11.29
https://v.daum.net/v/20181213180344785 뉴시스. 2018. 12. 13.
https://v.daum.net/v/20231016215102147
창녕의 또다른 가야고분군, 계성고분군 1호분 55년만에 재발굴조사 진행 (daum.net)2023.10.12
https://v.daum.net/v/20241127111910405 뉴시스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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