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 무덤에 30여 명 최다(最多) 순장…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11월 16일 03시 00분 
 

<20>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한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0일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마치 낙타 혹처럼 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들이 주산(主山)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수백 개의 고분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선산(先山)이나 다름없었다.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공주 송산리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규모를 모두 능가했다. 약 15분을 올라 정상에 가까운 44호분 초입에 이르자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가야인들이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경사면을 깎아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었다. 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 가야사 연구 암흑기 시절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고난을 겪은 역사를 반영하듯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천마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과 백제 무령왕릉이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방치됐다. 여기에는 가야 고분 연구가 자칫 일본의 식민사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야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은 일본계 유물이 가야 고분에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가야 점령 기록은 광복 이후 우리 학계의 가야 고분 연구에 걸림돌이 됐다.
 김세기가 계명대 학부생으로 참여한 1977∼1978년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은 순장곽 같은 가야 특유의 고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왜곡과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한 것도 가야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주보돈 조교(현 경북대 교수)와 김세기 등이 현장조사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가장 눈길을 끈 발굴 성과는 단연 순장자의 묘실인 ‘순장(殉葬) 석곽’의 존재였다. 이것은 대가야 고유의 묘제로 44호분에서만 무려 32기의 순장 석곽이 발견됐다. 44호분의 주인과 함께 최소 32명이 한꺼번에 순장된 셈이다. 김세기는 “주인공이 묻힌 석실 등에도 4명이 추가로 묻힌 45호분의 사례를 감안하면 총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일 무덤에 30여 명이 순장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중국에서는 최대 200여 명이 묻힌 순장묘가 발견됐으며 일본은 순장풍습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해지지만 아직 순장묘가 발굴되진 않았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2.25 06:00 수정 : 2020.02.25 16:52

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심상치않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가야국 신화를 6컷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을 세 번 보았다. 한번은 허황후의 도래 신화를 담은 ‘파사석탑’을 중심으로, 또 한 번은 전체적인 전시구성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그런데 두 번 관람에도 뭔가 그냥 스치고 지나간 듯한 유물 한 점이 계속 눈에 밟혔다. 결국 세번째로 박물관을 찾아 그 유물을 제대로 뜯어보았다. 그 유물이 지난해 3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제방울’이었다.

■견강부회인가

이번 특별전이 가야를 주제로 2700여 점의 유물이 총출동한 전시회가 아닌가. 어쩌면 직경 5㎝ 정도인 이 토제방울은 ‘가야본성’ 특별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특별전에서는 전시장 한편 구석에 다음과 같은 유물설명과 함께 ‘초라한 모습’(필자의 눈에는)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 방울에는 거북, 관을 쓴 남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급합 등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3월 이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대다수 언론은 ‘거북아 거북아…5세기 어린이 무덤서 대가야 버전 가락국 신화 그린 방울 출토’(필자)라는 등의 제목으로 제법 비중있는 기사를 썼다. 필자는 일단 발굴조사단의 해석을 존중하는 편이어서 되도록 긍정적인 입장에서 조사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견해를 다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의감이 가시지 않았다. 왜냐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설명처럼 토제방울에 새겨진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견강부회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에 너무 소홀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가야붐이 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린이 무덤에서 나온 그 작은 유물을 두고 ‘억지춘향’ 격으로 짜맞춘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놓치기 쉬운 그 작은 방울을 찾아낸 조사단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조사단의 해석을 제법 긍정적으로 소개했지만 ‘방울에 나타난 대가야 버전의 가락국 신화’와 관련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방울그림의 첫번째 주제. <삼국유사> 가락국 신화의 무대인 구지봉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가야 버전으로 해석될 경우 대가야 정견모주 설화의 무대로 전해지는 가야산 상아덤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다.|배성혁씨 제공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그림

그후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가야본성’ 전시장 구석에 전시된 ‘토제방울’을 보고 불현듯 현재의 연구성과가 궁금해졌다. 해서 발굴조사 때 책임조사원을 맡은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에게 연락했더니 ‘마침 가야고분군 등재추진단이 펴낸 연구총서(<가야고분군 Ⅴ>)에 논문을 발표했노라’고 화답했다.

그래 배실장이 보낸 논문(‘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의 건국신화’)을 훑어보았더니 제법 논리를 갖춘 흥미로운 글이었다. 지금부터 배성혁씨의 논문을 토대로 ‘또 하나의 신화, 대가야 건국’ 이야기를 풀어본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기대해본다.

그림에 등장하는 ‘관을 쓴 남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성혁씨는 ‘남자의 머리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이것은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배성혁씨 제공

2019년 3월 어느 날 고령 지산동 고분(사적 제79호)의 탐방로 조성을 위한 사전발굴조사에서 어린이 무덤이 확인됐다. 길이 1.65m, 너비 0.45m 정도의 작은 무덤에서 4~5살 어린아이의 치아 및 두개골 편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에 눈에 띈 것은 흙으로 구워 단단해진 방울이었다. 직경 5㎝ 정도되는 아주 작은 방울이었다. 5세기 후반 유물로 판단됐다. 발굴단은 무덤 주인공인 어린이가 생전에 갖고 놀던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방울을 세척하자 재미있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처음 보인 것이 거북이 그림이었다. 심상치않은 그림이라 여긴 발굴단은 현미경을 들이댔다. 그랬더니 방울 표면에서 6개의 그림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었다.

방울에 새겨진 춤추는 사람.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형상을 그렸다는 것이다.|배성혁씨 제공

■<삼국유사> ‘가락국신화’

발굴 1년이 지난 지금 배성혁 실장의 정리된 논문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배실장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그림 내용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 건국신화’를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는 “기원후 43년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지역을 다스리던 지도자 9명(9간·九干)이 200~300명을 이끌고 갔더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말소리만 들렸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왔으니, 너희는…’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하면서 춤을 추어라.”

무엇에 홀린 듯 9간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며 춤춘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그곳에 가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가락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릇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빛났다.…알 6개가 모두 남자로 변했다…그 중 용처럼 생긴 이는 수로라 했는데 가야국을 세웠고, 나머지 5명도 5가야의 임금이 됐다.”

춤추는 인물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게 배성혁씨의 주장이다. 그림 한가운데 선시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배성혁씨 제공

■방울 그림의 해석

논문은 이 신화를 염두에 두고 방울그림을 해석했다.

먼저 ‘거북 머리’ 형상(제1주제)은 어떨까. 가락국 신화의 성소인 구지봉이 연상된다는 것이다. 봉우리 모양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어서 구지봉이라 하지 않던가. 전문가 중에는 거북을 신과 인간의 매개동물로 보고, 거북의 ‘머리’를 수로(首露), 혹은 우두머리, 혹은 남근(男根) 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방울의 고리부분을 머리로 삼고 표면에 둥글게 외곽선을 그은 뒤 내부에 2열의 등껍질을 새겨넣은 형상(제2주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북 그림은 ‘가락국기’의 ‘구지가(龜旨歌)’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림의 제3주제인 ‘관을 쓴 남자’는 어떻게 설명되나.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한 것으로 평가했다. 논문은 머리 부분의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즉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히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자루를 엎드려 맞이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그림. 이 그림은 말과 같은 짐승으로도 볼 수 있어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배성혁씨 제공

4번째 그림은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인’이라 평가한다. 왜 여인일까. 그림 한가운데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오른손은 긴 소매가 앞으로 꺾어지며 휘날리고, 왼손은 뒤로 돌아가는 모양으로 짧게 표현했다.

5번째 그림은 어떻게 해석될까. 논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보자기’를 엎드려서 우러러 맞이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보자기를 형상화한 모습. 배성혁씨는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고 해석했다.|배성혁씨 제공

논문은 마지막인 6번째 그림의 주제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로 판단한다. 두번째 그림의 거북 그림에서 보듯 방울의 고리 부분은 하늘(天)과 신(神)을 상징하는 거북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6번째 그림을 보면 역시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이 ‘가락국 신화’의 하이라이트와 부합된다고 보았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자루)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는 대목이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4~5살 어린이 무덤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 |배성혁씨 제공

■일연스님은 왜?

한마디로 ‘대가야의 중심지’인 경북 고령의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 그림은 ‘가락국 신화’를 6컷으로 그린 삽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얼굴은 용처럼 생겼고, 요순과 상 탕왕, 한나라 고조 유방 등(역대 성군들)을 빼닮은 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대가락국(가야국) 임금인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5가야의 임금이 되니….”(<삼국유사> ‘가락국기’)

인용문에서 보듯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기본적으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다뤘다. 나머지 5가야는 ‘이하동문’으로 처리한 인상이 짙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이 ‘가락국기’를 쓰면서 달아놓은 각주를 살펴보자.

“문종의 대강 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김해부사)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기’를 줄여 싣는다.”

무슨 말일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찬하면서 기존 ‘문인’이라는 인물이 쓴 ‘가락국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요약해서’ 실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므로 일연 스님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신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가야의 건국 이야기’를 생략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방울이 발굴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어린이 무덤. 머지않은 곳에 상아덤이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배성혁씨 제공

■가락국신화의 대가야 버전?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가 아닌 대가야의 중심지(고령)에서 현현한 방울그림은 ‘가야 건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배성혁씨의 논문은 한술 더뜬다.

이 ‘대가야 버전’이 두 단계로 발전 전승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857~?)의 <석이정전>을 인용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른 ‘대가야 신화’를 소개한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뇌질청예) 등을 낳았다.”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구지봉(김해)이 <석이정전>에서는 가야산으로 바뀐다. 또 <삼국유사>의 ‘수로왕과 다섯임금’은 <석이정전>에서는 두 형제, 즉 ‘대가야왕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수로왕의 별칭)’으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배성혁씨의 논문은 출토된 방울 그림의 전체적인 컨셉트로 보아 5세기 무렵까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비슷한 건국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시조가 알에서 태어난 건국신화의 내용은 금관가야 뿐 아니라 대가야 등 모든 가야의 공통된 ‘난생설화’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기원후 400년) 이후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가야연맹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대가야가 그 위상을 과시하려고 ‘가락국 신화를 대가야 버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5세기 후엽 제작된 토제방울의 출토의미라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야본성-칼과 현’전에 출품된 방울. ‘보는 이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대가야가 형, 금관가야가 동생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대가야 버전’의 신화는) 고령 대가야(가라국) 중심의 인식에서 새롭게 정리되어 전승됐다”고 보았다. 고령의 대가야는 최고지배자의 칭호를 종래 ‘한기’에서 ‘왕’으로 개칭했다. 중국 양나라 시대(502~557)에 편찬한 <남제서>는 “479년 가라국왕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했다. 남제(479~502)는 이때 가라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내렸다. 가라국이 남제와의 교섭을 통해 대외교역권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상강화에 걸맞은 건국신화는 대가야 중심으로 바뀐다. 즉 대가야왕(뇌질주일·이진아시왕)이 형으로, 금관가야왕(뇌질청예·김수로왕)이 동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또한 새로운 버전의 가야신화는 가야 시조의 성(姓)을 김수로왕의 ‘김’씨가 아니라 ‘뇌질’씨로 바꾼다. 이것은 대가야 시조의 성씨는 ‘뇌질’이며, 대가야가 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되자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성까지 ‘뇌질’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지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토제방울 속에는 작은 구슬에 들어있었다. 배성혁씨는 “방울을 만든 대가야 장인은 방울외형을 금합에 비유하고 그 속에 넣은 작은 구슬은 가락국기의 6개의 알 중 하나로 대가야의 시조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김해 구지봉과 가야산 상아덤

그런 의미에서 배성혁씨의 논문은 5세기 후엽의 토제방울 그림을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토제방울 그림의 첫번째 주제인 ‘거북 머리’ 형상이 김해 구지봉이 아닌 고령 인근의 가야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상아덤’(해발 1220m)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가야신화 무대가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 구지봉)에서 가야산 상아덤(고령)으로 바뀐 것이다.

논문이 주목한 가야 상아덤은 남성 성기처럼 우뚝 솟은 바위로 유명하다. 이 상아덤이 바로 가야산신과 천신이 사랑을 나눠 대가야와 금관가야 형제 창업주를 낳았다는 성소이다. 논문은 토제방울에 등장하는 거북 목 혹은 남성 성기의 형상이 바로 상아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부담스러운 소개지만…

사실 필자는 한 연구자의 논문을 이렇게 길게 소개하는 것이 적이 부담스러웠다. 토제방울의 그림 중 단 한 컷이라도 다른 해석이 나온다면 전체 스토리가 얼크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그림 중 5번째 주제는 배성혁씨의 논문도 언급하지만 가장 이견이 많은 그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맞이하려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저 말과 같은 짐승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요즘 대통령의 언급 한마디에 영남지역은 물론이고 전라도 지역까지도 ‘가야 가야’ 하는 것도 보기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신라나 백제의 유물과 유적이 확실한 것 같은데 ‘가야붐’ 때문에 너도나도 ‘가야!’라고 한다면 그 또한 중대한 역사왜곡이니까….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난 ‘신라붐’과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동북공정 때 불어닥친 ‘고구려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역사고고학에서는 ‘맞다’ ‘틀리다’는 없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이 논문을 소개하는 것은 두가지다. 실토하자면 토제방울 그림 자체가 매우 재미있다는 것도 작용했다. 순전히 기자적인 압장에서…. 이것이 ‘대가야 신화’가 아니고, 어린이 무덤에서 나온 시쳇말로 ‘어린애 장난감’이라도 재미있지 않은가. 직경 5㎝ 될까 말까 한 그 작은 방울에 동화 속 삽화 같은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가지고 놀던 1500년 전 아이를 생각해보라.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고고학이나 역사 분야에서 가장 꼴보기 싫은 이들은 바로 ‘맞다’와 ‘틀리다’를 함부로 재단하는 연구자들이다. 그들이 2000년 전, 1000년 전, 500년 전을 살아보았던가. 다른 이의 연구결과를 ‘틀렸다’ ‘맞다’고 평가를 내리는 어줍지않은 자세는 꼴불견이다. 역사·고고학에서는 ‘맞다’ ‘틀리다’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고고학 연구자들은 그저 옛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정하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깎고 담금질 하는 과정에서 상당수는 사장되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통설이 되고, 정설이 되고, 사실이 되고, 결국 진실로 굳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 논문이 나름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만약 이 논문의 해석이 맞다면 1년전 현현한 토제방울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없는 ‘새로운 가야 신화’의 증거일 수 있다.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이정전>이 소개한 ‘가락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을 입증하는 자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연구자라도 반론이 있다면 논문을 통해 논쟁하기를 바란다.(2)

<참고자료>

배성혁,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의 건국신화’, <가야고분군 Ⅴ-가야고분군 연구총서> 6권,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20

노중국. ‘대가야의 국가발전과정’, <쟁점 대가야사-대가야의 국가발전단계>, 대가야박물관·대동문화재연구원, 2017

 

 

고령 가야 고분의 순장자는 왜 금동관을 썼을까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⑦ 뼈가 말하는 고대사 (상)
고대 순장자는 노예라는 기존 생각
법의학적 연구 결과 쌓이면서 깨져
고령 지산동 순장자 인골 분석하니
뼈에서 육류 즐긴 흔적 나오고
금동관 쓴 채 묻힌 순장자도 있어

  • 수정 2019-02-09 11:56등록 2019-02-09 11:56
가야와 신라 시대에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순장자는 모두 노예일 거라고 추정했으나

 

2002년 가을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쉬는 도중 한신대학교 박물관의 이기성 박사(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발굴조사 중인 현장으로 속히 와 달라는 당부였다. 달려가 보니 조사원 몇몇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조사하는 중에 투명한 비닐로 감싼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고인돌이나 조선시대 무덤에서 인골을 수습한 경험이 몇차례 있기는 하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연구실의 이숭덕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이 교수는 젊은 연구원 한 명과 함께 금방 현장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비닐 속에서 꺼낸 시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교수는 여름철에 자연사한 행려병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시신이 더 나올 것 같다고 말하고 떠났다. 과연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비닐에 싸인 시신이 속속 발견돼 이 교수의 예언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유적이 입지한 그곳은 최근 무연고 상태로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집단 매장지였던 것이다. 그 후에도 발굴 현장에서 유골이 발견되면 이 교수의 도움을 받고는 하였다. 이 지면을 빌려 고고학 연구자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법의학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인골에 남은 전쟁의 흔적

과학수사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법의학자들의 활약은 역사 연구에서도 반복된다. 6·25전쟁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학살당한 분들의 시신을 찾고, 사인과 신원을 밝혀내는 작업은 법의학자와 체질(형질)인류학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들의 연구를 통하여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일부나마 복원되고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의 활약은 선사와 고대, 중세의 유적 발굴 현장에서도 이어진다.

인골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순장자의 신분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육류를 즐긴 순장자도 있으며
일부 순장자는 금동관을 쓴 사람도 있다. 사진은 순장이 행해진 가야 고분의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에서 발견된 기원전 2~1세기의 한나라 무덤. 지역관리인 리창과 그의 부인 신추

 

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馬王堆)란 곳에서는 기원전 2~1세기 무렵 이 지역 고위 관리였던 리창(利倉)과 부인인 신추(辛追), 그들의 아들이 각각 별도의 무덤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신추의 무덤은 깊이가 16m나 될 정도로 깊고, 시신은 여러 겹의 목관과 목곽으로 감쌌으며, 목곽 바깥에 두께 40~50㎝, 총 무게 5t이나 되는 목탄을 다져 넣고 다시 그 바깥에 하얀 점토를 채워서 습기와 해충을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그 결과 부패되지 않고 원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엄청난 양의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한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 놀라운 발견의 압권은 신추의 시신이었다. 그의 시신은 관절이 움직이고 피부에 탄력이 남아 있었으며, 모공과 지문이 확인될 정도로 생생하였다. 또 신추의 위 속에서는 미처 소화되지 않은 참외 씨가 발견됐다. 시신을 감식한 의료진은 그의 나이는 50살 전후, 신장은 158㎝, 평소 동맥경화증으로 고생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생생한 모습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아쉽게도 곧바로 화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와 중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시신은 문헌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환경, 식생활, 병리, 위생 등 여러 측면을 해명해주는 역사 자료란 점에서 고인에 대한 적절한 예의를 갖추면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전쟁의 참상을 증명하는 유골은 근현대는 물론이고 선사시대 이후 전 역사를 거쳐 많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학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유골이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성인이 모두 포함된 유골 수십 구는 이들이 전투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학살당하였음을 증명한다. 조총과 칼, 창에 의해 살해된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절명하였는지는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학교 교수에 의해 생생하게 밝혀졌다.

일본의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규슈 지방의 무덤에서는 머리가 잘리고 몸통만 옹관에 묻힌 경우, 반대로 머리만 묻힌 경우가 확인되는데 이는 적의 수급을 취하는 형태의 전투가 치러졌음을 의미한다. 화살촉이나 돌칼, 동검 등 무기의 끝부분이 몸에 박힌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때에는 곧바로 사망한 경우, 부상이 치료되고 후유증을 앓으면서 몇년을 더 생존한 경우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그려볼 수 있다. 심지어 몸에 박힌 흉기의 나머지 부분을 다른 누군가의 무덤에서 찾아내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다.

아들이 각각 묻힌 이 무덤은 시신 등 부장품이 완벽한 상태로 발굴됐다. 권오영 교수 제공

 

우리의 경우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나오는 돌칼이나 화살촉 중 일부는 부장품이 아니라 흉기일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는 토양의 산성 성분이 강하여 무덤에서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가 드문 편이지만, 부장용으로 넣은 화살촉과는 다른 형태이거나 부러진 화살촉이 몸통 부위에서 발견될 경우 그 화살촉은 부장용이 아니라 사람을 살상하던 흉기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지배 엘리트의 무덤에 많은 무기를 부장하는 풍습도 당시 사회가 전쟁으로 인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군사지도자를 숭배하는 분위기였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금속기, 쌀농사, 방어취락이 통째로 전해지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전쟁도 함께 전해졌다고 판단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모두 작은 지역 단위의 경쟁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집단 간, 개인 간의 우열의 차이는 심해졌고 고대국가 형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살해당한 인골은 그 여정을 증명해주고 있다.

나주 복암리 옹관이 남매 근친혼 증거?

고대 사회사 연구에서도 인골은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돌이나 나무로 두개골을 압박하여 변형을 꾀하는 편두의 습속은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김해 예안리고분군의 인골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고구려 개마총 고분벽화의 주인공, 신라 금령총 출토 흙인형도 모두 편두로 추정되므로 편두는 기괴한 풍습이 아니라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 의외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사천 늑도와 김해 예안리의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에서는 일부러 생니를 뽑은 발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발치는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며 그 과정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고전소설 <배비장전>은 기생 애랑이 비장 벼슬하는 배씨 남정네를 농락하고, 그 애랑의 사랑을 얻기 위해 생니를 뽑아 주는 배비장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고대인들이 왜 발치를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생의 중요한 시점, 예컨대 성인식을 치르면서 실시하였거나, 혹은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풍습(‘할체’(割体)라고 부름)의 한 종류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에서 발굴된 신추의 생전 모습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다. 복원 모형 왼쪽은 발굴 당시의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창녕에선 순장 소녀가 금동귀걸이
노예 가설만으론 충분한 설명 안돼
고대의 사회상 제대로 그리려면
체질인류학·법의학 등과 결합해야

하나의 무덤에서 여러 구의 유골이 출토되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는 가족묘라고 판단할 것이고, 남녀가 함께 매장되었으면 부부 관계라고 단정할 것이다. 그러나 인골에서 추출한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친족관계를 추적한 요즘 연구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막연한 추측이 그릇되었음을 밝혀냈다. 나주 복암리 1호분의 한 돌방에서는 대형 옹관 4개가 발견되었고, 그중 3호 옹관에서 2인의 인골이 합장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모계로 연결됨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관계는 외할머니와 손자, 어머니와 아들, 남매, 이모와 남자 조카, 외삼촌과 여자 조카 등으로 좁혀진다. 분석이 실시된 1999년도에는 남매의 근친혼을 추정하는 견해가 강하였으나, 합장된 남녀가 반드시 부부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복암리 근처의 영동리에서도 여러 개의 돌방과 돌덧널로 구성된 무덤에서 다수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의 분석 결과, 하나의 매장시설 안에서 발견된 인골들의 관계는 매우 다양해서 형제가 함께 묻힌 경우, 남매가 함께 묻힌 경우, 자매가 함께 묻힌 경우, 부부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 혈연적으로 무관한 여성들이 함께 묻힌 경우 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고대 사회의 혼인과 가족구성, 매장 단위 등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재고해야 함을 말해준다.

인골을 통한 고대 사회사 연구의 대표 격은 단연 순장이다. 6세기 창녕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인 송현동 15호분에서 순장된 인골 1구를 분석한 결과 성장판이 채 닫히지 않은 신장 153㎝ 정도, 16살 전후의 소녀로 규명되었다. 두개골을 컴퓨터 단층 촬영하고 여기에 16살 된 현대 한국인 여성 40명 얼굴 살의 평균 두께를 참조하여 살을 붙여 복원해보니 현대인보다 약간 짧은 턱뼈, 펑퍼짐한 얼굴의 소녀가 나타났다. 송현동이란 지명을 따서 송현이라고 불리게 된 이 소녀는 살아생전 모시던 주인의 죽음에 즈음하여 강제로 죽임을 당하였다. 송현이를 순장한 이유는 그의 주인이 저승세계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송현이의 경골(정강이뼈)과 비골(종아리뼈)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생활하였던 가엾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신의 피부가 여전히 탄력적일 정도로 보존이 완벽했던 신추의 무덤 모형. 16m 깊이에 여러 겹의 목관과 목곽을 둘렀으며

 

40명 순장된 고령 지산동 44호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회에서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 5세기 무렵의 왕릉인 황남대총에서는 순장당한 소녀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가야의 경우는 순장에 대한 기사가 없으나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고령 지산동 등 당시의 왕릉급 고분에서 많은 사람을 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표적 순장묘인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총 40명 정도의 사람이 순장당하였는데 그들의 직책은 창고지기, 마부, 호위무사, 첩, 시녀 등으로 추정된다.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며 부부, 부녀, 형제, 자매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순장당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고, 순장의 실시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라는 견해가 한때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순장당한 사람들에 대한 고인골 연구가 진행되면서 차츰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순장당한 송현이는 금동제 귀걸이를, 고령 지산동의 한 순장자는 금동관을 쓰고 있었다. 인골에 대한 골화학적 분석 결과 순장당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육류와 곡류를 골고루 섭취하였고, 심지어 육류 섭취가 더 많았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순장당한 사람들이 모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강제 노역에 종사하던 노예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역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그중 일부는 왕족이나 귀족의 먼 친척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 매우 중요한 순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문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고인골에 대한 법의학적, 체질인류학적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학자가 체질인류학과 법의학을 겸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인접한 학문 분야의 연구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안개로 덮인 고대 사회의 면모가 서서히 밝혀진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역사학이 인문학의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시대는 지났다. 고대사 연구 역시 예외가 아니다.(3)

 

 

[취재파일] 고분 1만기, 대가야의 타임캡슐 열리나?

김명진 기자 작성 2018.01.20 08:49 수정 2018.01.20 10:07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581887&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산을 허물어 수십 개의 고분을 파헤쳐 놓은 듯한 광경, 고령 지산동 44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입니다. 단 한 개의 고분이 이 정도로 컸습니다. 봉분 지름이 27m, 높이는 6m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입니다.

 

지산동 44호분 발굴 장면

 

무덤 주인이 잠들어 있던 돌방, 그 옆엔 부장품만 따로 모아둔 돌방이 두 개가 더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대가야 고유의 토기와 갑옷, 투구 등 무기, 말갖춤, 장신구,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등이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발굴 참가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생생한 순장 현장이었습니다. 무덤 주인이 매장된 돌방을 호위하듯 자그마한 돌덧널 32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각각 1~2명의 뼈가 나온 것입니다.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부장품을 넣는 딸린돌방 두 개에서도 순장자가 발견됐습니다. 사후에도 무덤 주인을 모시기 위한 시종과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인 셈입니다. 이렇게 한 무덤에서 나온 순장자가 40명에 이르렀습니다. 
https://youtu.be/or5No6VV-eM

 

인골을 분석해보니 부녀로 보이는 30대 초반 남성과 8살 소녀가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고, 30대 남녀가 함께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순장자 옆에는 말갖춤 유물, 무기류, 장신구, 농기구가 발견됐습니다. 무덤 주인을 모실 마부, 호위 무사, 농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1년이 흘렀습니다. 이번주 초 경북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지산동 일대 고분 74기를 추가로 발굴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부장품 중에는 A구역 2호분에서 나온 금동제 관모와 환두대도의 손잡이가 특히 주목을 끌었습니다. 금동제 관모는 주로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잎사귀 모양의 환두대도 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유물입니다. 무덤 양식도 시신을 무덤 옆면을 통해 매장하는 신라식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하나의 무덤 안에 가야와 신라, 백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죠.

 

 A구역 제2호묘 출토 금동제 관모

 A구역 제2호묘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A구역 제19호묘 출토 말등 기꽂이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왼쪽) B구역 제3호묘, (오른쪽)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B구역 제3호묘 전경

 

B구역 제3호묘 유물 출토상태(마구류)

 

귀하지 않은 유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앞서 본 44호분에 비해 너무 빈약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모두 소형분들입니다. 봉분이 아예 없어서 발굴 전까지는 관람객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던 이동로였습니다. 이 길을 CCTV와 조명용 케이블을 매설하기에 앞서 발굴해봤더니 나온 유물들인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분이 감춰져 있길래 이렇게 간단히(?) 74기나 나왔을까요?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사는 "지산동에서 육안으로 봉분이 확인돼 고유번호가 매겨진 고분은 현재 704기"라며 "봉분이 없거나 서로 겹쳐진 고분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기, 많으면 2만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분 수만 놓고 보면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입니다. 가야는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부족국가 연맹에 머물렀다고 배워온 우리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야 국가들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은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었습니다. 신라의 구조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이 5만명의 병사를 낙동강 하구까지 내려 보내 가야와 왜군을 토벌한 사건이었습니다. 고구려 군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아라가야의 함안까지 추격해 들어왔고, 이후 신라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했고, 그 대체 세력으로 내륙에 있던 고령의 대가야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대가야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 협조해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대가야 특유의 토기들이 합천, 함양은 물론 멀리 백두대간 넘어 남원, 진안, 장수 등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도 발굴되고 있어서 대가야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가야가 고대 왕국으로 성장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왕' 칭호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도굴 유물이어서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대가야에서 만든 금관 2개와 '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령 향교 자리에서 대가야 당시 궁성 터와 주위를 둘러싼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앞을 둘러 인공적으로 판 연못)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vhhVMjYDjPU

 

 

다시 지산동 현장으로 가봅니다. 고령군 읍내를 굽어보며 남북으로 흐르는 해발 310m 주산 능선을 따라 수많은 고분들이 봉긋봉긋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20m 이상 고분은 11기에 불과합니다. 이보다 큰 왕릉급 5기는 일제에 의해 마구 파헤쳐졌습니다. 파헤쳐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겠다며 변변한 발굴보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마구 부장품을 뒤져갔기 때문입니다. 발굴이라기 보단 약탈에 가까웠습니다. 고령군의 한 관계자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기 직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트럭 3대분의 엄청난 유물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산동 고분 가운데 상당수는 도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20m가 넘는 대형 고분 10여 기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그보다 작은 1만기가 넘는 고분은 고대 가야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땅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가야의 타임캡슐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야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밝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대가야는 서기 42년 건국돼 562년 신라 진흥왕때 이사부 장군에 의해 멸망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장장 520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한 국가지만 문헌 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래도 각자 역사서를 남겼고, 그 기록의 일부가 삼국사기 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가야는 역사서 자체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덤마다 출토되는 그 많은 덩이쇠가 어디서 생산돼 어떻게 유통됐을까? 수없이 쏟아지는 철제 갑옷과 투구, 가야 국가별로 특색을 보이는 각종 토기들은 또 어디서 누가 제작했을까? 가야금과 우륵으로 대표되는 가야의 예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아직 우리는 뚜렷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가야사의 비밀을 밝히는 작업은 198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상태입니다.(4)

 

 

1,500년 만에 모습 드러낸 '대가야 궁성'

정인효2024. 6. 18. 14:17
대가야 궁성지 1-1구역 정밀발굴조사
대가야 궁성 실체인 방어시설 발견
고령군이 발굴한 대가야 궁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방어시설.고령군 제공

고령군이 대가야 궁성지 발굴과 정비사업 일환으로 추진 중인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에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궁성의 북벽부 토성벽 일부와 해자 등 궁성의 존재와 범위를 알려주는 방어(放語) 관련 시설이 발견돼 오는 21일 현장공개 설명회를 개최한다.

고령군은 2017년 대가야읍 연조리 594-4번지에서 토성과 해자로 추정되는 시설을 발굴한 이후, 2019년 '대가야 궁성지 발굴 ․ 정비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발굴조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그러나 아싑게도 통일신라시대 토축시설만 확인돼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고령군은 지난 3월부터 대가야읍 연조리 555-1번지 일원에 대한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에 나서 통일신라시대 토축시설 아래에 대가야시대 토성벽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다짐성토층이 일부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대가야시대 해자도 함께 발견돼 대가야궁성의 존재와 범위를 밝혀줄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됐다.

이번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대가야 토성벽의 흔적과 해자는 그동안 논란이 돼 왔던 대가야 궁성의 위치와 범위 등의 궁금증을 일부나마 풀어줄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령군 관계자는 "지산동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에 이어 5~6세기 대가야 도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궁성의 윤곽과 실체를 발굴함에 따라 그동안 미진했던 대가야사 복원에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5)

정인효 기자 antiwhom@hankookilbo.com

 

 

 

<주>

 

 

 

(1)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한 무덤에 30여 명 최다(最多) 순장…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동아일보 (donga.com)

 

 

(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2250600001

 

 

(3) 고령 가야 고분의 순장자는 왜 금동관을 썼을까 (hani.co.kr)

 

 

(4) [취재파일] 고분 1만기, 대가야의 타임캡슐 열리나? (sbs.co.kr)2018.01.20 

 

 

(5) 1,500년 만에 모습 드러낸 '대가야 궁성' (daum.net)정인효2024. 6. 18.

 

 

(6)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122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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