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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가야(가라)고고학 (2) 고령 지산동고분군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3. 가야(가라)고고학 (2) 고령 지산동고분군

대야발 2024. 5. 2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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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고령 지산동 고분군 -   44호분, 45호분 발굴

 

 

 

1977년 11월 고령 지산동 고분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을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주보돈 조교(현 경북대 교수)와 김세기 등이 현장조사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가장 눈길을 끈 발굴 성과는 단연 순장자의 묘실인 ‘순장(殉葬) 석곽’의 존재였다. 

 

 

이것은 대가야 고유의 묘제로 44호분에서만 무려 32기의 순장 석곽이 발견됐다. 44호분의 주인과 함께 최소 32명이 한꺼번에 순장된 셈이다. 김세기는 “주인공이 묻힌 석실 등에도 4명이 추가로 묻힌 45호분의 사례를 감안하면 총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일 무덤에 30여 명이 순장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중국에서는 최대 200여 명이 묻힌 순장묘가 발견됐으며 일본은 순장풍습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해지지만 아직 순장묘가 발굴되진 않았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을 허물어 수십 개의 고분을 파헤쳐 놓은 듯한 광경, 고령 지산동 44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입니다. 단 한 개의 고분이 이 정도로 컸습니다. 봉분 지름이 27m, 높이는 6m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입니다.

 

 

 

 

지산동 44호분 발굴 장면

 

 

 

 

무덤 주인이 잠들어 있던 돌방, 그 옆엔 부장품만 따로 모아둔 돌방이 두 개가 더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대가야 고유의 토기와 갑옷, 투구 등 무기, 말갖춤, 장신구,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등이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발굴 참가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생생한 순장 현장이었습니다.

 

 

 

무덤 주인이 매장된 돌방을 호위하듯 자그마한 돌덧널 32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각각 1~2명의 뼈가 나온 것입니다.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부장품을 넣는 딸린돌방 두 개에서도 순장자가 발견됐습니다. 사후에도 무덤 주인을 모시기 위한 시종과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인 셈입니다. 이렇게 한 무덤에서 나온 순장자가 40명에 이르렀습니다. 

 

 

 


https://youtu.be/or5No6VV-eM

 

 

 

 

 

인골을 분석해보니 부녀로 보이는 30대 초반 남성과 8살 소녀가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고, 30대 남녀가 함께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순장자 옆에는 말갖춤 유물, 무기류, 장신구, 농기구가 발견됐습니다. 무덤 주인을 모실 마부, 호위 무사, 농민이었습니다.

 

 


 

 

대표적 순장묘인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총 40명 정도의 사람이 순장당하였는데 그들의 직책은 창고지기, 마부, 호위무사, 첩, 시녀 등으로 추정된다.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며 부부, 부녀, 형제, 자매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순장당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고, 순장의 실시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라는 견해가 한때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순장당한 사람들에 대한 고인골 연구가 진행되면서 차츰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순장당한 송현이는 금동제 귀걸이를, 고령 지산동의 한 순장자는 금동관을 쓰고 있었다. 인골에 대한 골화학적 분석 결과 순장당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육류와 곡류를 골고루 섭취하였고, 심지어 육류 섭취가 더 많았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순장당한 사람들이 모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강제 노역에 종사하던 노예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역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그중 일부는 왕족이나 귀족의 먼 친척이었을 것이다.

 

 

 


 

 

 

■ 2018년 지산동 일대 고분 74기 추가 발굴 결과 발표

 

 

 

 

그로부터 41년이 흘렀습니다. 이번주 초 경북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지산동 일대 고분 74기를 추가로 발굴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부장품 중에는 A구역 2호분에서 나온 금동제 관모와 환두대도의 손잡이가 특히 주목을 끌었습니다.

 

 

금동제 관모는 주로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잎사귀 모양의 환두대도 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유물입니다. 무덤 양식도 시신을 무덤 옆면을 통해 매장하는 신라식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하나의 무덤 안에 가야와 신라, 백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죠.

 

 

 

 A구역 제2호묘 출토 금동제 관모

 

 

 

 A구역 제2호묘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A구역 제19호묘 출토 말등 기꽂이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왼쪽) B구역 제3호묘, (오른쪽)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B구역 제3호묘 전경

 

 

 

 

B구역 제3호묘 유물 출토상태(마구류)

 

 

 

 

귀하지 않은 유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앞서 본 44호분에 비해 너무 빈약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모두 소형분들입니다. 봉분이 아예 없어서 발굴 전까지는 관람객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던 이동로였습니다. 이 길을 CCTV와 조명용 케이블을 매설하기에 앞서 발굴해봤더니 나온 유물들인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분이 감춰져 있길래 이렇게 간단히(?) 74기나 나왔을까요?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사는 "지산동에서 육안으로 봉분이 확인돼 고유번호가 매겨진 고분은 현재 704기"라며 "봉분이 없거나 서로 겹쳐진 고분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기, 많으면 2만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분 수만 놓고 보면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입니다. 가야는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부족국가 연맹에 머물렀다고 배워온 우리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https://youtu.be/vhhVMjYDjPU

 

 

 

 

 

 

 

■ 2019년 고령 지산동고분군 탐방로 조성을 위한 사전발굴조사에서 어린이무덤 발굴

 

 

2019년 3월 어느 날 고령 지산동 고분(사적 제79호)의 탐방로 조성을 위한 사전발굴조사에서 어린이 무덤이 확인됐다. 길이 1.65m, 너비 0.45m 정도의 작은 무덤에서 4~5살 어린아이의 치아 및 두개골 편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에 눈에 띈 것은 흙으로 구워 단단해진 방울이었다. 직경 5㎝ 정도되는 아주 작은 방울이었다. 5세기 후반 유물로 판단됐다. 발굴단은 무덤 주인공인 어린이가 생전에 갖고 놀던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방울을 세척하자 재미있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처음 보인 것이 거북이 그림이었다. 심상치않은 그림이라 여긴 발굴단은 현미경을 들이댔다. 그랬더니 방울 표면에서 6개의 그림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었다.

 

 

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거북, 관을 쓴 남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급합 등으로 추정되는 그림이새겨져 있다.

 

 

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심상치않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가야국 신화를 6컷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방울그림의 첫번째 주제. <삼국유사> 가락국 신화의 무대인 구지봉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가야 버전으로 해석될 경우 대가야 정견모주 설화의 무대로 전해지는 가야산 상아덤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다.|배성혁씨 제공

 

 

 

그림에 등장하는 ‘관을 쓴 남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성혁씨는 ‘남자의 머리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이것은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배성혁씨 제공

 

 

 

 

 

 

방울에 새겨진 춤추는 사람.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형상을 그렸다는 것이다.|배성혁씨 제공

 

 

 

■<삼국유사> ‘가락국신화’

발굴 1년이 지난 지금 배성혁 실장의 정리된 논문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배실장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그림 내용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 건국신화’를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는 “기원후 43년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지역을 다스리던 지도자 9명(9간·九干)이 200~300명을 이끌고 갔더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말소리만 들렸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왔으니, 너희는…’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하면서 춤을 추어라.”

 

 

 

무엇에 홀린 듯 9간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며 춤춘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그곳에 가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가락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릇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빛났다.…알 6개가 모두 남자로 변했다…그 중 용처럼 생긴 이는 수로라 했는데 가야국을 세웠고, 나머지 5명도 5가야의 임금이 됐다.”

 

 

 

 

 

춤추는 인물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게 배성혁씨의 주장이다. 그림 한가운데 선시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배성혁씨 제공

 

 

 

■방울 그림의 해석

논문은 이 신화를 염두에 두고 방울그림을 해석했다.

 

 

먼저 ‘거북 머리’ 형상(제1주제)은 어떨까. 가락국 신화의 성소인 구지봉이 연상된다는 것이다. 봉우리 모양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어서 구지봉이라 하지 않던가. 전문가 중에는 거북을 신과 인간의 매개동물로 보고, 거북의 ‘머리’를 수로(首露), 혹은 우두머리, 혹은 남근(男根) 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방울의 고리부분을 머리로 삼고 표면에 둥글게 외곽선을 그은 뒤 내부에 2열의 등껍질을 새겨넣은 형상(제2주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북 그림은 ‘가락국기’의 ‘구지가(龜旨歌)’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림의 제3주제인 ‘관을 쓴 남자’는 어떻게 설명되나.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한 것으로 평가했다. 논문은 머리 부분의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즉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히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자루를 엎드려 맞이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그림. 이 그림은 말과 같은 짐승으로도 볼 수 있어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배성혁씨 제공

 

 

 

 

4번째 그림은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인’이라 평가한다. 왜 여인일까. 그림 한가운데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오른손은 긴 소매가 앞으로 꺾어지며 휘날리고, 왼손은 뒤로 돌아가는 모양으로 짧게 표현했다.

 

 

5번째 그림은 어떻게 해석될까. 논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보자기’를 엎드려서 우러러 맞이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보자기를 형상화한 모습. 배성혁씨는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고 해석했다.|배성혁씨 제공

 

 

 

 

논문은 마지막인 6번째 그림의 주제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로 판단한다. 두번째 그림의 거북 그림에서 보듯 방울의 고리 부분은 하늘(天)과 신(神)을 상징하는 거북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6번째 그림을 보면 역시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이 ‘가락국 신화’의 하이라이트와 부합된다고 보았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자루)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는 대목이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4~5살 어린이 무덤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 |배성혁씨 제공

 

 

 

■일연스님은 왜?

한마디로 ‘대가야의 중심지’인 경북 고령의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 그림은 ‘가락국 신화’를 6컷으로 그린 삽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얼굴은 용처럼 생겼고, 요순과 상 탕왕, 한나라 고조 유방 등(역대 성군들)을 빼닮은 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대가락국(가야국) 임금인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5가야의 임금이 되니….”(<삼국유사> ‘가락국기’)

 

 

인용문에서 보듯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기본적으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다뤘다. 나머지 5가야는 ‘이하동문’으로 처리한 인상이 짙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이 ‘가락국기’를 쓰면서 달아놓은 각주를 살펴보자.

 

 

“문종의 대강 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김해부사)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기’를 줄여 싣는다.”

무슨 말일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찬하면서 기존 ‘문인’이라는 인물이 쓴 ‘가락국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요약해서’ 실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므로 일연 스님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신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가야의 건국 이야기’를 생략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방울이 발굴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어린이 무덤. 머지않은 곳에 상아덤이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배성혁씨 제공

 

 

 

■가락국신화의 대가야 버전?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가 아닌 대가야의 중심지(고령)에서 현현한 방울그림은 ‘가야 건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배성혁씨의 논문은 한술 더뜬다.

 

 

이 ‘대가야 버전’이 두 단계로 발전 전승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857~?)의 <석이정전>을 인용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른 ‘대가야 신화’를 소개한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뇌질청예) 등을 낳았다.”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구지봉(김해)이 <석이정전>에서는 가야산으로 바뀐다.

 

 

또 <삼국유사>의 ‘수로왕과 다섯임금’은 <석이정전>에서는 두 형제, 즉 ‘대가야왕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수로왕의 별칭)’으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배성혁씨의 논문은 출토된 방울 그림의 전체적인 컨셉트로 보아 5세기 무렵까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비슷한 건국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시조가 알에서 태어난 건국신화의 내용은 금관가야 뿐 아니라 대가야 등 모든 가야의 공통된 ‘난생설화’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기원후 400년) 이후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가야연맹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대가야가 그 위상을 과시하려고 ‘가락국 신화를 대가야 버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5세기 후엽 제작된 토제방울의 출토의미라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야본성-칼과 현’전에 출품된 방울. ‘보는 이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대가야가 형, 금관가야가 동생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대가야 버전’의 신화는) 고령 대가야(가라국) 중심의 인식에서 새롭게 정리되어 전승됐다”고 보았다. 고령의 대가야는 최고지배자의 칭호를 종래 ‘한기’에서 ‘왕’으로 개칭했다.

 

 

중국 양나라 시대(502~557)에 편찬한 <남제서>는 “479년 가라국왕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했다. 남제(479~502)는 이때 가라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내렸다. 가라국이 남제와의 교섭을 통해 대외교역권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상강화에 걸맞은 건국신화는 대가야 중심으로 바뀐다. 즉 대가야왕(뇌질주일·이진아시왕)이 형으로, 금관가야왕(뇌질청예·김수로왕)이 동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또한 새로운 버전의 가야신화는 가야 시조의 성(姓)을 김수로왕의 ‘김’씨가 아니라 ‘뇌질’씨로 바꾼다. 이것은 대가야 시조의 성씨는 ‘뇌질’이며, 대가야가 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되자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성까지 ‘뇌질’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지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토제방울 속에는 작은 구슬에 들어있었다. 배성혁씨는 “방울을 만든 대가야 장인은 방울외형을 금합에 비유하고 그 속에 넣은 작은 구슬은 가락국기의 6개의 알 중 하나로 대가야의 시조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김해 구지봉과 가야산 상아덤

그런 의미에서 배성혁씨의 논문은 5세기 후엽의 토제방울 그림을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토제방울 그림의 첫번째 주제인 ‘거북 머리’ 형상이 김해 구지봉이 아닌 고령 인근의 가야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상아덤’(해발 1220m)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가야신화 무대가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 구지봉)에서 가야산 상아덤(고령)으로 바뀐 것이다.

 

 

논문이 주목한 가야 상아덤은 남성 성기처럼 우뚝 솟은 바위로 유명하다. 이 상아덤이 바로 가야산신과 천신이 사랑을 나눠 대가야와 금관가야 형제 창업주를 낳았다는 성소이다. 논문은 토제방울에 등장하는 거북 목 혹은 남성 성기의 형상이 바로 상아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자료 출처>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한 무덤에 30여 명 최다(最多) 순장…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동아일보 (donga.com)

 

 

 

[취재파일] 고분 1만기, 대가야의 타임캡슐 열리나? (sbs.co.kr)2018.01.20 

 

 

 

고령 가야 고분의 순장자는 왜 금동관을 썼을까 (hani.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 경향신문 (khan.co.kr)

 

 

 

 

뛰어난 조형미 갖춘 갑옷, ‘철의 왕국’ 증명 < 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 김해뉴스 (gimhaenews.co.kr)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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