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심상치않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가야국 신화를 6컷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방울그림의 첫번째 주제. <삼국유사> 가락국 신화의 무대인 구지봉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가야 버전으로 해석될 경우 대가야 정견모주 설화의 무대로 전해지는 가야산 상아덤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다.|배성혁씨 제공
그림에 등장하는 ‘관을 쓴 남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성혁씨는 ‘남자의 머리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이것은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배성혁씨 제공
방울에 새겨진 춤추는 사람.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형상을 그렸다는 것이다.|배성혁씨 제공
■<삼국유사> ‘가락국신화’
발굴 1년이 지난 지금 배성혁 실장의 정리된 논문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배실장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그림 내용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 건국신화’를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는 “기원후 43년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지역을 다스리던 지도자 9명(9간·九干)이 200~300명을 이끌고 갔더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말소리만 들렸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왔으니, 너희는…’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하면서 춤을 추어라.”
무엇에 홀린 듯 9간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며 춤춘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그곳에 가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가락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릇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빛났다.…알 6개가 모두 남자로 변했다…그 중 용처럼 생긴 이는 수로라 했는데 가야국을 세웠고, 나머지 5명도 5가야의 임금이 됐다.”
춤추는 인물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게 배성혁씨의 주장이다. 그림 한가운데 선시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배성혁씨 제공
■방울 그림의 해석
논문은 이 신화를 염두에 두고 방울그림을 해석했다.
먼저 ‘거북 머리’ 형상(제1주제)은 어떨까. 가락국 신화의 성소인 구지봉이 연상된다는 것이다. 봉우리 모양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어서 구지봉이라 하지 않던가. 전문가 중에는 거북을 신과 인간의 매개동물로 보고, 거북의 ‘머리’를 수로(首露), 혹은 우두머리, 혹은 남근(男根) 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방울의 고리부분을 머리로 삼고 표면에 둥글게 외곽선을 그은 뒤 내부에 2열의 등껍질을 새겨넣은 형상(제2주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북 그림은 ‘가락국기’의 ‘구지가(龜旨歌)’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림의 제3주제인 ‘관을 쓴 남자’는 어떻게 설명되나.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한 것으로 평가했다. 논문은 머리 부분의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즉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히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자루를 엎드려 맞이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그림. 이 그림은 말과 같은 짐승으로도 볼 수 있어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배성혁씨 제공
4번째 그림은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인’이라 평가한다. 왜 여인일까. 그림 한가운데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오른손은 긴 소매가 앞으로 꺾어지며 휘날리고, 왼손은 뒤로 돌아가는 모양으로 짧게 표현했다.
5번째 그림은 어떻게 해석될까. 논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보자기’를 엎드려서 우러러 맞이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보자기를 형상화한 모습. 배성혁씨는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고 해석했다.|배성혁씨 제공
논문은 마지막인 6번째 그림의 주제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로 판단한다. 두번째 그림의 거북 그림에서 보듯 방울의 고리 부분은 하늘(天)과 신(神)을 상징하는 거북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6번째 그림을 보면 역시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이 ‘가락국 신화’의 하이라이트와 부합된다고 보았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자루)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는 대목이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4~5살 어린이 무덤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 |배성혁씨 제공
■일연스님은 왜?
한마디로 ‘대가야의 중심지’인 경북 고령의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 그림은 ‘가락국 신화’를 6컷으로 그린 삽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얼굴은 용처럼 생겼고, 요순과 상 탕왕, 한나라 고조 유방 등(역대 성군들)을 빼닮은 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대가락국(가야국) 임금인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5가야의 임금이 되니….”(<삼국유사> ‘가락국기’)
인용문에서 보듯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기본적으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다뤘다. 나머지 5가야는 ‘이하동문’으로 처리한 인상이 짙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이 ‘가락국기’를 쓰면서 달아놓은 각주를 살펴보자.
“문종의 대강 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김해부사)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기’를 줄여 싣는다.”
무슨 말일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찬하면서 기존 ‘문인’이라는 인물이 쓴 ‘가락국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요약해서’ 실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므로 일연 스님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신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가야의 건국 이야기’를 생략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방울이 발굴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어린이 무덤. 머지않은 곳에 상아덤이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배성혁씨 제공
■가락국신화의 대가야 버전?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가 아닌 대가야의 중심지(고령)에서 현현한 방울그림은 ‘가야 건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배성혁씨의 논문은 한술 더뜬다.
이 ‘대가야 버전’이 두 단계로 발전 전승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857~?)의 <석이정전>을 인용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른 ‘대가야 신화’를 소개한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뇌질청예) 등을 낳았다.”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구지봉(김해)이 <석이정전>에서는 가야산으로 바뀐다.
또 <삼국유사>의 ‘수로왕과 다섯임금’은 <석이정전>에서는 두 형제, 즉 ‘대가야왕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수로왕의 별칭)’으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배성혁씨의 논문은 출토된 방울 그림의 전체적인 컨셉트로 보아 5세기 무렵까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비슷한 건국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시조가 알에서 태어난 건국신화의 내용은 금관가야 뿐 아니라 대가야 등 모든 가야의 공통된 ‘난생설화’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기원후 400년) 이후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가야연맹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대가야가 그 위상을 과시하려고 ‘가락국 신화를 대가야 버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5세기 후엽 제작된 토제방울의 출토의미라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야본성-칼과 현’전에 출품된 방울. ‘보는 이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대가야가 형, 금관가야가 동생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대가야 버전’의 신화는) 고령 대가야(가라국) 중심의 인식에서 새롭게 정리되어 전승됐다”고 보았다. 고령의 대가야는 최고지배자의 칭호를 종래 ‘한기’에서 ‘왕’으로 개칭했다.
중국 양나라 시대(502~557)에 편찬한 <남제서>는 “479년 가라국왕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했다. 남제(479~502)는 이때 가라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내렸다. 가라국이 남제와의 교섭을 통해 대외교역권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상강화에 걸맞은 건국신화는 대가야 중심으로 바뀐다. 즉 대가야왕(뇌질주일·이진아시왕)이 형으로, 금관가야왕(뇌질청예·김수로왕)이 동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또한 새로운 버전의 가야신화는 가야 시조의 성(姓)을 김수로왕의 ‘김’씨가 아니라 ‘뇌질’씨로 바꾼다. 이것은 대가야 시조의 성씨는 ‘뇌질’이며, 대가야가 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되자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성까지 ‘뇌질’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지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토제방울 속에는 작은 구슬에 들어있었다. 배성혁씨는 “방울을 만든 대가야 장인은 방울외형을 금합에 비유하고 그 속에 넣은 작은 구슬은 가락국기의 6개의 알 중 하나로 대가야의 시조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김해 구지봉과 가야산 상아덤
그런 의미에서 배성혁씨의 논문은 5세기 후엽의 토제방울 그림을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토제방울 그림의 첫번째 주제인 ‘거북 머리’ 형상이 김해 구지봉이 아닌 고령 인근의 가야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상아덤’(해발 1220m)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가야신화 무대가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 구지봉)에서 가야산 상아덤(고령)으로 바뀐 것이다.
논문이 주목한 가야 상아덤은 남성 성기처럼 우뚝 솟은 바위로 유명하다. 이 상아덤이 바로 가야산신과 천신이 사랑을 나눠 대가야와 금관가야 형제 창업주를 낳았다는 성소이다. 논문은 토제방울에 등장하는 거북 목 혹은 남성 성기의 형상이 바로 상아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