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조선상고사

근구수왕 즉위 이후의 해외경략

근구수왕은 서기 375년에 즉위하여 10년간 재위했다. 그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겨우 한 차례 평양을 침공했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전진(前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런 이야기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없지만, 《양서》 및 《송서》에서 “백제가 요서군·진평군을 빼앗았다”라고 하고, 《자치통감》에서 “부여는 처음에는 녹산()에 거점을 두었지만, 백제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옮겨가 연나라에 가까워졌다”라고 한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근구수는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사와 국정의 대권을 처리했다. 그는 침입한 고구려를 격퇴한 뒤 반격에 나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병합했다. 이후 해군을 확충하여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을 침입했다. 그는 모용씨를 쳐서 요서 지방과 북경을 빼앗고 요서·진평 2군을 설치했다. 또 녹산 즉 지금의 하얼빈까지 들어가서 부여 수도를 점령했다. 이 때문에 북부여는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게 됐다.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에서 전진왕 부견이 강성해지자, 근구수는 지금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전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또 남쪽으로는 지금의 강소·절강 등을 보유한 진(晋)나라를 쳐서 어느 정도의 지역을 빼앗았다. 그래서 여러 역사서에 그의 중국 진출에 관한 사실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진서》·《위서》·《남제서》에서 이런 사실을 빠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사관들은 국치를 숨기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다. 중국에 들어간 모용씨의 연나라나 부씨의 전진이나 탁발씨의 위나라나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같은 경우는, 중국인 자신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지만 그 외의 경우는 거의 다 삭제했다.

당태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할 때 장병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중국이 두 나라의 침입을 받은 사실을 없애고 중국에 있었던 두 나라 영토의 절반이 본래 중국 것이었던 것처럼 조작했다. 《진서》는 당태종이 직접 저작에 개입한 책이므로, 백제 근구수왕이 중국에 대해 거둔 전공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위서》나 《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서적이므로 이 역시 근구수왕의 서방 정복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것이다. 다만 《양서》나 《송서》에 나오는 ‘백제가 요서를 빼앗았다’는 문장은 기록 자체가 너무 간단하고 사실 관계도 매우 소략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이런 기록에 주목하지 못해 후세에 그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럼, 〈백제 본기〉에서는 어떤 이유로 이런 사실을 빠뜨렸을까? 이는 신라가 백제를 증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사실을 뺐을 것이다. 일부러 뺀 게 아니라면,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한 탓에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범위에서만 조선의 중국 침략 사실을 인정하다 보니 그 외의 것들은 삭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삭제된 게 아니라, 문화 방면에 관한 그의 업적도 많이 삭제됐다. 근구수왕은 10여 년간은 태자로, 10년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백제 본기〉에 적힌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은 박사 고흥을 기용해서 백제 역사서인 《백제서기》를 지은 것 한 가지뿐이다.

나는 일본 역사에 나오는 성덕태자(쇼토쿠 태자_옮긴이)의 업적은 거의 다 근구수왕의 것을 훔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의 근()은 ‘건’으로 발음됐다. 또 백제 때는 성()이 ‘건’으로 발음됐다. 따라서 근초고·근구수·근개루의 ‘근’은 다 성()을 뜻한다. 근구수의 구수()는 ‘구수’로 발음된다. 구수는 마구(, 마구간_옮긴이)를 가리킨다. 일본 성덕태자의 ‘성덕’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에서 딴 것이다. 성덕태자가 마구간 옆에서 탄생했기에 구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으니, 이는 근구수의 구수를 본뜬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성덕태자가 헌법 17개 조를 제정했다고 한 것과 불법()을 수입했다고 한 것은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한 일본인들이 그의 공적을 본떠 성덕태자 전기에 넣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침류왕 원년 9월1)에 서역 승려인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백제가 불교를 수입한 시점을 침류왕 원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전 임금의 말년을 새로운 임금의 원년으로 삼곤 했다. 그래서 이전 임금 말년에 일어난 사건을 새로운 임금 원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잘못 기록한 예가 허다하다. 이 문제는 별도로 논의하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이 같은 습관에 따르면,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이지 침류왕 원년이 아니었다.2)

깊이 읽기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

백제가 중국 땅을 지배했다는 점은 중국 역사서에서도 잘 증명된다. 본문에 언급된 《양서》와 《송서》 외에 《남사》의 〈이맥 열전〉에서도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개 군을 소유하고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고 했다. 《양서》는 당나라 때인 629년에 편찬된 양나라의 역사서이고, 《송서》는 남북조시대인 488년에 편찬된 유송()의 역사서이며, 《남사》는 당나라 때인 659년 이후에 편찬된 남쪽 왕조 즉 유송·남제·양나라·진()나라의 역사서다.

한국 역사서도 아닌 중국 역사서에서 백제의 중국 지배를 인정했는 데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부인의 근거가 좀 이상하다. 실증을 중시할 뿐 아니라 소신이 강한 역사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김한규의 《한중관계사 Ⅰ》(아르케, 1999)에서조차 별다른 근거 없이 백제의 중국 지배를 부정하고 있다. 이 책 175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정사()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부정하거나 무시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다는 진말()의 요서는 선비 모용씨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군현을 보유하였다는 정황적 개연성이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평이군() 혹은 ‘진평군 진평현()’의 소재를 확인하기 어렵고, 요서 점유의 당사자인 백제와 북조의 사서나 사료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이 백제 요서 점유설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김한규는 ‘진나라 말기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요서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군현을 두었을 리 없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요서 지방이라고 하며 선비족이 항상 요서 전역을 지배했는지에 관한 명확한 사실 확인도 없이 백제의 중국 지배를 그냥 막연하게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가 중국을 지배했다는 점은 백제도 아닌 중국의 역사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은 자국의 역사는 과장해도 남의 역사는 과장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려면, 보다 더 확실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한 추정만으로 확실한 증거를 부정하는 것은 올바른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백제나 북중국의 역사서에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백제 역사서인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백제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에서 백제 역사를 기술했다. 또 침략을 받은 당사자인 북조 즉 북중국 왕조의 역사서에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민족에게 침략당한 사실을 가급적 숨기는 태도는 중국 역사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침략을 받은 당사자가 아닌 남중국 왕조들의 역사서에 백제의 북중국 점령 사실이 나타난 것은 남중국 왕조들이 북중국 왕조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는다. 하지만 《남사》나 《양서》는 남중국 왕조의 역사서이기는 하지만, 이 책들은 중국 전역이 통일된 당나라 때 편찬됐다. 당나라는 북중국을 계승한 통일 왕조였다. 따라서 남중국 왕조가 북중국을 폄하할 목적으로 백제의 북중국 점령을 역사서에 기록해 놓았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 역사서에 엄연히 기록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려면 훨씬 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중국의 한국 침략 사실은 무조건 믿으면서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한국의 중국 침략 사실은 “설마?” 하며 믿지 못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공정한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 북중국을 계승한 당나라가 이런 사실을 역사 기록에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당나라 때 편찬된 《남사》나 《양서》에는 백제의 중국 진출이 기록된 데 비해 같은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 등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신채호가 직접 대답할 것이다.(1)

 

 

 

조선상고사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 사망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훨씬 더 넓었다.

《구당서》 〈백제 열전〉에서는 백제의 영토에 관해 말하면서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도달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고려에 도달하며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도달한다”고 했다.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1)다.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월나라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명사였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서의 서쪽 즉 지금의 봉천성 서부는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구절에 의하면 당시의 일본 전역이 백제의 속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는 이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언제 잃었을까?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 패해 국세가 약해졌으니, 이때 해외 식민지를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동성대왕은 이처럼 큰 전공을 이루었지만, 수재나 가뭄 같은 재해가 심한 때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웅장하고 화려한 임류각을 지었다. 그 앞에 정원을 조성하고 못을 파서 진귀한 동물과 기이한 물고기를 길렀다. 또 수렵을 즐겨 자주 궁을 나갔다. 그는 재위 23년 11월 사비 부여의 마포촌에서 수렵을 하다가 큰 눈을 만나 유숙하던 중에, 왕을 미워하는 전 위사좌평2) 겸 전 가림성주 백가3)가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재위 23년 12월4)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22년간(원문은 23년_옮긴이)5)이었다. 당시 나이는 겨우 30여 세였다.(2)

 

 

 

윤내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하였다. 백제가 중국에 처음으로 진출했던 지역은 요서군과 진평군 지역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기록에 요서군과 진평군으로 지칭된 곳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서 서남으로 하북성 중부의 안평 지역까지와 광서장족자치구의 옹녕현 지역이었다. 

난하 유역에서 하북성 중부까지를 차지하고 기반을 닦은 백제는 그 세력을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의 산동성 지역을 거쳐 강소성 남부 양주 지역까지를 장악하였다.  백제는 지금의 절강성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어느 시기까지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으로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본국으로부터 관리와 연락이 쉬운 지역이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시기는 서기 246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이미 당시의 요동(지금의 난하 유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백제는 서기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바로 전까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요동진출과 백제의 동부 해안지역 진출은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고 지난날 고조선의 영토를 침략한 중국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시대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난하 유역에 있었으므로 이는 고구려의 옛 땅과 백제 왕실 조상들의 옛 땅을 수복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던 시기는 중국이 위 · 촉한 · 오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인데, 뒤에 한때 진晉나라에 의한 통일시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계속해서 중국 북방은 이민족들의 정권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백제가 중국에 진츨하여 그 지역을 계속해서 지배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에 한족漢族 정권은 중국의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매우 약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와 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서 활동하는 백제 관리와 장수들에게 사지절使持節 ·  자사刺史 · 장군將軍 · 태수太守 등의 중국 관직을 제수하였다. 백제로서도 그러한 관직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의 관직은 현지의 한족들과 토착인들을 지배하는데 명분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한 것은 34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에 변화가 있었다. 초기의 화친관계가 무너지고 대립관계로 바뀌면서 중국에 진출한 양국의 세력도 서로 견제하는 관계로 변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 중국은 이 기간 동안에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영역을 계속 지배했을 것이리고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영역 변천관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그 말기까지 산동성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지배영역의 변천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보완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에서는 이후 당唐시대에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치청번진淄靑藩鎭을 형성하고 작은 왕국과 같은 세력으로 55년 동안 당조唐朝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치청번진이 멸망한 뒤에는 바로 장보고 대사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한민족의 활동은 이전에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기초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3)

 

 

이종호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이종호  | 기사입력 2008/03/17 [22:20]

 

기록에 나타난 고대 천문현상 관측지 추적


일반적으로 고대의 사서에는 자연의 특이 현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고대인들의 믿음 때문이다. 기록된 자연 현상 중에서도 특히 천문현상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서의 기록은 위정자나 집필자의 주관에 의해 선별되고 변조되며 후대에 갈수록 윤색될 수 있다. 그러나 천문현상은 큰 틀에서 뉴턴의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대에 가더라도 변조가 불가능하고 설사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발견되는 사료들은 천문현상 기록을 토대로 사료의 진위여부를 가려주기도 한다.

■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기록의 의문

1994년, 고대사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매우 놀라운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와 경희대학교의 라 대일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기록된 일식의 관측 위치는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이었다. 

▲  [사진설명] 『삼국사기』 천문기록에 의한 삼국의 수도 비정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를 비정한 결과 삼국의 전반기에는 모두 중국 지역에 위치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蝕)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년(BC 54년)의 일식은 식분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기록으로 남긴 모든 일식은 어느 지역에서든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신라에서 141년에 측정된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166년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최적 관측지 즉 천문관측 현상을 관측하였던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일식기록이 201년을 마지막으로 787년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무려 580여 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록이 엄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즉, 일식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신라는 중국 본토 지역에서 한반도로 일정 시기에 넘어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게 된다.

문제는 신라의 경우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관측자가 한반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것을 차용했을 확률은 겨우 0.24퍼센트였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0.026퍼센트였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매우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의 여러 곳에서 천체를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래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 일본학자들의 견해도 기원 5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거나 꾸며내었으며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삼국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근거는 『백제본기』에 의할 경우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다가 375년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기록이 없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에 백제가 기록한 이 공백기의 일식기록으로 태백주현(224)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사진설명] 4세기 백제의 발전도. 고등학교 『국사』에는 4세기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반도, 왜의 규슈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천문현상기록이 구전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이를 글로 적었다는 가설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과거의 천문현상은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이 중요하지 지나간 과거의 천문현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의 천문현상이 수백 년을 걸쳐 구전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중국에서 차용했다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중국에서 천문기록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한 것이 현재까지 전달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문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민족의 기록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도 옛글이 있었다는 기록이 매우 신빙성 있게 느껴짐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국정브리핑, 2004.05.29 참조).

■ 백제의 요서영유(설)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루어지는 삼국시대를 거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국 측의 정사로 볼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만을 따로 분리한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3세기 중엽까지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라고 하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대에 이미 고부(古阜) 지방까지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과 16관등제라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국가체제 내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학자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자료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음에도 중국 측의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설로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 나타난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살펴본다.

『송서(488년)』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년)』 :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년)』 :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년)』 :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년)』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현재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

『송서』에 실린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주로 백제의 대 중국 외교 자료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이들 기록이 5세기 후반 경 백제와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사실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송서』의 내용은 모두 당대의 외교기록인데 요서영유 기록만은 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건 기록으로 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었던 이유로 당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송서』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상대되는 백제가 요서지방을 차지하고 이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는 대목이다.

반면에 『남제서』의 경우 전반부분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는데 유원재(兪元載)는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라는 내용이라고 발표했다. 『남제서』는 『송서』와 같은 내용이지만 진평군 진평현이 백제군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사서는 당대의 변화된 인식의 일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사신도(使臣圖)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는데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계의 기사를 담았다. 특히 백제의 원류기사를 마한으로부터 구했으며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지역을 차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남조계 사서에만 전해지고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 본토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당시의 동북아시아사상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당사국인 북조계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남조와 북조에서의 인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백제의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유사』, 『삼국사기』가 워낙 후대에 저술된 것이므로 요서영유(설)에 대해 일연과 김부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북위가 백제의 지경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이 전쟁도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중국으로 원정군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다. 490년 전쟁에서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당시 북위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이들을 운송시킬 대함선이 필요하다.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강성한 고구려(장수왕 시대)의 영토를 통하여 백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고구려가 순순히 허락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통과하려면 고구려와 북위가 상당한 조약을 맺거나 혈전을 치렀어야 하며 이럴 경우 북위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영토들은 남제가 북위에게 빼앗겼던 땅으로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일부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백제와 북위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인 산동반도는 요서영유(설)의 지역과는 다른데 백제가 언제부터 산동에 거점을 잡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역에 진출했던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전진의 연합에 의해 공격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제,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이상과 같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해서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있다. 제3의 의견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부여, 낙랑 등 다른 세력이 주체인데 백제로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백제의 요서영유를 긍정하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실학자 신경준으로부터 임수도, 정겸(丁謙) 등의 중국인과 신채호 , 정인보, 이민수,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등으로 이어지며 그 위치를 요서, 산동, 강소, 절강(遼西, 山東, 江蘇, 浙江) 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북조가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누락시킨 것은 북조의 사관들이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김상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근초고왕 말기에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요서영유(설)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 측의 자료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반면에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부정하는 입장은 실학자인 한진서를 비롯하여 주로 일본의 연구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중국 측 사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시기인 진말(晉末)에는 모용씨가 요서지방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의 의견으로 요서영유의 주체는 백제가 아니라 낙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부여 또는 마한과 관련된 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백제의 요서영유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설(說)'로 다루는 것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정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삼국의 역사를 재편해야 하는 상황도 피할 수 없으므로 현 단계에서 '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은 비록 (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다루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부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 [사진설명] 『우적도』(1978년 신신문화출판사 간행 『중국역사도설』)


■ 대륙 백제

백제의 '요서 영유(설)'은 한반도 백제 세력에 의해 중국 내의 일정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근래 이도학 박사는 한반도 세력에 의한 백제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 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도학 박사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했다.

『자치통감』 :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키는데 한반도 서남안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백제가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백제가 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지역을 아무런 견제 없이 무사히 통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말한다면 백제는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하며 중국 본토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정인보 등은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발전을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았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나 물길을 의미하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지적해 놓았다.

여하튼 부여는 고구려(또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연(燕)나라 가까이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1만 7000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비록 전연왕이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를 주면서 사위를 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후 부여는 전연과 전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를 두고 당시에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부여의 영토는 추후 강력한 제국인 고구려에 병합되므로 고구려에 병합되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부여가 존재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 기록들도 백제의 위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송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위의 기록 역시 우리가 배운 고대사의 상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볼 수도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라는 글이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박사는 이 기록이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 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꼽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로 추정한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중국 지역 존재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인 13-14세기에 제작된 『중국역사도설』〈우적도(禹迹圖)〉와 이를 기본으로 한 『송본지리지장도』〈우적도(禹迹圖)〉로도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지도에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관련되는 지명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리민족사연구회〉의 오재성은 『송본지리지장도』는 송나라가 진한(秦漢)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나(支那, 秦漢 = Chin Han, 이하 중국이라 적음)의 역사를 밝히는 역사부도로 볼 수 있으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우적도(禹迹圖)〉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거론되는 지명들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지명인 북평(北平), 태원(太原)은 물론 진번(珍播, 眞番)과 주애(朱崖) 사이에 동이의 유적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무덤이 있는 동평(東平)과 조선의 기자무덤이 있는 몽성(蒙城) 등이 나타난다.

특히 백제의 지명으로 사서에 나온 황산(黃山), 평원(平原), 대산(大山), 제성(諸城), 백마(白馬), 동명(東明), 정성(項城), 주류성(周留城), 동성(桐城), 독산(獨山), 덕안(德安) 등은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 중국 반도의 동쪽 지역 즉 현재의 중국 요동지역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도 〈우적도〉에 의하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①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②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③ 하수(河水(한수(漢水), 한강(漢江))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군(晉平二郡)이 있다. 

▲ [사진설명] 『송본지리지장도』. 백제에서 보이지 않는 사서의 지명들이 이들 지도에는 나온다(『백제는 중국에 있었다』)

 
<우적도>가 한국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한민족과 연관이 많은 요(遼, 현재의 중화민국 지도에서는 좌권(左權)으로 적혀 있음)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는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고 하는데 〈우적도(禹迹圖)〉를 참조하면 요동 요서는 요수(遼水)가 기점이 아니라 요(遼, 좌권)가 기점이 된다(백제의 요서영유(설)의 요서는 이 기록에 의할 경우 요의 동쪽에 있음).

〈우적도(禹迹圖)〉에 의하면 적어도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구려는 현재 만주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아시아 동북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지역인 현재 중국 본토의 동부에 백제가 있었고 그 아래에 신라가 있었던 것이 된다.

특히 『남제서』에는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산동반도 지방에 7개 군에 태수를 두었으며 임승국은 동성왕의 능이 산동의 청도서북(靑島西北(百支莢王之墓))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백제가 중국 지역을 통치한 연한을 통산하면 약 400년에 가깝다고 적었다.

백제의 주민 구성을 보면 한강 하류 지역인 마한 세력권으로 포함하여 지배집단을 이루게 되는 북방 유이민들이 정착하기 이전, 이 지역 선주민 세력은 대개 한족(韓族)계통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제부터 영제 말기(147 189)에 이르면서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이나 그 지배 하에 있는 현의 힘으로는 이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196 219)에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쪼개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摸) 등을 보내어 유민(流民)들을 결집시켜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토벌했다. 이 이후로 왜(倭)와 한은 드디어 대방군에 소속되었다.'

이들 한예들이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으로 보이며 백제 지배층을 구성했던 세력들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남하하여 한강유역 각지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 주민 구성에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섞여 있게 된 것은 4세기 전반 중국의 군현이 축출된 이후 급변하던 삼국간의 정세에서 많은 중국계 인물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경우도 중국영유의 여지를 갖고 있다. 안호상은 신라의 국역이 만주의 삼개성(三個城)과 중화(中華)의 구개주(九個州)였다고 적었다. 장보고의 신라방(新羅坊)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확대하여 신라방이 아니라 신라가 영유하는 지역이 중국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오재성은 신라가 중국 본토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고 적었다. 307년부터 통치자의 호칭을 '왕'으로 했던 신라와 503년 간((干)에서 신라국왕으로 불렀던 신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구당서』는 은산, 신성, 고대인성의 고구려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고 고구려 남쪽과 백제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 설에 의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에서 분리된 사로신라(斯盧新羅)와 한반도에서 간(干)에서 신라왕이 된 신라가 있었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의 기록도 인정하고 송대의 〈우적도(禹迹圖)〉도 인정하면서 현재 중국에 있는 지명도 참고한다면 삼국의 위치가 현재까지 인정되는 역사와 전혀 달라지게 된다. 한반도를 무대로 구성한 고구려 신라 백제 특히 백제의 역사는 한 마디로 엉망이 된다는 뜻이다. 
 

▲ [사진설명] 비류의 근거지로 알려진 &lsquo;백제우물&rsquo;. 인천 문학산성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매립돼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인천지역에서 삼국시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됐거나 출토된 적이 없어 고대사 연구의 공백 지대로 남아있다(『새로 쓰는 백제사』)


■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중국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도학 박사는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주서』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부여계이고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부여계인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배경으로는 ①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②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③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 박사는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 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어떻게 결합했느냐'인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했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기록 연구에 따른 백제 신라의 위치 비정은 앞에서 설명한 대륙백제(신라도 포함)설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은 백제의 요동영유(설) 등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보인다. 물론 신라 최적 일식 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에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이므로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을 덧붙인다.

기록이 많지 않은 고대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현재적 한계이다. 여하튼 우리 고대사를 과학으로 풀어 보면 앞으로 그 미스터리가 더욱 많이 규명될 것으로 생각된다.(4)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중국의 동북공정 뒤엎을 史料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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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2004-09-23 14:54:00
 
  • ‘흠정만주원류고’, 백제를 중국 동부 지배한 황제국으로 기술
  • 온조왕~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 소정방이 멸망시킨 것은 일부분, 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는 존속
  • 한반도 서부 중심의 백제사는 일제의 역사 왜곡

충남 부여 소재 백제 별궁 연못인 궁남지. 최근 중국 동부지방에 위치했다는 ‘화북백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흔히 백제라고 하면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 같은 패망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린다. 그것은 백제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면보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백제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대륙 깊숙한 요서(遼西)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 중 제일 먼저 패망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나라였다.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선 백제의 뿌리인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부산(鳧山)과 역산(繹山)을 차지하고 마침내 서국(徐國)의 영토를 짓밟아 해방(海邦)에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 남쪽 이족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감히 순응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후에게 순종했다.”

노송이란 동방의 동이족을 몰아내고 노나라를 세운 주공(周公)을 칭송하기 위해 자손들이 쓴 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 역, 서택, 해방, 회이, 만맥, 남이는 노나라 건국 당시 오늘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푸젠성 일대 동남방 지역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부(鳧)는 9이(九夷)의 다섯 번째인 부유(鳧臾)로 바로 부여국의 전신이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다.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 일대가 노(魯)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산둥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 이 부여족은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묻고 “사료로 보건대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했다.

복희에서 부여로 정통성 계승한 백제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伏羲氏)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마천은 왜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지지(輿地志)’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魚台)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중국인이 한족의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올해 4월 필자가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중국 산둥성 줘청(鄒城)시 이산(繹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微山湖)부근에 실재 부산이 있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었다.

이처럼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둥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희가 동이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희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씨족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세기’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고조선이다. 그러니까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의 국조(國祖)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허광웨는 ‘동이원류사’에서 부여족의 발전경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다. 일명 부유(浮楡), 어여(於余)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둥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세웠다. 이것이 북부여(北夫餘)다. 북부여는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했다. 북부여의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졸본천(卒本川)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 또는 졸본부여라 칭한다. 동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왕족의 또 다른 한 갈래는 남조선 지역으로 건너가서 백제국을 세웠는데 뒤에 당태종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유의 후예인 부여족의 한 갈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중 굳이 부여족의 정통성을 따진다면 필자는 백제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나중에 동부여를 병합함으로써 부여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데 반하여, 백제는 부여장(夫餘璋), 부여륭(夫餘隆), 부여풍(夫餘豊) 등 왕조의 성씨를 아예 부여로 쓰고 또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남부여(南夫餘)라는 국명을 쓰면서 부여를 계승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산둥성 제수(濟水)에서 국명 유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시조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그 후 처음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라왔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국명에 왜 제(濟)자가 들어갔는지 논리가 빈약하다.

허광웨는 이에 대해 ‘동이원류사’에서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즉 남쪽으로 내려온 부여족은 부락이 점차 늘어나자 옛 산둥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필자도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로 보는 데 동의한다.

우리는 그동안 백제의 발상지를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에 대한 명확한 유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지어 찾아야 옳다.

지금도 제수는 산둥성을 가로질러 흐른다. 현재 산둥성의 성 소재지 지난(濟南)시는 제수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수는 옛 사독(四瀆), 즉 강(江), 하(河), 회(淮), 제(濟) 등 사대수(四大水) 중의 하나로 허난성현 서쪽 왕옥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산둥성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이처럼 제수 주위에 여러 동이부족 집단이 형성되어 국명을 백제(百濟)라 했을 수도 있고 또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100여명에 이르는 부여족이 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 해서 백제라 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백제는 산둥성의 제수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시조 설화부터 논의가 엇갈린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周書)’ 49권 백제전, ‘수서(隋書)’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九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사라진 백제 초기 역사

일본의 옛 문헌인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구다라노기미(백제공) 조에는 “구다라노기미가 백제국 추모왕의 30세 손인 혜왕의 손자 문연왕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왕세계표에는 혜왕이 온조왕의 18세 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모왕으로부터 계산하면 19세 손이 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왕세계표에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후지이노수쿠네 조에는 그가 ‘백제 추모왕의 10대손 귀수왕의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귀수왕(214~234년)은 시조의 5대 손, 동명왕의 6대 손이라 되어 있다. 역시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에 4명의 왕이 빠져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보다 ‘신찬성씨록’에 왕이 4대 혹은 11대나 더 많다는 것을 통해 초기 백제의 역사가 잘려나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추모왕의 아들로 전하는 음태귀수왕, 추모왕의 손자라고 하는 덕좌왕 등의 이름이 보이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잘려나간 초기 백제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고대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하남 위례성 발굴지.

백제 역사의 뿌리가 상당부분 삭제된 것은 백제 건국 초기의 수도변천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처음 하남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국가 성립을 선포한 다음 불과 10여년 만에 수도를 한산, 즉 지금의 남한산 일대로 옮겨 2년 후 왕궁을 지었다. 10여년 만에 수도를 옮기고 연이어 궁전을 건립하는 대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영역이 100여 리에 불과했던 백제 초기의 경제능력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기 이전, 하북 위례성에 이미 초기 백제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고 바로 이 하북시대의 백제사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하남 위례성에 한반도 백제가 수립되기 이전 하북에 대륙백제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대륙백제를 세운 시조는 구태이고 한반도 백제의 시조는 온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온조의 기록만 남고 대륙백제의 역사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후기 신라의 역사편찬자들이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하면서 백제사의 시작을 신라 창건보다 후대로 끌어내리려 한반도로 이주해온 후 온조왕 시대를 백제의 창건 기준으로 설정하고, 온조 이전 대륙백제 구태왕 시대를 잘라버린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반도 백제는 자생적으로 성립한 나라가 아니고 대륙 서북지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와 기술문화를 가진 동이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와서 건립한 나라다. 따라서 한반도 하남 백제 이전에 대륙의 하북 백제가 있었다는 논리를 전면 부인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한강은 역사적으로 강(江)이지 하(河)가 아니다. 백제가 실제 요서 진평 등을 지배한 기록이 중국문헌 여러 군데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하남 위례성의 ‘하’를 한강이 아닌 지금의 랴오닝성 요하(遼河)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초기 백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하남 위례성 시대 이전 대륙의 하북 백제와 그 시조 구태에 대한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중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예컨대 ‘한서(漢書)’ 고제기에 ‘치진중(治秦中)’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치’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한(漢) 고조가 진중(秦中)에 수도를 정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백제소치’도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요서 지배에 관한 기록은 ‘송서’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자치통감’ ‘위서물길전(魏書勿吉傳)’ 등에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서 지방은 한반도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백제가 이곳에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라고 기술하여 백제의 요서 지방에 대한 지배를 진출로 폄훼했고, 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술 더 떠서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여 지배와는 상관없는 무역기지의 건설로 왜곡했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다.

대륙 백제의 수도 요서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미궁에 싸인 한성 백제 이전의 백제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왕과 제후 거느린 대제국

‘흠정만주원류고’ 3권은 “사서(史書)에 ‘백제는 무예를 숭상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宋),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이는 백제의 땅이 넓고 백성도 많았다는 증거다.”

일부 사학자들 중에는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흠정만주원류고’의 이 기록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나타난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建武) 2년에 백제의 모대왕(牟大王)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건무는 남제 명제(明帝)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천자(天子)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었다. 제후와 왕공을 분봉(分封)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비록 강성했지만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왕과 제후를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데 백제가 ‘중건후왕(衆建侯王)’, 즉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이것은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 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서력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 평야에 신라를 세웠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서 건립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터잡고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됐고 20년 후 고구려, 그로부터 다시 19년 후 백제가 성립됐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기록을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의 부용(附庸) 국가였는데 나중에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이웃나라가 됐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것일까. 아마 북사(北史)의 다음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신라는 백제에 부용되어 있던 국가다.” 여기서 ‘부용’이란 큰 나라에 부속된 작은 나라, 즉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국가를 말한다. ‘맹자’에는 ‘강역이 50리가 안 되어 제후에게 부속된 작은 국가를 부용국이라 한다’는 설명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독립국가가 아니라 백제의 부속국가로 있다가 나중에 차츰 발전하여 독립국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보다 먼저 신라가 건국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출발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주로 한반도 이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한데 반해 중국의 고대사료는 그 이전 대륙시대 역사까지 포괄하여 다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하류로 침입했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이것은 백제 멸망에 대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을 통해서 본 백제의 패망 시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아마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에는 5방(五方)이 있고 방은 10군(郡)을 관리한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라고 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다.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된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절반 가까운 세력이 그대로 남아 백제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는 것이 ‘흠정만주원류고’의 주장이다. 또한 삼국 중 백제가 최후까지 남았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元)나라 때도 백제가 중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1280~1367년까지 존속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 가량 더 존속했고,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미화나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고 폄훼된 경향이 짙다. 중화 중심의 사대(事大)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백제사는 두 번에 걸쳐 크게 왜곡되는 수난을 겪었다. 첫째, 고려 시기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초기 백제사의 상당부분이 삭제 혹은 훼손되었다고 본다. 둘째, 일제에 의한 왜곡으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한국사 연구에 손을 댔는데, 이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백제사를 총관(總觀·전체를 대충 살펴봄)하는 ‘백제약사’와 ‘백제사강화’를 저술했다. 이마니시의 백제사 서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가 신사시대(信史時代)로 들어간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 그 이전은 전설의 시기로 파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왜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보호와 통치하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의 이와 같은 백제사 인식체계는 백제의 후진성과 타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의 가치

광복이후 일제에 의해 왜곡된 백제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구인력의 제한과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백제사 인식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때 편찬된 책이다. 흠정이란 황제의 저술 또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저술을 뜻한다. 청나라 건륭 43년에 아계(阿桂)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이 책은 부족, 강역, 산천(山川), 국속(國俗) 네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간행됐다.

당시 조선은 친명배청(親明排淸)정책을 견지하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보니 우리 민족사의 한 축인 백제사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 이 ‘만주원류고’에 보이는 백제는 후진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토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고, 역사는 깊고, 문화는 우수하고, 국력은 강대한 대제국이었다.

광복된 지 어언 60년인데 우리가 아직도 식민사관의 잔재를 벗지 못한 채 고대사연구를 국내의 한정된 자료에 의존하면서 ‘흠정만주원류고’와 같은 소중한 역사기록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한 고구려사 탈취 시도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역사문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또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책연구기관이 출범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나 신라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취약하고 또 삼국사 중 일제에 의한 왜곡의 정도가 가장 심각한 부여, 백제사가 여기서 제외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5)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장수들을 왕과 제후로 봉한 백제 동성왕

조하준 기자
  • 입력 2024.01.27 11:21
  • 수정 2024.01.29 09:23
본지가 그려본 서기 488년 당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지역과 양군의 진격로를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백제의 요서군과 진평군이 어디인지를 앞선 기사에서 짚었다. 두 지역을 짚고 넘어간 이유는 백제와 북위 사이 전쟁이 발생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대략적으로 살피기 위함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진평군은 위치가 너무 남쪽에 있으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아마도 요서군 지역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는 488년에 있었던 백제와 북위 사이의 전쟁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중국 25사 중 하나인 『남제서』에는 좀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그를 통해 백제의 영토가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도 상세하게 나와 있어 주목을 끈다.

이 『남제서』란 책은 남조의 제나라 역사를 다룬 책인데 재미 있는 건 남제란 나라는 479년에 건국되어 502년에 멸망해 백제 동성왕의 재위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려 7명의 황제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남제란 나라가 국력도 허약했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남제서』에 기록된 서기 488년 당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상황에 대해서 같이 한 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장수들을 왕과 제후로 봉한 동성왕

『남제서』는 백제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에 국서를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한 내용을 인용하여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물론 해당 사서는 어디까지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찌든 중국인의 시각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실제 동성왕이 쓴 원문과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록이 너무도 길기 때문에 원문 전체를 다 올리지는 못하지만 기록을 요약해서 보면 이렇다. 서기 488년 당시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자 동성왕은 저근(姐瑾), 부여고(扶餘古), 부여력(扶餘歷), 부여고(扶餘固) 등 4명의 장군들을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논공행상 내용이다. 저근은 본래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이었는데 이 전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으로 봉해졌다. 또 부여고(扶餘古)는 전쟁 전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였다가 전쟁 후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으로 봉해졌다.

그 밖에 전쟁 전 건위장군이었던 부여력은 전쟁 후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으로 봉해졌고 전쟁 전 광무장군(廣武將軍)이었던 부여고(扶餘固)는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로 봉해졌다. 즉, 동성왕이 백제 장군들을 왕과 제후로 봉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의 임금은 황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백제가 제국(帝國)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봉왕, 봉후된 4명의 백제 장군들의 영지를 모조리 한반도 안에 있었던 곳으로 왜곡해 놓았다. 먼저 저근의 첫 번째 영지인 면중에 대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王, 侯와 관련된 地名으로 보아 武珍州로 比定하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武珍州는 全羅南道 光州가 되거니와, 文章의 內容으로 보아 地名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면중의 위치는 무진주 즉, 광주라는 것인데 근거는 없다. 그냥 일제 식민사학자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자신의 책인 『임나흥망사』에다 아무 근거 없이 말한 것이 고작이다. 그래놓고 “한편 이러한 류의 지명비정은 백제의 해외경략설과 관련하여 비판적인 견해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요한다.”는 말을 덧붙여 어물쩍 빠져나가고 있다.

만약 백제의 해외경략설을 사실로 보고 있었다면 윤내현 교수 같은 다른 사람 말을 인용했을 것이지 일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 같은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근의 새 영지인 도한에 대한 주장은 이렇다.

“都漢에 가까운 地名을 『三國史記』「地理志」에서 찾아보면 武州에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하나는 分嵯郡의 屬縣으로 豆肹縣이 있고 또 하나는 發羅郡의 屬縣으로 豆肹縣이 있다. 前者는 全羅南道 高興地方으로 보고 있으며, 後者는 羅州地域으로 잡고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도한은 분차군 속현인 두힐현 혹은 발라군의 속현 두힐현으로 전남 고흥군 혹은 나주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물론 없고 그냥 아무렇게나 막 찍은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 역시 일본인 학자인 이노우에 히데오다. 도한이 두힐현이랑 같은 곳이란 근거는 발음이 비슷한(?) 것밖에 없다. 부여고(扶餘古)의 첫 번째 영지인 팔중에 대한 해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末松保和는 武州 發羅郡이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다. 鮎貝房之進은 이를 半奈夫里縣에 比定하고 있다.(「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 이들을 현 지명과 대비하여 보면 發羅는 지금 全羅南道 羅州이며, 半奈夫里는 羅州郡 潘南面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즉, 전라남도 나주시라는 것인데 물론 이 역시 근거는 없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와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멋대로 비정한 게 전부다. 그래놓고 역시 어물쩍 백제의 해외경략설을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하며 책임 회피를 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임지인 아착에 대한 주석은 이렇다.

“『三國史記』「地理志」百濟條에는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阿次山郡이 있다. 이곳은 務安郡 押解面으로 비정하고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아착은 백제의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그 위치는 전라남도 무안군 압해면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역시 없다. 오로지 이노우에 히데오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전부일 뿐이다. 부여력의 임지인 매로는 이렇게 비정했다.

“『三國史記』「地理志」百濟條에는 馬西良縣이 있다. 이는 沃溝郡 沃溝邑이다. 이와 비슷한 地名으로는 馬斯良縣이 있으며 이는 寶城郡 會泉面으로 比定되고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이것을 全南 長興郡 冠山面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매로는 백제의 마서량현이며 그 위치는 전라북도 옥구군 옥구읍이고 다른 견해로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혹은 장흥군 관산면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 역시 근거는 없다. 오로지 이노우에 히데오가 마음대로 찍은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부여고(扶餘固)의 임지 불사에 대한 주석은 이렇다.

“比自伐에 比定한다면 이것은 全羅北道 全州가 된다. 물론 比自伐은 昌寧의 古名이지만 이것은 해당되지가 않는다. 위의 이름과 유사한 것으로 分嵯郡이 있는 바, 이는 全羅南道 長興郡 冠山面에 비정되고 있다.”

이 역시 발음 비슷한 것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전라도 지역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이런 곳에 4명의 왕과 제후가 존재한단 말인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광주광역시 면적까지 다 합쳐봤자 북경시보다 약간 더 큰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조그만 곳에 왕과 제후를 4명씩이나 봉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사와 비사벌이 뭐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발음 비슷한 것으로 지명 짜 맞추면 불사란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브라질을 중국어로 ‘바시(巴西)’라고 하는데 불사를 중국어로 읽으면 ‘푸시’가 된다. 어떤 이가 보기엔 이 두 발음도 비슷해 보이는데 저런 식으로 논증하면 불사는 지금의 브라질이란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은 백제는 한반도 호남 지방에 있었던 소국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둔 상태에서 『삼국사기』 《지리지》를 뒤적거려 대충 발음 비슷한 지명들을 짝지어서 아무 곳에나 비정한 것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즉,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백제가 공격을 받은 지역은 북경시 일대

그런데 위 내용보다 더 쇼킹한 내용은 동성왕이 보낸 두 번째 표문에 있다. 이 역시 488년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 및 인사 이동 조치에 담긴 것이다. 앞서 언급한 4명의 장수 외에 3명의 장수가 더 언급되는데 아마 이들이 북위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였고 저근을 비롯한 4명의 장수가 야전을 이끈 것으로 판단된다.

추가로 언급된 3명의 장수는 건위장군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 직의 고달(高達)과 건위장군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양무(楊茂), 선위장군(宣威將軍) 겸 참군(參軍) 회매(會邁)라는 인물이다. 이들이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서기 488년 당시 북위가 쳐들어간 곳은 백제의 광양군과 조선군으로 추정된다. 그럼 이 2곳의 위치를 알면 전쟁이 발생한 지역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광양군의 경우 이 지명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다. 전라남도 광양시는 한자가 다르다. 이로 볼 때 고달이 태수를 지냈던 광양군은 한반도의 지명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광양군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① 한나라 때 광양국(廣陽國)을 설치했고 후한 때 군으로 삼았으며 삼국의 위나라가 연국(燕國)으로 삼았다. 옛 치소는 지금의 북경시 대흥현(大興縣) 서남쪽에 있었다. ② 북위가 설치했고 북제가 폐지했다. 옛 치소는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동북쪽에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북경시 일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북위가 있었던 시절이므로 아마도 두 번째 기록이 좀 더 사실에 부합하리라 본다. 그 밖에 오늘날 북경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한 하북성 낭방(廊坊)시에도 광양구가 존재한다. 가만히 보면 앞서 살펴본 백제 요서군 지역과 거의 비슷한데 이로 볼 때 북위가 공격한 지역이 백제 요서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현대의 이병도는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현재의 평양에다 처박아 놓고 한사군 전쟁이 거기서 일어났으며 그 일대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거짓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엄연히 사서에 하북성 창려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다음은 조선군의 위치를 찾아보도록 하자. 조선군의 경우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선 찾아볼 수는 없다. 이는 진평군과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와는 관계가 없는 순수한 백제의 지명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현의 기록은 있는데 이 역시 진평군과 마찬가지로 백제가 조선현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현의 기록은 이렇다.

“① 한나라가 설치했고 후한과 진나라까지 이어졌다. 『괄지지(括地志)』에 ‘고구려 왕험성이다. 즉, 고조선 왕험성이다.’고 하였다. 곧 지금의 평양이다. ② 북위가 조선 백성을 이곳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했고 북제가 폐지했다. 옛 성이 지금의 직예성 노룡현 동쪽에 있다.”

본래 조선현이란 곳은 낙랑군의 속현이었는데 아무래도 낙랑군 조선현이었던 곳이 후에 북위 시절에 백제의 조선군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①의 기록은 고의적인 역사 왜곡인데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사기집해》에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창려가 험독현이고 그곳에 왕검성이 있었단 뜻이다. 《사기색은》에는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험독은 옛 도읍의 이름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지리지의 주(注)에서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 하였고,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조선왕의 도읍인 왕검성이 험독현에 있으며 현재 창려에 있다는 뜻이다. 이 창려현이란 곳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험독이란 말의 뜻은 물길이 험하다는 뜻인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왕검성을 왕험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②의 기록을 보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동쪽에 조선현이 있다고 했는데 창려현은 노룡현의 동남쪽에 있다. 이로 볼 때 위만조선의 왕검성에서 유래한 낙랑군 조선현과 북위의 조선현은 서로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양무가 태수를 지냈던 조선군은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로 추정된다.

위치를 볼 때 서기 488년에 북위가 공격한 지역은 고달이 태수로 있었던 광양군이었고 조선태수 양무는 인근에서 고달을 지원한 사람이며 저근을 비롯한 4인의 장수는 백제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병력을 이끌고 북위군을 섬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회매라는 인물은 참군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저근을 비롯한 4인의 장수를 도와 작전 수립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이후 이들은 논공행상을 거쳐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번엔 그들이 발령을 받아 떠난 곳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회매가 태수로 부임하게 된 청하군의 경우 이 역시도 한반도에는 없었던 지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청하군의 위치를 찾으면 이렇다.

“① 한나라가 설치했고 지금의 직예성 청하(清河), 고성(故城), 조강(棗強), 남궁(南宮), 산동성 청평(清平), 은현(恩縣), 관현(冠縣), 고당(高唐), 임청(臨清), 무성(武城)의 땅이다. 치소는 청양(清陽)이다. 후한이 청하국으로 삼았으나 북위가 다시 군으로 삼았다. 옛 치소는 지금의 직예성 청하현 동쪽이다. 수나라가 폐지했으나 얼마 후 다시 설치했고 치소를 청하로 삼으니 지금의 청하현 북쪽 10리에 있다. 원나라가 폐지했다. ② 남조 송나라가 설치했다. 치소는 반양성(般陽城)이며 북위가 동청하군(東清河郡)으로 고쳤고 북제가 폐지했다. 즉, 지금의 산동성 치천현(淄川縣)의 치소이다. ③ 북위가 설치했고 아울러 현을 설치했다. 옛 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상성현(商城縣) 동쪽이다.”

3곳 모두 북위와 조금씩 관련이 있는데 ②의 경우는 북위 때엔 청하군이 아니라 ‘동청하군’이었으므로 후보에서 제외된다. ③의 경우는 위치가 하남성 신양시 상성현이라고 했는데 뒤에서 살펴볼 북위 광릉군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①의 경우는 지금의 하북성 형태시 청하현을 말하는데 광양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곳이다. ①이 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음으로 조선태수 양무가 발령을 받아 새로이 태수로 부임하게 된 광릉군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자. 광릉군 역시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지명으로 한반도에 없었던 지명이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광릉군의 위치를 찾으면 이렇다.

“① 한나라의 광릉국(廣陵國)이었고 후한 때 군으로 고쳤다. 치소는 광릉으로 옛 성이 지금의 강소성 강도현(江都縣) 동북쪽에 있었다. 진나라 초기에 치소를 회음(淮陰)으로 옮기니 강소성 회음현 동남쪽 50리에 있었다. 동진 때 다시 지금의 강도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수나라가 양주(揚州)를 설치했고 또 강도군으로 고쳤다. 당나라가 다시 양주를 설치했다가 광릉군으로 고쳤고 또 양주로 고쳤다. 송나라는 양주 광릉군이라 했다가 후에 폐지했다. ② 북위에서 설치한 곳으로 광릉성 항목을 참조하라.”

역시 북위 때의 기록이므로 ②의 기록이 시키는 대로 광릉성 항목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릉성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직예성 문안현(文安縣) 서북쪽 20리에 있었고 신진현(新鎭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나라 때 이곳에 군량을 모았고 익진관(益津關)이 지키게 했다. ② 지금의 하남성 식현(息縣)의 치소이다. 본래 한나라 신식현(新息縣)의 땅이다. 북위가 광릉군을 설치했으나 양나라가 이기고 이내 군으로 삼았다. 그 후로 항상 땅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북주가 광릉을 빼앗고 마침내 신식현을 이곳으로 옮겼고 식주(息州)를 설치하고 군을 폐지했다.”

즉, 광릉군은 오늘날 강소성 양주(揚州)시 강도구와 하남성 신양(信陽)시 식현 2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곳이 합당할까? 우선 전자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자의 기록을 보면 전한 → 후한 → 서진 → 동진까지는 변천 양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동진∼수나라 때까지의 변천 양상은 전혀 기록이 없다.

동진이란 나라는 317년에 건국되어 420년에 멸망한 나라이고 수나라는 581년에 건국되어 618년에 멸망한 나라이다. 즉, 160∼300년간의 기록이 뻥 비어있는 셈이다. 이것을 단순히 그 200∼300년 동안 어떠한 행정구역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 마침 동성왕이 재위한 기간이 그 사이 기간에 해당한다.

그리고 북위란 나라는 386년에 건국되어 534년에 멸망한 나라인데 꼭 동진과 수나라 사이에 존속했던 나라였다. 그 북위가 설치한 광릉군이 하남성 신양시 식현에 있었다고 한다. 혹 동진∼수나라 사이에 강소성에 있었던 광릉군이 중국 왕조의 영토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속해 있었고 그 때문에 북위가 하남성 신양시에 제 2의 광릉군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로 볼 때 광릉군은 오늘날 강소성 양주시에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과연 현재도 중국 지도를 보면 과거 강도현이었던 곳은 현재 강도구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강도구 바로 서남쪽에 지금도 광릉구가 있다. 이로 볼 때 과거 강도현이란 곳은 지금의 양주시 강도구와 광릉구 두 곳을 모두 포함하고 있던 곳이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둘로 나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광릉군은 중국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231km 지점에 있다. 백제 동성왕이 이곳에도 태수를 임명했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백제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백제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는지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양태수 고달이 발령을 받아 새로 부임하게 된 대방군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선 오늘날 황해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로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던 군이었을까? 그 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방군은 후한 말 요동 군벌 공손강이 설치

대방군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백제가 건국된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 25사 중 『주서』와 『북사』, 『수서』 등 여러 사서엔 공통적으로 구태(仇台)라는 인물이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방군이란 행정구역은 후한 말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던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 말 때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던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거친 땅을 분할하여 신설한 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사학계에선 낙랑군의 위치를 지금 북한의 평양 일대라 하고 대방군은 그 남쪽의 황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국내에 시판되는 『삼국지』를 보면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 서북부까지도 위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유주(幽州)의 속군(屬郡)들을 표기한 지도.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뺀 나머지 7개 군, 국의 위치는 모두 지금의 북경시 주변에 있었다. 그런데 과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이 기존 사학계에서 주장한 위치에 있었을까?(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하지만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던 행정구역이 아니다. 이는 추후 기회가 될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먼저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이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유주에 속한 군으로는 탁군(涿郡), 발해군(渤海郡),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菟郡), 낙랑군(樂浪郡)이고 후국으로 광양국(廣陽國)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유주라는 행정구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유주에 속했다는 군국들 중 낙랑군,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국들은 모두 지금의 북경시 주변에 있는 것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낙랑군,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 이 4개 군만 따로따로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공손강은 앞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는데 낙랑군이 그의 세력권 안에 있었기에 그가 마음대로 대방군을 신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낙랑군은 요동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기 30년에 발생한 왕조(王調)의 난 당시 『후한서』《광무제본기》에는 주석으로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고 했다.

그러니 공손강이 낙랑군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고 대방군을 신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낙랑군에는 패수(浿水)라는 강이 흐르는데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패수는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경계를 이룬 곳이자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곳이다.

“패수는 낙랑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즉, 패수란 강은 낙랑군 누방현 일대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적힌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면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荀彘)가 패수 서쪽에서 위만조선의 군대와 만나 전투를 치른 후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수군사령관 양복(楊僕)이 왕검성의 남쪽을 포위했다고 한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당시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는 패수 서쪽이자 상류에 주둔했던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한다. 왕검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므로 패수를 조백하에 두고 볼 경우 보다 진로가 자연스럽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중요한 것은 순체가 전투를 벌인 지역이 패수 ‘상류’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패수란 강은 왕검성의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어야 하는 셈이고 『수경』의 기록대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인 셈이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라 했으니 패수 또한 그 인근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

아마도 조백하(潮白河)가 낙랑군과 관계 있는 패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백하의 상류는 현재 북경시 밀운구의 밀운수고(密雲水庫) 일대인데 그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왕검성이 있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의 서북쪽에 닿게 되니 진로가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서기 488년 1차 백제-북위 전쟁이 끝난 후 동성왕이 단행한 논공행상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영토는 오늘날 중국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애초에 대방군을 신설한 공손강의 근거지였던 요동군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인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낙랑군과 대방군 역시 그 일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로 볼 때 본래 낙랑군은 조백하 동쪽에 위치했고 대방군은 그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현재 하북성 당산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488년 당시 전황을 정리해 보면 북위는 당시 수도였던 평성(平城, 오늘날 중국 산서성 대동시)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오늘날 북경시 밀운구 동북쪽의 백제 광양군을 공격했다. 이에 인근에 있던 조선태수 양무가 급하게 구원을 왔고 백제 중앙정부도 저근, 부여고(扶餘古), 부여력, 부여고(扶餘固) 등 4인의 장수에게 구원병을 이끌고 휘하 참모로 회매(會邁)를 대동해 방어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백제가 북위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고 중앙군을 이끌었던 저근 등 4인의 장수는 모두 왕과 제후로 봉해졌으며 광양태수 고달은 대방태수로 또 조선태수 양무는 광릉태수로 발령을 받고 참모 회매는 청하태수로 임명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6)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버린 일제와 매국식민사학계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17 [15:14]
필자가 백제에 대한 연재를 계속해 나가면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자, 썩어빠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음해성 댓글로 공격을 해왔고, 주위에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한반도에는 누가 있었느냐?”고 푸념어린 질문을 해왔다. 필자 귀에는 “살기 좋은 이 땅을 놔두고 역사를 왜 대륙으로 가져가려느냐?”는 항변으로 들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면 당연히 고구려와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는 말 아니냐? 그렇다면 한반도엔 아무도 없었단 얘기인데, 우린 도대체 누구의 자손이냐? 우린 애비 애미도 없는 호로 자식이냐?”라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다들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국심이 넘치는 한국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일부러 믿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애국심에 충족이 되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일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인 반도사관은 이 나라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반도사관이 얼마나 무서운 이론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얼빠진 이 나라 정부가 아직도 일제 때 조작된 역사 이론을 그대로 교과서에 실어 학교에서 교육했기 때문이요,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이 나라 사학계가 일제 때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의 질손인 이병도는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팔아먹은 이 나라의 역사는 해방 62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보다 더 나쁜 민족반역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나라가 역사 회복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로 이 나라 사학계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 지킴을 위해 오히려 스승의 반도사관을 더욱 더 굳건히 사수한다. 심지어는 이병도가 죽기 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잘못이라는 참회의 글을 발표하자 “우리 스승이 나이가 들어 노망을 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 찾기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이란? 

반도사관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동서로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이런 반도사관이 뭐 그리 잘못된 이론이라고 성훈이라는 사람은 글 쓸 때마다 매번 사학계를 매국이니 식민이니 하며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 해소가 되리라 믿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백제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로 비정 해버리면 문제는 그 이전 역사도 당연히 한반도로 비정이 되어야 한다. 그 이전 역사란 바로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사군과 삼국의 전신인 삼한(마한,변한,진한)과 위만/기자 조선의 역사이다. (일제와 이병도는 위만 이전인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어 버려 반도사관에 단군조선의 역사는 없다)  

결국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현 대동강 평양이 되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 위만조선의 수도도 대동강 평양이 되는 것이다. 현 역사 이론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기자조선은 중국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고 한다.(참고로 북한은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었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말 한마디도 없으며, 단군은 모친이 곰이라는 신화로 처리되어 있다. 배달국과 환국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그저 교과서에 있는 문장이라고는 “B.C 2333년 단군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에서  --> “~ ~ 건국되었다”로 바뀌면서 ‘고 한다’이 세 글자 떼는데 6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반도는 예로부터 기자라는 이민족에 의해 시작되어, 위만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다가, 한사군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된 역사라는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대로 이민족에 의해 지배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일제가 조작한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매한 조선민족이 천황의 민족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반도사관을 편 일제의 논리였다.

“조선인이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 특명으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중국과 조선에 있던 고대 사서를 전부 거두어들인다. 중요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고,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란 새로운 역사서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조작되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키던 역사 이론이,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된 지 6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 이론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이 나라의 통치권자들의 역사인식이 친일적이었거나 아예 역사개념조차 없었던 통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민족정신을 말살하던 이병도는 6.25 후 친일파를 중용하던 이승만에 의해 다시 이 나라 사학계를 맡게 된다. 일제에 역사를 팔아먹은 조선사편수회의 매국노 멤버들인 홍희/신석호 등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핵심이 되어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 후학들이 대학의 강단으로 펴져 나가면서 이 나라의 사학계는 더욱 매국식민사학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아직도 일제치하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엉터리 역사이론인 동북공정을 앞세워 북한 땅을 노리고 있음에도 이 나라 사학계는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리 되면 지금까지의 자기들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누가 자기 목줄을 걸고 그렇게 하겠는가!

대한민국 사학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풍지대이다. 아무런 저항도 안받고 그 엉터리 이론을 마구 떠들고 있는데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입도 뻥끗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간혹 입바른 소리가 나오면 이번에는 정부에서 중국과 외교상 문제가 된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도 되찾기 운동이다.

간도는 조선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을사늑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제3자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고, 이미 일본이 을사늑약 자체를 무효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간도에 대한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년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해이건만 이의신청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인지? 아니면 중국의 제후국 정부인지, 일본의 식민정부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삼한의 진실 (삼한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알아보기로 하자.
단군조선은 44세 구물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천왕이 진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로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기자의 후손 6명이 번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이 단재 신채호선생의 이론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기준은 해대(海岱)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해대는 해(海) 지방과 대(岱)지방을 합한 말로 대(岱) 지방은 산동성 태산 일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거기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뛰어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가다’의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Let's go'의 뜻이다.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 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따라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25사인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보아도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영역은 하북성 일대인 것이다. (아래 사진참조)

한무제와 위만국 우거왕의 전쟁을 직접 참전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는 이 전쟁 후 참전 장수들을 처벌하는데 극형인 기시(찢어 죽임)라는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무참히 패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한4군이 아닌 조선4군을 설치했다 하며, 낙랑.임둔.현토.대방이라는 기록이 없다. 한사군은 분명 후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은 어떤 나라이고 어디 있었나?

나머지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단군조선의 정통인 진조선을 계승하여 나중에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이어지며, 영역은 내몽고와 하북성 일대로 보인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간 가섭원(동)부여는 북만주 일대가 그 영역이 된다. 나머지는 최씨의 낙랑국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를 그 강역으로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대대로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바다로 들어가 자살했고, 한반도 남부에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생겨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nbsp;&nbsp;기준이 남하한 곳은 대륙 동부 海지방으로 선조인 기자가 살던 땅이고, 최씨의 낙랑국은 한반도에서 세워진다. 식민사학계는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낙랑군을 그 위치로 가지고 간다.


대동강평양은 대대로 기자/위만조선의 수도였으며, 한무제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쓰러뜨리고 현 북한 땅 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허무맹랑한 이론을 지껄이고 있다. 평양근처에서 발굴된 유물은 바로 최씨 낙랑국의 유물이었음에도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이걸 한사군인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시켰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공교롭게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같이 쓰기 때문에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의 경우 ‘낙랑태수’라는 것은 낙랑군을 의미하고, ‘낙랑왕’이라는 것은 최씨의 낙랑국을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는 단군조선의 막조선에 이어 최씨 낙랑국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 망함으로서 한반도 전체는 고구려의 강역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호동왕자와 자명고와 낙랑국왕 최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왕자 호동이 옥저 지방을 구경다닐 때 낙랑왕 최리가 마침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오?”하고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환국한 다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녀에게 알리기를 “그대가 그대 나라 병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부셔버린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겠다.”하였다.

전부터 낙랑국에는 고각이 있어 만약 적병이 침입해올 경우 북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녀는 날선 칼을 가지고 병기고 속으로 들어가 고면과 각구를 부수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을 왕(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케 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방비하고 있지 않다가 군사가 엄습하여 성안에 당도한 후에야 북과 호각이 다 부숴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

호동과의 사랑에 빠져 조국을 배반하는 낙랑공주의 낙랑은 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손인 낙랑국이다. 이렇듯 엄연히 정사서인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낙랑국을 매국식민사학자들은 아예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는 낙랑군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래서 중국 하북성에 있어야 할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들어오게 되고,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국의 유물이 모조리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 변조되는 것이다. 

▲&nbsp;&nbsp;&nbsp;한반도 낙랑국과 하북성에 있던 낙랑군과 그 위에&nbsp;잇었던 고구려.


낙랑국 이후 한반도는 누구의 땅?

한반도는 낙랑국에 이어 AD 32년부터는 고구려의 영역이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것임에도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물이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둔갑된다.

대표적인 것이 풍납동 몽촌토성의 피라밋이 백제 근초고왕의 것이라고 하는 희한한 이론이다. 분명 풍납토성의 피라밋은 집안지역의 피라밋과 그 양식이 같고, 공주의 무녕왕릉과는 그 양식이 완연히 다르다. 어떻게 한 왕조에서 두 가지 무덤 양식을 쓸 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대부(大夫)라는 고구려의 관직명이 엄연히 적혀 있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유물은 전부 AD 450년 이전의 유물이고, 그 이후에는 고구려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즉 대략 450년 이전의 한반도 전체는 확실한 고구려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nbsp;&nbsp;풍납토성에 있는&nbsp;대형 피라밋. 식민사학계는&nbsp;이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nbsp;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이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 무덤양식이다. 사학계는&nbsp;왜 공주의 무녕왕릉과 그 양식이 다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같은&nbsp;나라에서 이렇듯 다른 무덤&nbsp;양식으로 왕릉을 조성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고구려 이후에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라의 유물로는 진흥왕순수비를 들 수 있다.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즉 지증왕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신라가 자립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24대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워 그 영역을 표시하며, 나중에는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nbsp;&nbsp;561년 세워진 창녕진흥왕순수비는 4개의 비 중 가장 남쪽에 있다. 그 서쪽엔 백제의 뭔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백제의 도읍지는 분명 산동성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의 담로 형태로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상으로 보아 분명 한반도에도 뭔가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 아마 그 시기는 AD 500년 전후로 동성대왕 ~ 무녕왕 사이가 아닌가 싶다.

그 근거로는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에서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지석이 발견되었고, 부여에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백제 사마왕능의 주인공이 무녕왕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황제가 죽을 때 쓰는 용어인 붕(崩)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정식 왕인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식 왕의 부부 합장묘로 보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왕릉 바로 옆에 다른 묘 2개가 붙어있고, 지석에 적혀있는 斯麻의‘麻’자가 정사의 기록인 ‘摩’자와 다르고, 사마라는 왕의 휘(이름)를 함부로 쓴 것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무녕왕은 대륙 동부를 호령하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는데 그런 왕의 무덤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만큼이나 위상이 강했던 백제왕의 무덤이 덕흥리 고분(주인공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보다도 작고 초라하니 이상한 일 아닌가?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글씨체도 너무 조잡하고 초라하다. 여하튼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은 아직도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nbsp;&nbsp;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의 지석.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 붕(崩)했다고 적혀있다.


백제 무녕왕릉에 대해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본으로 남긴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왕비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녕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녕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이 맞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nbsp; 부부합장된 백제의 본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백제사마왕릉


여하튼 의혹은 많으나 523년 붕(崩)한 백제 무녕왕의 능이 공주에 있고, 그 후 신라 진흥왕의 남쪽 순수비는 창녕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진흥왕 이전에 창녕 서쪽에는 백제가 분국이나 담로 형태로든 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후에 동신라가 만주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보아 확실치는 않으나 600년 경 한반도의 백제 담로는 소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25사에도 백제의 수도가 동.서 두 군데가 있었다고 했다. 해서 혹자는 동쪽 수도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나, 필자는 동쪽 수도라는 개념보다는 백제의 담로나 분국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백제의 동쪽 수도는 산동성, 서쪽 수도는 호남성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한반도에는 어느 나라가 있었는지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된다 하겠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는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행정력을 가진 국가로서의 형태는 구리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구리시대 (한웅, 신시시대) : B.C 3898 ~ B.C 2333

2. 조선 : B.C 2333 ~ B.C 238

3. 낙랑국 : B.C  238 ~ A.D  32

4. 고구려 : A.D   32 ~ A.D 500년 전후

5. 백제담로와 동신라 : A.D 500년 전후 ~ A.D 918년

6. 고려와 근세조선과 대한민국/북조선 : A.D 918 ~ 현재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수도는 다 대륙에 있었고 주 활동무대도 대륙이었지만, 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땅인 한반도에도 삼국이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다. 옛부터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이 거의 없는 평화지대로 말 그대로 소도(蘇塗)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와 한반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도사관을 믿으려고 하는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여! 이제는 역사에 대한 눈을 제대로 뜨고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인정하면 결국 북한 땅은 낙랑군 때문에 중국 땅이라는 이론적 결과가 나와 동북공정이 옳다고 인정하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현재 식민사학계가 지껄이고 있는 반도사관은 국가를 망칠 무서운 매국적인 이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망국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륙을 지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역사가 밝혀지는 날 이 땅에는 희망이라는 찬란한 빛이 도래할 것이다. 
 

▲&nbsp;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도. 최적관측지는 그 나라의 수도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는 787년 이후에 신라의 도읍이 들어선 것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7)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근구수왕 즉위 이후의 해외경략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 사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416-418쪽

 

 

(4)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이종호2008/03/17

 

 

(5)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3/200409230500060/200409230500060_6.html

 

 

(6)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4.01.27 

 

 

(7)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성훈. 2008/06/17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역사이슈]놀라운 '남제서(南齊書)'의 대륙백제 기록: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10/06

"백제는 중국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

그의 고향 '광서장족자치구'는 백제의 서부.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

성훈 칼럼니스트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 3부는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나뉘어 연재됩니다.
(3부)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
(4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20§ion=section78성훈  2008/05/19 

대륙의 동부를 호령한 해양대제국 백제를 밝히는 다른 기록들

 

 

 

 

대륙백제.. 한반도 '백제' 성씨가 없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7700§ion=section78§ion22007/11/03 [00:10]

백제의 8대 성씨는 어디로 갔는가.지금의 산동성을 중심으로 대만에...

 

 

 

 

[단독]"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http://www.pluskorea.net/63392007/09/08

▶ 전북 익산군(益山郡)은 중국 운남성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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