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인천 계양산성, 공주 수촌리고분, 세종 나성동유적, 전북 고창 봉덕리유적을 알아 봅니다. 인천 계양산성에서는 논어 구절이 적힌 목간, 목제, 원저단경호, 귀갑 등이 나왔고, 공주 수촌리고분에서는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대롱옥, 흑유닭모양항아리 등이 나왔습니다. 

 

전북 고창 봉덕리유적에서는 금동신발이 나왔는데요,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받는다고 합니다.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다. 기존 제품 중에도 凸자문과 능형문(마름모 무늬) 같은 단순 무늬에서 벗어나 거치문(톱니무늬), 화염문, 용문 등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즉 정(끌)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법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내부에 다채로운 문양을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6)

 

 

 

(26) 인천 계양산성

입력 : 2008.12.19 15:59
인천 | 이기환 선임기자

 

1600년전 백제인의 논어책을 엿보다

2005년 5월11일.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다. 계양산성은 풍납토성 발견(1997년)과 함께 이 교수가 눈여겨봤던 곳.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엔 바다와 강(江)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년)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 하구의 계양산성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체육시설이 있었던 이곳(집수정)은 골짜기였기 때문에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집수정이 있었던 게지. 겉으로 보기에 지름이 13m 정도 돼보였는데….”

조심스레 층위별로 흙과 돌을 걷어내며 바닥까지 발굴하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한성백제시대 ‘논어’ ”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집수정 밑바닥 모습. 목간과 목제, 원저단경호 등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유물이 나왔다. <선문대 고고연구소 제공>

 

“아 글쎄, 맨 밑바닥에서 이른바 연질에 가까운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밑이 둥글고 목이 짧은 항아리)가 보이지 않겠어요? 그걸 조심스레 다루고 있는데, 같은 바닥에서 목제(木製) 유물이 노출됐습니다.”

“집수정 맨 밑바닥에서 목제가 나왔으니 (이 교수가) 떨리기도 했겠네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럼요. 직감적으로 아! 묵서(墨書) 같은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과연 그랬다. 물을 적셔가며 붓질로 목제를 부드럽게 다듬으니 과연 희미한 글씨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목제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유물이 보였는데, 그것은 예부터 발해문명권에서 점복(占卜)에 쓰였던 거북이 등, 즉 귀갑(龜甲)이었다. 이 교수는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움직였다. 우선 사진을 찍고 실측을 한 다음 목제와 그 인근 흙층을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잘라 진공플라스틱에 밀폐시켰다. 그런 뒤 바로 당시 윤근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소장, 긴급 보존처리가 필요해. 가지고 내려갈 테니 좀 기다려요.”(이 교수)

막 발굴한 묵서가 새겨진 계양산성 목간과 귀갑을 태운 승용차는 그날 밤 자정을 넘어 새벽 2시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닿았다. 윤근일 소장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수와 윤 소장은 고교 선후배 사이(중동고).

“아이고! 선배님. 아무리 급해도 공문은 띄우셔야죠.”(윤근일)

“응급상황인데 무슨 절차야. 사람으로 치면 죽을 수도 있는데….”(이 교수)

하기야 그렇다.

“목간의 경우엔 발굴 때 시간이 지체되거나 초기대응을 잘못하면 묵서가 지워질 우려가 있어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얼마 후, 이 교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적외선 촬영결과 묵서가 확실하게 보인다”는 결과를 통보받고 급히 경주로 내려갔다. 목간은 잔존 길이 13.8㎝, 지름 1.87㎝ 정도였다.

“첫눈에 ‘자왈(子曰)’이라는 대목이 보였고, 논어의 유명한 글귀인 ‘오사지미능신(吾斯之未能信·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이 보였습니다. 아! 이 묵서는 바로 ‘논어(論語)’ 제5장 공야장(公冶長)’의 내용이었습니다.”

목제를 5면으로 깎아 만든 목주(木柱)에는 면마다 ‘논어·공야장’의 내용을 실었다.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공자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공자는 전과(前科)가 있던 공야장을 두고 “그에게는 죄가 없다”면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정도였다. 계양산성 출토 목간 1면에는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者斯焉取斯)’, 즉 공자가 자천(子賤)이라는 사람을 두고 “그 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겠는가?” 하고 되묻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2면은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즉 공자가 칠조개(제자)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자 칠조개가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3면은 ‘(孟武伯問~求也~)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 즉 “맹무백(노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구(求·공자의 제자인 염유)에 대해 묻자 ‘그가 인자한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고, 맹무백은 ‘그렇다면 적(赤·공자의 문하생)은 어떠냐’고 물었다”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4면과 5면에도 공야장의 문구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계양산성 출토 목간은 왜 중요한가. 우선 목간이 나온 문화층의 연대를 보자.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목간 옆에서 함께 출토된 이른바 원저단경호의 연대는 아무리 늦춰잡아도 4세기 말~5세기 초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 결정적인 자료는 AMS(가속기질량분석기) 연대측정 결과. 조사단은 목간과 함께 노출된 목제를 시료로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에 AMS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400년과 480년이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즉 이 유적은 4~5세기 때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자(子)’의 경우, 계양산성 출토 글자(1-1)는 AD 256년의 서진 비유경(1-2)과, 408년 고구려 덕흥리고분 묵서(1-3)와 흡사하다. 가로획법을 보면 셋다 처음에 뾰족하게 시작해서 굵게 마무리지었다. 이 가로획법은 계양산성 목간의 ‘오(吾·4-1)’와, 서진(西晉) 둔황 장경동 문서의 ‘길(吉·4-2)’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지(之)’자의 경우 계양산성 목간(2-1)은 오른쪽 삐침이 꺾이지 않고 그대로 흐른다는 점에서 AD 325~334년 글씨인 우파색계경(2-2)의 ‘之’와 같다. ‘능(能)’ 역시 마찬가지다. 계양산성 목간(3-1)과 동진(東晉)시대 대반열경(3-2)이 비슷한데, 글자 가운데 달 月자의 왼쪽 끝 삐침이 꺾여 있다. 계양산성 목간의 ‘인(仁·5-1)’자와 서진시대 둔황문서에 나오는 ‘하(何·5-2)’자도 마찬가지다. 두 글자의 변의 모습이 비슷한데 이는 이른바 팔분법의 잔영이 남아있는 과도기적인 필법이다.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제공>

1 - 1, 1 - 2, 1 - 3(위 왼쪽부터). 2 - 1, 2 - 2, 3 - 1(두번째 왼쪽부터). 3 - 2, 4 - 1, 4 - 2(세번째 왼쪽부터). 5 - 1, 5 - 2(왼쪽부터).

 

“목간의 제작연대는 4~5세기”

목간을 직접 보고 분석한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의 해석은 더욱 명쾌하다.

“3~4세기 위진(魏晉) 시기에는 불경을 많이 필사(寫經)했는데요. 이 목간의 서체는 ‘둔황문서(敦煌文書)’나 ‘러우란(樓蘭)잔지(殘紙)’에서 사용된 4~5세기 사경체(寫經體)와 관련이 깊어요. 이런 사경체는 해서(楷書)가 정착되기 이전의 필획법입니다. 즉, 이른바 팔분(八分)의 필법과 서진(西晉·265~316년)과 동진(東晉·316~420년) 사경의 해서필법입니다.”

즉, 글씨체는 해서(楷書)지만 아직 완전하게 해서의 필법을 갖추지 못한 과도기의 서체라는 것이다.(서체 설명 참조)

“계양산성 출토 목간의 자(子)자를 보면 아직 팔분법이 남아 있어서 왼쪽갈고리법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필법은 아직 해서가 정립되지 못한 ‘서진(西晉) 비유경(臂喩經·256년)’과 ‘고구려 안악 3호분 묵서명(357년)’,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408년)’ 등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뿐인가. 자(子)자의 가로획법을 보면 처음에 뾰족하게 시작해서 굵게 마무리하는 필법을 보여주는데 이것 역시 계양산성 묵서와 앞에 예를 든 묵서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之)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양산성 목간을 보면 아직 오른쪽 삐침이 해서법을 갖추지 못했는데, 이것은 325~334년으로 편년되는 ‘우파색계경(優婆塞戒經·중국역사박물관 소장)’의 예와 같습니다.”

“그리고 인(仁)자의 경우에도 ‘ 변의 필법에서 팔분법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요. 이것은 ‘서진의 둔황문서(마하반야바라밀타경권 제14)’의 경우도 같습니다.”(손환일 교수)

가장 특징적인 유사점을 찾자면 계양산성 묵서의 가로획법이 중국 4~5세기 때 사경체는 물론 고구려의 벽화명문에 나타난 필법과 같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계양산성 출토목간의 제작연대는 늦어도 4세기 중반~5세기 초라는 뜻입니다.”

“목간 들고 다니며 논어공부한 한성백제인”

결국 400~480년대 계양산성 논어 목간은 우리나라 유교사와 한문학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는 게 손환일 교수의 해석이다. 한자도입과 유교 수용을 입증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자료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 이미 372년 태학(太學)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유교경전으로 가르쳤습니다. 백제는 이미 6세기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보냈잖아요.”

양(梁)나라(502~587년) 소자현(蕭子顯)이 편찬한 <남제서·동남이전·고구려전>을 보면 “고려는~오경을 읽을 줄 안다”는 내용이 있다. 오경은 알다시피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유가의 경전이다. 백제는 어떤가. <삼국사기·백제본기·근구수왕조>를 보면 그 유명한 고구려와의 평양전투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근구수왕 원년(375년), 태자(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가 계속 진군하려 하자, 막고해(莫古解) 장군이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만류한다.”

이미 백제가 4세기 후반 전쟁을 벌이면서 노자의 <도덕경>까지 인용하며 전략에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됐는데, 유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이다.

“풍납토성에서는 이미 각종 중국제 시유도기와 청자류가 몇 트럭 분이 출토됐는데, 중국과의 인적·물자교류만 하고, 인류가 가장 중요시하는 사상·철학·역사·문화자료 등 지적 성과물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지요.”(이형구 교수)

목간을 통해 당대 한성백제인들의 삶을 추정해보자.

“요즘 기독교인들이 작은 성경책을 손에 들고 다니잖아요. 조선시대엔 이런 용도의 서책을 수진본(袖珍本)이라 해서 늘 도포의 소맷자락에 넣고 다니며 암송했고…. 당대 백제인들도 이 논어목간을 들고 다니며 암송하면서 인생의 좌표로 삼았겠지요. 한마디로 ‘수진본 목간’이라 할 수 있어요.”(이 교수)

조유전 관장은 기자에게 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계양산성이 백제가 쌓은 석성(石城)이라면 굉장한 고고학적인 성과예요. 사료를 보면 백제가 돌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그동안 논란이 계속됐거든. 즉 백제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처럼 토성만 쌓았지, 석성을 쌓을 줄은 몰랐다는 주장이 강력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져왔어요.”

“백제는 석성을 쌓았다”

백제는 과연 석성을 쌓지 못했을까.

“충주 장미산성의 경우,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유물이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성백제 석성입니다. 신라도성인 경주 월성과 고려 도성인 개경도 풍납·몽촌토성 같은 토성입니다.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도성의 경우도 토축이 전체의 68%를 차지해요. 결국 축조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축성재료를 찾았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축성 담당자가 석재를 구하려고 선대의 능묘와 고총(古塚)의 돌을 파냈다가 귀양 간 일도 있었어요.”(심정보 한밭대 교수)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도 “풍납토성의 경우도 토성이지만 성벽의 내벽을 마감할 때 1.5m의 두께로 석축으로 마감했고, 외벽의 토루 가장 윗부분도 돌을 깔아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했다”고 밝힌다. 백제가 기술이 없어 석성을 쌓지 않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동안 ‘백제=석성축조설’을 부인했던 권오영 한신대교수도 “최근 발굴된 화성 소근산성과 청명산성, 의왕 모락산성, 파주 월롱산성 등에서는 신라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는 한성백제 석성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쏟아져 나오는 고고학 발굴자료에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제산성과 관련된 논쟁은 남아 있는데, 이번 기회에 끝장 토론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하나, 목간과 관련해서도 연구자들이 목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또는 발굴보고서의 내용과 AMS 연대측정값도 믿지 않고 자기주장만 펼친다는데 이 또한 옳은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조유전 관장)(1)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금빛 봉황이 날아오를 듯…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의 자태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3월 8일 18시 38분 
 

<28> 공주 수촌리 고분 발굴

수촌리 4호 석실분 출토 금동관으로 높이는 19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한 마리 ‘금빛 봉황’을 보았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수촌리 고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또 다른 아취를 담고 있었다. 온몸에 달개를 매단 세 줄기 입식(立飾)은 정면에서 보면 꼿꼿이 세운 봉황 머리와 양옆으로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신라 금관의 입식과 확연히 다른 형태다. 특히 머리에 닿는 관테까지 날렵하게 이어진 곡선은 우아함을 더한다. 수촌리 고분에서 함께 나온 금동신발과 금귀고리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장신구 연구 권위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수촌리 금귀고리는 현미경으로 200배를 확대해 봐도 만듦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며 “백제 왕실에 소속된 최고 장인의 솜씨”라고 말했다. 그러나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수촌리는 백제 영토였지만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 1급 유물들이 왜 한성이 아닌 이곳에 묻혀 있을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2003∼2013년 수촌리를 발굴한 이훈 당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단장(55·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현장을 찾았다.

○ 묘제(墓制) 세 번이나 바뀐 사연

충남 공주시 수촌리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자 정상에 봉분 6기가 원형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로도 고분 10여 기가 늘어서 있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제단(祭壇)을 이루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중 나란히 조성된 무덤 세 쌍은 부부 관계임이 확인됐다.
 
수촌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과 대롱옥. 구슬 지름은 0.2-1.05cm 정도 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한쪽 무덤에서 남성 수장이 죽을 때 몸에 씌우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이 나온 반면 다른 쪽에서는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등이 나온 것. 이훈은 “수촌리는 4세기 말∼5세기 중엽까지 약 60년에 걸쳐 4세대가 묻힌 지방 지배층의 가족묘”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건 무덤들이 조성된 양식이 빠르게 변한 흔적이다. 시대순에 따라 덧널무덤(토광목곽묘)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모두 발견됐다. 유물로 보면 분명 같은 집단인데 불과 60년 동안 묘제가 세 번이나 바뀐 셈이다.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흑유닭모양항아리. 당시로선 최고급품에 속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훈은 “수촌리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교류하면서 돌무덤을 들여온 것”이라며 “최고 수준의 금동관, 금동신발, 중국 자기들이 부장된 걸 보면 이들이 백제 왕실과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배경일 수도 있다. 학계는 4∼5세기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금동관 등을 사여한 걸로 보고 있다.
 
이훈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6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수촌리 고분 금동관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 금동관이 이 연구위원이 4호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앞쪽은 원형을 복원한 복제품이다. 공주=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1600년간 제자리 지킨 목관 꺾쇠·관못

수촌리 1호분 토광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높이는 약 18.7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다. 이훈은 직접 만든 대나무칼로 푸르스름한 청동녹이 낀 금동관을 조금씩 땅 위에 노출시켰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바깥 공기에 취약한 청동유물 특성상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흙과 함께 통째로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길이 35cm의 재갈.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말을 탈 때 쓰는 등자로 길이 25.0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쇠창으로 길이는 29.2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도 화려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더 중요했던 건 조성 당시 위치를 간직한 목관 꺾쇠와 관못이었다. 발굴팀은 3열에 걸쳐 목관을 두른 총 90여 개의 꺾쇠를 지표 20cm 아래서 찾아냈다. 통상 오랜 세월이 흘러 목관이 썩으면 물이 흘러들어가 꺾쇠나 관못의 위치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1호분은 물 대신 모래흙이 목관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부속품이 고정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발굴팀은 백제 지방 지배층이 사용한 목관의 형태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 내세에도 다시 만나리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첫번째 사진), 금동관(두번쨰 사진)과 대롱옥. 부부가 묻힌 4호분과 5호분에 각각 부장된 대롱옥을 맞춰보니 아귀가 딱 맞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야, 이게 정말로 딱 붙습니다!”

2004년 7월 발굴팀에서 사진을 담당한 이형주 연구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수촌리 고분 출토 유물들을 늘어놓고 촬영하던 이형주가 4호분과 5호분에서 각각 나온 대롱옥(관옥) 2점을 우연히 맞춰봤는데 거짓말처럼 아귀가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대롱옥을 두 개로 부러뜨린 뒤 남편과 아내 무덤에 각각 부장한 것이었다. 생전에 금실 좋던 부부가 내세에 가서도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쪼갠 게 아닐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떠올리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때론 소설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2)
 
 
 
 

(3)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 공주 수촌리 고분(上)

 

금동관·금동신발 … 백제인의 삶이 쏟아지다

2003년 12월2일 아침. “빨리 와달라”는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의 급보를 받은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은 서둘러 행장을 꾸려 공주 수촌리로 떴다.

금동신발과 금동관, 환두대도가 쏟아진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의 현장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전화는 받았지만 내심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에 도착했어요. 구제발굴이라는 점도 그랬고, 또한 도굴 무덤에서 그저 청동유물 정도나 나왔겠거니 했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현장은 충청남도가 농공단지 조성을 위해 그에 앞서 사전조사를 벌이던 곳이다. 이른바 구제발굴을 벌이던 곳인 것이다. 과연 현장은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다.

“전망은 확 트였지만 잣나무 숲과 풀이 무성해서 고분이 존재할 만한 환경으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현장을 보니 막 모습을 드러낸 금동신발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겠어요? 아! 큰 일이 터졌구나.”

 

■ 금동유물 품고 있던 백제 무덤 6기

37년 전의 일이 번개처럼 조유전의 뇌리를 스쳤다. 무령왕릉 발굴의 교훈. 흥분에 빠져 단 하루 만에 쓱싹 발굴을 해치워버린 바로 그 쓰라린 기억이었다. 그래 흥분은 금물이다. ‘내 손으로 큰 발굴을 했다’는 흥분에 사로잡히면 평정심을 잃게 되고, 그것은 도굴이나 다를 바 없는 졸속 발굴로 이어진다. 바로 1971년 무령왕릉 발굴처럼….

“자, 시간이 필요해. 절대 서두르지 말 것. 차근차근…. 언론에 먼저 보도되면 큰 혼란에 빠진다(무령왕릉 발굴 때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언론의 취재경쟁으로 발굴현장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보존대책을 미리 세워야 할 것이야.”

조유전은 이훈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12월4일자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터졌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300평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구릉 한쪽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남짓 지난 2008년 6월 어느 날. 조유전 관장과 이훈, 그리고 기자가 수촌리 현장을 찾았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왔다.

 

■ 각광 받지 못한 청동세트

“야, 전망이 좋네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훈씨(오른쪽)가 조유전 관장에게 말끔히 정비된 수촌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적으로 지정된 현장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봉분까지 복원해놓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현장은 동편 뒤로는 산을 등졌고, 서편 앞쪽으로는 드넓은 정안뜰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확 트였으니 말이다.

“옛날에는 홍수가 나면 저 정안뜰까지 물이 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수촌리(水村里)라고 했다네요.”(이훈)

세 사람은 발굴 당시의 기억 속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땐 여기보다는 저쪽에서 청동검(한국형 세형동검), 청동꺾창(靑銅戈)과 청동창(靑銅矛·끝을 뾰족하게 하여 찌르는 창의 일종), 청동도끼, 청동 조각도 등 청동기 세트가 한꺼번에 먼저 출토됐잖아? 이런 청동기 세트가 한자리에 출토된 것도 획기적인데….”(조유전)

“그랬죠. 실은 우리가 이 중요한 청동기 세트를 발견하고 나서 ‘어떻게 언론에 터뜨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에 여기서 더 엄청난 대형발굴이 터진 겁니다.”(이훈)

“그러니 청동기 세트는 운이 없는 거네요.”(기자)

“그것도 팔자지 뭐. 허허.”(조유전)

이게 무슨 말인고? 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03년 9월 이훈이 소속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조사팀은 의당 농공단지 조성의 사전단계로 문화재조사를 벌이게 되었다. 이훈은 발굴대상을 1지역(1000평), 2지역(300평)으로 나누었고, 먼저 1지역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10월20일. 1지역에서 뜻밖의 유물이 터졌다. 아까 언급한 청동세트가 확인된 것이다. 이훈은 마음이 급했다. 매우 중요한 유물세트이니만큼 언론에 공개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미 1지역에서 좋은 유물이 나온 터여서 2지역 조사는 서둘러 끝내려 했어요. 사실 2지역은 지형 자체는 좋은 편도 아니었고, 개인소유 땅이었어요. 조경수를 심느라 땅을 파내기를 수 십 년 간 해왔던 터라 유적이 있어도 훼손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충남의 담당 공무원은 조바심을 냈다. “(2지역에서) 중요한 유물이 나오면 농공단지 조성은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니냐. 그냥 조사없이 끝내면 안되냐”고 걱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인데, 조사단은 오히려 “별 것 없을 것이니 빨리 (조사를) 마무리 짓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다. 조사단은 발굴조사에 앞서 통과의례처럼 지내는 개토제(開土祭·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도 ‘별것 없겠거니’하고 생략했다.

 

■ 아! 금동신발, 어! 금동관

1호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금동신발.

 

그러던 11월3일. 연구실에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이훈에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2지역, 즉 수촌리 현장에서 발굴을 담당하던 이창호 연구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부장님(당시 이훈의 직책). 지금 1호 토광묘에서 이상한 것이 잡혔어요. 금동관 하고, 환두대도(둥근 고리 칼)가 나왔어요.”

“금동관?”

머리가 띵 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며칠 전 본 청동기 세트도 처음인데, 이번엔 금동관이라니. 급거 현장으로 달려간 이훈의 앞에 희미한 금동관 같은 범상치 않은 흔적과 환두대도가 보였다.

“제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각인된 신라금관의 T자형 형태였어요. 이 금동관은 환두대도의 칼날 끝부분 바로 아래 놓여있었고…. 일단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내일(4일) 다시 정밀하게 조사하자고 하고 돌아왔어요”

이훈은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낮에 보았던 1호 무덤의 장면이 파노마라처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머리에 쓰는 금동관이 환두대도의 칼 끝에 있을까. 칼이 거꾸로 놓였단 말인가. 순간 이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왜 금동관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금동신발…. 맞다. 금동신발이다.’

백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 즉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최상격의 유물이 아닌가. 다음날 이훈은 이 무덤에 ‘요주의’란 딱지를 붙인 뒤 맨 마지막으로 돌려버렸다. 보통 중요한 무덤이 아니므로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 조사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5기의 무덤을 먼저 조사하기로 결정내렸다. 먼저 조사하기 쉬운 석실분(3호)부터….

그러나 절대 쉬운 조사는 없었다.

“아! 여기서도 또 한 켤레의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항아리 등이 줄줄이 엮여 나오잖아요.”

조사단의 눈과 귀가 다 멎었다.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 다음엔 4호 무덤. 여기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금동고리칼, 금동허리띠 등 지역의 수장층이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필수품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색다른 유물이 걸렸다.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등자, 재갈, 그리고 계수호(鷄首壺·닭머리 달린 항아리) 등 도자기들이 쏟아졌어요. 6기의 무덤 가운데 최고의 부장품을 자랑하고 있었죠. 흙 속에서 검은색 닭머리(계수호)가 삐죽 삐져 나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가장 중요한 무덤이라 여겨 뒤로 미뤘던 1호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와 비슷한 청자유개사이호(뚜껑 있는 귀 네개 달린 항아리) 등 중요 유물이 더 나왔다.

“누구도 접해보지 못한 유물들이라 제가 직접 대나무 칼을 들고는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그야말로 신주 모시듯 유물의 노출을 시도했어요. 금빛 유물들이 터지면서 저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책임자가 흥분할 수는 없었고…. ‘릴렉스 릴렉스’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차분하게 작업에 임했습니다.”

 

■ 속내까지 다 연 백제사람들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 세트. 2지점에서 쏟아진 금동제 유물 때문에 각광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심상치 않은 일 하나. 3호 무덤에서 금동신발이 나올 무렵, 갑자기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때서야 느낌이 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무덤을 파헤치면서 제사조차 지내지 않은 ‘싸가지 없는 후손들’이 아닌가.

“아! 우리가 너무 이 분들(무덤의 주인공들)을 우습게 보았구나.”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 위령제를 지냈다. 다음 날 어르신들의 화가 풀렸다.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개었고, 포근해졌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있어서인가요? 백제인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문을 열어주면 속내까지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바로 이 수촌리의 주인공들처럼….”

다시 2008년 6월 어느 날. 기자가 “수촌리와 관련된 자료 좀 달라”고 하니 이훈이 몇가지 자료를 건네준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반성문이다. 무슨 반성문? 발굴 때의 실수담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구원 한 명이 새파랗게 질려 달려왔습니다. 부장님, 어쩌면 좋죠? 하고. 사연인즉슨 2호분에 흩어져 있던 구슬들에 대한 보존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바닥에 널려있는 구슬의 배치를 살펴서 머리장식과 목걸이 형태를 알아보려면 바닥면까지 한꺼번에 우레탄폼으로 굳혀 통째로 들어낸 뒤 보존처리실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 올리다가 그만 바닥에 구슬을 쏟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물론 미리 평면실측도 했고, 사진촬영까지 마친 뒤라 보고서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지만 더욱 정밀한 사후조사로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실수로 묻혀버린 것이었다. 이훈은 그것을 자책하는 것이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해서 다시 1971년 무령왕릉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하룻밤 졸속 발굴로 수많은 정보가 묻혀버렸던 그 때의 몸서리쳐지는 일이….

“발굴자는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거라. 잘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야. 실수를 몰래 덮어 버리면 남 몰래 넘어갈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지. 발굴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해.”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렇게 공개하는 후학의 용기가 가상한 모양이다. 하기야 발굴자가 이렇게 후일담으로나마 실수를 인정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AD 4~AD 5세기, 한성백제국 수촌리 마을로 돌아가보자. 당시 이 땅에 묻힌 무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으로….(3)

 

 

 

(4)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공주 수촌리 고분 (下)

 

‘한 가문의 무덤’ 세대별 묘제 다르다

“제 사촌형수가 여기(수촌리) 살았는데 예전에 저기 보이는 학교(수촌초교)를 조성할 때 ‘왕의 칼’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대요.”(이훈)

왕의 칼이라 하면 환두대도(둥근고리칼)를 뜻하는 것이리라.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은 수촌리 현장 바로 곁에 있는 수촌초교를 지목하며 떠도는 이야기를 전한다.

고고학자의 야장(野帳·조사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노트). 2003년 11월27일과 12월2일 수촌리 1, 2, 4호를 조사한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창호 연구원의 야장이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수촌리 현장과 학교 사이에 있는 무성한 풀숲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본다.

“저 풀숲에도 무언가 있을 가능성이 있네.”(조 관장)

“예, 이곳부터 저 학교까지의 사이에 아마도 고분군이 있었을 겁니다. 저 풀숲을 발굴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발굴자인 이훈은 그러면서 수촌리 고분이 AD 4~5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가족묘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 유구와 유물의 양상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조 관장)

5세기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부모님의 묘를 선산에 조성했다고 치면 1~2호분은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묘이고, 3호분은 할아버지, 4~5호묘는 부모묘인 것이다.

“할아버지 묘(3호분)는 있는데, 할머니 묘가 없는 게 이상하네요.”(기자)

“아니지, 어딘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게지.”(조 관장)

“아마도 3호분 곁 어디엔가 있는데, 우리가 조사하지 못한 거죠.”(이훈)

 

■ 애틋한 부부의 정표

이훈은 왜 가족묘라고 단정을 내릴까.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2004년 여름 어느 날, 나른한 오후였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데, 이형주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잠이 확 달아났다.

“부장님, 이 두 개가 붙어요.”

이 무슨 소린가? 안경너머로 보니 이형주 연구원이 자색 관옥 2점을 들고 있었다. 4호분과 5호분에서 한 점씩 출토된 것이었다.

그런데 출토유물을 정리하다가 유물의 형태가 비슷한 것 같아 서로 맞춰보니 딱 맞는 게 아닌가. “그래, 부부묘다”라고 외치며 뛰어온 것이었다.

“아, 부절(符節, 돌·대나무·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이다. 살아생전 부부의 도타운 정을 죽어서도 간직하고픈 것이었겠지.”(이훈)

아니면 먼저 간 사랑하는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으리라.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라고…. 죽은 뒤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려면…. 결국 4~5호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담고 있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고고학의 묘미다. 바로 묘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수촌리 유적은 한 집안의 무덤들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일정한 시차를 둔 다양한 묘제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틱해. 하나의 고분군에서 이렇게 시기별로 나타난 것은 드물지.”(조 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과 돌무덤의 차이.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들, 즉 마한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土鑛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돌무덤이 전파되었다. 돌무덤은 발해연안에서 선진문물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후예, 즉 백제인이 BC 18년 남하하면서 가져온 고급 묘제이다. 그런데 이 수촌리 1~2호분의 주인공은 마한의 전통이 남은 토광목곽묘를 썼다. 반면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앞트기식 돌방무덤),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이다.

토광목곽묘는 위에서 구덩이를 판 뒤 목곽을 짜맞춰 놓고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묘제인데, 1~2호분은 목곽 안에 목관을 조성했다. 3호묘인 횡구식석곽묘는 돌방무덤을 만든 뒤 앞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4~5호묘인 횡혈식석실분은 무덤 앞에 안팎으로 통하는 무덤길(연도)을 만든 뒤 무덤방, 즉 돌방무덤을 조성했다.

 

■ 수촌리 가문

“고대 묘제는 토광목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실분의 순서로 발전합니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지체높은 분들이었으니까 첨단 묘제를 쓰기 시작했겠죠.”(이훈)

1~2호(토광목곽묘)는 AD 380~390년, 3호(횡구식석곽묘)는 AD 400~410년, 4~5호(횡혈식석실분)는 AD 420~440년으로 추정된다. 즉, 5세기 중반에 살았던 수촌리 어떤 가문의 증조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수촌리 2지점과 붙어있는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세트를 떠올려보자.

“이 수촌리 가문은 청동기 시대(BC 4세기)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청동기시대 수장(首將)이 지니고 있었을 청동기세트를 땅에 묻은 집안의 후예가 마한의 지배세력으로 이어졌을 겁니다.”(이훈)

자, 시계를 기원 전후로 되돌려보자. 이복형인 고구려 유리(주몽의 적자)의 핍박에 밀려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 온조왕은 마한의 도움으로 위례성에 도읍을 세웠다(BC 18년). 이 무렵 한반도 서남부에는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왕(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년)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마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한이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면서 그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에서 또 한마디 지적한다.

“생각해봅시다. 온조왕이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마한의 전통이 쉽게 사라질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려고 마한인들을 북돋는 정책을 펼쳤을 겁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이렇듯 명백하게 나온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훈도 두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즉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AD 16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다.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서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겠지.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거야. 간접지배라는 뜻이지. 백제 중앙정부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환두대도 같은 예기(위세품)를 하사했을 테지.”(조 관장)

특히 강정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연구팀장은 “AD 4세기말~5세기초로 편년되는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하사품들은 AD 392년 광개토대왕의 남침 등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 한성백제왕이 하사한 왕·후 작위

이훈은 특히 송서 백제전 및 남제사 백제전에 등장하는 왕·후제에 주목한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후(侯)제를 두었습니다.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는데, 수촌리 가문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마한의 후예, 즉 공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귀족에게 금동관과 금동신발 같은 최상급의 하사품을 주지 않았을까요?”(이훈)

또 하나, 수촌리 가문 계보의 출자에 대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어요.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더 자세히 묻는다면? 그 가문의 성씨는?

“이 가문의 성(姓)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백가(加)입니다. 웅진세력이 기반인 백가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새로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수촌리 고분 가문과 백씨 가문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노중국 교수)

이렇게 보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BC 4세기부터 공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배계급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후에 마한 54개국 중 감해비리국의 수장으로 이어지며, 훗날 한성백제의 지방 혹은 중앙귀족이 된 뼈대있는 ‘백씨’ 가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지금까지 고고학 발굴 성과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엮어본 그럴듯한 추정일 뿐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역사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요.”(이훈)

이것은 무슨 말인고? 지금까지는 몇 안되는 고고학 발굴 성과를 갖고 일부 학자들이 우리 고대사를 멋대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최근 10여년간 특히 백제사와 관련된 고고학 성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면서 기존 학자들의 학설이 ‘거짓말’로 판명되기 일쑤다.

여기서 조유전 관장의 한마디는 경청할 만하다.

“며칠 전 풍납토성에서 쏟아진 수많은 토기들을 보라고. 수촌리 고분이 조성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토기들이 중앙, 그러니까 풍납토성으로 운반되잖아. 기원 전후부터 활발했던 국제교역의 증거들은 또 어떻고. 쾌도난마로 학설을 독점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시해왔던 학자들이 지금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제발 섣부른 단정을 내리는 어리석은 고고학자가 되지 말라’는 노학자의 충언이다.(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600년 전에도 호수공원이…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찾았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11월 30일 10시 33분 

 

<21> 세종시 나성동 유적 발굴한 이홍종 고려대 교수

24일 세종시 나성동에서 이홍종 고려대 교수가 백제 도시유적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5세기 백제 도시의 기반이었던 금강이 보인다. 세종=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600년 전에 거대한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8)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1.5m 깊이의 호수는 최대 너비 70m, 길이 300m에 이르렀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꼴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고지형 분석 결과 나성리 도시유적 내 토성을 둘러싼 옛 물길과 금강, 제천이 일종의 해자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홍종 교수 제공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그는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걸로 봤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에게 “유기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 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홍종은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24일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 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상가건물들이 대거 들어선 가운데 도시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발굴된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 도로, 빙고(氷庫) 등 도시 기반시설 즐비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수도 이외 지역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성리 유적이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설치한 뒤 건물을 지은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가마터, 빙고,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유력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충남대 교수)은 나성리가 풍납토성의 구조와 흡사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건설을 주도한 걸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반면 이홍종은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유력층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는 임영진(전남대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 중앙정부에 점차 복속됐으나, 일정 기간 지방 수장들이 반(半)자치를 누렸다는 것이다.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백제 토기. 이홍종 교수 제공
 
○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유적 찾아내

 사실 나성리 도시유적의 존재는 발굴 5년 전인 2005년 9월 고지형 분석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 옛 지형을 추정해 지하에 묻힌 유적 양상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연사된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주거지 유적의 존재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 도시유적이 묻혀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재밌는 건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가 구하도와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5)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2021. 5. 4. 05:01
 
2009년 9월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을 조사중이던 발굴단이 1호분 정상부에서 도굴의 화를 피한 구덩식 돌방무덤을 확인했다. 돌 틈 사이로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보자 한줄기 빛이 반사된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1550년전 무덤주인공의 발에 신긴 금동신발이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전북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시대의 금동신발. 5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최고의 ‘명품 구두’라 할만큼 빼어난 문양과 제작기법을 뽐내고 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물론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다. 기존 제품 중에도 凸자문과 능형문(마름모 무늬) 같은 단순 무늬에서 벗어나 거치문(톱니무늬), 화염문, 용문 등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즉 정(끌)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법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내부에 다채로운 문양을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 백제와 신라를 통틀어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명품으로 꼽힌다. ①전남 고흥 길두리 금동신발 ②충남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비 금동신발 ③무령왕 금동신발 ④ 공주 수촌리 1호분 금동신발 ⑤ 익산 입점리 금동신발 ⑥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중국을 괴롭힌 전성기 백제

도굴되지 않은채 현현한 이 고분에는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고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금동신발과 같은 유물을 백제 중앙정부가 봉덕리 근방을 다스리던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룬 나라는 백제이다. 특히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태자(근구수왕·375~384)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파하고(369년)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깃발을 휘날리며 대대적인 열병식을 열었다. 2년 뒤(371년)에는 급기야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원정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331~371)까지 죽였다. <송서>와 <양직공도> 등 중국 사서에 ‘요서경략’ 기사가 등장하고 <양서>에는 “요서에 근거를 둔 백제가 근구수왕, 전지왕(405~420), 비유왕(427~455)이 백성을 파견했다”는 대목까지 보인다.

이 기록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혔다”(<삼국사기>)는 편지를 보냈다. 백제가 중국을 괴롭힐만큼 강성했다는 얘기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왼쪽 사진은 중국 지린성(吉林省)지안(集安)의 고구려 고분인 마선묘구(麻線墓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일본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에서 확인된 금동신발(오른쪽 사진).|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오른쪽 사진). 5세기 말~6세기 초 조성된 경주 식리총은 귀족무덤으로 추정된다. 제작기법과 문양 등을 미뤄볼 때 식리총 금동신발은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덕리 고분 출토품과 흡사하다. 신라에서도 백제산 금동신발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봉덕리 고분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사진 오른쪽)와 중국제 청자(왼쪽)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4~5세기 중국 남조에서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봉덕리 1호분 4호석실에서는 장식대도와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장신구’와 ‘청동잔탁(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6)

 

 

 

 

<주>

 

 

(1)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70308/83217619/1

 

 

(2) https://www.khan.co.kr/article/200807041734595

 

 

(3) https://www.khan.co.kr/article/200807111728345

 

 

(4)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61130/81589702/1

 

 

(5) https://www.khan.co.kr/article/200812191559075 

 

(6)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1. 5. 4.

 

 

 

<참고자료>

 

 

 


백제로 이어졌던 베트남 바닷길 유적서 1600년 전 힌두사원터 나왔다 (hani.co.kr)(daum.net)2024. 1. 12. 

 

 

 

"봉덕고분 마한~백제 무덤양식"…고창군 7일 고분발굴 현장 설명회 (daum.net)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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