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공부할 때 나오는 검이 있다.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인데, 청동기 시대 전기의 검이 비파형동검이라면 후기의 검은 세형동검이다. 세형(細形)은 말 그대로 '가는 모양'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에 견주어 가는 동검을 말한다. 비파형동검은 그 생김새부터 참 특이하다. 도무지 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걸로 무얼 베거나 찌르기도 힘들 것 같다. 학자들은 이 검을 악기 비파를 닮았다고 해서 '비파형동검'이라 한다. 하지만 비파와 견주어 봐도 전혀 닮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청동기인들은 이 검을 이렇게 일컫지 않았을 것이다. 
 
▲ 경북 영덕시 장륙사 대웅전 벽화 주악천녀(奏樂天女)가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당비파는 넉 줄 현에 목이 뒤로 굽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 여자가 왼손(이 천녀는 왼손잡이다)에 달목(撥木 튀길발·나무목)을 쥐고 연주하고 있다. 발목은 술대인데, 상아나 물소뿔로 만든다. 발목은 원래 이렇게 쥐지 않는데 그것을 잘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 같다. 얼굴은 여자이지만 허리가 잘록하지 않고, 몸이 남성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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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식동검'에서 '비파형동검'으로

비파형동검은 중국 동북 지역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고 지금까지 한 60점 남짓 나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고 주로 중국 랴오닝성에서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 고고학자들은 '요령식(遼寧式)동검'이라 이름을 붙였다. 물론 지금도 이렇게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컬으면 이 동검이 마치 중국의 청동 기술로 만든 검 같은 느낌을 준다. 더구나 청동기 시대 랴오닝 지방은 고조선 땅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주로 '비파형동검'이라 하고 있다.
 
▲ 청동기 시대 무덤에서 나온 껴묻거리 충남 부여 초촌면 송국리 유적에서 나옴. 맨 왼쪽에 있는 것이 비파형동검이고 그 오른쪽에 돌화살촉과 돌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는 ‘굽은옥’(용의 원시 형상)과 옥으로 만든 원통 모양 치레거리다. 이 치레거레를 줄에 꿰면 목걸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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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검

비파형동검은 중국식 동검과 달리 칼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다. 칼 손잡이를 청동이나 나무로 따로 만들어 슴베(손잡이를 연결하는 부분)에 조립한다. 그런데 슴베 길이가 고작 2~3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이렇게 작은 슴베에 칼 손잡이를 제아무리 잘 만들어 조립한다 해도 무기가 될 수는 없다. 또 칼날 모양도 전쟁터에서 적을 찌르거나 벨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체 길이 또한 30~4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전쟁 무기로 쓰기에는 힘들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우리나라 비파형동검은 무기로 썼다기보다는 제사장(군장 또는 권력자)의 막강한 힘을 내보이는 상징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형동검 또한 조립식 검이고 슴베와 칼날 길이도 비파형동검과 비슷해 무기로써의 기능보다는 제사장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검이었거나 종교 의식을 치를 때 쓴 검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중국식 동검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에서 나옴. ‘도씨검(桃氏劍)’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국의 고대 과학책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편에 있는 구절 ‘도씨위검(桃氏爲劍)’에서 왔다. 이 검은 춘춘 시대 전기(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후한 때까지 쓴 검으로, 칼 몸과 손잡이가 하나로 되어 있어 한 손으로 쥐고 싸우기에 아주 편하게 되어 있다. 이런 중국식 검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슷하게 만든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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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동검, 물방울동검, 불꽃동검, 새싹동검

초등학생들에게 비파형동검 사진을 보여주고, 만약 자신이 역사학자라면 이 동검 이름을 무엇으로 짓고 싶은지 써 보라 했다. 김민서(광주 일곡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역사학자라면 '깃털동검'이라 이름을 지을 것이다. 이유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새를 '신의 사자'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 새의 깃털 모양을 본떠 이 동검을 만들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민서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청동기 시대 유물에는 새 문양이 많고, 그것은 이 유물의 주인이 신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세형동검 슴베 바로 위에 새 문양이 새겨져 있다.

 
▲ 세형동검의 날아가는 새 슴베 바로 위를 보면 날개를 살짝 접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새를 볼 수 있다. 새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검의 주인은 틀림없이 신의 사자인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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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어린이는 '물방울동검'이라 했다. 물방울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린 화면으로 보면 이렇게 보인다고 한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니, 청동기인 가운데 눈이 아주 밝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니냐고 한다. 이 어린이 주장도 일리가 있다. 아마 당시 눈이 아주 밝은 청동기인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파형동검보다는 '불꽃동검'이나 '새싹동검'이라 하면 좋겠다고 했다. 깃털동검, 물방울동검, 불꽃동검, 새싹동검은 비파형동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또 당시 청동기인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가 있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1)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청동거울이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이 거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하학적 추상무늬'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한반도 청동거울의 기원과 거울 뒷면의 무늬, 이 거울에 담긴 세계관은 무엇인지 밝혀 보고자 한다. - 기자말
 
  〈사진145〉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뒷면(왼쪽)과 앞면. 지름 21.2cm. 지금은 녹이 슬어 검은빛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은빛이었다. 앞면을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 얼굴을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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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추상무늬'란 말의 본뜻

이 거울은 1960년 이전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가까이에서 한 군인이 참호를 파다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이도 최근 2008년에야 밝혀졌다. 그전에는 강원도(또는 원주)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60년이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데, 그동안 학자들은 이 거울을 연구했지만 밝혀낸 것은 거의 없다.

단지 거울의 재질이라든지 선이 1만 3300개쯤 된다는 것만 밝혀진 상태이다. 이 거울의 디자인이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이 거울에 어떤 '세계관'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우리는 역사 유물을 교과서에서 보면 학자들이 모두 밝혀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유물이 아주 많다. 이 거울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여러 방송국에서 이 거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최근에 찍은 것은 유튜브에 거의 올라와 있는데, 거울의 정체를 밝혀낸 다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다뉴세문경 다큐를 볼 때 수없이 듣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기하학적 추상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석기 미술사를 읽을 때 수없이 나오는데, 이때 우리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한번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한다. 학자들이 선사시대 어떤 무늬를 두고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면, '아, 이 사람도 모르고 있구나!(I don't know!)'로 읽어야 한다. (사실 학자들은 이 말을 몹시 하기 싫어하거나 할 줄 모른다) 하지만 학자들이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물론 그 무늬는 추상무늬가 아니라 '구상무늬'일 때가 많다. 다뉴세문경 무늬도 마찬가지다.
 
  〈사진146〉 거울 빛깔이 검은 까닭은 땅속에서 녹이 슬었기 때문이다. 동그라미 부분은 깨진 곳인데 보는 것처럼 은백색에 가깝다. 이 거울은 구리 61.6퍼센트에 주석 32퍼센트다. 청동은 주석 비율이 22퍼센트일 때 가장 단단하다. 그리고 그 이상 들어가면 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당시 한반도 청동기인들은 이 사실을 알았는데도 지금의 거울 빛깔과 비슷하게 하려고 일부러 주석을 최대치까지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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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nze Mirror With Geometric Designs

2007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다뉴세문경 보존처리를 한다. 이 거울은 19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군인의 삽에 부딪혀 깨졌는지, 아니면 원래 깨져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붙인 곳에 틈이 나고, 더는 미룰 수 없어 다시 분리해 보존처리를 한 것이다. 보존처리는 그해 6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8월까지 14개월이나 걸렸다. 이때 박물관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종합조사를 해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종합조사연구》(2009)를 낸다.

〈사진146〉은 《다뉴세문경 종합조사연구》 논문 사이사이에 있는 간지 부분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Bronze Mirror With Geometric Designs(기하학적 무늬 청동거울)'란 말이다. 연구자들은 이 거울의 무늬를 처음부터 '기하학적 무늬'라고 아주 못을 박고 논의를 펼쳐 나간다. 거울의 정체를 풀 수 있는 것은 무늬인데도 그들은 거울의 무늬를 '기하학적 무늬'라 하면서 더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 한 구절은 지금까지 다뉴세문경을 놓고 이루어진 모든 논의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사진147〉 다뉴세문경 고리. 〈사진148〉 다뉴세문경 동심원 확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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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울은 과연 '태양(해)'을 상징할까?

〈사진145〉 청동거울을 '다뉴세문경'이라 한다. 다뉴(多紐 많을다·끈뉴)는 말 그대로 끈을 꿸 수 있는 고리(紐)가 많다는 말이다. 〈사진145〉 거울 뒷면을 보면 가운데 약간 위쪽 두 곳이 튀어나와 있다. 이 튀어나온 꼭지에 구멍이 〈사진147〉처럼 옆으로 나 있다. 이 구멍 두 개에 줄을 꿰어 묶고,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손바닥으로 받치고 얼굴을 봤던 것이다. 또는 줄을 길게 해 목에 걸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줄을 꿸 수 있는 고리를 '뉴(紐 끈뉴)'라 한다. 이 거울은 뉴가 두 개지만 어떤 거울은 다섯 개, 많게는 아홉 개까지 달린 것도 있다. 그리고 '세문경(細文鏡 가늘세·무늬문·거울경)은 가는 무늬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 청동거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배우는 역사 교과서 청동기 시대 편에 늘 실려 있어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거울은 흔히 '태양(해)'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몇 해 전 김양동은 《한국의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지식산업사, 2015)에서, 우리 겨레가 고대부터 태양을 '숭배'했다고 하면서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를 '빛살'무늬로 보고, 이 거울의 빗금무늬 또한 '빛살'로 해석한다. 그러자 이 가설은 그대로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건너가 거의 정설이 되어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한반도 신석기인과 청동기인이 '태양'을 숭배했다는 근거는 없고, 물론 유물도 없다.

한반도 청동기인, 컴퍼스를 쓰다

〈사진148〉은 다뉴세문경 동심원을 확대한 사진이다. 가운데 두 동그라미를 보면 다른 동그라미와 달리 엉성하게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이렇다. 동심원은 모두 22줄로 되어 있는데, 청동기인은 톱니가 20개 달린 컴퍼스(그림쇠)를 만들어 동심원 무늬를 새겼다. 가운데에 쇠를 찔러 고정하고 빙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그라미 골이 20개가 된다. 청동기인은 컴퍼스를 뺀 다음 쑥 들어간 송곳 자리를 끝이 뭉툭한 무늬새기개로 잘 메꾼 다음 그 무늬새기개로 두 원을 그렸다.

그래서 가운데 두 원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청동기인은 거푸집을 만들 때 활석(무른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고운 흙이나 모래가루를 반죽해 그 위에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활석 가루를 반죽해 새긴 것으로 짐작한다. 활석을 서로 문질러 갈아 가루를 내고, 그것을 반죽해 평평한 거푸집 평면에 고르게 바른 다음 살짝 굳었을 때 정밀한 자와 컴퍼스 같은 그림쇠로 무늬를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활석 가루를 반죽할 때 마르더라도 갈라지지 않게 도토리나 식물줄기에서 나오는 녹말 성분 즙 같은 것을 넣었을 것으로 본다.
 
  〈사진149〉 중국 은허 M202호 묘에서 나온 칠각성문 청동단추. 은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상(商)나라 수도다. 〈사진150〉 청동단추. 경상북도 영천 어은동유적(지금의 영천시 금호읍)에서 나왔다. 지름 2.5㎝ 안팎. 이곳 유적은 1세기 청동기·철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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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거울의 기원은 과연 '청동단추'일까?

지금까지 한중일에서 나온 다뉴세문경은 100여 점쯤 된다. 이 거울은 청동검과 함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청동거울이 나온 뒤 수많은 학자들이 90년 남짓 연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한중일 학자들 모두 청동거울의 기원을 중국 상나라 은허 부호묘(기원전 14-13세기)에서 나온 청동단추(〈사진149〉)나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오르도스(Ordos, 기원전 10세기)에서 나온 청동단추(銅泡 구리동·거품포)에서 찾았다. 그런데 학자들은 청동단추에 그 기원을 둔다고 하면서도 정작 단추의 무늬는 해석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청동거울이든 청동단추이든 거기에 있는 무늬는 '기하학적 무늬'이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무늬이기에 더 이상 연구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어떤 유물에 대한 연구에서, 더구나 그 무늬가 아주 중요한데도 '기하학적 무늬'라 전제해 놓고 연구를 한다면 그 연구 방법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거울의 본질은 뒷면에 있는 무늬를 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이 거울의 정체도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학자들도 이 거울의 무늬를 단 한마디, 즉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만 할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진151〉 용문공심전(龍文空心?) 탁본. 길이 117cm. 중국 함양 진궁전 유적지에서 나왔다. 가운데 원판, 천문(天門) 안에 작은 동그라미 무늬를 수없이 그렸다. 이는 천문의 강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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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계의 엉뚱한 무늬 풀이

〈사진151〉 용문공심전(龍文空心磚)은 벽돌인데, 속이 비어 있는 벽돌을 말한다. 이 벽돌은 진나라 때 함양에 지은 궁전 터에서 나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벽돌 그림을 아직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학자들은 가운데 둥근 원판을 옥(璧 둥근옥벽)으로 보고, 거기에 용 몸통이 붙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후한시대 역사서 《한서(漢書)》 〈율력지(律歷志)〉에 나오는 구절, "해와 달은 마치 옥을 합친 것 같고, 오성(五星 수·금·화·목·토성)은 꿰어 놓은 구슬과 같다(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에서 옥(璧)의 뜻을 가져와 옥과 용이 하나가 되어 있으니 완벽하다,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조화롭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풀이는 엉뚱하기 그지없다. 이 벽돌 그림에는 해와 달도, 오성(五星)도 없다. 무늬 해석은 전체 무늬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즉 무늬의 이야기(story)가 한 묶음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용과 원판의 관계가 빠져 있다. 왜 둥근 옥인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동그라미 무늬는 또 뭔지, 더불어 용 몸통에 동그라미 무늬가 왜 있는지, 용 몸통을 비늘로 하지 않고 왜 빗살무늬로 했는지, 이런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대체 그들은 왜 이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일까.  

용(龍) 갑골과 금문은 y축에서 본 천문

〈사진151〉 벽돌 그림은 용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하늘 천문(天門·원판)에서 용이 태어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곡옥(曲玉)을 용의 기원으로 보아 왔지만 이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천문(天門)은 청동거울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청동거울의 기원이 청동단추가 아니라 천문(天門)이라는 것이다.
천문은 중국과 한반도 신석기인에게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기도 하다.

'하늘 속 물(水)'이 이 천문을 통해 구름으로 나오고, 이 구름에서 비가 내려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천문화생(天門化生), 우운화생(雨雲化生)의 세계관이다. 이것은 앞글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기도 하다('조선백자 자라병과 암사동 신석기인의 세계관' 참조 바람).
 
  〈사진152〉 한자 용(龍), 해일(日) 갑골, 용(龍) 갑골과 금문, 위상(上) 갑골과 육서통, 운(云←구름운(雲)의 본자) 갑골. 중국과 암사동 신석기인은 파란 하늘(경계) 넘어 공간을 거대한 물그릇으로 여겼다. 거기서 천문을 통해 구름이 나오고,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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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51〉이 x축에서 본, 그러니까 사람이 땅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본 천문과 용이라면 〈사진152〉 용(龍) 갑골과 금문은 y축(옆)에서 본 천문과 용이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갑골과 금문에서는 천문(天門)을 〈사진151〉처럼 둥그렇게 그리지 않고, 반드시 y축에서 본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x축에서 본 천문(동그란 천문)은 육서통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다. 중국 고대인들은 왜 천문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것은 해(日)와 관계가 깊다.

중국 고대인들은 해(日)를 동그랗게 그리지 않고 네모 속에 짧은 가로획을 그었다(〈사진152〉 참조). 이렇게 한 까닭은 거북 배딱지에 송곳으로 글자를 새길 때 동그라미를 새기기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해(日)와 달(月)과 천문(天門)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셋 다 모양이 둥근데도 해는 네모지게, 달은 그믐달이나 초승달 모양으로 그렸다. 그리고 천문은 y축에서 본 것으로만 그린 것이다. 세계적인 한문학자 시라카와 시즈카는 y축에서 본 천문을 '꽃받침'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신석기 세계관과 관련하여 사라카와 시즈카의 한자학을 다룰 때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용(龍)과 구름(云)은 위상(二)에서 비롯한 글자

한중일 한문학계에서는 용(龍) 갑골과 금문에서 아래쪽 152-② '구름'은 읽어내고 있으나 위쪽 ①번 천문, 물그릇, 하늘 속 물(水)은 아직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보통 이 부분을 용 '뿔'로 보는 듯싶다. 이렇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동한시대(25-220) 허신의 《설문해자》(121)에서 그 내력을 찾을 수 있다.

허신은 위상(二)과 아래하(二가 뒤집어진 꼴)를 상형글자로 보지 않고 지사문자로 본다. 흔히 지사문자를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이나 선으로 그린 기호(symbol) 글자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중국 신석기인에게 위상과 아래하 글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추상적인 것을 나타내는 기호였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파란 하늘 너머에 커다란 물그릇이 있다고 봤고, 그 그릇에 물(水)이 차 있고, 그 물이 천문(天門)을 통해 시시때때로 구름이 되어 온 세상을 덮었다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으로 여겼다. 근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신석기인에게 이러한 생각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언제나 생생한 실제이고 구상이었다.

더구나 중국 신석기인들은 이 세상을 위상과 아래하 단 두 글자로 표현했다. 어쩌면 이 두 글자는 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난 글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이 두 글자를 합쳐, 그러니까 위상 아래에 아래하를 붙여 한 글자로 표현한 금문도 있다. 한자학계에서는 이 글자를 상(二) 자로 보고 있다.

용(龍)과 구름(云) 또한 위상(二)에서 비롯한 글자이다(〈사진152-③〉 참조). 하지만 허신은 위상과 아래하뿐만 아니라 이 두 글자에서 생겨난 여러 글자, 특히 중국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헤아릴 수 있는 글자(云天气雨霝示言音龍不否丕辛王帝)를 한일(一)부나 두이(二)부 아니면 다른 여타 부수에 넣어 버렸고, 그 뒤 중국의 신석기 세계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흐릿해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허신이 주역의 세계관으로 중국 한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중국 한자에 깃들어 있는 신석기 세계관은 송두리째 날아가고 만다. 한마디로 허신은 신석기 세계관을 주역으로 전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전도가 일어나면 기원(신석기 세계관)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 말미에서 아주 자세히 밝힐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씁니다)(2)

 

 

 

 

  〈사진153〉 용문공심전(龍文空心?) 탁본. 길이 117cm. 중국 함양 진궁전 유적지에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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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에서 찾은 천문 세계관

저번 글을 읽고 한 독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진153' 벽돌은 진나라 함양궁 벽돌이니까 기원전 3-2세기 유물이고, 청동거울은 그보다 훨씬 이전 기원전 14세기, 더 멀게는 20세기까지 올라가는데, 어떻게 이 사진 속 원판이 청동거울의 기원이냐고 물었다.

모두 맞는 말씀인데 한 가지는 잘못 보신 것 같다. 나는 이 벽돌이 청동거울의 기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저 벽돌 속 원판, 즉 천문(天門)이 청동거울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천문은 저 멀리 신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해서는 앞글 '빗살무늬는 과연 암호일까'에서 아주 자세히 밝힌 바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중국 한나라 초기 회남려왕 유장의 아들 유안(劉安)이 엮었다고 알려진 <회남자(淮南子)>에 신석기 세계관을 알 수 있는 개념이 곳곳에 있고, 특히 '천문훈(天文訓)', '지형훈(墬形訓)', '남명훈(覽冥訓)' 편은 한중일 신석기 세계관을 그려내는 데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회남자> 천문훈과 지형훈 편에는 아홉 겹 하늘과 아홉 구멍 구중(九重 아홉구·겹칠중)·구규(九竅 아홉구·구멍규), 여덟 방위와 아홉 들판 팔방구주(八方九州), 여덟 방위에 나 있는 하늘 통로 팔문(八門)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구규(九竅)와 팔문(八門)을 '천문(天門)' 세계관으로 정리했다. 이 천문 세계관은 서울 암사동과 러시아 아무르강 수추 섬, 중국 서북 마가요문화, 황하 중류 앙소문화에서 핵심 세계관이고, 그 뒤 이 세계관은 한국과 중국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진154〉 중국 당나라 용 수막새. 지름 14.1cm. 국립중앙박물관 설명글에는 이 수막새 이름을 ‘짐승얼굴수막새’라 해 놓았다. 하지만 이는 짐승이 아니라 용이 머리를 디밀고 천문에서 나오는 구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55〉 중국 한나라 청룡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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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수막새에 있는 까닭

'사진154-5' 수막새는 '사진153' 용문공심전 벽돌 그림을 수막새에 표현한 것이다. 테두리가 둥근 수막새는 '사진153'의 원판과 마찬가지로 천문(天門) 그 자체가 된다. 중국과 한국의 기와쟁이들은 수막새 앞면에 구름, 용, 기린, 현무, 주작, 연꽃을 장식했다. 이 모든 것이 천문에서 비롯한다는 '천문화생(天門化生)'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54'처럼 수막새에 용을 장식하면 용이 천문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고구려백제신라 수막새에 왜 용이 있는지, 왜 그 용이 수막새에서 나오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수막새는 그 생김새가 둥글기 때문에 장식을 새기지 않아도 그 자체가 천문(天門)이지만 '사진155'처럼 수막새 한가운데에 다시 동그란 천문을 장식하기도 한다.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수막새 둥근 테두리가 천문이기 때문에 가운데 천문은 없어도 된다. 그런데도 이 기와쟁이는 가운데에 따로 천문을 장식한다. 이는 천문의 '강조'이다. 이는 우리가 공부할 때 중요한 것에 별표를 여러 번 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기와쟁이가 바깥 둥근 테두리를 도상에서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보고 가운데에 천문을 두었을 수도 있다.
 
  〈사진156〉 원판 옥. 전국시대 말. 지름 16cm. 〈사진157〉 방제경. 포항 성곡리 7호 목관묘. 지름 4.8cm.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사진158〉 구름운(云)의 갑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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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세계관과 청동거울

먼저 '사진158' 구름운(云←雲의 본자)의 갑골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쪽 운(云) 갑골문에서 머리 쪽 '二'는 위상(上)의 갑골문이다. 중국 신석기인은 파란 하늘 너머에 커다란 물그릇이 있어 그 속에 물(水)이 방방이 차 있다고 보았다. 또는 하늘 너머에 물(水) 층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천문(天門)을 통해 구름으로 나온다고 여겼다.

이것을 그린 글자가 아래쪽 갑골 운(云)이다. 이런 세계관은 서울 강동구 암사동 신석기 세계관과 똑같다. 이에 대해서는 앞글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 충분히 다뤘다('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 참조 바람). '사진158' 구름운(云) 아래 갑골문이 하늘과 천문을 옆(y축)에서 본 것이라면 '사진156' 원판 옥과 '사진157' 방제경은 땅(x축)에서 고개를 쳐들고 본 천문(天門)이다.

'사진156'은 용문공심전 원판 옥을 입체로 깎은 것이다. 이 또한 땅에서 고개를 쳐들고 본, 그러니까 x축에서 본 천문(天門)이다. 다만 가운데 구멍을 뚫어 천문을 더 구체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천문 둘레에 고사리 순처럼 말려 있는 것은 구름이다. 이것은 '사진158' 구름운(云)의 갑골문을 그대로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천문에서 구름이 나오는 도상이다.

구름운(云)의 갑골문을 알게 되면

'사진157'은 신라 방제경인데, 방제경(倣制鏡 본뜰방·만들제·거울경)은 말 그대로 한나라 거울을 모방해서 만든 본뜬거울을 말한다. 이 거울 무늬에도 '사진156'과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말린 넝쿨 더듬이 순 무늬가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것을 '고사리 순'이나 '에스(S)자' 무늬로 본다. 즉 이것이 '구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간혹 구름이라 하는 이도 있지만 정작 이 구름 도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 또한 '사진158' 구름운(云)의 갑골문에서 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사진158' 구름운(云) 갑골문을 알게 되면 그동안 우리 미술·사학계가 풀지 못했던 수많은 유물을 더 깊고 풍성하게 풀 수 있다.

'사진157' 본뜬거울은 다뉴세문경 무늬를 분석할 때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아무리 복잡하고 세밀하게 새긴 다뉴세문경이라 하더라도 전체 도상은 '사진157' 본뜬거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무늬도 알고 보면 '구름'이라는 것을 단숨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장인이 복잡한 중국 한대 거울을 보고 내린 결론이다. 그들은 한대 거울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잡아 표현했다. 조선의 분청 사기장과 민화쟁이들이 복잡한 세계관을 한없이 단순하게, 마치 아이의 붓질과 손길로 본질을 드러냈듯, 추사가 말년에 아이 손 붓질로 글자를 쓰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진159〉 세모형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높이 3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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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거울 무늬의 기원은 암사동 신석기 토기

'사진160-161' 중국 칠성각 거울을 보기에 앞서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문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암사동 토기 문양에 중국 청동거울 문양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159'는 서울 암사동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아가리 부분이다. 가장 위쪽에 하늘 속 물(水) 층을 6층으로 새겼다.

왼쪽과 중간을 보면 무늬를 새기다 만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 속 통로, 즉 천문(天門)이다. 이 천문을 통해 삼각형 구름 또는 원(타원)형 구름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름에서 비(雨)가 내린다('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 참조 바람). 이 그릇 무늬는 y축에서 본 하늘 속 물과 천문, 하늘, 구름, 비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사진160-161'은 x축에서 본 비와 구름과 천문이다. '사진160-161' 다자인은 '사진159〉에서 아래 노란 수평선까지이다.
 
  〈사진160〉 중국 치지아문화(濟家文化 기원전 2000년) 청해타마대 M25호 무덤. 칠성각(七星角) 기하문단뉴동경. 기원전 12-11세기. ‘칠성각’은 세모꼴 각이 일곱 개인 별 무늬란 말이고, ‘단뉴’는 뉴(고리)가 하나라는 뜻이다. 〈사진161〉 칠성각(七星角) 기하문단뉴동경에서 테두리를 지운 도상이다. 중국 청동기 장인이 생각한 실제 도상은 여기까지다. 테두리는 그의 디자인에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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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星)이 아니라 삼각형 구름

중국 청동거울은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나 '사진160' '칠성각 거울'(12-11세기)을 드는 까닭은 문양이 선명하고, 또 이 문양이 그전과 그 뒤 한중일 청동거울 문양을 풀 수 있는 기본 문양이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뿐만 아니라 한·일 학계에서도 이 문양을 '별문양(星文)'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과 한반도 사람들은 별을 그릴 때 이렇게 세모꼴로 각이 지게 그리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나 일본 기토라 천문도를 보더라도 큰 별은 좀 큰 '동그라미'로, 작은 별은 좀 작은 동그라미로만 구별했을 뿐이다. 이는 조선의 천문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양을 별로 보는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관점이다.

'사진160'에서 바깥 테두리 선은 청동기 장인이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이다. 그래서 이것을 지우고 색을 더해 '사진161'처럼 그려 보았다. 가운데 천문에서 삼각형 구름이 나오고,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 종류' 참조바람). 이 디자인은 그 뒤 한중일 청동거울의 기본 디자인이 된다. 한반도 다뉴세문경 무늬도 이와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무늬가 세밀하고 복잡할 뿐이다.
 
  〈사진162〉 평안남도 맹산에서 나온 청동거울 거푸집으로 만든 청동거울 재현품.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163〉 평안남도 맹산 청동거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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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무늬를 풀 수 있는 실마리 몇 가지

'사진162'는 평안남도 맹산 출토 거푸집으로 만든 청동거울이다. 맹산에서 나온 거푸집은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보다 이른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거울 무늬에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무늬를 풀 수 있는 실마리 몇 가지가 담겨 있다.

'사진163'을 보면 가운데에 팔각형 천문을 두었다. 이는 팔방(八方)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동서남북과 동북·서북·동남·서남 방향, 이렇게 팔방 세계관을 표현했다. 팔면에 붙은 삼각형 구름-①은 천문에서 여덟 방향으로 나오는 구름이다. 구름 안의 빗금은 비(雨)나 수분(水)을 뜻한다. 그러니까 구름 속에 물(水)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삼각형 구름-②에서 주황빛 빗금을 보면 일부러 팔각형 면에 수평으로 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형 구름-③을 보면 구름-②의 규칙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구름-①의 ㉮, ㉯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규칙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구상이 완벽하지 않아서이다. 그래도 팔각형 천문과 거기에서 나오는 삼각형 구름, 이 구름에서 내리는 비만큼은 규칙성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서도 그대로 지켜진다. 다만 팔각형 천문은 둥근 원으로 바뀔 뿐이다.

'사진162'에서 ㉰, ㉱, ㉲는 삼각형 구름인데,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서는 '구름'을 새길 때 이처럼 삼각형 한 변에 수평으로만 그린다. 이것은 빗금 비(雨)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우리 학계에서는 ㉰, ㉱, ㉲, ㉳를 삼각형 안에 선(線)이 모여(集) 있다 해서 '삼각집선문'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처럼 삼각형 한쪽 면이 터진 집선문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삼각형과는 관계가 없고, 삼각형 구름에서 나오는 비(雨)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삼각형 구름 사이에 빗금이 그려져 있어 잘못 읽은 것이다. 이는 '사진161' 칠성각 청동거울 도상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비와 구름과 바람(風)

한국과 중국 미술사에서 바람(風)은 청동기시대 말 철기시대부터 문양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석기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는 중국 한자 갑골에서는 단 한 자만 보이고, 육서통에 이르러서야 24자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기록에서 바람(風)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이 기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일 것이다. 환웅은 이 땅에 내려올 때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오는데, 여기서 풍백은 우사와 운사의 '맏이'(우두머리)이고, 비와 구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다. 청동기시대 군주(제사장)는 스스로 풍백을 자처했고, 자신들만이 비구름을 몰고 올 수 있다고 했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이 대목은 당시 백성들의 비구름 세계관을 독점하려 했던 청동기 지배자들의 욕망과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뒤 청동기와 철기시대 지배자들이 남긴 유물을 봤을 때 그 욕망은 성공한 듯싶다. 청동기시대 그릇에서 비구름 무늬가 사라지는 것, 무늬가 사라지고 민무늬토기만 빚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 고대미술에서 바람(風)은 결코 간단한 주제가 아니다. 이는 다음 연재글 '팔주령의 비밀' 편에서 소리(音), 파문형 동기와 바람개비 수막새를 다루면서 아주 자세하게 밝힐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씁니다) (3)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과 천원지방(天元地方)

고대 중국 사람들은 세상을 '천원지방(天元地方)'으로 보았다. 여기서 '지방(地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이지만, 천원(天元)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옛날부터 믿었던 세계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보개설(寶蓋說)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 첫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 넓이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큰 바람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바다(南冥)는 곧 천지(天池)를 말한다.
-안동림 역주, 《장자》(현암사, 2007), 〈소요유(逍遙遊)〉 27쪽
 
장자는 여기서 '남쪽바다(南冥)'를 '천지(天池)'라 한다. 이 구절은 장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닷가에서 수평선을 보면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구주(九州)에 내렸던 비가 다시 남쪽바다 끝 천지(天池)로 간다는 말일 것이다. 하늘이 밥그릇 덮개처럼 둥글기 때문에 남쪽바다 끝에 모여 다시 하늘 연못(천지 또는 은하수)을 채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하늘 연못 물이 천문을 통해 구름으로 나오고, 이 구름에서 비가 아홉 들판 구주에 비가 내리는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남쪽바다 남명(南冥)과 천지(天池)를 팔인(八殥) 팔택(八澤)이라 하고, 천문(天門)을 팔문(八門)이라 한다. 여기서 팔문은 여덟 방향 여덟 들판 하늘에 나 있는 천문(天門)을 말한다.
 
  〈사진189〉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과 〈지형훈(?形訓)〉 편을 참고하여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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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 편과 팔문(八門)

〈지형훈(墬形訓)〉 편에는 구주(九州), 팔인팔택(八殥八澤)의 구름(雲), 팔굉(八紘)과 팔극(八極), 팔문(八門)이 나온다(241-243쪽). 《회남자淮南子》에 나와 있는 세계관은 혼란스러워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기가 여간 힘들지만 신석기 세계관을 염두에 두면서 한번 그려 보았다.

먼저 하늘을 둥글게 했는데, 이것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른 것이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편에, "하늘의 도는 원이고 땅의 도는 네모다. 네모는 어둠을 주관하고 원은 밝음을 주관한다(162-163)" 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세계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상 만물이 하늘과 땅의 움직임과 변화로 태어난다는 것, 하늘과 땅의 변화가 이 세상 만물의 실제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사진183〉 참조).

〈사진189〉에서 오른쪽 남쪽의 팔문(八門)·팔택(八澤)은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남명(南冥)의 천지(天池)로 볼 수 있다. 구주(九州) 아홉 들판에 서 있는 사람 모양은 육서통 천(天) 자다. 사람 머리를 보면 동그란 원 가운데에 점을 찍었다. 동그란 원은 비구름이 나오는 천문(天門)이고, 가운뎃점은 물(水)·비(雨)·구름(云)의 기원이다.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 편에서는 동그란 원을 팔문(八門)·팔택(八澤)이라 한다. 그리고 사람 팔과 다리는 천문에서 구름(云)이 나오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태는 전한 시대 수막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육서통의 천(天)은 사람 또한 그 기원은 천문(天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 만물을 비롯하여 사람 또한 천문이 기원이라는 천문화생(天門化生)의 세계관은 고구려백제신라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사진164-167, 169-170, 184-185〉를 설명하면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육서통 천(天) 자는 육서통 기(气)에서 비롯한 글자인데, 이 또한 사진 〈사진174-177〉을 설명하면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었다.

나는 국보 제141호 뒷면에 있는 동심원 여덟 개를 이건무·조현종처럼 풍요와 다산(多産)을 뜻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선사유물과 유적》(솔, 2003), 176쪽). 이 여덟 개 동심원과 가운데 큰 원은 팔방구주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고, 한가운데 동그란 큰 원은 균천(鈞天), 둘레 여덟 개 동심원은 팔문(八門)과 팔택(八澤), 천문(天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봐야 둘레 '삼각형 안 빗금'(삼각형 구름=云)과 '삼각형 밖 빗금'(빗줄기=雨)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고, 거울 뒷면에 있는 무늬가 총체로 맞아떨어진다.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 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팔극(八極)의 구름은 천하에 비를 내리고, 팔문(八門)의 바람은 추위와 더위를 조절하며, 팔굉(八紘)·팔인(八殥)·팔택(八澤)의 구름은 구주에 비를 내리고 중토(中土: 冀州)의 기후를 조화롭게 한다.(243쪽)
 
이 구절은 〈사진189〉를 보면서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가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읽더라고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우선 구름의 기원이 팔극(八極)·팔굉(八紘)·팔인(八殥)·팔택(八澤)으로 나와 있어 혼란스럽다.

사람이 살아가는 아홉 들판 구주(九州) 경계에 팔인(八殥)이 있고, 그 너머에 팔굉(八紘)이, 그 너머에 팔극(八極)이 있다. 이 세 곳은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남쪽바다 끝 남명(南冥)으로 봐도 될 것이다. 이 세 곳 가운데 팔굉(八紘)과 팔극(八極)은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다. 그에 견주어 팔인(八殥)은 아홉 들판 경계에 있고, 더구나 팔인에 있는 여덟 연못 팔택(八澤)은 이 세상 아홉 들판에 비(雨)를 내리는 구름(云)의 기원이다. 중국과 한반도 고대인들은 세상에 내리는 비(雨)가 은하수(銀河水)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은하수를 팔택 가운데 하나로 보아도 될 것이다. 또한 중국 신화 '여와와 홍수' 편에 나오는 이야기도 은하수, 즉 팔택과 관련이 있다.
 
  〈사진190〉 다뉴세문경.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강림1리 초기 철기시대 무덤에서 나왔다. 지름 16.2cm. 기원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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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무늬, 별무늬, 번개무늬, 고사리무늬

〈사진190〉 청동거울에 대해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은 "거울 뒷면에 가는 선으로 삼각형 내부를 평행선으로 빽빽하게 채워 넣은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을 기본 무늬단위"로 하는 다뉴세문경으로 설명하고 있다(20쪽). 이것 말고는 설명이 더 없다. 청동거울을 풀이한 미술사나 고고학 책을 살펴봐도 더 깊이 들어간 설명글을 찾아보기 힘들다. '삼각집선문'이라 하지만, 문제는 이 삼각집선문이 무엇을 구상으로 하여 새긴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삼각형(三角形) 안에 선(線)이 모여(集) 있다 해서 삼각집선문이라 할 뿐이다. 한중일 고대 미술사에서 삼각집선문은 아주 중요한 무늬인데도 한중일 학계 모두 이것이 무엇을 새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는 삼각집선문의 비밀을 풀지 못한 채 신라와 가야 사람들의 세계관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원룡·안휘준의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16)에서는 청동거울의 무늬를 일러 기하학적, 추상적, 상징적 무늬라 한다(43쪽). 하지만 이 무늬가 기하학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또 추상적이라 하는데, 무엇(구상)을 추상화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물론 상징적 무늬라 하면서도 무엇을 상징으로 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은 말하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 학자들이 자주 쓰는 '기하학적 추상무늬'란 말은 '자신도 모른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홍준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2)에서 청동거울을 "제관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의기"이고, "거울 뒷면에 가는 선과 동심원을 기하학 무늬로 새긴 것은 태양과 햇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 또한 어떤 근거도 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근거 없는 말이 지금은 공리(公理)가 되어 있다. 역사나 미술사에서 이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엉뚱한 논리가 일단 공리가 되어 버리면 이것을 지우기가 여간 힘들기 때문이다.

유홍준은 〈사진190〉에서 동그라미 부분, 거울 테두리 쪽 이등변 삼각형 꼴이 햇살이 비치는 모양 같다 해서 '태양과 햇살을 추상적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무늬가 진정 햇살이라면 그의 말처럼 추상적·기하학적·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그야말로 '구상적'인 무늬이다. 아이들은 해와 햇살을 보통 이렇게 그리는데 이걸 두고 우리는 그것을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이라 하지 않는다. 청동거울에 있는 무늬 가운데 햇살무늬, 별무늬, 번개무늬, 고사리무늬 같은 무늬 이름은 원래 무늬의 모양을 말하는 이름이었지만 수십 년 동안 그 무늬의 정체를 풀지 못함에 따라 그 무늬가 정말 그 무늬가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번개무늬가 실제로 번개를 새긴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191〉 화로모양 그릇받침. 김해시 대성동2호 무덤. 높이 25.6cm. 지름 42.7cm. 4세기 중엽. 국립김해박물관 〈사진192〉 뚜껑접시. 경주 천마총. 높이 8.1cm.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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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집선문, 그동안 반대로 읽지 않았을까?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면 〈사진191〉 같은 화로 모양 그릇받침이 많고, 이 그릇에는 어김없이 삼각집선문(삼각형 빗금무늬)가 있다. 삼각집선문은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그릇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무늬다. 이 무늬는 근대사학 100년 동안 처음부터 삼각집선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삼각집선문이다. 문제는 고대 장인들이 무엇을 삼각집선문으로 디자인했는가, 하는 점이다. 학계는 이에 대해 근대사학 100년 동안 '기하학적 무늬'라 해 왔다. 한마디로 알 수 없는 무늬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이 무늬는 기하학적 추상무늬일까. 정말 알 수 없는 무늬일까.

우리는 근대사학 100년 동안 〈사진191-2〉의 무늬를 혹시 반대로 읽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래 왔다고 본다. 〈사진192〉에서 동그라미 부분을 보면 빗금이 밖으로 나와 있다. 이 그릇에서 빗금은 아래 경계선을 삐져나오게 새겼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이 그릇을 디자인한 장인이 이 경계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경계선을 마음에 두었다면 그는 이 선을 넘지 않게 새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삼각집선문이 될 수 없다. 나는 이 빗금을 삼각형 구름(云)에서 내리는 빗줄기(雨)로 본다. 그리고 이 삼각형 구름은 가장 위 천문(天門)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진191〉의 무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도상은 중국 전국·전한 시대와 고구려 수막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디자인이기도 하다.(4)
 
 

<참고자료>

 

 

 

22화다뉴세문경 무늬, 드디어 풀리다3[차근차근 한국미술사22] 고구려 사람들의 세계관과 내세관 그리고 다뉴세문경

 

 

 

23화다뉴세문경 무늬, 드디어 풀리다4[차근차근 한국미술사23] 다뉴세문경, 과연 기하학적·추상적·상징적 무늬일까

 

 

 

24화다뉴세문경 무늬, 드디어 풀리다5[차근차근 한국미술사] 사방오주(四方五州)와 천문(天門) 세계관

 

 

 

25화다뉴세문경 무늬, 드디어 풀리다 6[차근차근 한국미술사] 동심원 여덟 개는 도대체 무엇일까?

 

 

 

26화다뉴세문경, 드디어 풀리다7[차근차근 한국미술사] 하늘은 둥글고 아홉 겹으로 되어 있다

 

 

 

 

 

 

‘고조선 자취’ 본격 논쟁판 열린다 : 한겨레 (hani.co.kr)2017-11-01

한국고고학회 3~4일 고고학대회 열어
위만조선 왕검성 위치 등 논란에
중견·소장 연구자들 새 논고 발표

 
고조선의 자취와 연관되는 중국 만주, 북한 일대의 유물들. 왼쪽부터 중국 자오양(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
 
중국 자오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나온 청동인물장식.
 
 
중국 랴오양(요양) 탑만촌 유적에서 출토된 선형동부 거푸집. 인물상이 돋을새김돼 있다.
 
 
평양 신성동 유적에서 나온 다뉴경(잔무늬거울).

 

 

 

작년 7월 태양광시설 불법공사.. 기원전 2세기 묘 1기 파헤쳐4m 떨어진 지점서 간두령 발견 등.. 청동유물 대부분 제 위치 잃어문화재청, 사고 25일뒤 현장조사
 

 

 

 

[사진] 국보급 청동방울 ‘간두령’ 완주서 발굴 | 중앙일보 (joongang.co.kr)2011.09.21

출토지가 분명한 국보급 간두령(竿頭鈴)이 처음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임영진)은 전북 혁신도시 개발사업부지 내 완주 신풍유적 2차 발굴조사에서 기원전 2~3세기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왼쪽)에서 간두령 2점과 세형동검 등 청동기 유물을 수습했다고 20일 밝혔다. 간두령은 쌍으로 된 창촉 모양의 청동기 안에 청동 방울이 달린 유물로 제사장이 사용한 의식구로 추정된다. 한수영 책임조사연구원은 “간두령은 대부분 국보·보물 등으로 지정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만 지금까지 출토지가 명확한 예는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2400년 전 청동거울 ‘신비한 비밀’ - 주간경향 (khan.co.kr) 2008.11.11위클리경향 799호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의 ‘초정밀 문양’ 제작 비법 실마리 나왔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경향신문사>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한반도에 최첨단 나노 기술이 존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기원전 4세기 무렵 청동기 시대에 만든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紐細汶鏡)은 이 시기 한반도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정밀 기술이 존재했음을 웅변하는 유물이다. 다뉴세문경 제작 방법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금껏 수차례 복원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다.

다뉴세문경은 청동기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유행한 청동 거울이다. 다뉴(多紐)란 뉴(끈으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다는 뜻으로, 거울 뒷면에 달려 있는 고리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이 고리에 끈을 걸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 뒷면에는 직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다. 세문(細汶)은 이 문양이 정밀하다는 뜻에서 붙은 것으로, 무늬가 굵고 거친 거울은 따로 다뉴조문경(多紐粗汶境)이라고 부른다. 다뉴조문경은 청동기 전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름 21㎝ 공간에 수많은 선과 원 새겨
다뉴세문경은 중국 동북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같은 종류의 청동 거울이 발견된다.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숭실대 국보경)은 1960년대 충남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100여 점의 다뉴세문경 중 가장 크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숭실대 국보경은 한때 출토지가 강원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고(故)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을 빌려 국보경은 원래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이 발견했는데 중간상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원도에서 발견한 것으로 둔갑했다고 전했다.

국보 다뉴세문경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문양의 정교함에 있다. 국보 다뉴세문경은 지금껏 발견된 것 중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지름이 21.2㎝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좁은 공간에 무려 1만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불과 0.3㎜에 불과한데다, 원과 직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 최고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과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을 받아 그린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오로지 육안과 초보적인 수준의 기구에 의존해서 이처럼 정교한 문양을 그렸다는 것 때문에 신비감은 물론,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위조 논란까지 일고 있는 것이다.

위_ 수많은 직선을 이어서 그린 다뉴세문경의 삼각 문양. 아래 _ 다뉴세문경 외구의 동심원.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다뉴세문경의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것이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만든 주물 작품이라는 점이다. 도안이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그 도안을 바탕으로 주물을 떠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물 기술이 필요하다. 주물 기술에 문제가 있을 경우 도안의 정교함이 희생되어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거울이 도안과 같은 수준의 정밀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푸집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거푸집의 재질과 형태는 더욱더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었다.

지난 10월 16일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개최한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과학적 보존 처리’ 학술대회에서 다뉴세문경의 제작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발표한 두 개의 논문이 그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7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올해 8월까지 거울 표면이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한 다뉴세문경에 대한 보존 처리를 진행하면서 제작 방법을 규명했다. 보존과학팀은 이 과정에서 국보경을 발견 당시와 같은 19개의 파편으로 분리하고 파편의 단면을 X-선형광분석기와 입체 현미경 등을 동원하여 분석했다.

 

 

 

<국보 다뉴세문경 제작비밀 풀렸다> | 연합뉴스 (yna.co.kr) 2008-10-14 16:09

제작비밀 풀린 국보 다뉴세문경

(서울=연합뉴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이 입자가 가는 모래를 이용해 만든 거푸집인 사형(砂型)으로 주물했음이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조사 결과 드러났다. 그런 흔적은 사진에서 보이는 주연부(테두리)에 존재하는 주조 결함을 분석함으로써 가능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구리와 주석 비율 66:34..'砂型' 거푸집 활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이 소장한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정확한 출토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짜 유물일 가능성은 "제로"라고 최병현 관장은 자신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존과학자나 전문가들이 그 복원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다. 현대의 어떠한 기술로도 복제 불가능하니 "어찌 가짜이겠느냐"는 것이다.

 
국보 다뉴세문경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을 지난해 7월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이 분석하고 보존처리를 실시했다. 왼쪽은 보존처리 전이고 오른쪽은 보전처리를 완료한 상태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이 다뉴세문경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그 비밀의 문이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

기독교박물관 의뢰로 지난해 7월부터 이 국보경에 대한 과학적 보존처리를 맡아온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이 성분을 분석하고 제작 방법을 구명하려는 노력을 펴왔다.

그 구체적인 성과가 16일 오후 2시 기독교박물관이 이 대학 한경직기념관에서 개최하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과학적 보존처리' 학술대회에서 공개된다.

이에 따르면 우선 이 거울은 구리(Cu)와 주석(Sn)을 65.7 대 34.3 비율로 섞어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를 주물해 낸 거푸집을 입자가 가는 모래를 재료로 해서 만들고 그에다가 각종 문양을 조각한 "사형(砂型)임을 확인함으로써 그동안 다뉴세문경의 제작에 사용한 거푸집의 재질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고 보존과학실은 말했다.

제작비밀 풀린 국보 다뉴세문경

(서울=연합뉴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이 입자가 가는 모래를 이용해 만든 거푸집인 사형(砂型)으로 주물했음이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조사 결과 드러났다. 그런 흔적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거울 단면에 존재하는 거푸집(사형)에서 분리한 주물사가 발견됨으로써 가능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지름 21㎝인 이 다뉴세문경은 거울 뒷면에 0.3㎜ 간격으로 무려 1만3천개에 이르는 가는 선을 새겨넣은 섬세한 제작 기법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말기 한반도에서 어떤 기술로 이처럼 정교한 금속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보존과학실은 이 거울을 만든 거푸집이 사형이라는 사실은 "거울 면과 문양 면에 걸쳐 있는 주조 결함에서 거푸집에 사용한 주물사(鑄物砂.거푸집 모래)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구리와 주석의 혼합비율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라는 중국 고대 문헌에 보이는 동경 제작 기법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보존과학실은 덧붙였다.

16일 학술대회에는 청동기시대 고고학 전공인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다뉴정문경(다뉴세문경의 다른 이름)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다뉴세문경의 도안과 제작기술의 발전(이양수.국립경주박물관) ▲국보경의 성분 조성(유혜선.국립중앙박물관) ▲국보경의 제작기술(박학수. 국립중앙박물관) 등 세 가지 주제 발표가 있다.

토론자로는 이청규 영남대 교수와 조진선 전남대 교수가 나선다.

 

 

 

 

36년전 못찾은 국보급 청동검 찾았다 : 한겨레 (hani.co.kr)2008-02-28

기원전 3세기 유물 2자루 재발굴 과정서 발견

청동기 유물 11점(사진 아래 ·국보 143호)

자칫 이가 빠질 뻔했던 국보 143호 청동유물 일습이 36년만에 완전한 모양을 갖추게 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은 28일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적석목관묘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 무렵 세형 청동검 2자루(사진 위)를 공개했다. 이 청동검은 1971년 청동기 유물 11점(사진 아래 ·국보 143호)을 쏟아낸 곳을 재발굴하면서 추가로 찾아낸 것이어서 국보 143호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채널e - The history channel e_청동거울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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