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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 문화유산 (6) 세계문화유산 - 수원 화성 본문

남국/조선

4. 조선 문화유산 (6) 세계문화유산 - 수원 화성

대야발 2025. 9. 20. 11:14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https://youtu.be/3WukxpcFKUA

 

 

 

 

 

장안문(長安門)

 

1794년(정조 18)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1975년 문루 복원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북옹성 

 

 

1795년(정조 19) 창건
1975년 수리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 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있는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드문 사례이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 오성지: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북동적대 北東敵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69년 수리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동북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적대가 있는 경우로 드물다.


* 현안: 성벽의 바깥에 위에서 아래로 낸 홈

 

 

북서적대 北西敵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68년 수리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을 세 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현안: 성벽의 바깥에 위에서 아래로 낸 홈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1794년(정조 18) 창건
2013년 해체・수리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규모와 형식은 장안문과 같다. 1794년 2월 28일 장안문과 같은 날에 터 닦는 일을 시작했지만 대체로 장안문보다 공정별로 약 1주일 늦게 완성하였다. 강원도 출신 목수 윤사범이 다포를 짜 맞추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 목수는 훗날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를 담당해 근 100년 만에 화성에서 재현했던 다포 건축 기술을 이어 나갔다.
팔달문은 축성 당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공사 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판, 현판까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013년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했는데 훼손된 목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였다. 부재에 남겨져 있는 전통 기술의 흔적까지 보존한 사례로 손꼽힌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 다포 : 기둥과 기둥사이에 받침목재를 배열한 건축양식

 

 

창룡문(蒼龍門)

 

 

 

 

1795년(정조 19)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1976년 문루 복원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한국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1796년(정조 20) 창건
1848년(헌종 14) 수리
1975년 수리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썼으나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북암문(北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2년 수리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동암문(東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복원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서암문(西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수리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서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비예(睥睨) : 암문 위에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장방형 여장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서남포사 복원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 오성지: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

 

 

 

 

1795년(정조 19) 창건
1848년(헌종 14) 홍수로 유실 후 재건
1922년 홍수로 유실
1932년 복원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존회’를 주축으로 수원시민이 힘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 홍예문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남수문(南水門)

 

 

 

 

 

1796년(정조 20) 창건
1848년(헌종 14) 홍수로 무너져 재건
1922년 홍수로 유실
2012년 복원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를 두었다. 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다.
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별도로 설치했다.

 

 

 

동장대, 연무대(東將臺, 鍊武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76년 주변 부속건물 복원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서장대(西將臺)

 

 

 

 

1794년(정조 18) 창건
1971년 복원
2006년 화재 후 수리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식이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수리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서노대(西弩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71년 복원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복원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봉돈(烽墩)

 

 

 

 

 

1796년(정조 20)창건
1971년 수리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 높게 쌓은 대臺 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 봉수제도烽燧制度 : 변방에서 일어난 위급한 일을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서울로 연락하는 군사통신제도.

 

 

 

동북각루, 방화수류정(東北角樓,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
1794년(정조 18) 창건
1934년 해체・수리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은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만들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용연(龍淵)

 

 

 

 

 

 

1796년(정조 20) 조성
1976년 주변 정비
2011년 주변 정비

용연은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이다. 금강산 구룡연을 비롯해서 전국의 이름난 명소에 용연이라는 명칭이 두루 쓰였고 갖가지 전설이 있다. 화성의 용연은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 바위에서 유래했다.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이 반달처럼 생겼고, 용두 바위는 물고기를 잡는 조대釣臺로 쓸 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간다. 출수구에는 용이 되기 전 단계의 짐승인 이무기 상을 새겼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인 ‘용지대월龍池待月’은 화성에서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

※ 용연의 경치를 표현하는 용어에 대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여러 용어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했다. 정조는 화성 축성 이후 화성의 봄 풍경인 춘8경과 가을 풍경인 추8경을 지정했다. 그 가운데 추8경에 ‘용연제월(龍淵霽月, 용연의 개인 달)’이 있다. 19세기 초 홍길주는 『표롱을첨』이라는 책에서 ‘용연후월(龍淵候月, 용연에서의 달맞이)’로 기록했으며,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성8경 시 병풍에는 ‘용연순채(龍淵蓴菜, 용연의 순채)’라 하여 용연에 가득한 순채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꼽았다. 근대기에는 1912년 이원규가 「수원8경가」에서 ‘나각망월(螺閣望月, 방화수류정에서 보는 동북공심돈 위의 달)’을 수원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록했다. 수원에 살던 일본인 사카이 마사노스케도 1914년 ‘용지대월(龍池待月, 용연에서의 달맞이)’을 수원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꼽았다. 그동안 주로 사용해 온 ‘용지대월’은 사카이의 저작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수원문화재단,

https://www.swcf.or.kr/?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