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배달국 고고학(13) 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홍산문화 채색기법의 성격과 발달 본문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1>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0/03 [09:49]
이 글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이 중국학자들의 견해처럼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옥도장이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임을 다음의 내용들을 통해 명확히 밝히게 될 것이다. 글 차례는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2장. 홍산문화 출토 옥인장의 주체 검토 3장. 홍산문화가 지속된 고조선문화(1절.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과 고조선 2절. 채색기법의 성격과 고조선문화 3절. 석경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4장. 옥인장은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으로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옥도장의 주체해명을 통해 그 까닭을 밝히게 될 것이다. 홍산 옥인장의 주체가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환웅천왕 ‘신시’문화의 상징물로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나만기유적에서 두 개의 옥인장이 출토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옥인장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어 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양식에 따라 동물형 옥인장(그림 1)과 쌍두조형 옥인장(그림 2)으로 분류하였다. 이 옥인장에 끈을 꿰어 의복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옥인장이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으로 만든 용과 새 등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만들어진 시기를 홍산문화시기(서기전 4500〜서기전 3000)로 추정하며 ‘(中華民族第一印)’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홍산문화유적에서 패대에 사용되었을 다양한 복식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어 중국학자들이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성격을 근거로 옥인장의 주체를 올바르게 해명하는 목적을 가진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는 주로 복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뿐만이 아니라 적석총, 제단, 성곽과 취락유적들이 함께 두드러진 문화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되었을 악기와 도구 등의 유물에서 보여지는 문화적인 의미와 상징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서기전 3500〜서기전 3000년)의 우하량유적은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발전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홍산문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문화현상들은 중국문화와 확연히 구별되고, 고조선문화와 이후의 여러 나라 시대 문화 특징에 지속적인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해석하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중화주의에 따른 헛된 집착일 뿐이다.
중국학자들은 어떠한 유물을 분석할 때, 대상유물과 동반유물의 기원과 양식 및 문화적 상징성 등에 관한 변천사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하는 마땅한 수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아주 단순히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의도적인 경향이 많다. 홍산 옥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은 홍산문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옥인장을 비롯하여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그림 3)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그림 4)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의 여러 유적에서는 옥기가 계속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한민족 특징의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아울러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수공업 생산기술의 교류와 상품 교역이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나만기유적에서 출토된 옥인장은 이러한 교역에서 필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사회변화의 요소로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 사용 등을 들었으나, 복식자료로부터 본다면 방직도구와 재봉도구의 급격한 증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의 유적들에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 안에서는 많은 량의 채색 질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질그릇과 옥기, 뼈와 뿔 및 돌로 만든 생산도구와 방직도구, 재봉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성곽유적은 정치적 지도자가 무리를 통치하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취를 보여주는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옥기를 비롯한 수공업품과 농업품 등으로 큰 규모의 교역을 진행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장이 쓰여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장은 정치지도자가 직권을 행사하는 상징물이며 공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만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는 한민족 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와 기하학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옥기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의 주체가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신시’문화였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홍산 옥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 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도 함께 해석하고자 한다.(1)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4> 홍산문화 채색기법의 성격과 발달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장식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과학적인 수준을 이루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풀, 꽃, 흙, 열매, 뿌리, 곤충, 돌 등의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하였다. 그 실제 예들이 암화와 벽화, 채회도, 채도, 칠기 등에서 보인다.
신석기시대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적봉시 오한기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에서 출토된 그림이 그려진 채색질그릇에서 처음 보인다.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서기전 4512〜서기전 2460년)에서 보이는 채색질그릇보다 이른 시기이다.
요령성 심양 부근의 신락유적(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채색질그릇과 함께 붉은색과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붉은색 철광석과 석묵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연마기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연마기를 사용해 염색재료를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
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에 있는 자하향암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보구유적출토채색질그릇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서기전 3500년경) 여신묘 벽화에는 붉은색과 황백색이 채색된 화려한 기하학문양이 보인다. 벽면에는 적색과 홍색사이에 황백색을 교차하여 삼각문양으로 채색한 기하문양을 표현했고, 소하연문화에서는 흰옷위에 흑색과 홍색 등을 사용했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그렸지만 소하연 채도의 부호문양과 여러 종류의 색채가 함께 장식된 특징으로 본다면 연원이 같은 공통의 요소를 가진다. 여신묘 벽면에 보이는 적홍색 기하문양과 소하연문화의 뢰문 또는 기회자형으로 불리우는 문양과 유사하다.
소조달맹의 석붕산유적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에서도 같은 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질그 릇에 연결되어 문양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른 부호와 함께 연속하거나 단독으로 그려져 원시글자 혹은 도화자로 인식되며 ‘뢰’ 혹은 ‘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홍산문화의 제사유적들에서 이 부호가 나타나고 있어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 등 어떠한 악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객좌 동산취유적과 우하량유적, 릉원 삼관전자유적, 부신 호두구유적에서는 모두 밑바닥이 없는 채색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처럼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을 당시 사람들이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우하량유적 제16지점 하층
적석총에서 출토된 통형 채색질그릇의 입구 부분에 테둘레가 있어 북면의 가죽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채색질그릇은 주로 큰무덤과 주무덤의 외부를 둘러싸며 세워져 있어 특정한 제사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제사의식과 채색은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여신묘벽화의 채색은 소하연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의 흑색과 홍색 등의 채색 문양으로 계승되어지고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000〜서기전 1500년)로 이어진다. 이러한 염료의 사용은 화려한 흑색 바탕위에 홍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채색질그릇을 만들어낸 오한기에 위치한 대전자유적에서 잘 나타난다.
대전자유적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질그릇과 함께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붉은색 안료가 담긴 돌그릇과 채색질그릇 부분 붉은색 안료가 담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그릇이 출토되어 채색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 고형의 칠기도 출토되어 칠기의 역사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음과 다양한 채색기법이 발전해갔음을 알게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 한 모습은 고조선시기로 오면 보다 과학적인 발달을 이룬다.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에서 장식기법과 직조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서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옷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겉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했다. 동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였으므로 그들의 복식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래 폭이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부여에서 입었던 큰 소매 달린 겉옷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부여의 넓은 폭과 긴 길이의 겉옷을 입었던 모습은 길림시 모아산에서 출토된 도용에서 확인된다. 위의 《삼국지》 동부여에 관한 서술내용에서 ‘尙白’과 ‘白布’가 보인다. 白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부여사람들이 흰색 천을 숭상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되어진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리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량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되어진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 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흰색의 옷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錦)으로 상징될 만큼 금(錦)을 즐겨 입었다. 금(錦)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등에서 이야기하는 ‘白衣’는 흰옷을 의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의’는 단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늬가 같은 계통의 색상으로 표현되어 옷의 바탕색과 무늬가 서로 크게 이색지지 않고 단아한 조화를 이룬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의 복식은 고구려로 오면서 색실로 짜 넣는 직조기술과 염색기술에서 더욱 발전양상을 보이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에는 특히 기하학문양이 많이 표현되었다. 문양은 주로 둥근 문양과 네모문양, 마름모문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복식에서 나타낸 문양들은 주로 염색기법과 직조기법, 자수기법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복식에 나타나는 색상은 고조선의 염색기술을 이어 색실로 직조한 것이거나,

직조한 직물을 침염법으로 염색한 것으로 기하학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에는 홀치기염과 납힐기법, 채회기법, 협힐기법 등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염색기법과 자수기법을 혼용하면서도 그 위에 장식기법을 더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복식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장식기법은 기학학문양의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것이 지속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양식의 문양이라도 크기와 양식의 차이 및 기하학적인 선의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 있는 복식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복식기법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채색기법 위에 고조선의 전통기법을 발전적으로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2)
(2)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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