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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7) 가야 멸망 이후 가야왕들의 제사/ 제사와 관련한 기이한 사건들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1. 가야(7) 가야 멸망 이후 가야왕들의 제사/ 제사와 관련한 기이한 사건들

대야발 2025. 12. 16. 15:49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가야 멸망 이후 가야왕들의 제사

 

신라 제30대 왕 법민왕(法敏)은 용삭(龍朔) 원년 신유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충왕(仇衝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이끌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다. 따라서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당했으나 그를 장사지낸 묘(廟)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 인하여 그 옛 궁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비용으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해 때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밥·차·과실 등 여러 맛있는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그 향기로운 효사(孝祀)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충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그 구충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이 묘에 지내는 제사지내는 예를 가끔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다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향하였다.(1)

 

 

 

제사와 관련한 기이한 사건들

 

신라 말년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金官) 고성(高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英規) 아간(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端午)를 맞아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져서 인하여 깔려 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스스로 말하기를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진영(眞影)을 그리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그윽한 은혜를 갚아야겠다”라고 하고, 교견(鮫絹) 3척을 가지고 진영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 정도가 되었다. 장군은 매우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가지고 사당을 나가서 불태우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인가. 이는 필경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진노한 것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렵게 여겨 진영도 이미 태워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주살을 받을 것이다. 경은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나이 88세에 이르러 죽었고,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서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그런데 옛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앞서 영규가 있고 뒤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적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서 7, 8명을 맞혀 죽이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큰 구렁이가 있었는데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사당 옆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처음 만든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한지 31년인 대강(大康) 2년 병진(1076)까지 도합 878년인데 제단을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으며, 하물며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오직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곧 체부의 말이 맞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곧 체부의 말을 믿을 수 없다.(2)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

이 중에 또 놀이를 하여 수로왕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백성·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 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3)

 

 

 

가야 고지의 지명 변천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로부터 259년 후에 우리 태조(太祖)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이었다.(4)

 

 

 

수로왕 능묘 소속 전답과 관련한 일화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양전사의 별칭이다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5)

 

 

 

가락국의 사적

 

시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다. 인륜(人倫)은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지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겠는가.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냈다. 산 속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하였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있었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맑게 개었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가닥 자색 줄에 드리웠다.

 

낯선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렸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곧 맑아지려 하였다.

 

궁전은 옛 법을 따랐고, 흙계단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베풀었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하였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하였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모든 백성은 태평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하였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다.(6)

 

 

 

<자료출처>

 

 

(1)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3)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4)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5)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6)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