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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가야(5) 6대 좌지왕(407-421년), 7대 취희왕(421-451년), 8대 질지왕(451-492년), 452년 시조와 허황옥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 세움, 9대 겸지왕(492-521년),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1. 가야(5) 6대 좌지왕(407-421년), 7대 취희왕(421-451년), 8대 질지왕(451-492년), 452년 시조와 허황옥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 세움, 9대 겸지왕(492-521년),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대야발 2025. 12. 16. 15:41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좌지왕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에게 장가를 들어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웠다. 계림국(鷄林國)이 꾀를 써서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 5월 12일(421년)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1)

 

 

 

취희왕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로 영초(永初)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1년으로 원가(元嘉) 28년 신묘 2월 3일(451년)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王子) 질지(銍知)를 낳았다.(2)

 

 

 

질지왕

금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시조와 허황옥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혼인한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영명(永明) 10년 임신 10월 4일(492년)에 죽었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으로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3)

 

 

 

겸지왕

금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0년으로, 정광(正光) 2년 신축 4월 7일(521년)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4)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 29년 임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5)

 

 
 

《조선상고사》

 

제7편 남방 제국의 대 고구려 공수동맹

 

제1장 4개국 연합군의 전쟁과 고구려의 퇴각

 

1. 신라 · 백제 양국 관계와 비밀동맹의 성립

 

2. 고구려에 맞선 신라 · 백제 · 임나가라 · 아라가라 4국 동맹

 

장수태왕이 신위례성을 침입하자, 근개루의 태자인 문주는 신라에 가서 급난을 알렸다. 신라는 꼭 동맹의 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출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비마립간이 병력 1만을 보냈지만,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도 파괴된 뒤였다.

 

 

문주왕은 수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웅진에 도읍을 정했다. 웅진은 광개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고모나라()다. 웅진과 고모나라는 똑같이 곰나루로 읽어야 한다. 전자는 뜻에 근거한 이두문자이고 후자는 음에 근거한 이두문자다. 지금의 공주가 당시의 곰나루다.

 


당시 한강 이남에는 신라·백제 외에 가라 등 6개국이 있어, 이들이 지금의 경상남도를 차지했다는 점은 제3편서 설명했다. 처음에는 신가라가 종주국이고 임나·아라·고자·고령·벽진 다섯 가라가 그 아래에 있었다. 나중에 신가라와 고자·고령·벽진 가라가 약해져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상실하고, 임나·아라 두 가라만이 강성하여 신라와 대립했다. 두 가라는 광개토태왕이 왜군을 칠 때 상당한 병력을 동원해서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 왜군과 싸웠다.

 


그러나 신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자, 놀란 두 가라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신라·백제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두 가라에게 동맹 가입을 종용했다. 이로써 신라·백제 양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이 신라·백제·임나·아라 4개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바뀌게 되었다.

 


광개태왕이 왜군을 물리쳐준 은혜를 잊고 신라가 백제와 연합한 사실에 크게 분노한 장수태왕은 서기 481년에 대군을 동원해서 신라의 동북 지방을 침입했다. 신라의 소지마립간이 몸소 비열홀 즉 지금의 안변까지 가서 방어했지만 대패했다. 고구려군은 승세를 타고 남진하여 고명 즉 지금의 회양 등 일곱 성을 함락했다. 이에 두 가라국과 연합한 백제 동성대왕은 여러 길로 구원병을 파견해 고구려 군대를 깨뜨리고 잃은 땅을 회복했다(다음 장 참고).(6)

 
 
 

 

<자료출처>

 

 

(1)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3)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4)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5)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6)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313~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