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1. 가야(3)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1. 가야(3)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

대야발 2025. 12. 16. 15:20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관제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농부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고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를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1)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나라에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2)

 

 

 

<자료출처>

 

(1)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참고자료>

 

 

김해 가락국 시조대왕 수로왕 춘향대제 봉행 :: 경남신문 (knnews.co.kr)

 

 

[가야역사를 찾아서] (5) 수로왕릉과 허왕후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