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옥저(1) 동옥저는 高句驪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본문
옥저(1) 동옥저는 高句驪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대야발 2026. 2. 7. 15:14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옥저(東沃沮)
동옥저는 高句驪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 쯤 된다.
土質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五穀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邑과 촌락에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며 步戰을 잘한다. 言語·飮食·居處·衣服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들은 장사지낼 적에는 큰 나무 椁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丈이나 되며 한쪽끝 부분을 열어 놓아 문을 닫는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시체는 우선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하고, 뒤에 뼈만 추려 椁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며,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木像을 새기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한다.
○ [漢] 武帝가 朝鮮을 멸망시키고서 沃沮 땅으로 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夷貊의 침략을 받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沃沮를 縣으로 고쳐 樂浪[郡]의 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後漢] 光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沃沮侯로 삼았다.
그 나라는 지역이 좁고 작은데다가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의 大人을 뽑아 使者로 삼아서 邑落을 [토착 渠帥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 租稅로서 貂布·魚鹽 및 여타 해산물을 징수하고, 美女를 뽑아 그 종이나 妾으로 삼았다.
○ 또 北沃沮가 있으니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南沃沮와 같으며, 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 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산을 내려와 邑落에서 산다.
그 나라의 老人이 이야기하기를,
“일찍이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한 벌 주웠는데, 그 모양은 마치 中[國]人의 옷과 같고 두 소매의 길이는 3丈이나 되었다.”
하며, 또 이르기를,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 가운데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말을 해 보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 가운데에 女人國이 있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그 나라에는 神井이 있는데 여자들이 그 신정을 엿보면 곧 자식을 낳는다’고 하였다.”(1)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동옥저(東沃沮)
○ 東沃沮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 漢나라 초에 燕의 亡命客 衛滿이 朝鮮의 王이 되면서 沃沮의 [邑落들은] 모두 [朝鮮에] 복속케 되었다.
漢 武帝 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는데, 沃沮城으로 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夷·貊의 침략을 받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玄菟의 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東部都尉를 설치하고 不耐城에 治所를 두어 별도로 領東 7縣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의 [邑落도] 모두 현이 되었다.
○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변경의 郡을 줄였는데, [沃沮의 東部]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華麗·沃沮등의 諸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이들 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功曹·主簿 등의 諸曹를 두었는데, 濊人이 모두 [그 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縣國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 [東沃沮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서 大人을 두고 使者로 삼아 [토착 渠帥와]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大加로 하여금 租稅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草類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동옥저 사람)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五穀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步戰을 잘한다. 음식·주거·의복·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
魏略: 그 나라의 혼인하는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成人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 그들은 장사를 지낼 적에는 큰 나무 槨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丈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槨 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써 모양을 새긴다. 또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의 문 곁에다 엮어 매단다.
○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王 宮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毌丘儉은]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沃沮의 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級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宮은 北沃沮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 王頎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宮을 추격,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어느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일을 바람부는 대로 표류,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 하였다. 그 섬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달이면 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다.”
라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
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시체는 마치 中國사람 같고 입은 옷의 두 소매 길이는 3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에 밀려온 배 한척을 잡았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생포하여 함께 말을 해 보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이 말한]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2)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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