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 소동파가 오고 싶어했던 옥저
등록 2015.03.23 16:49:35수정 2016.12.28 14:44:58
등록 2015.03.23 16:49:35수정 2016.12.28 14:44:58
6월28일부터 8월3일까지 러시아 조사단과 함께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유적을 발굴한 한국전통문화학교 발굴단(단장 정석배)은 주거지 1기에서 발해 온돌과 옥저 온돌을 차례로 발굴했다.
◇옥저·발해 온돌이 한꺼번에=지난 7월22일이었다.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눈이 빛났다.
발굴단은 이미 이 발해 주거지에서 발해시대 쪽구들(부분 온돌) 1기를 확인한 바 있다. 그때 확인한 발해 쪽구들의 길이는 4.5m가량이었고,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의 구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발해인들이 버린 생활 폐기물 구덩이를 파다가 바닥 땅부분에 불에 탄 흙(소토) 2줄기를 본 것이다.
“아, 이건 옥저의 쪽구들이야.”
정교수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소토의 흔적을 파서 옥저-크로노브카(러시아에서 옥저시대와 비슷한 초기철기시대를 일컬음) 문화층에서 ‘ㄱ’자 모양의 쪽구들을 확인한 것이다. 아궁이는 폭이 약 60㎝로 약간 넓은 타원모양이고, 위에는 작은 판석 3장이 놓여 있었다. 아래쪽은 재가 충진돼 있었고, 바닥은 불에 딱딱하게 달궈져 있었다. 쪽구들의 전체길이는 2.2m가량 됐다.
이렇게 발해 온돌(AD 698~926년)이 확인된 주거지 바로 1m 밑에서 옥저(BC 3세기~AD 3세기)의 온돌을 확인한 것은 획기적인 성과다. 온돌의 기원문제를 가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면면히 흘러온 우리 역사의 일맥을 밝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온돌의 기원은 옥저=온돌의 기원은 문헌상으로 “고구려의 풍속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겨울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한다”(후당서)고 돼있다. 이 문헌 자료는 ‘온돌의 고구려 기원설’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옥저, 즉 북옥저 기원설이 힘을 받고 있다. 연해주 지역에서 기원전후의 온돌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가장 이른 시기(BC 3~BC 2세기가량)의 옥저 쪽구들이 발견됨으로써 옥저기원설에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또한 옥저 온돌 1m 위쪽에서 발해 온돌이 발견된 것도 주목거리다. 옥저와 발해 사이에는 약 400년간의 시간 공백이 있다.
이 시기 연해주 지역은 말갈의 영역이었다. 송기호 서울대교수는 “말갈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는 쪽구들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쪽구들과 말갈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유적(체르냐치노 유적)을 보면 그렇습니다. 옥저와 발해문화층 사이에 말갈의 문화층, 즉 온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정석배 교수)
결국 고고학적 층위를 살펴보면 온돌은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 민족만의 고유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옥저 이후 400년간이나 발걸음을 끊었던 우리 민족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둥지를 틀었을 때 고유의 난방법인 구들을 얹고 불을 땠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 이후 900년 이상 연해주에서 사라진 우리 민족은 19세기 중엽부터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이곳에 이주함으로써 다시 역사 속에 나타난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쪽구들뿐 아니라 옥저-크로노브카 문화층에서 토기가마의 흔적을 찾았다. 이밖에도 생활폐기물 유구와 토기, 조개껍데기 단추, 뼈 장신구, 골·철촉 등 다량의 옥저 및 발해유물이 쏟아졌다.
◇연해주에 이어진 2300년의 역사=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 연해주에서 우리 역사의 맥이 2300년간 끊길 듯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옥저와 발해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불과 70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한인 이주민의 흔적도 보입니다.”
바로 이 옥저·발해 주거지에는 1937년 스탈린의 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인들의 판잣집과 저장시설인 움터, 그리고 백자편들이 확인된다. 유적 바로 곁에는 옥저와 발해인, 그리고 고려인의 터전을 묵묵히 지켜본 라즈돌나야강이 흐르고 있다. 발해의 솔빈부(지방통치조직의 하나)를 따라 흐른다 해서 솔빈강이었는데 러시아가 이름을 바꿨다.
“옥저인, 발해인, 한인 이주민 모두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동일민족입니다. 그러니 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겁니다.”
정석배 교수는 “이번 발굴성과는 한반도를 벗어난 이 연해주 땅에서 우리 역사의 맥락이 2000년 이상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체르냐치노|이기환 선임기자〉(2)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진다. 온돌방은 한국이 개발하고 보급한 대표적인 난방시스템이다. 온돌은 기원전 4세기께 두만강 유역의 옥저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하였다. 옥저인들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이기며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추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불을 땐 뒤 이 열기를 방바닥으로 보내 열효율을 높이는 온돌을 개발했다. 옥저인들의 생활의 지혜는 곧바로 널리 퍼져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확산하였다. 기원전 1세기께 남한 일대까지 퍼져서 남해안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던 삼천포 늑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사실, 온돌과 비슷한 구조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로마에도 온돌과 비슷한 ‘하이퍼코스트’(hypocaust)가 있었고, 알래스카에서도 발굴된 일이 있다. 필자도 몇년 발굴했던 러시아 아무르강 수추섬의 신석기시대 집터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옥저인의 온돌과 달리 다른 방바닥 난방시설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온돌이 열효율은 좋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만들면 유독가스가 집 안으로 새거나 불이 날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추운 만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울을 나야 했던 옥저인의 온돌만이 안전성을 담보했고, 지금까지 이어져서 한국을 대표하는 난방문화로 이어졌다. 물론 중국에선 북중국에서 나왔으니 중국이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한족이 만든 것이라면 굳이 만주 일대에서만 발견될 리가 없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예맥 계통 주민이 온돌을 발달시키고 확산시킨 주인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온돌은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시베리아 한가운데 바이칼 동편에는 한반도 1.5배 크기로 몽골 계통 원주민들인 부랴트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 근처엔 2천년 전 흉노인들이 만든 대표적인 성터인 이볼가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소련 시절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흉노의 성터였다. 레닌그라드대학의 고고학과 교수였던 다비도바(1920~2000)는 1949~74년 사이에 오로지 삽과 호미만을 사용하여 7000㎡ 넓이의 유적에서 주거지 51개를 발굴해냈다. 얼핏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50여년 전 울란우데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일주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다. 다비도바 교수는 당시 드물었던 여성 고고학자로서 쉽지 않은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전체 면적이 약 11㏊(헥타르)에 달하는 이 성터의 내부에는 마치 신도시처럼 일렬로 줄을 맞춘 주거지들이 발견되었다. 각 집 내부엔 ㄱ자의 ‘쪽구들’이 만들어졌다. 집의 모서리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열기는 집 벽을 타고서 집 바깥의 굴뚝으로 나가는 구조다. 옥저가 발명하고 고조선과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온돌이 멀리 바이칼에서까지 활용했음이 확인된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발굴 당시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볼가 성터에선 온돌과 함께 대량의 중국 계통 유물이 발견됐다. 당시 1970년대 이후는 중-소 국경분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은 자칫 영토분쟁의 빌미가 될까 봐 이볼가 성터를 흉노에 잡혀 온 ‘중국인 포로수용소’라는 공식 견해를 내놨다. 7~8년 전에 내가 일본과 몽골에서 흉노 성터 연구를 발표할 때 한 일본인 노학자는 그 내막을 알고선 이제까지 이볼가 성터를 포로수용소로 알았다면서 허탈해했었다.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전무하던 시절의 해프닝이었다.
흉노는 유르트(천막)에 살면서 평생을 이동하는 대표적인 유목민이다. 그런데 흉노가 이런 발달한 성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선뜻 믿기는 어렵다. 사실 초원에 성터를 건설한 것은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의 발로였다. 유목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유제품과 고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곡식, 무기, 마구 등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유목민들은 수천년 전부터 초원 주변 정착민들과 교류해왔고, 바로 그것이 고대 실크로드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흉노가 세력을 키울 때 중국은 흉노를 지속적으로 견제했다. 이에 흉노는 안정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생산기지가 필요했고, 당시 주변의 여러 사람을 받아들여서 각종 성터를 초원 곳곳에 건설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흉노의 정착기지로 모였다. 이볼가 성터에서는 중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장간과 토기를 만들었으며, 만주 일대에서 온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흉노의 국가 형성과정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든 미국과 유사하다.
가장 큰 문제는 정착민에겐 익숙하지 않은 바이칼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에 흉노는 겨울철 난방에 최적화된 한국의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각 지역의 성지에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온돌 주거지를 지었다. 최근 몽골의 셀렝가강 일대에서 흉노가 운영했던 성지를 조사하는데, 그 성지에선 예외 없이 온돌 주거지가 나온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정착민에겐 익숙하지 않은 바이칼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에 흉노는 겨울철 난방에 최적화된 한국의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각 지역의 성지에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온돌 주거지를 지었다. 최근 몽골의 셀렝가강 일대에서 흉노가 운영했던 성지를 조사하는데, 그 성지에선 예외 없이 온돌 주거지가 나온다. 각 온돌은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형식과 크기가 거의 동일하다. 온돌은 세심하게 시공하지 않을 경우 열효율이 낮거나 불연소된 연기가 집 안으로 새는 경우도 있다. 50대 이상의 독자라면 겨울철 빈번했던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용하는 연료, 난방 습관, 고래(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의 높이와 형태를 세심하게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이렇듯 흉노가 중국과 경쟁하여 초원에서 제국을 성립하는 기반이 된 각종 신도시의 건설에 한국인의 지혜가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흉노와 한국 고대사의 관계는 비록 간략하지만 중국의 역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서>(漢書)에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라는 기록이 있다. 흉노와 경쟁하던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이 통하는 것을 걱정한 대목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 이래 흉노는 300여년간 중국을 위협해왔다. 그 흉노의 강력한 국력의 배경에 고조선과의 관계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또 다른 <후한서>의 기록은 더욱 구체적이다.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한 왕망이 고구려인들에게 흉노를 없애라고 명령하자, 이에 반발한 고구려인들이 흉노로 도망가고 같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중국을 역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 최고였던 흉노의 군사력과 기마문화의 흔적은 고조선과 부여에 잘 남아 있다. 대신에 고조선과 그 후예들이 추운 지역에서 도시를 만들던 노하우는 흉노에 전달되었다. 중국이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두려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기 1세기경에 흉노는 결국 중국에 패하고 그 지배세력은 서쪽으로 도망쳐서 훈족을 이루었다. 하지만 바이칼과 몽골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그 이후에 발흥한 선비의 일부가 되면서 그들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더는 바이칼 지역에서 온돌은 쓰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초원이라는 환경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초원 지역은 삼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온돌을 쓰기에는 너무 땔나무가 부족하다. 오죽하면 흉노 귀족들은 무덤에 쓸 나무가 풍부한 산골짜기 근처에 무덤을 만들 정도였다. 유목생활을 한다면 이동하면서 땔감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지역에 정착해서 온돌을 사용한다면 결국 그 주변의 삼림자원은 고갈된다. 비슷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도 조선 시대 후기에 양반이 기하급수로 증가하면서 온돌집이 널리 유행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 도심 근처의 산들은 모두 민둥산이 됐다. 하물며 초원에서 온돌 주거지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흉노 이후의 돌궐, 유연 같은 초원제국들은 성지 건설을 포기했다. 이와 함께 온돌을 만들던 전통도 사라졌다.
몽골 지역에 다시 온돌이 등장한 것은 흉노 이후 천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다. 이 지역에 다시 온돌을 건설한 사람들은 발해의 유민이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이주시킨 발해의 유민이 살던 몽골의 친톨고이(역사에는 진주(鎭州)라고 기록됨) 성터에서 고래가 여러번 돌아가는 발달한 형태의 온돌이 생생하게 등장했다.
바이칼에서 흉노가 만든 온돌은 사라졌지만, 놀랍게도 그 전통은 카자흐스탄 일대의 실크로드로 이어졌다. 서기 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대상(카라반)을 위한 숙소인 ‘사라이’라는 고급 저택에 온돌이 등장한다. 아궁이 대신에 탄두르 화덕에 불을 땐 열기를 방바닥을 지나가는 고래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나 마르코 폴로가 지나갔던 숙소인 사라이치크 유적에서도 발달한 온돌이 발견되었다. 그들도 삭풍 몰아치는 사막을 가로지르며 얼었던 몸을 온돌에 녹였을 것이다. 추운 만주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명품인 온돌은 이렇듯 초원에 도시를 건설하고 지역들을 잇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의 역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고학의 도움으로 온돌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관련성을 밝히는 또 다른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3)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하> 러시아 옥저 유적
옥저에서 처음 발견된 청동투겁창… 기원전 4세기 고조선 유물로 추정
모피 무역 중심지였던 고조선… 연해주와의 교역 보여주는 증거
고립된 부족국가로 알려졌던 옥저…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확인
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0>
(3)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79839.html
(4) [단독]고조선 청동투겁창, 러시아 연해주서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 2017-08-16 김상운 기자
(5)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428/77821385/1
동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옥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