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

동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예(東濊, 기원전 82년 ~ 6세기경)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동옥저와 자리잡았던 초기 부족 국가의 하나이다. (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른다.[1]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강원도 강릉(명주)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이르렀고 영서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하였는데, 서쪽의 마한·백제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6세기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신라의 하슬라주(何瑟羅州)로 편입되었다. 진흥왕은 옛 동예 영토의 위쪽 지방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움으로써 신라의 영토임을 확실시하였다.

역사[편집]

지금의 원산에서부터 강릉까지 사이의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족 계열의 부족 국가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군현에 속해 있다가 6세기 이후 멸망했다.

멸망[편집]

6세기 이후, 동예의 옛 땅은 확실히 신라의 영토가 되었음이 문헌과 금석문, 발굴을 통해 입증되었다. 현재 멸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몇가지 가설이 제시되어 있다.

신라의 정복[편집]

신라가 전성기일 때 함경도 일대 동해안까지 진출함으로써 신라에 정복되었다는 설이다.[2]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북진으로 신라에 완전 병합되어 하슬라주가 된 사실과, 강원도 위쪽 지방인 함경남도에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된 사실로 볼 때, 가장 유력한 설로 평가된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 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9년(548) 봄 2월에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여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은 장군 주령(朱玲)[3]을 보내서 굳센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 김부식(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이 (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은 장군 주진(朱珍)[4]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朱珍)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

— 김부식(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자연적 멸망[편집]

동예의 정치형태는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군장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왕권이 한곳으로 모이지 못했다. 따라서 내부적인 분열, 반란 등에 의해 스스로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기타[편집]

  • 고구려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지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병합하자 동예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는 가설이다. 다만 동예가 고구려의 정식 영토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속국의 형태로 예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예의 직접적인 멸망에 대해 학계에서 인정받는 가설은 아니다.
  • 또한 해외 유목민의 이주로 인해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위치[편집]

예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니 본시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위나라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나라 안에 옛 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맥의 땅”[5]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삼국지 부여전 등)에서 부여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라고 기술하여, 동예의 위치를 지금의 강릉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는가’라고 기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라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강릉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그 수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28만 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학회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두 사서의 예를 별개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6]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7]

정치·문화[편집]

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한편 책화(責禍)라는 씨족 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책화란 다른 마을을 침범할 경우에는 재물과 가축으로서 그를 보상한다는 제도이다. 또, 아래 족외혼에도 역시 씨족사회의 유습이 드러난다. 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특산물[편집]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8]
  •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풍습[편집]

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족외혼),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별점).

 

 

[옥저]

옥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옥저(沃沮, 기원전 3세기 ~ 285년)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1][2],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3]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4]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조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때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나 구루로 나타내었고 고구려어로 (城)을 의미한다고 한다.[5]

위치[편집]

옥저는 고대에서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 사회이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통설[편집]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6]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다른 의견[편집]

다음은 통설과 다른 소수의견이다.

  • 윤내현 주장 - 옥저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
  • 후한서》에서,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8] 이에 대하여 이덕일은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9]
  •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10]라고 하였다.[9]

변천[편집]

남옥저의 중심지역의 집단은 기원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108년, 다시 의 군현에 소속되었다. 임둔군에 소속된 후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폐지되자 현도군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제2 현도군으로 이동하였을 때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고 여겨진다.[11]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 관구검이 이끄는 (魏)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고, 285년에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시작되었다.[12]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이후 동부여를 이루었다고 보는데 이 동부여는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입력 2017-08-16 03:00업데이트 2017-08-16 03:00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하> 러시아 옥저 유적
옥저에서 처음 발견된 청동투겁창… 기원전 4세기 고조선 유물로 추정
모피 무역 중심지였던 고조선… 연해주와의 교역 보여주는 증거
고립된 부족국가로 알려졌던 옥저…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확인
러시아 연해주 아누치노 지역의 옥저 유적에서 발견된 고조선 청동투겁창. 길이 21㎝, 최대 폭 3.9㎝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보다 큰 편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기원전 4∼3세기 고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銅모·동모)이 러시아 연해주의 옥저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다. 옥저가 모피 등을 매개로 요동지역의 고조선과 원거리 교역을 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구성된 취재팀은 연해주 아누치노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 1점을 현지에서 확인했다. 해당 유물은 한 러시아 주민에 의해 기원전 4∼1세기 크로우놉카(옥저) 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1cm, 폭 3.9cm의 청동투겁창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날 끝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특히 숫돌로 등날을 갈아 움푹 파인 흔적이 투겁창 표면에 남아 있었다. 등날을 간 흔적이 많지 않은 걸 감안할 때 몇 번만 사용한 뒤 무덤에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자루를 투겁창에 고정하기 위해 등날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중국 지린(吉林) 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강 교수는 투겁창의 형태가 위아래로 가늘게 떨어지고 한반도 출토품보다 대형인 점 등이 후기 고조선의 세형동검 양식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유물은 요동 지역의 후기 고조선 문화가 지린성 중부를 거쳐 연해주로 유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조선 청동투겁창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 강 교수는 고조선이 압록강 일대와 중원을 잇는 모피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동물 뼈와 고대 화폐 명도전의 출토지역을 감안할 때 고조선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모피를 생산해 중원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고조선의 원거리 모피무역 루트에 옥저도 포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옥저가 자리 잡은 연해주는 예부터 모피와 약초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해주 콕샤롭카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발해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에서 발견된 기원전 4∼3세기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銅劍)이 주목된다. 당시 이 동검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된 중국 위나라 화폐 ‘칠원일근’과 함께 발견됐다. 강 교수는 “고조선 청동투겁창과 부여 동검은 중원과 요동지역, 연해주로 이어지는 고대 모피무역 과정에서 옥저로 넘어온 유물로 추정된다”며 “옥저가 고립된 부족국가라기보다 멀리 고조선,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연해주 미하일롭카 지역에서도 니콜라옙카 출토품과 비슷한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동검 근처에서는 중국 화폐인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도 발견됐다.

강 교수는 “연해주는 이미 기원전부터 옥저로 대표되는 한민족 고대사의 한 축을 이뤘다”며 “이후 발해가 연해주로 진출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아누치노=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입력 2016. 4. 28. 09:57

연해주 옥저 유적에서 나온 촉각식 동검 (daum.net)

 
 

(서울=연합뉴스)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유역의 옥저 유적에서 기원전 3~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식 촉각식(觸角式) 동검.

고대 부족사회인 옥저가 부여와 교류한 증거라고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설명했다. 2016.4.28 [강인욱 교수 제공]

photo@yna.co.kr

 

 

입력 2016. 4. 28. 09:57

(서울=연합뉴스)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유역의 옥저 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위(魏)나라의 동전인 '천원일근'.

고대 부족사회인 옥저가 부여와 교류한 증거라고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설명했다. 2016.4.28 [강인욱 교수 제공]

photo@yna.co.kr

 

 
 

입력 : 2007.08.17 03:43

러시아 연해주에서 2300년 전의 옥저 온돌(쪽구들)과 발해 온돌이 한꺼번에 확인됐다.

6월28일부터 8월3일까지 러시아 조사단과 함께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유적을 발굴한 한국전통문화학교 발굴단(단장 정석배)은 주거지 1기에서 발해 온돌과 옥저 온돌을 차례로 발굴했다.

◇옥저·발해 온돌이 한꺼번에=지난 7월22일이었다.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눈이 빛났다.

 

발굴단은 이미 이 발해 주거지에서 발해시대 쪽구들(부분 온돌) 1기를 확인한 바 있다. 그때 확인한 발해 쪽구들의 길이는 4.5m가량이었고,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의 구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발해인들이 버린 생활 폐기물 구덩이를 파다가 바닥 땅부분에 불에 탄 흙(소토) 2줄기를 본 것이다.

“아, 이건 옥저의 쪽구들이야.”

정교수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소토의 흔적을 파서 옥저-크로노브카(러시아에서 옥저시대와 비슷한 초기철기시대를 일컬음) 문화층에서 ‘ㄱ’자 모양의 쪽구들을 확인한 것이다. 아궁이는 폭이 약 60㎝로 약간 넓은 타원모양이고, 위에는 작은 판석 3장이 놓여 있었다. 아래쪽은 재가 충진돼 있었고, 바닥은 불에 딱딱하게 달궈져 있었다. 쪽구들의 전체길이는 2.2m가량 됐다.

이렇게 발해 온돌(AD 698~926년)이 확인된 주거지 바로 1m 밑에서 옥저(BC 3세기~AD 3세기)의 온돌을 확인한 것은 획기적인 성과다. 온돌의 기원문제를 가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면면히 흘러온 우리 역사의 일맥을 밝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온돌의 기원은 옥저=온돌의 기원은 문헌상으로 “고구려의 풍속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겨울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한다”(후당서)고 돼있다. 이 문헌 자료는 ‘온돌의 고구려 기원설’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옥저, 즉 북옥저 기원설이 힘을 받고 있다. 연해주 지역에서 기원전후의 온돌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가장 이른 시기(BC 3~BC 2세기가량)의 옥저 쪽구들이 발견됨으로써 옥저기원설에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또한 옥저 온돌 1m 위쪽에서 발해 온돌이 발견된 것도 주목거리다. 옥저와 발해 사이에는 약 400년간의 시간 공백이 있다.

이 시기 연해주 지역은 말갈의 영역이었다. 송기호 서울대교수는 “말갈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는 쪽구들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쪽구들과 말갈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유적(체르냐치노 유적)을 보면 그렇습니다. 옥저와 발해문화층 사이에 말갈의 문화층, 즉 온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정석배 교수)

결국 고고학적 층위를 살펴보면 온돌은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 민족만의 고유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옥저 이후 400년간이나 발걸음을 끊었던 우리 민족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둥지를 틀었을 때 고유의 난방법인 구들을 얹고 불을 땠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 이후 900년 이상 연해주에서 사라진 우리 민족은 19세기 중엽부터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이곳에 이주함으로써 다시 역사 속에 나타난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쪽구들뿐 아니라 옥저-크로노브카 문화층에서 토기가마의 흔적을 찾았다. 이밖에도 생활폐기물 유구와 토기, 조개껍데기 단추, 뼈 장신구, 골·철촉 등 다량의 옥저 및 발해유물이 쏟아졌다.

◇연해주에 이어진 2300년의 역사=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 연해주에서 우리 역사의 맥이 2300년간 끊길 듯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옥저와 발해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불과 70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한인 이주민의 흔적도 보입니다.”

바로 이 옥저·발해 주거지에는 1937년 스탈린의 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인들의 판잣집과 저장시설인 움터, 그리고 백자편들이 확인된다. 유적 바로 곁에는 옥저와 발해인, 그리고 고려인의 터전을 묵묵히 지켜본 라즈돌나야강이 흐르고 있다. 발해의 솔빈부(지방통치조직의 하나)를 따라 흐른다 해서 솔빈강이었는데 러시아가 이름을 바꿨다.

“옥저인, 발해인, 한인 이주민 모두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동일민족입니다. 그러니 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겁니다.”

정석배 교수는 “이번 발굴성과는 한반도를 벗어난 이 연해주 땅에서 우리 역사의 맥락이 2000년 이상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체르냐치노|이기환 선임기자〉

 

 

  • 입력2015.03.23 16:49

[하도겸 칼럼] 소동파가 오고 싶어했던 옥저 : ZUM 뉴스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6>

◇ 흑수(黑水)와 옥저(沃沮)

말갈과 발해 문헌을 뒤져보면, 흑수(黑水)와 옥저(沃沮)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송대(宋代) 소식(蘇軾: 1036∼1101) 즉 소 동파(東坡)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그 시인 맞다. 이 사람이 효자여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관리에 부임 안 하고 바로 어머니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치른 후에 동파거사는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짓고는 ‘남행집’이라는 책도 냈다. 여행하기 위해서 물길에도 관심이 많았던 소식은 시간을 내서 우리나라 금수강산에 와보고 싶었을 것이다.

 
소동파가 지은 지도책인 듯한 ‘지장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진한(辰韓) 북쪽에 남과 북의 두 흑수(黑水)가 있다. 흑수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물 이름이기도 한 흑수를 이름으로 쓰고 있는 종족도 있다. 말갈 7부의 하나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다른 6부가 발해에 복속되자 726년 발해 몰래 당에 사신을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당은 이때다 싶어 바로 장사(長史)를 파견하고 흑수국의 이름을 흑수주로 바꾸고 기미주(覊縻州)로 삼았다. 발해 무왕은 당연한 일인데도 힘이 아주 셌던지, 당을 치기 위해 먼저 당과 동맹을 맺은 흑수말갈을 쳤다.

옥저라는 이름을 찾아보니, 고구려 동명제(東明帝)는 왕이 된 지 10년만인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42년인 A.D. 23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가호가 신라에 투항했다. 또 혁거세 52년인 B.C.5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란 땅도 있었나 보다.

사실 북, 남, 동은 모두 어느 나라가 이 기사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붙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도 문헌을 쓴 사람이 어디에 거주했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보통 수도에 거주했으니 수도 보다 북쪽에 옥저가 있었다면 북옥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방향이 도치돼 표기될 수도 있다. 남옥저는 옥저의 남쪽지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명칭만 다를 뿐 남해안 일부지역에서 보이는 초분(草墳)의 풍속과 같이 복장(複葬) 또는 이차장(二次葬)과 형사취소혼의 풍속을 가진 옥저들은 모두 하나의 나라인 옥저일 수 있다.

◇ 이서국(伊西國)

이서국 사람들이 신라 제3대왕인 노례왕(弩禮王) 14년인 A.D. 37년에 금성(金城)을 쳤다.

‘삼국사기’ 권2 유례이사금 14년(297)조에는 이서국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는 대병으로 막았으나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홀연히 기이한 병사(異兵)가 나타나 신라병과 연합해 이를 물리쳤다. 이긴 후에 보니 이병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선왕인 미추왕의 왕릉 죽현릉(竹現陵)에 죽엽(竹葉)이 쌓인 것을 보고는, 선왕이 음덕으로 대나무 잎으로 병사들을 만들어 신라를 도운 것으로 믿었다. ‘삼국유사’ 기이권제일 미추왕 죽엽군조(味鄒王竹葉軍條)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까닭에 위의 노례왕은 3대 유리왕이 아니라 14대 유례왕인 듯하다. 일연스님께서 없는 자료로 글을 쓰다 보니 애를 많이 먹은 듯하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일연스님은 안 본 걸까? 애써 외면한 걸까?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또 다른 ‘구삼국사’일까?

운문사(雲門寺)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가 있다. 이 장부에 “632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적혀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주변의 여러 사찰(말사)들이 본사인 운문사를 유지하기 위해 논밭을 바친 내용을 적은 장부인 듯하다. 영미사가 어딘지 잘 모른다.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서 어딘지 알았으면 좋겠다. 어딘가 논밭으로 뒤덮인 폐사지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절에서 바친 논밭에서 키운 곡식으로 공양미를 올리고 그것으로 생활했던 것 같다. 지금 조계종의 일부 권승처럼 축재나 도박에 쓰지는 않았기를 빈다. 적어도 효심이 지극한 국존 일연선사가 머물렀던 절인데 설마 아닐 것이다.

* 이글은 일연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상상에 기반을 둔 재해석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일연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됐을 것이기에 원문(진한 글자)을 조목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한 것도 있음을 알린다.

dogyeom.ha@gmail.com

 

 

[낙랑국]

 

낙랑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낙랑국(樂浪國) 또는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은 1세기경인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비정되는 국가이다. 추정하는 위치나 이름으로 인해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과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국 왕의 존재로 편의를 위해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

역사[편집]

서기 14년,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것을 기화로, 낙랑 역시 신라를 공격하였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낸다.[2] 신라 본기에 따르면 37년에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사가 있어, 32년으로 기술한 위의 기록과 멸망 시점이 엇갈린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 대무신왕#낙랑 정벌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낙랑과 낙랑군[편집]

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가 낙랑의 위치로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국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랴오닝성 지역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의 고분 및 유물들이 모두 낙랑국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5] 또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6] 동예 일대에 위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7]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김부식 (1145) 남해 차차웅 조(條)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 知賊衆乃止” (즉위 11년(14년)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 동쪽에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서 적의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중지하였다.)
  2.  《삼국사기》에는 이 멸망 기사 이전에도 백제 및 신라가 그 초기에서부터 낙랑과 군사적 갈등을 겪은 기사가 꾸준히 등장하나, 대부분은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다만 위의 멸망 기사는 최리를 태수가 아닌 낙랑의 '왕(王)'으로 칭하고 있어 '낙랑'의 성격이 모호해진다. '왕'으로 칭하고 있으니 한나라의 군인 한사군은 아니며 또 다른 나라, 즉 낙랑국이 존재한다는 설이 있다.
  3.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4.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5.  《역사연구》,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 (정확한 권호수, 필자, 연도 등은 불명)
  6.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선희 교수,
  7.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

 

 

기사입력 2011/12/05 [07:13] 

출토옷감서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breaknews.com)

<특별기고>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박선희 교수 |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많은 양의 누에천(실크)이 출토되었다. 직물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복식유물의 한 구성부분으로 출토되었는데, 누에천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출토된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자료는 당시의 사회와 경제수준을 가름할 수 있게 해 줄 뿐 만 아니라, 무덤 주인의 국적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기존의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본 평양설과 북한학자들에 의해 대두된 요동설, 그리고 요서지역에 위치할 것으로 보는 난하설로 구분된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복식유물에 관한 분석은 비교적 소홀히 되었고,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에 대한 비교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직물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일제시대 교도섬유대학에서 처음으로 평양 낙랑구역에 위치한 왕우무덤, 채협총, 토성동 486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진 누에천을 실험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광무덤이나 정백리무덤과 마찬가지로 이 무덤들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유적일 것으로 분류되어 출토된 직물의 문화적 성격도 당연히 중국 한나라의 생산품일 것으로 단정되었다.
 
이처럼 일본 학자들이 한국 고대 누에천에 대해 단순한 분석의 틀을 가지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은 대동강유역을 낙랑군의 위치로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하였고, 또한 고조선에서 누에천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고 믿어왔다. 종속적 해석의 연구  경향은 요즈음 신진학자들의 연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서기 전 12세기 말경 箕子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정론처럼 통용되었다. 그 까닭은 문헌자료인 󰡔漢書󰡕와 󰡔後漢書󰡕에 기재된 서로 다른 내용을 무분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중국에서 사직물 생산은 서기전 2700년경부터였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인 서기전 2209년경부터 중국과 계속 우호적인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 시기에 중국은 500년 이상 축적된 양잠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도 양잠기술을 수입하지 않고 있다가 서기전 12세기경에 와서야 비로서 箕子로부터 양잠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므로 기자에 의하여 고조선에 양잠기술이 전달되었다는 󰡔후한서󰡕 「동이열전」에 나오는 기록은 기자의 치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된 것이었다.
 
고대 한국은 중국에서 누에천을 생산한 시기인 서기전 2700년보다 앞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이미 야생누에로부터 누에천을 독자적으로 생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령성 동구현 后洼유적에서 누에의 조소품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 유적의 연대를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으로 밝혔다.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파림우기  나사태유적 등에서도 옥으로 만든 누에가 출토되었다. 또한 고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통잎뽕나무 조각무늬가 새겨진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한민족의 거주지역에서 메누에로부터 토종 뽕누에로 순화된 시기가 신석기시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학자 조희승이 평양의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고조선시기의 누에천을 실험‧분석한 결과 고조선에서 생산했던 누에천의 독자성과 고유성이 확인되었다.
 
조희승은 해방 전후시기에 낙랑구역 11개 무덤들에서 출토된 누에천을 실험 분석하여 그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한 이를 근거로 일본 교도섬유대학에서 진행한 무덤들의 분석결과는 한민족이 생산한 누에천의 특징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누에천의 특징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의 누에품종이 중국의 넉잠누에가 아닌 석잠누에라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이 평양일대에서 출토된 누에천은 조선 토종의 석잠누에로 부터 뽑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 연원은 중국의 산동일대에서 넘어 온 중국계통 석잠누에라고 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絹직물(가공하지 않은 누에실로 짠 천)과 縑직물(가는 누에실을 겹쳐 촘촘히 짠 천), 羅직물(누에실로 성글게 짠 천)에 대한 분석 내용을 중국 누에천과 비교하면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에 속하는 직물이 출토 된 평양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한민족이 생산한 석잠누에의 누에천 만이 출토되었다. 둘째는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누에천들은 같은 시기 중국의 것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독창적인 직조방법과 염색기술 등을 갖는다. 셋째는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위 표에 보이는 직물들이 생산된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까지의 기간에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낙랑구역의 직물들이 보여주는 여러 사실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종래의 통설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는 직물과 함께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만들어진 유물도 있지만 한민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석암리 212호 무덤유적에서는 요녕성과 한반도 지역의 특징적 청동기인 세형동검과 함께 검자루 맞추개가 출토되었고, 고조선시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마구장식과 청동단추, 청동방울, 잔줄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낙랑구역 정백동의 부조예군무덤에서는 고조선 유물의 특징인 여러 개의 청동방울과 함께‘夫租薉(濊)君’이라고 새겨진 銀印이 출토되었는데, ‘부조예(예)군’은 고조선과 위만조선에서 사용했던 관직명이었음이 이미 밝혀진바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구결과와 함께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사직물이 고조선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밝혀져 이를 뒷받침한다. 왕우무덤(석암리 205호 무덤)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永平 12년”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영평 12년은 東漢 明帝시대로서 서기 69년이다. 이로 보면 왕우무덤이 조성된 연대는 서기 69년 보다 이르지 않을 것이다.
 
토성지역에서는 ‘樂浪禮官’·‘樂琅富貴’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에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것이 출토되어 이 지역을 한사군의 낙랑군지역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지역에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기 때문에 낙랑예관 · 낙랑부귀 등의 명문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문은 이 지역이 반드시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기와의 명문은 서예사적인 연구에서도 중국과 구별되는 한민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기와 명문의 필획에 나타나는 특징에서 볼 때 중국의 기와명문이 명문을 중심으로 문양과 독립적으로 발전한 데 비하여 낙랑의 기와명문은 문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문양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즉 낙랑 기와명문에서 나타나는 필획이 문양화되고 점획이 圓點化하는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자를 주된 장식 수단으로 하는 중국미술에 비하여 문양을 주된 장식수단으로 하는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채협무덤(남정리 116호 무덤)에서는 목찰이 출토되었다. 木札의 내용은,“비단 3필을 옛 관리인 조선승 전굉이 아전을 보내어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하여 북한학자 손영종은 조선승 전굉이 그 부근에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오히려 전굉이 채협무덤 피장자 밑에서 복무하다 먼 곳인 낙랑군으로 가서 조선승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재물을 보냈다고 해석해야 할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일제시기 토성지역에서는 약 200개의 봉니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위조품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러면 이시기 평양의 낙랑구역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살았을까? 
 
고대 문헌에 나타난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시대 최리왕이 다스리던 낙랑국이 있었다. 일찍이 이익과 신채호가 한사군과 다른 최리의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밝혔다. 즉 이익은 낙랑을 낙랑군과 낙랑국으로 나누고 낙랑군은 요동지역에, 낙랑국은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낙랑을 남낙랑과 북낙랑으로 나누고, 남낙랑은 대동강유역의 낙랑국으로 최리왕이 다스렸던 나라이고, 북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라고 했다. 이후 리지린과 윤내현이 그 연구 내용에서 조금씩 차이를 갖지만, 대동강유역에 있었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인 것으로 밝힌 바 있다.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다음의 문헌 기록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조(서기전 3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 에 놀러 갔다 낙랑국의 최리왕을 만나 나눈 대화가 있다. 최리왕이 호동에게,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최리왕이 대화에서 고구려가 북쪽 나라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어디까지 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당시 고구려는 “4년(서기 57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무신왕 이후 태조대왕 시기까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대무신왕 때 남쪽 국경도  살수 즉, 청천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 위치는 청천강 이남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예전에는 예의 서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고, 한전에서는 마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가깝게 있다고 하였다. 마한이 당시 북쪽으로 황해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앞의 󰡔후한서󰡕 「동이열전」에 설명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그 위치는 대동강유역으로 고구려의 남쪽 경계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 서술한 羅직물은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한 것이었다. 이 시기 실제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로 한다. 낙랑국의 존속기간을 살펴보면,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은 가장 이른 기록이 서기전 28년에 보이고 있어 건국은 이보다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에 낙랑왕 최리의 공주가 왕자 호동의 지시로 적이 나타나면 알려주는 鼓角을 부수게 되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차츰 약화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나 서기 37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 다시 서기 44년에 낙랑국은 동한 광무제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서기 300년 대방국과 함께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존속했다.
 
위의 내용으로부터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표에 보이는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羅직물과 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하였으므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에게 축출되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보았을 때 다음의 사실이 정리된다. 즉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칠기는 서한무덤과 흉노무덤 등에서 출토된 칠기와 비교한 결과 황실용으로 낙랑군의 관리나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음도 밝혀진바 있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은 서기 1세기 초에 속하는 석암리 9호무덤에서 출토된 용무늬금띠고리의 금세공기술도 이미 중국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중국 漢문화로 볼 수 없다고 분석한바 있다. 또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의 분석결과 이웃나라의 것과 달리 산화연을 유리의 주원료로 사용한 연유리와 소다유리, 회분유리등으로 한민족 유리의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대동강유역 유물들에 관한 다양한 분석내용은 낙랑유적의 금속유물들이 중국의 것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 견해와 함께 복식방면에서도 종래의 잘못된 견해를 수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복식재료를 자료로 평양 낙랑지역 문화의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것은 복식이 고고학적 유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이기 때문이다. 복식의 특성 연구는 곧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밝히고, 복식양식과 자료의 고유성에 관한 분포 연구는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를 파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평양낙랑 유적의 복식유물도 그 재료적 특성과 직조기술을 통해서 그 지역 거주 민족의 정체가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었음을 추적할 수 있다. 복식유물의 국적을 알게 되면, 해당 복식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 주민들의 국적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복식이 민족적 정체성을 증언하는 시각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 입력2014.12.18 15:25

[하도겸 칼럼] 낙랑국과 대방, 그리고 말갈의 역사 : ZUM 뉴스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5>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한서 지리지에 설명(주)을 단 응소(應邵)는 낙랑군이 ‘고조선국’이라 했다.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싶었나 보다. 죽어도 고조선을 지배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은 몇 번이나 패배했던 그들의 열등감의 표현인가? 그래선지 ‘신당서’도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주를 달았다. 당연한 사실이라면 왜 이리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회장은 내가 “회장이야” 또는 “내가 전에 네 상사였지!”라고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

 
‘국사’에는 'B.C. 28년 낙랑인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A.D.27년에는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북)대방(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A.D. 44년 광무제(光武帝)가 낙랑을 공격해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 살수(薩水)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속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문헌들만 보면 낙랑이 평양성이란 게 맞다. 누구는 낙랑의 중두산(中頭山) 부근이 말갈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결국, 지명이나 경계가 문헌마다 달라서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다 모아 남겨 놓겠다. 백제 온조왕(溫祚王)은 '동쪽에 낙랑,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낙랑은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던 현(縣)인가?

낙랑이라고 하면 고조선 관련 문헌만 있는 게 아니다. 신라 사람들도 스스로 낙랑이라고 했나 보다. 지금 우리 고려(高麗)에서도 그쪽 출신 부인들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부른다. 태조(太祖) 왕건이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낼 때도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는 기사도 있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에 죽담성(竹覃城)이 있었다. A.D. 27년 대방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 낙랑과 대방 둘 다 전한 때 설치한 군(郡)이다. 그 후에 참람되게 나라(國)라고 하더니 이때에 와서 항복했다.

남대방(南帶方)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때 남대방군(지금의 南原府)을 뒀다. 대방의 남쪽에는 천리나 되는 바다 한해(澣海)가 있다. A.D. 196∼219년 사이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해 드디어 왜(倭)와 한(韓)과 접하게 됐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발해는 본래 속말(粟末) 말갈이다. 추장(酋長) (대)조영(祚榮)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712년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했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왕위에 오르자 우리 황제(당 현종)가 왕에 책봉했다. 그런데 우리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스스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만들며 해동(海東)의 큰 나라로 컸다. 5경(京)·15부(府)·62주(州)의 지방행정제도를 뒀다. 926년 거란(契丹)이 발해를 공격해서 이긴 이후로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고 중국 역사서인 ‘통전(通典)’은 ‘발해’가 ‘당’에게 까불다가 ‘거란’한테 혼났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678년 고구려 후예들이 북쪽 태백산(太伯山) 부근에서 발해를 세웠다. 732년 당 현종이 장수를 보내 발해를 공격했다. 734년에는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현종은 겨우 막아냈다.'는 ‘삼국사’와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발해를 세웠다.'는 ‘신라고기(新羅古記)’ 기사들을 일연스님은 용케도 찾아냈다. 그러고는 '여러 문헌을 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別種)으로 이후 갈라지기도 합치기도 해서 서로 좀 다르게 기재되었을 뿐이다.'고 분석했다.

‘지장도(指掌圖)’는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다.'고 했다. 가탐(賈眈)이 지은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지리지에서 삭주 영현(領縣)으로 지금의 용주(湧州)로 비정되는 신라 천정군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驛)이 있다'고 했다. ‘삼국사’에는 '백제 멸망 후 발해·말갈·신라가 그 땅을 나눠 가졌다'고 했다. 이들 문헌을 보면 발해는 또 말갈과 갈라져서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이외에도 말갈 관련 기사는 더 있다. 신라인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우리 신라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 서쪽에는 백제가 있어 우리나라의 해가 되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지금의 동진(東眞)인 말갈에 접해 있다. A.D. 125년 말갈군사들이 신라 북쪽 국경을 대거 넘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갔다'는 기록도 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고 했으며 ‘지장도’에는 '읍루와 물길이 모두 다 숙신(肅愼)이다'라고 했다. 일단 여기에 다 전하니, 후일 역사가들이 잘 공부해주기를 바란다.

* 이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상상에 기반을 둔 재해석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일연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 재편됐을 것이기에 조목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한 것도 있음을 알린다.

dogyeom.ha@gmail.com

 

 

 

<참고자료>

 

동예인 - Daum 백과

옥저인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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