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배달국(12)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1) 자오지환웅은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 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이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 본문
1. 배달국(12)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1) 자오지환웅은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 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이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
대야발 2026. 3. 9. 14:50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
《규원사화》에 치우씨가 헌원과 싸워 회대와 기연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규원사화》
이때 유망은 소호에게 치우씨를 막게 했다.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둘러 소호와 크게 싸우며 안개를 일으켰다. 소호는 넋을 잃고 혼란에 빠져 크게 패하여 공상으로 달아났다. 소호는 유망과 함께 달아나다가 탁록 들에 들어갔다.
이때 치우씨는 공상에서 제위에 올랐다. 이어 군사를 탁록 들로 돌려 유망을 포위하니 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관가가 “천하의 임금이 칼을 들고 노하면 쓰러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때 헌원이란 사람이 유망에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했다. 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도전했다. 치우씨는 탁록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리하여 회대와 기연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중국 사람은 활과 돌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사용할 줄 몰랐다. 또 치우씨의 높고 강한 법력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서 싸우면 지고 말았다. …
치우씨는 동으로 회대 땅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마침내 치우씨가 죽자 점점 뒤로 물러 났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현재 그 무덤이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다섯 길이라 한다.(1)
자오지환웅은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성기전 하편》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환(九桓)은 모두 삼신(三神)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蘇塗)를 관리하고 관경(管境)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和白)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환은 모조리 삼한(三韓)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2)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레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 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을 나아가서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 고신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요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엔 헌원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3)
《태백일사》 〈신시본기〉
이때부터 치우治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九治를 만들어 동銅과 철鐵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刀戟 · 대궁大弩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의 여러 족속들은 대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는 큰 것으로부터, 활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 《춘추》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4)
《대변경》에서 말한다. …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시어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시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대개 아홉 개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해에 12 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少昊)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셨다. 《관자》가 말하는 바의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토착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헌원과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兗의 회대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 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 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 치우비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岱)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山東성의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관향성闕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 한다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은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 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나니〉 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 《상서》 여형에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를 빼앗긴 탓」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뒤에 갈고 환웅葛古桓雄이 있었는데 신농神農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획정하여 공상空桑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또 몇 대 지나 자오지환웅에 이른다. 자오지환웅은 귀신같은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九治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 함께 떠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더라.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했다. 헌원軒轅이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삼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5)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계속하여 치우씨蚩尤氏가 있었는데 구야九治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정벌코자하여 크게 탁록涿鹿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山西성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의 대인大人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대,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렷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사람에게 명하시어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6)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檀君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番韓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케 하였다.
경자庚子년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桶道, 거용渠庸,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들이다.(7)
《사기(史記)》
史記 卷一 五帝本紀 第一 황제(黃帝)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손...
[황제(黃帝)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식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 헌원의 시대가 되자 신농씨(神農氏)〔의 후손〕들은 쇠퇴하였다. 제후들은 서로 침벌하고, 백성들을 포학하게 대하였으나 신농씨는 정벌할 수 없었다. 이에 헌원은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신농씨에게〕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정벌할 수가 없었다. 【集解】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이다.” 신찬(臣瓚)이 말했다. “『공자삼조기(孔子三朝記)』에서 말했다. 「치우는 서인(庶人) 중에 탐욕스러운 자이다.」” 【索隱】살피건대, 이 기(紀)에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하고, 치우는 가장 포악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치우는 천자가 아니다. 또 『관자(管子)』에서 말하기를 “치우는 노산(盧山)의 청동[金]을 얻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확실히 서인(庶人)이 아니며 아마도 제후의 호칭일 것이다.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서 말했다. “공자가 노(魯)나라 애공(哀公)을 알현할 때 〔애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하・은・주〕 세 왕조를 비교하였는데, 물러난 이후 이를 기록하였기에 〔책 제목을〕 '삼조(三朝)’라고 한 것이다. 모두 7편으로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들어가 있다.” 현재 이 주(注)는 용병편(用兵篇)에 보인다. 【正義】『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 말했다. “황제(黃帝)가 섭정할 때, 치우에게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을 하고서 사람의 말을 하였으며,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모래와 돌을 먹었으며, 병장기로 칼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를 떨게 만들면서 〔백성들을〕 죽임에 도(道)가 없었고, 어질지도 자애롭지도 않았다. 만백성들은 황제(黃帝)로 하여금 천자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나, 황제는 인의(仁義)만으로는 치우를 제어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하였다. 하늘에서는 현녀(玄女)를 내려보내어 황제에게 병신신부(兵信神符)를 내려주고, 치우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도록 하였다. 제(帝)는 그것을 사용하여 군대를 지휘하여 팔방(八方)을 제압하였다. 치우가 죽고 난 뒤 천하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 천하에 위엄을 떨치도록 하니, 천하는 모두 치우가 죽지 않았다. 여기고 팔방의 만방(萬邦)은 모두 복종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했다. “황제는 응룡(應龍)에게 명하여 치우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치우는 풍백(風伯)·우사(雨師)에게 청하여 따르도록 하면서 큰 바람과 비를 내렸다. 황제(黃帝)는 이에 천녀를 내려보내 ‘발(魃)’이라 외치게 하니, 이에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고 난 후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염제가 제후들을 침략하여 능멸하려고 하자 제후는 모두 헌원에게 귀의하였다. 헌원은 이내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하고, 다섯 기운[五氣]을 다스리고, 오곡을 심고, 만민을 어루만지고, 사방을 헤아리니, 웅(熊)・비(羆)・비(貔)・휴(貅)・추(貙)・호(虎)를 훈련시켜, 염제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싸웠다. 세 번이나 싸운 뒤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군대와 제후들을 소집하여,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웠는데,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集解】『황람』에서 말했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감향(闞鄕)의 성안에 있는데, 높이는 7장(丈)이며, 백성들이 10월마다 제사지낸다. 붉은 기운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마치 붉은 비단과 같아 백성들은 치우기(蚩尤旗)라고 이름을 붙였다. 어깨와 팔뚝을 묻은 무덤은 산양군(山陽郡)거야현(鉅野縣) 중취(重聚)에 있는데, 크기는 감총(闞冢)과 같다. 전해지는 말로는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들판에서 싸웠고, 황제가 그를 죽이고 나서, 신체를 〔잘라〕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 묻었기 때문이라 한다.” 【索隱】살피건대, 황보밀이 말했다. “황제는 응룡에게 명하여 흉려지곡(凶黎之谷)에서 치우를 죽이도록 하였다.” 혹은 황제는 중기(中冀)에서 치우를 참살하였고 이로 인해 그 땅을 ‘절비지야(絶轡之野)’라고 하였다. 『황람』에 대해 풀이하자면 책 이름이다. 역대 〔제왕들의〕 무덤[冢墓]이 있는 곳을 기록하였으며, 〔후대의〕 제왕[皇王]들이 열람하도록 하였기에 『황람』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위나라 사람 왕상(王象)·무습(繆襲) 등이 찬한 것이다. 그러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었고, 신농씨를 대신하도록 하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8)
《한서(漢書)》에 치우는 옛날의 천자(天子)라고 나온다.
《한서(漢書)》
漢書 卷一上 高帝紀 第一上 (진이세 원년(기원전209) 9월) ...
(진이세 원년(기원전209) 9월) 이에 번쾌가 고조(高祖)와 함께 왔다. 패현 현령이 뒤늦게 후회하였다. 그는 변고가 생길까 걱정하여 성문을 잠그고 성을 지키면서,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했다. 소하와 조참은 두려워 성벽을 넘어 고조에게 의탁하였다. 고조는 비단에 글을 쓰고 이를 화살에 매어 성 너머로 쏘았는데, 비단에는 패현 부로(父老)에게 전하는 글귀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하가 진나라 학정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지금 여러 원로께서 패현 현령을 위해 성을 지키지만 제후가 일제히 일어나면 패현을 도륙할 것입니다. 패현이 이제 함께 현령을 죽이고 마땅한 사람을 뽑아 그를 세운 다음 다른 제후의 봉기에 부응하게 한다면 집안이 온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父子)가 함께 가축처럼 도살당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원로들은 바로 자제를 이끌고 가 패현 현령을 죽였고, 성문을 열고 고조를 맞이하여 현령으로 삼고자 하였다. …… 고조는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조는 그제서야 패공(沛公)이 되었다. 패현 뜰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응소(應劭)는, “황제가 판천(阪泉)에서 전투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치우 또한 옛날의 천자(天子)로서 오병(五兵)을 잘 다루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 복상(福祥)을 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찬(臣瓚)은 “『공자삼조기(孔子三朝記)』에 ‘치우는 서인 가운데 탐욕스런 자이지 천자가 아니다. 관중(管仲)이, 『할로산(割廬山)이 폭발하여 그곳에서 물이 흘러 나왔는데, 쇠가 따라서 나왔다. 치우가 그것을 받아 검(劍)과 극(戟)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라고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안사고는, “신찬이 인용한 내용은 모두 『대대예기(大戴禮記)』로서 「용병편(用兵篇)」에 나온다. 『삼조기(三朝記)』가 아니다. 나머지는 응소의 설에 동의한다. ‘패정(沛廷)’은 패현(沛縣)의 현정(縣廷)이다.”라고 하였다. 깃발과 전고(戰鼓)에 피를 발랐다. 깃발은 모두 붉은색이었다. 적제 아들로서 백제 아들을 죽여서였다. ……(9)
<자료출처>
(1) 규원사화, 북애 지음, 고동영 옮김, 한뿌리, 2005, 37-39쪽
(2)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35쪽
桓雄天王, 肇自開天生民施化, 演天經, 講神誥, 大訓于衆. 自是以後, 蚩尤天王, 闢土地, 採銅鐵, 鍊兵興産. 時, 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 主蘇塗, 主管境, 主責禍與衆議一歸爲和白. 竝智生雙修爲居佺, 自是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 乃號曰檀君王儉.
(3)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40-43쪽
後, 有葛古桓雄, 與炎農之國, 劃定彊界. 又數傳, 而有慈烏支桓雄, 神勇冠絶以銅頭鐵額, 能作大霧, 造九冶, 而採鑛, 鑄鐵作兵, 天下大畏之, 世號爲蚩尤天王. 蚩尤俗言, 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見炎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又, 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 及軒侯之立也. 直赴鹿之野, 擒軒轅而臣之. 後遣吳將軍, 西擊高辛, 有功.
時, 天下鼎峙, 𣵠之北, 有大撓, 東有倉頡, 西有軒轅, 自相以兵欲專其勝而未也. 初, 軒轅稍後起於蚩尤, 每戰不利, 欲依大撓而未得, 又, 依倉頡而不得. 二國皆蚩尤之徒也. 大撓嘗學干支之術, 倉頡受符圖之文, 當時, 諸侯罔不臣事者亦以此也.
司馬遷史記曰,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 天下莫能伐. 軒轅攝政, 蚩尤有兄弟, 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 造五丘杖, 刀戟, 太弩, 威振天下. 蚩尤古天子之號也.
(4)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170-171쪽
(5)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178-183쪽
及至楡罔, 爲政束急, 諸邑携二, 民多離散, 世道多艱. 我蚩尤天王, 承神市之餘烈, 與民更張, 能得開天知生, 開土理生, 開人崇生, 衆物原理, 盡自檢察, 德無不至, 慧無不宜, 力無不備, 乃與民分治, 虎据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楡罔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中, 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之金, 大制劍鎧矛戟大弓楛矢, 一幷齊整, 拔涿鹿而登九渾, 連戰而捷, 勢若疾風, 慴(罫)伏萬軍,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以九治發水金石金, 而制芮戈雍狐之戟, 更整師躬率, 而出陣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陳留, 楡罔所都也.
是歲之中, 兼倂十二諸侯之國, 殺得伏尸滿野, 西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昊拒戰, 天王揮芮戈雍狐之戟, 與少昊大戰, 又作大霧, 使敵將兵昏迷自亂, 少昊大敗, 落荒而走, 入空桑, 偕楡罔出奔. 蚩尤天王, 乃卽祭天而誓告, 天下泰平, 更復進兵, 圍迫涿鹿, 一擧而滅之. 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戰一怒, 伏尸滿野者, 是也.
時, 有公孫軒轅者, 土着之魁, 始聞蚩尤天王, 入城空桑, 大布新政, 而敢有自代爲天子之志, 乃大興兵馬, 來與欲戰. 天王先遣降將少昊, 圍迫涿鹿而滅之, 軒轅猶不自屈敢出百戰. 天王動令九軍, 分出四道, 自將步騎三千, 直與軒轅, 連戰于涿鹿有熊之野, 縱兵四蹙, 斬殺無算, 又作大霧, 咫尺難辨而督戰. 賊軍乃心慌手亂, 奔竄逃命, 百里兵馬不相見. 於是, 冀兗淮岱之地, 盡爲所據,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軒轅之屬, 皆稱臣入貢. 盖當時西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 又値蚩尤天王之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 雲笈軒轅記之, 所謂蚩尤始作鎧甲兜鍪,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其狼狽之甚矣.
蚩尤天王, 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三回, 將無疲色, 軍不退後. 軒轅旣屢戰敗, 尤益大興士馬, 效我神市, 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敢出百戰. 天王赫然震怒,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軒轅之軍, 不敢生意於是役也, 我將蚩尤飛者, 不幸有急功, 陣沒. 史記所謂擒殺蚩尤者盖謂此也. 天王赫怒動師, 新造飛石迫擊之機, 成陣聯進, 賊陣終不能抗也. 於是, 分遣精銳, 西守芮涿之地, 東取淮岱爲城邑, 而當軒轅東侵之路, 及至崩逝數千載, 而猶有萬丈光烈, 能起感於後人者也.』追襲, 與之大戰, 混殺一陣, 然後方熄.
今據漢書地理志, 其陵, 在山東, 東平郡, 壽張縣, 闕鄕城中. 高七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謂之蚩尤旗. 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數千歲而猶不泯者歟. 軒轅以是索然, 楡罔亦從以永墜矣.
蚩尤天王之餘烈, 世襲能振, 盡有幽靑, 聲威不墜, 軒轅以來, 世不自安, 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 史記所謂, 披山通路, 未嘗寧居, 邑于涿鹿之河, 遷徙往來, 無常定處, 以師兵, 爲營衛者, 盖其戰兢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 若有古訓, 惟蚩尤作亂. 彼之畏威奪氣, 而世傳其訓, 以爲後人戒者, 亦甚矣. 其後三百年無事, 只與顓頊一戰, 破之.
蓋自神市開天,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而始有檀君王儉, 以熊氏裨王, 遂代神市, 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 檀君朝鮮也.
三韓秘記曰, 伏羲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域外. 後, 有葛古桓雄, 與神農之國, 劃定疆界, 空桑以東屬我. 又數傳, 而至慈烏支桓雄, 神勇冠絶, 其頭額銅鐵, 能作大霧, 造九治以採鑛, 鑄鐵作兵, 造飛石迫擊之機, 天下大畏之, 共尊爲天帝子蚩尤. 夫蚩尤者, 俗言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 見神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進據淮岱之間, 及軒轅之立也. 直赴涵鹿之野, 擒軒轅而臣之, 後, 遣吳將軍, 西擊高辛, 有功.
(6)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201-202쪽
(7)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214-217쪽
蚩尤天王 西征涿芮, 南平淮岱, 披山通道, 地廣萬里. 至檀君王儉, 與唐堯幷世…… 於是, 檀君王儉, 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 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蚩頭男, 蚩尤天王之後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 卽拜爲番韓, 兼帶監虞之政. 庚子, 築遼中十二城, 險瀆·令支·湯池·桶道·渠庸·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 是也.
탁예涿芮는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의 결전장. 탁록에 가까운 땅일진대 현재의 산서성 대동부 근처일 것이다.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하북성 탁록과 산서성 예성현을 말한다. 예芮는 섬서성 대려현 조읍성 남쪽으로도 볼 수 있다. 이곳은 주 문왕 때 건립한 예국芮國이 있던 곳이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461쪽)
험독은 번한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개평 동북쪽 70리에 있는 탕지보를 말한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463쪽)
요遼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를 말한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463쪽)
(15)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한국 고대 사료 DB
(16)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한국 고대 사료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