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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달국(14)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3) 황제헌원軒轅씨, 소호금천씨(BC 2598~BC 2514) 본문

신시배달국시대/신시배달국

1. 배달국(14)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3) 황제헌원軒轅씨, 소호금천씨(BC 2598~BC 2514)

대야발 2026. 3. 9. 15:00

 

 

 

 

황제헌원軒轅씨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신농은 웅씨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다 뒤에 열산으로 이사하였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헌구로 유배되었고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웅씨가 갈라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환웅의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列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 후손이다.(1)

 

 

《사기》 〈오제본기〉

 

《사기》 〈오제본기〉에 황제(黃帝)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식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나온다.

 

 

史記 卷一 五帝本紀 第一 황제(黃帝)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손...

 

황제(黃帝)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식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 헌원의 시대가 되자 신농씨(神農氏)〔의 후손〕들은 쇠퇴하였다. 제후들은 서로 침벌하고, 백성들을 포학하게 대하였으나 신농씨는 정벌할 수 없었다. 이에 헌원은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신농씨에게〕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정벌할 수가 없었다. 【集解】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이다.” 신찬(臣瓚)이 말했다. “『공자삼조기(孔子三朝記)』에서 말했다. 「치우는 서인(庶人) 중에 탐욕스러운 자이다.」” 【索隱】살피건대, 이 기(紀)에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하고, 치우는 가장 포악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치우는 천자가 아니다. 또 『관자(管子)』에서 말하기를 “치우는 노산(盧山)의 청동[金]을 얻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확실히 서인(庶人)이 아니며 아마도 제후의 호칭일 것이다.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서 말했다. “공자가 노(魯)나라 애공(哀公)을 알현할 때 〔애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하・은・주〕 세 왕조를 비교하였는데, 물러난 이후 이를 기록하였기에 〔책 제목을〕 '삼조(三朝)’라고 한 것이다. 모두 7편으로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들어가 있다.” 현재 이 주(注)는 용병편(用兵篇)에 보인다. 【正義】『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 말했다. “황제(黃帝)가 섭정할 때, 치우에게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을 하고서 사람의 말을 하였으며,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모래와 돌을 먹었으며, 병장기로 칼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를 떨게 만들면서 〔백성들을〕 죽임에 도(道)가 없었고, 어질지도 자애롭지도 않았다. 만백성들은 황제(黃帝)로 하여금 천자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나, 황제는 인의(仁義)만으로는 치우를 제어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하였다. 하늘에서는 현녀(玄女)를 내려보내어 황제에게 병신신부(兵信神符)를 내려주고, 치우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도록 하였다. 제(帝)는 그것을 사용하여 군대를 지휘하여 팔방(八方)을 제압하였다. 치우가 죽고 난 뒤 천하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 천하에 위엄을 떨치도록 하니, 천하는 모두 치우가 죽지 않았다. 여기고 팔방의 만방(萬邦)은 모두 복종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했다. “황제는 응룡(應龍)에게 명하여 치우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치우는 풍백(風伯)·우사(雨師)에게 청하여 따르도록 하면서 큰 바람과 비를 내렸다. 황제(黃帝)는 이에 천녀를 내려보내 ‘발(魃)’이라 외치게 하니, 이에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고 난 후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염제가 제후들을 침략하여 능멸하려고 하자 제후는 모두 헌원에게 귀의하였다. 헌원은 이내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하고, 다섯 기운[五氣]을 다스리고, 오곡을 심고, 만민을 어루만지고, 사방을 헤아리니, 웅(熊)・비(羆)・비(貔)・휴(貅)・추(貙)・호(虎)를 훈련시켜, 염제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싸웠다. 세 번이나 싸운 뒤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군대와 제후들을 소집하여,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웠는데,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었고, 신농씨를 대신하도록 하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황제가 쫓아가 정벌하고, 평정한 후에는 떠났으니, 산을 파서 길을 뚫느라,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환산(丸山)에 오르고 대종(岱宗)에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공동(空桐)에 이르러, 계두(雞頭)에 올랐다. 남쪽으로는 장강(長江)에 이르러, 웅산(熊山)과 상산(湘山)에 올랐다. 북쪽으로는 훈육(葷粥)을 쫓아내고, 부산(釜山)에서 부절을 맞추어 보았으며, 탁록의 평원에 도읍을 세웠다.(2)

 

 

 

《제왕운기》

 

《제왕운기》에 황제는 성이 공손(公孫)이며 토덕(土德)이고 탁록(涿鹿)에 도읍하였는데, 옮겨다니는 데 있어 일정한 장소가 없었다. 이름은 헌원(軒轅)이며,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 원년은 정해년이다. 소전(小典)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부보(附寶)이다. 창힐(蒼頡)로 하여금 문자를 만들게 하고, 천부(天符)를 받아 장수(將帥)·대오(隊伍)·정절(旌節)을 두었으며, 창·갑옷·활·화살을 만들어 치우(蚩尤)를 멸하였다. 뒤에 성을 바꾸어 희(姬)라 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것이 100년이라고 하였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상(卷上) > 아래 삼황(三皇)이라는 자는 묻건대 누구인가

 

아래 삼황(三皇)이라는 자는 묻건대 누구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과 ○황제(黃帝)가 이들이다. 성은 공손(公孫)이며 토덕(土德)이고 탁록(涿鹿)에 도읍하였는데, 옮겨다니는 데 있어 일정한 장소가 없었다. 이름은 헌원(軒轅)이며,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 원년은 정해년이다. 소전(小典)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부보(附寶)이다. 창힐(蒼頡)로 하여금 문자를 만들게 하고, 천부(天符)를 받아 장수(將帥)·대오(隊伍)·정절(旌節)을 두었으며, 창·갑옷·활·화살을 만들어 치우(蚩尤)를 멸하였다. 뒤에 성을 바꾸어 희(姬)라 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것이 100년이다. ○소호(小昊)와 ○ 전욱(顓頊) 및 ○제곡(帝嚳)과 ○당요(唐堯)와 ○ 우순(虞舜)이라는 오제(五帝)가 일어났다.(3)

 

 

 

소호금천씨(BC2598~BC2514)

 

《태백일사》 〈신시본기〉

 

《대변경》에서 말한다. …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少皞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矢氏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穀麻藥石의 기술도 또한 또한 갖춰져서 낮에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두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4)

 

 

 

《제왕운기》

 

《제왕운기》에 소호(小昊)는 성이 희(姬)이고, 금덕(金德)이다. 곡부(曲阜)에 도읍하였다. 이름은 지(摯), 자(字)는 청양(靑陽)이며 금천씨(金天氏)라 불렀다. 원년은 정묘년이다. 황제(黃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여절(女節)이니, 왕위에 있은 것이 14년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상(卷上) > 아래 삼황(三皇)이라는 자는 묻건대 누구인가

 

아래 삼황(三皇)이라는 자는 묻건대 누구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과 ○황제(黃帝)가 이들이다. ○소호(小昊) 성은 희(姬)이고, 금덕(金德)이다. 곡부(曲阜)에 도읍하였다. 이름은 지(摯), 자(字)는 청양(靑陽)이며 금천씨(金天氏)라 불렀다. 원년은 정묘년이다. 황제(黃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여절(女節)이니, 왕위에 있은 것이 14년이다. 와 ○ 전욱(顓頊) 및 ○제곡(帝嚳)과 ○당요(唐堯)와 ○ 우순(虞舜)이라는 오제(五帝)가 일어났다.(5)

 

 

 

신용하는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고 한다.

 

<신용하의 지식카페>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문화일보,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2019년 12월 4일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 한민족 문명학

 

 

 

▲ <그림 3> 고조선 두 번째 이주민 소호족의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아사달’ 문양의 토기. <그림 5> 양저문화 유적 출토 옥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과 소호족 상징인 ‘새’.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동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5000년 전~4400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혀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파손품 포함)나 출토됐다.

 

태호족과 소호족의 이주 이후 연달아 고조선 이주민들이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에 정착해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가, 마을공동체들이 연합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했다.

 

그 결과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이전 간척지대는 양자강 하류 남안까지 이주해 들어온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크고 작은 ‘분국들’의 생활 터전이 됐고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관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들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河北) 발해안, 하남(河南)성 동부, 강소(江蘇)성 북부, 안휘(安徽)성 동북각 지방의 이른바 동이족은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보았으며, 기원전(BC) 1000~BC 600년경까지 고조선족이 매우 강성했음을 지적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독립된 장으로, 서국을 고조선 이주민의 식민부락 가운데 하나인 소국으로 출발해 한 시기 주(周)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주나라에 매우 관대했던 고조선 식민지 국가였다가, 주의 선왕(宣王)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고 설명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 지역 동이족의 기원이 고조선 이주민인가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조선 이주민들의 무덤인 ‘고인돌’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운반불능인 고인돌 무덤이 이주민의 사실을 명료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산동성 등주(登州)의 치박(淄博)에는 1930년대까지 대형 개석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산동반도와 회수 유역의 ‘동이’지역에는 이 밖에도 다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적으로 보존돼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고조선식 고인돌의 중국 호칭인 석붕(石棚) 이름을 가진 지명은 아직도 다수 남아 있어서 고조선 이주민 공동체 분국들과 고인돌 무덤이 존재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동이족의 하나인 우족(우族)이 고조선으로부터 청동기를 처음으로 고중국 지역에 가져와 전파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양자강 하류 북안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양저문화(良渚文化) 유적이라고 호칭하는 고대 유적이 있는데, 그 상층유적(BC 2300년경)은 ‘동이문화’ 유적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양저문화 상층유적 출토 옥기들 가운데 고조선의 상징인 ‘아사달’ 문양과 그 문양 위에 고조선 이주민 ‘소호’족의 상징인 ‘새’를 새긴 (그림 5)와 같은 옥기가 출토됐다.

 

또한 양자강 하류 절강성 일대에는 고조선 이주민 무덤인 고조선식 고인돌이 지금도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의 축성 연대는 청동기 시대인 BC 11세기~BC 400년경(중국 편년 상말 주초~춘추 말기)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중국 양자강 하류 남안의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가 고조선·진국 지역(전라남도 지역)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산동반도 등에 이주한 고조선 사람들은 회수 유역부터 산동반도 이북 해안 지역에 걸쳐서 자치적 소분국을 세워 활동했다. 그들은 고조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았고, 또한 물론 고중국 계열 어느 소왕국의 통치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할 때 가지고 간 고조선 문화 양식을 변용·발전시키면서 자치생활을 했다. 중국인 학자 장광직(張光直) 교수가 상(商)시대 중국에 대한 정밀한 연구 끝에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지도로 그린 것이 있는데, 동이족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고조선 이주민 분국들은 진시황이 BC 221년경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수축해 고조선 기마부대와 고조선 이주민의 월경을 차단하고, 동으로는 ‘동이족’을 고중국인들과 섞여 살도록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해 급속히 해체돼갔다. 그러나 고조선 이주민이 갖고 들어간 선진 고조선 문명이 그 후 고중국 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끼친 영향과 도움은 실로 막대했다. 중국 상(商)나라도 고조선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으며, 고중국 문명의 중핵인 상(商)문명도 바로 선행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 지역에서 계승한 문명이었다. (문화일보 11월 6일자 15면 9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6)

 

 

 

[현장답사] 중국의 최초 문화로 인정한 동이문화 일대 산동성,하남성,강소성 / 동이문화박물관 답사후 버스 강의

2020. 4. 13.

https://youtu.be/40aVFxd2QlY?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주>

 

 

(1)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195-196쪽

熊氏之所分, 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 嘗百草制藥. 後徙列山, 日中交易, 人多便之. 少典之別派, 曰公孫, 以不善養獸, 流于軒丘, 軒轅之屬, 皆其後也.

 

 

(2)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한국 고대 사료 DB

 

 

(3) 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levelId=mujw_001r_0030

下三皇者問誰歟

下三皇者問誰歟. ○伏羲風姓, 水德. 都陳, 號太昊. 母華胥. 元年辛巳. 上古人, 知其母, 不知父, 至此, 正夫婦. 又畵八卦, 造書契, 立屋, 造琴, 服牛乘馬. 其妹女媧氏繼之, 鍊石補天. 下至無懷氏, 凡十六代, 合一千二百六十年. ○神農姜姓, 火德. 都魯, 號炎帝. 母任己. 元年辛巳. 始爲斤斧耒耜, 種五穀. 下至楡門, 凡八代, 合四百二十六年. ○黃帝是.姓公孫, 土德, 都涿鹿, 遷無常處. 名軒轅, 號有熊氏, 元年丁亥. 小典之子, 母附寶. 令蒼頡, 造文字, 受天符, 置將帥·隊伍·旌節, 制戈矛·鎧甲·弓·矢, 以滅蚩尤. 後改姓爲姬, 在位一百年. ○小昊姬姓, 金德. 都曲阜. 名摯, 字靑陽, 號金天氏. 元年丁卯. 黃帝之子, 母女節, 在位人十四年. ○顓頊姬姓, 木德. 都衛, 遷高陽. 號高陽氏. 元年辛卯. 黃帝之孫, 昌意之子, 母握裒. 作重·黎, 以司天地. 效八風, 作音樂. 有才子八人, 號八凱, 在位七十八年. 及○帝嚳姬姓, 水德, 都亳. 號高辛氏, 元年己酉. 黃帝曾孫, □極校勘 001之子, 母. 以句芒爲木正, 祝融爲火正, 蓐收爲金正, 亥爲水正, 后土爲土正. 有才子八人, 號八元. 在位七年, 崩而子帝摯嗣, 荒淫無道, 不善崩故, 不登五運, 方年, 己未, 在位九年., ○唐堯姓伊祈, 火德. 都平陽. 名放勛, 諡高, 號陶唐氏. 元年戊辰. 帝嚳之子, 母慶都. 以唐侯升爲天子, 故稱唐. 在位一百年, 國號及諡, 始於此. ○虞舜姓姚, 土德. 都蒲坂. 名重華, 諡舜, 號有虞氏. 受禪卽位, 元年戊申. 高陽氏七世孫, 父瞽叟, 母握. 登位五十年, 居於嬀汭, 或云姓嬀. 五帝起.

 

 

(4)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178쪽

大辯經曰, … 神農起於列山, 列山列水所出也. 神農, 少典之子. 少典與少皞, 皆高矢氏之傍支也. 盖當世之民, 定着爲業, 漸至成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日中爲市, 交易以退也. 及至楡罔, 爲政束急, 諸邑携二, 民多離散, 世道多艱.

 

《강감금단》에 따르면 고시씨의 방계 후손인 소호 금천(BC2598~BC2514)은 황제 헌원의 맏아들로 황제를 이어 임금이 된 오제 중의 한 사람이다. 《제왕세기》에서 “소호제의 자는 청양이고 성은 희씨이다. 소호가 곧 현효이고 궁상을 다스리다가 제위에 올라 곡부에 도읍하였다” 라고 하였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헌원의 맏아들이 현효, 청양이라 하고 그 주석에서도 현효(청양)가 곧 소호라 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오제에서 빠져 있어 황제의 계통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소호는 헌원의 계통을 이은 전욱고양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오직 태호복희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라 부른 것이다. 즉 태호의 다음 가는 사람이란 뜻에서 소호라 하고, 금덕에 의해 임금이 되어 금천이라 하였다(강감금단;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참조).

쉬량즈는 “소호씨는 동이의 맹주 씨족으로서 독립적인 지반과 문화를 갖고서 서방 황제족과 정치적 관계는 있지만 혈연적 관계는 없다. 사실이 분명하여 부인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408쪽)

 

 

(5) 제왕운기 < 고려시대 사료 DB

下三皇者問誰歟

下三皇者問誰歟. ○伏羲風姓, 水德. 都陳, 號太昊. 母華胥. 元年辛巳. 上古人, 知其母, 不知父, 至此, 正夫婦. 又畵八卦, 造書契, 立屋, 造琴, 服牛乘馬. 其妹女媧氏繼之, 鍊石補天. 下至無懷氏, 凡十六代, 合一千二百六十年. ○神農姜姓, 火德. 都魯, 號炎帝. 母任己. 元年辛巳. 始爲斤斧耒耜, 種五穀. 下至楡門, 凡八代, 合四百二十六年. ○黃帝是.姓公孫, 土德, 都涿鹿, 遷無常處. 名軒轅, 號有熊氏, 元年丁亥. 小典之子, 母附寶. 令蒼頡, 造文字, 受天符, 置將帥·隊伍·旌節, 制戈矛·鎧甲·弓·矢, 以滅蚩尤. 後改姓爲姬, 在位一百年. ○小昊姬姓, 金德. 都曲阜. 名摯, 字靑陽, 號金天氏. 元年丁卯. 黃帝之子, 母女節, 在位人十四年. ○顓頊姬姓, 木德. 都衛, 遷高陽. 號高陽氏. 元年辛卯. 黃帝之孫, 昌意之子, 母握裒. 作重·黎, 以司天地. 效八風, 作音樂. 有才子八人, 號八凱, 在位七十八年. 及○帝嚳姬姓, 水德, 都亳. 號高辛氏, 元年己酉. 黃帝曾孫, □極校勘 001之子, 母. 以句芒爲木正, 祝融爲火正, 蓐收爲金正, 亥爲水正, 后土爲土正. 有才子八人, 號八元. 在位七年, 崩而子帝摯嗣, 荒淫無道, 不善崩故, 不登五運, 方年, 己未, 在位九年., ○唐堯姓伊祈, 火德. 都平陽. 名放勛, 諡高, 號陶唐氏. 元年戊辰. 帝嚳之子, 母慶都. 以唐侯升爲天子, 故稱唐. 在位一百年, 國號及諡, 始於此. ○虞舜姓姚, 土德. 都蒲坂. 名重華, 諡舜, 號有虞氏. 受禪卽位, 元年戊申. 高陽氏七世孫, 父瞽叟, 母握. 登位五十年, 居於嬀汭, 或云姓嬀. 五帝起.

 

 

(6) <신용하의 지식카페>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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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달국(16) 단군왕검檀君王儉(BC 2333년-BC 2241년)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나셨다. 웅씨熊氏의 비왕裨王으로서 마침내 신시神市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統一하고 관경管境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1) 2026.03.09
1. 배달국(15) 15세 치액특환웅(蚩額特桓雄) 재위 89년(BC 2598~BC 2509), 16세 축다리환웅(祝多利桓雄) 재위 56년(BC 2509~BC 2453), 17세 혁다세환웅(赫多世桓雄) 재위 72년(BC 2453~ BC 2381), 18세 거불단환웅(居弗檀桓雄) 재위 48년(BC 2381~ BC 2333) BC 2467년보다 3년 전인 BC 2470년 9월 새벽 ‘오성취각(五星聚角)’이 있었다.  (0) 2026.03.09
1. 배달국(13)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2)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다.  (0) 2026.03.09
1. 배달국(12)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재위 109년(BC 2707년~BC 2598년)(1) 자오지환웅은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 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이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  (0) 2026.03.09
1. 배달국(11) 11세 거야발환웅(居耶發桓雄) 재위 92년(BC 2971년~BC 2879년), 12세 주무신환웅(州武愼桓雄) 재위 105년(BC 2879년~BC 2774년), 13세 사와라환웅(斯瓦羅桓雄) 재위 67년(BC 2774년~BC 2707년) 사와라환웅때 웅녀군의 후손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었다고 한다.  (0) 2026.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