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스가 전화회담 때 징용·위안부 문제 의견 교환"

이세원 입력 2021. 01. 29. 08:48 수정 2021. 01. 29. 11:32 댓글 206

일본 정부 '외교상 대화' 이유로 구체적 내용은 공개 안해

https://news.v.daum.net/v/20210129084840198

 

"바이든-스가 전화회담 때 징용·위안부 문제 의견 교환"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전화 회담에서 한일 갈등 현안에 관한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시간(한국과 동일) 28

news.v.daum.net

 

 

[특파원리포트] 日, 조몬시대·동남아 관계 띄우기

우군화로 영향력 확대… 한국도 중요성 인식해야

입력 : 2018-07-25 21:24:51      수정 : 2018-07-25 21:24:5

http://www.segye.com/newsView/20180725005515

 

[특파원리포트] 日, 조몬시대·동남아 관계 띄우기

지난 21일 도쿄국립박물관 매표소 앞은 개관 시간 전부터 조몬(繩文) 특별전을 보기 위한 관람객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지난 3일부터 9월2일까지 ‘일본 미(美)의 원점,

segye.com

 

 

 

"일본 최고 역사서, 한글로 작성됐다"

김훈남 기자 입력 2009.10.09. 14:01 수정 2009.10.09. 14:01 댓글 0

[머니투데이 김훈남기자][한글날,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교수 주장]

http://v.media.daum.net/v/20091009140113431

 

"일본 최고 역사서, 한글로 작성됐다"

[머니투데이 김훈남기자][한글날,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교수 주장]고대 일본의 신화, 전설 및 사적을 기록한 최고(最古) 역사서 '고사기'의 한글판이 발견됐다. 발견된 '한글판 고사기'는 일본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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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스파게티+명란젓…‘만들어진 나라 일본’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8.06.07 03:09 | 최종수정 2008.06.07 05:30

[인문사회]스파게티+명란젓…‘만들어진 나라 일본’ (donga.com)

 

[인문사회]스파게티+명란젓…‘만들어진 나라 일본’

◇만들어진 나라 일본/마쓰오카 세이고 지음·이언숙 옮김/440쪽·1만6000원·프로네시스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www.donga.com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막아야"

訪韓 마쓰우라 주교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08.03.07 23:57 | 수정 2008.03.08 03:06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막아야" - 조선일보 (chosun.com)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막아야"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막아야 訪韓 마쓰우라 주교

www.chosun.com

 

 

 

서양의 도구로 헤집은 18세기 일본

에도의 몸을 열다/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서울신문기사일자 : 2008-01-18    23 면

 

피부를 벗겨내고, 근육을 한점 한점 떼낸다. 뇌를 열어 뇌수를 헤집고, 흘러 내리는 창자를 쓸어 담아 주무른다. 턱을 덜렁거리게 빼내 목구멍을 관찰하고, 대나무에 내장을 줄줄이 꿰어 생선 말리듯 널어 말린다.

 

18세기 일본 에도시대(1603∼1867년)때 그려진 해부도들의 살풍경이다. 잘리고, 썰리고, 벗겨지고, 헤집어지고, 주물러지는 몸은 일본인의 것이나, 살을 자르고 뼈를 써는 건 서양의 메스와 톱이다.

 

 서양의 도구로 찢겨지고 분해되는 동양의 몸. 서구 근대의 습격에 직면한 동양의 운명이자, 동양이 근대와 접속하는 기회였다.

 

 

해부의 충격에 직면한 일본인들의 수용과 변용

 

‘에도의 몸을 열다’(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박경희 옮김, 그린비 펴냄)는 일본 ‘난학’(蘭學·에도시대 중기 이후 네덜란드어 서적을 토대로 서양의 학술·문화를 연구하던 학문의 총칭)의 중심이었던 해부학에 관한 책이다.

 

의학적으로는 사람 몸에 대한 해부서이고, 문화사적으로는 일본 에도시대 문화 전반에 대한 해부서다. 철학적으로는 세계관과 인식에 대한 해부서이고, 정치적으로는 동서양 힘의 관계에 대한 해부서다.

 

지은이 타이먼 스크리치(런던대 교수, 일본학연구소장)는 미술사학자다. 신미술사학(예술작품에 반영된 이데올로기와 작품을 둘러싼 사회체계 검토를 통해 예술이 사회와 별개가 아님을 밝히는 연구사조)의 방법론을 차용한 그는 책의 상당 분량을 각종 해부도로 채웠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행해진 해부 문화를 광범위하게 검토하면서도 해부 그 자체보다 해부의 충격에 직면한 일본인들의 ‘수용’과 ‘변용’에 주목했고, 해부라는 외래의 방법론으로 전통의 심장부를 공격한 난학자들의 학문 경로를 탐색했다.

 

해부는 앎에 대한 욕구다.‘보고자 하는 강박’이자,‘자신이 본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강박’이다. 곧 과학 정신이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휘둘러진 메스는 계몽주의 이래 강력해진 서양의 합리성을 상징한다. 해부의 주체는 칼이고, 객체는 몸이다.‘합리적’ 서양의 칼은 ‘비합리적’ 동양의 배를 가르고 짼다.

 

일본인의 몸 위에서 펼쳐지는 서양의 해부기술은 결국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서양의 해부였다. 메스로 일본인의 몸을 여는 행위는 책 제목처럼 에도의 몸을 여는 행위였고, 일본으로 상징되는 동양의 몸과 문화와 의식을 여는 행위였다.

 

에도 시대 해부학의 급격한 전파는 서양 과학을 선망하는 일본 학계의 첨단적 유행이었던 셈이다. 해부된 신체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듯, 해부당한 일본 또한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다. 난학을 통해 일본은 서구가 찍어 놓은 근대의 발자국을 밟아갔다.

 

난학의 유행은 국가 정치 기획과도 상통

 

난학의 유행은 국가의 정치 기획과도 무관치 않다. 부국강병의 논리 하에 한 개인의 신체가 국가에 종속되는 현상은 이때도 발생한다.

 

 신체 내장에 계급을 부여하는 행위는 플라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다. 혈액이 심장으로 모였다 다시 흘러 나가는 모습은 국가의 심장인 왕이 담당한 핵심적인 위상을 설명하는 비유로 차용됐다.

 

서열이 매겨지는 건 개인만이 아니라 국토 전체였다. 저자는 “도로의 핵심에는 심장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고도 교토가 일본의 심장, 즉 천하의 기원으로 떠올랐다.”고 지적한다.

 

난학이 일본 전통의술과 부딪히며 권력투쟁을 벌이는 대목 또한 ‘시대 초월적’이다. 열고 열리는 상호작용이 정치시스템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현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한·미 FTA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2만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서울신문기사일자 : 2008-01-18    23 면

 

 

20세기 일본을 반성하고 갈 길을 묻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

게재 일자 2007-10-19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01901031730065002 

 

20세기 일본을 반성하고 갈 길을 묻다

문명(文明). 이 단어만큼 근대를 대변하는 상징어도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더..

www.munhwa.com

 

 

 

바다로… 우주로… 日 21세기 新대국 야심

입력 2007-10-11 03:03수정 2009-09-26 10:10

www.donga.com/news/article/all/20071011/8498773/1

 

바다로… 우주로… 日 21세기 新대국 야심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나라 일본. 그러나 최근 넓은 바다와 광활한 우주로 뻗어 나가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일본의

www.donga.com

 

 

 노동시장도 빗장 푼다

입력 2007-09-15 03:00수정 2009-09-26 13:48

외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배타성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http://www.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f__&n=200709150054 

 

日 노동시장도 빗장 푼다

외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배타성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주택 임대 문제만 봐도 외국인에게는 집을 빌려

www.donga.com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상)

2007년 8월 15일 한겨레신문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상)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상)

미야티 히로토 “납치문제 빌미 ‘과거청산’ 실종 추악한 역사의 새로운 시작” 기무라 미쓰히로 “한·중 도발하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대미종속 감추기 위한 것”

www.hani.co.kr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하)

:2007년 8월 15일  한겨레신문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하)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8·15 62돌] ‘일본의 오늘’ 4색 인터뷰 (하)

고토다 마사즈미 자민당 의원 “아베 ‘전후체제서 탈피’ 주장 자민당 참패 요인 중 하나” 오누마 야스아키 도쿄대 교수 “일본의 민간기금모금 등 사죄 한·중서 수용하지 않은 건 잘못”

www.hani.co.kr

 

 

 

“왜 우리는 ‘쪽발이’로 불리는가”

日작가 고바야시 작품집 ‘쪽발이’국내 첫 출간

게재 일자 2007-07-12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71201031930008004 

 

“왜 우리는 ‘쪽발이’로 불리는가”

‘일본인에게 조선인이란 무엇인가’를 평생의 주제로 삼아 치열하게 고뇌한 일본인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小..

www.munhwa.com

 

 

 

[인터뷰]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대학교수 호사카 유지

“선비와 사무라이는 배다른 형제”

내일신문 2007-07-09 오후 3:52:48 게재

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sid=E&tid=4&nnum=347485 

 

 

일본 국학은 제국 뒷받침 위해 만들어낸 학문

일본 근대사상 비판―국가·전쟁·지식인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사 | 332쪽 | 2만원

유석재 기자

입력 2007.04.20 22:46 | 수정 2007.04.21 07:27

일본 국학은 제국 뒷받침 위해 만들어낸 학문 - 조선일보 (chosun.com)

 

일본 국학은 제국 뒷받침 위해 만들어낸 학문

일본 국학은 제국 뒷받침 위해 만들어낸 학문 일본 근대사상 비판―국가·전쟁·지식인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사 | 332쪽 | 2만원

www.chosun.com

 

 


일본에서 '한글부적" 사용, 토속신 섬겨

입력 2004.10.05. 07:12 수정 2004.10.05. 07:12 댓글 0

http://v.media.daum.net/v/20041005071258292

 

일본에서 '한글부적" 사용, 토속신 섬겨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제558돌 한글날을 나흘 앞둔 가운데 일본에서 한글 부적을 사용하며 토속신을 모시는 신사(神社)와 마을이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 돼 눈길을 끌고 있다. 5일 부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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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의회 “아이누족 원주민 인정을” [중앙일보]

중앙일보 2008.6.7

 

출처: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173712

 

일본 의회 “아이누족 원주민 인정을”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족(사진)이 민족 정체성을 되찾게 됐다. 일본 국회는 6일 정부가 아이누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종합 지원 대책을 마련하

www.joongang.co.kr

 

 

 

출처; 일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일본국[주 1], 약칭 일본[주 2]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네 개의 (홋카이도혼슈시코쿠규슈)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로, 네 개의 본섬과 주변의 작은 부속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체 면적은 37만 7973km2이며, 독일(35만 7386km2)보다 조금 크다.[4]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5]인 일본은 혼슈규슈시코쿠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많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이며, 이 지역에만 4,350만 명(일본 전체 인구의 34.5%)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나루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며 내각총리대신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경제력은 명목 기준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네 번째로 크다.(2017년 기준) 또한 세계에서 네 번째로 수출이 많으며 다섯 번째로 수입이 많은 나라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20여 년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내 총생산이 높았으며[6] 1993년 당시에는 룩셈부르크에 이어 1인당 명목 국내 총생산도 세계 2위를 기록하였으나 버블 붕괴 이후부터는 점차 하락세에 있어 현재는 20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인간개발지수는 2015년 기준 세계 20위에서 2016년 세계 17위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1위이다.[7] 또한 아시아 국가 중에서 G7에 들어가는 유일한 국가이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비록 일본은 헌법에 따라 군대 및 교전권을 포기하였으나 국토의 방위와 평화,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자위대는 현대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8] 유엔 및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일본은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낮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기록하고 있다.[9][10]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5만 으로, 이탈리아와 비슷한 정도이며 2022년 기준 OECD, NUMBEO가 조사하는 삶의 질 지수에서도 아시아에서 1위이다.[11][12] 세계에서 이주대상국으로 인기가 많은 나라이며 2020년에는 국제 송금 서비스를 다루는 remitly에서 조사한 가장 이주하고 싶은 국가 순위에서 캐나다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US news & world report 또한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캐나다에 이어 일본을 2위로 선정했다.[13][14]

국호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의 국호입니다.

일본의 국호는 일본어 명칭으로 ‘닛폰’(일본어: にっぽん, 

듣기 (도움말·정보)) 또는 ‘니혼’(일본어: にほん, 

듣기 (도움말·정보))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일본어: 漢字 간지[*])를 읽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한자로는 동일하게 일본(日本)이라 표기한다. 보통 닛폰이 공식적인 표기로 많이 쓰이며 주로 엔화와 우표, 그 외에 많은 공공 기관의 명칭이나 체육 행사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니혼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을 ‘니혼진’(日本人, にほんじん)이라고 호칭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일본어는 ‘니혼고’(日本語, にほんご)라고 부른다.[15]

닛폰과 니혼 양쪽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중국 수나라 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니혼과 닛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 일본은 주변국으로부터 멸시적인 의미에서 (倭) 또는 왜국(倭國, 왜나라)이라 불려왔고 히미코 여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동해희씨국’(東海姬氏國), ‘동해여국’(東海女國), ‘여자국’(女子國)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으며 ‘부상’(扶桑, 일본어: 扶桑 후소[*])이라고도 하였다.[16][17] 주로 서양권에서 부르는 명칭인 ‘저팬’, ‘재팬’(영어: Japan)은 중국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를 순례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고대 중국어의 한 갈래인 우어(吳語, 오어)로 일본을 뜻하는 단어인 ‘지팡구’(Gipangu)라는 단어로 일본을 소개하였고 이것이 수세기 동안 여러 변형을 거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자퐁(Japon)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5] 일본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JP이다.

역사

607년에 건립된 호류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의 역사는 보통 일본 열도의 역사와 동일시되지만 엄밀히 ‘일본’이라는 국호는 8세기 전반에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 일본 열도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18]

일본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고고학과 역사학 구분으로 나뉜다. 고고학에서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선토기 시대),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고훈 시대, 그리고 역사 시대로 일반적으로 나누는 한편, 역사학 상에서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고대(아스카 시대 및 그 이전 ~ 헤이안 시대), 중세(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센고쿠 시대), 근세(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근현대(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쇼와 시대헤이세이 시대)이다.

일본 열도의 인류사는 약 10만 년 전에서 약 3만 년 전 사이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일본 열도는 아시아 대륙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나 화베이 일대의 몽골 인종과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진 일본 열도[19]:17는 최후 간빙기를 거치면서 약 1만 2천 년 전에 대한해협(현해탄)과 쓰가루 해협의 생성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지만[19]:17, 그 후에도 일본 열도와 대륙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일본 열도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점차 편입되는 한편 동북아시아 지역의 최동단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에 따라 다소 이질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 경 이후 대륙으로부터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화 양식이 전해지면서 각지에 ‘무라’, ‘구니’와 같은 정치 조직이 천천히 형성되어 1~2세기 전후에는 각 구니의 연합체로서 왜국이라는 대규모 정치 조직이 출현했다. 이 연합 정치 조직은 3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야마토 왕권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663년 백제 부흥 운동에서 백제를 도왔다가 신라와 당나라에 패배하고 백제의 지배 계층이 대량 유입되어 7세기 후반 한자 문화권에 본격적으로 흡수되어 중국식 법체계, 사회 제도를 급속도로 받아들여 8세기 초 고대 율령 국가 체제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 한반도 등과 교류하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 체제를 바탕으로 귀족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귀족들의 세력 투쟁 사이에서 발달한 사무라이 계층은 13세기 이후 가마쿠라 막부를 세워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한편으로는 무로마치 시대에서 센고쿠 시대까지 무로마치 막부가 명나라에 조공을 행하였으며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씨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누르고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되었다.

15세기 ~ 16세기에는 15세기 후반에 등장한 센고쿠 다이묘 세력에 의한 지방 자치 체제의 형성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가 16세기 후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주도 하에 통일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루러 근세로 이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홋카이도와 지시마(쿠릴), 가라후토(사할린)의 에조치를 점령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일본의 영토 범위 또한 넓어지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뒤를 이은 근세의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鎖國)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敎化)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평화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20]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21]:225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냈고[21]:244 19세기 중엽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는 붕괴, 근대로 이행하게 된다.

전후 일본은 고도 경제 발전을 경험하며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사진은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의 모습.

에도 막부의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한 일본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인접국들과의 국경 확정을 행하여 가라후토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대신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 전역을 일본령으로 하였고, 난세이 제도와 류큐국은 류큐 처분을 통해 실효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여 지금의 일본 영토 범위가 거의 확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이루어져 1885년 내각 제도가 성립하고, 1889년에는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890년 중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제국의회를 설치함으로써 명목 상의 입헌 국가가 되었다.[22]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조선(대한제국), 타이완, 미나미카라후토(사할린섬 남부)를 강제 합병하고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 조차지를 설치하는 등 주변국 침략에 뛰어들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정당 정치와 보통 선거가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 군부의 정치적 대두와 함께 무리한 주변국 침략을 감행하면서 주변국의 저항과 미국 등 기존 열강과의 충돌을 통해 일어난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인해 주권을 상실한 일본은 연합군의 지배 하에서 청일 전쟁 이후에 조약으로 획득하였거나 강제 병합, 불법으로 획득한 대부분의 영토에 대한 권한을 주변국에 돌려주었다. 또, 국가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현재의 일본국 헌법 제정이 이루어졌으며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1972년까지 아마미 제도오키나와현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한편, 1970년대에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23]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22]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계속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22] 그러나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에 압승을 거둬 전후 최초로 완전한 정권 교체[24] 가 이루어져 2009년 9월 16일에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하였다.[25] 그러나 경제난과 2011년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등으로 신임을 잃은 민주당 정권은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에게 다시 여당 자리를 빼앗겼고, 2012년 12월 26일부터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 출범했다. 현재는 기시다 후미오가 일본의 총리에 선출되어 자유민주당이 오랫동안 여당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의 정치일본국 헌법 및 일본의 천황입니다.

제126대 천황 나루히토

일본의 정치 체제는 군주인 천황과 헌법이 양립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일본 국민들의 총의(總意)에 바탕을 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26]:62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내각의 조언과 승인, 책임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26]:62 그에 따라 내각총리대신과 내각의 임원들을 임명하거나 그 신임장에 인증하는 것,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하는 것, 국회를 소집하고 헌법 개정과 법률 및 정령, 조약을 공포하는 것 등으로 천황이 국사에 관여하는 것은 크게 한정되어 있다.[26]:63[27] :531 하지만 천황은 외교의례 상에서 일본의 국가원수로 대우받고 있다.[26][28] :63 현재 일본의 천황은 나루히토이며 2019년 즉위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황 스스로 백제의 왕손이라고 한 것은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입법 기관인 국회는 헌법에서 명시된 국권의 최고 기관[27]:531이자 나라의 유일한 입법 기관으로써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수상의 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과 불신임의 의결권을 가진다.[27]:531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 및 참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원은 전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되어 있다.[26]:65 국회는 1955년 이후 1993년부터 1996년까지의 연정 기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당이 계속해서 여당의 자리에 있었으나 2009년 9월 15일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시작되면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29][30] 2012년 12월 16일에 실시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여당의 자리를 탈환하였다.

기시다 후미오 현임 내각총리대신

행정권은 내각총리대신을 장으로 하는 내각에 속하며 내각은 행정권의 행사와 아울러 국회에 책임을 진다.[31]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내각총리대신이 임명권을 가지는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27]:531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을 비롯한 하급 입법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27]:531, 그러한 수행 상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국무대신들을 책임자로 하는 12성(省)을 갖추고 있다.[27]:531

일본의 사법 기관으로는 재판소가 있다. 최고재판소와 하급재판소(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 가정재판소, 간이재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재판관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립된 직권을 행사함에서 헌법과 이하 법률의 구속을 받는다.[26]:65~66 최고재판소의 법관은 내각의 지명을 받아 천황이 임명한다. 일본이 베트남과 협력하여 베트남의 법제를 정비하고 법률가 양성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구축하여 지원한 사업은 현재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32]

정당과 선거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의 정당 및 일본의 선거입니다.

국회의원, 도도부현 및 시정촌의 각 수장과 의회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만 20세 이상의 남녀 전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참의원 의원 및 도도부현 지사는 만 30세, 그 외에는 만 25세 이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보통 양원 의원과 도도부현 지사 및 의회 의원들은 특정한 정당의 당원 또는 그 정당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시정촌의 수장과 의회의원들은 무소속이거나 지역 소규모 정당 소속인 경우가 많다.[26]:68[33]

한편 일본의 주요 정당은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26]:68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55년 체제 이후 2009년까지, 2012년부터 총리대신을 배출한 자유민주당과 현재 연립내각을 함께 구성 중인 공명당이고,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당은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사회민주당일본공산당이다.[26]:68

외교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의 대외 관계입니다.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독도는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곳이다.

2006년 APEC 정상 회의에서 만난 한미일 삼국 정상 (왼쪽에서부터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내각총리대신)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의 대외 관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년) 및 각국과의 배상·보상조약을 거쳐 재구축된 것이다.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동맹을 기축으로 하여 서방 각 국가들과 긴밀한 제휴를 해 가면서 반공주의, 경제중심주의 외교라는 특징을 가지고[27]:531 유엔을 지원함으로써 평화로운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패전 이후, 1951년까지 주권을 상실하여 외교 자주권을 갖지 못하여 점령 기간 동안 점령국인 미국의 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대외 정책이 실시되어 왔다.[27]:531 그 후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서 소비에트 연방 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조인 거부가 이루어진 가운데 미일 강화조약과 안보조약이 체결되고, 중화민국과 중일조약이 조인되어 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함과 동시에 외교권을 회복하게 된다.[27]:531 1955년에는 GATT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민주주의 경제 정책을 취하는 선진 공업 국가들 중에서 점차 중요한 대외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6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국교를 회복함과 동시에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국제 사회에 복귀하게 되고[27]:532 거의 모든 독립국과 국교를 맺고 외교를 행하고 있다. 다음 해인 1957년에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유엔 중심주의, 자유주의 국가들과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27]:532

전통적으로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 각국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서양을 비롯해 세계 각국과 국교를 텄다. 일본은 전 세계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데 현재 일본은 맹방인 미국과의 외교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참조).[34] 태평양 전쟁 이후 체결된 조약에 따라 일본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2006년까지 미국은 일본의 최대교역국이었다. 하지만 하토야마 내각 이후 미일 관계는 각종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35][36][37] 이웃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서유럽 각국과의 관계도 깊다. 다만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러시아 등과 영토 문제 및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인해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38][39][40] 특히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과는 센카쿠 열도(조어도 제도), 러시아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4개 섬(이투루프섬쿠나시르섬시코탄섬하보마이 군도), 대한민국과는 독도를 둘러싸고 영토 문제를 안고 있다. 1965년에는 대한민국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회복하였으며 경제의 고도 성장을 거치면서 국제적 지위가 점차 높아지는 반면 동남아시아에서는 반일 운동이 일어나는 등 마찰이 발생하기도 하였다.[27]:532

일본은 유엔에 경제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나 그에 비해 지위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현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41] 독일브라질인도와 함께 상임이사국 진출을 계속 시도하는 국가인 이른바 G4 국가에 속한다.[42] 군사적으로는 한국 전쟁 당시 자위대를 후방에 파병한 것이 첫 활동이었으며[43] 2003년 이라크 침공 등을 계기로 자위대의 해외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44][45]

한일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일 관계입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46]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47]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폭악한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에서도 반한감정을 가진 일부 일본인들이 반한시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제기되는 독도 분쟁과 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등의 이슈를 안고 있다.[48][49][50] 2009년에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한 이후 이루어진 양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다수가 더 악화된 한일 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응답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51] 위안부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52]

국방

 이 부분의 본문은 자위대 및 주일 미군입니다.

방위성 청사

항공자위대 소속의 F-15J가 이륙하고 있는 모습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 항복의 조건으로 제국군을 해체시켰다.[26]:83 따라서 일본국 헌법에 명시한 내용으로써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가지지 않을 것임을 밝혀왔다.[27]:532 그 때문에 패전 후 군비(軍備) 및 교전권(交戰權)이 부인되었으나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어, 미국의 명령으로 일본의 기초적인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경찰예비대를 설치하였으며[26]:83[27]:532 , 1952년 보안청으로 승격되고, 1954년 방위청이 설치되어 경찰예비대가 현재의 자위대가 됨으로써 사실상 군대로 변모하였다.[27]:532 이후 일본은 3~5년 단위의 방위력 정비·증강 계획을 추진하여 1987년부터 방위비가 GNP 대비 1%를 초과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말 첨단 군사장비의 자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와 함께 극우계에서는 방위 개념의 확대를 기도함으로써 1980년대 말 최대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53]

한편으로 1947년 시행된 헌법에 따르면 국가 간의 교전권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자위대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재해석하여 자위대를 강화했다는 비판도 있다.[26]:83[54][55] 자위대는 육상, 해상, 항공 자위대로 나뉘며 헌법에 따라 징병이 아닌 자원으로 충원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최고 지휘권은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대신이 가지고 있지만 통상적 업무는 방위상에게 있다.[26]:85

한편 자위대와 더불어 일본의 실질적인 군사적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주일 미군은 1945년 이후부터 일본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또한 주일 미군은 자위대에 지속적으로 미국산 무기를 제공하고 공유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자위대의 지나친 주일 미군 의존이나 기노완 후텐마 기지 이전을 비롯한 주일 미군의 재편 문제, 주일 미군이 일으키는 범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56][57][58]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견제라는 취지에서 발동된 명령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일본의 자위대가 과연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가 유럽의 상황처럼 명령취소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미국과 유엔의 명령으로 자진 해산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위대의 역행적 자진해산이 가능한지는 일본 자위대의 지속적인 권한확대 및 강화에 따른 정반대의 행보로 비춰지는 '신군국주의'의 우려를 낳았다.[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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