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3-12 08:00

  • 근세 세계 모든 문헌과 지도는 말한다. ‘만주는 한국땅’이라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초 임시헌법의 ‘구한국(Old Korea)의 판도’가 최종 임시헌법 ‘대한(Great Korea)의 고유한 판도’로 해상도와 배율이 더욱 뚜렷해지고 확대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뇌부들의 국토인식이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큰 한국, 대한(大韓)’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다음 여덟 부문으로 요약해본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토는 삼천리 한반도뿐만 아니라 사천리 만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이어받은 것은 국호뿐만 아니다. 대한제국의 사천리 국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제2조 영토 ‘대한의 고유한 판도’가 바로 대한제국 원년(1897년)에 선포한 사천리 강토이다.

1)고종 34년(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일 익일: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2)고종 34년(1897년) 9월 30일 : 우리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다스리는 나라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3) 고종 34年(1897년) 9월 29일: 육지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그래픽=강효백 교수 제공]


2.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시대 실학자 증언 : 만주는 우리 땅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3권, 「송한교리치응사연서(送韓校理致應使燕序)」에서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이라 한다(而國於遼河之東謂之東國”라며 요하 동쪽을 우리나라 강역으로 정의했다.

정약용이 1811년에 편찬한 역사지리서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에서도 예맥과 말갈 발해의 강역을 상술하였으며 요동 지역은 수복해야 할 강역으로 보았다.

초기 실학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조선영토를 압록강 이북 지역까지 포함했다. 허목(許穆, 1596~1682)의 『동사(東史)』는 숙신과 말갈을 조선의 역사지리에 서술하였다. 이익(李瀷,1681~1764)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흥왕조승(興王肇乘)』과 『북새기략(北塞記略)」,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강계고(疆界考)』 등은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을 조선의 영토임을 명기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인문지리서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의 『택리지(擇里志)』는 고려 중기의 윤관(尹瓘, 1040~1111)이 동북 9성을 개척하면서 기념비를 공험진(公嶮鎭)곁에 있던 선춘령(先春嶺)아래에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했다.

3. 근세조선 대표지도, 만주는 우리 땅

18세기 대표적 지리학자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1750년대에 제작한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2)*는 만주와 조선을 아우르는 영토를 조선전도로 표기하고 있다. 『동국대지도』는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 이후 역대 조선 왕실에 의해 공인된 조선후기 대표지도다. 영조는 칠십년 평생 이런 지도를 본 일이 없다고 감탄을 하며 『동국대지도『를 홍문관(弘文館)에 보내 모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실록」 90권, 1757년 8월 6일(을축)). 같은 시기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에도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대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중국 근세 거의 모든 대표 문헌, ‘조선영토 남북사천리’

중국의 명청(明淸, 1368~1910)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총서 사서 지리지에는 조선 영토를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문헌을 12개만 골라 시대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1) ② 『수역주자록(殊域周咨录)』(1574) ③ 『함빈록(咸宾录)』1598, ④ 『황명경세문(皇明經世文)』 (1643) ⑤『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1658) ⑥『대청일통지(大清 一統志)』 1743, ⑦『사고전서(四庫全書) 조선부(朝鲜赋)』(1781) ⑨『사고전서 외사이관고총서(外四夷馆考总叙)』(1781) ⑩『사고전서 정계양잡저(鄭開陽雜著) 조선도설(朝鮮圖說)』(1781) ⑪ 『광여도전서(廣輿圖全書)』(1785) ⑫『동번기요(東藩纪要)』 (1882)

반면에 조선 영토를 한반도의 면적인 ‘3천리’로 표기된 명청시대 문헌은 단 1건도 없다.

참고로 중국의 1리(里)는 약 0.5km로 한국의 1리 약 0.4km보다 긴 거리다. 따라서 조선영토 남북 사천리는 약 2000km로 제주도 남단에서 러시아의 하바롭스크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거리다. 즉 만주 지역은 고조선시대나 고구려 발해시대는 물론 조선후기에도 우리 땅이었다.

5. 근세 중국과 일본의 거의 모든 지도: 만주는 한국 땅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1717년), <대청만년일통천하전도(大淸萬年一統天下全圖)>1767년,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1865년),<대청23성여지전도부조선주도여지도(大淸二十參省輿地全圖附朝鮮州島輿地圖)>(1885~1895년) 등을 비롯 18~19세기 중국의 모든 지도는 만주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지도작성의 선구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1717~1801)가 1775년 제작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도 만주가 조선 영토로 표기돼 있다.
 

[사진제공=강효백 교수]


 
6. 400여점의 서양 고지도 : 만주는 한국땅

2007년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은 2005년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이 발표한 서양 고지도 69점을 포함한 서양 고지도 400여점을 분석한 결과, 모든 서양 고지도에 20세기 초까지 이들 남만주 지역은 모두 한국 영토로 표기됐다고 밝힌 바 있다.

7.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인의 영토관에는 만주는 없었음

유사 이래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의 가슴 속 영토에 만주는 없었다. 만주가 중국인의 영토의식 판도밖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줄 수 있는 자료들이 반만년 중국사의 벌판에 수북하게 널려있다. 그 중 한가지만 예로 들겠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을 때 대부분의 세계열강들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규탄하고 가능한 한 강경한 제재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국인 중국 정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만주지역을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만큼 중국정부의 저항은 미약했다. 세세대대로 한족들에게 만주지역은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鷄肋)'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계륵보다 훨씬 못한, 뽑아내야 할 ‘충치’이거나 떼어 내어야 할 ‘종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들의 입장에서 만주는 조상대대로 국경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본토를 위협하거나 지배해 온 오랑캐들, 흉노, 부여, 고구려, 발해,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들의 본거지였으니.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 국민당 수뇌부와 피난행렬을 같이하며 맺어진 끈끈해진 관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진 영토의식의 실체를 엿볼 기회가 많았을 것이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인의 내심의 국토에는 만주가 없었으며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수복의지 역시 미약하였음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8. 20세기 전반까지 만주는 진공상태

[자료제공=강효백 교수]

 
종전 1년전이라는 1944년이라는 시간과 힘의 진공상태에 임박한 만주라는 공간이다. 연합국 승리와 일본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의 일본세력의 패퇴와 그로 인한 만주지역의 힘의 진공상태가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임정수뇌부는 간도 및 북방영토를 ‘대한의 영토’로 수복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포착, 이러한 염원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헌장 제2조에 전격 수용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주석

(1)*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는 장지연(張志淵1864~1921, 친일 변절자로서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의 주석에 의해 재발행 되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규정되고 이후의 개정과정도 상당히 불투명하여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가 정약용의 판본과 같은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흔히들 1861년 평민출신인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동국대전도를 토대하여 사적(私的)으로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상식의 오류’이다. < 대동여지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지도처럼 인식된 계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다. <대동여지도>는 <동국대지도>를 비롯한 300여종의 조선시대 지도와 달리 만주를 국토에서 제외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제의 구미에 부합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부각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분석된다.

 

 

김민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0/09/06 [13:51]

요하 천리장성을 한.중 국경선으로 정해야 한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요하 천리장성을 한.중 국경선으로 정해야 한다

중국진(秦),한(漢)은흉노(匈奴)의침략을방어하기위해국경에만리장성을축조하였고당(唐)태종은만리장성북쪽의이민족국가를복속하고세계제국건설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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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고종황제가 선포한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 영토를 통치했다.

 

중국 진(),()흉노(匈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을 축조하였고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국가를 복속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nbsp; 빨간색라인이 현재의 요하다. 그러나 단군조선당시 요하는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의 기준인 난하였다.&nbsp; 현재 요하아래가 번조선이 위치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영역은 번조선이 위임통치했던 난하아래 산동성.절강성지역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난하까지임을 알 수 있다. 한나라가 번조선지역의 위만조선을 지배한 이후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한나라의 국경은 요하가 기준이 되었으며, 고구려가 고토회복에 따라 서진하여 회복한 난하지역이 한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태조태왕때 10개의 성을 쌓아&nbsp; 1차 바리케트를 삼았고, 요하가 2차 바리케트가 된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천리장성이 그것이다. 따라서 최소 요하를 경계로 만주지역은 한국에 이양해야 한다는 역사적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nbsp; 한국이 성산으로 삼는 백두산지역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의 청나라는 한머리땅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김함보 후손의 나라 로&nbsp;쇠락해 가는 명나라 말기에&nbsp;만리장성을 넘어&nbsp;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북경을 도읍지로 삼고&nbsp; 현재의 &nbsp;지나국의 영토를 더욱 확장시켜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본래 한민족의 터전이고 역사무대인 만주지역은 마땅히 한국(남.북한)에 양도해야 하는 것이다 .&copy; 편집부(윤복현)

 
중국이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高句麗)의 연개소문 또한 중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는데 북간도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초대 황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가 시작됐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하며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제국은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 영토를 통치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간도(間島)를 직접 관할,통치하였으며 1905년 11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체결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고 대한제국령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일제에 불법 병탄되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삼권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1945년 8월 15일 대한 광복까지 대한광복운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日本帝国主義)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主權)과 영토(領土)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大韓國)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를 수립하였다.

간도가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정부,국회는 간도협약의 무효를 천명하고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야 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체 및 영토 계승을 공식 천명하고 중국과 요하(遼河)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국경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04.08.13 04:12l최종 업데이트 04.08.13 13:13l

 

"'압록강 서쪽은 중국땅' 주장은 황당대국주의 관점서 역사기술은 불공정"

중 주은래 전 총리, 63년 연설문서 주장... 설훈 전 의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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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의 벗이자 중국의 양심으로 추앙받았던 주은래 전 총리가 1963년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과의 접견에서 "조선 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며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밝힌 자료가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해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진 게 주요 원인"이라며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주은래의 이같은 발언은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어서 더욱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중국에 머물렀던 설훈 전 의원은 이같은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록'을 입수해 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조선과학원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주은래는 "발해의 수도였던 경백호 부근에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이는 (조선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고,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조선족이 더 오래 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라며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주은래는 "민족의 역사 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과학적이고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라며 "서적상의 기록은,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고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어 역사서는 2차 자료일 뿐"이라고 밝혔다.

'후대 사람이 역사를 위조할 수 있다'며 역사 기록을 맹신하지 말라고 한 발언은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와도 맞닿는 대목으로 주은래의 깊이 있는 역사적 안목을 보여준다.

주은래는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세워야할 하나의 공통된 관점은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 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라며 "어떤 때는 (중국이)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고 '중국의 역사왜곡'을 고백했다.

주은래는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며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고 말했다.

 
 
▲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천안문 누각에 선 주은래
 
 

이어 그는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런 불평등은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기에 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통일 뒤 정치·외교·행정·군사·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신중국의 실질적인 건설자로 평가받는 주은래는 26년 동안 총리로 재직하는 한편, 준의회의로부터 41년 동안 부동의 제2인자로 우뚝 서 있었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라는 중국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주은래의 추도 시비에 새겨진 글귀처럼 그는 아직도 중국인들의 가슴에 영원한 '인민의 벗'으로 남아있다.

다음은 설훈 전 의원이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 요지다.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 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 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 시기는 중조 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 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 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 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 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 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 시기는 역사 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000, 4000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 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 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 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 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 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 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온 생활 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 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 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 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 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 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 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 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族),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 본토 침입 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 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 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 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입력 2007. 3. 13. 08:46수정 2007. 3. 13. 08:46

국어교사가 만주 답사 후 책 펴내 (daum.net)

 

국어교사가 만주 답사 후 책 펴내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가동해 한민족의 역사인 고구려, 발해사를 철저히 왜곡하고 있어요. 비록 영토는 되찾지 못한다 해도 고구려나 발해의 기상과 웅대한 정신마저 빼앗겨선 안 된다

v.daum.net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가동해 한민족의 역사인 고구려, 발해사를 철저히 왜곡하고 있어요. 비록 영토는 되찾지 못한다 해도 고구려나 발해의 기상과 웅대한 정신마저 빼앗겨선 안 된다고 봅니다. 만주 5000년의 우리 역사를 되찾기 위해 역사기행문을 썼어요."

서울 신일고 국어교사인 박혁문(46·사진)씨가 1990년부터 방학을 이용해 만주지역 즉 동북3성을 찾아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와 유물, 중국의 동북공정 실체 등을 살펴 본 뒤 '만주 오천년을 가다'(㈜정보와 사람)를 펴냈다.

 

박씨는 중국의 한민족 역사 왜곡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그동안 왜곡되고 잊혀진 우리 민족의 숨결과 자취가 남아 있는 역사 현장인 발해만과 돈화, 단동, 관전, 집안, 서파, 요양, 연주산성, 심양, 무순, 훈춘, 용정, 백두산 등 15곳을 답사했다.

그는 "만주는 발해 멸망 이후 한번도 우리가 차지한 적이 없으나, 우리 민족인 예맥족과 우리 민족의 사촌격이라 할 수 있는 만주족이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며 수천년을 이어 온 자랑스런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만주역사나 만주 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매우 왜곡되고 편협했어요.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우리 정부와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무시하고 폄하했어요. 그럼에도 불구, '만주 벌판'이라는 낱말이 지금도 동북3성의 조선족에 의해 구전되고 있어요."

이제는 '만주'라는 말에 더 이상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지 않고 정서적·지리적으로도 단절돼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박씨는 "21세기에 필요한 우리의 시대정신이 고려나 조선의 반도 역사보다 고조선에서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만주 역사에 더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석규 기자

skpark@segye.com

 

 

입력 2008-02-14 13:27

 
 
한반도 동쪽끝인 독도에서 최남단인 이어도까지 전영토를 영어로 표기한 영문판 국가지도집이 처음으로 발간됐다. 독도와 백두산. 이어도 등을 놓고 인접국가들과 분쟁을 겪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영토를 국제공용어로 공식 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은 14일 우리나라의 영토 및 자연환경, 경제, 사회, 인구, 문화 등 종합정보를 수록한 국영문판 ‘대한민국 국가지도집’(The National Atlas of Korea)을 발간했다고 발표했다. 국문판은 1993년에 제작됐지만 영문판이 만들어지기는 처음이다.

국가지도집에는 대한민국의 영토, 자연지리, 인구및 정주(定住), 경제, 사회 등 5개 부문별로 480여개의 지도가 수록됐다. 2월25일부터는 인터넷(www.ngii.go.kr)을 통해서도 서비스된다.

영문판 국가지도집에는 일본과 중국 등 인접국가와 보이지 않는 마찰을 빚고 있는 독도와 백두산, 이어도 등이 한글 영어발음으로 표기됐다.

일본이 다케시마(竹島)로 부르고 있는 독도는 ‘Dokdo’, 백두산은 ‘Baekdusan’으로 표기됐다. 해양과학기지가 있는 한반도 최남단인 이어도도 ‘Ieodo’로 명시됐다.

국토지리정보원 관계자는 “독도 영유권분쟁, 동해 표기문제 등을 둘러싸고 인접국과 분쟁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영토를 명확히하고 구글 어스 등에서도 잘못된 표기를 바로잡기 위해 영문판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영문판 국가지도집은 오는 23일까지 1500부가 세계 지도제작기관, 주한외국대사관, 해외 주요대학, 재외공관 등에 배포될 예정이다. 이제교기자 jklee@munhwa.com

 

 

이종호  | 기사입력 2008/03/17 [22:20]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기록에나타난고대천문현상관측지추적일반적으로고대의사서에는자연의특이현상들이상세히기록되어있다.자연스럽지않은자연의변화가인간과사회의운

www.pluskorea.net

기록에 나타난 고대 천문현상 관측지 추적


일반적으로 고대의 사서에는 자연의 특이 현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고대인들의 믿음 때문이다. 기록된 자연 현상 중에서도 특히 천문현상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서의 기록은 위정자나 집필자의 주관에 의해 선별되고 변조되며 후대에 갈수록 윤색될 수 있다. 그러나 천문현상은 큰 틀에서 뉴턴의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대에 가더라도 변조가 불가능하고 설사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발견되는 사료들은 천문현상 기록을 토대로 사료의 진위여부를 가려주기도 한다.

■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기록의 의문

1994년, 고대사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매우 놀라운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와 경희대학교의 라 대일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기록된 일식의 관측 위치는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이었다. 

▲  [사진설명] 『삼국사기』 천문기록에 의한 삼국의 수도 비정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를 비정한 결과 삼국의 전반기에는 모두 중국 지역에 위치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蝕)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년(BC 54년)의 일식은 식분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기록으로 남긴 모든 일식은 어느 지역에서든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신라에서 141년에 측정된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166년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최적 관측지 즉 천문관측 현상을 관측하였던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일식기록이 201년을 마지막으로 787년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무려 580여 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록이 엄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즉, 일식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신라는 중국 본토 지역에서 한반도로 일정 시기에 넘어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게 된다.

문제는 신라의 경우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관측자가 한반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것을 차용했을 확률은 겨우 0.24퍼센트였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0.026퍼센트였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매우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의 여러 곳에서 천체를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래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 일본학자들의 견해도 기원 5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거나 꾸며내었으며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삼국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근거는 『백제본기』에 의할 경우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다가 375년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기록이 없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에 백제가 기록한 이 공백기의 일식기록으로 태백주현(224)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사진설명] 4세기 백제의 발전도. 고등학교 『국사』에는 4세기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반도, 왜의 규슈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천문현상기록이 구전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이를 글로 적었다는 가설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과거의 천문현상은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이 중요하지 지나간 과거의 천문현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의 천문현상이 수백 년을 걸쳐 구전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중국에서 차용했다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중국에서 천문기록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한 것이 현재까지 전달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문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민족의 기록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도 옛글이 있었다는 기록이 매우 신빙성 있게 느껴짐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국정브리핑, 2004.05.29 참조).

■ 백제의 요서영유(설)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루어지는 삼국시대를 거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국 측의 정사로 볼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만을 따로 분리한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3세기 중엽까지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라고 하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대에 이미 고부(古阜) 지방까지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과 16관등제라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국가체제 내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학자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자료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음에도 중국 측의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설로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 나타난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살펴본다.

『송서(488년)』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년)』 :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년)』 :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년)』 :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년)』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현재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

『송서』에 실린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주로 백제의 대 중국 외교 자료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이들 기록이 5세기 후반 경 백제와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사실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송서』의 내용은 모두 당대의 외교기록인데 요서영유 기록만은 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건 기록으로 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었던 이유로 당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송서』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상대되는 백제가 요서지방을 차지하고 이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는 대목이다.

반면에 『남제서』의 경우 전반부분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는데 유원재(兪元載)는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라는 내용이라고 발표했다. 『남제서』는 『송서』와 같은 내용이지만 진평군 진평현이 백제군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사서는 당대의 변화된 인식의 일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사신도(使臣圖)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는데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계의 기사를 담았다. 특히 백제의 원류기사를 마한으로부터 구했으며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지역을 차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남조계 사서에만 전해지고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 본토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당시의 동북아시아사상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당사국인 북조계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남조와 북조에서의 인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백제의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유사』, 『삼국사기』가 워낙 후대에 저술된 것이므로 요서영유(설)에 대해 일연과 김부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북위가 백제의 지경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이 전쟁도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중국으로 원정군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다. 490년 전쟁에서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당시 북위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이들을 운송시킬 대함선이 필요하다.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강성한 고구려(장수왕 시대)의 영토를 통하여 백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고구려가 순순히 허락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통과하려면 고구려와 북위가 상당한 조약을 맺거나 혈전을 치렀어야 하며 이럴 경우 북위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영토들은 남제가 북위에게 빼앗겼던 땅으로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일부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백제와 북위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인 산동반도는 요서영유(설)의 지역과는 다른데 백제가 언제부터 산동에 거점을 잡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역에 진출했던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전진의 연합에 의해 공격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제,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이상과 같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해서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있다. 제3의 의견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부여, 낙랑 등 다른 세력이 주체인데 백제로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백제의 요서영유를 긍정하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실학자 신경준으로부터 임수도, 정겸(丁謙) 등의 중국인과 신채호 , 정인보, 이민수,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등으로 이어지며 그 위치를 요서, 산동, 강소, 절강(遼西, 山東, 江蘇, 浙江) 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북조가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누락시킨 것은 북조의 사관들이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김상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근초고왕 말기에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요서영유(설)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 측의 자료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반면에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부정하는 입장은 실학자인 한진서를 비롯하여 주로 일본의 연구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중국 측 사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시기인 진말(晉末)에는 모용씨가 요서지방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의 의견으로 요서영유의 주체는 백제가 아니라 낙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부여 또는 마한과 관련된 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백제의 요서영유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설(說)'로 다루는 것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정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삼국의 역사를 재편해야 하는 상황도 피할 수 없으므로 현 단계에서 '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은 비록 (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다루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부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 [사진설명] 『우적도』(1978년 신신문화출판사 간행 『중국역사도설』)


■ 대륙 백제

백제의 '요서 영유(설)'은 한반도 백제 세력에 의해 중국 내의 일정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근래 이도학 박사는 한반도 세력에 의한 백제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 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도학 박사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했다.

『자치통감』 :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키는데 한반도 서남안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백제가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백제가 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지역을 아무런 견제 없이 무사히 통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말한다면 백제는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하며 중국 본토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정인보 등은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발전을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았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나 물길을 의미하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지적해 놓았다.

여하튼 부여는 고구려(또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연(燕)나라 가까이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1만 7000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비록 전연왕이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를 주면서 사위를 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후 부여는 전연과 전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를 두고 당시에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부여의 영토는 추후 강력한 제국인 고구려에 병합되므로 고구려에 병합되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부여가 존재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 기록들도 백제의 위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송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위의 기록 역시 우리가 배운 고대사의 상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볼 수도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라는 글이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박사는 이 기록이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 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꼽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로 추정한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중국 지역 존재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인 13-14세기에 제작된 『중국역사도설』〈우적도(禹迹圖)〉와 이를 기본으로 한 『송본지리지장도』〈우적도(禹迹圖)〉로도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지도에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관련되는 지명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리민족사연구회〉의 오재성은 『송본지리지장도』는 송나라가 진한(秦漢)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나(支那, 秦漢 = Chin Han, 이하 중국이라 적음)의 역사를 밝히는 역사부도로 볼 수 있으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우적도(禹迹圖)〉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거론되는 지명들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지명인 북평(北平), 태원(太原)은 물론 진번(珍播, 眞番)과 주애(朱崖) 사이에 동이의 유적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무덤이 있는 동평(東平)과 조선의 기자무덤이 있는 몽성(蒙城) 등이 나타난다.

특히 백제의 지명으로 사서에 나온 황산(黃山), 평원(平原), 대산(大山), 제성(諸城), 백마(白馬), 동명(東明), 정성(項城), 주류성(周留城), 동성(桐城), 독산(獨山), 덕안(德安) 등은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 중국 반도의 동쪽 지역 즉 현재의 중국 요동지역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도 〈우적도〉에 의하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①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②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③ 하수(河水(한수(漢水), 한강(漢江))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군(晉平二郡)이 있다. 

▲ [사진설명] 『송본지리지장도』. 백제에서 보이지 않는 사서의 지명들이 이들 지도에는 나온다(『백제는 중국에 있었다』)

 
<우적도>가 한국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한민족과 연관이 많은 요(遼, 현재의 중화민국 지도에서는 좌권(左權)으로 적혀 있음)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는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고 하는데 〈우적도(禹迹圖)〉를 참조하면 요동 요서는 요수(遼水)가 기점이 아니라 요(遼, 좌권)가 기점이 된다(백제의 요서영유(설)의 요서는 이 기록에 의할 경우 요의 동쪽에 있음).

〈우적도(禹迹圖)〉에 의하면 적어도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구려는 현재 만주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아시아 동북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지역인 현재 중국 본토의 동부에 백제가 있었고 그 아래에 신라가 있었던 것이 된다.

특히 『남제서』에는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산동반도 지방에 7개 군에 태수를 두었으며 임승국은 동성왕의 능이 산동의 청도서북(靑島西北(百支莢王之墓))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백제가 중국 지역을 통치한 연한을 통산하면 약 400년에 가깝다고 적었다.

백제의 주민 구성을 보면 한강 하류 지역인 마한 세력권으로 포함하여 지배집단을 이루게 되는 북방 유이민들이 정착하기 이전, 이 지역 선주민 세력은 대개 한족(韓族)계통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제부터 영제 말기(147 189)에 이르면서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이나 그 지배 하에 있는 현의 힘으로는 이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196 219)에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쪼개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摸) 등을 보내어 유민(流民)들을 결집시켜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토벌했다. 이 이후로 왜(倭)와 한은 드디어 대방군에 소속되었다.'

이들 한예들이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으로 보이며 백제 지배층을 구성했던 세력들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남하하여 한강유역 각지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 주민 구성에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섞여 있게 된 것은 4세기 전반 중국의 군현이 축출된 이후 급변하던 삼국간의 정세에서 많은 중국계 인물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경우도 중국영유의 여지를 갖고 있다. 안호상은 신라의 국역이 만주의 삼개성(三個城)과 중화(中華)의 구개주(九個州)였다고 적었다. 장보고의 신라방(新羅坊)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확대하여 신라방이 아니라 신라가 영유하는 지역이 중국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오재성은 신라가 중국 본토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고 적었다. 307년부터 통치자의 호칭을 '왕'으로 했던 신라와 503년 간((干)에서 신라국왕으로 불렀던 신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구당서』는 은산, 신성, 고대인성의 고구려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고 고구려 남쪽과 백제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 설에 의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에서 분리된 사로신라(斯盧新羅)와 한반도에서 간(干)에서 신라왕이 된 신라가 있었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의 기록도 인정하고 송대의 〈우적도(禹迹圖)〉도 인정하면서 현재 중국에 있는 지명도 참고한다면 삼국의 위치가 현재까지 인정되는 역사와 전혀 달라지게 된다. 한반도를 무대로 구성한 고구려 신라 백제 특히 백제의 역사는 한 마디로 엉망이 된다는 뜻이다. 
 

▲ [사진설명] 비류의 근거지로 알려진 &lsquo;백제우물&rsquo;. 인천 문학산성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매립돼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인천지역에서 삼국시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됐거나 출토된 적이 없어 고대사 연구의 공백 지대로 남아있다(『새로 쓰는 백제사』)


■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중국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도학 박사는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주서』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부여계이고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부여계인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배경으로는 ①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②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③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 박사는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 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어떻게 결합했느냐'인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했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기록 연구에 따른 백제 신라의 위치 비정은 앞에서 설명한 대륙백제(신라도 포함)설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은 백제의 요동영유(설) 등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보인다. 물론 신라 최적 일식 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에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이므로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을 덧붙인다.

기록이 많지 않은 고대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현재적 한계이다. 여하튼 우리 고대사를 과학으로 풀어 보면 앞으로 그 미스터리가 더욱 많이 규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17 [15:14]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

필자가백제에대한연재를계속해나가면서백제가대륙에있었다는논리를펴자,썩어빠진식민사학을추종하는일부네티즌들이음해성댓글로공격을해왔고,주

www.pluskorea.net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버린 일제와 매국식민사학계

필자가 백제에 대한 연재를 계속해 나가면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자, 썩어빠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음해성 댓글로 공격을 해왔고, 주위에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한반도에는 누가 있었느냐?”고 푸념어린 질문을 해왔다. 필자 귀에는 “살기 좋은 이 땅을 놔두고 역사를 왜 대륙으로 가져가려느냐?”는 항변으로 들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면 당연히 고구려와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는 말 아니냐? 그렇다면 한반도엔 아무도 없었단 얘기인데, 우린 도대체 누구의 자손이냐? 우린 애비 애미도 없는 호로 자식이냐?”라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다들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국심이 넘치는 한국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일부러 믿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애국심에 충족이 되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일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인 반도사관은 이 나라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반도사관이 얼마나 무서운 이론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얼빠진 이 나라 정부가 아직도 일제 때 조작된 역사 이론을 그대로 교과서에 실어 학교에서 교육했기 때문이요,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이 나라 사학계가 일제 때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의 질손인 이병도는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팔아먹은 이 나라의 역사는 해방 62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보다 더 나쁜 민족반역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나라가 역사 회복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로 이 나라 사학계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 지킴을 위해 오히려 스승의 반도사관을 더욱 더 굳건히 사수한다. 심지어는 이병도가 죽기 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잘못이라는 참회의 글을 발표하자 “우리 스승이 나이가 들어 노망을 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 찾기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이란? 

반도사관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동서로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이런 반도사관이 뭐 그리 잘못된 이론이라고 성훈이라는 사람은 글 쓸 때마다 매번 사학계를 매국이니 식민이니 하며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 해소가 되리라 믿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백제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로 비정 해버리면 문제는 그 이전 역사도 당연히 한반도로 비정이 되어야 한다. 그 이전 역사란 바로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사군과 삼국의 전신인 삼한(마한,변한,진한)과 위만/기자 조선의 역사이다. (일제와 이병도는 위만 이전인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어 버려 반도사관에 단군조선의 역사는 없다)  

결국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현 대동강 평양이 되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 위만조선의 수도도 대동강 평양이 되는 것이다. 현 역사 이론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기자조선은 중국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고 한다.(참고로 북한은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었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말 한마디도 없으며, 단군은 모친이 곰이라는 신화로 처리되어 있다. 배달국과 환국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그저 교과서에 있는 문장이라고는 “B.C 2333년 단군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에서  --> “~ ~ 건국되었다”로 바뀌면서 ‘고 한다’이 세 글자 떼는데 6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반도는 예로부터 기자라는 이민족에 의해 시작되어, 위만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다가, 한사군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된 역사라는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대로 이민족에 의해 지배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일제가 조작한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매한 조선민족이 천황의 민족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반도사관을 편 일제의 논리였다.

“조선인이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 특명으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중국과 조선에 있던 고대 사서를 전부 거두어들인다. 중요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고,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란 새로운 역사서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조작되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키던 역사 이론이,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된 지 6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 이론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이 나라의 통치권자들의 역사인식이 친일적이었거나 아예 역사개념조차 없었던 통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민족정신을 말살하던 이병도는 6.25 후 친일파를 중용하던 이승만에 의해 다시 이 나라 사학계를 맡게 된다. 일제에 역사를 팔아먹은 조선사편수회의 매국노 멤버들인 홍희/신석호 등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핵심이 되어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 후학들이 대학의 강단으로 펴져 나가면서 이 나라의 사학계는 더욱 매국식민사학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아직도 일제치하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엉터리 역사이론인 동북공정을 앞세워 북한 땅을 노리고 있음에도 이 나라 사학계는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리 되면 지금까지의 자기들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누가 자기 목줄을 걸고 그렇게 하겠는가!

대한민국 사학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풍지대이다. 아무런 저항도 안받고 그 엉터리 이론을 마구 떠들고 있는데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입도 뻥끗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간혹 입바른 소리가 나오면 이번에는 정부에서 중국과 외교상 문제가 된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도 되찾기 운동이다.

간도는 조선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을사늑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제3자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고, 이미 일본이 을사늑약 자체를 무효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간도에 대한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년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해이건만 이의신청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인지? 아니면 중국의 제후국 정부인지, 일본의 식민정부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삼한의 진실 (삼한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알아보기로 하자.
단군조선은 44세 구물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천왕이 진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로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기자의 후손 6명이 번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이 단재 신채호선생의 이론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기준은 해대(海岱)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해대는 해(海) 지방과 대(岱)지방을 합한 말로 대(岱) 지방은 산동성 태산 일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거기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뛰어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가다’의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Let's go'의 뜻이다.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 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따라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25사인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보아도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영역은 하북성 일대인 것이다. (아래 사진참조)

한무제와 위만국 우거왕의 전쟁을 직접 참전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는 이 전쟁 후 참전 장수들을 처벌하는데 극형인 기시(찢어 죽임)라는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무참히 패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한4군이 아닌 조선4군을 설치했다 하며, 낙랑.임둔.현토.대방이라는 기록이 없다. 한사군은 분명 후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은 어떤 나라이고 어디 있었나?

나머지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단군조선의 정통인 진조선을 계승하여 나중에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이어지며, 영역은 내몽고와 하북성 일대로 보인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간 가섭원(동)부여는 북만주 일대가 그 영역이 된다. 나머지는 최씨의 낙랑국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를 그 강역으로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대대로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바다로 들어가 자살했고, 한반도 남부에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생겨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nbsp;&nbsp;기준이 남하한 곳은 대륙 동부 海지방으로 선조인 기자가 살던 땅이고, 최씨의 낙랑국은 한반도에서 세워진다. 식민사학계는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낙랑군을 그 위치로 가지고 간다.


대동강평양은 대대로 기자/위만조선의 수도였으며, 한무제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쓰러뜨리고 현 북한 땅 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허무맹랑한 이론을 지껄이고 있다. 평양근처에서 발굴된 유물은 바로 최씨 낙랑국의 유물이었음에도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이걸 한사군인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시켰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공교롭게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같이 쓰기 때문에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의 경우 ‘낙랑태수’라는 것은 낙랑군을 의미하고, ‘낙랑왕’이라는 것은 최씨의 낙랑국을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는 단군조선의 막조선에 이어 최씨 낙랑국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 망함으로서 한반도 전체는 고구려의 강역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호동왕자와 자명고와 낙랑국왕 최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왕자 호동이 옥저 지방을 구경다닐 때 낙랑왕 최리가 마침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오?”하고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환국한 다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녀에게 알리기를 “그대가 그대 나라 병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부셔버린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겠다.”하였다.

전부터 낙랑국에는 고각이 있어 만약 적병이 침입해올 경우 북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녀는 날선 칼을 가지고 병기고 속으로 들어가 고면과 각구를 부수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을 왕(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케 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방비하고 있지 않다가 군사가 엄습하여 성안에 당도한 후에야 북과 호각이 다 부숴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

호동과의 사랑에 빠져 조국을 배반하는 낙랑공주의 낙랑은 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손인 낙랑국이다. 이렇듯 엄연히 정사서인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낙랑국을 매국식민사학자들은 아예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는 낙랑군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래서 중국 하북성에 있어야 할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들어오게 되고,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국의 유물이 모조리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 변조되는 것이다. 

▲&nbsp;&nbsp;&nbsp;한반도 낙랑국과 하북성에 있던 낙랑군과 그 위에&nbsp;잇었던 고구려.


낙랑국 이후 한반도는 누구의 땅?

한반도는 낙랑국에 이어 AD 32년부터는 고구려의 영역이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것임에도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물이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둔갑된다.

대표적인 것이 풍납동 몽촌토성의 피라밋이 백제 근초고왕의 것이라고 하는 희한한 이론이다. 분명 풍납토성의 피라밋은 집안지역의 피라밋과 그 양식이 같고, 공주의 무녕왕릉과는 그 양식이 완연히 다르다. 어떻게 한 왕조에서 두 가지 무덤 양식을 쓸 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대부(大夫)라는 고구려의 관직명이 엄연히 적혀 있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유물은 전부 AD 450년 이전의 유물이고, 그 이후에는 고구려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즉 대략 450년 이전의 한반도 전체는 확실한 고구려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nbsp;&nbsp;풍납토성에 있는&nbsp;대형 피라밋. 식민사학계는&nbsp;이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nbsp;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이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 무덤양식이다. 사학계는&nbsp;왜 공주의 무녕왕릉과 그 양식이 다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같은&nbsp;나라에서 이렇듯 다른 무덤&nbsp;양식으로 왕릉을 조성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고구려 이후에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라의 유물로는 진흥왕순수비를 들 수 있다.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즉 지증왕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신라가 자립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24대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워 그 영역을 표시하며, 나중에는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nbsp;&nbsp;561년 세워진 창녕진흥왕순수비는 4개의 비 중 가장 남쪽에 있다. 그 서쪽엔 백제의 뭔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백제의 도읍지는 분명 산동성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의 담로 형태로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상으로 보아 분명 한반도에도 뭔가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 아마 그 시기는 AD 500년 전후로 동성대왕 ~ 무녕왕 사이가 아닌가 싶다.

그 근거로는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에서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지석이 발견되었고, 부여에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백제 사마왕능의 주인공이 무녕왕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황제가 죽을 때 쓰는 용어인 붕(崩)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정식 왕인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식 왕의 부부 합장묘로 보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왕릉 바로 옆에 다른 묘 2개가 붙어있고, 지석에 적혀있는 斯麻의‘麻’자가 정사의 기록인 ‘摩’자와 다르고, 사마라는 왕의 휘(이름)를 함부로 쓴 것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무녕왕은 대륙 동부를 호령하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는데 그런 왕의 무덤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만큼이나 위상이 강했던 백제왕의 무덤이 덕흥리 고분(주인공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보다도 작고 초라하니 이상한 일 아닌가?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글씨체도 너무 조잡하고 초라하다. 여하튼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은 아직도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nbsp;&nbsp;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의 지석.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 붕(崩)했다고 적혀있다.


백제 무녕왕릉에 대해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본으로 남긴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왕비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녕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녕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이 맞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nbsp; 부부합장된 백제의 본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백제사마왕릉


여하튼 의혹은 많으나 523년 붕(崩)한 백제 무녕왕의 능이 공주에 있고, 그 후 신라 진흥왕의 남쪽 순수비는 창녕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진흥왕 이전에 창녕 서쪽에는 백제가 분국이나 담로 형태로든 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후에 동신라가 만주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보아 확실치는 않으나 600년 경 한반도의 백제 담로는 소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25사에도 백제의 수도가 동.서 두 군데가 있었다고 했다. 해서 혹자는 동쪽 수도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나, 필자는 동쪽 수도라는 개념보다는 백제의 담로나 분국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백제의 동쪽 수도는 산동성, 서쪽 수도는 호남성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한반도에는 어느 나라가 있었는지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된다 하겠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는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행정력을 가진 국가로서의 형태는 구리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구리시대 (한웅, 신시시대) : B.C 3898 ~ B.C 2333

2. 조선 : B.C 2333 ~ B.C 238

3. 낙랑국 : B.C  238 ~ A.D  32

4. 고구려 : A.D   32 ~ A.D 500년 전후

5. 백제담로와 동신라 : A.D 500년 전후 ~ A.D 918년

6. 고려와 근세조선과 대한민국/북조선 : A.D 918 ~ 현재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수도는 다 대륙에 있었고 주 활동무대도 대륙이었지만, 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땅인 한반도에도 삼국이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다. 옛부터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이 거의 없는 평화지대로 말 그대로 소도(蘇塗)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와 한반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도사관을 믿으려고 하는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여! 이제는 역사에 대한 눈을 제대로 뜨고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인정하면 결국 북한 땅은 낙랑군 때문에 중국 땅이라는 이론적 결과가 나와 동북공정이 옳다고 인정하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현재 식민사학계가 지껄이고 있는 반도사관은 국가를 망칠 무서운 매국적인 이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망국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륙을 지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역사가 밝혀지는 날 이 땅에는 희망이라는 찬란한 빛이 도래할 것이다. 
 

▲&nbsp;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도. 최적관측지는 그 나라의 수도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는 787년 이후에 신라의 도읍이 들어선 것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은 "백제의 분국인 왜(일본)의 위치는 어디인가?"가 2~3부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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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신라등고대 주요 지명의 추정지역(근거: 『신당서』, 『요사』, 『후한서』, 『사기』, 『삼국사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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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과학으로 증명된 충격 사실!! -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siddham.kr)

 

· 자유게시판 - 과학으로 증명된 충격 사실!! -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1.별자리로 본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3국의 무대는 중국 대륙이었다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1997년 2월 신동아) 고려시대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에는 다양한 천체현상과 기상이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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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강역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역사의 강역

지도로 본 역사강역 동북아시아지역의 지도를 중심으로 한(韓)민족의 고대국가와 화하족의 강역을 살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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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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