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49) 제6공화국 : 노태우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992년 8월 24일 한 · 중 수교, 1992년 9월 28일 한 · 중 정상회담 본문
대한민국 (49) 제6공화국 : 노태우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992년 8월 24일 한 · 중 수교, 1992년 9월 28일 한 · 중 정상회담
대야발 2025. 7. 6. 16:34

한중 수교 배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붕괴와 이를 계기로 속도를 높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임기만 놓고 보면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37개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중 수교는 1990년 한소 수교와 더불어 국제 정세의 격변과 한국의 기민한 외교 활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특파원 리포트] "한중수교 직접 서명하려했다"..노태우 전 대통령과 중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사망했습니다. 고인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불법 비자금 조성 등 짙은 역사적 그늘을 남겼습니다. 다만 베이징 특파원 입장에서 그의 생애 한 부분은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 관계의 커다란 분수령이 된 1992년 한중 수교 당시의 대통령이었습니다.
■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상징적 사건
한중 수교 배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붕괴와 이를 계기로 속도를 높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임기만 놓고 보면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37개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중 수교는 1990년 한소 수교와 더불어 국제 정세의 격변과 한국의 기민한 외교 활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상대인 중국에서도 1992년 남순강화로 위상을 높인 덩샤오핑이 자신의 경제 발전 구상의 실현을 위해 중국 내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중 수교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또 한국에 타이완과의 단교를 요구해 타이완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고 수교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었던 첸지천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밝혔습니다. 노태우 정부 역시 한중 수교를 통한 대북 압박과 이를 통한 한국 주도의 통일을 노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김종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중앙일보> 인터뷰)

한중 수교 교섭 과정의 외교문서들은 여전히 비밀의 영역에 남아있지만 이처럼 수교에 참여했던 외교관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중 수교 과정에 대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역할과 의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노태우 전 대통령, 직접 수교협정에 서명 희망…수교 직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으로 절충
이미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며 한중 양국이 어느 정도 관계 정상화에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APEC회의에 참석한 첸지천 외교부장에게 한중 수교 의사를 전달하며 정부 간 최고위급 차원에서 사실상 공식화됐습니다. (김하중 전 주중대사 회고록 <한국외교와 외교관>)
한국 측에서는 '동해사업'이란 이름으로 은밀히 추진한 한중 수교 협상 결과 1992년 8월 한중 양국은 수교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중국을 직접 방문해 수교협정에 서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대신 다음 달인 9월 중국을 국빈 방문해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습니다.
수교 협정 체결 시점이 거의 결정된 상황에서 대통령 방중을 위해 세부 계획과 인원, 숙소 등을 결정해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수교 자체가 비밀이어서 쉽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권병현 전 주중대사 '한중수교비망록' <한국일보>).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중 수교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자신의 역할을 대외적으로 부각시키기를 강하게 바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9월 27일부터 3박 4일간 중국을 공식 방문해 양상쿤 주석과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장쩌민 공산당 총서기, 리펑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양국은 한중 간 선린 협력 발전이 양국 국민의 이익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 평화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내용 등을 담은 ‘한중 공동 언론발표문’도 발표했습니다.


■ 주한 중국대사, 한중 수교일 앞서 노 전 대통령 방문…중국 정부 "사망에 깊은 애도"
이 같은 선친의 경험과 의지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인 노재헌씨는 일대일로연구원의 원장을 맡아 한중 교류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자녀들도 어린 시절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이 가운데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해와 올해 8월 한중 수교 기념일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만큼 싱 대사는 노재헌씨 등 노 전 대통령 가족들과 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올해 8월 20일 연희동 방문 당시 싱하이밍 대사는 “29년 전 양국의 전 세대 지도자들이 현명하고 정확한 결정으로 한중 양국이 수교하게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중국은 노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한중 관계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입장을 내놨습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말을 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오 대변인은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한중 수교와 양국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1)
소련과의 수교가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외교의 분수령이었다면, 중국과의 수교는 북방외교를 완성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한반도에 찾아온 안보 불확실성을 제거한 대담한 접근법이었다.
■ "협상팀 믿고 '한·중 수교 대국적 타결하라' 지원..盧 아니었다면 역사 바뀌었을 것" [노태우 별세]

“한ㆍ중 수교라는 역사적 사건이 불과 4개월간의 비밀협상 끝에 이뤄진 것은 협상단을 믿고 권한을 완전히 위임해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넓은 포용력을 갖고 큰 역사만 본 분입니다.”
1992년 한ㆍ중 수교 당시 대중 실무교섭대표를 맡아 중국과의 협상을 이끌었던 권병현 전 주중 대사는 26일 “그분의 큰 뜻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며 이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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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원천은 노 전 대통령 강력한 의지"

소련과의 수교가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외교의 분수령이었다면, 중국과의 수교는 북방외교를 완성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한반도에 찾아온 안보 불확실성을 제거한 대담한 접근법이었다.
권 전 대사는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직후 이뤄진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92년 4월 양국이 협상 대표를 정하기로 한 뒤 5월 첫 회담을 하고 8월 24일에 수교하기에 이르렀는데, 단기간에 이런 비밀 협상과 타결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임기를 끝내기 전 중국과의 수교로 북방외교를 마무리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고 돌아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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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국만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의 의지

Q : 수교 협상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A : 1991년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가 열렸는데,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게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해에 북방외교의 실행부처인 외무부 주도로 중국, 대만, 홍콩이 모두 APEC 정회원국으로 가입될 수 있도록 했다. 첸지천 부장이 올 수 있는 레드 카펫을 깔아준 셈이다.
Q : 중국과의 수교를 염두에 둔 조치였나.
A : 그렇게 볼 수 있다. 당시 방한한 첸지천 부장이 청와대로 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미수교국의 정상을 예방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첸지천 부장에게 전했던 메시지가 사실상 ‘그린 시그널’이었다. “양국 간에 이제 수교를 할 때가 됐다” “우리는 소련, 동구권과 수교를 했고 이제 중국만 남았다”는 취지의 강력하고 직설적인 수교 의지를 보였다.
Q : 노 전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보인 배경은 무엇인가.
A : 93년 초면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에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방외교를 완성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중국과도 수교해야 화룡점정이 되는 것이었다. 또 중국에서는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옹의 결단이 있었다. 덩샤오핑 옹의 개혁ㆍ개방 정책은 89년 6ㆍ4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으로 서구 자본의 대탈출이 이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덩샤오핑 옹은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것 같다. ‘무해양득’, 중국 경제에 좋고 중국 통일에 좋고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런 덩샤오핑 옹의 암묵적 훈령에 따라 첸지천 부장이 서울에 왔고, 노 전 대통령이 만나 화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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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동해', 4개월 간의 비밀 협상

Q : 중국 반응은 어땠나.
A : 첸지천 부장이 돌아가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리펑(李鵬) 총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92년 4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APEC 각료회의 참석을 위해 방중한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이 단독으로 첸지천 부장과 비밀 회담을 했다. 거기서 담판 대표를 한 명씩 임명하자고 합의가 됐다. 양국 지도자의 뜻을 받들어 이뤄진 것이었다. 이상옥 장관이 이를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곧 내가 대표로 임명돼 5월 베이징에서 첫 회담을 했다. 작전명 ‘동해’로 명명한 비밀협상이었다.
Q : 중국과의 수교 협상인데, 왜 서해가 아니라 동해인가.
A : 혹시 상황이 새어나가도 동해라고 하면 중국과 연결하지는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정했다. 그만큼 기밀 유지가 핵심인 협상이었다. 나를 협상 대표로 임명하면서 이상옥 장관이 “고향의 아버지가 병이 났다고 하고 사라지라”고 했고, 실무에 참여한 신정승 동북아2과장은 병이 나서 입원한 것으로 했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자정이 넘어 안가와 이상옥 장관이 있는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서류를 전달했다.
Q : 결국 유출 없이 불과 4개월 만에 협상을 타결했는데.
A : 그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준 게 노 전 대통령이었다. 사실 비밀이 깨지면 협상이 깨지고, 그러면 양국관계에 미칠 충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단시간 내에 빨리 타결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가 있었다. 협상 대표로서 비밀이 깨지는 게 먼저냐, 타결이 먼저냐 하는 치킨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협상팀에 모든 것을 맡겨줬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을 내리지 않고 “어떻게든 대국적으로 타결하라”고 강한 의지를 갖고 밀어줬다. 협상팀을 믿고 권한을 완전히 준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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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 교차점 된 한·중 수교"

Q : 이 정도 중대한 사안은 통상 협상 중 계속해서 대통령에 보고하도록 할 텐데.
A : 물론 이상옥 장관이 회담이 끝날 때마다 대통령에 보고는 했지만, 협상 중간에 단계 단계 보고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았다. 서울 워커힐 호텔 꼭대기 층 VIP룸에서 이뤄진 마지막 3차 회담에서 수교문서 문안이 확정됐는데, 이것까지도 협상단에 위임된 권한이었다. 협상단이 우선 중국과 문안에 합의한 뒤 이상옥 장관과 김종휘 청와대 수석 등이 직접 워커힐로 와서 문안을 검토한 뒤 승인했다.
Q : 노 전 대통령은 처음부터 대만과의 단교를 결심한 뒤 중국과의 수교를 택한 것인가.
A : 그렇다. 중국이 수교하는 나라들에는 빼놓지 않고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첫 회담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버텼고, 이 때문에 결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마지막 회담에 가서야 우리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은 북한과의 혈맹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대만 못지않게 충격받은 게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원했던 것은 한ㆍ중이 수교하면 북ㆍ미도 수교하는 것이었는데, 한ㆍ중만 단독수교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과의 수교로 상전벽해 같은 기회를 맞이한 것을 고려하면, 남북에 일종의 교차점이 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Q : 노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한ㆍ중 수교는 언제 가능했을까.
A :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상황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중국이 대가로 북ㆍ미 수교를 요구하지 않았겠는가. 노 전 대통령과 덩샤오핑 옹, 두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맞아떨어져 이뤄낸 결과였다. 고인의 큰 뜻을 잘 조명해달라. 그분의 큰 뜻이 아니었다면, 그 기회를 놓쳤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11027080152048
(2) https://v.daum.net/v/20211026180024128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50605070507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