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조선 문화유산 (25)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년(헌종 9년)~1897(광무 1년)), ‘호취도(豪鷲圖)’ 본문
■[최문영의 그림산책] 오원 장승업 ‘호취도(豪鷲圖)’

‘호취도’는 안견, 김홍도, 정선과 함께 조선 시대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조선 말의 천재 화가 장승업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장승업은 사의적인 문인화풍이 아닌 뛰어난 기교로 그의 감성을 작품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짜임새 있는 구성과 힘 있는 필법, 강렬한 묵법 등으로 생동감과 활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장승업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호인 오원에서 드러나는데, 오원은 그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과 같이 본인도 원이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은 그의 뛰어난 실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산수, 인물, 영모, 화훼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여줬으며 기명절지도를 창안하기도 했다.
장승업의 작품 중 화조영모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특징이다. ‘호취도’는 이런 장승업의 작풍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두 마리의 매가 위아래 대칭되는 위치에 배치돼 작품에 안정감을 준다. 두 매는 날카로운 부리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깃털이 몰골법으로 표현됐다.
두 마리의 매는 앉아 있는 자세는 완전히 대비된다. 위의 매는 먹이를 노리는 듯 몸을 크게 비틀어 아래를 보고 강렬한 눈빛과 곤두서있는 털로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그 나뭇가지도 매와 같은 형태로 뒤틀려져 있다. 그와 반대로 아래가지의 매는 위를 쳐다보고 있으며 털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여유로워 보이며 나뭇가지도 부드럽게 뻗어 나가고 있다.
고목의 줄기와 옆의 바위 역시 몰골법과 적절한 먹의 농담으로 견고함을 느끼게 하며 섬세하게 표현된 나뭇잎과 잔가지, 흰 꽃들은 안정적이고 운치를 느끼게 해 화면을 조화롭게 한다. 또한 절제된 색상 사용으로 매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뒀다.
장승업은 자유분방하며 강렬한 화풍으로 많은 작품을 그렸고 이러한 그의 그림은 암울했던 조선 말기를 찬란하게 빛내었다.(1)
■[그림같은 세상―조선말기 화단 풍미한 오원 장승업] 궁중화원 되기까지 인생역정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에 빗대 "나도 있다"며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고 지었다는 장승업(1843∼1897). 그림엔 천부적 재능을 가졌으나 술에 빠져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오원의 파란만장한 삶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으로 잘 아실 겁니다. 술병을 들고 지붕에 올라 "세상이 뭐라 하던 나는 나, 장승업이오!"라고 외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죠.
조선말기 화단을 풍미했던 오원은 어린 시절 남의 집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했답니다. 어깨너머로 서화를 익힌 그는 마당에 그림을 끼적거렸다죠. 눈 밝은 주인이 재능을 알아보고 왕실 화원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살던 소실이 "흔한 장롱 하나 없다"고 투덜거리자 집을 나가 장롱 세 바리를 짊어지고 돌아왔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요.
일자무식인 오원이 경복궁 단청공사 책임자로 일하다 도화서 실관으로까지 오른 것은 뛰어난 그림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왜곡과 과장을 통한 해학적 미의 발현'으로 요약되는 그의 그림은 연습 없이 곧바로 비단과 종이에 그렸기 때문에 엉성한 구석도 있으나 생동감이 넘친다는 평가입니다. 당시 서화의 수요층이었던 상공인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동농 김가진이 '三人問年'(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이라고 제목붙인 작품을 보시죠. 한 노인이 "반고(盤古)와 어릴 적 친하게 지냈다"고 하고, 다른 노인이 "바다가 변해 뽕밭이 될 때마다 산가지 하나씩 두었는데 열 칸 집을 가득 채웠다"고 하고, 또 다른 노인이 "내가 먹고 버린 복숭아씨가 곤륜산만큼 쌓였다"고 했다니 오원의 해학성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산수면 산수, 화조면 화조, 뭐든지 능숙하게 그려낸 오원은 조선 왕조 마지막 화원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을 길렀지요. 심전의 제자인 심산 노수현은 서울대 동양화과를, 청전 이상범은 홍익대 동양화과를 각각 창설했으니 현대 한국화단의 뿌리가 오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장승업의 기개가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2)
■ 천재 자유인 '오원 장승업' 한자를 쓰지 못했다
드라마 같은 삶과 탁월한 작품 남겨..후대 위조자들 단골로 흉내
갸름한 얼굴에 누런 눈을 가진 사내는 술독에 빠져 살아 코끝이 불그스레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일자무식으로 이곳저곳 굴러다니다 서울로 흘러들어왔다. 어찌어찌해서 천재적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 화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술을 목숨만큼 좋아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으며, 때론 한 달이 되도록 깰 줄 몰랐다. 여자를 밝혀 분 냄새를 풍기는 예쁜 여자가 따라주는 술을 먹어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 40여 세가 돼서야 마누라를 얻었으나 하룻밤 자고 난 후 버리고 평생 다시 결혼하지 않은 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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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장승업의 '풍진삼협'. 2 민영환이 소장했던 장승업의 '기명절지 쌍폭'. 3 장승업의 '어옹도'. |
이는 그 사내가 죽은 지 10여 년도 안 된 1910년대 세상에 떠돌던 이야기다. 그는 바로 오원 장승업(1843~1897)이다. 그의 삶은 무척 드라마틱해 당시 세도가, 선비, 미술 애호가, 서화가가 모이는 조선서화미술회 사랑방에서 단골 화젯거리였다. "오원 장승업이 종적을 감춘 지 15년이 지났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혹시 그가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조선 사랑방의 단골 화젯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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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장승업의 가짜 '영모도 대련'. 5 장승업의 가짜 '유묘도'. 6 장승업의 매 화법 비교. 7 양기훈의 '야안도'. |
한 번은 오세창(1864~1953)이 장승업에게서 직접 그림 한 폭을 얻었는데, 그림 속 게의 집게다리가 2개가 아니고 3개였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 사람아, 다른 게 좀 있어야지. 같으면 볼 재미가 있나"라고 반문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그림은 "어떤 것은 그리다 말고 집어치운 것,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항아리 주둥이를 삼각형으로 만들어놓은 것 등 제멋대로였다. 말을 그리다 다리 하나를 잊고 안 그린 적도 있고 꽃을 그리다 그냥 일어서버려 꽃과 줄기만 주인을 기다리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좋은 예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장승업의 '풍진삼협'(그림1)을 들 수 있다. '그림1'은 장승업이 1891년 봄에 그린 것으로, 3명이 아닌 2명의 협객이 나온다. 당시 안중식(1861~1919)이 "협객 한 명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뒤에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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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장승업의 가짜 그림과 양기훈 그림의 장식적 태점 비교. 9 장승업이 그린 사내아이 얼굴 비교. |
장승업은 돈의 유혹에 이끌려 그림을 그리기보다 인정에 따라 그림을 그린 듯하다. 그림 그릴 때 준비된 물감 그릇이 없으면 방바닥에다 쓱쓱 물감을 풀고 채색할 때도 있었다. 장승업과 생전에 친분이 깊던 오세창의 기억에 따르면, 장승업이 그림에 인장을 찍은 후 인장을 챙기지 않아 잃어버려 오세창이 여러 번 새겨줬고, 그가 오세창의 집에 들를 때마다 주머니에서 물감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며 농담하고 웃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오세창은 1917년 편찬하고 28년에 간행한 '근역서화징'에서 장승업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장승업은 그림에 있어 못하는 게 없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매번 스스로 자랑하길 '멋진 운치가 살아 있다'고 하니 헛된 말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자는 모르나 대가의 좋은 진짜 작품을 많이 보고 기억력도 강해 여러 해가 지난 후 암기해서 그려도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어 가는 곳마다 술상을 차려놓았고, 그림을 구하면 언제나 옷을 벗고 책상다리로 앉아 청동기 항아리, 꺾인 꽃, 꺾인 나뭇가지를 그려줬다. 그 밖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그린 산수와 인물은 더 큰 보배로 여길 만하다."
술자리에서 장승업이 많이 그려준 그림은 '그림2'와 같은 청동기 항아리와 꺾인 꽃, 꺾인 나뭇가지를 그린 그림들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바처럼, '그림2' 등의 작품에서 미비하거나 제멋대로인 점이 발견된다고 해도 그의 그림엔 천재 화가의 탁월한 운치가 살아 있다. 1892년 그가 그린 '어옹도'(그림3)는 수준 높은 산수와 인물의 표현 능력을 보여준다. 장승업은 언제나 사람들의 거듭되는 그림 요구를 승낙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워 때맞춰 그리지를 못했다. 이게 빚처럼 가슴에 쌓이면 그는 말술을 마시고 빠르게 그려냈다.
모호한 것 좋아하는 사기꾼들
필자는 서울 한남동 리움이 주최한 2006년 '조선말기회화전'과 2011년 '조선화원대전'에서 장승업이 그렸다는 '영모도 대련'(그림4)을 봤다. '그림4'는 그림과 글씨를 모두 한 사람이 그리고 쓴 것으로, 글씨가 그림에 잘 어울린다. 이는 장승업이 한자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에 위배되는 가짜다. 동일한 위조자가 '그림4'처럼 그린 그림으로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장승업의 '유묘도'(그림5)와 일본의 고(故) 이리애가 소장한 '삼준도'가 있다.
'그림4'에 그려진 매와 리움이 소장한 장승업의 '웅시팔황도',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장승업의 '산수영모 10첩 병풍' 중 제7폭에 그려진 매는 그 화법이 전혀 다르다(그림6). 오히려 '그림4'를 제작한 위조자의 붓놀림은 양기훈(1843~?)의 '그림7'을 배웠고, 정학교(1832~1914)의 글씨를 배웠다. '그림4' 속 나무에서 보이는 장식적 태점은 국립순천대박물관이 소장한 양기훈의 '사군자화훼 10폭 병풍' 중 제1폭과 제7폭에 그려진 나무 및 바위 화법에서 나온 것이다(그림8). 참고로,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장승업의 '10첩 병풍'도 양기훈의 화법을 배운 후대 위조자가 만든 가짜다.
필자는 간송미술관이 2008년 5월 기획한 '오원화파' 전시장에서 장승업의 '춘남극노인' '추정구선' '송하녹선'을 봤다. 여기서 '춘남극노인'은 진짜고, '추정구선'과 '송하녹선'은 가짜다. 흥미로운 점은 '춘남극노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삼인문년', '그림3' 등을 보면 장승업이 중년 이후 사내아이의 얼굴을 거의 비슷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위조자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흉내만 냈다(그림9).
살다 보면 이것저것 미심쩍은 일이 있다. 위조자나 사기꾼은 분명한 것보다 모호한 것을 좋아한다.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소설 같은 삶으로 신화가 돼버린 장승업은 그들의 구미에 누구보다 잘 맞았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말술을 즐겼고 그로 인해 그림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엉터리로 그려진 그의 가짜 그림에 살길을 열어줬다. 필자의 바람은 독자 여러분이 그를 둘러싼 신화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장승업 그림의 감정 포인트는 서명이나 도장이 아닌 본능적이고 습관적인 묘사에 있다.(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30213193750633
(2) https://v.daum.net/v/20080520173805675
(3) https://v.daum.net/v/20130610154934303
<참고자료>
‘취화선’ 붓질에 만취한들 어떠리 (hani.co.kr) 2008.5.15
https://v.daum.net/v/20240711050007865
https://v.daum.net/v/2024081910311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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