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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고려 (16) 28대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1330년-1332년 복위1339년-1344년), 29대 충목왕(1344년~1348년), 30대 충정왕(1348년~1351년) [1270년~1352년 몽골간섭기] 본문

남국/고려

1. 고려 (16) 28대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1330년-1332년 복위1339년-1344년), 29대 충목왕(1344년~1348년), 30대 충정왕(1348년~1351년) [1270년~1352년 몽골간섭기]

대야발 2025. 9. 26. 16:54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일찍이 시중 행촌 이암(1297~1364년)이 상소하여 권신 무리가 국호를 폐하고 행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뿌리가 같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정신과 육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신시개천과 삼한관경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천수 태조께서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려의 건국이념인 다물 정신을 계승하여 세상을 평정하시어 국가의 명성을 크게 떨치셨습니다. 간혹 이웃에 강적이 생겨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幽州)와 영주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꾀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오잠과 류청신 같은 간악한 무리가 감히 멋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어찌 고려라는 국호를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를 어찌 낮출 수 있겠사옵니까?

이제 이러한 거론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언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옵니다.

杏村李侍中嵒, 嘗疏沮權臣輩, 欲廢國號而請立行省之議, 其疏略曰,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各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也. 況我國, 自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 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是乃神市開天, 三韓管境之爲大名邦於天下萬世者也. 我天授太祖, 以創業之資, 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平定宇內, 國聲大振也. 間有强隣, 乘以作暴, 幽營以東, 尙未歸我, 則此君臣, 日夜奮振, 謀所以自主富强之策. 敢有潛淸輩之大姦慝, 逞能陰謀, 我國雖小, 國號不可廢 也. 主勢雖弱, 位號何其降也. 今此之擧, 皆奸小之輩之出於逋逃, 而非國人之公言也. 宜請都堂, 嚴治其罪.

 

 

 

행촌 시중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 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을 지어 환·단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과 심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 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문정공 목은 이색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 거리와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 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 되리라.”

杏村侍中, 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紹述桓檀相傳之道學心法, 農桑輯要, 乃經世實務之學也. 文靖公李牧隱穡, 序之曰, 凡衣食之所由足, 貲財之所由豊, 種蒔孼息之所由周備者, 莫不分門類聚, 縷析燭照, 實理生之良書也.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환·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의 진결이었다.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고사에 박식한 행촌의 학문은 그 뛰어남이 칭찬 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의 계율을 닦는 법도는 삼신으로부터 받은 성품을 응결시켜 지혜를 이루고, 삼신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응결시켜 덕을 이루며, 삼신으로부터 받은 정기를 응결시켜 힘을 이루는 것이다.

우주에 삼신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인물에 삼진이 불멸하는 것은 마땅히 하늘아래 영원한 대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생성과 변화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도가 하늘에 있으면 삼신이 되고, 도가 사람에게 있으면 삼진이 된다. 그 근본을 말하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하나인 것이 도요, 둘이 아닌 것이 법이다.

위대하도다. 환웅천황이시여! 뭇 사람 중에 먼저 나와 천도의 근원을 체득하시고 대광명의 가르침을 세우시니, 신시개천의 의미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아졌도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도를 구하고 전(佺)에 참여하여 계(戒)를 받아 우리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나 아직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온갖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나니 늙어감이 한스럽도다!”

선생은 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 흥행촌에 들어가 스스로 호를 흥행촌수라 하고 마침내 행촌 삼서를 저술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다.

杏村先生嘗遊於天寶山, 夜宿太素庵, 有一居士曰素佺, 多藏奇古之書, 乃與李茗·范樟, 同得神書, 皆古桓檀傳授之眞訣也. 其通脫博古之學, 卓然有所可稱, 而其參佺修戒之法, 蓋凝性作慧, 凝命作德, 凝精作力, 其在宇宙而三神長存, 其在人物而三眞不滅者, 當與天下萬世之大精神, 混然同其體而生化無窮也.

先生曰, 道在天也, 是爲三神. 道在人也, 是爲三眞. 言其本則爲一而已. 惟一之爲道, 不二之爲法也. 大哉! 桓雄, 首出庶物, 得道天源, 立敎太白, 神市開天之義, 始大明於世矣. 今吾輩因文求道, 參佺受戒, 尊吾敎而未發, 又聞百途而難會, 老將及矣, 可恨哉! 先生以侍中致仕, 退居江都之紅杏村, 自號爲紅杏村叟, 遂著杏村三書藏于家.

 

 

헌효왕 복위 5년(단기 3677, 1344년) 3월에 행촌 이암이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으로 신을 수호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있고, 영재를 길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공이 서원을 세우는 데 있느니라.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 역시 신에게 의지하여야 백성과 국가가 길이 편안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정성은 결국 근본에 보은하는 정신으로 돌아감이니 인긴 세상에서 찾음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獻孝王後五年三月, 杏村李嵒, 以命祭天于塹城壇, 謂白文寶曰, 賴德護神, 一存信念, 養英衛國, 功在發願. 乃神依人, 人亦依神, 而民而國, 永得安康, 祭天之誠, 竟歸報本, 其求人世, 敢可忽諸.(1)

 

 

 

 

■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주색·재물에 빠진 왕, 왕조 몰락 재촉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5. 4. 25. 00:26

왕권으로 사익 추구한 28대 충혜왕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으니 내를 이뤄 바다에 이르도다.’(『용비어천가』 제2장)

 

옳은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뭄에 마를 리가 있겠나. 세종은 새 나라 조선이 그렇게 무궁하기를 바라면서 갓 만든 훈민정음으로 순우리말 노래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 불과 두 세대 전에 고려 왕조가 흔들리고 말라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 왕조의 멸망, 그것은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어쩌다 망했을까? 고려의 망국인(亡國因)은 직접적이고 가까운 근인(近因)부터 멀고 간접적인 원인(遠因)까지 다양할 것이나, 그 중간쯤에 충혜왕의 실정이 있다.

 

「 원 공주 출신 왕비 겁탈했다 압송무당에도 세금 물려 사금고 채워

공무 망각하고 극단적 사익 추구국왕 타락하자 간신들만 들끓어

결국 원에 잡혀가 유배길에 객사
공민왕 노력에도 민심 못 되돌려」

 

 

충혜왕이 안장된 영릉(永陵).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이다. 원 안에 흐트러진 석물이 보인다. 능의 정확한 위치는 실전돼 알 수 없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

 

 

고려에는 이른바 ‘충자(忠字)왕 시대’가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왕호에 충자가 붙은 시대이다. 그 전 태조·광종·성종 등이 고려 스스로 정한 묘호(廟號)인 데 비해 충렬왕·충선왕 등은 원에서 정해 보내온 시호(諡號)라는 점이 달랐다. 이름만 달라진 게 아니다. 고려 국왕은 대대로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는데, 전에는 먼저 즉위한 뒤 추인받는 형식적 절차였다면, 충자왕 시대에는 원에서 국왕을 결정해서 책봉했다. 더 심하게는 잘 있는 왕을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기도 했다. 책봉 철회가 곧 폐위의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자주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당시 사람들은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나라가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원 책봉 받아 왕 된 후 납득 어려운 행적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차지했을 때 국가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금·남송을 비롯해서 서쪽으로 탕구트, 카라 키타이, 호레즘, 아바스 왕조 등 번성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고려만은 국호와 왕실, 영토와 인민, 제도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남았고 그런 가운데서 원의 간섭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운영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국에 이르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서도 국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다만, 외세의 간섭이 강한 때일수록 유능한 국왕이 나왔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충렬왕은 원의 간섭을 줄였지만 국내 정치에서 실패했으며, 충선왕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멸하고 말았다. 충숙왕은 무능하고 정치에 무관심했으며, 충혜왕은 사욕이 앞서 패가망국(敗家亡國)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다음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어렸다. 이 가운데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행적을 보인 것이 충혜왕이다.

 

 

충혜왕 2년(1341)에 사경한 『불설아미타경』.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물로 그림을 그리고 은물로 글씨를 썼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

 

 

 

충혜왕은 두 번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충숙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었을 때 한 번, 그리고 충숙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또 한 번 즉위했다. 그러니 고려 국왕 계보가 ‘숙-혜-숙-혜’가 된다. 부자간에 왕위를 주고받은 것부터가 비정상이지만, 두 왕 사이가 좋지 않아서 왕이 바뀔 때마다 전 왕의 총신들을 숙청하는 피바람이 불었다. 게다가 이 싸움에 원의 권력자까지 개입해서 혼란을 더했다.

 

 

충혜왕의 첫 즉위는 원의 권신 엘테무르에 의한 것이었다.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엘테무르가 고려 국왕마저 자기 마음대로 교체했고, 당시 16세이던 충혜왕은 엉겁결에 왕이 되어 아버지와 대립했다. 하지만 대청도로 유배와 있던 황태자 토곤테무르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문 때문에 속절없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1차 재위의 전말이다. 충숙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당연히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엘테무르 사후 권력을 잡은 바얀의 반대에 부딪혔고, 또 따른 정변으로 바얀이 죽임을 당한 뒤에야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새 궁궐 짓고 궁녀 시켜 직물 생산도

 

고려의 문신 이조년(1269~1343)의 초상. 이조년은 충혜왕에게 직언을 마다치 않아 “담이 몸보다 크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

 

 

 

충혜왕은 이렇게 남의 나라 정쟁에 깊이 휘말렸다. 하지만 그의 실정이 반드시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주색을 좋아하고 놀이와 사냥에 탐닉했으며 황음무도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국왕 주변에는 ‘악소(惡少)’라고 불리는 무뢰배들이 득실거렸고 이런 자들이 호가호위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제지하지 못했다. 불량스럽기는 충혜왕도 만만치 않았다. 누가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남의 부인이라도 달려가 빼앗았다. 아버지 충숙왕의 왕비들까지 겁탈했으니 그 인면수심은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그 가운데 원 공주 출신 왕비를 겁탈했다가 고소당해 원에 압송되기까지 했다. 국왕의 체면이 대체 어찌 되었겠는가. 그럼에도 충혜왕은 영예(英銳)하다는 평을 들었다. 영민하고 예리하다는 뜻인데, 특히 재산을 늘리는 데서 재능을 발휘했다. 보흥고라는 사금고를 만들어놓고 국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재산을 모았다. 직세(職稅)를 신설해서 지방에 사는 관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무당들에게 무세(巫稅)를, 배 가진 사람들에게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국고로 들이지 않고 자신의 사금고를 채우는 데 썼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왕이 여느 권력자들처럼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마구 빼앗기까지 했다. 백성들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었겠나.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소란하고 동요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재산 증식을 위해 또 한 가지 한 일이 있었다. 바로 무역이었다. 왕과 교역하기 위해 위구르 상인들이 고려를 오갔고, 왕은 관리를 시켜 원에 가서 물건을 팔게 했다. 충혜왕이 주력 상품으로 생산한 것이 직문저포라는 직물이었다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는바(이강한, ‘어떤 제국과의 조우’)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궁궐에 생산 시설까지 갖추어놓았다. 새 궁궐을 짓고 그곳에서 궁녀들에게 직물 만드는 일을 시켰으며, 방아와 맷돌 같은 기구가 많이 있었다고 하니 영락없는 작업장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경영 수완을 그저 칭찬할 일이 아니다. 이 궁궐에 들어가 일하기를 거부한 여자 둘을 충혜왕이 쇠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잔혹하고 엽기적인 갑질 경영이었다. 무역의 이익은 당연히 충혜왕 개인의 몫이 되었다.

 

원에 아부하려 재산 모았다는 추측도

 

개경 경천사지 십층석탑. 충혜왕을 압송했던 고용보 시주로 만든 탑이다. 고용보는 고려인 출신 환관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다가 돌려받아 1960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

 

 

 

충혜왕은 왜 이렇게 재산을 모으려고 했을까? 나라 전체가 왕의 것인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병적인 물욕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사용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왕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원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려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일말의 동정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일국의 국왕으로서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국왕이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그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온 나라가 사욕의 용광로가 되었다. 국왕 주변에는 아첨하는 간신들이 들끓고, 관리들은 그런 국왕의 눈치만 보고, 백성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충혜왕의 말로는 더없이 비참했다. 원에서 개입해서 왕을 잡아갔다. 충혜왕의 무책임한 정치로 인해 고려에 대한 간섭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사신이 왕을 발로 차고 포박해서 대도(베이징)로 압송했고, 거기서 2만 리 떨어진 게양현(광둥성 지에양시)으로 유배했다. 충혜왕은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어 손수 옷 보따리를 들고 유배 길에 올랐고 도중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국왕이 원에 잡혀가고, 멀리 유배 가고, 객사하는 비극이 연속되었지만 고려에서 원에 대한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다시 살날을 보게 되었다며 기뻐 날뛰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실에 대한 민심 이반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고 있었다.

 

 

충혜왕의 그림자는 짙고 깊었다. 그 뒤로는 충혜왕이 사익을 추구한 탓에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공민왕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끝내 민심을 되돌리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렀으니 충혜왕의 실정이 망국인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마침 정도전이 충혜왕 때 태어났다. 그가 훗날 정치사상을 정리하면서 무엇보다도 국왕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고,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틀림없이 충혜왕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2)

 

 

 

<자료출처>

 

(1)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731~739쪽

 

(2)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주색·재물에 빠진 왕, 왕조 몰락 재촉해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