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려 (18) 32대 강릉왕(우왕)(1374년~1388년), 33대 창왕(1388년~1389년), 34대 공양왕(1389년~1392년) 1376년 최영 왜구 정벌, 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 설치, 직지심체요절 인쇄, 1388년 위화도 회군, 1389년 박위, 쓰시마섬 토벌, 1391년 과전법 제정, 1392년 고려 멸망. 본문
1. 고려 (18) 32대 강릉왕(우왕)(1374년~1388년), 33대 창왕(1388년~1389년), 34대 공양왕(1389년~1392년) 1376년 최영 왜구 정벌, 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 설치, 직지심체요절 인쇄, 1388년 위화도 회군, 1389년 박위, 쓰시마섬 토벌, 1391년 과전법 제정, 1392년 고려 멸망.
대야발 2025. 9. 26. 17:05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강릉왕(우왕) 원년(단기 3707년, 1374년)
강릉왕이 선제의 명으로 즉위(단기 3707, 1374년)하셨다. 이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써 붙이고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開元)에 속하던 땅이니 거기서 관할하던 군인,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여전히 요동에 속한다.”운운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의 병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셨다.
江陵王以先帝命卽位. 時, 遼東都司, 遣承差李思敬等, 到鴨綠江, 張榜曰,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元, 所管軍人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云云. 朝議紛紛不一, 竟以督戰決定, 大發中外兵馬, 以崔瑩爲八道都統使.
강릉왕 우(禑) 5년(단기 3712, 1379)
3월 신미에 사자를 보내어 첨성단에서 천제 드릴 것을 명하셨다.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이 서고문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초헌(初獻):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인간 세상의 번뇌와 시끄러움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제단 중앙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고 강림하시는 삼신님을 맞이하옵니다. 조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밝으신 삼신께서 계시는 듯하옵니다.
이헌(二獻):
삼신께서 미혹됨이 없이 들어 주시나니 이 사람을 감싸 안고 베풀어 주십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덮으시고 인간 세상을 굽어보십니다. 예를 극진히 하여 섬기나니 삼신께서 감응하시어 성신이 통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곰곰이 헤아려 보건대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옵니다. 성조 이래로 백성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옛 법통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우셨습니다. 고종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가 이를 계승하여 더욱 공경하옵나이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구(外寇)가 개같이 좀도둑질하여 우리 백성을 어란(魚爛)의 지경에 이르게 하시옵니까?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오히려 표문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그 고을이 침략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시옵니까? 어찌 밝은 위엄의 징험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실로 저의 부덕한 소치이니 진실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오직 자책할 뿐이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을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면 삼신께서도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고하오니 조촐한 저의 정성이지만 기꺼이 받으시고 밝게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시어 배를 타고 멀리서도 몰려들게 하소서. 하늘이시여! 천명을 내려 주시어 사직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江陵王, 禑五年三月辛未, 命遣使致祭于塹城壇, 大提學權近, 製誓告文以進, 其文曰, 初獻, 海上山高, 逈隔人寰之煩擾. 壇中天近, 可邀仙馭之降臨. 薄奠斯陳, 明神如在. 二獻, 神聽不惑, 庇貺斯人. 天覆無私, 照臨下土. 事之以禮, 感而遂通. 竊念, 摩利山, 檀君攸祀. 自聖祖爲民立極, 俾纘舊而垂休, 曁後王, 避狄遷都, 亦賴玆而保本. 故, 我家守之不墜, 而朕小子承之益虔. 天何外寇之狗偸, 而以致我民之魚爛, 雖遠疆之受侮, 尙許表聞, 況厥邑之被侵, 胡然忍視, 其明威之不驗, 寔否德之無良. 實難求他, 惟在自責. 然, 人若不安其業, 則神將無所於歸, 玆因舊典之遵, 敢告當時之患, 卑忱款款, 寶鑑明明, 致令海不揚波, 丕亨梯航之幅湊, 天其申命, 光膺社稷之安磐.(1)
■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지공거, 급제자들과 정치세력화…무신정권도 무너뜨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2024. 11. 8. 00:27
과거 시험관과 합격자의 특별한 관계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5급 공무원 선발 시험을 고등고시라고 했다. 그리고 이 이름이 잘못 번져서 사법시험은 사법고시라고 불렀다. 이밖에 다양한 국가고시가 있었는데, 공무원을 뽑을 때 시험을 치르는 전통은 958년(광종 9년) 과거제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을까? 지금이야 그동안 수고한 자기 자신에게 고맙다고 하는 게 세태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모와 스승에게 먼저 감사드렸다. 그런데, 고려는 또 달랐다. 고려의 과거 급제자들은 자기를 뽑아준 시험관을 가장 먼저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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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제·채점·선발 두 사람이 전담
급제 문생, 좌주로 깍듯이 모셔
이제현 세력, 정치 타락 막았지만
공민왕 때 “나라의 도둑” 몰려
조선 들어 좌주-문생 타도 대상
지공거 이름 없애고 시험관 늘려」

고려시대에 과거를 주관한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불렀다. ‘공거’는 과거의 다른 이름이고, ‘지(知)’는 주관한다는 뜻이므로 지공거란 시험의 출제부터 채점·선발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맡았으나 1083년(문종 37년)부터 두 사람이 정·부가 되어 각각 지공거, 동(同)지공거라고 했다. 고려의 과거는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시(詩), 부(賦) 등 한문 문장을 짓는 능력, 그리고 책문(策問)이라고 해서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평가하는 종합시험이었다.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없었으므로 시험의 공정성은 전적으로 시험관의 권위에 기대어 보장되었다. 따라서 지공거에게는 폭넓은 지식과 식견뿐 아니라 높은 도덕성까지 요구되었으며, 그랬던 만큼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한편, 과거 급제는 전적으로 지공거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급제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준 시험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좌주-문생, 부자 관계와 다름없어
과거 급제자들은 자기를 뽑아준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座主)라고 부르고, 좌주는 급제자들을 문생(門生)이라고 불렀다. 좌주와 문생은 서로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관계는 마치 부자 관계나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 함께 급제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년(同年)이라고 부르면서 형제처럼 생각했다. 좌주-문생과 동년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지공거를 역임하게 되면 앞의 문생들과 뒤의 문생들이 같은 좌주 아래서 선동년(先同年), 후동년(後同年)으로 묶였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좌주가 살아 있을 때 문생이 지공거가 되어 자기 문생을 선발하면 3대에 걸친 좌주-문생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을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을 본다(門生門下見門生)’고 해서 정점에 있는 좌주에게 대단한 영광을 돌렸다.

고려 사람들은 좌주-문생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문풍(文風, 학문을 중시하는 기풍)이라고 해서 숭상했다. 최자(崔滋)는 『보한집』에서 “양숙공 임유는 네 번 과거를 주관했다. 문정공(조충), 문안공(유승단), 문순공(이규보), 한·진 추밀(한광연과 진식), 사성 유충기, 아경(亞卿) 윤우일은 모두 동년이다. 또 문생 중에 평장 김창, 추밀 이중민, 최복야·승선 형제(최종재·종번), 왕칭·김규·갈남성 등 3경(卿)이 있는데 역시 뛰어난 선비이다”라고 해서 네 번이나 과거를 주관한 임유(任濡)의 문생들이 번성한 것을 칭송했다.
좌주-문생 관계는 인간적인 친밀함으로 그치지 않았다. 1208년(희종 8년) 과거에서 금의(琴儀)가 지공거가 되었는데, 그때 급제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관직을 얻는 특혜를 누렸다. 금의가 당시 권력자 최충헌과 가까웠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렇게 좌주는 문생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평생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지방에서 갓 올라와 가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향리 집안 급제자에게는 좌주가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고려시대에 급제자들이 직접 자기를 가르친 스승보다 자기를 뽑아준 좌주를 먼저 찾은 것이 이런 점에서 이해가 된다.
좌주와 문생, 동년의 끈끈한 유대는 때로 정치적 관계로 발전했다.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이 득세하고 문신들이 위축되었던 시절, 좌주-문생 관계는 문신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이었다. 과거 급제자들은 이 관계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좌주-문생 관계의 번성함을 얘기할 때는 언제나 무신 집권기의 사례가 회자된다. 몽골과 오랜 전쟁으로 피해가 커지면서 문신들 사이에서 강화론(講和論)이 제기되었는데, 권력을 쥐고 있는 무신정권의 항전론을 거역하며 강화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임유와 금의의 문생이었다. 결국 금의의 문생인 최린의 문생 유경(柳璥)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지한 좌주-문생 관계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정치세력으로 발전한 사례이다.
신흥사대부 성장에 기여

고려 후기 들어 좌주-문생 관계가 또 한 번 위력을 발휘했다. 그때 원에서 성리학이 들어오고, 고려의 과거제도가 바뀌어 성리학이 시험과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적은데 과거시험 과목이 되었으니 지공거를 맡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현(李齊賢)이 주목을 받았다. 이제현은 충선왕의 배려로 젊을 때 원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왔고, 1320년(충숙왕 7년) 불과 34세의 나이로 동지공거가 되었다. 당시 과거 급제 연령이 20대 중반 정도였으므로 이제현은 불과 10년 안팎 연하의 문생들을 거느리게 된 셈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그의 문생들이 지공거를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써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을 보는 단계에 도달했고, 급제한 문신 대다수는 이제현과 좌주-문생 관계로 엮였다. 이제현을 정점으로 하는 좌주-문생 집단은 성리학의 도덕률을 내세워 고려의 정치가 타락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고, 신흥사대부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좌주-문생 관계가 비난받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과거 출신 문신들에 대해 “문생이니 좌주니 동년이니 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린다”라며 비난했다.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에게 과거급제자들은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조직을 만들고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비쳤던 것이다. 개혁의 선봉에 섰던 신돈은 이렇게 호응했다. “유자(儒者)들은 좌주니 문생이니 하면서 서로서로 청탁합니다. 이제현 같은 경우는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을 보아 마침내 온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 되었으니, 과거의 해로움이 이와 같습니다.”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심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엘리트 사조직이 비대해져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할 때 나올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공민왕 시해 후 좌주-문생 부활

공민왕은 과거제도를 고쳐 좌주-문생 관계가 더 이상 생기지 못하도록 했다. 친시(親試)라고 해서,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채점까지 끝내고 33명을 선발하면 왕이 직접 시험을 쳐서 석차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급제자가 지공거의 문생이 아니라 국왕의 문생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킴으로써 사적인 좌주-문생 관계를 국왕과의 공적 관계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친시는 단 3회 실시되었을 뿐이고, 원래 제도로 돌아가면서 좌주-문생 관계도 부활했다. 윤소종(尹紹宗)은 이색의 문생이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개혁파가 권력을 잡고 반대파를 공격할 때 윤소종은 맨 앞에서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그런 그가 동료들이 이색을 공격하자 돌연 침묵을 지켰다. 이색이 자신의 좌주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정치 공세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조선이 개창된 뒤 과거는 훨씬 더 중시되고 더 자주 시행되었지만, 좌주-문생 관계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33명을 선발하는 복시와 석차를 매기는 전시의 시험관을 따로 두고, 인원도 많게는 7명까지 늘려 시험관이 더는 ‘대단한’ 자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지공거라는 이름도 없앴다. 공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관리들이 사조직을 결성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조직에 들어 있는 사람은 모른다.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빼앗고 있는지를.(2)
<자료출처>
(1)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743~745, 751쪽
(2)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지공거, 급제자들과 정치세력화…무신정권도 무너뜨려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