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9) 22대 안장제(안장왕, 519년-531년) 523년 08월 백제를 침, 529년 10월 오곡에서 백제에 승리함. 본문
1. 고구려(19) 22대 안장제(안장왕, 519년-531년) 523년 08월 백제를 침, 529년 10월 오곡에서 백제에 승리함.
대야발 2025. 11. 23. 18:05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안장왕(安藏王)
안장왕이 즉위하다 ( 519년 )
안장왕(安臧王)은 이름이 흥안(興安)이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 재위 7년에 〔그를〕세워 태자로 삼았고, 28년에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20년 01월 )
2년(520)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게 책봉호를 받고, 양이 보낸 사신이 북위에 붙잡히다 ( 520년 02월 )
2월에 양(梁) 고조(高祖)가 왕을 봉하여 영동장군(寧東將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사자(使者) 강주성(江注盛)을 〔고구려로〕 보내 왕에게 의관, 칼, 패물을 주었는데, 북위의 병사가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그를 사로잡고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북위가 안장왕을 책봉하다 ( 520년 )
〔2년(520)〕 〔북〕위[魏]가 왕을 봉하여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으로 삼았다.
양에 조공하다 ( 520년 09월 )
〔2년(520)〕 가을 9월에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다 ( 521년 04월 )
3년(521) 여름 4월에 왕이 졸본으로 행차하여 시조의 사당[始祖廟]에 제사지냈다.
빈핍한 자들에게 곡식을 내려주다 ( 521년 05월 )
〔3년(521)〕 5월에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지나간 주읍(州邑)의 빈핍(貧乏)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세 곡(斛)을 내려주었다
가뭄이 들다 ( 523년 )
5년(523) 봄에 가뭄이 들었다
백제를 치다 ( 523년 08월 )
〔5년(523)〕 가을 8월에 병사를 보내 백제를 쳤다.
기근이 들어 백성을 구휼하다 ( 523년 10월 )
〔5년(523)〕 겨울 10월에 기근이 들어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해 조알하다 ( 523년 11월 )
〔5년(523)〕 11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조알하고,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26년 03월 )
8년(526)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27년 11월 )
9년(527)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왕이 사냥을 하다 ( 529년 03월 )
11년(529) 봄 3월에 왕이 황성(黃城)의 동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오곡에서 백제에 승리하다 ( 529년 10월 )
〔11년(529)〕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와 오곡(五谷)에서 싸워 이겨,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안장왕이 사망하다 ( 531년 05월 )
13년(531) 여름 5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이름을 안장왕이라 하였다이때는 양(梁) 중대통(中大通) 3년, 〔북〕위[魏]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梁書)』에는 “안장왕이 재위 여덟 번째 해인 보통(普通) 7년(526)에 죽었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1)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이명의 《진역유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조의선인으로 뽑혀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받아들여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애에 이름난 조의가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3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함께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먼저 가신 선령님은 우리 삶의 법이시고
뒤에 오는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 받드네
선령님을 본받음은 그 정신이 불생불멸
후손들 선령 위함 귀천이 어디있다
사람은 천지 중심 대천지와 하나이니
마음은 몸과 함께 온 우주의 근본일세
사람이 태일 됨에 차고 비나 같은 경계
우주의 근본이라 신과 만물 둘 아니네
참될 진은 온갖 선의 극치에 이름일세
삼신님은 일심중도 만사만물 주장하네
참과 선의 극치에서 세 가지 참 귀일하고
삼신님이 일심에서 삼신일체 창조할새
하늘 아래 온 땅에서 오직 내가 있음이여
옛 땅 옛 혼 다물하니 나라를 부흥하네
스스로 생존함에 함이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부흥함에 말이 없이 가르치네
참 목숨이 크게 생함 성통광명 이유라네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라
광명하여 모든 선을 다 받들어 행하옵고
효도 충성 다함으로 일체 악행 짓지 말라
만백성의 정의로움 나라 위한 중한 마음
나라가 없다면 내가 어찌 살아가리
백성에게 만물 있어 우리나라 복이 되고
이 나라에 혼이 있어 우리 백성 덕이 되네
우리 혼은 삼혼이니 생함과 깨달음과
신령함이 예 있구나 삶과 지혜 닦아 보세
조화신이 머무르는 천궁이여 이내 몸이여
몸과 영혼 함께 닦아 영원불멸 얻으리라
우리들 자자손손 나라 잘 다스리고
대광명의 신교 배움 영원한 스승일세
우리 자손 통일되면 모두 잘 살리니
우리 스승 가르침은 새롭고도 새로워라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거주하며 오직 하늘에 천제 올리고 수련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대개 신선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율을 삼고 그 이름을 더욱 굳세게 지켜 서로 영광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만물을 살리고 몸을 던져 정의로움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었으니, 천추만세에 추앙을 받아 능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인존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 대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한 명승이다.(2)
■ 안장왕의 연애전과 백제의 패퇴
『이상은 《해상잡록》에 기록된 것이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의 개백현 항목에 딸린 주석에서는 "왕봉현은 개백이라고도 한다. 한씨라는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땅이다"라고 했고, 달을성현 항목에 딸린 주석에서는 "한씨라는 미녀가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 때문에 나중에 고봉이라고 명명했다"고 했다. 이런 점을 보면 한씨가 《해상잡록》의 한씨임을 알 수 있다. 미녀 한씨는 한주를 가리키고, 달을성은 지금의 고양을 가리킨다. 달을성은 개백현을 점령한 을밀이 대왕과 한주를 만나도록 해준 곳이다.
개백은 '가맛'으로 읽는다. '가'는 고구려에서 와이나 귀인을 지칭하는 명사였고, '맛'은 만나본다는 뜻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옥기현은 개차정이라고도 한다"고 한 점을 보면, 개에 왕이란 뜻이 있었다는 게 한층 더 명확해진다. 백의 뜻은 '맏'이므로, 여기서 '맛'이란 음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개백을 이두로 적으면 '가맛'이 되고, 가맛을 한자로 적으면 왕봉이 되는 것이다. 가맛은 한주가 안장왕을 만난 뒤에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역사가들은 본래의 지명도 모르고 이두의 독법도 몰랐기 때문에 개백을 안장왕 이전의 명칭으로 이해했다.
한편, 〈백제본기〉에서는 성왕 7년(안장왕 11년)에 고구려가 북부 변경인 혈성을 빼앗았다고 했다. 혈성은 통로의 입구 즉 지금의 강화를 가리킨다. 을밀이 행주를 함락할 때 이곳을 함께 점령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단심가는 예로부터 포은 정몽주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위의 기록을 보면 그보다 더 옛날 사람인 한주의 작품을 정몽주가 불러 조선 태종의 노래에 답한 것이지, 포은이 처음 지은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3)
<자료출처>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19~623쪽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341~344쪽(《조선상고사》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군의 쟁탈 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2. 안장왕의 연애전과 백제의 패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