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8) 21대 문자호태열제(문자제, 문자왕, 491년-519년) 연호; 명치, 494년 02월 부여가 투항함, 494년 07월 신라군을 격파하였으나 백제의 지원으로 물러남, 497년 08월 신라의 우산성을 빼앗음, 503년 11월 백제가 수곡성을 침공함, 504년 04월 예실불이 북위에 사신으로 감, 507년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다가 물러남, 512년 09월 백제의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킴. 본문
1. 고구려(18) 21대 문자호태열제(문자제, 문자왕, 491년-519년) 연호; 명치, 494년 02월 부여가 투항함, 494년 07월 신라군을 격파하였으나 백제의 지원으로 물러남, 497년 08월 신라의 우산성을 빼앗음, 503년 11월 백제가 수곡성을 침공함, 504년 04월 예실불이 북위에 사신으로 감, 507년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다가 물러남, 512년 09월 백제의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킴.
대야발 2025. 11. 23. 18:05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문자왕(文咨王)
문자명왕이 즉위하다 ( 492년 )
문자명왕(文咨明王)은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이름이 나운(羅運)이고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인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어 장수왕이 〔그를〕 궁중에서 길러 대손(大孫)을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 즉위하였다
북위가 문자명왕을 책봉하다 ( 492년 03월 )
원년(492) 봄 3월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벼슬을 주어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郎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으로 삼고, 의관(衣冠)·복물(服物)·수레 깃발의 장식 등을 주었다. 또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세자를 보내 입조하게 하라.”라고 하였으나, 왕은 〔세자가〕 병이 있다고 하여 사절하고, 종숙(從叔, 堂叔)인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북위의〕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2년 06월 )
〔원년(492)〕여름 6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2년 08월 )
〔원년(492)〕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2년 10월 )
〔원년(492)〕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지진이 일어나다 ( 493년 10월 )
2년(493)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4년 01월 )
3년(494)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부여가 투항하다 ( 494년 02월 )
〔3년(494)〕2월에 부여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신라군을 격파하였으나 백제의 지원으로 물러나다 ( 494년 07월 )
〔3년(494)〕 가을 7월에 우리 군대가 신라인과 살수(薩水)의 들판에서 싸웠는데, 신라인은 패하자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지켰다. 우리 군대가 이를 포위하니 백제가 병력 3,000명을 보내 신라를 지원하여 우리 군대가 물러났다.
남제가 문자명왕을 책립하다 ( 494년 )
〔3년(494) 가을 7월에〕 남제(南齊)의 황제가 왕을 책립하여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4년 )
〔3년(494)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기상이변이 일어나다 ( 494년 10월 )
〔3년(494)〕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5년 02월 )
4년(495)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다 ( 495년 02월 )
〔4년(495) 2월에〕크게 가물었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5년 05월 )
〔4년(495)〕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남쪽을 순수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 495년 07월 )
〔4년(495)〕 가을 7월에 남쪽으로 순수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다가 돌아오다 ( 495년 08월 )
〔4년(495)〕 8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니,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게 함으로, 우리 군대가 물러나 돌아왔다.
남제가 왕의 책봉호를 올리다 ( 496년 )
5년(496)에 남제(南齊)의 황제가 왕의 〔책봉호를〕 올려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사신을 보내 남제(南齊)에 가서 조공하였다.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다가 패배하다 ( 496년 07월 )
〔5년(496)〕 가을 7월에 군대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군대가 이하(泥河) 가로 나와 공격하여 아군이 패배하였다.
신라의 우산성을 빼앗다 ( 497년 08월 )
6년(497) 가을 8월에 군대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왕자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 498년 01월 )
7년(498) 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금강사를 창건하다 ( 498년 07월 )
〔7년(498)〕 가을 7월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498년 08월 )
〔7년(498)〕8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의 백성이 투항해오다 ( 499년 )
8년(499)에 백제의 백성이 굶주려 2,000명이 투항해 왔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0년 08월 )
9년(500)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1년 01월 )
10년(501)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1년 12월 )
〔10년(501)〕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누리의 피해가 일어나다 ( 502년 08월 )
11년(502) 가을 8월에 누리[蝗蟲] 피해가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이 죽다 ( 502년 10월 )
〔11년(502)〕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양 고조가 문자명왕의 책봉호를 올리다 ( 502년 04월 )
〔11년(502) 겨울 10월에〕 양(梁)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름 4월에 왕의 〔책봉호를〕 올려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삼았다.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다 ( 502년 11월 )
〔11년(502)〕겨울 11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2년 12월 )
〔11년(502)〕1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가 수곡성을 침공하다 ( 503년 11월 )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병력 5,000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을 침공해왔다.
예실불이 북위에 사신으로 가 황제를 알현하다 ( 504년 04월 )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北魏)에 가서 조공하니,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에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국은 정성껏 대국[天極]과 관계를 맺어 여러 대에 걸쳐 지극한 정성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조공하는데 허물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珂玉)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 두 물품이 제왕의 부고(府庫)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지위[上將]에 있으면서 해외(海外)의 일을 오로지 하여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다. 작은 술병[瓶]이 비는 것은 큰 술독[罍]의 수치인데, 〔이는〕누구의 허물인가? 지난 공물의 잘못은 연솔(連率)의 책임이니, 경은 마땅히 경의 임금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여와 섭라〕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수복하도록 하여,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용산에서 사냥하다 ( 506년 08월 )
15년(506) 가을 8월에 왕이 용산(龍山) 남쪽에서 사냥을 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6년 09월 )
〔15년(506)〕9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를 정벌했다가 눈이 많이 내려 돌아오다 ( 506년 11월 )
〔15년(506)〕 겨울 11월에 장수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눈이 많이 내려 병졸들이 얼고 손발이 터져서 돌아왔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7년 10월 )
16년(507)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다가 물러나다 ( 507년 )
〔16년(507)〕 왕이 장군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靺鞨)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 아래까지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는데, 백제가 군대를 출진시켜 역습하여 싸움에 나서므로 비로소 물러났다.
양 고조가 문자명왕의 책봉호를 올리다 ( 508년 )
17년(508)에 양(梁)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某)는 정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秩命]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儀典)을 넓혀 무군(撫軍) 동(東)이라고도 한다.대장군(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8년 05월 )
〔17년(508)〕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8년 12월 )
〔17년(508)〕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09년 05월 )
〔18년(509)〕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0년 06월 )
19년(510) 여름 윤6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0년 11월 )
〔19년(510)〕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2년 03월 )
21년(512)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2년 05월 )
〔21년(512)〕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의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키다 ( 512년 09월 )
〔21년(512)〕 가을 9월에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3년 01월 )
22년(513)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3년 05월 )
22년(513)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3년 12월 )
22년(513)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4년 11월 )
23년(514)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5년 10월 )
24년(515) 겨울 19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6년 04월 )
25년(516)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7년 04월 )
26년(517)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8년 02월 )
27년(518)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폭풍으로 왕궁의 남문이 무너지다 ( 518년 03월 )
〔27년(518)〕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히고 왕궁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8년 04월 )
〔27년(518)〕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18년 05월 )
〔27년(518)〕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문자명왕이 사망하다 ( 519년 )
28년(519)에 왕이 세상을 떠나 이름을 문자명왕이라 하였다. 〔북〕위[魏]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추증하여 책립하였다. 이때 〔북〕위의 숙종(肅宗)이 나이가 10세이어서 태후가 조정에 임하여 천자의 명을 대행하였다(1)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문자호태열제는 연호를 명치로 고치셨다. 11년에 제 · 노 · 오 · 월의 땅이 우리에게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2)
이에 앞서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명치 11년(50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 · 회계 · 오성 · 좌월 · 산월 · 천주라 하였다.
명치 12년(502년) 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 진평 등의 군을 쳣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3)
■ 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위축
『백제 동성대왕이 반역자 백가에게 암살되자, 유능하고 용맹한 사촌형제인 무령왕이 백가의 난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무령왕은 고구려의 방비 소홀을 틈타 달솔인 부여우영에게 정에병 5천 명을 주고 고구려 수곡성(지금의 신계군)을 기습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장령(지금의 서흥군)과 철령을 차지하고 성책을 세워 예족을 막았다. 이로써 백제의 서북 경계가 지금의 대동강까지 미치게 됐다. 근구수대왕 시대의 형세가 회복된 것이다.
서기 505년에 고구려 문자왕은 치욕을 씻고자 대군을 동원해서 가불성(위치 미상)을 침입했다. 이에 맞서 무령왕은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고구려인들은 백제군이 소수인 것을 보고 방비를 소홀히 했다. 이것을 이용해서 왕은 계책을 써 고구려군을 급습하고 대파했다. 이후 10여 년간 고구려는 남쪽을 침범하지 못했다.
무령왕은 이 틈을 타 도성과 지방의 유랑자들을 농토로 유인했다. 이들에게 농사를 시키고 제방을 수축하고 수전을 짓도록 하자, 국고가 더욱 더 충실해졌다. 서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인도 · 대식국 등과 통상하니 문화적으로도 꽤 발달했다.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23년간은 백제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만하다.』(4)
<주>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77쪽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03쪽
(4)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339~340쪽(《조선상고사》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1장 신라의 발흥 1. 진흥대왕의 화랑 설치 2. 6가라의 멸망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군의 쟁탈 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1. 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위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