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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10)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1. 가야(10)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대야발 2025. 12. 16. 16:09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문화일보 입력 2020-07-15 10:49 수정 2020-07-15 10:51

 

 

가라 기병을 조각한 기마인물형 각배 가라토기(김해 고분 출토, 국보 275호, 경주 박물관 소장, 자료: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조선 해체 뒤 민족 대이동 … 기병대장 출신 수로, 김해에 도착 뒤 이진아시왕에 복속 않고 금관가라 건립
백제·신라엔 없는 철장검, 6가라 全지역 출토… 기마부대 야영용 구리솥도 부여족이 세운 국가임을 증명


 
 

고조선 연방제국이 해체되고 뒤이어 위만조선이 BC 108년 멸망하는 대폭발적 거대충격이 가해지자, 고조선 지배층 유민들은 이웃 후국들로 피란하거나 새 국가를 세우고자 해 민족대이동의 제1차 파동이 일어났고, 우선 한국 역사에도 ‘다국시대’가 시작됐다.

 

고조선 유민의 일단은 남하해 멀리 진한, 지금의 경주 지역에 6개 마을을 형성해서 정착했다가 고조선 왕족 청년이 말을 타고 찾아오자 그를 박혁거세 왕으로 추대해 고조선을 계승해서 BC 57년 신라(사로국)를 건국했다.

 

고조선 왕족의 한 가문은 북부여에 피란했다가 환영받지 못하자 주몽 집단이 말을 타고 압록강 중류 구려에 내려와서 BC 37년(일설 BC 277년)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왕위 계승에서 밀린 온조 세력은 한강 부근으로 남하해 BC 1세기 중엽 백제를 건국했다.

 

AD 1세기에는 제주도에도 부여·고구려·양맥족 일부가 남하해 선주민 촌장들과 결합해서 탐라국을 건국했다.

 

변한 지역의 6가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가라 출토유물들에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없는 북방 ‘부여(扶餘)’의 선진 철기문화, 기마문화 유물과 동일한 것이 한반도 낙동강·섬진강 사이에서 많이 출토돼 있다. 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선진적 철기문화와 기마문화 유물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나오려면 성장 과정의 미숙한 초기 철기들과 초기 기마문화 출토유물이 반드시 이 지역에서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온 경우에 우리는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사회사연구회에서 단군 실재 발표 때 이 해석을 구두로 발표했으나(‘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제47집, 1995), 단군 실재 논쟁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를 글로 정리해 독자들의 새 패러다임 전환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대가야의 금동관(3C) (자료: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문헌에는 2가지 설화가 남아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이정(李貞)으로부터 채록한 건국 설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政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 금관국(金官國)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이다”라고 수록돼 있다.

 

고령군은 변한 시대에 ‘미오야마나(국)(彌烏邪馬國)’이었다. 가야산 산신으로 표현된 미오야마국(고령) 모주(母主) 여성 족장이 천신(天神, 고조선·부여 왕족 상징)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라국 시조 ‘이진아시’왕(별칭 ‘붉은 해(朱日)’)과 금관국의 ‘수로’왕(별칭 푸른 후예(靑裔))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붉은 해’의 ‘해’(의역 朱日, 음역 解)는 부여 왕족의 성씨라는 사실이다. 부여 왕족 ‘해’ 씨 ‘이진아시’왕이 ‘대가라’(고령가라·임나)를 건국한 것이다. 한편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했는데 모두 천신의 아들이지만 ‘푸름의 후예(靑裔)’라 했다. 부여 왕실 ‘해’ 씨는 ‘태양’과 ‘새’ ‘사슴’을 토템으로 했다.

 

한편 고조선연방의 유목민들, 산융·실위·정령… 등은 ‘태양’과 함께 ‘푸른 이리’를 토템으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조선·부여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대가라의 이진아시왕이 부여왕족이고, 금관가라의 수로왕은 유목민의 자손 기마부대장이었음을 대학자 최치원이 시사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는 후에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라는 관직자가 고려 문종(1075∼1084) 때 기록했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이것은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설화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18년) 3월에 구지봉에 함성이 들려 9간(9개 마을 촌장)이 모여 가 봤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했는데, 맨 처음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처음 나타났다는 뜻)로 해 대가락(大駕洛)의 왕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각기 돌아가서 5가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구지봉 봉우리’의 ‘함성’을 통해 수로 등이 ‘육로’로 집단 이동해 왔으며, ‘붉은 줄’ ‘붉은 보자기’ ‘황금알’로 동일한 고조선·부여족을 상징하고, ‘가라’의 한자를 ‘駕洛’으로 써서, ‘말’(馬)위에 ‘가’(加)를 얹은 글자를 택해 부여의 ‘가’(장군, 대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으며, 6개 편대의 기마부대에 선봉대장은 ‘수로’였고, ‘대가라’를 건국했으며, 나머지 5개 기마부대장도 각각 주둔지에 돌아가서 각각의 가라를 건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은 기마부대의 정복이었지만 전투 없이 지방 촌장들이 합의해 수용·봉대한 무혈 정복 융합이었음이 잘 시사돼 있다.



유수노하심 부여 동복(제1형)

 

 

 

고문헌에서 ‘가라’ 관련 지명을 찾아 연결해 보면,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육로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남해안 김해 지역까지 ‘가라’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서기 42년 부여 기마족의 한 갈래가 기병부대를 나눠 황해도 수안 부근 멸악산맥 등성이를 거쳐서 충청도 죽령과 조령을 넘어 낙동강 상류에 도착했다고 본다. 왕족은 낙동강 상류에서 가장 농경과 기마 활동에 적합한 지금의 가야산 밑 고령(高靈)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한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는 남해안 끝 김해(金海)까지 도착했다고 본다.

 

이 두 개 건국설화를 종합해 보면, 처음 6개 기병부대가 하나의 통일 ‘가라국’을 건국하지 못하고, ‘6가라’를 각각 건국하게 된 요인을 알 수 있다. 고령 ‘대가라’ 이진아시왕은 부여 왕족이므로 신분상 전체 6개 부대 정복지의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족일 뿐 전투 실력은 부족했다. 반면 ‘수로’는 신분은 ‘가’이지만 가장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 대장이고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는 ‘해’ 씨가 아니라 청예(靑裔·유목민의 후예)였으므로 최강의 무력에 기초해서 독립 금관국을 건국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6가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기록했다. ‘임나’와 ‘가라’를 분절시키면, 그 뜻은 ‘임나’는 ‘임금의 나라’이고, ‘가라’는 ‘가(장군·대장)의 나라’의 뜻이 된다.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신분은 부여 유목민 후예 ‘가’였으나 그의 역량은 가장 탁월했다. 그는 선봉부대로 서기 42년 김해 지방에 도착하자 고령의 이진아시왕에게 복속하지 않고 금관국을 건국했다. 부여족 기마군단이 남하해 6가라를 건국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 고고유물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된 철장검들은 부여 유적인 만주 요령성 서차구 유적과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BC 1세기∼AD 1세기)에서 다수 출토된 철장검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철장검은 황해도 이남 한반도(백제·신라 지역)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고, 탐라국(제주도) 용담동 유적(AD 1세기)에서만 2자루 출토돼 있다.

 

(2)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무덤을 비롯해 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제 말 자갈, 말 멈추개 등 철제 마구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출토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형이다.

 

(3)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의 철제 투구와 갑옷, 합천 옥전 M3호 무덤의 금동장식 투구, 부산 복천동 10호 무덤의 철제 단갑 등 가야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2기(中기)층 56호, 67호, 97호 무덤 출토의 각종 갑옷과 투구, 길림성 대안현 어장토광묘 207호 출토 갑옷(편)과 동일한 유형으로 계승·발전한 것이다.

 

(4)가라 유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 출토 동복(銅·구리솥)은 부여 유적인 길림성 동단산 유적과 요령성 서차구 유적 및 길림성 유수노하심 2기층 출토 동복 2점 가운데 제2형 동복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여 기마부대에서는 동복을 야영용 필수장비로 사용했다. 대성동 출토 가라 동복은 흉노의 동복이 아니라 부여 기병부대의 동복이라고 본다.

 

(5)가라 토기는 ‘경질’ 토기의 굳기와 높은 그릇받침대의 구멍(물, 바람구멍)과 다양한 도안으로 큰 특징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는 섭씨 800도 이하로 구운 농경사회의 토기다. 필자는 가야에서 1200도 이상 고열로 ‘경질토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철기문화가 철 생산 고열기술을 토기에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97호 무덤 출토 제1형 동복(銅)을 다시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동복은 본 동복(높이 25㎝, 구경 14㎝)에, 높이 4.2㎝의 받침대(器臺)가 붙어 있고, 받침대에는 가라 경질토기처럼 전후좌우에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토기를 얇게 만들어 1200도의 고온으로 매우 단단하게 소성할 때 불길이 고르게 들어가 구워내도록 새 기술이 도입된 것이고, 그 기원이 부여의 동복 제조 기술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6가라는 북방에서 AD 42년에 부여족의 기마군단이 새 정착지를 찾아서 육로로 남하해 변한 12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해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여 기마족의 정치적 지휘자인 부여 왕족은, 막강한 선봉 기마부대(김수로)가 앞길을 남해안 김해까지 안전하게 개척하자, ‘고령’에 도착해 여기에 정착했다. 고령에 부여 왕족은 ‘임나(任那)’를 건국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5개 기병부대장을 다 통솔하지 못했다. 선봉부대장 ‘수로’는 신분은 부여왕족이 아니라 가(加·아마 狗加인 듯)였지만, 능력은 가장 탁월했으므로, 역시 AD 42년에 정착지 김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세웠다. 나머지 4개 기병부대장도 각기 군립했다. 그 결과 1개 임나(任那·임금 신분의 나라)와 5개 가라(加羅·가 신분의 나라)가 수립됐다. 부여의 선진 철기 문화·기마 문화와 변한의 선진 농경 문화의 융합에 기초한 6가라 연맹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AD 4세기 말까지에는 가장 강성한 금관가라가 6가라 연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백제 아신왕이 399년 신라를 정복·병합하려고 백제·금관가라·왜의 3개국 동맹 연합군을 편성할 때 이에 참가한 것이 금관가라 실패의 변곡점이 됐다. 백제·금관가라·왜군이 연합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점령한 즈음에, 위기의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로의 신속(臣屬)을 결정하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명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부대 대군이 AD 400년 경주로 직행 남하해 백제·왜 연합군을 참패시키고 김해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때 백제군 4만 명 가운데 전사자는 셀 수도 없고, 포로가 된 백제군만도 8000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금관가라군과 바다를 건너온 왜군도 대패했다. 이에 1세기 이후 300여 년간 크게 번영했던 금관가라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신라 연합공격에 불참했던 대가라(임나)가 5세기 초부터 6가라의 맹주가 된 후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래의 가라 건국사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용어설명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 과정
금관국 건국은 6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그는

①건국(서기 42년) 이듬해 ‘수도’를 김해에 정하고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궁궐’을 44년 2월에 완공했다.

②이해(44년) 탈해(脫解)가 지휘하는 군사들이 바닷길로 쳐들어오자 막강한 기병과 500척을 이끈 수군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그들을 쫓아 보냈다.

③수로왕은 서기 48년 중국 상선 편으로 회계(會稽)에 망명한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16세)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정식 왕비로 삼고 왕족 신분을 갖췄다. 수로의 부여 신분은 왕족이 아니라 그 아래의 ‘가(加)’였다. 이제는 아유타국왕의 공주와 결혼했으니, 부여의 제도로도 ‘고추가’가 되고, ‘왕족’이 된 것이다.

④수로왕은 대대적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농경과 제철수공업, 국제무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김수로왕의 금관국은 AD 1세기 중엽 고대국가 구성요를 다 갖춘 부강한 고대왕국을 건국했다.(1)

 

 

 

 

동해안 따라 부여인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기자명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입력 2020.09.22 09:05수정 2020.09.22 09:06호수 2626

 

 

 

 

10여 년 전의 일이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반도 역사 얘기가 대화의 주제가 됐었다. 민요에도 조예가 깊은 전통춤꾼 김경란이 뜬금없이 “동해안을 따라 기마민족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 비슷하게 전해지고 있다는 구음(口音) 한 가락을 불러주는데, 잠깐 듣기만 해도 보통 우리 민요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수많은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 빠른 박자의 박진감은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말을 키운다면 제주도를 연상한다. 태백산맥 옆 좁은 땅줄기인 동해안에서 그렇게 많은 말들이 달릴 일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합석한 친구들은 모두 웃으며 “그럴 리가”라며 다음 얘기로 넘어갔고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가끔씩, 그때 들었던 그 가락과, ‘기마민족이 동해안에?’라는 의문이 떠오르곤 했다.

 

 

부여인이 이용했던 아무르강, 넨강, 쑹화강, 우수리강의 큰 줄기 및 부여인이 연해주에서 김해까지 이동했을 걸로 추정되는 해상 루트. 제공: 이진아

 

 

 

가야인의 기원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잡으면서, 그들이 만주 평원의 부여에서 쑹화강, 아무르강을 거쳐 연해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말들이 달리는 듯한 박자의 구음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작은 동해안 마을들에서 원래부터 많은 말을 키울 일은 없었을지 몰라도, 기마생활을 했던 평원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큰 배로 말과 함께 도착했던 일은 있지 않았을까.

 

 

지난 기사(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625100029)에서 알 수 있었듯이 고구려인이 수백 마리의 말을 배에 싣고 다니는 걸 예사로 생각했는데, 같은 시대에, 광활한 평야를 영토로 했던 부여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일시에 말을 타고 해변을 달려 마을로 향해왔다면, 그 엄청난 인상은 그런 가락으로 남았을 법했다.

 

 

그런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준 것은 2017년 한국상고사학회에서 발표된, 한림대 심재연 교수의 논문이었다. ‘환동해지역 비(非)중원계 철 생산 가능성’, 풀어 말하자면, 연해주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경로의 지역에서, 중국의 제철 중심부로 알려졌던 양쯔강이나 황하에서 온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철이 생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철기시대는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전파되어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물 발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설은 이미 낡은 것이 됐다. 2007년 강원도 홍천에서 기원전 7세기에 제작된 철기 단편이 발견된 바도 있다. 그래도 중국 중심부인 양쯔강과 황하 유역에서 먼저 제철이 시작되고 그것이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설명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심교수의 주장은 이런 통설마저 뒤집는 것이다.

 

 

선철 상태에서 두드려가며 더 단단하게 하고 모양을 갖추게 하는 제작 방식의 동해안 형 철기들. 좌로부터 동해, 연천, 홍천에서 발굴된 유물. 제공: 이진아

 

 

 

동해안 지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기시대 유적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삼척 호산리, 동해 송정동, 동해 망상동, 강릉 안인리, 강릉 병산동, 강릉 교항리, 양양 동호리…. 모두 바닷가 혹은 바로 바다로 연결되는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며, 앞으로도 이런 지역에서 발굴이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의 제작 특성은 중국 중심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중국에선 거푸집을 만들어 쇳물을 흘려 넣어 굳히는 방법이었는데, 이곳 철기는 선철 덩이를 계속 가열해가며 두드려 모양을 잡는 방식이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괴로의 구조도 다르다.

 

 

이는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출발, 아무르강을 따라 만주 평원을 거쳐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 제작 특성이다. 연해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한반도 동해안 지역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특징이 북한강, 남한강, 임진강 및 한강 지천인 안성천과 왕숙천 유역 등 내륙 깊숙한 곳에서까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의 연대는 동해안에서보다 조금 나중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서 발굴되는 철기 유물에는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제작 연대가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왜 이런 연대에만 생산됐던 것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궁금해하는 듯하다. 만일 이 시리즈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기원전 1세기, 백두산 폭발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다수의 부여인이 일시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서 그 중 일부가 중간중간 정착해가며 김해까지 갔다면, 충분한 설명이 된다.

 

 

다시 바다 사람의 경우를 상기해보자. 원래 고대 제철 선구자들의 속성이 빠르게, 그리고 끊임없이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바다로 움직인다면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부여인 남하 사태보다 1000년이나 이전인 지중해에서, 바다 사람이 움직이는 스케일은 직선거리로 4000킬로미터가 넘었다. 연해주에서 김해까지 직선거리는 그 절반도 안 된다.

 

 

 

바다사람과 부여인의 해상 이동 경로 비교 제공: 이진아

 

 

 

또한 부여인들은 아무르강, 쑹화강, 넨강, 우수리강 등의 수계를 따라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 규모로, 연해주로 연결되는 물길을 이용하던 사람들이다. 대흥안령 및 소흥안령 산맥이 주는 넉넉한 목재도 있고 하니, 큰 배로 장거리 이동하는 것도 일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앞선 철기 무기도 갖고 있었고, 좁은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준마의 위용을 이용할 줄도 알았을 테다.

 

 

마음만 먹는다면 동해안을 타고 내려가며 이곳저곳 장악하여, 소규모이나마 국가 비슷한 체계를 갖춘 집단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서에 잠깐 등장하는 실직국, 음즙벌국 등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 동해안 남쪽의 형산강을 따라 지금의 경주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테고, 조금 더 내려와 남해안을 끼고 돌아서 낙동강을 만나면 김해를 비롯, 여러 곳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테다.

 

 

김해까지 오면, 거기서 남해와 서남해 방향으로 진출할 길이 활짝 열린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금관가야의 설립자 수로왕의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7성이 머물 만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낙동강 수계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인 김해 일대를 여뀌잎에 비교했던 수로왕, 만주 평야를 주름잡던 부여 출신다운 스케일이다. 그는 어디까지 강토를 개척했을까?(2)

 

 

 

 

<자료출처>

 

 

(1) <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 문화일보 munhwa2020-07-15

 

 

(2) 동해안 따라 부여인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 주간조선 (chosun.com)

 

 

 

<참고자료>

 

 

희미해진 역사의 이상한 공백…양쯔강과 한반도 인간집단  - 주간조선 (chosun.com)이진아.2020.07.14

 

 

 

 

‘철의 왕국’ 가야의 전혀 다른 두 얼굴  - 주간조선 (chosun.com)이진아.2020.09.08

 

 


해상왕국 페니키아와 가야의 공통점은? - 주간조선 (chosun.com)이진아.2020.11.03

 

 

 

 
 

 

 

 

 

 

 

 

 

 

 

인도에서 한반도 낙동강까지... ‘가야’가 새겨진 역사  - 주간조선 (chosun.com)

 

 

기원전 350년 인도-베트남-한반도 ;제철인 핫라인의 탄생  - 주간조선 (chosun.com)

 

 

가야의 철기문명, 시작은 어디였을까? - 주간조선 (chosun.com)

 

 

‘중국 대륙-한반도-일본 열도’ 동아시아는 가야를 중심으로 교류했다  - 주간조선 (chosun.com)

 

 

배 타고 가야로 온 아유타국 공주... 신화의 미장센에 깔린 역사적 사실  - 주간조선 (chosun.com)

 

 

‘가락국기’ 속 244자에 담긴 ‘500척’과 ‘중국’의 의미  - 주간조선 (chosun.com)

 

 

옛 가야 터의 이국적 ‘돌’... 남방 해양교류의 역사 품었다  - 주간조선 (chosun.com)

 

 

수로왕은 가야가 아니라 ‘가락국’의 개국시조였다  - 주간조선 (chosun.com)

 

 

“철기문명은 바닷길을 통해 확산됐다”  - 주간조선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