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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신라(16) 24대 진흥왕(眞興王, 540-576년)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1. 신라(16) 24대 진흥왕(眞興王, 540-576년)

대야발 2026. 1. 12. 17:09

 

 

 

《삼국사기》 권 제4 권 제4신라본기 제4 眞興王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진흥왕(眞興王)

 

진흥왕은 즉위 초기 어렸으므로 법흥왕의 딸인 태후가 섭정하다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부인이었다.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

 

 

 

진흥왕이 고구려와 화친하니 백제가 침범해 오다

승성(承聖) 3년 9월 백제 병사가 진성(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2)

 

 

 

《조선상고사》

 

■ 진흥대왕의 화랑 설치

 

화랑은 신라를 발흥시킨 계기에 그치는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훗날 중국문화의 융성으로 사대주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민심 · 풍속 · 학문을 지배하고 전 조선을 중국화하려 할 때 이에 맞서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것이 화랑이었다. 고려 중엽 이후로 화랑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져 직접적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과거의 유풍을 통해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것은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는 것은 골수를 빼고 인간의 정신을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화랑이 직접 기술한 《선사》 · 《화랑세기》 · 《선랑고사》 등의 문헌은 다 사라졌다. 그래서 화랑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화랑의 문외한인 유교도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일연(원문은 '무극'-옮긴이)의 《삼국유사》 두 책 가운데서 과화숙식으로 적은 수십 행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 수십 행의 기록이나마 정확하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먼저 《삼국사기》에 나타난 화랑 창설 기록을 언급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대왕 편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물가 구름처럼 모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그 전에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얻을 길이 없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집단별로 모아 놓고 단체 활동을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행동을 관찰한 뒤에 인재를 발탁하고자 했다. 여기서 미녀 두 사람을 선발했다. 하나는 남모라 하고, 하나는 준정이라 했다. 무리를 모으니 300여명이었다. 두 여성은 서로 경쟁하고 질투했다. 준정은 남모를 사저로 유인해 강제로 술을 권해 취하게 만든 뒤, 끌어다가 하천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을 당하자, 무리는 화합을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미모의 남자들을 모아 화장을 시키고 화랑이라 명명하고 이들을 받들도록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함께 도의를 연마하고 어떤 이들은 함께 가락을 즐기며 산천을 유람했다. 이들은 멀다고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개개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훌륭한 사람을 뽑아 조정에 천거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피어나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말했다.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하고 부른다. 이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나오지만, 실제로는 3교를 다 동원해서 대중을 교화하는데 있다. 예컨대 안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를 실천하고 불언을 지키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가르침이다.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족 자제 중에서 잘생긴 사람을 뽑아서 분을 바르고 꾸며서 화랑이라고 불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섬겼다'고 했다."

 

문장 하반부에서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인용해 화랑을 상당히 찬미한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잘못된 이해와 황당한 오류가 심각하다. 《삼국사기》〈사다함열전〉에 의하면, 사다함이 가라 정벌에 참여한 때는 진흥대왕 23년이다. 그렇다면 이때 이미 화랑이 있었음이 명백한데도 진흥대왕 37년에 화랑 제도가 시작됐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였다. 원화를 폐지한 뒤, 남자 교사를 세우고 이들을 국선 혹은 화랑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원화가 곧 화랑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김부식시대에는 화랑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또 화랑에 관한 서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지은 《삼국사기》에서는 화랑 창설의 연도도 불확실하고 기원도 불명확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부식은 유학자의 영수로서 화랑파 윤언이를 쫓아내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하려 한 자이니, 그의 생각대로 한다면 《삼국사기》에 화랑이란 명사를 단 한 자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야기이건간에 중국 책에 나오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화랑을 매우 미워했지만 중국의 《대중유사》 · 《신라국기》 같은 책에 화랑이란 말이 실려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삼국사기》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위의 문장 말미에서 인용한 《신라국기》의 내용은 "귀족 자제 중에서 잘생긴 사람을 뽑아서" 이하의 스물네글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종의의 《설부》에 인용된 《신라국기》에는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얻을 길이 없다고 걱정했다. ...... 행동을 관찰한 뒤에 인재를 발탁하고자 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런 점을 보면, 그 밑의 사실 관계와 김대문 · 최치원의 논평도 거의 다 《신라국기》에서 채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그는 《신라국기》에 쓰인 화랑 창설의 역사만 인용하고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내용은 모두 말살해버렸다.

 

다음으로 《삼국유사》에 적힌 화랑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진흥왕이 ...... 즉위했다. ...... 신선을 매우 숭상하며 민가의 낭자들 중에서 예쁜 사람을 골라 원화로 세우고 무리를 모아 효제충신을 가르쳤다. ...... 남모 낭자와 교정 낭자라는 두 원화를 뽑고 무리 3, 4백 명을 모았다. 교정 낭자는 남모 낭자를 질투하여 남모 낭자에게 술을 많이 먹였다.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뒤, 북천으로 몰래 데리고 가서 큰 돌로 매장해 죽였다. 그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몰라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흩어졌다. 이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길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남모의 무리가 이것을 듣고 북천에서 시신을 찾아내고 교정 낭자를 죽였다. 그러자 왕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왕은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가정의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뽑고 화랑이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설원 화랑을 국선으로 받들었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면 좀 상세한 편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아닌 밤에 홍두깨' 같은 소리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선을 숭상하여 원화나 화랑을 만들었다는 부분이다. 만약 그렇다면, 원화나 화랑이 도사나 황관(도사와 같은 의미-옮긴이)의 일종이란 말인가? 《삼국유사》 저자는 불교도인 까닭에 《삼국사기》 저자인 유교도처럼 배타적인 심술을 품지는 않았겠지만,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한가지다.

 

국선 화랑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를 모방해서 만든 제도다. 선배를 이두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으로 쓴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선배는 신수두 제단 앞에서 열린 시합을 통해 선발됐다. 이들은 학문에 힘쓰는 한편, 수박 · 격검 · 궁술 · 기마 · 택견 · 깨금질 · 씨름 등의 각종 기예를 했다. 가깝든지 멀든지 관계없이 산천을 유람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고 한 곳에서 공동으로 숙식했다. 평시에는 환난을 구제하고 성곽 · 도로 등을 수축하며, 비상시에는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공익을 위해 자기 일신을 희생했다. 화랑은 이런 선배와 같은 제도였다. 이들을 국선이라 불렀는데 이는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해 단어 앞에 국자를 넣어 만든 명사다. 화랑이라고 부른 것은 이들이 화장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선배가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조의라고 불린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화랑과 조의선인을 구별했다. 한편 원화라는 것은 유럽 중고 예수교 무사단의 여교사(중세 유럽 기독교 기사단의 여성 수도사_ 옮긴이)처럼 남자의 정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설치한 여성 교사였다.

 

《소재만필》에서는 "화랑의 가르침에서는 사람이 전쟁에서 죽으면 천당의 상석을 차지한다고 했다.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고,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화랑들은 소년의 몸으로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국선의 선仙을 근거로 화랑을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중국의 도교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를 실천하고 불언을 지키는 것은 주주사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국선의 교리가 유교 · 불교 · 도교 3교의 장점을 갖추었음을 찬미하는 말일뿐이다. 실제로 국선들은 전쟁터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무위니 불언이니 하는 것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에서 "득오 급간이란 이가 있었다.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려놓고"라고 한 것을 보면 국선의 가르침을 풍류라고 명명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서 소개한 《삼국유사》에서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검군열전〉에서 "저는 ...... 풍월의 뜰에서 수행했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국선의 도를 풍월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풍류라는 것은 중국 서적에 나오는 유희와 같은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말의 풍류 즉 음악을 가리킨다. 풍월이라는 것도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음풍영월과 같은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즉 시와 노래를 가리킨다. 화랑도는 여타의 학문과 기예도 중시했지만, 무엇보다 시 · 음악 · 노래를 통해 세상을 교화하는 것을 중시했다. 《삼국사기》〈음악지〉에 있는 진흥대왕 시대의 〈도령가〉와 화랑 설원의  〈사내기물악은 화랑의 작품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신라 사람들 중에는 향가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천지귀신을 감동시킨 예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것도 화랑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을 보면, 이런 시 · 음악 · 노래로 연극을 많이 공연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및 삼한 사람들이 노래를 좋아해서 주야로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지》에도 명확히 실려 있다. 신라는 이런 풍속을 토대로 백성 교화의 전략을 세워  · 노래 · 음악 · 연극 등으로 민심을 고무시킴으로써 기존의 소국에서 벗어나 문화적 · 정치적으로 고구려 · 백제와 대적할 수 있게 되었다.

 

화랑의 원류를 적은 《선사 · 《선랑고사》 · 《화랑세기》 등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선사》는 신라 이전 즉 단군 때부터 고구려  · 백제까지의 선배들에 관한 책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나오는 "평양이란 곳은 본래 선인 왕검의 터였다"라는 문장도 《선사》의 한 구절이었을 것이다.  《선랑고사》 《화랑세기》 등은 신라 이래의 선배들에 관한 책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런 책들에서 채록한 부분이 간혹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화랑들에 관한 것일 뿐, 300여 화랑과 낭도의 스승들에 관해서는 하나도 다루지 않았다. 김부식이 화랑을 말살하려 한 의도가 여기서도 드러난다.(3)

 

 

 

■ 신라의 10개군 기습과 신라 · 백제 동맹의 파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했다는 기사가 없고, 그래서 양원왕이 장안성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없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선생은 '이때 백제 달솔인 부여달기가 정예병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하자,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그리로 천도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천도한 장안성은 지금의 봉황성일 것이고, 봉황성이 당시의 신평양이라고 보았다.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에 천도한 기사는 양원왕이 도읍을 옭겼다가 곧바로 평양으로 환도한 뒤 평원왕이 다시 장안성 즉 신평양에 천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왔다고 보았다.

 

 

서기 548년, 고구려 양원왕이 예족 군대를 거느리고 한강 이북에 있는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했다. 진흥왕은 동맹의 약속에 의거하여 장군 주진이 정예병 3천을 데리고 고구려군을 격퇴하도록 했다. 당시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으로 인해 모두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럼, 위에서 말한 한강 이북은 어느 땅일까? 이것은 지금의 양성 한래의 북쪽을 가리킨다. 독산성은 지금의 수원과 진위(지금의 평택시에 진위면이 있다_옮긴이)의 중간에 있는 독산고성인 듯하다. 

 

신라가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양원왕은 대군을 동원해서 더욱 깊숙이 침입했다. 이듬해에 고구려군은 지금의 충청도 동북 일대로 진입했다. 고구려군은 도살성(지금의 청안)에 주둔하고 백제군은 금현성 즉 지금의 진천에 주둔한 상태에서 , 1년 좀 넘게 혈전이 벌어졌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한 사이였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듬해인 서기 551년 돌궐족이 지금의 몽골로부터 동진하여 고구려의 신성 및 백암성을 공격했다. 병력을 나눈 양원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도록 했다. 이때 백제 달솔인 부여달기가 정예병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하자,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그리로 천도했다.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곳이 평양이라면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났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장안성은 지금의 봉황성일 것이다. 봉황성은 당시의 신평양이니, "안동도호부(지금의 요양)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는 800리"라고 할 때의 평양은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본기〉에서는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에 천도했다고 한다. 양원왕이 도읍을 옮겼다가 곧바로 평양으로 환도한 뒤 평원왕이 다시 장안성 즉 신평양에 천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왔을 것이다.

 

만약 신라가 동맹의 우의를 지키고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쳤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증오했다. 그래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결과적으로 백제가 강성해져 신라가 대적하기 힘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흥왕은 가만히 백제의 뒤를 기습해서 백제의 신 점령지를 탈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병부령 이사부가 지금의 충청도 동북부로 출병하는 한편, 대아찬 거칠부가 구진 · 비태 · 탐지 · 비서 · 노부 · 서력부 · 비차부 · 미진부 등 장군 여덟 명을 거느리고 죽령 이북으로 출병했다. 백제는 이것을 동맹에 의한 출병으로 판단하고 매우 환영했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고 충청도의 충주 · 괴산 등지도 고구려의 강역이 되었다. 그런데 근세에 정약용 · 한진서 선생 같은 분들은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을 단 한 발짝도 밟은 적이 없다면서 《삼국사기》를 공격했다. 하지만 도살성 점령 사건을 보면, 고구려가 한강을 넘지 못했다는 말이 어떻게 잠꼬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구려는 이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황해도까지도 항상 백제의 땅이었다. 그러니 충북 지역을 고구려 땅으로 만든 《삼국사기》에 오류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4)

 

 

 

■ 백제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영토 확장

 

신라는 10개 군을 취한 뒤에 고구려와 강화했다. 신라는 어제의 동맹국인 백제를 적국으로 돌리고, 백제의 동북 지방을 침탈하여 지금의 이천·광주·한양 등지를 취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패배한 백제는 고립됐지만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반격에 나섰다. 백제는 밈라가라의 유민들에게 국원성(지금의 충주)을 떼어주고 나라를 재건하도록 한 뒤, 서기 554년에 밈라와 연합하여 어진성(진산())을 쳐서 신라군을 격파하고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했다. 백제군이 더 나아가 고시산(지금의 옥천)을 치자, 신라 신주군주 김무력과 삼년산군(지금의 충북 보은)의 고우도도()가 대군을 거느리고 지원에 나섰다. 성왕은 정예병 5천 명을 뽑아 한밤중에 신라 대본영을 기습하려 했지만, 구천(, 음은 ‘글래’, 여기서 옥천이란 이름이 나옴, 지금의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의 복병을 만나 패전하고 사망했다.

승세를 탄 신라군이 백제의 좌평(대신)과 병졸 2만 9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자 백제 전국이 크게 진동했다. 그 뒤 백제를 더욱 더 공략한 신라는 남으로는 비사벌(지금의 전주)을 쳐서 완산주를 설치하고, 북으로는 국원성을 쳐서 제2밈라를 멸하고 그 땅에 소경()을 만들었다. 진흥대왕은 이처럼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충주·전주 같은 경기·충청·전라도의 요지를 획득했다. 그런 뒤 고구려를 쳐서 동북방으로 나가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길림(吉林) 동북을 차지했다. 신라 영토의 확장은 이때가 건국 이래 최고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는 연도가 바뀌거나 사실 관계가 빠진 예가 한둘이 아니다. 화랑이 창설된 연도가 틀렸다는 점은 이 편의 제1장에서 서술했다. 또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 변방을 취해서 신주()를 설치했으며, 겨울 10월에 백제의 왕녀를 취해 작은 왕비로 삼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아무리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시대라고 해도, 석 달 전(원문은 ‘4개월 전’_옮긴이)에 전쟁을 해서 영토를 뺏고 빼앗긴 나라들이 석 달 뒤(원문은 ‘4개월 후’_옮긴이)에 결혼동맹을 맺고 장인-사위 관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이 일은 10개 군을 탈취한 때로부터 불과 3년 뒤의 일이다. 3년 전에 신라와의 동맹에서 배신을 당한 백제가 3년 뒤에 딸을 시집보내고 신라왕을 사위로 삼았겠는가.

또 진흥왕 12년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지금의 충주 탄금대 부근)에서 우륵과 그 제자 니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따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음악지〉에 따르면, 성현현(지금의 청풍) 사람인 우륵이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악기를 갖고 신라에 투항하자 진흥왕은 그를 국원성()에 안치했다”고 했다. 우륵은 본래 제1밈라 즉 고령 사람이었다. 그는 제2밈라에 들어가 지금의 청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다가 제2밈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신라에 투항했다. 제2밈라를 점령하고 우륵을 국원성에 안치한 진흥왕이 순행 중에 우륵을 불러 가야금 소리를 감상한 곳이 지금의 충주 탄금대 유적이다. 국원성 즉 지금의 충주가 신라 땅이 된 때가 진흥왕 16년6)이므로,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도 진흥왕 16년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진흥왕 12년에 낭성에 순행하여 우륵의 가야금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한양 삼각산 북봉에 진흥대왕순수비가 있다. 이것은 대왕이 백제를 쳐서 성공한 일을 기념하는 유적이다. 함경남도 함흥 초방원()에도 진흥대왕의 순수비가 있다. 이것은 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성공한 일을 기념하는 유적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는 이 같은 대사건이 죄다 빠져 있지 않은가. 《만주원류고》 및 《길림유력기()》에 따르면, 길림은 본래 신라의 땅이다. 길림이라는 표현도 신라를 가리키는 계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진흥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강토를 개척하고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 보유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한편, 박지원의 《연암집》에서는 복건성의 천주()와 장주()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었다고 했다. 어떤 책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자세히 인용할 수는 없지만, 진흥대왕이 바다 건너까지 경략하여 그곳에 유적을 남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5)

 

 

 

한국열국사연구》

 

지증마립간과 법흥왕 시대의 기반 위에서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시대에 신라는 크게 도약을 하게 되었다.

진흥왕은 불교를 일으켜 귀족 신분제를 유지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음과 동시에 신라 문화를 국제화하였고 국사를 편찬하여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세웠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가르치게 하는 등 문화 진흥에 힘썼고, 화랑도를 창설하여 젊은 인재들이 민족 주체성을 갖도록 하였다.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남 함흥 황초령, 함남 이원군 마운령 등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와 단양의 적성비가 잘 말해 주듯이 이 시기에 신라의 영토는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넓었다.

 

백제는 물론 중국의 북조 및 남조와도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튼튼히 하고 민족 통합의 기반을 닦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는 왕호를 사용한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진흥왕 때에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신라는 한민족 고유의 가치관과 이념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불교를 통하여 신라의 사회와 문화를 국제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넓은 영토와 강본약지의 국가구조도 형성되었다. 중국과 외교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고구려를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훗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6)

 

 

 

<자료출처>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4, 325-332쪽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8편 삼국혈전의 개시 제1장 신라의 발흥 1. 진흥대왕의 화랑 설치)

 

(4)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347~350쪽(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군의 쟁탈 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4. 신라의 10개군 기습과 신라 · 백제 동맹의 파기)

 

(5) 조선상고사, 신채호지음, 김종성옮김, 위즈덤하우스, 347-354쪽(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 군의 쟁탈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5. 백제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영토 확장)

 

(6)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451-452쪽

 

 

 

<참고자료>

 

 

신라의 화랑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제도…자유의지와 사명감으로 삼국통일 위업 달성 앞장 | 생글생글 (hankyung.com)

 

 

신라 5세기부터 변혁과 전략적 거점 확보 추진 선진문물 수용하며 변방국가서 강국으로 발돋움 | 생글생글 (hankyung.com)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 진흥왕과 원광법사 - 오마이뉴스 (ohmynews.com)2020.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