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신라(18)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본문
《삼국사기》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眞平王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진평대왕(眞平大王)
진평왕이 비형을 키우고 귀교를 놓게 하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執事)라는 직책을 주었다. [비형은] 매일 밤 멀리 나가서 놀자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나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荒川) 언덕 위에경성(京城)의 서쪽에 있다가서 귀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속에 매복하여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에 각각 흩어지고 비형랑도 역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용사들은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이 비형을 불러 묻기를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 하자 비형랑이 대답하길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러하면 너는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神元寺)의 북쪽 도랑에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어떤 이는 황천(荒川)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다리를 놓아 보도록 하여라.” 하였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 한다.
비형이 도망간 귀신 길달을 잡아 죽이다
왕이 또 묻기를 “귀신의 무리 가운데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조정(朝廷)을 도울만한 자가 있느냐?” 하자 [비형이 말하기를]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국정을 도울만합니다.”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왕을] 알현하니 [길달에게] 집사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과연 충직한 것이 비길 자가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角干 林宗)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루문(樓門)을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 위에 가서 잤으므로 그 문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갔으므로 비형이 귀신들로 하여금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성스런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 나라의 풍속에는 이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친다.
백정왕이 내제석궁의 돌계단을 밟아 부러뜨리다
천사옥대(天賜玉帶)청태(淸泰) 4년 정유(937년) 5월 정승(正丞) 김부(金傅)가 금을 새기고 옥을 두른 허리띠 한 벌을 바치니, 길이는 10뼘[圍]이고 과(銙 ; 장식으로 늘어뜨린 고리)는 62개이다. 이것이 진평왕의 천사대(天賜帶)이다. 태조가 그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보관하였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김씨이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8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에 행차하였는데, 돌계단[石梯]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不動石) 중의 하나이다.
천사가 백정왕에게 삼보중의 하나인 옥대를 하사하다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의 정원에 내려와 말하기를 “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으니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교묘(郊廟)와 대사(大祀)에는 항상 이것을 허리에 찼다.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 정벌을 도모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신하가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의 구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그 셋째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계획을 그치었다.
찬(讚)하여 말한다.
구름 밖의 하늘이 준 옥대를 두르니 임금의 곤룡포에 아름답게 어울리네.
우리 임금의 옥체 이제부터 더욱 위중해지니 다음에는 쇠로써 섬돌을 만들어야 마땅하네.(2)
《조선상고사》
■ 백제 왕손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결혼
백제 위덕왕의 증손으로서 서기 6세기 후반에 태어난 서동은 준수한 도련님이었다. 그는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이었다. 신라 진평왕의 둘째 따님인 선화공주도 어여쁜 아가씨였다. 선화공주도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처녀였다. 진평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몇이었다. 그중에서 선화가 가장 어여뻤기 때문에 선화를 가장 사랑했다. "신라의 왕이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비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노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진평왕은 선화를 위해 좋은 사윗감을 얻고자 했다. 진평왕은 서동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서동을 선화의 남편감으로 생각했다. 위덕왕도 증손을 위해 증손부를 얻어주고 싶어 했다. 위덕왕도 선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선화를 서동의 아내감으로 생각했다.
이 시대는 가부장제 시대였다. 집안의 어른인 양쪽의 주혼자이자 일국의 대왕인 위덕왕과 진평왕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이 결혼은 성사되기 쉬운 혼사였다. 하지만 결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 결혼을 제안했다면, 진평왕이나 위덕왕은 필시 "이 역적 놈!"하고 대노하면서 처형했을 것이다.
그 사정은 무엇일까? 신라에서는 대대로 박 · 석 · 김 3성이 상호 결혼하고, 아들과 사위 중에서 연장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다른 성씨의 딸을 3성의 집에 들일 수는 있어도, 3성의 딸을 다른 성씨에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신라 소지왕이 백제 동성대왕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지만, 또 신라 법흥왕 때 밈라가라 가실왕에게 누이를 주었다고 하지만, 실은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6부 귀족의 딸이나 누이였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입장에서는 자기 딸인 김선화의 미래 남편은 박싸기 아니면 석씨이고, 석씨가 아니면 동성인 김씨일 수 밖에 없었다. 신라인도 아닌 백제 부여씨인 서동의 아내가 될 수는 없었다. 이는 선화 쪽의 사정이었다.
백제는 신라처럼 성씨를 이유로 결혼에 대해 가혹한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덕왕의 아비인 성왕을 죽인 자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흥대왕이었다. 진흥대왕은 누구인가 하면, 그는 바로 성왕의 사위였다. 증손부를 데려올 데가 없어서 아비 죽인 원수 놈의 손녀를 데려오랴? 장인을 죽인 고약한 사위 놈의 손녀를 데려오랴? 미래에 서동의 아내가 될 사람은 백제의 목씨 국씨 같은 8대 성의 여자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일반 백성일 수는 있지만 선대의 원수인 진흥대왕의 손녀일 수 없다는 마음속의 엄중한 목소리가 있었다. 이는 서동 쪽의 사정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왕이나 신하들도 대개 다 상호간의 살육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도 두 사람의 결혼을 막는 부수적 사정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서동은 성장하면서 '백제 왕가에서 태어나지 않고 차라리 신라의 일반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선화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쳐다볼 수 있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랬더라면 선화의 눈에 내 꼴이 한번이라도 보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찔러댔다. 결국 그는 백제 왕궁을 탈출하여 신라의 동경(지금의 경주)을 찾아갔다. 거기 가서 그는 머리 깎고 어느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불교를 존숭했다. 왕이나 왕족이 궁중에 승려를 초청하여 불공을 올리거나 백고좌를 열어 대화상의 설법을 듣곤 하던 때였다. 서동은 설법이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오래도록 그리던 선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선화는 '백제 서동은 사랑스러운 사내라지만, 아마 저 중만 못할 것이다. 내가 오늘부터는 서동의 생각을 버리고 저 중을 좋아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서동은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하면 죽어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을 바에야 죽여버리리라'라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마음이 맺어지게 되었다. 서동은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고 밤을 이용해서 선화의 궁에 들어가서 사통했다. 선화는 서동이 아닌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고, 서동은 선화가 아닌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주변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찌하랴. 서동과 선화는 상의 끝에 "차라리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함께 죽자"고 합의했다. 서동은 이따금 엿과 밤과 과일을 잔뜩 사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꼬여 "선화 아기씨님은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전했지만 반쪽은 서동에게 떼어주고 반쪽은 자기가 갖고 상사병을 앓고 있다네. 서동아, 어서 오소서. 어서 오시어 염통을 도로 주고 선화 아기씨를 살려주소서"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하루아침에 신라 동경의 곳곳에 퍼지니,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고백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죽을 각오로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위덕왕과 진평왕은 처음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모르는 남녀 사통은 가정의 변고'라며 곧바로 사형을 내릴 듯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딸이요 사랑하는 손자이니 어찌 하랴. 진평왕은 박 · 석 · 김 3성의 혼인 전통을 타파하고, 위덕왕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함으로써 양국 왕실은 다시 사돈이 되었다.
■ 결혼 이후 약 10년간의 양국 동맹
양국은 결혼동맹 이후 매우 친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것은 나중에 고타소낭의 참사(고타소 낭자의 참혹한 죽음_옮긴이)를 계기로 백제를 증오하게 된 신라가, 백제를 멸한 뒤에 그런 기록을 모두 태워버리고 신라 왕가의 여자가 백제에 출가한 자취를 숨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선화공주의 미모를 들은 서동이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에 와서 아이들을 꾀어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하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무강왕이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하여 용화산에 미륵사를 짓자 진평왕이 기술자들을 보내 도왔다고 했으니, 양국이 한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후조선 무강왕 기준과 왕비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릉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주석에서, 백제 무왕의 아명이 서동이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서동은 백제 왕위를 이어받은 지 42년 만에 사망하고 나서 무왕이란 시호로 불렸으므로, 무강왕이란 표현은 후조선 기준이 아니라 백제 무왕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이두의 독법으로 읽을 경우, 서동은 서薯에서 뜻을 취하고 동童에서 음을 취해 '마동'으로 읽어야 하며, 말통은 말末과 통通에서 모두 음을 취해 마동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말통대왕릉은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가 합장된 무덤이다.
그런데 말통대왕이 즉위한 뒤 백제와 신라가 혈전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으므로, 신라가 혈전의 상대방 쪽으로 기술자들을 보내 사찰 건축을 도왔을 리 만무하다. 미륵사는 서동이 왕손이었을 때 지은 원당(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법당_옮긴이)으로 보인다. 원당을 지을 때는 신라 · 백제 두 사돈 국가가 상호 우호적이어서, 고구려에 맞서 동맹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진평왕 원년에서 24년까지, 즉 백제 위덕왕 26년에서 45년을 지나 혜왕 2년과 법왕 2년을 넘어 무왕 2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단 한 차례의 전쟁도 없었다. 이 시기에 양국은 수나라에 경쟁적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함으로써 수문제 및 수양제가 침입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 동서 전쟁, 김용춘의 총애 다툼과 무왕의 항전
백제는 위덕왕 말년이나 혜왕 · 법왕 시대 즉 서동이 왕증손 · 왕손 · 왕태자였을 때는 신라와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서동이 왕이 된 뒤인 무왕 3년부터 신라와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지금의 운봉)을 치고, 신라는 소타 · 외석 · 천석 · 옹금(지금의 덕유산 위)에 성책을 쌓고 백제를 막았다. 또 백제는 좌평인 해수를 시켜 네 개의 성을 공격하고 신라 장군 건품 · 무은과 격전을 벌였다. 이후로 양국은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 괴산 · 연풍 · 보은 등지와 지금의 지리산 좌우의 무주 · 용담 · 금산 · 지례 등지와 지금의 덕유산 동쪽인 함양 · 운봉 · 안의 등지에서 무수한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참극을 연출했다.
진평왕은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다. 속담에, 아내에게 엎어지면 처가의 밭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왕이 왕이 되어 정치권력을 잡은 뒤에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 나라를 밭 말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병력으로 유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왕위는 삼성상전(박 · 석 · 김 3성간에 대대로 이어졌다는 의미_옮긴이)으로 계승되었다. 이것은 시조 박혁거세 때 제정된 성문헌법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박 · 석 2성이 결혼했으며 그중 1성의 아들이나 사위가 왕이 될 권리를 가졌다. 그러다가 건국 300년 뒤에 첨해왕의 사위이자 김씨인 미추이사금이 2성에 가세함으로써 삼성상전의 국면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600년 뒤에 부여씨가 3성에 가세해서 사성상전의 국면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 불가했겠는가.
엄밀히 말해, 무왕은 신라 왕위를 이을 권리가 있었다. 원래 신라는 아들과 사위 중에서 연장자가 선왕의 왕통을 계승하는 나라였다.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맏딸 선덕이 있었지만, 여승이 되어 출가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화는 둘째 딸이었지만, 선화의 남편인 무왕은 맏사위였다. 그러므로 무왕은 신라왕이 될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 진평왕도 무왕에게 왕위를 넘길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됐다면 박 · 석 · 김 · 부여 사성상전의 국면이 생겨, 신라와 백제가 하나의 나라가 되고 양국 인민이 무의식적인 혈전을 피했을 것이다.
백제는 부여씨 밑에 사沙, 진眞, 국國, 해海, 연燕, 목木, 백苩, 협劦씨라는 8대 가문이 있었지만, 부여씨가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귀족 공화제인 고구려와는 달랐다. 신라는 박 · 석 · 김 3성 공화제의 국가였지만, 이때는 김씨 일가가 왕위상속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했다. 그랬기 때문에 부여씨와 김씨 양쪽 왕의 마음만 맞았다면 결혼을 통한 양국의 연합도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 꼭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랴. 양국 신하들이 거의 다 반대했겠지만, 그중에서도 김용춘이 가장 강력한 반대 의견을 품었을 것이다. 김용춘이 누구인가? 그는 진평왕의 셋째 딸인 천명의 남편이다. 선화가 백제에 시집가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진평왕의 애정은 자연스레 천명에게 옮겨갔을 것이고, 첫째 사위이자 선화의 남편인 서동보다는 둘째 사위이자 천명의 남편인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신라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는다면 김용춘 자신한테 돌아올 가능성이 컸으므로, 김용춘은 반대 의견을 내세워 저지에 나섰을 것이다. 결국 그의 반대가 성공하여,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버린 진평왕은,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장녀 덕만 즉 선덕대왕을 불러 왕태녀로 삼고 김용춘을 중용하여, 장래 명목상 권위는 선덕에게 있을지라도 실권은 김용춘에게 있도록 했을 것이다. 김용춘에게 왕위를 계승할 명분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왕위를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었으니, 어찌 이런 방법에 속으랴. 그는 즉위 후에 김용춘을 죽이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쳤다. 김용춘은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진영에서 참모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으로서 대장군을 겸직하고 전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상호 간의 악전 고투가 거의 매년 벌어지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이다.(2)
<자료출처>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362-376쪽(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3장 동서전쟁 1. 백제 왕손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결혼 2. 결혼 이후 약 10년간의 양국 동맹 3. 동서 전쟁, 김용춘의 총애 다툼과 무왕의 항전 4. 동서 전재의 희생자, 이 전쟁은 두 동서 간의 왕위쟁탈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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