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재기 기자입력 2024. 3. 28. 16:23수정 2024. 3. 28. 21:31

입력 2021. 6. 22. 12:49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한 저수지에서 한해살이 부엽(浮葉)식물인 가시연꽃이 꽃망울을 떠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가시연꽃은 7월에서 8월말에 보라색 꽃을 피운다. (뉴스1 자료)2021.6.22/© News1 최창호 기자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2일 월성유적의 해자에서 벌견된 가시연꽃 씨앗에 대한 이용 사례와 현재의 서식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가시연꽃 씨앗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제공)2021.6.22/© 뉴스1

 

(경주=뉴스1) 최창호 기자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2일 월성유적의 해자에서 발견된 가시연꽃 씨앗에 대한 이용 사례와 현재의 서식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영농조합법인 가시연꽃들꽃마을로부터 기증받은 가시연꽃으로 고대 환경을 복원하는 것이다.

가시연꽃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식물로 자주색 가시가 달린 꽃과 잎이 특징이며, 창녕 우포늪과 강릉 경포천 등 일부 지역에서 관찰되고 있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가시연꽃이 제수품으로 언급돼 있다.

월성해자에서 1만6000여개의 씨앗이 발견됐는데, 이를 통해 5세기 어느 여름날 가시연꽃이 핀 경주 일대의 당시 풍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가시연꽃은 신라 미추왕,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 가을 숭혜전에서 성대한 제례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제물에 포함돼 있다"며 "경주 도심과 가까운 곳에서 가시연꽃이 확인돼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choi119@news1.kr

 

 

수정 2021-09-15 09:13 등록 2021-09-15 05:00

‘죽음의 이벤트’가 열렸다…‘인간 제물’ 위로 쌓은 신라의 권력 (hani.co.kr)

 

‘죽음의 이벤트’가 열렸다…‘인간 제물’ 위로 쌓은 신라의 권력

“1500년 전 참수된 백제 성왕의 죽음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지난 7일 낮 신라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의 발굴 현장을 돌아보며 조사단 총책임자인 김성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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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주 월성 인신공희 흔적의 비밀

기자노형석
지난 7일 경주 월성 서성벽 발굴 현장에서 장기명 학예연구사가 인골이 나온 기저부 조성층 위의 출토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들을 올린 까닭에 거멓게 변색된 기저층 위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을 프린트한 대형 종이 표시가 보인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 그 옆으로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나타난다.

 

“1500년 전 참수된 백제 성왕의 죽음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지난 7일 낮 신라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의 발굴 현장을 돌아보며 조사단 총책임자인 김성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소회를 털어놓았다. 연구소는 이날 놀라운 뉴스를 발표한 참이었다. 월성 서성벽과 성벽에 연결된 옛 서문터 부근의 단면을 발굴조사하다 내부 바닥층에서 2017년에 이어 또다시 인골이 나왔으며, 성벽을 쌓을 때 사람 제물을 바친 신라인들의 인신공희 희생자로 판명됐다는 내용이었다. 김 소장은 이 소식을 들으며 월성 건물터 어딘가에 묻혔을지 모를 성왕의 머리를 생각했다고 했다.

최근 경주 월성 서성벽 기저층에서 인신공희의 제물로 발견된 20대 여성의 인골.

 

월성 성벽에서 나온 인골과 백제 성왕의 머리는 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554년 신라군이 점령한 관산성(충북 옥천)을 태자 창(위덕왕)이 치러 갔다가 고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성왕이 구원하러 정예군을 끌고 갔다가 매복한 신라군에 잡혀 살해당한 기록만 전한다. 하지만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일본서기> ‘흠명기’조에는 상세한 후일담이 나온다. 고도라는 신라 노비가 포로인 성왕의 목을 베어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전하는 한편으로, 다른 책 기록에 주검의 몸은 백제에 돌려보냈으나 머리는 경주 월성 북청 계단 아래 묻었고,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그 관청을 일컬어 도당이라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고 명기한 것이다. 성왕의 참수로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된다. 그 배경엔 <일본서기> 내용대로 왕의 머리를 월성 관청 지하에 묻고 밟고 다니게 한 굴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매장의 의미가 마냥 간단치 않은 의식적·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굴 결과는 일러준다.

2017년 월성 서성벽 아래 기저층에서 발견된 50대 남녀의 인골. 두 사람의 인골에서 북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지점에서 최근 20대 여성의 인골이 출토됐다. 모두 성벽의 안전을 기원하는 인신공희의 희생자들로 판명됐다.

 

성벽 안 인골이 연속 출토된 데 대해 국내 학계는 신라인들의 종교적 의식 세계와 권력자들의 사고방식 일단이 드러난 것이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문터와 건물, 토목구조물 아래 생명을 희생시킨 인간 제물을 놓아 땅 신에게 건조물의 안전과 번영을 비는 것은 고대 인류사에서 널리 퍼진 습속이었다. 성벽, 특히 성벽의 문터 앞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삼아 제례를 지내는 것은 유럽의 고대 켈트족 사회나 중국의 선사시기인 룽산(용산)문화, 상나라 때 성행했다. 2017년 월성 서성벽 단면을 발굴하면서 그 속에서 50대 남녀 인골이 나오자 인신공희의 흔적일 것이라는 추정이 제기됐지만, 무덤이나 집단 살해의 흔적일 것이란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추가 발굴 결과 장신구를 착장한 여성의 인골과 술을 따른 듯한 제례용 토기, 늑골 부분만 자른 각종 동물 뼈까지 나오면서 인신공희는 사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다. 무덤 특유의 시설이 없고 인골들이 일정한 방향축을 형성하면서 놓여 있다는 점도 그렇다. 더욱이 1985년 서문터 북쪽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시굴한 결과 3구의 인골을 확인했고, 90년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무려 23구의 인골을 발굴한 사실도 재조명되면서 인신공희 흔적임이 뚜렷해졌다.

198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월성 서성벽 서문지 앞을 시굴조사하다 출토된 인골. 2017년과 올해 서성벽에서 나온 인골과 출토 지점이 지척이다.

 

재밌는 건 이런 습속이 기원후 국가체제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는데 유독 신라만 1천여년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는 점이다. 왜 이런 지체 현상이 나타난 걸까? 연구자들은 분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골의 희생 의식에 대해 좀 더 가지를 쳐 해석해보면 당혹스러운 실상도 떠올리게 된다. 1700년 전 신라의 천년 왕도 서라벌(경주)의 월성 성벽 앞에서 성스러운 제전을 내세운 죽음의 이벤트가 벌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제왕과 성골·진골 왕족들은 4세기 초중엽 자신들의 거처인 도읍 경주의 월성을 둘러싼 거대 성벽을 쌓으면서 성문 앞 너른 문터에서 평민과 노비들을 희생시켜 성벽이 들어설 자리 위에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렀다. 인신공희는 권력을 치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기획한 제전 성격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섬뜩한 참극으로 비치겠지만, 당시엔 신성한 국가 행사로 간주됐고, 희생자들 또한 영광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소나 학계의 추정이다. 발굴된 인골 어디에도 저항의 흔적이 없고, 목걸이로 장식되고, 짚과 목재덮개 등으로 덮은 의식의 흔적이 확인된다는 점이 근거다.

지난 7일 월성 서성벽 서문 추정터의 발굴 현장을 찍은 사진.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층 때문에 거멓게 변색된 기저층 위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의 프린트 종이들이 각각 놓여 있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이 보인다. 중심골조 옆으로는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드러나 있다.

 

서성벽 단면 발굴 현장에는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층 때문에 거멓게 변색된 성 기저층 바닥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의 프린트 종이들이 각각 놓여 있었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이 보였고, 중심골조 옆으로는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드러났다. 백제 풍납토성과 비견되는 높이 10m 이상, 너비 40m 이상의 웅장한 성벽과 그 안에 깔린 인골들의 자취를 보면서 당시 마립간이란 왕호를 쓰면서 국력이 뻗어나가던 신라인들의 옹골찬 힘과 신비로운 내면 세계가 느껴지는 듯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수정 2021-09-08 02:30 등록 2021-09-07 08:59

신라 성벽 속에서 ‘인간 제물’ 흔적 또 나왔다 (hani.co.kr)

 

신라 성벽 속에서 ‘인간 제물’ 흔적 또 나왔다

신라의 천년 왕성이었던 경북 경주 월성의 성벽 속에서 신라 사람의 뼈가 또 발견됐다. 지난 2017년 신라인들이 산 사람을 희생 제물로 쓴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으로 어른 남녀의 뼈 2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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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에서 여성 인골 발견…인신공희 사례

기자노형석
경주 월성 서성벽의 추가조사 과정에서 최근 발견된 신라인 여성의 인골. 목걸이(경식)와 팔찌를 찬 것이 특징이다. 주검 왼쪽에 토기항아리도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의 천년 왕성이었던 경북 경주 월성의 성벽 속에서 신라 사람의 뼈가 또 발견됐다.

지난 2017년 신라인들이 산 사람을 희생 제물로 쓴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으로 어른 남녀의 뼈 2구와 곰뼈 등이 나왔던 월성의 서성벽에서 최근 희생물로 쓰인 어른 여성 인골 1구와 동물뼈들이 뒤이어 발굴됐다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7일 발표했다.

월성 서성벽에서 나온 인골들은 국내에서 고대 성벽 의례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 자료다. 특히 고대 성벽의 축조 과정에 인간 희생물을 쓴 사례는 한국과 일본의 다른 고대 유적에서는 전례가 없다.

확인된 여성 인골은 이전에 나온 인골과 달리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 등의 고급 장신구를 착용한 것이 특징이다. 키가 135㎝ 전후로 체격은 왜소한 편이다. 동물뼈는 말, 소 등 대형 포유류로 추정되는데, 늑골 부위 위주로 골라 제물로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인골 옆에서는 제례 때 음용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항아리가 발견됐는데, 안에 작은 토기가 겹으로 들어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7일 공개된 경주 월성 서성벽 발굴 현장. 큰 고분 내부를 갈라놓은 듯한 모습으로 전면에 보이는 유적이 서성벽 단면이다. 돌들을 겹쳐 쌓은 중심골조 옆으로 진흙층을 덧대어 성벽을 넓힌 흔적이 드러난다. 그 아래 기저층 바닥엔 이번에 출토된 여성 인골과 지난 2017년 출토된 남녀 인골을 각각 프린트한 대형 종이판을 나란히 깔아놓았다. 바로 인골들의 출토 지점이다. 노형석 기자

 

인신공희 흔적이 나온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1985년과 1990년 시굴·발굴 조사에서 출처 불명의 인골 20구 이상이 무더기로 나온 바 있다. 연구소 쪽은 “이번에 밝혀진 월성의 축성 작업과 비교해 보면 과거 무더기로 나온 성벽 부근의 인골들 또한 성벽 축조 과정과 관련하여 묻힌 것으로 보인다”면서 “성벽 쌓는 과정에서 사람, 동물 등을 상당수 제물로 바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월성의 기초 부분 공사를 끝내고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아 올리기 전에 성벽과 문터가 견고하게 건립되길 기원하는 인신공희가 치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인신공희 인골이 발견된 지점의 유적 사진. 월성 서성벽의 서문터 부근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대 동아시아에서 주거지 또는 성벽의 건축 과정에 사람을 제물로 바쳐 땅 기운을 다스리려 한 습속은 기원전 1600~1000년께 중국의 상나라(은나라)에서 성행했다고 학계에 알려져 있다. 국내에도 인신공희 흔적이 추정되는 전례들이 있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터를 구제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우물 속에서 어린 아이 유골이 소, 말, 개 등의 뼈, 부서진 제기들과 함께 발견됐다. 월성 해자(연못)의 바닥과 전북 김제 벽골제 저수지에서도 인골들이 나온 전례가 있다. 권력자가 죽으면 수하 사람들도 죽여서 묻는 순장 풍습도 넓게는 인신공희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생전 형상까지 복원했던 창녕 송현동 가야고분군의 10대 순장 소녀, 경북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의 무더기 순장 인골 등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왕성의 성벽을 쌓는 데서 나온 인골은 과거 사례들에 비해 인신공양 제례의 실체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월성 유적 전경. 오른쪽 끝 점선 표시 부분이 최근 인골이 잇따라 나온 서성벽 구간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사단은 인신공희의 흔적과 더불어 월성 성벽의 축조 연대와 축성 방식도 최초로 밝혀냈다. 기존 성벽이 <삼국사기> 등 역사 기록에 나온 2세기보다 250년 이상 후대인 4세기 초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0~70년이 지난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 분석에 바탕해 서성벽의 토목 기술과 축조 공정 세부를 파악한 결과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옛 사서 기록을 보면, 월성은 고신라 초기인 파사왕 22년(101년)에 쌓은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사서의 축성 기록이 실제 축조 연대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기일 것이라며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사서의 월성 관련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조사 결과가 공개되면서 논란이 사실상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월성은 신라 토성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분류되지만, 당대에 이미 다양한 축성 기술을 썼다는 점도 명확해졌다. 일정 간격으로 나무 말목을 박은 지정(地釘)공법과 목재, 식물류를 층층이 깔아 견고성을 높이는 부엽(敷葉)공법 등으로 기초 부분을 다졌고, 성벽 몸체를 만드는 체성부 공사 과정에서 볏짚, 점토 덩어리, 건물 벽체 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써서 성벽을 높고 거대하게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고도의 토목기술을 적용해 쌓은 왕성 성벽은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으로 추정돼 외관과 규모 등에서 웅장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소 쪽의 설명이다.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4~5세기 경주 일대의 소국이던 사로국이 주변 지역을 통합해 고대국가 신라국으로 새롭게 출범하게 된 시대적 변화를 이번에 발굴된 월성 서성벽의 유적 양상이 그대로 보여준다”면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인신공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신라 사람들이 월성 축조에 그만큼 많은 공력을 들였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굉장히 갈망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월성 조사구역 도면. 모두 네개 지구로 나뉘어지는데, 에이(A)지구 측면의 서성벽 서문터(점선 부분)에서 인골이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월성 유적은 모두 네개 지구로 나뉘는데, 인골이 나온 서쪽 에이(A)지구는 지난 2015년 6월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조사 과정에서 서쪽 성벽을 5세기에 처음 쌓은 뒤 6세기 보수했고, 문이 있던 자리는 유실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조사 성과는 7일 오후 4시부터 연구소의 온라인 유튜브 채널의 현장설명회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8일엔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발굴의 학술적 의미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는데, 역시 온라인 유튜브 채널로 실시간 중계할 예정이다. 토론회는 1·2부로 나눠 1부에서 월성 서성벽 구조·축조 연대·인신공희를, 2부에서는 신라권역과 백제·가야권역 토성의 무덤 자료, 문헌들을 비교 검토하는 차례로 진행된다. 연구소는 월성의 궁궐 배치와 성벽 축조 재료의 자연과학적 분석에 대한 연구 조사도 준비중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입력 2021. 9. 7. 09:01수정 2021. 9. 7. 17:43

경주 월성에서 나온 성인 여성 인골과 토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2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연 신라 고환경 연구 학술대회에서 하대룡 서울대 교수는 경주 월성(月城) 해자에서 1990년에 발견된 인골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하 교수는 인골 257점을 분석해 20명 이상에 해당하는 인골이 한꺼번에 묻힌 이유로 집단 폭력 혹은 전염병에 의한 사체 처리, 하천 범람으로 주변 무덤이 유실돼 유입된 결과, 색다른 장례 풍습 등 여러 가설을 검토했다.

그는 월성 인골에 대해 "미성년자와 성인이 대략 반반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형태의 장례 결과물이거나 유골에 대한 과거인의 인식이 오늘날과 크게 달랐기 때문에 방치된 결과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골들이 쏟아져 나온 장소로부터 약 10m 떨어진 지점에서 인신공희(人身供犧·인신공양) 흔적으로 추정되는 1천600여년 전의 새로운 인골들이 발견되면서 인골 20여 구에 얽힌 미스터리가 풀릴 가능성이 생겼다.

경주 월성 서성벽 인신공희 지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4년 만에 서성벽서 또 확인된 인골, 인신공양 근거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4년 12월 조사를 시작한 월성은 신라의 천년 왕성으로, 매년 한 차례 정도 흥미로운 학술 성과가 공개되는 유적이다.

월성은 A∼D지구로 나뉘어 조사가 진행 중인데, 2017년 A지구 서쪽 성벽 문지(門址·문터) 근처에서 가지런히 누운 인골 2구가 나왔다.

 

당시 연구소는 인골을 살펴본 뒤 몸을 묶거나 저항한 자국이 없어 제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보도자료에도 '제물로 추정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인신공희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7일 연구소는 월성 서성벽 발굴조사 자료에서 '인신공희의 성인 여성 인골 한 구를 추가로 발굴'이라고 발표했다. 미루어 생각한다는 뜻의 '추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인골은 신장이 약 135㎝인 성인 여성. 조사단은 인골에 대해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막 성장이 끝난 상태로 20대 전후로 보면 틀림없다고 했다. 2017년에 출토된 유골이 50대 남녀이고, 키는 남성 165.9㎝·여성 153.6㎝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훨씬 젊고 왜소하다.

연구소는 세 인골과 이에 앞서 2016년 동일한 지점에서 나온 5세 전후 유아 인골이 모두 같은 시기에 희생된 사람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경주 월성 서성벽 축조 과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신공희가 이뤄졌다는 근거로는 인골이 나온 장소와 축성 과정이 제시됐다.

연구소는 신라가 4세기 중엽 월성 성벽을 쌓을 때 먼저 기초부를 다진 뒤 중심부에 토루(土壘)라는 흙으로 쌓아 올린 시설물을 조성하기 직전에 사람을 제물로 삼아 의례를 거행했다고 봤다.

인골이 발견된 장소는 토루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며, 함께 매납한 동물 뼈나 토기가 의례의 흔적이라고 짚었다. 시신을 관에 넣는 대신 풀과 나무판으로 덮고, 그 위에 흙을 차곡차곡 쌓은 점도 인신공희 양상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또 신라인이 행한 순장도 문화사적 맥락에서 함께 살펴볼 만한 풍습으로 꼽혔다. 순장은 지배층 인물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을 함께 묻는 것을 뜻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신라는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 구조물을 지었다"며 "왕성과 무덤은 성격이 다르지만, 두 곳에서 모두 사람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경주 월성 인골 출토 상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여구도 축조 과정서 묻힌 것은 확실…열쇠는 추가 인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공개하면서 1985년과 1990년 월성 조사에서 수습한 인골 20여 구의 성격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성벽 축조 과정에서 묻힌 것은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인신공희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공사 중에 사망한 사람을 위로하며 묻어줬을 가능성도 있다"며 "30여 년 전에는 인골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출토 정황을 정확히 복원하기가 힘들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라가 인신공희를 했다는 문헌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발굴조사 성과뿐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다만 이전에 조사가 끝난 동쪽 문지에서는 인골이 나오지 않았다.

월성 조사 상황을 잘 아는 학계 관계자는 "최근에 나온 인골과 1980∼1990년대 수습한 인골은 성벽에서 일직선을 이룬다"며 "인신을 바치는 제의 행위가 월성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곳에서 인골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서성벽에만 사람을 제물로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공사를 하기 매우 어려운 장소였거나 공사의 시작 혹은 종료 지점이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1985년 경주 월성 인골 조사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sh59@yna.co.kr

 

 

입력 2017. 5. 16. 18:10수정 2017. 5. 16. 21:15

경주 월성 서쪽 성벽에서 발견된 인골 2구. 성벽 축조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 설화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가 국내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아래 사진은 월성 해자(垓字·성벽 외곽에 파 놓은 못이나 물길)에서 발견된 다양한 모양의 토우들. 가운데 터번을 쓴 토우는 이란계 소그드인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신라의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성벽에서 약 1500년 전 제물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나왔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묻힌 사람의 뼈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3월부터 진행된 정밀 발굴조사에서 5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서쪽 성벽의 기초층에서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는 인골 1구와 얼굴과 팔이 이 인골을 향해 있는 또 다른 인골 1구를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이종훈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똑바로 누운 인골은 키 166㎝의 남성이고, 다른 인골은 이보다 조금 작은 159㎝로 아직 성별은 파악되지 않았다 ”며 “자연 퇴적층에 1.5m 높이로 흙을 쌓은 뒤 사람 두 명을 묻고 다시 9m 높이로 성벽을 축조했다”고 설명했다.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기원전 1600∼1000년·상(商)나라)에서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돼 설화로만 전해져 오다가 이번에 고고학적으로 처음 확인됐다. 이 소장은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고 곧게 누운 점으로 미뤄 사망한 뒤에 묻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의례 행위를 치르고 나서 매장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현재 인골을 조사 중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2000년 경주국립박물관 내 신라 우물 안에서 발견된 어린이 유골이나 이번에 성벽에서 발견된 유골의 특징을 볼 때 신라시대에 인신공양의 풍습이 의례행위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아이를 쇳물에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설화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와 함께 경주 월성의 서북쪽 해자에서는 높이 5∼10㎝에 달하는 독특한 모양의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사람 형상의 인형)들과 이두(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법) 사용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목간도 나왔다.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토우 중 에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페르시아풍의 긴 옷을 입은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금관총]

 

입력 2021. 3. 8. 06:00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라면 훈민정음(국보 70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석굴암(국보 24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신라금관을 꼽을 겁니다. 금관 중에서는 1921년 발굴된 첫번째인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으뜸으로 칠 겁니다.

하지만 이 금관총 발굴이 당시 경주에서 ‘대서방’ 주인이었던 일본인 비전문가가 주도한 ‘아마추어 발굴’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또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학계는 “우리(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이라고 흥분했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죠.

1921년 사상 처음으로 발굴된 신라금관. 이 발굴은 당시 경주에서 대서소를 운영하던 모로가 히데오(오른쪽)의 주도로 3~4일간 졸속으로 마무리됐다.|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 제공

 

■아마추어가 3~4일만에 후딱 판 금관총

시간을 1921년으로 경주로 되돌려 볼까요.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찰하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 경찰서)의 눈에 3~4명의 아이들이 쌓아놓은 흙속에서 청색 유리옥을 줍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흙의 출처를 물어봤더니 아이들이 가리키는 곳은 봉황대 고분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습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습니다. 미야케는 즉각 경주경찰서장에게 그같은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이후 각종 보고 전문이나 공문서, 발굴보고서에 발견 일자와 발굴 시점 등이 자주 틀리거나 모호하게 나와았습니다. <경주 금관총 발굴 보고서>는 미야케가 24일 아침 9시 유물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야케 본인이 경주경찰서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분명히 25일 오전 9시라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발굴은 대서소 주인이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오른쪽 사진)이 주도했다. 1921년 10월19일 경북도지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보고서는 이미 ① 9월27일 현장을 발견한 뒤 ②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맡겨 ③채굴(발굴)을 시작하고 ④29일까지 모든 채굴을 끝냈다고 적시했다.|국립중앙박물관의 <경주 금관총>(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22집), 2016에서

 

경북지사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유물 발견 전보’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4~5일이나 지난 9월 29일과 30일이었습니다. 29일 전보는 “어제(28일) 고분을 찾아냈고 금속장신구 등 기타의 유물을 찾아냈다”는 것이었고, 30일 전보는 “경주 고분발굴물은 학술상 상당히 참고가 될 것이니 급히 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19일 경북도지사가 조선 총독에게 보낸 저간의 발굴 보고서를 보면 심상치 않은 대목이 나옵니다.

‘9월 27일 오전 10시 현장을 발견한 뒤 발굴에 착수하여 29일에 이르렀습니다. 미야케의 보고를 받은 경찰서장 이와미 히사미쓰(岩見久光)는 일단 경주고적보존회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통지하고 현장에 나와보니 희귀한 귀중품이며 그 수량이 많아 흩어질 우려가 있어서…채굴(발굴)에 착수하고 겨우 29일에 모든 것을 채굴했습니다.”

1921년 9월24일 아침 경주 노서리 박문환씨의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 발견모습을 그린 삽화. 이곳에서 사상 최초로 금관이 확인됐다.|<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1926년)에서

 

그러면서 발굴품 목록을 보고했는데, ‘59개의 굽은 옥이 달린 순금제 보관(금관) 1점과, 39개의 장식이 달린 허리띠 1조, 순금제 반지 12점, 순금제 귀고리 5점, 순금제 띠드리개 1점 등…’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본부, 즉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것이 29일이고, 전문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게 30일인데 실제로 그때는 이미 ‘발굴 끝’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발굴을 담당했다는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누구입니까. 경주고적보존회 촉탁이었다는데, 실은 원래 ‘대서소(행정 및 법률서류를 대신 작성해주는 직업)’ 주인이었답니다. 이 발굴에는 경주보통학교 교장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등도 나섰는데요.

금관총 발굴현장. 아마추어가 발굴을 주도했기 때문에 현장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유물 출토 상황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금관총 보고서에서

 

이렇게 ‘아마추어’끼리 지지고볶은 위험천만한 발굴은 단 3~4일 만에 끝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거죠. 뒤늦게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정식발굴작업이 펼쳐졌는데요. 발굴 후 총독부가 펴낸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1926년) 역시 이런 사실을 적시합니다.

“우연히 발견되어…모로가 히데오(비전문가)의 감독 아래…풍부한 유물이 겨우 1~2평 남짓되는 곳에서 쌓여있는 것을 단시일 내에 캐내야 했기에…출토상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유물이 적지 않았다.”

또 “(주로 경험이 일천한 발굴자인) 모로가와 오사카 등의 기억과 각서에 의존해서 되살렸지만 각자의 소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 이 획기적인 발굴은 이렇게 ‘비전문가의 손에서 뚝딱 해치운’ 졸속 발굴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안게 됩니다.

대서소 주인이었던 모로가 히데오(오른쪽)와 경주보통학교 교장이던 오사카 긴타로(왼쪽)가 금관총 발굴을 주도했다.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 일원이었지만 발굴의 ‘발’자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금관총을 발굴한 것이다.|함순섭 대구박물관장 제공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 발견된 첫 금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수습된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그득했기 때문이었죠.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나온 이 고분에게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당시 보고서는 “금관총 출토유물의 황금(당시 보고서는 2관, 즉 7.5㎏으로 추정)은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 그리스 미케네에서 발견한 금제 보기(寶器)보다는 뒤지겠지만…. 중앙 아시아의 옥수스 출토품들과 견주면 그것을 능가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이 금관총 유물은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또한 전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견 유물의 한 예”라 자랑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보고서 내용 중 ‘일본 영토’라는 표현이 영 거슬리지 않습니까. 일제 강점기라지만 너무도 가슴 아픈 기억이죠.

금관총에서 확인된 금관 이외의 순금제 유물들. 이중 금제 허리띠는 국보 88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마추어에서 ‘경주왕’이 된 모로가

‘아마추어’였던 모로가는 금관총 발굴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장터질 노릇인데요. 금관총 발굴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승승장구합니다. 모로가는 조선총독부가 출토유물들을 서울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우자 ‘경주 출토 유물은 경주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지역여론을 부추겨 금관총 유물의 서울 이송을 무산시킵니다.

시민성금으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의 건립이 추진됐고, 결국 ‘고대의 내선관계(內鮮關係)에 몰두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초대 분관장(주임)이 되었답니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지원아래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는 유지합니다.

모로가 등 일본인들이 경주의 신라 유적을 조사·보존·현창하기 위해 결성했다는 경주고적보존회는 어떤 단체일까요. 1912년 출간된 <조선총독부 월보> 2월호의 ‘경주의 고적에 대하여’를 봅시다.

대구의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소장한 금관총 유물 8점. 금관총 발굴책임자가모로가였기 때문에 모로가가 금관총 유물의 반출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경주는 일본 신공황후가 정벌한 곳이고…일본의 옛 식민지이기 때문에 특히 관심을 끄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249년)조에 등장하는 “신공황후 49년 봄 3월에…신라를 격파하고…가라 7국을 평정했다”는 지긋지긋한 기록을 인용한 겁니다. 일본인들에게 경주는 신라의 천년 고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본의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지원아래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를 만들었던 겁니다.

 

모로가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1910~1916)는 물론 3·5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919~1927, 1929~31) 등 조선 총독의 경주 방문 때 직접 모시면서 친분을 쌓아 지역권력을 극대화시킵니다. 금령총과 식리총 발굴(1924년)도 모로가의 부탁이 주효했답니다. 잇단 경주 발굴로 자신의 영향력을 쌓은 거죠.훗날 도굴문화재 매매혐의로 체포된 모로가를 보도한 신문은 ‘속칭 경주왕(慶州王)의 말로’라는 소제목을 달고 “경주지역을 좌지우지한 권력자”로 묘사했어요.

모로가는 1925년 멀쩡한 첨성대를 두고 “약간 기울었다”면서 해체·복원을 주장했다가 호응을 얻지 못해 무산됐는데요. 보존상태가 양호한 첨성대를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는 있었답니다. 분황사 전탑의 해체(1915년) 과정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사례를 기억해낸 겁니다. 모로가에게는 한국 문화재의 보존은 안중에 없었고, 온통 유물만 보인겁니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 펴낸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보고서>는 금관총 발굴을 두고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되는…”이라고 표현했다.

 

■경주왕에서 도굴품매매업자로 체포

그런 모로가를 긍정평가하는 이들도 있겠죠. 모로가가 이유야 어떻든 경주박물관을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냐고요. 과연 그렇게 긍정 평가할 수 있을까요. 모로가가 금관총을 발굴했잖습니까. 그런데 당시 금관총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반출된 유물 중 금제 장신구 8점이 그 악명높은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의 수중에 넘어갔는데요. 이때 모로가와 금관총 유물의 반출이 모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일본학자들도 있었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요. 결국 모로가는 도굴품 매매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00원형을 받습니다. 불법소장품들은 압수되고 박물관 주임(분관장)직에서도 쫓겨납니다. 압수된 모로가의 유물 중 일부는 경주박물관이 사들이고, 나머지는 일본 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이 구입 인수했습니다. 이 모로가 유물은 1965년 한·일 회담으로 환수된 유물 가운데 포함됐는데요. 반환유물 중에는 ‘황남동’이라고 출토지점까지 표시된 신라유물도 있었답니다. 모로가가 사주한 도굴을 통해 탈취한 유물인거죠.

1933년 문화재 장물 매매혐의로 체포된 모로가를 다룬 기사. “경주를 좌지우지한 속칭 경주왕의 말로”라고 표현했다.

제대로 공부한 학자였고, 명색이 국립박물관장이었다면 절대 자행할 수 없었던 도굴 사주이자 도굴품 밀매업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담이 있는데요. 1927년 12월10일 밤 경주박물관에 진열돼있던 금관총 유물 중 금관을 제외한 금제유물 90여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요. 범인은 6개월 후인 1928년 5월21일 경주경찰서장의 관사 앞에 순금제 반지 등 몇점을 제외한 도난유물들을 도로 갖다놨답니다. 끝내 범인은 잡지못했는데요. 이런 설이 있더라구요. 공교롭게도 도난사건이 일어난 날 모로가는 경주에서 유적조사를 수행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의 결혼식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는데요. 이게 수상하다는 겁니다. 범인이 어떻게 모로가가 박물관을 비운 바로 그날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석연치 않다는거죠. 그래서 금관총 유물을 어찌어찌 해볼 요량으로 모로가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뭐 진실은 알 수 없죠.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를 분석하다가 ‘이사지왕(이斯智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금관총 주인공으로 추정된 ‘이사지왕이 누구일까’하는 논쟁이 벌어졌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의 주인은 소지왕?

이 금관총은 누구의 무덤일까요. 2013년 7월 금관총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었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하면서 ‘이사지왕(이斯智王)’이라는 명문을 확인했는데요. 연구자 중에는 ‘이사지왕’의 ‘이(이)’자는 사전의 의미대로 ‘그(其)’, 혹은 ‘이(此)’의 의미일 수 있으니까,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사지왕’은 ‘소지왕’(재위 479~500)과 동일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구요. 아무튼 1921년 사상 처음으로 금관을 내보낸 금관총 발굴은 이와 같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답니다. 뭐 유쾌한 역사는 아니지만 이 역시도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 아니겠습니까.(이 기사를 쓰는 데 정인성 영남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대구사학> 95집, 2009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보고서(국역)>, 2011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주 금관총(유구편)>, 2016년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도움말과 자료제공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서봉총] 

남정현입력 2020. 9. 7. 13:58
서봉총 재발굴, 북분 직경 36.3m →46.7m
[서울=뉴시스]2017년 경주 서봉총 발굴 모습(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2020.09.0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봉총을 재조사, 당시 밝혀내지 못한 유의미한 사실들을 밝혀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가 조사한 경주 서봉총을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재발굴한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간행했다고 7일 밝혔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은 일제가 밝히지 못한 무덤의 규모와 구조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제는 북분의 직경을 36.3m로 판단했으나 재발굴 결과 46.7m로 밝혀졌다.

 

또 서봉총의 무덤 구조인 돌무지덧널무넘의 돌무지는 금관총과 황남대총처럼 나무기둥으로 만든 비계 틀을 먼저 세우고 쌓아올렸음이 최초로 확인됐다.

경주 서봉총은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중 하나로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졌다. 서봉총은 두 개의 봉분이 맞닿은 형태인 쌍분으로, 먼저 만들어진 북분(北墳)에 남분(南墳)이 나란히 붙어 있다.

북분은 1926년에, 남분은 1929년에 각각 발굴됐다. 무덤 이름은 당시 스웨덴 황태자가 조사에 참여한 것과 봉황 장식 금관이 출토된 것을 기념해 서봉총으로 붙여졌다.

서봉총은 금관을 비롯해 다수의 황금 장신구와 부장품이 출토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제는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지 않았다.

[서울=뉴시스]경주 서봉총 남분 큰항아리 내부 동물 유체발견 모습(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2020.09.07 photo@newsis.com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서봉총 출토품 보고서를 간행하고, 2016부터 2017년까지 서봉총을 재발굴한 후 이번에 그 성과를 담은 유적 보고서를 발간했다.

조사 결과 무덤 둘레돌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도 고스란히 발견됐다. 이번 재발굴을 통해 당시 신라에서는 무덤 주인공을 위해 귀한 음식을 여러 개의 큰항아리에 담아 무덤 둘레돌 주변에 놓고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도 알 게 됐다.

 

이러한 제사는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발굴에서 출토되는 동물 생태물로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을 말함)들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이다.

큰항아리 안에서 종(種)과 부위를 알 수 있는 동물 유체 총 7700점이 확인됐다. 이 중 조개류 1883점, 물고기류 5700점이 대다수이지만, 아주 특이하게 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됐다. 이밖에도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됐다.

[서울=뉴시스]돌고래 동물 유체 좌측 전지골(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2020.09.07 photo@newsis.com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들은 신라 무덤제사의 일면을 밝힐 수 있는 정보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개는 산란기 때 독소가 있어 식용하지 않는 점, 또 많이 확인된 청어와 방어의 회유시기 등을 고려할 때 이들은 대부분 가을철에 포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이 제사가 무덤 축조 직후에 실시된 점을 고려하면, 서봉총의 남분은 가을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향후 서봉총 북분과 남분의 주인공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앞으로 서봉총의 발굴 성과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 등으로 공개하고, 학계와 대중에게 신라 왕족의 무덤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연구를 심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nam_jh@newsis.com

 

 

 

입력 2015. 5. 12. 03:00수정 2015. 5. 12. 04:52

일제때 훼손 '서봉총 금관' 전시회 가보니

신라때와 다른 금실 순도-기법.. X선 형광 분석 통해 한눈에

[동아일보]

신라 금관 중 유일하게 봉황 장식이 달린 서봉총 출토 금관. 이 금관에 들어간 금실 가운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왼쪽)은 &lsquo;늘여 빼기&rsquo; 흔적이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급조된 금실(오른쪽)은 표면이 매끈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인위적으로 훼손되기 이전의 신라 서봉총(瑞鳳塚) 금관은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봉총 금관에 달린 곡옥이 떨어지고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가 엉뚱한 데 붙여진 사실을 최근 발견한 가운데 관련 전시회를 열어 눈길을 끈다.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서봉총은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을 발굴했다는 뜻에서 ‘서전(瑞典·스웨덴)’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보물 제339호로 지정된 서봉총 금관은 봉황 장식을 갖춘 유일한 신라 금관이다.

2일 찾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과학으로 풀어보는 서봉총 금관’ 전시는 금관의 훼손 흔적을 과학적 기법을 동원해 밝혀내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줬다. 1926년 서봉총 출토 직후 찍힌 금관 사진과 실물 비교가 결정적인 단서였지만 본격적인 검증은 ‘X선 형광 분석(XRF)’을 통해 가능했다.

 

전시장 오른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XRF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 급조된 금실이 금관의 어느 부위에 사용됐는지를 사진으로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시대 때 사용된 금실의 순도가 17∼19K로 나중에 만들어진 금실(23∼24K)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사실에 착안한 결과다. 이는 형광 X선을 유물에 쏘아 비파괴 분석으로 성분을 파악할 수 있는 XRF 장비 덕분에 알아낼 수 있었다.

금실의 제조기법 차이도 결정적이었다. 신라시대 금실을 확대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은 금박을 큰 구멍에서 작은 구멍으로 통과해 금실을 뽑아내는 ‘늘여 빼기’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반면 나중에 만들어진 금실의 표면은 사출 방식으로 제작돼 늘인 자국 없이 매끈하다.

일제강점기에 덧붙여진 금실의 위치는 금관의 원형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실제로 이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원형을 추정 복원한 금관 재현품이 전시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복원된 금관은 관테에서 떨어져 나간 4개의 곡옥을 다시 붙이고 양대를 원래 위치에 고정한 모습이었다. 복원된 금관을 머리에 쓰면 꼭대기에 있는 봉황 장식이 정확히 정수리 위에 놓이게 된다.

이 밖에 실제 금관(보물 339호)을 비롯해 금 허리띠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은그릇 등 57점의 서봉총 유물이 함께 전시돼 있다. X선을 이용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금귀고리의 제작기법을 규명한 전시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음 달 21일까지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테마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02-2077-9459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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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동 고분 120-2호]

 

입력 2020-09-04 03:00업데이트 2020-09-04 03:00

실제 키 170cm였을 가능성… 금동관-금귀걸이-금동신발 등
망자 평소 사용 물건 입힌 듯
3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의 금동관과 금귀걸이. 금동관은 평평하게 접힌 채 출토됐는데 피장자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6세기 전반 신라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 일체가 착용된 상태 그대로 출토됐다. 무덤 주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신구를 한 상태로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3일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 120-2호를 추가 정밀 발굴 조사한 결과 금동관 금귀걸이 은팔찌 은허리띠 금동신발 등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머리의 금동관부터 발의 금동신발까지 무덤 주인이 묻혔을 때 착용한 위치 그대로 금은 장신구가 모습을 드러낸 경주 황남동 고분 출토 현장 모습. 문화재청 제공
 
앞서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 공동 ‘신라 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은 올 5월 황남동 고분에서 금동 달개(금관에 붙이는 쇠붙이 장식)를 먼저 발견했다. 추진단은 2018년 5월부터 이 고분을 발굴 조사해왔다.

 
이날 오후 유튜브로 생중계된 황남동 고분 현장 설명회에서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피장자(被葬者)의 머리끝부터 금동신발까지 176cm여서 키는 170cm로 추정된다”며 “(발굴 장신구 중) 큰 칼이 없고 방추차(물레의 실을 꼬는 기구)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여성으로 추정되며 당시 왕족이나 귀족 등 최고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동관은 가장 아래에 관테(관을 쓸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든 띠)가 있고 그 위로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 2개를 덧붙인 모양이다. 문화재청은 “현재까지 경주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 중 가장 화려하다”며 “‘ㅜ’ ‘ㅗ’ 모양으로 뚫린 판이 있는데 세움장식 상단에도 같은 흔적이 일부 확인됐다. 이 판이 관모(冠帽)를 뜻하는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금동관은 평평하게 접어 무덤 주인의 머리가 아닌 얼굴에 덮은 형태로 발굴됐다. 이런 형태의 발굴은 드문 사례로서 망자의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왼손 부분이 완전히 노출되지 않아 추가적으로 조사하면 은반지가 더 출토될 가능성도 있다”며 “천마총 피장자처럼 모든 손가락에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경주 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 주인이 금동신발을 신은 채로 발굴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땅에 구덩이를 판 뒤 나무 덧널을 깔고 돌을 쌓아올리는 고분 양식이다.

이한상 대전대 고고학 교수는 “경주에서 금동관을 머리에 쓴 상태로 발굴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적은 거의 없다. 아마도 망자가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입혀서 관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며 “신라시대 사람들이 망자에게 어떻게 장신구를 착장시켰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 자료를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김민 kimmin@donga.com·정성택 기자

 

 

등록 :2020-09-03 08:58수정 :2020-09-03 16:36

화려한 신라 금동관, 경주 고분서 45년 만에 출토 (hani.co.kr)

 

 

송고시간2020-05-27 15:26

경주 1천500년전 '금동신발' 주인은 "왕족 내지 귀족일 듯"(종합) | 연합뉴스 (yna.co.kr)

경북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과 장신구

(경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경북 경주 대릉원 일원 내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 신발 한 쌍이 출토됐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 신발이 출토된 것은 43년 만이다. 사진은 120-2호분에서 흙 속에 묻힌 상태로 발견된 금동 신발과 금동 장신구(달개). 2020.5.27

 

 

[황남대총]

 

입력 2019. 12. 11. 11:55  

[경향신문]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앵무잔.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이다. 맨 밑 사진은 추정한 형태이다. |김종우의 논문에서

 

“노자표여, 앵무배여, 백년 삼만육천 일에, 하루에 삼백 배씩 기울여야지(로자杓 鸚鵡杯 百年三萬六千日 一日須傾三百杯).”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이 읊은 ‘양양가’이다. 술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이백의 술시에 등장하는 노자표와 앵무배는 뭔가 술그릇과 술잔 이름이기는 한데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65년 조사된 중국 동진(317~420) 시대 왕흥지 부부묘에서 1점, 2015~16년 사이 영주시 신하진 전약묘촌에서 발굴된 서진(265~613)시대 가족묘지에서 1쌍 등 중국에서 단 3점만 발굴됐다. 일본에서는 아예 출토예가 없다.

앵무조개의 내부 구조.|김종우의 논문에서

 

그런데 이백이 읊은 앵무배(잔)가 다른 곳도 아닌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의 황남대총 남분에서 1쌍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또한 이 앵무잔은 고생대 캄브리아기 전기에 출현했고, 그후 멸종한 암모나이트와 유사하고 지금도 6종이 살아남은 앵무조개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김종우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학예연구사는 학술지 <보존과학> 제22집에 게재한 ‘경주 황남대총 출토 신라 앵무새’ 논문에서 “1973~75년 조사된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조개 유물을 분석한 결과 앵무조개 금제와 금동제잔 1쌍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밝혔다. 약 3만점의 유물이 쏟아진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60여점의 조개껍데기가 출토된바 있다. 그러나 금속이 붙은 이 유물들은 워낙 훼손이 심해 별다른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분석된 것이다.

중국 서진과 동진 시대 무덤에서 확인한 앵무잔. 이백의 시에 등장하는 앵무잔은 중국에서만 3점 출토되었을뿐 일본에서는 출토예가 없다. |김종우의 논문에서

 

이중 금동테두리 앵무잔은 전체크기가 110㎜ 정도이며, 손잡이 길이는 32㎜이며 폭은 80㎜ 정도다. 그러나 파손편으로보아 대략 8.5~9.5㎝로 추정할 수 있고, 남아있는 조개 두께는 0.81~0.93㎝이다. 금제 앵무잔의 경우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 힘든 상태이지만, 앵무조개 특징인 껍데기 내부 격벽은 그대로 남았다. 폭은 5.2∼5.4㎝로 짐작됐다. 금동제는 동에 수은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고, 금제는 금과 은 합금으로 금 성분이 약 88%다.

앵무잔 제작에 쓰인 앵무조개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일컬어진다. 앵무조개는 고생대 실루리아기(4억 4370만년전~4억1600만년전)에서 중생대 백악기(1억3500만년전~6500만년전)까지 존재했다가 멸종된 암모나이트와 가까운 종이기 때문이다. 껍질 지름이 20㎝, 껍질의 폭은 9㎝ 정도되며 안쪽으로 감겨있다. 나사모양 층의 밑부분이 앵무새의 부리 같아서 앵무조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주보고 짝짓기하고 이때 수컷의 생식용 촉수가 알을 수정시킨다. 암컷이 수정된 알을 얕은 바다의 바위에 붙여놓으면 이 알들은 8~12달 후 지름 3㎝ 정도의 새끼로 부화한다. 최대 20년 이상 살며, 사모아 제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태평양과 호주 부근의 인도양에서 서식한다. 주로 300~500m 사이에서 나온다.

암모나이트의 체관과 격벽. 앵무조개와 흡사하다. |김종우의 논문에서

 

이 앵무조개로 만든 앵무잔 관련자료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문헌에 ‘앵무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임금이 종친이나 신하에게 하사하는 귀중한 물품 중 하나로 알려져왔다. 예컨대 1480년(성종 11년) 1월24일 제주출신의 첨지중추부사 고태필이 “제주도에서 진주배와 앵무배를 바치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않다”고 아뢰니 성종이 “폐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된다면 마땅히 감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성종실록>에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유물이 발견된 예는 거의 없다. 김종우 학예사는 “금동제 테두리 앵무잔의 경우 중국 서진 및 동진시대 앵무잔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 수입한 완제품일 수 있고, 신라가 앵무조개를 수입해 제작한 순수 신라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남대총 앵무잔이 금동제 테투리와 함께 크기와 형태가 다른 금제 테두리의 두가지로 제작됐고 표면 마감처리를 옻칠 추정 유기물을 사용한 것으로 미뤄 순수 신라산일 가능성이 높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송고시간2018-11-07 06:00

이은석ㆍ정일, '마랑' 실체, 43년만에 풀어

"4세기 무렵 신라에 바둑 전래…신라 해양교류 가능성 커"

황남대총에서 나온 마랑명 칠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한 칠기에 적힌 명문인 '마랑'(馬朗)의 실체를 알려주는 획기적 연구 결과가 고분 발굴 43년 만에 나왔다.

이 칠기는 중국에서 제작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칠기 바닥에 새긴 글자가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아 학계에서 오랫동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과 정일 목포대 중국언어와문화학과 교수는 "마랑은 3∼4세기대 중국 서진(西晉·266∼316) 시기에 활약한 바둑 최고수로 바둑 성인인 '기성'(棋聖)이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이라고 7일 말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이 발간하는 학술지 '중앙고고연구'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두 사람은 "5세기 초중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고분에서 중국 기성 이름을 적은 칠기가 나온 점으로 미뤄 서진 바둑문화가 4세기 무렵 신라왕조에 전해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강조했다.

마랑명 칠기 출토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마랑에 대한 단서는 중국 사상가 갈홍(葛洪·284∼363)이 저술한 '포박자'(抱朴子)에 있는 문장인 "마랑은 자가 수명(綏明)이며, 바둑 기술에서 적수가 없으니 기성(棋聖)이라는 칭호가 있다"(馬朗,字綏明,圍棋藝無敵,有棋聖之稱)에서 잡혔다.

정 교수는 "마수명(馬綏明), 즉 마랑이 기성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된다"며 송나라 학자인 정초(鄭樵·1104∼1162)가 펴낸 '통지'(通志)에 나오는 "원강(元康) 연간(291∼299)에 조왕 (사마)륜의 사인(舍人·개인 저택 관리인)인 마랑이 '위기세'(圍棋勢) 29권을 편찬했다"는 대목을 주목했다.

그는 "조왕 사마륜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301년에 죽었고, 그를 따른 많은 사람도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며 "마랑도 이때 반역에 연루돼 주살되고 바둑 전문서 위기세도 소실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와 이 과장은 "마랑은 서진 때 실존했고 바둑 서적 29권을 기술할 만큼 바둑 실력이 뛰어났으며, 마랑명 칠기는 마랑이 전성기였던 290년대에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황남대총 남분 주곽(主槨·으뜸덧널) 청동시루에서는 마랑명 칠기와 크기가 동일하고 똑같이 화염무늬가 있는 또 다른 칠기 한 점이 나왔는데, 이 칠기에는 글자가 없었다. 두 칠기는 지름 9㎝, 높이 4㎝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이 과장은 "두 칠기는 바둑돌을 넣는 통이었다"며 "기성인 마랑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마랑명 칠기를 쓰고, 상대는 이름이 없는 칠기에 바둑돌을 담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바둑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소형 자갈 243개는 마랑명 칠기가 바둑돌을 담는 통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굽다리접시에 담긴 채로 출토된 자갈은 직경 1∼2㎝, 두께 0.3∼0.7㎝이며 색상은 검은색, 회색, 흰색이다.

이 과장은 "자갈은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칠했을 확률이 높다"며 "고분 내 환경적 요인으로 칠이 벗겨졌거나 발굴 이후 세척 과정에서 칠이 지워졌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이 중국과 바둑으로 교류했다면 마랑이라는 명문이 있는 최고급 칠기는 신라 상류층이 소장하고 싶어 했을 물건"이라며 "신라에도 중국 칠제품이 유입돼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과장은 마랑의 실체가 기성으로 확인됨에 따라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학계에서 신라가 백제만큼 중국과 통교하지 않았고, 주로 북방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봤다"며 "오키나와산 조개와 마랑명 칠기를 통해 신라가 남쪽 해로로도 다른 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음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피장자가 여자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바둑돌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바둑을 남자들의 전유물로 볼 수 있고, 그와 관련된 유물이 무덤에도 부장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과장은 마랑의 실체 규명으로도 황남대총 남분 피장자가 402년 사망한 내물왕인지, 458년 세상을 떠난 눌지왕인지 알기는 어렵다면서도 "마랑은 신라문화와 서진문화를 연결하는 매개체였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마랑 명문 실측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psh59@yna.co.kr

 

[금령총]

 

기자입력 2023. 7. 24. 06:01수정 2023. 7. 24. 11:37
 

"5살 왕자는 낙마사, 10살 공주는 병사"…금령총·쪽샘 44호 주인공의 사인[이기환의 Hi-story]

얼마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쪽샘 44호분의 10년 발굴성과를 정리한 시사회를 열었는데요. 2014년 시작된 발굴은 황남대총 조사(1973~75) 이후 40여년만에 진행된 장기프로젝트였죠. 신라의

v.daum.net

 

 

 

입력 : 2019.09.30 18:28 수정 : 2019.09.30 18:37

경주 금령총서 최대규모 56㎝ '혀 내민 말 모양' 토기 발굴 - 경향신문 (khan.co.kr)

94년만에 재발굴중인 금령총에서 확인된 말모양 토기. 크기가 56㎝에 이를 정도로 그동안 발굴된 말모양 토기중 압도적 크기를 자랑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혀를 낼름 표현한 말모양 토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경주 금령총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압도적인 크기(56㎝)의 말모양 토기가 발굴됐다. 그런데 이 말모양 토기의 모습은 혀를 쑥 내밀고 있었다.

지난해부터 금령총(5세기말~6세기초)을 발굴해온 국립경주박물관은 올해 4월부터 진행된 2차발굴에서 무덤 둘레에 쌓는 돌(호석)의 바깥쪽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큰 56㎝ 크기의 말모양 토기 1점 등 30여개체의 제사용 토기들을 수습했다고 30일 밝혔다. 제사용 토기 안팎에는 말과 소, 기타 포유류 등의 동물뼈와 굴, 고동, 조개류 등 각종 패각류, 뚜껑접시, 토제방울, 유리구슬, 쇠스랑 등이 확인됐다.

발굴된 말모양토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모습이 이채롭다. 왜 혀를 내민 모습으로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말모양 토기는 무덤의 호석 바깥쪽 깨진 항아리 위에서 발견됐다. 항아리 안에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아리 위에 얹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머리와 앞다리 쪽만 발견됐으며, 등과 배 부분은 깔끔하게 절단된 듯한 흔적이 있었다. 말은 입을 벌리고 혀를 살짝 내민 모습이며, 얼굴·목·발굽 등 각 부분을 정밀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신체 비율도 실제 말과 흡사한 편이다.

이 말모양 토기가 확인된 금령총에서는 1924년 일제강점기 발굴에서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 2점이 확인된바 있다. 주인상(높이 26.8㎝)과 하인상(높이 23.4cm)으로 구성된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무덤 안에서 확인됐다. 이번에 발굴된 말모양 토기와는 제작기법이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부장 양상은 사뭇 다르다. 1924년 발굴된 기마인물형 토기는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됐는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해 저 세상으로 인도해주는 주술적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말모양토기. 머리와 앞다리 쪽만 확인됐는데 나머지 부분은 말끔하게 절단됐다. 제사용으로 쓰인 뒤 벽사 의미로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이번에 출토된 말모양 토기의 크기는 기마인물형 토기의 2배가 넘는다. 또 무덤 밖에서 다른 제사용 유물과 함께 깔끔하게 절단된 채 머리와 앞다리 쪽만 확인됐다는 것도 다르다. 신광철 학예사는 “제의 행위로서 제사에 쓰인 제기나 제수용품들을 의도적으로 깨뜨려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이한상 대전대교수(역사학과)는 “제수용품 등을 깨뜨리는 행위는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벽사의 의미”라고 말했다. 이한상 교수는 “크기(56㎝)로 보아 일본 고훈시대(古墳·3~8세기)에 유행한 하니와(埴輪·흙으로 빚어 만든 토기의 일종)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이번 발굴품이 입을 앙 다물었지만 다소 웃는 상인 기마인물형 토기와 달리 입을 벌리고 혀를 쑥 내밀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신광철 학예사는 “왜 혀를 내민 표정의 말모양 토기를 만들었는지는 아직 파악할 수 없다”고 전했다. 발굴성과를 정리하자면 금령총 조성자는 무덤 안에는 기마인물형토기를, 무덤 밖에는 깨뜨린 말모양 토기를 차례로 부장함으로써 무덤 주인공의 영생을 빌었음을 알 수 있다. 신광철 학예사는 “추가조사에서 말모양 토기 뒷부분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94년만에 발굴이 재개된 금령총.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 등이 발굴했지만 당시에는 유물 수습에만 초점을 맞춰 이번에 재발굴이 결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금령총은 지난해부터 재발굴하기 시작했다.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조사해서 기마인물형 토기와 금관(보물 제338호), 금제 허리띠 등을 발굴했지만 당시에는 유물 수습에만 초점을 맞췄다. 이에 국립경주박물관은 지난해 9월 고분 규모와 축조 방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94년 만에 다시 발굴했다.

박물관측은 지난 4월 시작한 제2차 금령총 발굴에서 호석 외부 유물을 수습하는 한편 무덤 조성 방법과 규모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금령총 직경은 당초 알려진 것보다 8m가량 더 긴 28m 내외로 확인됐다. 또 지하식이 아닌 지상식 적석목곽묘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써 지금까지 신라 금관이 나온 적석목곽묘는 모두 지상식 무덤이라는 사실이 규명됐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금령총과 맞물린 또 다른 고분 4기도 확인됐다. 봉토와 호석을 갖춘 지름이 약 5m인 옹관묘를 비롯해 적석목곽묘 2기, 소형 분묘 1기가 드러났다. 또 금령총 고분 주변 문화층 양상을 파악해보니 5∼6세기 신라 문화층이 현재 지면보다 2m 아래에 있었다. 신광철 학예사는 “이것은 식리총과 노동동 고분군 조사와 복원 과정에서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은희입력 2018. 9. 5. 18:02

일제가 파헤친 경주 금령총, 94년 만에 재발굴 (daum.net)

6일 오후 개토제 개최
【경주=뉴시스】 이은희 기자 = 경주 대릉원 일원의 금령총. 2018.09.05.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photo@newsis.com

【경주=뉴시스】 이은희 기자 = 국립경주박물관이 오는 6일 오후 4시 경주 대릉원 일원의 금령총에서 발굴조사를 위한 개토제를 개최한다.

 

5일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특이한 금제방울이 출토돼 이름이 붙여진 금령총의 이번 발굴조사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수집 자료 정리 사업의 일환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대형고분의 미진한 조사 내용을 보완하고, 전체 유적 현황을 파악해 기존에 정리되지 않은 자료와 추가 발굴 및 일제강점기 보고 자료를 포함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고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앞서 국립경주박물관은 지난 4~6월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와 매장문화재분과의 심의를 거쳐 발굴허가를 받았다.

현장조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디지털고고과학팀과 지하물리탐사 및 자력탐사를 진행했으며,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열어 의견을 수렴했다.

금령총은 인접한 식리총과 함께 1924년에 조사됐다. 당시 금관(보물 제338호), 금제허리띠, 감옥팔찌(嵌玉釧) 등의 장신구를 비롯해 기마인물형토기(국보 제91호), 채화칠기, 유리용기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경주=뉴시스】 이은희 기자 =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현장. 2018.09.05.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photo@newsis.com

 

당시 조사 내용은 1930~1931년에 보고서로 발간됐으나, 고분 축조과정 및 유물의 해석, 의례 행위와 관련한 종합적이면서도 정밀한 조사보다는 훼손된 봉토와 적석부를 걷어내고 매장주체부만 노출한 뒤 다량의 부장품을 수습하는 방식으로 단 22일 만에 조사가 완료됐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2015~2017년 진행한 경주 금관총과 서봉총의 재발굴 조사에서 봉분의 정확한 규모와 축조 방식, 봉분 주변의 부가시설 등이 확인된 바 있다.

특히 금관총에서는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최초의 왕호(王號)가 신라 고분 부장품에서 확인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 금령총 재발굴 조사에서도 이 같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leh@newsis.com

 

 

[천마총]

 

송고시간2018-07-27 11:18

1천500년전 신라 황금 무덤이 눈앞에 펼쳐지다

박상현 기자기자 페이지

경주 천마총, 고증·보수 거쳐 42년만에 재개관

경주 천마총 내부.

 

(경주=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어두컴컴한 무덤 내부에 높이 2.3m인 거대한 목곽(木槨) 내부만 환하다. 목곽 위로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무지가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경건한 마음을 품고 목곽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엄청난 양의 화려한 황금 부장품이 눈길을 붙잡는다. 1천500년 전 무렵 조성된 신라 왕릉급 무덤은 압도적이고도 장엄하다.

목관 안에는 금관, 목걸이, 귀걸이, 팔찌, 큰칼이 빽빽하게 놓였고, 바깥에는 금동신발 한 짝이 있다.

 

목관 옆 부장궤는 겹겹이 쌓은 껴묻거리로 가득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와 대나무에 금동 조각판을 입힌 또 다른 천마도가 보이고, 부장궤 덮개 위에는 금제 관식(冠飾) 두 점과 귀걸이가 있다.

지난해 8월 시작한 보수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한 경주 천마총(天馬塚) 전시관이 27일 다시 문을 열었다. 1976년 개관 당시와는 달리 철저한 고증 작업을 벌이고 1973년 발굴조사에 참가한 조사단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경주 천마총. 목곽 위로 거대한 돌무지가 보인다.

 

천마총은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초반에 축조한 신라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 무덤 주인공은 소지왕(재위 479∼500), 지증왕(재위 500∼514) 혹은 그 시대 왕에 준하는 권력자로 추정되며, 봉분 지름은 47m, 높이는 12.7m다.

인근 황남대총 조사에 앞서 이를 위한 경험 축적용으로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훗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10건을 포함해 유물 1만1천500여 점이 쏟아져 나오면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경주시는 40여 년 만에 천마총 내부 시설과 전시물을 교체하면서 발굴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목곽은 동서 길이 6.6m, 남북 길이 4.2m, 높이 2.3m로 다시 만들고, 목곽 천장 재질은 유리에서 나무로 바꿨다. 목곽과 입구 사이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는 커다란 벽을 설치했다.

또 관람객을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 1.5m가량 뒤로 밀었던 목곽 위치도 본래 자리에 가깝게 재조정하고, 목곽 위를 덮은 돌무지는 반구형에서 초가지붕을 닮은 사다리꼴로 변경했다.

박세웅 감리는 "목곽 바닥에 깐 돌과 돌무지는 실제 천마총에서 나온 유물"이라며 "새로워진 천마총에 들르면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마총 전시물을 살펴보는 박세웅 감리.

 

천마총에 얽힌 역사적 사실은 목곽 뒤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1974년 발간한 천마총 발굴보고서 실물을 비롯해 야광조개 국자, 곱은옥, 푸른색이 감도는 유리잔 복제품이 전시됐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양한 부장품이 제작된 지역을 표시한 세계지도,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금제 허리띠·금동신발·봉황 무늬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큰칼)·유리구슬과 금구슬로 만든 목걸이 복제품을 한데 모아놓은 전시물도 있다.

전시 설명은 한국어와 영어를 비롯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도 작성했다.

김홍규 경주시 문화재과 주무관은 "천마총 발굴은 우리 고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라며 "신라의 웅대한 고분문화와 찬란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진에 대비해 금제 유물 복제품 일괄을 전시한 진열장 바닥에는 진도 6.8까지 버티는 면진 받침대를 설치했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입력2017-05-27 19:10:29 수정 2017.05.27 19:10:29 전종선 기자
 

역사기행 그곳’ 왕 중의 왕 ‘마립간’, 금관·천마도의 주인…그 실체는? | 서울경제 (sedaily.com)

 

 



27일 방송되는 KBS1 ‘역사기행 그곳’에서는 ‘경주 - 1부 왕 중의 왕, 마립간과의 만남’ 편이 전파를 탄다.

■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경주 대릉원에 자리한 천마총. 천 년 세월에도 썩지 않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발견된 이 무덤의 주인공은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금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학자들은 이 무덤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에 이어 신라의 최고 통치자였던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징기스칸의 ‘칸(干)’처럼 화려한 황금관과 함께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마립간. 최태성과 이윤석은 1970년대 발굴 결과 금관을 비롯한 5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된 황남대총에서 5세기 마립간의 압도적 위용을 경험하는데...

■ 최초 공개, 마립간(麻立干)의 상징!

5세기 신라의 왕권이 강해졌음을 의미하는 왕호 마립간. 마립간의 대단한 권위를 드러내는 대표 유물은 천마도와 비단벌레장식말안장가리개다. 천마도는 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에 다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으로 화려한 장식그림이다.



비단벌레장식말안장가리개는 수 만 마리의 비단벌레 날개와 금동판으로 장식해 만든 화려한 장식마구다. 최태성 이윤석은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 허가를 받아 수장고에 보관중인 천마도와 비단벌레장식말안장가리개 실물을 직접 확인하고 벅찬 감동을 느낀다

■ 서서히 드러나는 천 년 신라의 경주의 위용

천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월성발굴현장에서는 월성, 황룡사, 대릉원 등 8개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옛 건물을 복원중이다. 최태성 이윤석 두 사람은 제2의 천마총으로 불리며 현재 발굴 중인 44호분 발굴 현장에서 신라 고유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직접 확인한다.

또한 월성의 방어시설인 해자 유적에서 채취된 진흙을 직접 채로 걸러 천 년 전의 복숭아 씨, 참외 씨, 멧돼지 턱뼈 등을 확인하며 당시 신라인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접한다. 그리고 조금씩 신라의 통치자 마립간의 실체에 다가서는데...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OG34RCB2J

 

 

 

김태식입력 2016. 10. 24. 16:43

“1973년 7월인가 금관이 나왔을 때 신문에 나니깐 청와대에서 가져오라 그러더라고. 김정기 박사한테 가져갈 수 있느냐 물으니, 필요한 조사와 기록을 다 마친 뒤에 들어내어 가져갈 수 있다고 해요. 저녁에 출발했어요. 자동차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여서 차를 두 대 가져갔어요. 금관 실은 차 한 대, 호송차 한 대. 금관 실은 차가 대구쯤 오다 고장 났어요. 뒤에 오던 차에 (옮겨) 싣고 청와대에 들어가니 (오전) 8시가 안 되었어. 경호실 사람들도 출근하지 않았어. 들어가도 괜찮다고 해서 안에 들어가니 대통령 혼자 앉아 계셔요. 집무실에…. 금관을 내어놓고 설명했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중 문화재 부문 조사 정비를 전담한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정재훈 소장의 1973년 천마총 발굴 회고담이다. 천마총에서 그 희귀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다는데, 경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당시 조사보조원으로 참가한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의 회고도 들어볼 만하다.

“금관이 나왔잖아? 그 소식이 보도된 직후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람이 와서 그러더라고. ‘빨리 파라, 갖고 가게.’ 그래서 현장에서 난리가 난 거야. 이제 막 노출됐는데 실측이나 사진도 안 찍고 어떻게 보내? (발굴단장) 김정기 박사가 박 대통령한테 많은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천마총 발굴은 정말로 발굴 원론대로 하려고 했어. 그래서 청와대 가는 것보다 조사가 우선이라고 한 거야.”

ⓒ연합뉴스 천마도 발굴 현장 모습. 문화재위원회는 제155호분의 이름을 천마총으로 바꾸었다.

 

이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그림이 대충 그려진다. 1973년 7월 어느 날, 천마총에서 금관이 출토된다. 발굴단 측은 당일 낮에 금관에 대한 실측, 사진 촬영 등 조사를 완료했다. 그 덕분에 금관은 그날 저녁 차량에 실려 청와대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정재훈 소장이 다음 날 아침 금관을 청와대로 갖고 들어갔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금관은 서울 어디선가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다. 금관에 대한 ‘비공식’이자 최초인 발굴 설명회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렸다. 정 소장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대통령 집무실에서 박정희를 만나) 지금까지 나온 금관의 여러 가지 특성이라든가, 이런 유형의 금관이 고고학적으로는 어느 지역에서 출토되었는지 등, 쿠르간 묘 출토품, 유라시아 지역과 러시아 고고학까지, 비슷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신라의 금관처럼 대륜(臺輪)과 관식(冠飾)이 있는 금관은 중국과 로마, 그 외 다른 데도 없는 거라고, 그렇게 설명을 해드리니 대통령이 김종필 국무총리, 근혜, 근령, 김정렴 비서실장 등을 오라 했어. 그날 다. 아침에 대통령이 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한 15분 사이에 다 오더라고.”

ⓒ연합뉴스 천마총 내부의 유물을 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주의할 것은, 금관을 청와대로 가져가 대통령에게 설명한 사람이 발굴단장 김정기 박사가 아니라 정재훈 소장이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문화재관리국장을 맡게 되는 정재훈 소장은 김정기 박사와 더불어 경주 개발 문화재 부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인물이다. 행정관료 출신인 정 소장은 ‘한국 전통 조경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놀랍게도 독학으로 조경학을 공부해서 그 경지에 이르렀다. 박학다식의 대명사인 그는 문화재 분야에도 통달했다. 정재훈 생전에 자주 만났으며 그의 성정을 조금은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가 추정하건대, 정재훈은 금관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자료를 섭렵한 뒤에 박정희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만큼 정열적이었다.

ⓒ연합뉴스 정재훈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위).

 

신라사를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천마총은 당초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한 일종의 교보재(중심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실험용 작업)로 선택된 곳이었다. 천마총 동쪽에 굼벵이처럼 길게 드러누운 황남대총은 한반도 최대의 고분이다. 황남대총의 성공적 발굴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천마총에서 쌓으려 했다. 문화재관리국이 천마총 발굴을 완료한 이듬해에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 가운데 김정기 박사가 쓴 글의 일부를 살펴보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르는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1기의 고분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기초로 이 지구의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한 표형분(瓢形墳:표주박 모양 무덤)인 제98호분을 발굴한 후 복원하여 그 내부를 내외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시책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제98호분은 규모도 거대하지만 또 지금까지 이만한 완형분(完形墳)을 발굴한 예가 없어서 처음부터 제98호분을 발굴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먼저 좀 작은 고분을 발굴하여 그 내용과 결과를 알고 경험도 쌓아 제98호분의 발굴에 착수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어 1973년 3월19일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제98호분과는 서로 동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며 같은 지구의 고분군 중 최북단에 위치한 제155호분이 선정되었다.”

여기서 제98호분은 황남대총, 제155호분은 천마총을 말한다. 경주 분지에 산포한 신라 시대 고분들(모두 155기)에 일련번호(제98호분 등)를 붙인 것은 조선총독부다. 박정희 정권의 경주 개발 계획 당시에도 같은 일련번호로 불렸다. 제155호분에 천마총이란 근사한 이름이 붙은 것은, 1973년 4월의 위령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까지 8개월간의 발굴조사가 완료된 이후다. 출토 유물 가운데 천마도(天馬圖)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면서, 1974년 9월 문화재위원회 의결을 거쳐 제155호분이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현재 천마총은 신라 시대 적석목곽분 가운데 내부가 공개된 유일한 유적이다.

문화재관리국이 발굴 완료 1년 만에(1974년)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를 발간한 것 역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무려 469쪽의 특대형 호화판 보고서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발굴조사 보고서가 이토록 빨리 나온 적이 없다.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유적이 더 많았을 정도다. 이는 아마 천마총에 대한 관심이 워낙 뜨거웠기 때문일 터이다. 정재훈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천마총은, 그 발굴 보고서가 신속하게 나옴으로써 국내외 학계에서 인용되기 시작했으며, 신라사를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ㆍ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입력 2014. 4. 11. 08:40수정 2014. 4. 11. 14:50 

 

[한겨레] [문화'랑'] '보존 과학'이 밝혀낸 천마도의 비밀

 

"나와서는 안 될 게 나왔어!" 주저앉을 뻔한 발굴단장

국민문화재인 신라 '천마도'(국보 207호)의 주인공은 기린인가, 천마인가. 신라미술사를 휘감았던 논란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발굴 40년 만에 과학의 힘으로 깨어난 천마들의 비상을 지금 경주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와서는 안 될 게 나왔어!"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그림 '천마도'(국보 207호)가 출토될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단장은 김정기(84·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박사였다. 금관이 나와도 눈 하나 꿈쩍 않을 만큼 냉철한 학자였지만, 영기에 휩싸여 비상하는 말을 그린 최초의 신라 회화를 무덤 바닥에서 목격하는 순간 발에서 힘이 쑥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고 한다. 발굴팀원이었던 최병현(66) 숭실대 명예교수는 "과묵한 김 박사가 평소와 달리 고함과 탄성을 지르며 천마도를 수습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신라회화사의 등장을 알리는 대발굴이었건만, 정작 천마도는 당시 온전한 실체를 내보일 수 없었다. 문화재보존과학이 걸음마 수준이던 시대적 한계 탓이었다.

 

무늬 희미한 천마총 그림 2종증기와 약품으로 얼룩 녹이고현미경 관찰하며 표면 긁어내지난해말 마침내 실체 밝혀냈다재질·무늬·기법, 고구려와 흡사완성품 가져왔나, 재료만 들여왔나그림 제작지 둘러싼 논쟁 벌어질듯

 

40년 만에 암흑 뚫고 드러난 천마

천마도는 말 탄 이의 옷에 흙이 튀지 않게 안장 양쪽에 늘어뜨린 말다래(장니)판에 그려졌다. 신라 고분의 특징인 무덤 속 돌무지에 짓눌린 채 부장품 나무상자(수장궤) 위쪽에서 출토된 말다래판은 추정품을 포함해 모두 세 벌. 맨 위에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올린 금동판 말다래 한 벌이, 그 아래에 자작나무 껍질인 백화수피 말다래판 한 벌이 포개어져 있었다. 궤 다른 쪽에는 다 썩어 없어진 칠기제 말다래 추정 조각들이 흩어진 상태였다. 천신만고 끝에 발굴팀은 백화수피 말다래판 한쪽에서 국보가 된 천마도를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말다래에는 무엇이 그려졌는지 밝혀낼 길이 막연했다. 푸석푸석한 대나무 말다래판에 무심코 유물을 굳히는 경화용제를 손 분무기로 뿌리고 이발소 드라이기로 급히 말린 게 탈이었다. 약물이 유기물과 엉키면서 시커먼 얼룩이 생겨 아래층 다른 말다래판 문양들까지 덮어버렸다. 대나무 말다래판에 삐죽한 돌기 같은 무늬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발굴팀은 이를 태양 빛살을 묘사한 '일광문'으로 추정된다고 보고서에 썼다.

40년 뒤인 2013년 연말. 천마총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경주박물관 보존과학 전문가들은 첨단 감식기법을 동원해 말다래판들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증기와 약품으로 얼룩을 녹이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며 메스로 표면을 긁어냈다. 칠흑 같은 대나무 말다래판 위에 그림이 나타났다. 옛 보고서에 일광문으로 썼던 문양은 천마의 갈기였고, 빛나는 말 머리가 뒤이어 드러났다. 대나무판 위에 마직물, 금동뚫음무늬판을 겹쳐 올린 뒤 점열·마름모·비늘 무늬의 천마상 금동판을 못박은 정교한 걸작이었다. 국보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와 한짝을 이룬 다른 쪽 백화수피 말다래판에서도 비슷한 천마도가 드러났다. 지난달 개막한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전 '천마, 다시 날다'에는 이렇게 복원한 천마도 3종 세트가 나왔다. 신라회화의 전례없는 잔치다. 어둠의 세월을 딛고 과학의 힘으로 깨어난 천마도 덕분에 신라미술사는 새 약동을 시작했다.

 

천마냐 기린이냐 입씨름은 끝났다

새 천마도 발견은 유령처럼 학계를 떠돌던 그림 주인공 논란, 곧 천마냐 기린이냐를 둘러싼 입씨름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달 천마총 말다래 연구보고서를 낼 예정인 경주박물관 쪽은 금동판 천마도와 국보 천마도를 비교 분석한 결과 천마라고 결론지었다. 금동판을 오리고 두들겨 만든 동물상은 분명한 말 형상이고, 말등에 기 꽂이인 듯한 말갖춤 장식 흔적이 보이는 게 근거다. 금동판 천마도는 붓질과 달리 조형적 표현에 제약이 있어 이미지를 단순명확하게 뽑아낼 수밖에 없다. 국보 천마도의 동물종도 발굽이 하나인 기제류로 말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왔다. 금동판 천마도를 살펴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회화사)는 "국보 천마도와 모양은 물론, 마름모꼴 누빔 흔적까지 본떠 만든 게 보인다. 천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린설은 90년대 학계 일부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과 벽화 등을 천마도와 비교해 상상의 동물 기린이 아니냐는 해석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2000년 연구자 이재중씨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천마도의 머리 위 솟은 부위를 기린의 뿔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뜨거워졌다. 2009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천마도를 적외선 촬영한 결과 머리 쪽에서 뿔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안휘준 교수 등 상당수 학자들도 동조했고, 기린설은 통설로 굳어져왔다. 이번 새 천마도 발견으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특별전을 준비한 장용준 학예연구관은 "학계는 다른 유적의 기린, 천마상과 비교해왔으나, 같은 천마총 유적 안에서 말이 분명한 천마도상이 다시 나온 만큼 논란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기린의 특징이라는 머리 위 뿔이나 영기로 비친 부분은 갈기를 묶은 매듭으로, 북방 민족의 말 그림에서도 보인다는 설명이다. 신라미술사를 연구해온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입속 영기 등 기린상으로 추정할 만한 부분도 있지만, 상서로운 동물의 특징을 반영한 천마 그림의 한 요소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구려 그림인가, 신라 그림인가

경주박물관은 국보 천마도의 화폭인 말다래판 재질도 처음 분석해 자작나무 껍질임을 확인했다. 원래 자작나무는 한반도 북부에서만 서식한다. 그림 재료를 북방의 고구려 등에서 들여왔다는 말이 된다. 더욱이 국보 천마도의 말 모양과 배경 무늬 등은 고구려 미술의 역동적 특징이 역력하다. 말의 앞뒷발이 전면 후면으로 뻗어 날아가는 듯 묘사되고, 배경인 덩굴·연봉 무늬들과 그 안에서 Y자형으로 틀어지는 곡선 등이 고구려 벽화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천마총보다 앞선 5세기 초 고구려 덕흥리 벽화에 '천마지상'(天馬之像) 명문 붙은 말이 그려져, 이 상을 신라 천마도 원형으로 짐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시에 함께 공개된 동그란 채화판에 칸칸이 그려진 말 탄 무사상이나 새 모양 서수 등이 고구려 무사상, 사신도 등과 비슷한 것도 고구려 영향을 보여준다.

학계 견해는 천마도의 고구려 직수입설, 재료만 수입해 신라 장인이나 고구려 장인이 그렸다는 설 등으로 엇갈린다. 정병모 교수는 "천마총 출토 금관에서 보이듯 신라 공예 수준도 탁월했다. 신라인들이 고구려 기법을 수용해 천마도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박물관 쪽은 전시를 계기로 천마총 출토 그림들의 실측도 등 고신라 회화 자료들을 대거 확보했다. 고구려 미술을 받아들여 통일신라 황금기를 닦은 고신라 미술의 '블랙박스'가 열렸다. 앞으로 그 안에서 어떤 보화들이 쏟아져 나올까.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송고시간2014-03-03 17:07  

<천마총과 천마도, 자작나무와 말다래> | 연합뉴스 (yna.co.kr)

제작 비밀 상당 부분 해명, 40~50년생 자작나무 사용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주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은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일환으로 황남대총이라는 초대형 고분 발굴에 앞서 그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1973년 4월6일에 발굴 첫 삽을 떴다. 이후 약 8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4일에 조사가 완료됐다. 그 결과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만 1만1천526점에 달한 이른바 '대박' 발굴을 기록했다.

봉분은 지름 약 47m에 높이 12.7m이며 도굴 흔적이 전연 없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무덤 축조 연대는 5세기 후반 이래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출토품 양상이나 무덤 규모로 보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이다. 따라서 이를 왕릉으로 본다면 이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재위 479~499) 또는 지증왕(재위 500~513)일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 신라 특유의 화려한 금관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이미 식민강점기에 발굴한 금관총이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선전한 까닭에 발굴 이전에는 155호분이라는 숫자로만 일컫던 이 무덤은 금관을 제외하고는 천마도(天馬圖)라는 회화 작품이 유명하다 해서 이에서 이름을 따서 공식으로 천마총이라 일컫게 된다.

 

천마도는 실은 인간이 말을 타기 위해 장식하는 각종 도구인 마구(馬具) 중에서도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다래란 한자어로는 장니(障泥)라고 하는 데서 짐작하듯이 말이 달릴 때 발굽에서 진흙(泥)이 사람에게 튀어오르는 것을 방지(障)하고자 안장 아래, 다시 말해 말의 배 아래로 늘어뜨려 진흙 튀김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말다래는 이뿐만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의 안전사고를 예방하는가 하면 발걸이인 등자로부터 말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나아가 말다래는 장식성, 혹은 선전성이 있어 중요한 행사나 행렬 같은 데서는 장엄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데 대체로 4~6세기 무렵 신라인, 특히 왕을 비롯한 특권층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적에 말다래를 포함하는 마구류를 껴묻거리로 함께 묻어주기도 했다.

천마총에서는 말 안장 3점이 나왔다. 안장이 3점이라는 뜻은 관련 마구류를 온전하게 갖춘다고 가정할 때 말다래는 총 6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다래는 말의 배 양쪽에 한 쌍을 달기 때문이다. 실제 천마총을 발굴한 조사단에서는 이곳에서 총 3세트 6점의 말다래가 출토됐다고 보고했다.

천마총 발굴보고서를 보면 나중에 국보 207호로 지정되는 천마도가 출현한 시점을 1873년 8월22일로 적고 있다. 이 날짜 발굴일지를 보면 "맑음. 백화수피제 천마문 장니 발견"이라고 적었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는 세트여야 하니, 실제 세트로 확인됐다. 두 말다래는 각각 아래위로 포갠 상태로 껴묻거리를 묻어두는 나무 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지금은 흔히 두 말다래를 각각 상하로 구분한다. 위에 있던 것을 상(上), 아래 있던 것을 하(下)로 구분하는 것이다.

국보로 지정되고, 각종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실리는 천마도는 두 말다래 중에서도 아래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위쪽 말다래에도 천마도가 확인됐음에도 왜 유독 아래쪽 말다래 천마도만 유별나게 잦은 소개가 이뤄졌을까?

당시 발굴단인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당연히 아래쪽에 눌려 있던 말다래가 보존상태가 훨씬 좋았고, 천마도 또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두 말다래는 주된 재료가 모두 백화수피(白樺樹皮)다. 백화수피는 특정한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글자 그대로는 껍질이 흰색 계통으로 화(樺) 계통에 속하는 나무껍질을 의미한다. 한데 백화를 흔히 자작나무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발굴단에서는 이 백화수피를 자작나무 껍질로 보았으며 이런 이해가 최근까지도 광범위하게 상식으로 유통됐다.

한데 90년대 이후 백화가 곧 자작나무라는 통설은 심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껍질이 흰 나무로는 자작나무가 유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왕벚나무나 거제수나무 같은 활엽수 껍질도 백화라 한 기록이 옛날 문헌에서는 더러 발견된다.

이에 더해 자작나무 자생지가 문제가 대두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서는 중부 혹은 남쪽 지방에서는 자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북부지방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물론 요즘은 곳곳에 자작나무가 조경수 등으로 심는 일이 많으므로 남부지방에서도 자란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는 근래에 와서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실제로 중남부 지방에 인위적으로 심은 자작나무는 생장에 커다란 한계를 보인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와 지금의 식생대 혹은 기후가 달랐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백화수피=자작나무라는 통설을 흔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목재조직학자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삼국시대 식생대 혹은 기후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마총을 축조하던 무렵 신라에서는 자작나무가 자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천마도를 그린 바탕인 백화수피가 진정 자작나무라면 고구려 같은 데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천마도 백화수피가 자작나무 껍질이라는 설이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대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수피 자료를 검토한 박 교수 또한 "정밀한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육안으로는 자작나무일 가능성이 크다"고 동의한다.

그렇다면 자작나무 껍질은 왜 그림을 그리는 '종이'로 사용됐을까? 이는 자작나무가 갖는 특징에서 비롯된다. 자작나무 껍질은 벗겨내면 마치 종이와 같다. 더구나 질겨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특성을 간파한 신라사람들이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처럼 사용했을 것이다.

천마총 특별전을 준비 중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이에 즈음해 백화수피 천마도 말다래를 둘러싼 비밀 상당수를 해소했다. 우선 말다래 제작에 사용한 백화수피는 총 3장의 자작나무 껍질이 사용된 사실을 밝혀냈다. 천마를 그린 앞면에는 자작나무 줄기에서 껍질눈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벗겨낸 껍질 1장을 사용하고, 뒷면에는 반대 방향으로 잘라낸 껍질 두 장을 이어붙였던 것이다. 백화수피 말다래 두 점은 모두 앞판보다 뒤판이 두꺼운 것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정밀 조사 결과 이런 껍질에서는 나무 옹이 흔적도 찾아냈다.

자작나무 수령은 분석 결과 앞판은 40년 전후였고 뒤판은 52년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자작나무 껍질은 언제 채취했을까? 이런 둘러싼 비밀은 실험으로 풀었다. 실제 자작나무로 실험한 결과 수액이 오르는 3~4월에 채취한 껍질이 그렇지 않은 시기에 채취한 껍질에 비해 월등히 종이 재료로 우수성을 나타냈다. 실제로 물이 오른 시기의 껍질이 훨씬 잘 벗겨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이렇게 채취한 껍질은 자연 건조한 상태보다는 물에 한동안 담근 뒤 건조한 다음에 간단한 공정, 예컨대 다리미질을 하고서 사용해야 훨씬 상태가 좋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 제작을 위해 사용한 안료는 연백(鉛白.백색)과 진사(辰砂.적색), 먹(墨.흑색), 석록(石綠.녹색)으로 드러났다.

경주박물관은 이번 천마총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그 마스코트 격인 천마도를 분석함으로써 이런 성과들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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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3.18. 03:02업데이트 2014.03.18. 09:32  

[오늘의 세상] 발굴 41년… 천마, 다시 날다 (chosun.com)

국보·보물 등 1600점 한곳에… 오늘부터 경주박물관서 전시

경주=허윤희 기자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경주 천마총의 전모가 발굴 41년 만에 전면 공개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 특별전 '천마, 다시 날다' 개막을 하루 앞둔 17일 언론공개회를 통해서다. 천마총 금관 등 국보·보물 10건 11점을 비롯해 천마총에서 출토된 136건 1600여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1973년 발굴된 경주 황남동 155호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1만1526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늘로 비상하는 흰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天馬圖·국보 제207호) 덕분에 고분 이름도 '천마총'이 됐다.

(왼쪽 위 사진)토끼 얼굴을 한 신라의 새, 1500년 만의 화려한 飛上 - 토끼 얼굴을 한 채 날개를 한껏 펼쳐 올린 상상의 새. 국립경주박물관이 1973년 천마총에서 출토된 채화판(彩畵板)을 복원 처리해 17일 공개했다. 가는 묵선으로 형상을 그린 후 머리와 날개·몸통·꼬리를 붉은색 안료로 칠했다. 또다른 채화판에는 말을 타고 힘차게 달려가는 무사를 그렸다. 부채 모양의 작은 판 8개를 이어 붙여 만든 채화판(오른쪽 위 사진)의 용도에 대해 박물관은“모자의 챙 혹은 말등에 놓인 장식판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왼쪽 아래 사진)달리는 말에 인물이 앉아 있는 모습을 힘찬 필치로 그린 기마인물무늬 채화판. 말은 머리를 쳐들고 네 다리는 둘씩 짝을 이루어 앞뒤로 뻗었으며, 꼬리는 뒤로 날린 상태이다. (오른쪽 아래 사진)금동 투조 장식 안장 앞가리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표현돼 있다.
 
 

 

 

 

 

이곳에선 부채꼴 모양의 채화판(彩畵板)이 두 장 출토됐다. 천마도와 함께 매우 귀한 신라의 그림이지만,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박물관은 보존 처리를 거쳐 채화판 두 장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모자 차양(바깥지름 40㎝, 안 지름 16㎝)처럼 생긴 채화판은 자작나무 껍질로 된 부채 모양의 작은 판 8개를 이어 붙여 만들었다. 위 장은 다양한 형태의 서조(瑞鳥·상서로운 새)를 그렸고, 아래 장은 기마인물(騎馬人物)을 그렸다.

보존 처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유물들은 또 있다. 깃발을 꽂던 뱀 모양의 기꽂이가 대표적. 발굴 당시에는 용도를 알 수 없었으나, 말 엉덩이 부분에 세워 깃발을 꽂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 확인됐다.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 보이는 기꽂이와 흡사하다.

사람 얼굴이 표현된 금동투조 장식 안장앞가리개도 처음 공개됐다. 용무늬와 봉황무늬를 새긴 금동 그릇,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를 금으로 박아 넣은 큰 칼 조각도 새롭게 확인됐다. 지난 3일 언론에 공개한 천마도 3점도 전시장에 나왔다.

 

 

뉴스1
입력 2014.03.17. 21:40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apos;백화수피제 서조문 채화판&apos;의 세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News1

 

1971년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는 큰 고분을 발굴해 내부를 복원 공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대상이 된 고분은 '황남대총'이었지만 발굴에 앞서 인근의 작은 고분을 시험 삼아 발굴하기로 했다.

당시 작은 고분은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황남동 155호분이라는 숫자만이 부여된 무덤이었다. 1973년 발굴 당시 신라 고유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만 추측될 뿐이었다.

하지만 시험 발굴 결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광복 이후 처음 출토된 금관을 비롯해 모두 1만1526점의 유물이 나왔다.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만도 10건 11점에 이른다.

당시 발굴된 이름 없던 고분의 전모가 발굴 41년 만에 한자리에 공개된다. 오는 18일부터 6월22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천마, 다시 날다' 전시를 통해서다.

무명의 고분은 발굴 당시 신라시대 귀한 회화 자료인 '천마'를 그린 백화수피제 말다래(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발견돼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후 1975~76년 무덤 내부 복원과정을 거쳐 천마총은 실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신라 능묘가 됐다. 천마총은 봉분 지름이 47m로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 주인은 금관과 금드리개, 금귀걸이를 비롯한 화려한 장신구와 금동제 봉황장식 고리자루칼을 차고 있었고, 머리맡에 있던 크기 1.8m×1.0m의 부장품 궤에도 온갖 보물이 들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천마도'로 익숙한 '천마문 말다래'도 이 부장품 궤 안에서 발견됐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발굴 41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마총 출토품의 거의 전부를 공개한다. 136건 1600여점에 이른다.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형 주자' 1점까지 포함해 국보와 보물이 모두 11건 12점이다.

전시는 도입부를 시작으로 1부 '왕의 무덤, 천마총'과 2부 '천마문 말다래와 장식 마구', 종결부로 구성된다.

도입부에는 당시 출토된 모습 그대로 복제한 목관이 전시되고 이어지는 1부는 천마총 발굴에 따라 드러난 구조와 부장품을 살펴보는 공간이다.

중앙부에는 무덤의 주인이 안치된 널(목관)과 수많은 보물들이 가득한 부장품 궤를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재현했다. 덕분에 관람객은 금관을 비롯한 여러 부장품들의 출토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주변 진열장에 전시되는 유물은 금관과 금허리띠 등 기존에 잘 알려진 출토품 외에도 다양하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무늬가 새로 확인된 용무늬·봉황무늬 등을 새긴 금동그릇과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금입사된 큰칼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apos;백화수피제 기마인물문 채화판&apos;의 세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News1

 

2부에선 '천마문 말다래'를 중심으로 장식 마구들이 전시된다. '죽제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 1점과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 2점을 처음으로 모두 함께 볼 수 있다.

'천마도'와 함께 주목을 받았지만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기마인물문 채화판'과 '서조문 채화판'도 처음 공개된다.

이들 중요 유물 공개는 전시 기간 가운데 3월18일~4월6일, 4월29일~5월18일, 6월3~22일 3차례만 이뤄진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사람 얼굴이 표현된 '금동투조장식 안장앞가리개'도 처음 선보인다. 말다래를 비롯한 마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기마인물형 주자' 등도 함께 전시된다.

'천마문 말다래'를 모니터 상에서 자유자재로 이동, 확대·축소하며 세부를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 돋보기가 운용되고 발굴 당시 중요 부장품들을 수습하는 영상도 제공된다.

전시는 천마총 조사단원의 사진 등 관련 사진과 기록물, 발굴보고서 등을 보여주는 종결부로 마무리된다.

천마총 특별전 '천마, 다시 날다'는 오는 7월24일부터 10월5일까지 국립청주박물관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입력 2014.03.05. 03:07

21세기 첨단과학, 황금天馬를 되살리다 (chosun.com)

 

 

 

[금관총]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3-07-03 14:03

칼집 새겨진 ‘이사지왕’ 신라 금관총 주인이십니까 (hani.co.kr)

 

칼집 새겨진 ‘이사지왕’ 신라 금관총 주인이십니까

1921년 발견된 뒤 90년 넘게 미스터리였던 신라 금관총의 주인이 과연 밝혀질 것인가?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란 이름을 새긴 명문이

www.hani.co.kr

 

 

 

입력 2016. 3. 23. 07:04수정 2016. 3. 31. 10:48

[한국사 Live] 신라 왕(王)은 'King'이었을까

 
금관총 환두대도에 쓰인 이사지왕(王)이라는 문구. 한눈에 보기에도 글씨체가 조잡하다. <사진 제공=국립중앙박물관>

 

1921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에서 왕명(王名)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최근 발견돼 무덤과 연관성이 있는지를 놓고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만일 이 왕명이 피장자 것으로 최종 확인된다면 신라왕릉 중 최초로 주인이 직접 밝혀진 무덤이 된다.

왕명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 일환으로 금관총 출토 환두대로(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박물관 측이 칼집 표면에서 녹을 걷어내고 확인한 글자는 이사지왕(王)이다. 글자는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써 형태가 매우 조잡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사료에서는 동일한 왕호를 발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사지왕 정체를 놓고 추측도 난무한다.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조성된 시기와 '이'자를 뺀 '사지' 발음이 신라 21대왕인 소지마립간(재위 479~500년)의 소지와 비슷하다며 피장자가 소지왕일 것이라는 해석이 그나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사지왕이 금관총 주인이냐를 두고서도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이사지왕은 남자로 단정된다. 하지만 금관총은 왕비 등 여자 무덤이라는 게 국내 고고학계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관총을 여성 무덤으로 단정하는 것은 여성용 태환이식(고리가 큰 귀걸이)이 나왔기 때문이다. 피장자는 대도를 허리에 차지도 않았다. 대도 주인이라면 허리에 차는 게 마땅하지만 칼은 피장자 둘레에서 수습됐다.

송의정 박물관 고고역사부장은 "금관총 환두대도는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편 또는 가까운 남자 친척이 선물로 헌납했을 수 있다"고 했다. 천마총 귀걸이, 금녕총 기마인물형토기가 피장자 쪽이 아닌 무덤 위쪽 적석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이치다.

신라에서 왕호가 실제 왕(King)이 아닌 이들에게 쓰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유산 상속 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한 냉수리 신라비가 그것이다.

냉수리 비문은 말추와 사신지 두 사람이 절거리 소유 재물에 대해 소유권 분쟁을 일으키자 중앙 정부에서는 지도로갈문왕을 의장으로 하는 7인으로 구성된 회의에서 과거 사례를 토대로 절거리 재물로 결정하고 차후 상속자까지도 판정했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원문은 7인을 '차칠왕등(此七王等)'으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로갈문왕(지증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부를 대표해 참석한 인물들이다. 왕이 아닌데도 왕으로 적은 것이다.

 

신라사에 정통한 이채경 경주시 학예연구사는 왕을 '분' 또는 '님'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존칭용 한자가 마땅찮아 왕을 대신 사용했다는 것이다.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인 경북 경주시 건천읍 방내굛모량리 일대에 대한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에서도 흡사한 유물이 나왔다. 발굴 지역은 신라 왕경으로 진입하는 서북 방면 주요 교통로에 위치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도로, 우물, 담장, 적심(積心) 건물지, 제방시설 등을 갖춘 대규모 도시유적이 확인됐다.

일종의 위성도시 형태로 조성됐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곳에서도 바닥에 '왕(王)'자가 새겨진 청동접시가 발견됐다. 이 접시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데 이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 지역인 신라 왕경과 지형적으로 격리돼 있고 글씨가 조악하다는 점으로 미뤄 역시 왕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6세기 지증왕 이후 왕호가 정착되면서 비로소 일반인에게는 '왕'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게 된다. 그렇더라도 금석문 등 각종 기록에서 왕들은 '왕'으로 불리기보다 태왕 또는 대왕으로 호칭되는 사례가 많았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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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 7. 30. 14:35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에 대한 정식 발굴의 최종 단계에서 출토된 칼집 끝 장식에서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지난 2013년 금관총 출토 큰 칼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 등의 명문이 발견된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발견이지만 정식 발굴 과정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명문은 칼집 끝 장식(금제) 양쪽 면에 각각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와 ‘十(십)’이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는 말 그대로 ‘이사지왕의 칼’이라는 의미이고, ‘十(십)’은 지금까지 주술적인 의미라고 하는 견해가 많다.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2013년 발견된 명문과 거의 같지만 ‘刀(도)’라는 글자가 추가로 더 있는 점이 다르다.

2013년 명문 발견 이후 금관총의 주인공과 이사지왕의 관계, 칼의 주인과 이사지왕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이것은 칼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이외에도 공동 조사단은 가는고리 금 귀걸이 2점(1쌍, 사진 9), 굵은고리 금 귀걸이 1점(사진 10), 가는고리 금 귀걸이 1점(사진 11), 유리구슬 수백 여 점을 비롯해 많은 양의 부장품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 중 가는고리 귀걸이 2점(1쌍, 사진 9)은 아직까지 신라 고분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기 때문에 주목된다.

또한 주인공이 묻힌 위치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비록 실제 나무덧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남아있는 구조와 목질 흔적으로 판단해 볼 때, 나무덧널은 대형 나무기둥을 세워 동서 9m, 남북 8m로 구획한 돌무지 구조 안쪽에 동서 길이 7.2m, 남북 길이 6.2m, 깊이 0.4m의 구덩이를 파고 강돌과 자갈을 깐 구조 위에 축조되었음을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발간된 보고서에는 하나의 나무덧널 안에 나무널(목관)이 들어있는 구조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발굴 결과, 금관총의 나무덧널은 폭 2.4m인 내부덧널(내곽)과 폭 4.2m인 외부덧널(외곽)의 이중 구조로 축조되어 있었음을 조사단은 확인했다.

특히 대형 나무기둥을 세워 돌무지 공간과 주인공이 묻힌 공간을 구획한 구조는 현재까지 신라 적석목곽분 조사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앞으로 신라 고분의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kisanglim@hotmail.com

 

 

입력 2015. 7. 30. 17:32수정 2015. 7. 30. 17:32

 

 

 

  • 승인 2013.07.25 17:47

신라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의 수수께끼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신라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의 수수께끼 - 미래한국 Weekly

신라 금관총에 부장된 환두대도의 소유자 이름이 최근 밝혀져 국사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이사지왕’1600년 만에 푸른 녹을 걷어낸 신라 금관총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는 역사.

www.futurekorea.co.kr

 

 

 

송고시간2013-07-03 16:36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확인(종합2보)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무덤에서 신라왕 이름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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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신라 무덤서 첫 '왕명' 나왔다 [앵커]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진 신라 왕릉급 무덤은 현재 수백 봉분이 있는 걸로 추정되는데요. 그중에서 왕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건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왕의 이름, 즉 왕명이 새겨진 무덤 속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윤석이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칼. 색이 바랜 이 칼은 약 90년 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입니다. 그냥 오래된 유물로만 간주되던 이 칼이 최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한자 때문입니다. 칼끝 부분에 새겨진 '이사지왕' 6세기 이전 마립간시대 신라 최고지배층 무덤으로 판단되는 곳에서 왕 이름이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송의정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 "(4~6세기 신라왕릉 중) 묻힌 사람이나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이 나온 예가 없습니다. 물론 역사책에는 내물왕부터 진흥왕까지 그 지역에 묻혔을 거라 기록했는데...그 시기의 사회 시스템, 정치 시스템, 정부 시스템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문제는 이사지왕의 존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관련 문헌에서 이사지왕이란 이름이 없어 칼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물을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고 통치자가 아닐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합니다. <송의정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 "우리가 알고 있는 대왕, 내물왕이나 이런 사람 말고도 왕족이나 큰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도 왕으로 부르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큰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사지왕을 고위 귀족으로 본다면, 금관총ㆍ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 즉 왕의 무덤으로 간주한 국내외 고대사 연구는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뉴스Y 윤석이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21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한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갖춤 쇠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이 3일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 일환으로 산하 보존과학부에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를 보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명문(銘文)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판독한 결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고 이날 덧붙였다.

글자는 칼집 끝 부분과 자루와 만나는 첫 부분을 장식한 금속(금동)에서 각각 확인됐다.

 
금관총 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금관총 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1921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한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고리갖춤 쇠칼)에서 새겨진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이(人+小)자는 爾의 약자. 왼쪽 붉은색 원안에 `이사지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2013.7.3
srbaek@yna.co.kr

 

그중에서도 칼집 하단 앞면에는 '爾斯智王(이사지왕)'을 새기고, 그 뒷면에서는 '十(십)'이라는 숫자 혹은 기호가 확인됐다. 나아가 자루와 만나는 지점의 칼집 상단에서는 '爾(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는 금관총 출토 다른 환두대도에서도 '爾', '八(팔)', '十(십)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爾'가 실제 금석문에서는 속자로 나타남)

6세기 이전 마립간시대 신라 최고지배층 무덤으로 판단되는 신라무덤에서 신라의 왕 이름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호우총에서는 고구려 광개토왕 시호(죽은뒤 받은 이름)가 확인되고,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 등의 글자를 적은 유물이 확인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사지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상고기 왕 중에서도 누구에 해당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박물관은 "'이사지왕'은 금관총의 주인공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면서 "하지만 이사지왕은 다른 금석문이나 문헌에 나오지 않아 마립간(내물왕-지증왕) 중 한 사람의 다른 왕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금관총 큰칼에 새겨진 `이'자

금관총 큰칼에 새겨진 `이'자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1921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한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고리갖춤 쇠칼)에서 새겨진 '이(爾)' 글자. 이(人+小)자는 爾의 약자. 2013.7.3
srbaek@yna.co.kr

 

그런 까닭에 박물관은 '이사지왕'이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기록한 신라왕과는 다른 고위 권력자가 사용한 칭호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 보이는 '此七王等(차칠왕등)과 같은 기록을 통해 왕(마립간)이 아닌 사람도 왕으로 불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새긴 칼을 출토한 금관총이 실제 이사지왕이라는 사람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박물관은 확신을 하지 못했다.

송의정 박물관 고고역사부장은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적은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것이 이 무덤이 그가 묻힌 곳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면서 "예컨대 그의 부인 무덤일 수도 있고, 이사지왕에게서 하사받은 칼을 누군가의 무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관총은 현재까지는 환두대도 3점이 무덤 주인공이 직접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성 무덤일 것으로 간주됐으며, 축조시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확인(종합2보) | 연합뉴스 (yna.co.kr)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확인(종합2보)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21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한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갖춤 쇠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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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28t' 신라 말갑옷 덩이는 어떻게 통째로 보존됐나(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송고시간2020-04-07 17:29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보고서 발간…재현품 제작 과정도 소개

"당시 말은 조랑말과 크기 비슷…말갑옷에 남은 식물은 소나무"

경주 쪽샘지구 말갑옷 이동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그 옛날 신라 무사가 탄 말은 몸에 어떤 갑옷을 둘렀을까. 이 물음에 답할 유물이 지난 2009년 신라 왕족과 귀족 고분이 밀집한 경북 경주 쪽샘유적 동편 C10호 목곽묘(木槨墓·덧널무덤)에서 발견됐다.

출토 당시 말이 착용한 갑옷인 마갑(馬甲)은 바닥에 깔렸으며, 그 위에서 말을 탄 장수가 입은 것으로 짐작되는 찰갑(札甲·비늘식 갑옷)이 발견됐다. 740매로 구성된 마갑은 길이가 약 290㎝, 너비는 약 90㎝, 무게는 약 36㎏이었다.

1천500년 넘게 무덤에서 잠들었다가 빛을 본 신라 마갑은 습기와 자외선으로 인해 훼손될 가능성이 컸다. 이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마갑을 연구실로 옮겼고, 약 10년간 보존처리를 한 뒤 지난해 10월 유물을 언론에 공개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마갑 연구 성과를 정리해 최근 발간한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유적Ⅹ - C10호 목곽묘 출토 마주·마갑 조사연구 보고서'에서 한때 무게가 28t에 달한 마갑 유구(遺構·건물의 자취) 이동 작업을 상세히 설명했다.

경주 쪽샘지구에서 나온 말갑옷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7일 연구소에 따르면 마갑은 목곽 서쪽에서 동쪽으로 목·가슴, 몸통, 엉덩이 순으로 남았다. 주곽에 딸린 매장시설인 부곽(副郭)에서는 말 얼굴 가리개인 마주(馬胄)와 안장, 재갈, 발 받침 등 다양한 마구가 나왔다.

도굴되지 않아 완전한 형태를 갖춘 마갑을 보존하기 위해 연구소는 먼저 가건물을 세웠다. 건물에는 바깥과 온도 차를 줄이기 위한 냉방시설과 습기를 제거하는 제습시설을 설치했다.

문제는 길이 4.4m, 너비 2.2m에 이르는 거대한 마갑 유구를 국내에서 수습한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C10호 목곽묘 토층은 점토질이 있는 흙이 거의 없었고, 10∼30㎝ 크기 냇돌이 포함돼 이동 시 중량을 견디고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관건이었다.

연구소는 단번에 유구를 옮기지 않고 모의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의 표면을 강화하기 위해 셀룰로스계와 아크릴계 물질을 바르고, 유물에는 용해하기 쉬운 물질로 강화 처리를 했다. 강화제 농도는 5∼20%로 다르게 하고, 한지를 부착했다. 이어 위쪽에 석고붕대를 감싸고 발포 우레탄으로 20㎝ 정도 덮었다.

그다음에는 유구를 들어 올리는 연습을 하기 위해 40㎝ 너비로 흙을 파내고 비닐을 넣어 우레탄을 발포했다.

경주 쪽샘지구 말갑옷 이동 준비 작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연습을 마친 연구소는 들뜨거나 분리되는 갑옷 조각을 먼저 빼낸 뒤 2010년 5월 표면 강화 작업을 시작했다. 유구 주변은 연습보다 더 깊은 1.5m 깊이로 파냈다.

보고서는 "가건물을 해체한 뒤 1차 크레인 작업을 했을 때 유구 중량은 28t에 달했다. 보존처리실 문을 통과하려면 높이 조절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구를 뒤집어 우레탄과 흙을 걷어냈다"며 "2차 크레인 작업 시 중량은 18t으로 줄어 손상 없이 마갑과 토양을 떼어냈다"고 전했다.

연구소는 보존처리 과정에서 동물 털 흔적을 찾지는 못했으나, 직물이 평견(平絹·평직으로 된 비단)과 마직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평견과 마직물은 몇 가지 종류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아울러 마갑에 남은 나무 흔적을 조사해 소나무임을 밝혔다. 보고서는 "신라시대 목곽 중 수종(樹種) 분석이 된 예는 천마총 밤나무, 황남대총 느티나무가 전부"라며 "소나무가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주 쪽샘지구 말갑옷 재현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마갑을 착용한 말 품종에 대해서는 신라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 출토 말뼈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월성에서 나온 5세기 말뼈를 보면 당시 말은 높이가 120∼136㎝이며, 평균 128㎝로 판단된다.

보고서는 "마갑을 실제로 입은 말은 현재 조랑말과 유사하거나 조금 큰 말이었을 것"이라며 "당시에는 이러한 말이 우량한 품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는 다양한 도면과 사진, 엑스레이 촬영 결과를 담았고, 마갑 복원을 위한 연결 방법과 착용 방식 분석에 관한 내용도 수록했다. 연구소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재현품 제작을 완료해 제주 한라마에 입히기도 했다.

심명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현대인이 생각하기에 조랑말이 조금 작기는 하다"며 "말 모형은 관람객이 갑옷 재현품에 집중하도록 일부러 뼈대 형태로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갑옷에 칠을 한 흔적이 없어 일부러 불에 달궈 산화층을 만들었다"며 "안장은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유물이 없어 특히 고민해 완성했다"고 덧붙였다.

쪽샘지구 출토 마갑을 얹고 중무장한 기사가 올라타면 말은 대략 120㎏을 지탱해야 한다. 마갑 쓰임새는 의례용이라는 견해와 실전용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심 연구사는 "갑옷을 사용하거나 보수한 흔적이 없으나, 아직은 용도가 무엇인지 결론 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이르면 6월께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쪽샘 목곽묘에서 나온 마갑과 재현품·찰갑·무기류를 전시하고, 향후 찰갑 보고서도 펴낼 계획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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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경주 쪽샘지구 C 10호 목곽묘에서 확인된 말갑옷이 복원을 끝내고 첫 공개됐다. 복원결과 말갑옷은 736매의 철편으로 중무장한 신라 중장기병의 것임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목·가슴 가리개 348매, 몸통 가리개 256매, 엉덩이 가리개 132매…. 2009년 경주 쪽샘지구 C10호 목곽묘의 주곽(무덤 주인공이 묻힌 널방)에서 발굴된 말갑옷은 무려 736매의 철편으로 중무장한 신라 중장기병이 탄 말이 장착한 무구였음이 확인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출토된 5세기 전반의 말갑옷(총길이 약 290㎝×너비 약 90㎝ 가량)과 사람 갑옷의 복원을 마치고 발굴 이후 처음으로 16일 공개했다. 발굴 당시 말갑옷은 무덤 주인공의 널방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말갑옷을 복원해서 실제로 말에 착용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한쪽에는 사람 갑옷 중 투구와 목가리개가 놓여있었다. 또 말 갑옷의 몸통 가리개 위에는 사람 갑옷 중 대퇴부(허벅지) 부분이 포개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토기들이 부장돼 있었다. 피장자의 널방 옆에 달린 부곽에서는 말머리 가리개(마주·馬胄)와 안장, 재갈 등이 출토됐다.

이렇게 말갑옷 뿐 아니라 무덤 피장자로 추정되는 장수의 갑옷이 함께 확인된 것은 획기적인 발굴성과라 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 개마무사(鎧馬武士·철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무사)의 실체를 보여준 고고학 자료였기 때문이다.

2009년 쪽샘지구 C10호 목곽묘에서 노출되고 있는 말갑옷. 삼국시대 개마무사(鎧馬武士·철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무사)의 실체를 보여준 고고학 자료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복원작업을 통해 이날 공개한 갑옷은 말갑옷(36㎏)과 사람 갑옷(투구·목가리개·허벅지 부분) 등이다.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철편은 길이 6.8~7.2㎝, 너비 5~6.2㎝, 두께 약 0.2㎝이고, 몸통가리개 철편은 길이 12.2㎝, 너비 7.6㎝, 두께 0.2㎝이며, 엉덩이가리개 철편은 길이 8.3~10.2㎝, 너비 4.6~6.5㎝, 두께 약 0.2㎝ 정도로 측정됐다. 목·가슴가리개는 1~17단으로 구성됐는데 목가리개는 1~11단, 가슴가리개는 12~17단이었다. 몸통가리개 철편은 좌·우 각 6단으로 구성됐고, 엉덩이가리개 철편은 꼬리 윗부분과 아랫부분 각각 8단으로 제작됐다. 철편은 띠장식을 이용해서 말 갈기에서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몸통가리개 철편은 별도의 연결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말의 등 뒤에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 장인들은 말의 굴곡을 최대한 맞추려고 크기와 형태를 달리해서 철편을 제작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엉덩이가리개 철편 윗부분은 말 안장의 후륜(안장 뒤쪽에 세운 등받이)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밑부분은 별도의 연결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몸통가리개 양끝과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명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철편은 말의 굴곡을 최대한 맞추려고 크기와 형태를 달리해서 제작한 게 특징”이라고 밝혔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국내에서 이처럼 삼국시대 개마무사의 무장 상태를 완벽하게 갖춘 세트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송고시간2013-04-24 10:56

<신라 기마무사 복원과정과 그 특징> | 연합뉴스 (yna.co.kr)

 

 

 

입력 :  2013-04-24 18:19:05 수정 :  2013-04-24 19:38:25

이것이 신라 기마무사의 갑옷 - 매일경제 (mk.co.kr)

신라 기마무사 비늘갑옷 재현품

 

 

 

 

송고시간2014-03-25 09:57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 발굴현장 공개 | 연합뉴스 (yna.co.kr)

 

44호분 쪽샘유적발굴관 개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고분의 생생한 발굴과정을 현장에서 공개하기 위한 발굴전시관이 신라시대 무덤이 밀집한 경주 대릉원지구 쪽샘유적에서 문을 연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26일 오전 11시 쪽샘지구에서 쪽샘유적발굴관 개관식을 연다.

이 발굴관은 철골 막구조이며 면적은 1천927㎡로, 쪽샘지구에 위치한 무덤 중에서도 대형급에 속하는 제44호 고분 전체를 감싼 돔 형태의 구조물이다.

이 고분은 2009년 시굴조사 당시 봉분이 하나인 단일 적석목곽분으로, 봉분 기준 장축 30m에 단축 23m, 현재 높이 4m다.

 

발굴관이 개관함으로써 조사단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고분의 구조와 축조시기 등을 밝히는 조사 과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쪽샘유적에 대해 2007년 3월 이후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9년에는 신라 기마무사의 투구와 비늘갑옷, 마갑(馬甲)이 발굴되고 2012년에는 E41호분 적석목곽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사 해명을 위한 많은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향후 2025년까지 쪽샘유적 발굴조사가 계속될 예정이며, 이 중에서 일반에 조사과정을 공개하는 44호분에 대한 조사기간은 오는 5월을 시작으로 4년을 예상하고 있다.

조사현장 관람 시기와 방법 등은 추후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다.

taeshik@yna.co.kr

 

[경주 탑동유적]

정윤주입력 2021. 7. 15. 13:45

경주서 삼국시대 최장신 '180cm' 남성 인골 발견 (daum.net)

문화재청

 

탑동유적은 경주 남천과 인접한 도당산 아래쪽에 위치한 유적으로, 기원후 1세기 전후 목관묘를 비롯해 6세기까지 무덤이 지어진 신라 무덤군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2010~2021년까지 조사를 진행해 돌무지덧널무덤 130기를 비롯한 약 180여기의 무덤이 확인됐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조사 중인 경주 탑동 28-1번지(이하 '탑동 유적')에서 5~6세기 삼국 시대 대표적인 무덤 24기와 그 내부에 있던 총 12기의 인골을 확인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5일 오전 11시 경주 탑동일원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현장설명회를 진행했다.

 

 

신원건 기자입력 2021. 7. 15. 11:36

삼국시대 최장신 180cm 인골 발견.. 머리 모양이?[청계천 옆 사진관] (daum.net)

 

3D 스캐닝 사진. 뉴시스(문화재청 제공)

 

 

 

송고시간2018-05-09 15:23

경주 주택부지서 4∼6세기 신라고분 34기 쏟아져(종합) | 연합뉴스 (yna.co.kr)

목곽묘·적석목곽묘·석곽묘 발굴, 귀걸이도 출토

"무덤 나온 탑동 일대에 신라 초기 유적 가능성"

경주 탑동 6-1번지 3호 목곽묘. 왼쪽이 주곽, 오른쪽이 부곽이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북 경주 탑동 주택부지에서 4∼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34기가 나왔다.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은 경주 탑동 6-1번지와 6-6번지의 면적 1천336㎡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신라 전성기에 만든 목곽묘(木槨墓·덧널무덤) 8기,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 18기,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4기, 옹관묘(甕棺墓·독무덤) 4기를 찾아냈다고 9일 밝혔다.

경주 탑동 6-1번지 목곽묘 출토품.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목곽묘 가운데는 6-1번지 3호 목곽묘에서 많은 부장품이 나왔다. 이 무덤은 동쪽에 주곽(主槨·으뜸덧널), 서쪽에 부곽(副槨·딸린덧널)을 마련했다.

 

주곽에서는 허리에 숫돌을 찬 무덤 주인공 머리 부근에서 토기들이 발견됐고, 발 쪽에서는 비늘 갑옷과 화살촉이 출토됐다. 내부에서는 철창과 철도끼도 나왔다. 주곽보다 조금 높게 만든 부곽에는 항아리와 등자 조각, 운주(雲珠·말띠꾸미개) 같은 마구(馬具)를 묻었다.

이 무덤과 약 5m 떨어진 6-1번지 4호 목곽묘에서는 굽다리접시, 목 긴 항아리 등 신라 전기 양식으로 알려진 토기가 나왔다.

조사단은 토기 양식 등을 근거로 경주 황오동 월성로 고분군 출토품과 비교해 목곽묘 조성 시기를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으로 추정했다.

경주 탑동 적석목곽묘에서 나온 귀걸이.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적석목곽묘에서는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이 달린 굵은고리 귀걸이 한 쌍을 비롯해 둥근 옥이 달린 목걸이, 은제 팔찌,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큰칼)가 출토됐다.

조사단은 "적석목곽묘와 석곽묘는 2∼3개 무덤을 나란히 배치하기도 했다"며 "혈연이나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동일한 묘역에 매장한 문화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국비 지원으로 진행된 이번 조사에서는 신라고분 외에도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목관묘와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우물 등이 중첩해 나타났다.

경주 탑동 조사 지역 전경.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신라 무덤이 무더기로 확인된 탑동 일대는 신라 왕성인 월성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대릉원에서 보면 남천(南川) 건너편 지역으로, 남산에서 경주평야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지난 2010년 기원전 1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장급 인물의 목관묘(木棺墓·널무덤)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이전까지는 문헌에 기록된 신라 건국 시기 즈음해 조성된 유력 지배자 무덤이 조양동과 사라리 같은 경주 외곽에서만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후 탑동에서는 이번 조사 성과를 포함해 기원 전후 목관묘 3기와 4∼6세기 신라 무덤 80여 기가 나왔다.

노재민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장은 "탑동 일원에서 원삼국시대부터 오랫동안 대규모로 무덤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며 "탑동에서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4세기 무덤을 발견한 것이 성과로, 6월까지 조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차순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은 "탑동에서 4세기 목곽묘 여러 개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며 "근처에 박혁거세와 신라 초기 왕들 무덤이라는 오릉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가 초기에는 이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하다 나중에 남천 너머로 중심지를 이동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차 단장은 이어 "탑동에서 조금 더 조사를 진행한다면 신라 초기 역사를 구명하는 유적이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대규모 고분군이 확인된 탑동 주변 일대에는 오릉 말고도 박혁거세 탄강지인 나정과 그가 처음 궁궐을 세웠다는 창림사터를 비롯해 신라 건국과 관련된 유적이 밀집한다는 점에서 향후 이 일대는 발굴성과에 따라 신라 건국의 열쇠를 품은 곳이 될 수 있을 전망이다.

경주 탑동 6-1번지에서 나온 적석목곽묘.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그래픽] 경주서 4∼6세기 신라고분 34기 쏟아져(종합)

(서울=연합뉴스) 김토일 기자 =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은 경주 탑동 6-1번지와 6-6번지의 면적 1천336㎡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신라 전성기에 만든 목곽묘(木槨墓·덧널무덤) 8기,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 18기,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4기, 옹관묘(甕棺墓·독무덤) 4기를 찾아냈다고 9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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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 2. 24. 02:56
 

경주 낭산까지 아우른 신라의 거대사원터 위용 드러내다 (daum.net)

낭산서 대규모 유적..불상 7점·유물 1000점
국내 발굴사상 최대규모 대석단 기단 건물지
터 내부 회랑과 십이지신상 기단건물터 주목
학계 "신라 불교사 왕경역사 새롭게 봐야"

[한겨레]

경주 낭산 기슭에서 발견된 대형 왕실사원 추정 유적의 일부인 대석단 건물터. 국내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기단부와 회랑을 두른 시설터다. 뒤쪽에 전 황복사터 3층석탑과 낭산 자락이 보인다.

 

국가사적인 경주시 구황동 낭산 기슭(전 황복사터)에서 신라 왕실사원으로 추정되는 거대 사찰터가 발견됐다. 인근에 자취가 남아 있는 국찰 황룡사의 위세에 버금가는, 국내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와 대형 회랑을 비롯해 십이지신상을 새긴 건물 기단과 연못 등 크고 작은 유적들이 무더기로 드러났다. 유적 안에서는 금동입불상, 보살입상 등 불상 7점을 비롯해 1000점 이상의 유물도 쏟아졌다.

2년 전부터 낭산 일대를 조사해온 성림문화재연구원은 31일 낮 현장 설명회를 열어 발굴 성과를 공개했다. 조사는 전 황복사터 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에서 지난해 8월부터 진행됐으며, 발굴 과정에서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건물터 기단을 필두로 대석단 기단건물터와 딸림건물터, 회랑터, 담장터, 배수로, 도로터, 연못터 등이 잇따라 확인됐다고 한다.

왕실사원 성격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은 탑 아래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에 덧붙여 동-서쪽 축선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동·남쪽 면에 돌을 다듬은 장대석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올려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꾸린 뒤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놓았다. 내부에 대형 회랑을 돌린 독특한 얼개는 경주의 기존 신라 유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가람 배치 방식을 보여준다. 조사단은 특수 용도의 건물이거나 이곳에 있었다고 추정해온 신라 고찰 황복사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 건물터 뒤에 3층석탑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탑-금당의 일반적인 고대 가람 배치와 다른 문-금당-탑의 배치구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졌다.

90년 만에 유적에서 재발굴된 십이지신상 중 토끼상. 통일신라 십이지신상 중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는 토끼, 뱀, 말, 양의 십이지신상 4구가 각각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기단 쪽에 놓여 있다. 대석단 건물터와 함께 사원의 주요 전각터로 보인다. 1928년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가 여기서 십이지신상을 발굴조사했다가 다시 묻은 내력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5월 전면부의 십이지신상 4구를 90년 만에 재발굴(<한겨레> 2017년 9월5일치 18면)한 데 이어 후속 발굴로 터의 앞쪽 윤곽이 드러났다. 8세기 중후반께 유물로 가늠하는 기단부 십이지신상은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과 함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신라 십이지신상의 걸작으로 꼽힌다. 축조 당시 이 상들의 탱석(버티는 돌)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기단석으로 재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사 구역의 건물터와 방형 연못터에서 나온 금동입불상 및 보살상들.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대체로 7~9세기께 유물들로 화려한 장식 갑옷을 입은 신장상(불법을 지키는 신)이 새겨진 화상석, 치미(지붕 용마루 끝 날개장식) 등이 확인돼 격조 높은 건물이 들어섰음을 실증한다. 금동불입상, 금동보살입상 등 불상 7점도 같이 나와 유적 일대가 7~10세기 왕실사원으로 맥을 이었음을 보여준다. 주변 도로터 등의 배치 구도를 고려할 때, 남산 동쪽인 경주 보문동 일대까지 통일신라 도시계획인 바둑판 모양의 방리제가 실시됐다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게 조사단 쪽의 설명이다. 현장을 본 주보돈 경북대 교수(신라사)는 “신라인의 사상과 종교적 성소였던 낭산 일대를 중심축으로 거대한 왕실 사원이 만들어져 부근 도심 평지의 황룡사와 나란히 배치되는 구도를 이루면서 왕경의 핵심 경관을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짚었다.

발굴 현장에서 나온 건물터 주춧돌과 부재들.
낭산 기슭의 전 황복사터 삼층석탑 앞에 펼쳐진 발굴 현장. 푸른 포대로 덮인 부분이 대형 기단 건물터와 회랑터다.

 

낭산 동쪽 기슭은 황복사 탑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이 있어 전 황복사터로 불리운다. 황복사는 654년(진덕여왕 8년) 의상대사가 출가한 고찰로, 1942년 전 황복사터 삼층석탑을 해체할 당시 나온 금동사리함 뚜껑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란 명문이 드러나 신라왕실의 종묘 구실을 한 사원으로 추정돼 왔다. 탑 안에서 나온 금제여래입상·금제여래좌상(국보)은 신라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최고 명품들로 평가받는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8-01-31 09:06

경주서 황룡사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터 나왔다 (hani.co.kr)

 

 

경주서 황룡사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터 나왔다

국가사적인 경주시 구황동 낭산 기슭(전 황복사터)에서 대찰 황룡사에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으로 추정되는 거대 사찰터가 발견됐다. 대형 왕실사원의 위세를 보여주는 국내 발굴사상 최대규

www.hani.co.kr

 

 

[경주 덕동호]

 

입력 : 2018-03-04 21:01:01 수정 : 2018-03-04 21:00:59

경주 덕동호서 신라 무덤 무더기 발견 | 세계일보 (segye.com)

경주 도심 동쪽에 있는 덕동호에서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유구(遺構·건물의 자취·사진)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덕동호가 마르면서 드러난 땅에서 5∼6세기 신라 무덤으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됐다”고 4일 밝혔다.

 

 

입력 2018. 3. 3. 05:06수정 2018. 3. 4. 16:16

[단독] 경주 덕동호 바닥서 신라인 '공동묘지' 나왔다 (daum.net)

5~6세기 신라 석곽묘 100여기
가뭄으로 물 마르자 모습 드러내
수몰지역이어서 후속발굴 고심
 

 

입력 2013. 12. 5. 10:10수정 2013. 12. 5. 10:10

경주 천원마을 진입로에서 삼국시대 목곽묘 출토 (daum.net)

목곽 인골 및 출토유물

 

 

김성웅기자입력 2013. 12. 5. 18:03수정 2013. 12. 5. 19:01

경주에서 6세기 신라인 유골 묻힌 목관 발견 (daum.net)

 

박희송입력 2013. 7. 3. 09:48수정 2013. 7. 3. 09:48

경주 미탄사지에서 대형 금당지 발견 (daum.net)

 

 

입력 2011. 3. 22. 15:15수정 2011. 3. 22. 21:51

出자형 금동관.. 신라 '최고 수장층' 대형 고분 발굴 (daum.net)

 

 

입력 2009. 8. 27. 20:15수정 2009. 8. 27. 20:18

비담의 반란 근거지 '명활산성' 뜬다 (daum.net)

◇ 200년 12월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사적 제47호 명활산성

 

 

 

입력 2006. 10. 26. 08:05수정 2006. 10. 26. 08:05

경주 덕천리유물 '신라건국 밝혀질까' 관심 (daum.net)

[쿠키 사회]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 구간 완공을 앞두고 또다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건국시기인 사로국(斯盧國) 시대의 유적이 대량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요청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3만5천여㎡에 달하는 덕천리 유적 발굴에 나선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은 25일 현장에서 정징원·이청규 문화재위원과 김성구 국립경주박물관장, 이희준 경북대 교수, 김권구 계명대 교수 등이 참가한 가운데 지도위원회를 열고, 발굴유구 및 출토유물의 성격 등에 대한 설명과 향후 유적의 처리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박승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연구실장)은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29기와 원삼국시대 목관묘와 목곽묘 등 235기, 삼국시대 이후 도로유구 및 구상유구 등 36기 등 모두 300여기의 유구가 확인됐다"면서 "또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 원삼국시대 오리모양토기 등 유물 2천347점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박 책임조사원은 또 "덕천리 유적이 원삼국시대 대규모 분묘군임이 확인됨으로써 이 유적이 초기신라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집단으로 파악된다"며 "이를 통해 1∼3세기 초기 신라의 형성과정과 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수의오리모양토기와 마형대구 호형대구는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으로 이를 통해 덕천리 유적의 정치적 지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경주대 이근직 교수(신라사)는 "덕천리 유적 발굴성과를 존중한다면, 이들 유적을 남긴 주인공은 돌산 고허촌 혹은 사량부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다만 이 덕천리 유적 일대가 돌산 고허촌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신라 초기 사로 6촌에서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앞세워 건국한 것은 기원전 57년. 신라 6촌 및 촌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름이 기록돼 있고, 이 가운데 이번에 유적이 발견된 곳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촌장 소벌도리)으로 알려진 곳이다. 6촌은 이외에도 알천 양산촌과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 6촌도 나중에는 부(部)로 명칭이 바뀌고, 사로국이 나아가 '진한 6부(辰韓六部)'가 된다. 박혁거세 옹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고허촌장은 양산 기슭에 올라 나정에서 말이 하늘로 오르고, 그곳에서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바로 혁거세라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신라 건국에서 돌산 고허촌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 영남일보 경주=임준식기자 juns@yeongnam.com

 

 

 

2017-01-24 09:36 송고  

"신라 '임신서기석' 연대는 612년 아닌 552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문물연구' 9집 발간

(서울=뉴스1) 김아미 기자 

보물 제1411호 임신서기석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copy; News1


신라시대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인 보물 제1411호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의 연대가 552년임을 입증했다고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24일 밝혔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신라 문물 및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등에 관한 연구 논고 7편을 '신라문물연구' 9집에 게재해 발간, 배포했다. 신라문물연구는 2007년 이래 매년 발간돼온 국립경주박물관의 기관지로, 신라 문화 및 역사 관련 전문 잡지다. 

임신서기석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으로, 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용현씨는 '임신서기석의 문체와 연대의 재고찰'이라는 논고를 통해 임신서기석 연대가 문체 분석을 통해 552년임을 입증했다. 그동안 임신서기석의 연대는 612년설이 주류로 인식돼 왔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임신서기석은 신라시대 젊은이 두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성을 다바칠 것과, 유교경전을 3년 안에 습득할 것을 맹서한 것으로, 임신년 연대에 대해서는 그간 정해진 의견이 없었다"며 "간지(干支) 연대가 60년마다 반복되는 데다가 결정적인 자료가 결여됐던 탓에 유교 경전이 신라 사회에서 학습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을 기준으로 732년, 612년, 552년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논고에서는 '맹서하기를 … 라고 맹서한다'라는 서술어 반복 문체가 6세기대 신라 금석문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임신년의 연대를 552년으로 특정했다"며 "이번 연구를 계기로 임신서기석이 국어학에서 이두 발전 연구의 기준 연대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금동용봉무늬 그릇 © News1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무늬 그릇이 죽은 신라왕이 신선 세계로 올라갈 것을 염원해 만든 주술적인 제기라는 사실을 밝혔다. 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인 신대곤 씨는 '천마총 출토 금동용봉문합 연구' 논고에서 천마총 부장궤에서 출토된 용봉무늬 그릇의 무늬를 집중 분석하고, 이 무늬가 도교적 신선 관념이 내재된 신화의 일부를 선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박물관 측은 "신라인의 내세관이 중국 진·한대 이래의 선도(仙道)적인 정신세계와도 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물관 측은 "용봉무늬 그릇에 그려진 무늬의 배치가 고구려 고분 벽화의 공간 구분이나, 구도적 배치와 유사하다"며 "이 그릇은 신라의 궁중수공업 공방에서 제작된 부장 용기이며, 사람이 죽은 뒤 안락을 기원하고 신선 세계로 올라갈 것을 염원하는 데 사용된 주술적 제기"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신용비 학예연구사는 '경주황룡사 출토 금속품의 합금조성과 제작방법 조사' 논고에서 황룡사 회랑, 금당지, 목탑지 등에서 발굴된 금속품 14점을 성분 분석하고 합금조성과 제작기법을 추적한 결과, 은제금구(황룡87)은 금은제금구로, 청동제장식구(황룡8)은 동제장식구로, 청동판구(황룡132)는 동판구로, 아연판구는 연판구로 수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세은 학예연구사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집품에 대한 고찰'에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가시이겐타로 등 일본인 3인의 수집품이 광복 후 일본에 불법 반출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입수된 경위를 소개했다. 이들의 수집 목적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의 서화가 중국의 아류라고 규정하려는 풍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오 연구사는 지적했다. 
     
한편 국립경주박물관은 소장품을 매개로 한 전시와 연구를 통해 신라 문화를 조명해오고 있다. '신라문물연구 9집'은 그간 연구 성과물의 집적으로,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관련 기관과 학계에 배포될 예정이다. 내지 166면, 비매품.
amigo@

 

 

입력 2012. 2. 22. 02:35수정 2012. 2. 22. 02:35

 

'신라왕릉 중 7기만 진짜'라는 주장이 담긴 고 이근직(1963-2011)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의 책이 최근 발간됐으나 경주는 오히려 차분하다.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의 경우 백제 무령왕릉 외에는 주인공을 정확히 밝힐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왕릉의 가짜 주인공 학설은 학계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는 논란이다.

최근 출간된 학술서적 '신라왕릉 연구'는 지난해 6월17일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숨진 고 이 교수의 유저다.

 

책에 따르면 현재 신라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덤 중에서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서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홍덕왕릉의 7기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인을 잃었거나 잘못 알려졌다.

또 오릉 등 신라 상고기(上古期) 왕릉이라고 전승된 무덤은 7대 일성왕릉을 제외한 모두가 실제 왕릉과는 무관한 곳이고, 중고기 왕릉 중에도 23대 법흥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은 규모와 형식으로 미뤄 왕릉이 아니라 왕공귀족이 묻힌 곳이라고 주장했다.

여기다 지금의 진평왕릉은 실제로는 신문왕릉이며, 28대 진덕왕릉은 실제로 45대 신무왕릉이라고 주장하는 등 경주에 산재한 신라왕릉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내놨다.

특히 이 저서에 기술된 김유신묘가 실제로는 경덕왕릉이며 지금의 김인문묘가 김유신묘라는 주장은 다른 학자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다.

고 이 교수의 주장이 파격적인데도 불구, 경주지역 문화재계는 담담하다. 경주시 문화과 이준호 문화재연구담당은 "학계에서 왕릉 주인공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제기돼 왔다"며 "이 교수의 저서도 그 중의 하나로 본다"고 말했다.

또 경주의 한 문화계 인사도"신라왕릉을 포함한 전국의 왕릉 주인공의 경우 국가가 지정했고, 학계도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열정있는 학자의 개인적인 연구결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편 저자는 영남대 박사 학위 논문이었던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기 위해 생전에 수정과 보완을 거듭, 편집까지 끝낸 원고를 컴퓨터에 남겨 뒀고, 이를 유족과 주변 학자들이 정리해 완성시켰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신라왕릉을 기원부터 발전, 쇠퇴, 종말로 정리했고 역대 신라왕릉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를 연구, 눈길을 끌고 있다. 고인이 창립한 경주학연구원은 26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유저 발간 기념식을 연다.

김성웅기자 ks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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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 9. 10. 14:42수정 2010. 9. 10. 14:42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시 동부동 주택 내에서 재발견된 문무왕비편(文武王碑片)을 인수한지 3개월 만에 보존처리를 완료하고 일반에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할 문무왕비편 상단은 지난 6월 7일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될 당시 이물질이 일부 표면을 덮고 있는 등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특히, 앞면 가장자리 부분 등에 마모가 심한 상태였고 뒷면은 장기간 땅속에 묻혀 있었던 탓인지 결에 따라 깨져 있었다.

 

이에따라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물질을 제거하고 작은 비편 맞춤 등의 미세한 복원과정을 거쳐 오는 16일부터 시작되는 '원효대사' 특별전에서 이 비편을 공개할 예정이다.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비는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에 1796년(정조 20년) 비편들이 발견됐던 사실이 처음 전한다.

그러나 비편의 실물들은 그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가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으며 이번 '원효대사' 특별전에 공개될 비석의 상단 일부는 200여년만인 지난해 9월 경주시 동부동 주택 내에서 발견됐다.

한편, 문무왕비편이 공개될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1 - 원효대사'는 국립경주박물관이 기획한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가운데 첫 번째로 7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원효대사를 조명하는 전시다.jwki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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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금성면고분군]

 

2020-04-01 10:28

고대 무덤 320여기 '의성 금성면 고분군' 사적 됐다 | 연합뉴스 (yna.co.kr)

의성 금성면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의성 금성면 고분군 출토 금동관

[문화재청 제공]

 

의성 금성면 고분군 출토 그릇받침

[문화재청 제공]

 

 

[경산]

 

입력 2021. 9. 6. 09:00수정 2021. 9. 8. 16:08

1982년 1월14일 해외 밀반출 되려던 유물이 부산세관에 의해 극적으로 적발된다.

은제 새날개형관장식과 순금제귀고리, 금은제 고리자루큰칼, 은제 허리띠 등 15점이 압수됐다. 유물을 빼돌리려던 장물업자 3명은 대구 중부경찰서로 넘겨졌다. 이 유물은 경북 경산 임당동의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복숭아밭)에서 훔친 도굴품이었다.

임당유적에서 확인된 순장 무덤. 출토된 고인골의 DNA 분석결과 주곽(으뜸덧널)에 순장된 4~8세 여아는 부곽(딸린 덧널)에 묻힌 순장자 부부(④⑤)의 딸인 것으로 분석됐다. 무덤 주인공(①)을 위해 일가족이 순장된 경우이다.|영남대박물관 제공


■해외 밀반출 직전에 적발된 도굴품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소국인 압독국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압독국은 102년(신라 파사왕 23) 사로국(신라)에 투항했다. 예부터 이 일대, 즉 임당동과 조영동 등에 상당한 고분이 산재해있었다. 이곳 평야는 압독의 다른 이름(압량)을 따서 압량벌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에 신경 쓰느라 이곳의 정식발굴 및 보존대책은 뒷전이었다. 몇차례 도굴의 화를 입었지만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고분 9기가 산재된 과수원 구릉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 밀반출 직전 적발된 것이다.

뒤늦게 찾은 도굴 현장은 처참했다. 문화재위원회가 부랴부랴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6월24일부터 12월까지 도굴분과 인접고분을 대상으로 정식발굴이 이뤄졌다. 발굴단(영남대박물관)이 문화재관리국장(문화재청장)에게 12월14일 제출한 ‘임당동 고분 발굴 성과 보고서’를 보자.

임당유적에서 확인된 또다른 순장무덤(5세기 초반). 이 무덤의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성(36~50세)과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는 아빠와 딸 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 주곽에는 성인남성(36~50세)으로 보이는 무덤 주인공 주변에 10대 전후의 순장자들이 보인다. 그러나 성별을 알 수 없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도굴분(2호분)은 2개의 무덤이 합쳐진 형태로 조성됐다. 각각의 무덤은 주곽(으뜸덧널)과 부곽(딸린덧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도굴됐지만 3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주인공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백화수피·은제허리띠 일부와, 굽은옥, 유리구슬, 마름모 문양의 비단옷 및 금박 문양의 천조각 등이 발견됐다.

북쪽 주곽에서는 남녀 인골편과 순장된 개 3마리가 발견됐다. 주인공이 키운 반려견이었을 것이다. 부곽에서도 금동제 말안장 등 말갖춤새와 각종 토기, 그리고 토기 속에 든 닭뼈·상어뼈·돼지뼈·생선뼈 등이 확인됐다. 여기에서도 30대 초반의 남자 순장 인골이 발견됐다. 키가 172㎝ 정도로 측정됐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5·6·7호분은 여러 개의 봉분을 차례로 하나하나 연결한 형태의 고분이었다. 무덤이 시차를 두고 계속 조성된 것이다. 각 무덤은 도굴분처럼 주곽과 부곽으로 구성돼있었다.

여기서도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나왔다. 특히 7호분에서는 완형의 금동관을 비롯해 금제 장신구와 굽은옥, 철창, 꺽쇠 등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신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신라의 지배를 받고있던 옛 압독국 지도자의 후손이 무덤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짙다.

영남대박물관은 머리뼈 분석과 얼굴 근육층과 형태소 형성, 피부층 완성 등으로 1500년전 임당 고분군에 묻힌 무덤주인공(주피장자)와 순장자의 얼굴을 복원했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1000년의 생활사

이후 임당동과 조영동, 부적리 등에 대규모 택지개발이 본격화했다.

제대로 된 문화재보존 조치없이 공사가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유구와 유물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봉분이 남아있는 지역과, 공사중 유구가 노출된 곳을 대상으로 두차례(1988·1989~90)에 걸쳐 대대적인 후속발굴이 이뤄졌다. 이후에도 유적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가 이어졌다.

발굴성과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압량벌과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릉 위에 조성된 대규모 복합유적(분묘 및 생활)이 노출됐다. 기원전 4세기~기원후 7세기 사이 1000년의 생활사까지 복원될 수 있는 유적이었다. 구릉에 토성이 축조됐고, 토성 주변에 마을이 형성됐다. 토성 북쪽으로는 저습지와 환호(마을 방어용으로 둘러 판 도랑)가 조성됐다. 제사공간도 마련됐다. 토성의 주변에는 고분(임당동·조영동·부적리)이 축조됐다. 무덤은 모두 1700여 기가 확인됐고, 2만5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1982년 도굴된 무덤(2호분) 인근의 7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왼쪽)과 금동신발. 신라 중앙정부가 옛 압독국의 후예로 이 지역을 다스린 토착지도자에게 내린 사여품으로 추정된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왜 마을전체가 전소되었을까

특징적인 유구와 유물만 살펴보자. 기원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77기가 확인됐다.

부뚜막과 구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 화재로 소실된채 확인됐다. 기둥과 서까래까지 불에 탔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긴 달걀형 토기, 손잡이 달린 그릇, 시루, 항아리 등 생활토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을에서는 변기로 쓰인 항아리가 박혀 있기도 했다.

왜 마을이 불에 탔을까. 전쟁 때문에? 혹은 전염병 창궐로? 누군가의 실화 혹은 방화로?

계곡부에 형성된 저습지에서도 유의미한 유물이 쏟아졌다. 부산, 김해에서 반입된 토기는 물론이고, 일본제 하지끼(土師器·적갈색 연질토기), 중국 오수전(기원전 2~기원후 7세기 사용) 등이 수습됐다.

이곳 주민들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임당유적에서 순장자의 발밑에 묻어둔 상어를 순장자와 함께 복원한 모습. 임당 고분에서 다양한 제사 음식 가운데 특히 많은 양의 상어뼈가 눈에 띈다. 연구자들은 상어고기를 토막내어 소금에 절인 돔배기를 떠올린다. 경상도 내륙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돔배기’가 2000~1500년전 사람들도 즐겼을 것이다.|국립대구박물관 복원


임당 유적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가 ‘대호(大壺·큰 항아리)’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고분의 부곽 또는 주구(무덤 주변을 돌려 판 도랑) 등에서 적게는 2점, 많게는 8~9점 들어 있었다. 대호 안에는 곡물이나 술 등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발굴단(영남대박물관)은 이 대호를 ‘압독국의 명작’이라 한다.

임당동·조영동·부적리 고분 주인공의 위상을 드러낸 유물이 바로 금동관을 비롯한 황금제 유물이다.

특히 도굴 직후에 발굴한 7호분에서 확인된 완형의 금동관은 신라제품일 것이다.

5세기 무렵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 즉 옛 압독국왕의 후예에게 내린 사여품이었을 것이다. 금동관 뿐 아니라 금동관모,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 신라 귀금속 일체가 출토됐다.

임당유적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된 한 무덤의 부곽에서 꿩 70마리분을 담은 항아리가 확인됐다. 특이하게도 살이 많은 부위만 선별해서 부장했다.|영남대박물관 제공


■DNA로 분석한 1500년 전의 삶

뭐니뭐니 해도 임당 유적의 핵심은 고인골이다. 주로 산성 토양인 국내 발굴 현장에서 인골은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당동 인근의 토양은 진흙이 굳어져 생긴 무른 퇴적암 계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무른 암반을 깎아서 묘광을 조성한 뒤 그 틀 안에 무덤을 조성했다. 시간이 지나면 물과 진흙이 밀폐된 묘광 안에 가득 차게 됐다. 그렇게 바깥으로부터 산소유입이 차단된 진공상태가 유지됐고, 그 안에 안장된 인골도 쉽게 썩지않았다. 게다가 퇴적암은 알칼리성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인골은 최근까지도 환영받는 자료가 아니었다. 양질의 인골이 수습된다 해도 동티(금기시된 행위로 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가 난다고 여겼다. 조상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처럼 불효는 없었으니까…. 곧바로 화장하거나 이장하는 것을 죽은 이를 위한 기본예의라 여겼다.

임당 유적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가 ‘대호(大壺·큰 항아리)’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고분의 부곽 또는 주구(무덤 주변을 돌려 판 도랑) 등에서 적게는 2점, 많게는 8~9점 들어 있었다. 대호 안에는 곡물이나 술 등이 담겨있었을 것이다.|영남대박물관 제공


그러나 인골을 극히 터부시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1980년대) 임당유적을 발굴한 영남대박물관 등은 출토된 인골의 조각편까지 놓치지 않고 물체질까지 해서 걸러놓았다.

당시 발굴을 총지휘한 정영화 영남대 교수가 고인골을 탐구하는 구석기 전공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당동·조영동·부적리 고분 등에서 발굴한 인골은 총 500여 구에 이르렀다. 그 중 영남대박물관이 259구 정도 소장해왔다.

 

그렇게 모아놓은 인골이 이제와서 1500~2000년 전 역사를 복원하는 ‘신의 한수’가 될 줄이야.

최근들어 뼈에 담겨있는 DNA를 통해 옛 사람의 혈연관계와 건강 및 질병상태 등을 분석하는 학문이 생겼다. 고고학과 유전학을 융합한 고고유전학이다. 고고유전학은 고인골에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서 개인과 집단의 유전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은 임당유적의 고인골 가운데 46개 시료를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의 과학 연구소에 보냈다. 사실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1500년 된 고인골에서 DNA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낭보가 들렸다. 시료에서 뼛가루를 내어 DNA를 추출했더니 46점의 시료 중 35점에서 사람의 DNA가 존재한다는 소식이었다.

임당유적에서는 금동관 뿐 아니라 금동관모,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 신라 귀금속 일체가 출토됐다. 5세기 무렵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 즉 옛 압독국왕의 후예에게 내린 사여품이었을 것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일가족 순장의 충격

DNA 분석 성과는 흥미로웠다. 예컨대 5세기 초반 축조된 무덤을 보자. 이 무덤의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성(36~50세)과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는 아빠와 딸 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5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또다른 무덤에서는 주곽에 안장된 주인공(성인 남성·31~40세)의 곁에, 여자아이(4~8세)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 축조된 부곽 안에는 성인남성(41~60세)과 성인 여성(36~50세)이 순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DNA 분석결과 놀라웠다.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녀는 부부이며, 이 부부의 딸이 주곽의 무덤주인공 곁에 순장된 여아(4~8세)임을 밝혀낸 것이다.

또 5세기 후반 무덤의 주곽에 순장된 어린아이와, 20여 년 뒤 축조된 또다른 무덤의 순장자(혹은 주인공)는 남매 관계로 추정됐다.

목곽묘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 화로형토기, 목짧은토기, 손잡이달린 항아리, 굽다리접시, 항아리, 입넓은작은 항아리, 컵형토기, 소형그릇받침, 뚜껑있고 귀달린 항아리, 갑옷, 철손잡이달린 도끼 등이다.


■시동·시녀·유모에서 호위무사·집사·기술자까지

한가지 의문점이 든다. 무덤주인공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임당 유적의 순장자들은 무덤 주인공과 함께 주곽(으뜸덧널)에 묻힌 경우와, 부곽(딸린 덧널)에 묻힌 경우로 나뉜다. 주인공과 함께 주곽에 순장된 12명 중에는 1명을 빼고 모두 20세 이하인 점이 눈에 띈다.

따라서 주곽에서 주인공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은 생전에 주인공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시동이나 시녀일 가능성이 짙다. 만약 무덤 주인공이 어린아이라면 어땠을까. 어떤 무덤에서는 3~5살 되는 어린 주인공을 위해 15세 전후의 소년이, 6~10세의 주인공을 위해 성인(36~50세)이 각각 순장된 흔적도 보인다.

주인공이 2~4세인 무덤에서는 같은 또래의 어린 순장자와 함께 성인 여성(21~35세)이 묻혔다. 무덤 주인공인 어린이를 평소 돌보던 유모나 보모가 순장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임당유적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불에 탄 흔적. 임당에서는 기원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77기가 확인됐다. 그런데 대부분 화재로 소실된채 확인됐다. 기둥과 서까래까지 불에 탔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양한 생활토기가 그대로 있었다. 전쟁 때문에, 전염병 창궐로, 아니면 누군가의 실화 혹은 방화로 마을전체가 소실되었을 것이다.|영남대박물관 제공


이밖에도 무덤주인공의 첩이나 소실로 보이는 여성이 묻힌 흔적도 보인다.

임당유적의 순장 모습을 살펴보면 한가지 특이점이 있다.

순장자가 금동귀고리 등 장신구와 구슬, 철제대도(큰칼), 도자(작은칼)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숫돌과 쇠낫 등이 세트로 놓여져 있었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무덤주인공과 함께 순장된 이들의 신분이 만만치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순장자들이 노비계급인 시동이나 시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과 신변을 관리하고 지키던 집사나 호위무사, 혹은 전문기술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순장자의 머리맡에 제사유물이 놓여있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주인을 따라 죽는 순장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핟

임당 유적의 계곡부에 형성된 저습지에서는 부산 및 김해에서 반입된 토기는 물론이고, 일본제 하지끼(土師器·적갈색 연질토기), 중국 오수전(기원전 2~기원후 7세기 사용) 등이 수습됐다. 이곳 주민들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순장의 비극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필자는 근본적인 회의감을 버릴 수 없다.

순장자들의 신분이 높든 낮든 결과가 달라지는가. 주인의 사망과 함께 졸지에 따라 죽게 되는, 그것도 한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운명을 달래기 위해 까짓것 그저 던져주는 마지막 은전은 아니었을까.

특히 가족 단위의 적나라한 순장 풍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지금의 잣대로 당대의 순장풍습을 재단할 수는 없다. 순장은 고대 사회의 보편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금동귀고리를 달아주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해도 한사람도 아닌 가족 전체가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순장제도가 공식으로 폐지된 것이 6세기초, 즉 502년(신라 지증왕 3년)이었다. <삼국사기>는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신라본기·지증왕조’)고 기록했다.

옛 압독국 지역인 경산에서 가족 단위로 자행된 순장 풍습도 이 무렵부터 자취를 감춘다. 500년 무렵, 즉 6세기 극초기에 죽어 묻혀야 했던 일가족이야말로 불운의 순장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임당유적의 전경.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고, 압량(압독의 다른 이름)의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임당유적.예부터 임당동과 조영동, 부적리 등에 상당한 고분이 산재해있었다. 이곳에서 대규모 복합유적(분묘 및 생활)이 발견됐다. 기원전 4세기~기원후 7세기 사이 1000년의 생활사까지 복원될 수 있는 유적이었다.|영남대박물관 제공


■숙취가 심했을 1500년 전의 여성

DNA로 파악한 또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바로 각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의 혈연관계였다.

즉 조부와 손자녀, 삼촌(큰아버지)와 조카, 사촌지간, 심지어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제 3명의 DNA까지도 확인됐다.

영남대박물관은 지금 DNA와 법의학적인 분석으로 인골의 키와 함께 얼굴까지 복원하고 있다.

임당유적에서 출토된 인골 37개체의 대퇴골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른바 경산인(남성)의 평균키는 165.36±3.8㎝ 였다. 2019년부터는 관련 전문기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무덤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녀 성인(남 21~40, 여 21~35세) 2명과, 순장자로 보이는 여성 1명(21~35세)의 얼굴을 복원했다.

특히 지난해(2020년) 복원대상인 남자 주인공과 여성 순장자를 대상으로 인골DNA를 분석했더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두 인골의 혈액형이 AO형이고, 젖당 내성을 갖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1500년 전 살았던 사람의 혈액형까지 측정했고, 젖당을 포함한 우유를 마셨을 때 배탈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까지 찾아낸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여성 순장자는 알코올을 빠르게 분해하지 못해 술에 금방 취하고 숙취가 심했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여성은 급성 심장사, 이상지질혈증, 비만 등의 심혈관계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또 남성 주인공의 경우도 급성 심장사나 죽상동맥경화증 등에 취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당유적은 1982년 1월14일 해외 밀반출 되려던 유물이 부산세관에 의해 극적으로 적발되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은제 새날개형관장식과 순금제귀고리, 금은제 고리자루큰칼, 은제 허리띠 등 15점이 압수됐다. 이 유물은 경북 경산 임당동의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복숭아밭)에서 훔친 도굴품이었다.|영남대박물관 제공


■1500년 전의 영남 소울푸드

임당유적에서는 소소한 당대의 생활사도 읽을 수 있다.

특히 고분에 부장된 토기에는 다양한 음식 잔존물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상어고기이다. 임당 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제사 음식 가운데 특히 많은 양의 상어뼈가 눈에 띈다. 이를 두고 경상도 내륙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돔배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돔배기’는 상어고기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음식이다. 포항의 과메기, 안동의 간고등어와 견줄수 있는 경북의 별미다. 포를 뜬 돔배기를 꼬치에 가지런히 꿰어 식용유를 두른 팬에 굽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경상도 사람들의 ‘소울 푸드’라고 한다.

그렇다면 1500년 전 임당동 사람들도 무덤 주인공이 평소 즐긴 돔배기를 토기에 담아 넣어주었을까.

아니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한마리를 통째로 무덤의 빈공간에 넣어준 케이스도 있다. 죽어서도 어릴 적부터 즐겼던 ‘소울푸드’를 마음껏 먹으라는 배려의 발로였을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이 꿩뼈이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 재위 654~661)가 하루에 쌀 3~6말, 꿩 9~10마리를 먹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임당유적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된 한 무덤의 부곽에서 꿩 70마리분을 담은 항아리가 확인됐다. 주인공이 묻힌 주곽(으뜸덧널)에는 금동관과 금동허리띠 같은 최고급 유물(조각)이 들어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훗날의 태종 무열왕처럼 무지무지 꿩을 좋아했던 지역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82년 도굴분(2호분)과 함께 발굴조사된 5·6·7호분. 특히 7호분에서는 완형의 금동관을 비롯해 금제 장신구와 굽은옥, 철창, 꺽쇠 등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신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영남대박물관 제공


■물체질한 인골의 증언

영남대박물관은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임당 발굴과 고고학의 세계’ 특별전을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지금까지 30년의 임당유적 조사성과를 총정리하는 전시회란다.

필자는 특별전에 발맞춰 이 글을 정리하면서 참 기막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굴의 화를 입고 너덜너덜 상처난 채로 노출된 고분군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훗날을 위해, 그때는 아무도 주의깊게 들여다보지 않은 인골 등의 유물을 물체질까지 해서 걸러낸 결과가 이렇게 역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법의학과 DNA 분석을 통해 복원된 ‘1500년 전 경산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떤가. 지금의 경산 사람들과 비슷한가. (이 기사를 쓰는데 정인성 영남대박물관장과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역사스토리텔러 lkh@kyunghyang.com

 

 

입력 2019-09-26 03:00업데이트 2019-09-26 03:00

경북 경산시 임당동 조영동 고분군에서 2017년 발견된 압독국의 지배층 무덤. 금제 귀고리와 은제 허리띠가 함께 출토됐으며 무덤 주인의 발치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아이 인골이 나왔다. 동아일보DB
 
고대 한반도의 ‘가족 순장(殉葬)’ 습속이 DNA 분석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영남대 박물관(관장 정인성 교수)은 경북 경산시 ‘임당 고총’에서 출토된 고(古) 인골의 유전자 분석 결과 무덤에 함께 순장된 이들이 부부와 딸, 부녀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시간차를 두고 다른 무덤에 순장된 남매도 있었다. 이들은 무덤 주인의 가족은 아니고 순장된 사람들끼리 가족이었다.

김대욱 영남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은 10월 4일 경북 경산시 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 ‘고대 인골 연구와 압독국(押督國) 사람들’에서 ‘임당 고총에서 확인된 가족 순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임당동 고분에서 출토된 5세기 압독국 여성의 인골과 이를 바탕으로 복원한 얼굴(작은 사진). 영남대박물관 제공
 
발표문에 따르면 경산시 조영동의 5세기 고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인골 외에 순장된 이들의 유골 4개체가 출토됐다. DNA 분석 결과 이 가운데 3개체는 부부와 어린 딸인 것으로 나타났다. 무덤의 주곽(主槨)에 무덤 주인과 함께 순장된 2명 가운데 1명이 4∼8세의 여아였는데, 부곽(副槨)에 순장된 2명이 이 여아의 부모로 확인된 것이다.

조영동의 또 다른 5세기 고분 부곽에서 발견된 인골 2개체도 부녀 사이로 밝혀졌다. 10세 안팎의 여아와 아버지가 나란히 순장된 것이다. 5세기 말과 6세기 초의 서로 다른 무덤에서 각각 발견된 유골이 남매 사이로 밝혀지기도 했다.

경산시의 한 5세기 고분의 모식도. 주곽(오른쪽 네모)에 무덤의 주인(1)과 함께 어린 여자아이(2)가 순장됐는데, DNA 분석결과 부곽(왼쪽 네모)에 순장된 남성(3)과 여성(4)이 이 여아의 부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대욱 연구원 제공
김대욱 연구원은 “DNA 분석으로 고대 경산 지역 가족 순장의 습속을 파악했다”면서 “경주를 비롯한 신라 지역과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고총에서 확인된 다수의 순장자들 중 일부도 가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고 밝혔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정확히 절반씩 물려받지만 촌수가 멀어질수록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떨어진다. 이를 이용하면 인골의 촌수를 알 수 있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전달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일치 여부를 통해 모계친족도 가릴 수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발표문에서 “유전자 분석 결과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일부 성인 남성들은 부계 친족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전장 유전체(전체 유전자 염기서열)’ 자료를 분석해 순장자 사이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서 출토된 남성 순장자 4명이 같은 모계혈족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번 분석 결과가 순장자들의 신분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장된 이들을 노예나 전쟁 포로로 보던 견해 대신 시종이나 시동(侍童), 호위무사, 재산 관리자 등 무덤 주인과 가까운 사이라고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순장자를 위한 제사 유물이 부장되거나,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순장자의 유골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임당 고총’은 신라에 병합된 소국 압독국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1980년대 3차례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인골 259구가 출토됐다. 2012년부터 인골 분석이 시작됐고, 지난해 9월부터는 독일 막스 플랑크 인류사 과학연구소에서 DNA 분석을 진행했다. 인골 시료 46점 가운데 35점에서 DNA가 추출됐다.

영남대 박물관은 최근 가톨릭대 의과대학 연구팀과 함께 5세기 말 임당동 고분에 묻힌 21∼35세가량의 여성 인골을 컴퓨터단층촬영(CT)해 얼굴을 복원하기도 했다. 박물관은 ‘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을 되살리다’ 특별전을 11월 29일까지 열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송고시간2019-09-18 11:02

"1500년 만에 베일 벗은 압독국 여인"…경산시 얼굴형 복원

임당동 고분 출토 유골 토대, 영남대박물관 특별전서 공개

1500년 만에 베일 벗은 압독국 귀족 여인

[경산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경산=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경북 경산시는 1천500여년 전 고대 압독국(押督國) 귀족 여인의 얼굴형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18일 밝혔다.

압독국은 경산지역에 기반을 둔 고대 소왕국의 하나로 전해진다.

이번에 복원한 압독국 여인 얼굴은 1982년 경산시 임당동에서 발굴한 압독국 지배자급 무덤(5세기경 축조)에서 출토된 유골을 토대로 했다.

 

영남대 박물관 주도로 서울 가톨릭대 의과대학 김이석 교수팀이 CT 촬영을 통해 3차원 머리 뼈 모델을 완성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이원준 박사가 근육과 피부를 복원했다.

이어 미술가 윤아영 작가가 그래픽 채색과 사실화 작업을 마무리했다.

경산에서 출토된 압독국 시대 유물과 유골

[경산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경산시는 지난 3월 영남대와 '압독국 문화유산 연구·활용 프로젝트' 추진 협약을 맺고 임당동, 조영동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과 동식물 유존체, 고대 식생활사 등을 연구해왔다.

복원된 얼굴형은 26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영남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을 되살린다' 특별전에서 공개한다.

전시회는 얼굴 복원 과정과 고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인골 연구 성과도 소개한다.

경산시는 앞으로 성인 남성과 어린이 인골, 순장 계층별 인골도 차례로 복원할 계획이다.

또 고분에서 함께 발견된 상어 뼈, 조개껍데기, 꿩 등 조류와 포유류 유존체를 이용해 고대의 제사 음식 종류와 유통 경로도 연구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인골 전문가들을 초청해 '고대 인골 연구와 압독국 사람들'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도 열 계획이다.

duck@yna.co.kr

 

 

 

송고시간2017-11-23 07:32  

2천년전 압독국 왕릉 경산서 발굴…"규모·부장품 압도적"(종합) | 연합뉴스 (yna.co.kr)

고대 목관묘 중 부채 3점 발견은 최초…인골도 남아 있어

경산에서 나온 2천년 전 수장급 무덤.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경산=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2천년 전 경북 경산 일대를 지배한 압독국(押督國) 시대의 왕릉급 목관묘(木棺墓·나무널무덤)가 발견됐다.

이 무덤은 기원 전후에 한반도 남부에서 유행한 통나무 목관묘로, 규모나 부장 유물이 동시대 다른 무덤을 압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덤을 둘러본 전문가들은 이 목관묘가 창원 다호리 1호 목관묘와 경주 조양동 38호 목관묘의 중간 단계 무덤으로, 경산 압량면 일대에 있었던 고대 소국인 압독국의 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왕릉 여부는 추가 조사를 통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경산하양택지개발예정지구 내 하양읍 도리리 115-5번지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압독국 시대 왕릉급 무덤을 포함한 목관묘 2기를 발굴했다고 23일 밝혔다.

경산 목관묘에서 나온 동검(왼쪽)과 부채(오른쪽).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왕릉급 무덤으로 지목된 6호 목관묘는 참나무로 제작됐다. 이 무덤은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전체적으로는 ㅍ자 형태다. 통나무를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길쭉한 나무 판재를 사방에 세웠다. 가로는 약 80㎝, 세로는 280㎝인 직사각형이다.

목관 안에서는 피장자의 두개골과 치아, 팔뼈, 정강이뼈가 일부 확인됐다. 고대 목관묘에서 인골이 출토된 것은 처음으로 알려졌다.

무덤 내외부에서는 청동거울, 청동검, 철검, 청동마(靑銅馬), 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유물은 깃이 달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채다. 한 점은 시신의 얼굴 위에서 나왔고, 양손에 쥐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두 점은 허리춤에서 발견됐다.

시신의 얼굴을 가린 부채는 창원 다호리, 성주 예산리, 김해 봉황동, 경산 압량면 등지의 목관묘에서 1∼2점이 나왔으나 한꺼번에 3점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연구원은 강조했다.

시신의 어깨 위쪽에서는 지름이 10㎝에 이르는 청동거울이 출토됐다. 이에 대해 연구원 측은 경주 조양동 38호분에서 나온 거울과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또 팔뼈 아래에서는 깨뜨려 묻은 지름 17.5㎝의 소명경(昭明鏡)이 발견됐다.

또 무덤 바닥에서는 판상철부(板狀鐵斧·판 모양 쇠도끼) 26점도 드러났는데, 추가 조사를 통해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성림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목관 아래에는 요갱(腰坑·허리 부근 아래쪽을 판 구덩이)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보통 요갱에는 귀중한 부장품을 넣기 때문에 목관을 들어내고 추가 조사를 하면 더 많은 유물을 찾아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목관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목관과 유물 가운데 한쪽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며 "보존처리를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무덤들은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는 곳에 입지했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 인근에서는 다수의 목관묘가 발견된 바 있다.

경산 하양읍에서 나온 적석목관묘.

[그래픽] 압독국 왕릉급 무덤 발굴 위치.
 

 

 

김연주입력 2017. 11. 23. 17:26수정 2017. 11. 23. 21:33

2천년 전 최고위층 목관묘 나왔다 (daum.net)

규모 압도적..경산서 발견
한곳서 부채 3점 출토도 처음
목관묘 6호서 출토된 부채.
 
원삼국시대 최상위 수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관묘가 경산에서 발견됐다.

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은 23일 경산 하양(무학)지구 택지개발사업 용지 내 하양읍 도리리 115-5 일원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해 원삼국시대 목관묘 2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목관묘에서는 청동검, 철검, 청동거울, 청동마(靑銅馬), 부채, 동과, 재갈 등의 중요 유물이 함께 나와 당시 왕릉에 해당하는 최상위 수장묘로 추측되고 있다.

2기 중 최상위 수장묘로 추측되는 6호 목관묘는 참나무로 제작됐다. 이 무덤은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전체적으로는 ㅍ자 형태다. 통나무를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길쭉한 나무 판재를 사방에 세웠다. 목관 안에서는 피장자의 두개골과 치아, 팔뼈, 정강이뼈 일부가 확인됐다. 고대 목관묘에서 인골이 출토된 것은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 일대에는 대구 만촌동유적, 경산 임당동유적, 영천 어은동과 용전동 유적 등이 다수 포진돼 있지만 이번 발굴된 목관묘 6호는 규모나 부장 유물이 동시대 다른 무덤을 압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칠초동검과 칠초철검 4점, 부채 3점, 중국제 청동거울 2점 등이 한 무덤 안에서 발견됐다. 다량의 부장품으로 미뤄 보아 피장자 신분이 상류층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유물은 깃이 달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채다. 시신의 얼굴을 가린 부채는 창원 다호리, 성주 예산리, 김해 봉황동, 경산 압량면 등지의 목관묘에서 나왔으나 한꺼번에 석 점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성림문화재연구원 측은 "양질의 중국제 청동거울과 부채, 칠초동검을 부장한 금호강 유역의 원삼국시대 최고 위계의 무덤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의 축조 방식와 목관의 구조를 복원할 수 있는 실물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전했다.

일각의 경북 경산 일대를 지배한 압독국시대의 왕릉급 무덤 추정에 대해 성림문화재연구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김동숙 성림문화재연구실장은 "압독국은 삼국시대의 소국이나 이 무덤은 원삼국시대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삼국시대는 초기 철기시대 이후부터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압독국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2세기 초반 신라에 병합됐다는 경산 압량면 일대의 소국이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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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 4. 17. 20:10수정 2015. 4. 20. 12:00

국가사적 도굴 오래전인데..관계당국은 까맣게 몰랐다 (daum.net)

 

국가사적 도굴 오래전인데..관계당국은 까맣게 몰랐다

[한겨레]경산 임당동 고분 1호분 천장 함몰문화재청쪽 "80~90년대초 뚫은 듯"4~6세기 삼국시대 주요 무덤 유적으로, 국가사적(516호)인 경북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이 오래 전 무단도굴된 것으로 드

v.daum.net

 

 

[대구]

2023.11.16.

대구 구암동 고분군서 첫 '日'자형 무덤 발견…유물 250점 출토 (msn.com)

日자형 무덤 &copy;&nbsp;제공: 연합뉴스

 

유물 &copy;&nbsp;제공: 연합뉴스

 

 

 

입력 2018-05-16   |  발행일 2018-05-16 제2면   |  수정 2018-05-16

‘적석석곽분’ 대구 구암동 고분군 史蹟 된다 (yeongnam.com)

함지산 서쪽 5~6세기 무덤 360기
문화재청, 국가문화재 지정 예고
1호분 유물 신라 지역세력 묘 추정
“독특한 무덤양식 고대사 연구 자료”

대구 구암동 고분군 전경. 작은 사진은 2015년 발굴된 1호분 모습. <문화재청 제공>

 

 

[경북 경산]

2018.05.24 09:45

"경산 부적리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16호로 지정"- 헤럴드경제 (heraldcorp.com)

[사진설명=경북 경산시 압량면 &lsquo;부적리고분군&rsquo;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16호 &lsquo;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rsquo;으로 추가 지정됐다. 사진제공=경산시]

 

 

[경북 청도]

 

입력 2008. 1. 2. 17:45수정 2008. 1. 2. 17:45

경북 청도,수몰 예정지서 신라고분 900여기 발견 (daum.net)

 

[문경 고모산성]

 

입력 2007-06-11 03:08업데이트 2009-09-27 04:13

신라 지하목조건축물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

 

 

[남원]

입력 2014. 7. 10. 04:42수정 2014. 7. 10. 04:42

남원서 신라계 돌방무덤 발굴 (daum.net)

 

[충북 옥천]

 

등록 2019-10-29 15:23:42

옥천 공사현장서 신라시대 굽다리접시 출토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이삭 기자입력 2018. 8. 16. 18:37수정 2018. 8. 16. 19:13

신라·백제 격전지 충북 옥천서 7세기 고대 도로 발견 (daum.net)

[경향신문] 삼국시대 당시 신라와 백제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벌였던 충북 옥천에서 신라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로가 발견됐다.

충북문화재연구원은 옥천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옥천읍 서대리 일대를 조사한 결과 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고대 도로를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충북 옥천군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고대 도로 전경.|충북문화재연구원 제공

 

 

기사입력 2015/10/29 [11:05]

옥천 이성산성, 5세기 신라 토성으로 확인: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강원]

 

2020.07.06

한쪽 벽 뜯고 출입할수 있는, 신라 '앞트기식 돌방 무덤' 확인 (daum.net)

강원 양양 후포매리 고분군 조사
문화재청 "양양, 신라의 동해안 북진의 전략적 요충지"

[서울=뉴시스]양양 후포매리 고분군 조사 현장(1호분)(사진=문호재청 제공)2020.07.06 photo@newsis.com

 

 

입력 : 2018.11.01 15:53 수정 : 2018.11.01 15:59

이기환 선임기자

삼국시대 최전방 강릉에서 신라 장수가 입었던 갑옷이 출토됐다 - 경향신문 (khan.co.kr)

강릉 초당동 유적에서 발굴된 4세기 신라시대 찰갑. 당시 강릉지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간 국경충돌이 종종 일어났다.|강원고고문화연구원 제공

 

강원 강릉 초당동 유적에서 4세기 신라시대 찰갑(札甲·작은 미늘조각을 꿰매어 만든 갑옷)이 발굴됐다. 영동지역에서 신라시대 갑옷이 완형으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찰갑과 함께 확인된 신라시대 토기류. 토기편년으로 보아 4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강원고고문화연구원 제공

 

 

등록 2017.01.16 11:40:41

용인서 신라시대 추정 고분 2기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용인=뉴시스】이정하 기자 = 경기 용인시는 기흥구 보정동 산 121번지 일대 10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보정동 고분군'에서 6세기말~7세기초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2기와 유물 15점을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지역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2016.01.16 (사진=용인시 제공)  phot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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