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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 고고학 (1) 경주 금척리고분군, 경주 조양동유적, 경주 사라리유적, 경주 덕천리유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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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 고고학 (1) 경주 금척리고분군, 경주 조양동유적, 경주 사라리유적, 경주 덕천리유적

대야발 2024. 5. 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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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마립간시대로 넘어가기 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유적들을 알아봅니다. 경주 금척리고분군, 경주 조양동유적, 경주 사라리유적,  경주 덕천리유적들이 있습니다. 

 

 

 

경주 금척리고분군은 대릉원의 돌무지덕널무덤(적석목곽묘)보다 1세기 앞선 4세기부터 조성된 사실이 밝혀져,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가 5세기 등장한 신라중앙의 마립간에 앞서 금척리 일대를 지배한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경주 조양동유적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무덤은 1981년 말 발굴된 38호 묘인데요, 무덤 내부에서 다량의 철기와 함께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청동거울이 4개나 출토됐습니다. 최종규 학예사는 거울에 기준하여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무덤들이 1∼3세기까지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이 견해가 국내외 학자들에게 수용되면서 미지의 세계로 남겨졌던 신라 초기 300년의 실상이 비로소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경주 사라리유적에서 1996년 봄에 확인된 130호 묘는 무덤구덩이 크기가 조양동 38호 묘보다 조금 더 큰 3.3m인데요, 파들어 가기 시작하자 말 재갈, 쇠창과 함께 토기류가 확인됐습니다. 아래로 더 내려가니 망자의 유해에 착장했던 호랑이 모양 허리띠장식과 팔찌가 드러났고 그 주변에서는 칼집에 든 칼과 청동거울, 농기구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습니다. 특히 무덤 바닥에 쫙 깔린 길이 27cm 내외의 쇠도끼 70점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쇠도끼는 철소재로도 쓰였고 시장에서는 화폐처럼 통용되었으며 동아시아 각지로 수출되던 물품이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재화를 한 사람 무덤에 집중적으로 묻어주었다는 것은 당시 철 생산이 본궤도에 올랐으며 부와 권력을 독점한 인물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경주 덕천리유적은 2004년 6월부터 3만5천여㎡에 달하는데, 박 승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은 "덕천리 유적이 원삼국시대 대규모 분묘군임이 확인됨으로써 이 유적이 초기신라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집단으로 파악된다"며 "이를 통해 1∼3세기 초기 신라의 형성과정과 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다수의 오리모양토기와 마형대구 호형대구는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으로 이를 통해 덕천리 유적의 정치적 지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에 대해 경주대 이근직 교수(신라사)는 "덕천리 유적 발굴성과를 존중한다면, 이들 유적을 남긴 주인공은 돌산 고허촌 혹은 사량부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다만 이 덕천리 유적 일대가 돌산 고허촌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경주 덕천리유물 '신라건국 밝혀질까' 관심

2006. 10. 26. 08:05
 

[쿠키 사회]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 구간 완공을 앞두고 또다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건국시기인 사로국(斯盧國) 시대의 유적이 대량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요청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3만5천여㎡에 달하는 덕천리 유적 발굴에 나선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은 25일 현장에서 정징원·이청규 문화재위원과 김성구 국립경주박물관장, 이희준 경북대 교수, 김권구 계명대 교수 등이 참가한 가운데 지도위원회를 열고, 발굴유구 및 출토유물의 성격 등에 대한 설명과 향후 유적의 처리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박승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연구실장)은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29기와 원삼국시대 목관묘와 목곽묘 등 235기, 삼국시대 이후 도로유구 및 구상유구 등 36기 등 모두 300여기의 유구가 확인됐다"면서 "또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 원삼국시대 오리모양토기 등 유물 2천347점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박 책임조사원은 또 "덕천리 유적이 원삼국시대 대규모 분묘군임이 확인됨으로써 이 유적이 초기신라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집단으로 파악된다"며 "이를 통해 1∼3세기 초기 신라의 형성과정과 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수의오리모양토기와 마형대구 호형대구는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으로 이를 통해 덕천리 유적의 정치적 지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경주대 이근직 교수(신라사)는 "덕천리 유적 발굴성과를 존중한다면, 이들 유적을 남긴 주인공은 돌산 고허촌 혹은 사량부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다만 이 덕천리 유적 일대가 돌산 고허촌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신라 초기 사로 6촌에서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앞세워 건국한 것은 기원전 57년. 신라 6촌 및 촌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름이 기록돼 있고, 이 가운데 이번에 유적이 발견된 곳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촌장 소벌도리)으로 알려진 곳이다. 6촌은 이외에도 알천 양산촌과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 6촌도 나중에는 부(部)로 명칭이 바뀌고, 사로국이 나아가 '진한 6부(辰韓六部)'가 된다. 박혁거세 옹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고허촌장은 양산 기슭에 올라 나정에서 말이 하늘로 오르고, 그곳에서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바로 혁거세라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신라 건국에서 돌산 고허촌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5)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 영남일보 경주=임준식기자 jun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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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외곽 고분속 유물에.. 신라 6부 지배층, 중앙 귀속과정 담겨

이소연 기자2022. 4. 19. 03:01
 
40년만에 빛본 금척리 보고서
'대릉원'서 17km 떨어진 고분군.. 대릉원보다 1세기 앞서 조성 추정
목곽묘→적석목곽묘 무덤 축조 변화.. 모량부 등 신라 6부 지배 세력들
4세기전부터 활동하다 변모한 듯.. "경주시내 중심 연구, 확장해야"
경북 경주시 ‘대릉원’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금척리 고분군 전경.
 
경북 경주시 금척리 고분군이 대릉원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보다 1세기 앞선 4세기부터 조성된 사실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신라 6부(六部·건국 주체가 된 6개 정치단위체)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가 5세기 등장한 신라중앙의 마립간(麻立干·신라시대 왕의 칭호)에 앞서 금척리 일대를 지배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학계는 이번 조사 결과를 신라 6부 체제를 규명할 핵심 자료로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981년 실시한 금척리 고분 18기 발굴조사 결과를 최근 40년 만에 보고서(‘경주 금척리 신라묘’)로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 1065점을 토대로 무덤 조성 시기를 4세기 초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추정했다. 이 중 덧널무덤(목곽묘)인 10호분은 내부에서 4세기 초엽의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표면에 격자무늬나 끈 무늬가 새겨진 토기) 4점이 나와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10호분과 맞붙어 조성된 2, 4호분이 목곽묘보다 늦은 시기의 묘제(墓制)인 5세기 적석목곽묘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금척리는 모량부의 중심지로 신라 중앙의 대릉원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져 있다. 5세기 후반 적석목곽묘인 1호분에서 94.5cm 길이의 은 허리띠가 출토되는 등 금척리 고분군에 모량부 지배층이 묻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부족 연맹체였던 진한(辰韓)에서 씨족 집단으로 구성된 6부 체제가 등장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6부에는 모량부 외에도 급량부, 사량부, 습비부, 본피부, 한기부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고분이 확인된 곳은 모량부가 유일하다. 신광철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금척리 고분군을 통해 마립간 등장 전 모량부의 규모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 지배층의 무덤이다. 금척리 1호분에서 출토된 ‘은 허리띠’(왼쪽 사진)와 6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이 지역 지배층이 묻혔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학계는 모량부 연구를 통해 중앙집권을 추구한 마립간 시기가 도래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립간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지배력을 행사한 모량부 등 6부 세력이 점진적으로 중앙에 귀속되는 과정을 밟았다는 것.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비와 진흥왕비 모두 모량부 출신이다. 신라 김씨 왕조가 모량부 지배층과 혼인관계를 맺어 중앙집권의 기틀을 다졌다는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금척리 고분군은 4세기 목곽묘에서 5∼6세기 적석목곽묘로 바뀌는 무덤 축조 양식의 변천을 볼 수 있다”며 “이는 경주 외곽의 지배세력이 성장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모량부 핵심세력이 교체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풀이했다. 금척리 고분군 연구를 토대로 신라 6부 체제 내부의 지배세력 변화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계는 이번 발굴조사 결과가 신라 초기 지배층 고분의 조성 시기를 더 올려볼 여지를 줬다고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금척리 고분군 일대를 추가로 조사하면 2∼3세기에 조성된 목곽묘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주시내로 한정된 조사연구를 외곽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홍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그동안 대릉원 등 경주 중심에 집중된 신라사 연구 흐름을 외곽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서라벌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6월 금척리 고분군의 남쪽 경계에서 목곽묘 1기와 적석목곽묘 6기, 석곽묘 1기를 추가로 확인했다. 국가사적에 포함된 고분 52기 외에도 지배층 묘역이 더 넓게 분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1)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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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전설 전하는 경주 금척리 일대 신라무덤, 5월부터 조사

김예나2024. 3. 18. 09:49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1일 조사 방법·방향 논의하는 학술행사
사적 '경주 금척리 고분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관련한 전설이 내려오는 경북 경주시 금척리 일대의 크고 작은 무덤을 본격적으로 조사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올해 5월부터 국가지정문화재(추후 '국가지정유산') 사적 '경주 금척리 고분군' 일대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금척리 고분군은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크고 작은 무덤 50여 기가 모여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 시내 평지에 있는 무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이 묻힌 무덤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주 금척리 고분군의 옛 모습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된 유리 건판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금척리 고분군은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유적이다.

1952년 무덤 2기를 조사한 결과,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하는 형태의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 확인됐고 이후 1981년 상수도 공사 중 발견된 무덤 일부를 국립경주박물관이 조사한 바 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면 금척리 일대의 성격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금척리 일대는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금척)를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여러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중심지로 보기도 한다.

 

 

 

1981년 국립경주박물관의 발굴 조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구소는 올해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 분포 상황을 조사한 뒤, 무덤 1기를 발굴 조사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는 이달 21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또 다른 신라 이야기, 금척 고분군' 학술 행사를 열고 그간의 무덤 조사·연구 현황, 향후 조사 방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황남대총, 천마총 등 경주 지역의 주요 무덤 발굴 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금척리 고분군 발굴조사의 의미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연구 성과를 주제로 한 기조 강연에 나선다.

행사는 현장에서 등록한 뒤 참가할 수 있다. 연구소는 추후 유튜브 채널을 통해 녹화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다.(2)

 

 

 

'경주 금척리 고분군' 전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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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건진 300년이 완성한 천년왕국[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2021. 8. 17. 03:04
1981년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서 발견된 38호 묘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거울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따서 ‘소명경’이라고도 불린다. 지름 8cm.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된 점을 기준으로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인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에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불신하고 신라가 4세기 이후 세워졌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고려 삼국사기보다는 3세기 중엽 찬술된 중국 사서 삼국지 동이전을 더 신뢰한다. 같은 시대를 두고 두 사서는 신라의 모습을 전혀 다르게 묘사했다. 삼국사기는 매우 강력한 국가로, 삼국지는 미성숙한 소국으로 서술했다.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다. 경주에서 4세기 이전의 궁궐, 왕성, 왕릉이 확인되지 않으며 그 시기 신라가 영남 각지를 정복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4세기 이전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발굴된 바 없었기에 심지어 4세기 이후 북방 유목민들이 남하해 신라를 세웠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밭에 숨겨진 ‘초기 신라’

이런 학설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상식처럼 되뇌는 ‘천년왕국 신라’는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다 신라 초기사 300년을 되찾을 실마리가 우연히 발견됐다. 1978년 11월 경주시 조양동의 한 주민이 자신의 주택을 개축하던 중 토기 22점을 발견해 경주시에 신고했다.
 


신고품을 감정한 한병삼 경주박물관장과 최종규 학예사는 그것이 그들이 오랫동안 찾으러 다닌 신라 초기의 유물일 가능성을 직감했다. 주변 밭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주민 신고가 잇따르자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이듬해 4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발굴에 나섰다.
 


두 달이 더 지난 뒤 착수한 2차 발굴에서 상황이 반전됐고, 새로운 무덤들을 찾아냈다. 지표에는 무덤 흔적이 전혀 없었으나 표토를 제거하자 네모난 구덩이 윤곽이 속속 드러났다. 그 속에는 목관이나 목곽 흔적이 확인됐고 각종 철기와 생소한 모양의 토기가 쏟아졌다. 특히 토기는 청동기시대 토기나 예전에 발굴된 신라토기와도 달랐다. 최 학예사는 이 토기에 ‘와질토기(기와처럼 무른 질의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양동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무덤은 1981년 말 발굴된 38호 묘였다. 무덤구덩이 길이가 2.6m에 불과했지만 출토 유물의 수준은 대단했다. 무덤 내부에서 다량의 철기와 함께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청동거울이 4개나 출토됐다. 최 학예사는 거울에 기준하여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무덤들이 1∼3세기까지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견해가 국내외 학자들에게 수용되면서 미지의 세계로 남겨졌던 신라 초기 300년의 실상이 비로소 명확하게 밝혀졌다.
 


목관 받침으로 쓰인 쇠도끼

경주시 서면 사라리에서 발견된 130호 묘에서 발굴된 쇠도끼. 길이 27cm 내외의 쇠도끼 70점이 나란히 있었다. 철 소재이면서도 신라 초기에 화폐처럼 통용됐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1995년 경주시 서면 사라리에서 공장을 짓다가 유적이 훼손되자 영남문화재연구원 조사팀이 긴급 투입돼 조사를 벌였다. 교란토를 제거하자 야트막한 능선 전역에서 137기의 무덤이 드러났다. 특히 1996년 봄에 확인된 130호 묘는 다른 무덤과는 클래스가 달랐다.
 


무덤구덩이 크기는 조양동 38호 묘보다 조금 더 큰 3.3m였다. 파들어 가기 시작하자 말 재갈, 쇠창과 함께 토기류가 확인됐다. 아래로 더 내려가니 망자의 유해에 착장했던 호랑이 모양 허리띠장식과 팔찌가 드러났고 그 주변에서는 칼집에 든 칼과 청동거울, 농기구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특히 조사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무덤 바닥에 쫙 깔린 쇠도끼였다. 길이 27cm 내외의 쇠도끼 70점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 쇠도끼는 철소재로도 쓰였고 시장에서는 화폐처럼 통용되었으며 동아시아 각지로 수출되던 물품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재화를 한 사람 무덤에 집중적으로 묻어주었다는 것은 당시 철 생산이 본궤도에 올랐으며 부와 권력을 독점한 인물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탑동 목관묘, 왕묘인가

경주시 탑동 목관묘에서 발굴된 호랑이 청동 장식은 수입품으로 추정된다. 목관묘는 2세기 무렵 경주 일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2000년대에도 경주 일원에서 수많은 발굴이 있었지만 조양동과 사라리 두 무덤을 뛰어넘는 신라 초기 무덤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학계 일각에선 조양동과 사라리에 묻힌 인물들처럼 경주 외곽의 유력한 세력들이 힘을 키워 4세기 이후 경주 시내로 이주해 신라를 세웠을 것이라는 학설까지 나왔다.

2010년 봄 마침내 경주 중심지에서 탁월한 수준의 목관묘 1기가 발굴됐다. 이 무덤이 위치한 곳은 월성 남쪽의 탑동이며 신라 초기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곳 가운데 일부다. 한국문화재재단 조사팀이 민가 개축 부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 무덤은 사라리 130호 묘보다 조금 작았는데도 출토 유물은 훨씬 뛰어났다.

무덤 주인공의 생전 위세를 보여주는 동검은 옻칠된 칼집에 들어 있었고, 말재갈이나 쇠창 등 신라 제철소에서 만들었음직한 철기가 종류별로 출토됐다. 삼국시대 초기 각국 지배층이 권위의 상징물로 사용한 부채도 출토되었는데 몸체는 썩어 없어졌고 옻칠된 자루만 남아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청동거울처럼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물품이 많았다는 점이다. 함께 발굴된 호랑이, 곰, 개구리, 거북 모양 청동장식도 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이 무덤에 묻힌 인물은 현재까지의 자료로만 본다면 2세기 무렵 경주 일원 최고의 권력자였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학계에서 그를 왕으로 지목하는 견해는 아직 없다. 대릉원 일대에 축조된 5세기 이후 왕릉에 비교해 규모가 보잘 것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위의 세 사례는 신라 초기 무덤 중 ‘톱 3’라 부를 만하다. 특히 탑동 1호 묘는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면 왕의 무덤인지, 혹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6촌의 촌장 무덤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눈에 띄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신라 초기 중심지에 대한 체계적 발굴과 관련 연구가 축적되어 다시 찾은 신라 초기 300년 역사가 온전히 해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3)

 

 

 

 

 

 

 

 

 

<주>

 

 

(1) 경주 외곽 고분속 유물에… 신라 6부 지배층, 중앙 귀속과정 담겨|동아일보 (donga.com)2022. 4. 19.

 

 

 

(2) 박혁거세 전설 전하는 경주 금척리 일대 신라무덤, 5월부터 조사 (daum.net) 2024. 3. 18.

 

 

 

(3) 밭에서 건진 300년이 완성한 천년왕국[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daum.net) 2021. 8. 17.

 

 

 

 

(5) 경주 덕천리유물 '신라건국 밝혀질까' 관심 (daum.net) 2006. 10. 26. 

 

 

 

 

 

 

<참고자료>

 

 

 

사로국 발전 살펴보세요 '목관묘로 본 사로국의 형성과 전개' 학술대회 (daum.net) 2019. 10. 10.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 실체 드러날까 (daum.net) 2010. 6. 18.

 

 

경주 조양동유적 발굴 20년만에 보고서 완간 (daum.net) 2004. 12. 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神話, 역사가 되다… 박혁거세 탄생의 비밀 깃든 ‘나정’|동아일보 (donga.com)

 

 

 

 

 

 

박혁거세 왕비 알영 이야기 깃든 길이 150m 고대 수로 확인(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21-04-27

 

 

 

 

한쪽 벽 뜯고 출입할수 있는, 신라 '앞트기식 돌방 무덤' 확인 (daum.net)2020.07.06

 

 

 

 

경주 덕동호서 신라 무덤 무더기 발견 | 세계일보 (segye.com)2018-03-04 

 
 

[단독] 경주 덕동호 바닥서 신라인 '공동묘지' 나왔다 (daum.net)2018. 3. 3. 

 

 

 

 

 

 

경주 천원마을 진입로에서 삼국시대 목곽묘 출토 (daum.net)2013. 12. 5. 

 

 

경주에서 6세기 신라인 유골 묻힌 목관 발견 (daum.net)2013. 12. 5. 

 

 

 

경주 미탄사지에서 대형 금당지 발견 (daum.net)2013. 7. 3. 

 

 

 

 

비담의 반란 근거지 '명활산성' 뜬다 (daum.net)2009. 8. 27. 

 

 

 

 

 

 

 

 

 

 

 
 

 

 

 

 

 

 

"신라 '임신서기석' 연대는 612년 아닌 552년" - 뉴스1 (news1.kr)2017-01-24    

 

 

 

용인서 신라시대 추정 고분 2기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7.01.16 

 

 

 

국가사적 도굴 오래전인데..관계당국은 까맣게 몰랐다 (daum.net)2015. 4. 17.

 

 

 

 

 

 

옥천 공사현장서 신라시대 굽다리접시 출토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2019-10-29 

 

 

 

신라·백제 격전지 충북 옥천서 7세기 고대 도로 발견 (daum.net)2018. 8. 16. 

 

 

 

 

 

 

 

경북 청도,수몰 예정지서 신라고분 900여기 발견 (daum.net)2008. 1. 2. 

 

 

 

신라 지하목조건축물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200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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