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석굴암ㆍ불국사]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석굴암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代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후 지은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보살이 각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菩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다 하겠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원숙한 조법과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절대적인 경지인 정각을 통해 인간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존재인 석가여래가 되고, 속세는 법계라는 이상향이 된다.

불국사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 제50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Ⅰ), (Ⅳ)
  • (Ⅰ)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2021년 06월 04일 16시 53분

 
[앵커]

과학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보는 <궁금한 S> 시간입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에는 수학적 비례 원칙과 지진에 강한 건축기법이 적용돼 지어졌는데요.

이 때문에 인근에서 발생하는 지진에도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에 숨겨진 과학의 원리. 지금 바로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이효종 / 과학 유튜버]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져 불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유적이 유네스코로도 지정된 석굴암인데요. 석굴암은 750년경 신라 경덕왕 시대에 지어졌는데, 당시 건축기술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으로 설계됐다고 합니다. 석굴암은 751년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창건해 774년에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무려 23년이 걸린 큰 공사였습니다.

보통 인도나 중국에서는 바위산에 굴을 파서 석굴을 조성했는데요. 굴속은 햇빛이 차단되고 더운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서 여름에도 온도가 10도 정도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더운 기후에 있는 인도의 수도승들이 석굴에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바위의 대부분은 매우 단단한 화강암이어서 당시의 도구와 기술로는 바위를 파내기 쉽지 않았는데요. 또 석굴을 파다 보면 위쪽 흙이 누르는 힘으로 자칫 석굴이 주저앉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선조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아치형 구조로 만들면 위에서 누르는 힘을 골고루 분산해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이런 석굴암에도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굴은 습기가 잘 생긴다는 것이었어요. 거기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구름과 안개가 많이 생기는 지형이었는데요. 습기와 안개가 가득한 곳에서 석굴암은 어떻게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것일까요?

비밀은 석굴암 바닥에 차가운 물을 흐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닥의 차가운 물로 인해 석굴 내부의 습기가 바닥 쪽으로 모여들고, 물방울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들었는데요. 이는 한여름에 에어컨을 켰을 때 에어컨의 차가운 냉매 쪽으로 습기가 모여 습기가 사라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또, 석굴암에는 돌과 돌 사이에 작은 틈이 있어 통풍이 잘되고, 지붕 외벽을 둘러싼 자갈층도 제습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외부의 습하고 더운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수증기가 응축돼 자갈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지는데요.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아 아래쪽으로 흘러 석굴암 내부로 들어갑니다. 그 때문에 송풍기 없어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부를 꾸준히 채워 안은 항상 쾌적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죠.

석굴암의 우수성은 완벽한 비율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의 비례는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데요. 본존불의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가로 길이는 1:2:3:4 비율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율은 인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인체 비율인 균제비례와 거의 흡사합니다.

이렇게 과학적, 수학적으로 설계되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석굴암을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석굴암 외벽을 콘크리트로 두르고, 석굴암 아래로 흐르던 지하수를 막아버렸는데요. 그 결과 석굴암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고, 이끼와 곰팡이가 생기면서 벽면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은 화강석 벽도 손상시키기 시작했는데요.

1960년대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외벽 바깥쪽으로 약 1m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웠는데요. 하지만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기계에 의해 습도조절을 해야 했습니다.

석굴암과 함께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교 유적이 있었으니 바로 불국사입니다. 불국사에는 그랭이 공법이라는 특이한 공법이 사용됐는데요. 이 공법은 자연석을 서로 맞물리게 촘촘히 쌓은 뒤, 그 위에 세우는 기둥의 밑면을 자연석의 형태대로 정밀하게 깎는 방법을 말합니다. 자연석과 기둥이 마치 톱니바퀴 물리듯 맞물리도록 맞추는 것인데요.

여기에 동틀돌을 추가하는 기술이 더해져 더욱 건물을 안전하게 지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동틀돌이란 자연석들을 쌓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박아둔 돌을 말합니다. 이러면 지진 같은 충격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튼튼해집니다. 실제로 지난 2016년에 발생한 규모 5.8 지진에도 대웅전의 기왓장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랭이 공법은 통일신라에 꽃을 피웠지만, 이를 처음 개발한 국가는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성들이 장대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그랭이 공법 덕분이었는데요. 고구려 성의 가장 큰 특징은, 성을 쌓는 땅에 있는 암반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을 쌓는 돌을 암반의 모양에 맞게 다듬은 다음 암반 위로 그대로 쌓아 올렸습니다. 땅에 깊게 묻혀 있는 암반들이 성곽을 단단하게 지지해준다는 점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 궁금한S에서는 석굴암과 불국사에 숨어있는 과학원리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현대기술로도 따라 하기 힘든 선조들의 지혜가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궁금한 S는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과학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면 언제든 유튜브에 사이언스 투데이를 검색해주세요. 이상 궁금한 S였습니다.


YTN 사이언스 박순표 (spark@ytn.co.kr)

 

 

[경주역사유적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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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남산지구

 

세계유산적 가치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Ⅱ),(Ⅲ)
  •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월성지구]

40㎝ 길이 배 1척 발견

왕실 의례용으로 쓰인 듯

방패·씨앗·곰뼈도 출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의례용 미니어처 배.

 

5세기 8월 여름날의 신라 경주. 왕성(월성) 주변에 조성된 해자(垓子·성 주위의 물도랑 또는 연못) 안에는 분홍빛 가시연꽃과 다른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못 주변은 시야가 확 트인 초지이다. 해자에서는 국운왕성을 기원하는 수변의례가 벌어지고 있다. 의장용 방패가 늘어서 있고, 소원을 담아 불에 태운 ‘미니어처’ 배가 떠간다. 가죽공방에서는 곰가죽으로 군지휘관의 장식품을 제작하고 있다. 보석공방에서는 수정원석으로 장신구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 발굴한 유물을 토대로 복원해본 1600년 전의 경주 월성 모습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일 “경주 월성 해자에서 발굴된 구조물과 출토된 씨앗 및 열매 63종, 규조(식물성 플랑크톤) 등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해자 및 주변의 식생과 경관을 복원했다”고 밝혔다. 1㎜ 이하의 고운 체질로 걸러 가시연꽃씨와 쌀 등 다수의 씨와 열매를 확인했다.

경주 월성에서 발굴된 4~5세기 손잡이 방패.

 

해자에서는 불에 그을린 ‘미니어처’ 목제 배 1척(길이 40㎝가량)도 확인했다. 실제 배를 9분의 1로 축소한, 가장 이른 시기의 미니어처 배로 왕실과 관련된 ‘의례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소원을 쓴 종이를 배에 띄워 불에 태우는 형태의 수변의식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5세기에 제작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실물 방패는 손잡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각 1점씩이었다. 손잡이가 있는 형태로 발견된 방패로는 첫 사례이다. 방패는 이중동심원과 띠모양으로 밑그림을 그렸고, 붉은색과 검은색을 칠했다. ‘벽사(피邪·사악한 기운을 쫓는다)’를 의미한다. 방패는 의장용으로도 활용되지만 방어용 무기로도 사용된다.

곰뼈가 15점 이상 나온 것도 특이하다. 앞발뼈와 뒤꿈치뼈가 주로 확인되었고, 아래턱뼈에서는 칼로 해체한 흔적이 보였다. <삼국사기>는 “신라시대 각급 지휘관의 깃대에 다는 장식품을 곰의 뺨·가슴·팔가죽으로 제작한다”고 했다. 이 <삼국사기> 기록에 언급된 뺨가죽(아래턱뼈)과 팔가죽(앞발뼈 부위)에 부합되는 뼈가 출토된 만큼 이런 장식품을 제작하는 공방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짙다. ‘당주(幢主·군수)’라는 지방관 명칭이 명확히 쓰여 있는 목간 1점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목간에는 곡물의 부피를 표시할 때 일(一) 대신 일(壹), 삼(三) 대신 삼(參), 팔(八) 대신 팔(捌)과 같은 갖은자(같은 뜻을 가진 한자보다 획이 많은 글자)를 썼다. 이 밖에 가공하지 않은 수정원석도 확인됐다.

 

 

'신라왕궁의 수세식 화장실'

이종현 기자입력 2017. 9. 26. 14:27
 

(경주=뉴스1) 이종현 기자 =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이 26일 신라 왕궁의 수세식 화장실 유구가 나온 경북 경주 인왕동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에서 현장 설명을 하고 있다. 2017.9.26/뉴스1

 

 

[첨성대]

 

입력 :  2019-07-31 15:01:02

배한철 기자
 
1937년 경주 첨성대에서 촬영한 고등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지금은 접근을 통제하지만 과거에는 아무나 첨성대에 올라 갈수 있었다. /사진=대구교육박물관.
 
[국보의 자취-4] "첨성대에 있는 백구정(亭)에서 자주 노닐었다, 상층에 대(臺)의 이름 3자가 크게 남아 있으니, 설총의 친필로 행한 일이다(遊於白鷗亭而瞻星臺, 上上層有臺名三大字, 親筆焉事.)." 경주 순창 설씨 세헌편(世獻篇·설씨 가문의 업적을 적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설총은 주지하는 것처럼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두를 집대성했고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불리는 대학자이다. 그의 정확한 생몰년을 모르지만 태종무열왕대(654~661)에 출생하고 경덕왕대(742~765)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이 책이 우리가 천문관측 시설로만 알고 있는 경주 첨성대(瞻星臺)에 '백구정'이라는 정자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 정자에는 설총이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홍적(1549~1591)은 그의 문집 '하의유고'에서 "대가 비어 있되 반월이네, 각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첨성이로다(臺空猶半月, 閣廢舊瞻星)"라고 읊었다. 홍적은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서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해 예조정랑(정5품), 집의(사헌부 종3품) 등을 거쳤다. 선조 13년(1580) 가을에 혜성이 출현하자 이를 측후하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미뤄 천문 분야에도 식견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홍적 역시 반월(경주)의 첨성대에 누각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근대 기상학의 선구자로 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직접 첨성대 원형 추정도를 그리기까지 했다. 와다 유지는 "첨성대 위에 관측기구를 설치하여 상시로 천문 관측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첨성대 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는 신라의 옛 궁궐터인 월성에서 북서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경주 인왕동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인 633년(선덕여왕 2) 건설됐다. 첨성대 하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유명하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중간쯤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나 있다. 맨밑에 사각형 기단 2개 층, 그 위에 원통형 몸체 27개층, 맨위에 사각형 정자석(井字石) 2개 층 등 총 31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정자석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몸체 27개 층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첨성대의 개요일 뿐 우리는 아직도 첨성대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최초의 첨성대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편 말미에 "별기(別記)에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고 기술돼 있다. 같은 책 '왕력 내물마립간'편 끝에도 "(내물왕의)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씌여져 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첨성대를 '점성대'로 표기하고 있다.

1454년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과 더불어 실측자료도 실려 있다. "당 태종 정관 7년 계사년(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돌을 쌓아 위는 정사각형, 아래는 둥글게 만들었다. 높이는 19척 5촌이며, 위의 둘레는 21척 6촌이고 아래의 둘레는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가 뚫려 있어 사람들이 위로 올라 갔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첨성대가 천문을 살펴보던 기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 뒤 중간 부분 입구를 통해 들어가 안쪽에서 별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형태가 워낙 기이하다 보니 용도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학설은 거의 백가쟁명 수준이다.

첨성대 내부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물설'은 석가모니와 박혁거세 등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라는 관점이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만큼 반대 세력이 많았다. 여왕이 취임한 데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녀가 신성한 인물의 후예임을 천명해야만 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다. 고대인들은 풍요와 생명, 다산을 뜻하는 우물을 신성시했다. 여왕은 우물 모양의 첨성대를 통해 우물 옆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불교적 의미가 가미되고 있다. 신라는 왕즉불(王卽佛), 즉 왕을 부처와 동일시했다. 선덕여왕은 신라인이 신성시하는 박혁거세의 후계자인 동시에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자손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으로 첨성대에 마야부인의 몸을 투영시켰다. 불룩한 아랫부분은 마야부인의 엉덩이이고 중간 창문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오른쪽 옆구리라는 견해다.

우물설은 '우주우물'로도 확대해석된다. 불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신라인들이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 첨성대를 만들었을 수 있다. 신라왕실은 불교적 유토피아인 도리천(세상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33천에 존재하는 세계)을 동경했으며 그곳의 왕이자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신봉했다. 선덕여왕은 도리천을 동경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선덕여왕이 우주우물인 첨성대를 세워 살아서는 신라 땅에 제석천이 강림하기를 바라고 죽어서는 자신이 도리천에 환생할 통로로서 이용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층수를 보더라도 첨성대는 총 31층인데 대지를 1층으로 환산하면 모두 32천이 돼 이를 거쳐 33천인 도리천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불탑설'도 주목받는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사리를 차지하려고 주변 여덟 나라가 무력 충돌의 조짐을 보였다. 중재자가 사리를 8등분해 각국에 보내니 각국에 사리탑이 조성됐다. ‘불반니원경'은 사리를 분배받지 못한 나라가 유골을 담았던 병(甁)을 가져와 병탑을, 숯을 가지고 와서 재탑을, 숯을 갖고 와서 숯탑을 세움으로써 11탑이 조성됐다고 설파한다. 이런 불교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첨성대가 '병탑'이라는 의견이다.

그 밖에 학설로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사계절과 24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圭表·빛의 그림자로 태양의 고도를 재는 고대의 기구)설', 신라시대 수학인 주비산경(지름·높이·대각선이 3대4대5인 이상적 비례를 다룬 고대 중국의 서적)이 집약됐다는 '주비산경설',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던 제단이라는 '영성제단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스러운 탑인 지구라트를 모방했다는 '지구라트설' 등이 제기된다.

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가 그린 첨성대 원형 추정도.
 
첨성대는 또한 우리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일체의 재건 또는 복원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조선 중기 성균관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지낸 조위(1454~1503)도 경주 첨성대를 바라보며 "겁화에도 타지 않고 홀로 남아, 쌓은 돌이 비바람을 견디고 우뚝 서 있네. (중략) 신라 때의 제작이 놀랍기만 하구나"라고 했다. 이런 통념과는 달리 사실 첨성대에는 붕괴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우선 첨성대 몸통 상부 석재와 하부 석재의 가공법이 서로 다르다. 하층부 석재는 전부 모가 둥글게 가공된 반면 상층부 석재는 전반적으로 모가 각진 데다 중간중간 둥근 석재들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맨꼭대기인 31층 정자석도 금이 가 있거나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28층에는 분실된 돌이 있고 28층 남쪽 석재들과 27층 서쪽 석재들은 서로 위치가 바뀌어 있다.

첨성대가 붕괴됐다면 그 시기가 언제이며,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혜공왕 15년(779)에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규모 6.7 지진이 발생했다. 첨성대는 물론 동시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지진을 고려해 설계됐다. 따라서 지진으로 첨성대가 붕괴됐을 개연성은 낮다. 13세기 몽골군 침입 때, 16세기 임진왜란 때 첨성대도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

17층 이하는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8층 이상이 타격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은 첨성대 윗부분에 밧줄을 걸어 인위적으로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에는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 주변을 발굴하게 되면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 수 있을까.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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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20. 20:04

[한국사 Live] 첨성대 꼭대기엔 정자가 있었다 (daum.net)

▲ 첨성대 내부

 

▲ 용도를 알수 없는 상층부 홈

 

 

 

입력 2014. 5. 20. 21:17수정 2014. 5. 20. 21:17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했다."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1173년 착공된 피사의 탑은 생기지 말았어야 할 건축물이었다. 부드러운 진흙 토양 위에 건립됐기 때문이다.

공사는 5년 만에 중단됐다. 4층까지 쌓자 탑이 약 7인치나 기우뚱한 것이었다. 이후 공사재개(1272년)-재중단(1278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370년에야 완공됐다. 하지만 이미 2m(약 2.8도) 이상 기울어진 사탑이 됐다. 19세기에 들자 1층의 한 부분이 땅속으로 3m나 푹 들어가고 말았다.

1838년 탑의 하부구조를 파악하려고 땅을 파보자 지표 아래에서 물이 용솟음쳤다. 한마디로 피사의 탑은 물 위에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33년 무솔리니의 지시로 탑의 기초 속에 시멘트 80여t을 주입했다. 그러나 도리어 탑의 균형이 깨지고 더욱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보수공사가 결정된 1990년 탑의 기울기는 5.5m(약 5.6도)나 됐다. 탑의 높이가 약 50m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0%가량이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건축학적으로 10% 이상의 기울기라면 탑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5.44도 이상의 기울기에서는 결코 피사의 사탑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한, 불가사의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기울어지지 않은 탑의 북쪽 흙을 36m가량 빨아들여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 덕분에 탑의 기울기는 0.5m 줄어든 5m(1700년대 수준)로 맞췄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떨까. 최근 감사원은 첨성대가 북쪽으로 200㎜(1.95도) 기울고(2009년), 2013년에는 204㎜로 더 심해졌다고 발표했다(그림). 해마다 평균 1㎜씩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지나친 호들갑이 아닐까. 4㎜ 정도는 측정기구와 측정방법에 따른 오차범위 이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침소봉대' 감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첨성대의 하부에 피사의 사탑과 달리 불규칙한 침하(최대 161㎜ 부등침하)가 발생하고 있는 점은 찜찜하다. 불규칙 침하이다 보니 상부구조물 부재 간 벌어짐이나 균열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까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 단계는 아니지만 '요시찰 국보(31호)'인 것만은 사실이다. 요즘 부쩍 첨성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어찌됐든 감사원의 공이 아닌가 싶다.

< 이기환 사회에디터 >

 

 

[대능원지구]

 

입력 2021-03-23 03:00업데이트 2021-03-23 08:18

신라 예술혼이 담긴 그릇, 금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동아일보 (donga.com)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1-03-23 03:00업데이트 2021-03-23 08:18
 

5세기후반 신라 왕비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191호·왼쪽 사진)과 6세기 신라 왕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은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무겁다. 이한상 교수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21년 9월, 경주에서 신라 역사의 결정적 단서가 드러났다. 노서리 한 식당 뒤뜰에서 건물 터 파기 공사를 하다 금관, 금귀걸이, 금허리띠 등 황금 유물을 대거 발견한 것이다. 특히 금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하고 화려했다. 역사기록에만 전해 오던 ‘눈부신 황금의 나라’ 신라의 예술이 마침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이 무덤은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마터면 금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영영 사라질 뻔했다. 집주인과 공사 관계자들이 땅속에서 노출된 황금유물을 보고 신고를 망설이고 있을 때, 경주경찰서 순사가 들이닥쳤고 긴급 발굴로 이어졌다. 당시 많지 않던 고고학자들이 양산에서 발굴 중이었다. 그들 대신 비전문가들이 고구마 캐듯 유물을 수습해버렸다.

 
○ 금관을 찾아라!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자 조선총독부는 금관을 추가로 더 찾으려 했다. 1924년 총독부박물관은 금관총 주변에서 폐고분 두 기를 발굴했고, 그 가운데 한 기에서 또 하나의 금관을 찾아냈다. 금관총 금관보다 크기가 조금 작고 장식도 간소한 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 금관이다.

2년 뒤 서봉총 금관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는 사연이 있다. 철도국이 경주역 기관차고 신축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다 다수의 신라 고분을 훼손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철도국은 박물관과 협의하여 폐고분 한 기를 발굴하기로 했다. 철도국 예산으로 발굴하고 그 부산물로 나오는 자갈과 흙을 공사현장에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들이 발굴 대상으로 점찍은 것은 금관총에 이웃한 폐고분이었다. 예상대로 금관총 출토품에 버금가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광복 이후 두 점의 금관이 더 발굴됐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자 대통령은 신라 고분 발굴을 지시했다. 그에 따라 발굴이 시작됐고 1973년에는 천마총, 1975년에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연이어 금관이 출토됐다. 다만 당초 금관 발굴이 유력해 보였던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발굴단을 당혹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현지를 찾은 대통령의 불호령을 염려하였으나 무사히 지나가 안도하는 일도 있었다.


○ 반출 위기를 넘은 금관

금령총 금관드리개의 세부 모습. 이한상 교수 제공

신라 유물 가운데 금관은 발굴 당시부터 워낙 잘 알려져 훔치려는 시도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금관총 금관 절도 미수사건이다. 1927년 11월 10일 밤, 금관이 보관되어 있던 경주박물관 금관고에 도둑이 들어 금허리띠와 유리목걸이를 훔쳐 달아났다. 금관까지 손을 대려 했으나 전시장 문이 열리지 않아 포기했다. 경찰이 대대적 수사를 벌였지만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였고 이듬해 수사망이 좁혀오자 범인은 경찰서장 관사 앞에 유물이 담긴 보자기를 슬며시 내려놓고 사라졌다.

서봉총 금관은 1935년 평양박물관 전시회에 출품됐다. 이 전시회가 끝난 후 당시 박물관장이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파티를 열고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채 사진을 찍어 공분을 샀다. 1949년 5월에는 국립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서봉총 금관을 훔쳐 달아났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금관이 일본으로 반출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세 점의 금관 모두 국내에 남았다. 신라의 지방인 양산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신발 등 유물은 보고서 작성을 빌미로 일본으로 반출되어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조선고적연구회가 발굴한 유물 가운데 상당수는 ‘학술연구’라는 명목으로 반출되었으며 대부분 소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금관이 반출되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 하겠다.

○ 금관은 왕관이었을까?

금관은 발굴 이래 오랫동안 신라의 왕관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최종규 학예관은 금관이 장례용품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특이한 모습 때문이었다. 즉, 금관이 마치 데스마스크처럼 망자의 머리 전체에 씌워진 채 발견되었음을 상기시켰다.

1990년 후반 경주박물관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금관을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금관을 전시장 밖으로 옮겨보려 애를 써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금관의 금판이 너무 얇아 자꾸 휘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취약한 금관을 실제 신라왕이 썼을지 의문이 생겼다. 또한 금관에 조각된 무늬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제작과정에서 장인이 실수했을 법한 흔적을 금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었다. 신라왕이 생전에 이 금관을 보았다면 장인에게 경을 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관에 대한 호기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한동안 금관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그 결과 금관 소유자 가운데는 성인 남성도 있지만 성인 여성, 소년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금관은 신라왕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라왕의 직계가족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었던 것이다.

금관총 금관이 발굴된 지 한 세기가 다 되었지만 여전히 금관의 비밀은 다 풀리지 않았다. 신라 금관은 세계의 다른 금관에 비해 장중함이나 신비로움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아직 이와 유사한 금관이 다른 나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으므로 이 금관은 신라인이 그들의 예술혼을 오롯이 담아 만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왜 그런 형태의 금관을 만들어 망자의 머리 전체에 씌워주었는지, 금관에 주렁주렁 매달린 곡옥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왜 6세기 중엽 이후 금관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등 아직도 우리가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가 여전히 쌓여 있다. 장차 관련 연구를 통해 그런 비밀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 금관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깊어지길 소망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강구열입력 2020. 6. 1. 02:01  

"개도 금사슬을 했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대표 유물은? (daum.net)

강구열입력 2020. 6. 1. 02:01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의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라가 멸망(935년)하고 한참 뒤인 1154년 나온 책이긴 하지만 신라에 대한 외국의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옛 기록이 전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의 위상은 이제 각종 금제 유물로 확인되고 있다. 금관과 귀고리, 허리띠, 관모 등은 신라에 금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이 그것을 얼마나 잘 다루는 지를 증언한다.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문화재청 제공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신발이 발굴된 사실이 지난 27일 공개됐다. 금동신발 뿐만 아니라 “허리띠 은판, 금동 말안장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동신발 출토는 1977년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만이며 발굴이 좀 더 진행되면 금관이나 좀 더 화려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동 지역에까지 알려진 신라의 황금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은 무엇이 있을까.  

 

◆금관-신라의 시각적 표상

금관총 금관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 한 민가의 증축공사 중 진기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공사를 하며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고분을 건드렸던 것. 당시 언론에서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이라고 대서특필되며 세상에 모습을 이 고분이 금관총이다. 신라 문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고, 경주 지역 고분에 대한 조사도 활발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금관총에서 나온 유물은 양과 질 모두 탁월했으나 ‘대표선수’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금관이다.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1924년), 서봉총(1926년), 교동(1972년 압수), 천마총(1973년), 황남대총(1974년)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를 상징하는 ‘시각적 표상’이다.  1970년대 미국, 일본에서 열린 대규모 해외 특별전 ‘한국미술오천년전’에는 천마총 금관이 출품돼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금관은 고분의 위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경주의 고분은 압도적인 규모 때문에 왕릉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무덤의 규모는 물론 부장품의 수준에 따라 무덤 주인의 위계를 판단하는 데, 금관이 나오면 일단 왕족의 무덤을 판단한다. 

 

◆금귀고리-금속공예술의 정점

부부총 금귀고리
 
금귀고리는 경주 고분을 발굴하면 거의 예외없이 출토되는 유물이다. 이번에 금동신발이 나온 황남동의 다른 고분에서도 다양한 금귀고리가 출토된 바 있다. 형태는 크게 여성용으로 추정되는 굵은 고리 귀걸이, 남성용으로 추정되는 가는 고리 귀걸이로 나뉜다.   

국보 90호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는 금귀고리의 대표작이자 신라 금속공예기술의 최상의 사례로 언급된다. 둥근 고리에 수 백개의 금알갱이로 거북등무늬를 표현하고, 그 안에  꽃을 표현했다. 밑부분 나뭇잎 모양의 작은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연결하고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모양을 달았다.

 

◆금동신발-우주관·내세관의 표현

식리총 금동신발 출토 당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이 그렇듯 경주의 고분은 대표적인 출토 유물에 따라 이름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천마총, 금령총이 그렇고 식리총(飾履塚)도 같은 사례다. 금관총 발견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24년 노서동 126호분을 발굴했는데 여기서 금동신발, 즉 식리가 나왔다. 좌우와 바닥을 이룬 3장의 금동판에는 사람 머리를 한 새, 기린, 현무,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의 무뉘가 새겨져 있다. 이 금동신발은 신라인의 우주관과 내세관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가장 오래된 금동신발은 황남대총에서 나왔다.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3장의 금동판으로 구성했고, 표면에 ‘凸’ 모양의 무늬를 맞새김했다. 

 

◆보검-동·서양 교류의 증거

계림로 보검
 
칼은 금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처럼 느껴지지만 고분에서 나온 큰칼의 대부분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다. 

천마총 고리자루큰칼은 칼집,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얇은 금동을 입혔다. 칼집 끝은 금판으로 된 작은 돌기가 두 개 달려있다. 이런 칼이 실제 무기로 사용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소유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여겨진다.

보물 635호인 계림로 보검은 신라의 국제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것으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고리자루칼과 형태, 문양이 전혀 다른 이런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되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입력 2018. 4. 24. 10:14수정 2018. 4. 24. 12:03

50년 넘게 뒤바뀐 보물 '경주 신라 금귀걸이' 재검토 (daum.net)

여태경 기자
 
입력 2018. 4. 24. 10:14수정 2018. 4. 24. 12:03
 
문화재청 "문화재적 가치 재평가..보물지정 추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문화재청 제공)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50년 넘게 뒤바뀐 보물로 논란이 되어온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에 대해 문화재청이 재검토에 들어간다.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는 1933년 경주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주민에 의해 발견된다. 이 주민은 금귀걸이 한개와 다른 유물들이 마당에서 출토되자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렸고, 당시 총독부박물관 고적조사촉탁인 아리미쓰 교이치가 발굴에 들어가 나머지 금귀걸이 한개와 나머지 유물들을 발굴한다.

 

하지만 아리미쓰 발굴팀이 수습한 금귀걸이 한개와 나머지 유물들은 모두 일본 도쿄박물관에 기중된다. 결국 귀걸이 한 쌍이 각각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박물관에 보관되다 1965년 6월22일 체결된 한·일 협정에 따라 이듬해 반환돼 1967년 6월21일 보물 제455호로 지정된다.

노서동 금귀걸이의 기구한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신라 황금전 특별전을 준비하다 보물 지정 이후 황오동 금귀걸이가 노서동 금귀걸이로 전시도록 등에 사용된 사실을 발견한다.

이후 2009년 '보물 제455호 금제귀걸이' 관련 지정문화재 심의회가 열리게 되지만 황오동 금귀걸이가 보물 제455호로 인식됐던 상황 등을 고려해 보물 제455호를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변경,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문화재청 제공)

 

이에 문화재청은 현재 보물 제455호로 지정돼 있는 황오동 금귀걸이와 비지정 상태인 노서동 금귀걸이의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해 보물 지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1967년 6월21일 보물 제455호로 지정된 '태환이식(太鐶耳飾)'은 본래 경주 노서동 출토 금귀걸이로, 한 쌍 중 한 점은 일본에서 환수된(1966.5.28) 문화재인데 경주 출토 '황오동 금귀걸이'와 크기, 형태, 공예 기법 등이 매우 유사해 지정 이후 출간된 자료 등에서는 보물 제455호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오랫동안 인식되고 관리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문화재청은 1967년 당시 지정과 그 이후 경과 등을 재확인하고 두 지역에서 출토된 귀걸이에 대한 관계전문가의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심의 등의 절차를 밟아 문화재적 가치를 재평가할 계획이다.

haru@news1.kr

 
 
 
송고시간2018-12-31 06:00

 

송고시간2018-12-31 06:00

국립경주박물관, 재질별 색상 변화 비교 분석

신라 안장 재현품에 사용된 비단벌레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황남대총과 금관총 등 경주 신라 고분에서 출토한 비단벌레 장식 유물 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비단벌레 변색 현상의 원인이 철 산화물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31일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이승은 학예연구사와 정국희·이승렬 학예연구원은 신라 비단벌레 유물의 변색과 흑화(黑化)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딱정벌레목 비단벌렛과에 속하는 곤충인 비단벌레는 동아시아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서식하며, 국내에서는 전남 완도나 해남 등지에 산다고 알려졌다.

녹색이나 갈색인 몸에서 화려한 광택이 나는데, 특히 날개 빛깔이 아름다워 신라시대 투조(透彫·금속판 일부를 도려내는 것) 장식품에 사용됐다.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 비단벌레 장식 유물은 20여 건으로, 제작 시기는 5∼6세기로 추정되며 대부분은 마구(馬具)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일부 마구는 수습 직후 글리세린에 넣어 지금까지 보관해 특유의 색이 유지됐으나, 나머지는 변색이 진행됐다.

신라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재현품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구팀은 비단벌레 장식 유물을 살펴 형태와 재질을 기준으로 크게 5종류로 분류했다. 그중 네 가지는 평면이고, 하나는 원형이다.

평면형 유물은 비단벌레를 기준으로 상부는 모두 금동이나, 아래쪽은 재질이 모두 다르다. 하부 재질은 철, 목재와 금동, 동, 직물이다. 원형 유물은 목재 바깥쪽을 비단벌레로 감싸고, 그 위에 금동을 얹었다.

현미경으로 비단벌레를 들여다본 연구팀은 "금동이나 동에 부착한 비단벌레는 갈색과 녹색이 남아있었으며, 색상 구조는 안정적인 편"이라며 "비단벌레 날개의 강모(剛毛·굳고 거센 털) 홈 중앙에서 갈라짐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철에 부착한 비단벌레는 녹색과 갈색 구분이 어렵고, 전체적으로 옅은 녹색이나 검은색으로 보였다.

연구팀은 "철제 장식 비단벌레는 금동제 장식 비단벌레와 비교했을 때 섬유질이 상대적으로 열화(劣化)되고 떨어져 나가거나 들뜬 현상이 확인된다"며 "철제 부식물 가운데 비단벌레 표면을 매우 약하게 하는 물질이 있다고 추측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철제 부식물이 비단벌레를 변색한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X선 형광분석기(XRF)로 금속 성분을 조사했다.

분석 결과 금동제는 구리 성분이 대부분 90%를 넘었고, 철은 5%가 되지 않았다. 반면 철제는 철이 90% 안팎이고, 구리가 소량 포함됐다.

연구팀은 "이번 조사는 출토한 비단벌레 장식품 보존과 변색에 관한 기초 연구"라며 "비단벌레 손상 원인을 정확히 알려면 더욱 다양한 연구 실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비단벌레로 장식한 황남대총 허리띠꾸미개 [연합뉴스 자료사진]

psh59@yna.co.kr

 
 
 

입력 2016.07.05 01:11 업데이트 2016.07.05 11:39

중앙일보

박정호 기자 

입력 2016.07.05 01:11 업데이트 2016.07.05 11:39

고대 아프가니스탄은 빼어난 황금문화를 보여준다. 틸리야 테페 귀족 무덤에서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다. 신라 금관(오른쪽·국보 191호 황남대총 금관)과 유사한 모양새로 신라 금관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아프가니스탄-. 흔히 내전과 화약냄새를 떠올린다. 역사적으로 영국·러시아·미국 등 외세의 침입도 잦았다. 지금도 정정이 불안하다. 테러 소식이 잇따른다. 무장세력 탈레반이 저지른 문화재 파괴(반달리즘)의 폐해도 컸다.

아프가니스탄은 동·서문명의 교차로였다. 실크로드의 한복판에 자리했다. 서쪽의 유럽, 동쪽의 중국, 남쪽의 인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동서양이 만나는 접경지대였다. 4일 오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전시장 복판에 설치한 문구 하나가 눈에 띈다.

아이 하눔 유적에서 나온 ‘헤르메스 기둥’. 그리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금이다! 2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박트리아 공주가 우리 눈 앞에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1978년 틸리야 테페 유적을 발굴한 러시아 고고학자 사리아니디가 남긴 『회고록』 중 일부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에서 당시 유물 2만여 점이 쏟아졌다. 금관·상아 조각·유리병 등 하나같이 화려하고 정교했다. 이집트 투탕카멘 유적 발굴에 비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여성 무덤 5기와 남성 무덤 1기에서 출토됐다. 시신과 함께 묻은 부장품이다. ‘황금의 언덕’을 뜻하는 지명답게 금 공예품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6호 여성 무덤에서 나온 금관이 백미다. 신라 왕관의 ‘원류’로도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승미 학예사는 “아프가니스탄 왕관은 1세기에, 신라 왕관은 5~6세기에 만들어졌기에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영락(瓔珞)과 나뭇가지 세움장식 등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옛 아시아 지역의 문화전파를 연구하는 훌륭한 계기가 된다는 설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가 5일부터 9월 4일까지 열린다. 국립아프가니스탄 카불박물관 소장품 231건 1412점이 나온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아프가니스탄 전시다. 우리와 멀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아프가니스탄 문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자리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군주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도시 유적도 볼 수 있다. 인도·로마·그리스·이집트·중국 등의 문화가 섞인 이른바 ‘글로벌 문화’의 고대 버전과 만나는 셈이다.

이번 자리는 전세계 순회 전시 중 하나다. 그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카불박물관 소장품은 2003년 세상에 다시 공개됐다. 박물관 관계자들이 문화재 곳간 열쇠를 비밀리에 간직해온 덕분이었다. 2006년 프랑스 기메박물관을 시작으로 11개국 18개 기관에 전시됐다. 한국은 12번째다. 전시는 9월 27일부터 11월 27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계속된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입력 2016.07.04. 15:35

아프가니스탄 황금문화 최초로 국내 전시 (hankookilbo.com)

 

 

김민경입력 2016. 7. 4. 22:02

신라 금관의 뿌리, 아프가니스탄 '황금문화' (daum.net)

https://tv.kakao.com/v/vfdccoOE2o9EHB2vmE2HmvP@my

 

입력 2008-05-21 03:05업데이트 2009-09-25 01:45

입력 2008-05-21 03:05업데이트 2009-09-25 01:45

 
《신라 금관의 형태가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 비롯됐다는 이른바 ‘북방 기원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연구서가 동시에 나왔다.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에서, 박선희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이상 지식산업사)를 통해 “신라 금관은 북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창작품”이라고 말했다. ‘신라 금관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썼던 사슴뿔 모양의 모자를 본떠 만들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시베리아 사슴뿔 모자서 유래’ 통설 반박 연구서 2권 나와

임 교수는 우선 사슴뿔 모양을 따라했다는 설에 대해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은 대부분 5개며 더러 3개인 것도 있으나 2개인 경우는 전혀 없으므로 사슴뿔 한 쌍의 모양을 장식한 시베리아 무관(巫冠)과는 모양부터 다르다”고 지적했다.

또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끝부분이 ‘♤’ 모양으로 처리된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움(새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세움장식을 사슴뿔 모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모양과 사슴뿔의 연관성을 밝히지 못해 아예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의 이런 연구는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라 금관의 줄기 부분은 김알지가 최초로 발견된 계림(鷄林)의 신성한 나무(신수·神樹)를 형상화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씨계의 왕권 세습이 본격화되던 시기와 신라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로 일치하는데 김씨계가 왕권 강화를 위해 시조 신화를 금관에 담았다는 것.

그는 “금관의 세움장식이 신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면 나무의 새순인 움(♤) 모양 장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 밖에 △새 모양 장식이 붙은 신라 금관이 있다는 점 △태아 모양의 곡옥(曲玉)이 장식품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을 들면서 “닭 울음소리를 통해 황금궤 안에 있던 아기(김알지)가 발견됐다는 알지 신화와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 교수는 “기존의 시베리아 기원설에만 매달리는 학계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신라 금관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임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임 교수의 해석은 김알지 신화가 핵심인데 그 신화가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5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도 사슴뿔 모양 외에 나무 모양도 많이 나타난다”고 반박했다.

박선희 교수는 책에서 고조선시대 이후 나타난 관모(冠帽)의 형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신라금관의 원형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특히 관모의 한 형태인 절풍(折風)에 주목했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트는 고유한 머리 양식을 해왔는데 절풍은 상투를 튼 머리에 알맞은 관모 양식으로서 북방 지역에는 이런 양식이 없다는 것.

박 교수는 “신라 금관이 출토될 때 금관 속에 쓰는 절풍도 함께 나왔다”면서 “고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모 전통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신라 왕실이 썼던 명품 유리잔·장신구.. 원산지 비밀 풀렸다

손영옥입력 2021. 3. 17. 04:04
 
국립경주박물관 '고대 유리와 신라'展
국립경주박물관은 4월 11일까지 여는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통해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에서 나온 당시 초고가 수입품 유리식기와 유리구슬을 선보이고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보물급 유리식기는 성분 분석 결과 수입한 지역이 다양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리구슬은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지중해보다 더 짙은 파란색 그릇, 파란 물결무늬를 세련되게 덧댄 유리잔, 점박이 무늬가 박힌 찻잔, 입구가 봉황머리처럼 날렵한 유리병….

지금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전시장에 진열된 유리 식기는 놀랍게도 5, 6세기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1500∼1600년 전 신라의 왕과 왕족이 최고의 권력과 신분을 과시하듯 사용했던 최고 사치품이었다. 신라 왕족 여인들은 짙은 청색 유리구슬을 목이나 귀에 주렁주렁 달거나 옷에 꿰매 장식하기도 했다. 신라 시대 낙타에 실려 멀리 실크로드를 타고 건너온 저 유리그릇들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일까. 그 비밀이 풀렸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하고 있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한 유리를 주제로 한 전시로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다.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리제품 1만 8000점을 볼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신라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국보·보물 유리그릇이다. 4∼6세기 신라 권역의 대형 고분에서는 유리그릇이 23점이나 출토됐다. 경주의 황남대총(10점), 서봉총(3점), 천마총(3점), 금관총 (2점), 금령총(2점), 경주 안계리 4호분(1점), 합천의 옥천 고분(1점)등이다. 이 같은 발굴 규모는 동양에서도 최대다. 전시에선 그 가운데 국보·보물 등 15점이 한자리에 모여 모처럼 눈 호강을 했다.

유리는 모래와 불의 조화로 탄생한 신비로운 물질이다. 딱딱한 고체인 줄 알았던 유리는 불에 녹아 액체 상태가 되고 색깔과 모양, 크기 등 무한 변신이 가능하다. 4500년 전 이집트 혹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엔 거푸집으로 생산했지만, 기원전 1세기 경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됨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준보석류의 사치품이었던 유리는 일상 용기로 만들어져 ‘로만 글래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마침내 중국을 건너 한반도로도 흘러왔던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에 일본 아즈텍 회사와 공동으로 형광X선 분석기를 통해 성분 분석을 했다. 유리는 석영 등을 녹여서 제작할 때 끓는점을 낮추기 위해 융제(용융점을 낮추기 위해 첨가되는 물질)를 쓰기 때문에 성분으로 생산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다양한 지역에서 유리 식기가 건너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산(황남대총 북분), 이집트 산(천마총), 중앙아시아 산(황남대총 남분).


이를테면 황남대총 북분과 천마총, 경주 안계리 출토 유리잔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집트에서 건너온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투명한 유리잔과 봉황 모양의 유리병은 중앙아시아에서 것으로 추정됐다. 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황은순 연구관은 “신라가 여러 지역과 국제적인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신라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인들이 치장했던 유리구슬도 쏟아져 나왔다. 유리구슬은 3세기 삼한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사용된 이래, 화려한 색채 덕분에 보석처럼 사랑받았다. 중국의 역사서 위지 동이전에서는 그 시절을 이렇게 전한다. “구슬을 보배로 삼아 장식했고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 삼한∼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유리구슬만 해도 수십만 점이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신라(황남대총) 출토, 백제(오산 수청동)출토, 가야(김해 양동리) 출토.


흥미로운 건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백제권역에서는 오색영롱하게 다양한 색상을 즐겼지만 신라에서는 유독 블루톤이 사랑받았다. 가야의 여인들은 작은 유리구슬과 큼지막한 수정을 함께 엮어 멋을 냈다. 반면에 고구려에서는 구슬이 애용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유리를 수입만 한 건 아니었다. 직접 제작한 흔적들이 나온다. 거푸집을 사용해 유리구슬을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토기 거푸집이 삼한 시기 이후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런 거푸집과 유리를 녹이던 도가니도 나와 당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진화된 대롱 불기 기법으로 유리그릇을 제작하지는 못했을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고 있다.

경주=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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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전 서라벌에서도 '메이드 인 로마'는 명품이었다 (daum.net)

노형석입력 2021. 2. 24. 05:06수정 2021. 2. 24. 09:16
 
국립경주박물관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유리 유물 1만8천여점 전시
신라인이 금보다 높게 친 지배층 문화 '로만 글라스'
지중해~흑해~중앙아시아 초원길 거쳐 만주·한반도로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 ‘오색영롱…’의 네번째 부분인 신라 능묘 출토 유리그릇들. 사진 정면 아래쪽 그릇과 가운데 잔은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이며, 그 옆 푸른 잔이 북분 출토품이다. 멀리 안쪽에 보이는 유물은 금관총 출토 유리잔이다.

 

1600여년 전, 신라 경주에선 ‘메이드 인 로마’가 최고의 명품이었다는 것을 아시는지.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신라인이 등장하는 실크로드 역사의 꿈결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2000여년간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된 구슬과 그릇, 불교 공양구 등 각양각색의 유리 유물 1만8000여점을 엮은 전시는 진기하고 놀랍다. ‘2000년 제국 로마’의 수출품이 ‘1000년 왕국 신라’의 지배층을 결속하는 상징물이었다니!

핵심 주역은 이른바 ‘로만 글라스’로 이름 붙여진, 제국 곳곳의 공방에서 만들어 수출한 유리잔과 그릇이다. 초원길 교역품으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를 신라인은 금보다 더 높게 쳤다. 임금과 왕족이 독점하고자 기를 썼던 희귀 명품이고, 죽어서 묻힐 때 선호하는 부장품이기도 했다.

기획전 ‘오색영롱…’의 네번째 부분인 신라 능묘 출토 유리그릇들을 전시한 공간의 전경. 7개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 계통 유리그릇 1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고 있다.

 

국내외 고고학계에선 1920년대와 70년대 경주의 대형 고분 발굴과 연구 성과를 토대로 로마산 제품이 4~5세기 신라 경주에 들어와 크게 유행했다는 결론을 최근 잇달아 내놓고 있다. 확실한 증거가 전시장 네번째 영역인 신라 능묘의 유리 출토품 진열장에 나타난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령총 등 경주 7개 왕릉급 고분에서 로만 글라스 계통의 그릇, 주전자, 잔 등이 15점이나 나왔다. 1973년 천마총에서 나온 코발트빛 유리잔과 1975년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오이노코에’란 이름의 봉황 머리 모양(봉수형) 유리병이다. 옛 로마 권역을 제외하면 단연 압도적인 물량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 국립박물관과 일본의 실크로드 전문가들이 이 로만 글라스의 성분과 형태를 분석하고 이동 경로를 문헌과 유사 유물을 통해 추적했다.

빼어난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고신라의 상감유리구슬 네 점. 특히 3번 표시가 된 유물은 발굴 이후 90여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경주 식리총 출토 상감구슬로 학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2번 유물은 경주 인왕동 출토 상감유리구슬이다.

 

분석 결과, 천마총 유리잔은 지중해변 이집트의 나트륨 성분을 머금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물관 쪽은 황남대총 봉수형 유리병이 중앙아시아산일 가능성도 제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병은 흑해 크림반도 케르치와 지중해변 시리아 출토품 두 점밖에 없다. 지중해~흑해~중앙아시아 초원길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쪽에 더 심증이 갈 수밖에 없다.

전북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나온 유리 사리기(국보). 날렵한 목과 부드러운 곡선의 몸체가 아래 연꽃 대좌와 조화를 이루는 명품으로 국내에 전하는 유리 사리기들 가운데 조형미가 가장 뛰어나다.

 

로만 글라스는 경주 외엔 합천 옥전 고분을 빼놓고는 한반도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배층끼리만 공유한 외래 문물인 것이다. 신라 지배층은 고유의 무덤 방식인 돌무지덧널무덤과 북방 민족 특유의 취향이 깃든 금관 등의 황금 장신구, 로만 글라스란 세 가지 문물을 통해 정체성을 되새김질하며 결속했다. 유리제품 제작지가 어디였는지도 상상력을 돋운다. 학자들은 지중해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알프스 이북의 식민도시 콜로니아(독일 쾰른), 동지중해 연변의 시리아 팔미라(현 타드무르), 에게해에 접한 그리스 테살로니키 공방 중 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서 1만㎞에 가까운 여행을 해 경주에 안착했을 것이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뒤 마지막 통일제국 황제인 테오도시우스가 두 아들에게 동서로 제국을 나눠 주던 시기의 교역물인 셈이다.

경북 칠곡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 유리 사리기. 원형 유리고리 12개가 표면에 붙은 유리잔(오른쪽)과 목이 긴 유리제 사리병(왼쪽)으로 이뤄져 있다. 원형 고리가 붙은 녹색 유리잔은 신라 유리제 사리기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손꼽힌다.

 

전시의 또 다른 주역은 1만4000점이 넘는 유리구슬이다. 기획진은 한반도 유리의 시원으로 일컬어지는 청동기시대 부여 송국리, 보령 평라리 유적의 대롱 구슬 출토품과 더불어 98년 전 경주 식리총에서 발굴됐으나 한 번도 전시되지 않았던 이중 원형 무늬의 페르시아산 추정 구슬을 처음 공개했다. 한반도산 고대 유리 유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슬류의 주종이 알이 작고 적록황색을 띠는 인도-태평양(동남아)계 유리임을 보여준다. 로마와 통하는 인도의 남쪽 항구 파타남과 아리카메두 등에서 동남아~중국~한반도로 가는 유리구슬 교역로가 열렸기 때문이다.

기원 전후 시기 고대 한반도 유리구슬을 한데 모은 대형 진열장. 마한, 진한, 변한 등 당시 지역별 주요 구슬 유물들을 집약해 각각 설명을 붙였다. ‘오색영롱…’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볼거리로 꼽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기원 전후 시기 고대 한반도 유리구슬을 처음 한데 모은 대형 진열장에는 적갈색이 많은 마한계 구슬과 청색 계통의 마노·수정 등이 함께 나오는 변한·진한계 유물을 나란히 배치해 지역별 유리구슬의 특징까지 일별할 수 있게 해놓았다. 이 특징은 나중에 백제, 가야, 신라로 고스란히 계승되는데, 삼국시대 구슬 목걸이와 장신구, 사람 얼굴 들어간 상감구슬 등을 통해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삼국시대 유리는 초원길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 계통이 주종이고, 유리구슬은 해상 실크로드로 들어온 인도-태평양계 유물이 절대다수임을 전시는 드러낸다. 고대 한반도인이 육·해로를 통한 글로벌 교역에 열려 있었고, 이런 의식이 사리병 등 불교 공양구의 제작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1973년 7월 경주 천마총 고분 안에서 발견된 푸른빛 유리잔이 이번 전시의 들머리에 대표 유물로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이 2년 전 이 잔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나트론’으로 불리는 이집트 특산의 천연 탄산나트륨을 함유한 것으로 확인돼 이집트에서 원재료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출토된 구슬의 본산지와 유리 유물의 전파경로에 대한 상세하고 입체적인 설명이 허전한 대목으로 남지만, 로마·인도·한반도의 육·해상 교류사를 색다르게 짚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전시라 하겠다. 4월11일까지.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신라 유리병의 대표작인 봉황 머리 모양 유리병도 전시에 나왔다. 박물관 쪽은 2년 전 일본 쪽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한 결과 제작지가 중앙아시아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지만, 비슷한 유형의 유리병이 시리아와 흑해 연안 크림(크리미아)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6세기 초 백제시대 유리구슬들. 전형적인 인도-동남아산 계열의 수입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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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

입력 2020. 8. 24. 05:06수정 2020. 8. 26. 01:36

1970년대 찍은 경주 황룡사터 건물터 발굴 현장. 문화재관리국이 조사단을 꾸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2만평 넘는 대사원터를 발굴조사한 것은 국내 고고발굴사상 전례 없는 대역사였다.

 

왜 궁궐로 짓다가 거대한 절이 됐을까.

신라 천년 도읍 경주의 옛 도심 구황동에 2만평 넘는 터만 남긴 채 사라진 거대사원 황룡사 유적을 답사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다. 황룡사는 한반도 역사에 등장한 역대 불교 사찰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절이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세운 80m를 넘는 목탑과 본존불 장륙존상, 화가 솔거의 벽화로 유명했던 이 절터는 진흥왕 14년인 553년, 왕궁인 월성 동쪽의 광활한 저습지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인근의 좁은 반월성 궁성에 덧댄 새 궁터로 짓기 위해 막대한 분량의 흙을 쌓는 대역사를 벌여 대지를 닦았는데, 갑자기 거대한 절을 짓는 쪽으로 공사 방향이 확 바뀐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새 왕궁을 지으려 하니 터에서 기묘하게도 누른빛 황룡이 나타나는 이적이 일어나 절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고 절 이름도 황룡사로 지었다고 유래를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일연의 설명은 설화적 내용이며 실제 절로 바꿔 건축한 도시사적 배경이 무엇인지는 오랜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그런데 최근 이런 의문에 설득력 있는 풀이를 내놓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낭보가 들려온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현재 경주 시가지 모습을 바탕으로 신라 궁성 월성과 주변 큰 사찰들의 연결로를 표시한 설명도. 사진 위쪽이 북쪽이고 아래가 남쪽이다. 가운데 말굽 모양의 반월성 유적과 그 바로 위 사각형으로 표시된 월지(안압지) 동궁 유적과 노란 원 두개가 맞붙은 지점으로 표기된 제석궁(천주사)이 좀 더 큰 왕궁 권역인 ‘만월성’을 형성한다. 설명도 왼쪽 위와 아래, 오른쪽 위, 아래 각각 표기된 노란 원들이 왕궁의 서북쪽, 서남쪽, 동북쪽, 동남쪽에 있는 흥륜사, 영묘사, 황룡사, 그리고 사천왕사 쪽 영역이다. 이 절들을 표기한 원들로부터 이어진 직선로(빨간색)가 월성의 서문, 북문, 동궁의 동문과 월성의 남쪽 누각과 바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만평에 육박하는 면적을 지닌 황룡사터 유적 전경.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규모 조사작업이 진행된 직후의 유적을 공중에서 본 모습이다.

 

황룡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이는 신라사 전문가인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다. 그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개소 30돌을 기념해 지난 21일 마련한 학술대회에 ‘신라 왕도와 국가사찰’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연구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논문의 뼈대는 황룡사가 원래 궁터 위에 만들어진 배경으로 왕실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한 신라 특유의 도시계획 원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을 내세운 것으로 집약된다. 황룡사 서쪽 인왕동의 말굽형 언덕에 자리잡은 1000년 왕궁 반월성은 크기가 협소했다. 그래서 신라 중후기 동북쪽 월지(안압지) 권역 등 사방으로 계속 증축, 확장되어 만월성이란 큰 궁궐로 덩치를 키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월성의 사방에 설치된 4개의 큰 사원(사처가람)들이 월성 궁궐의 권위와 경주 일대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도시계획이 실행됐다는 게 논문의 요체다.

황룡사의 남쪽 구역 큰 도로와 광장 유적이 서쪽 월성 동궁의 동문과 연결되는 경관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도해도. 윤선태 교수는 황룡사 남쪽 광장의 큰길에 들어서면 길의 축선이 월성의 출입문으로 향하기 때문에 군중이 왕실의 권력 공간을 주시하는 시각적 효과를 낳게 된다고 설명한다.
황룡사터와 신라 궁궐인 월성이 활짝 트인 큰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적 설명도. 절터 남문 앞 큰 도로(대로)와 광장 유적이 터의 서쪽에 자리한 월성 동궁 동문 터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한 황룡사 남쪽 대로 및 광장 터 발굴조사 결과다. 길이 500m, 너비 50m나 되는 대로가 황룡사 남문 남쪽 광장부터 서쪽의 안압지 인근 신라 궁궐의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저습지 위에 2m 이상 두둑하게 흙을 쌓아 넓은 대지를 조성하고, 이렇게 궁궐 문과 대찰 문을 잇는 장대한 대로를 닦아 파노라마처럼 노출되면서 연결한 건 신라 경주만의 독창적인 도시계획 구조였다는 것이다. 축선은 남북이 아닌 동서 축이지만, 오늘날 서울 광화문에서 세종로, 태평로 대로를 보는 것처럼 장대한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3만평에 가까운 거대한 저습지를 무려 2m 이상 매립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성공한 신라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윤 교수는 이런 추론을 바탕으로 오히려 반월성과 황룡사 터 사이 월지 공간 저습지를 추가로 매립해 왕성을 넓히려는 계획을 추진했고, 궁터로 지으려던 황룡사 터는 확장된 왕성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장엄물로서의 효능이 더욱 크다는 입지조건 때문에 절로 전환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절로 바뀌어 건립된 뒤 남문 앞 남쪽 대로 광장을 크게 조성해 왕궁과 연결하는 도시계획을 실행하면서 신라 경주 반월성 동쪽의 신도심 핵심이 됐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이런 식의 큰 절 출입문과 궁궐 문을 활짝 트인 대로로 잇는 도시계획이 황룡사를 포함해 신라 왕경을 둘러싼 네 개의 절에서 모두 확인된다는 점이다. 왕성의 서북쪽 흥륜사, 서남쪽 영묘사, 동북쪽 황룡사, 동남쪽 사천왕사가 모두 ‘전대로’라고 불리는 절 문 앞 큰 도로를 갖고 있는데, 이 도로들이 모두 왕궁 반월성의 동서남북 문과 스펙터클한 경관을 만들면서 그대로 이어지는 얼개를 갖고 있다. 왕성을 서남쪽에서 지킨 영묘사의 경우 승려 진자사가 화랑으로 점찍은 소년 미시랑을 만났던 동북로라는 절 앞 도로 명칭까지 <삼국유사>에 전해졌으나, 후대 학계는 단순히 동북쪽 모퉁이로 해석했던 것을 윤 교수는 영묘사 앞 대로가 월성 서문의 누각까지 동북쪽으로 크게 트여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 영묘사 대로에서는 대규모 군사사열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서북쪽 흥륜사 앞길도 국외에서 들어오는 사신과 불교 승려의 보물들을 왕실이 맞는 길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 백성들이 장대한 권력의 시각화된 경관을 보게 하면서 권위를 과시하는 구실을 했다는 게 윤 교수의 추정이다.

2016년 당시 황룡사터 남쪽 조사지역을 공중에서 바라본 모습. 허옇게 드러나 가로로 길게 이어진 부분이 당시 새로 드러난 절터 남문 앞 대형 도로·광장 터의 흔적이다. 유적을 맡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2019년까지 발굴조사를 지속해 남문 앞 도로가 폭 50m, 길이 500m로 서울 세종로 거리를 방불케하는 거대한 대로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윤선태 교수는 이 대로의 끝이 월성 권역의 동쪽 끝인 동궁터 동문에 활짝 트인채 잇닿는 얼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왕궁의 장대한 경관을 한껏 부각시키는 시각적 장엄물의 기능을 지녔다고 짚었다.

 

신라인들은 오늘날 국내 위정자들처럼 도시의 옛 시가를 막 부수고 모두 헐어낸 뒤 다시 짓고 하는 도시계획을 한 게 아니었다. 흥륜사 쪽, 영묘사 등 월성 서쪽의 원도심은 강을 끼고 오래전부터 시가지가 조성되고 물류와 인력의 이동이 활발했던 점을 고려해 경관을 손대지 않았다. 반면, 저습지를 매립해 새로운 대지를 조성한 동쪽 황룡사 쪽은 새롭게 중국에서 발전하고 있는 도성의 장엄방식인 격자형의 직각적 얼개를 만들어냈다. 최대한 경주의 지세에 맞춰, 중국 북조에서 건너온 격자 가로 중심의 새로운 신도시 안을 기존 건물과 어우러지도록 수용해 법고창신의 태도로 도시계획을 했다는 점은 오늘날 현대 도시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윤 교수는 말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문화재청·윤선태 교수 제공

 

 

등록일 2021.09.06 19:36

월성 동쪽에 황룡사는 어떻게 지어졌나? - 경북매일 (kbmaeil.com)

 

 

'연구만 30년'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 속도내나 (daum.net)

김고금평 기자입력 2018. 6. 30. 06:31
 
미륵사지 석탑, 20년 복원 계기로 본 고난도 문화재 관리.."작업보다 연구 시간 등 시행착오 길어야"
13세기 몽고 침입으로 불탄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도. /사진제공=문화재청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두칼레 궁전은 9세기 세워진 이래 화재와 재건을 반복했다. 14, 15세기쯤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지만 복원 개념이 없었던 당시 재건 기술은 소실된 부분을 채우는 수준에 그쳤다.

폼페이 유적지의 ‘검투사의 집’ 등 유적들은 폭우와 습도 등을 견디지 못해 붕괴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손상된 건축물을 1940년 말 졸속으로 복구한 것이 화근이었다.

문화재 복원은 세계적으로도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딜레마의 연속’이다. 원본 자료 없이 진행되는 작업은 ‘창조’로 비쳐 져 문화재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자료가 충분해도 졸속으로 단행된 복원은 처음부터 손대지 않는 게 정답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1397년 지어진 일본 교토의 금각사는 1950년 방화로 뼈대만 남기고 모두 소실됐다. 다행히 상세한 도면이 발견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지만, 급하게 복원하느라 군데군데 금박이 떨어져 나가 ‘흑각사’라는 오명을 받기 일쑤였다.

돌의 실루엣과 높이 추정치만 남은 황룡사지 9층 목탑 터. /사진제공=문화재청


일본 문화재 당국은 1987년 80억 원을 들여 2차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600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가로세로 약 10cm의 금박 20만 장을 붙이는 난공사를 택해 지금의 금각사로 재탄생했다.

국보 11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 해체를 결정한 지 20년 만에 복원을 끝내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화재 복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6층이냐 9층이냐 등 원형 복원에 대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제 기준에 맞춰 구조적 안정성과 기존 부재의 재활용을 통한 진정성 확보에 주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세계적 추세는 로마 경기장처럼 원형 복원보다 깨진 상태로 두는 것 자체도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입장이어서 추정을 통한 원형 복원 작업조차 지양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원형을 살리자는 학계 쪽 의견도 만만치 않아 복원은 기술 발달과 함께 문화재 관리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대규모 수리 작업의 첫걸음을 뗀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계기로 덕수궁과 황룡사지 9층 목탑의 복원 작업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덕수궁 복원 투시도.


문화재청은 일본 강점기에 훼철되고 변형·왜곡된 궁궐 위상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최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시작으로 올해부터 덕수궁 복원 사업에 나선다.

100년 전 고종 승하 이후 제 모습을 잃어버린 덕수궁은 2010년 덕수궁 중명전 복원, 2014년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탈바꿈한 석조전에 이어 광명문, 돈덕전, 선원전 등 변형·왜곡된 건축물의 형태로 따로 존재해왔다. 덕수궁 복원은 앞으로 20년 후인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신라 선덕여왕 643년에 지어졌다가 13세기 몽고 침입으로 불에 타 절터와 탑 터만 남은 황룡사지 9층 목탑은 가장 예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고난도 복원 작업으로 꼽힌다.

돌에 새겨진 실루엣과 문헌에 남아있는 높이 추정치만 가지고 작업에 들어가야 해서 복원이라기보다 창조에 가깝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25층이 넘는 아파트에 해당하는 82m 높이의 9층 목탑이 첨단 기술과 만난다고 해도 완성된 복원 작업이 손대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로 이어졌을 때 문화재 훼손 및 역사적 의미 퇴색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

미륵사지 석탑 1910년 동측면(왼쪽)과 미륵사지 석탑 수리 후 동북측면. /사진제공=문화재청


전문가들은 복원에 대한 충분한 의견을 통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복원 작업보다 복원에 이르는 연구와 조사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쾰른 대성당이 100년에 걸쳐 복원 작업에 나서는 것도 원형에 가까운 형체를 만들기 위한 연구 작업에 더 시간을 쏟는다는 얘기다.

도진영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미륵사지 석탑이 20년 걸렸지만, 그 절반의 시간은 시행착오에 썼을 것”이라며 “석탑 복원을 계기로 보존가치 높은 문화재에 대한 수리·복원의 연구가 더 활발하고 깊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학계는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 문제에서도 연구 시간만 대략 30년을 잡을 정도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 교수는 “문화재 복원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내인데, 여론에 쫓겨 서두르다 낭패 본 경험이 적지 않다”며 “관리·복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배영윤 기자 young25@

 

 

입력 2016.03.30. 20:04 | 수정 2016.03.31. 10:34  

[한국사 Live] 현대기술로도 복원못하는 황룡사탑 (daum.net)

▲ 황룡사 조감도. 황룡사 중앙부에 9층 탑이 우뚝 솟아있다. <사진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입력 : 2007/04/26 [13:22

[단독]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한정환입력 2020. 1. 28. 13:57

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신라 천년 고찰 (daum.net)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분황사 1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경주의 동북쪽. 신라 천 년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찰이 하나 있다.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는 경주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보기엔 조그마한 사찰로 보인다. 그러나 경주 분황사는 신라시대 최고의 사찰로 명성을 날린 황룡사와 견줄 정도로 유명했던 사찰이다.

분황사 하면 선덕여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즉위 3년(63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리고 신라의 승려 자장과 원효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는 창건 후 현재까지 몸이 불편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 한정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과 씨앗

신라 최초의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 여왕으로 즉위(632년)해 16년 동안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린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재임하는 동안 예지력이 뛰어난 여왕으로 후세에 전해진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이 기록돼 있다. 그중 하나가 분황사와 관련한 모란꽃 이야기이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 앞으로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의 꽃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왕의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모르는 신하들이 의아해하며 여왕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왕은 신하들에게 함께 보내온 꽃씨를 바로 앞 뜰에 심도록 한다. 꽃씨를 심은 후 신하들이 그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여러 번 꽃의 냄새를 맡아보니 꽃에 향기가 없다. 과연 여왕이 처음 했던 그 말과 같았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었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여왕의 깊은 뜻과 예지력을 알고 모두 뛰어난 지혜에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쓰인 게 <삼국유사>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모란꽃 설화를 새로 썼다. 내용은 같으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로 시기가 바뀌어 있었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향기로운 여왕 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분황사. 해마다 분황사 앞에는 유채꽃, 메밀꽃 등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을 심어 선덕여왕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경주 분황사 보광전 모습
ⓒ 한정환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덕왕 때 한기리에 희명(希明)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여인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됐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를 찾았다.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으로 갔다. 거기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 꿇으며/두 손바닥을 모아/천수관음 앞에/축원의 말씀 올리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 주시옵소서,/아아, 저에게 끼쳐 주시면/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여기서 한번 아이의 어머니 희명이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자. 바랄 희(希)에, 밝을 명(明)은 자식이 시각장애인이 되자 더 함축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눈을 밝게 해주소서'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희명이라는 이름은 자식이 눈이 먼 아이가 될 걸 알고, 예지력이 풍부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같다.
눈먼 자식이 눈을 뜨자 희명은 분황사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렸다고 한다.
 
"대나무 말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 하루아침에 푸른 두 눈이 멀었네.
보살님이 자비로운 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 헛되이 버들꽃을 보냄이 몇 번의 봄 제사나 될까."

 
  경주 분황사 입구에 세워진 원효성지 분황사 비석 모습
ⓒ 한정환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원효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 없이 혼자 공부를 했다. 원효는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던 불교를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대중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킨 대중불교의 선각자다.

원효는 저잣거리로 내려가 <화엄경>을 설파하고 백성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삼국유사> 의해편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법을 중히 여기고 숭상하던 대사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하루는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궁리는 원효를 찾던 중 남산에서 문천교로 내려오는 원효를 만난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하는 수 없이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이때 원효대사가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세속 인연을 맺어서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특하며 민첩했다. 경서와 역사 책에도 널리 통달하여 신라의 10 현(賢)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와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疏)를 지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찰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소상을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예를 표했다. 설총이 매번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고개를 돌리며 계속 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이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설총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린다.

"각승(角乘)은 처음 삼매경(三昧經)의 축을 열었고/표주박 들고 춤추는 것은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더니/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 비었다."(각승(角乘) ; 삼매경을 풀이한 법사를 말함)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 모습.
ⓒ 한정환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주차료 : 무료
입장료 : 어른 1,3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최광식·박대재 옮김>
-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김용희>
-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고운기>
- 삼국유사 <김원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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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8 13:59l최종 업데이트 22.10.22 10:54l

석탑 파괴할 땐 언제고, 다시 쌓을 땐 무슨 이유?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분황사 2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고찰이다.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사찰은 불타 없어지고 일부는 유실되었다. 현재는 조선시대에 지은 지금의 보광전만 남아 있을 뿐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화쟁국사비부, 석정이란 우물만 남아있다.

1991년 분황사 터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 사찰과 같이 품자형 금당 배치를 하고 있었다. 분황사가 한창 번창할 당시 왼쪽 전각 북편에 영험이 있는 천수대비 그림과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 위에 있는 사자상 모습(서쪽편은 사자상, 동쪽 편은 물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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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선시대 분황사 스님이 수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대로 방치하던 중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다시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다. 타국의 문화재이지만 그때 당시에도 국보급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리에 참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서 차곡차곡 쌓아 만든 모전석탑은 높이가 9.3m이다. 국보 제30호로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3층만 남아있다. 일부 학자와 학계에서는 9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7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히 몇 층인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궁금증만 더한다.

모전석탑 기단 네 모서리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앉아있다. 공식적으로는 네 마리 모두 사자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물은 누가 보아도 사자가 맞다. 그러나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는 자세히 살펴보면 물개 형상이다. 동해 쪽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선덕여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님의 계율을 상징한다.

현재 탑신부 1층 네 면에 감실이 있는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는 인왕상은 한쪽은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이고, 또 다른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현존하는 인왕상 중 가장 이른 것이다. 최고 절정의 인왕상은 석굴암 내부의 인왕상이다.

모전석탑의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다.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및 사리장엄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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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 은제 가위 등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이라 여성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발견되었다.

모전석탑 안에는 큰 돌과 모래자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강력한 지진에도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래와 자갈 등을 채워 놓은 것이다. 몇 해 전 경주 지진 때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분황사 석탑은 신라 시대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분황사 한편에는 벽돌 같은 돌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이 돌들은 석탑을 쌓았을 때 사용된 돌들이다.

 

  경주 분황사 보광전 뒤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손과 얼굴이 함몰된 불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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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 주조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조선시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입상이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제작된 것만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경주 분황사 석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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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 사찰 내에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팠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경주에는 이런 형태의 석정이 3곳 있다. 분황사 석정과 재매정에 있는 김유신 생가터 우물 그리고 경주향교 우물이다. 이 중에서 분황사 석정은 우물과 관련하여 사연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은 삼국유사 원성왕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년)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주문을 외워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 버린다.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분황사 석정은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14년 분황사 뒤뜰의 우물 속에서 목이 잘려나간 석불 여럿이 발견되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관련기사 : http://omn.kr/s5we)에 진열되어 있다.
  

  경주 분황사 경내에 있는 화쟁국사비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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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고려 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다. 고려 숙종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에 대한 비석이나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에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 쓰여진 김정희의 친필이 어렴풋이 보인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이라도 보호 덮게를 세워 그나마 조금 보이는 글자만이라도 보호해야겠다. 이대로 방치하면 나중에는 받침돌이 퇴적을 거듭하여 완전히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한낱 바위돌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까 두렵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주차료 : 무료
입장료 : 어른 1,3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 참고 자료
- 경주 문화재 길잡이 <경주시>
- 문화재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금관, 금제장신구]

 

송고시간2019-12-18 09:47

대련리 유적 석실묘에서 금제 귀걸이 3쌍, 은제 팔찌 1쌍 나와

포항 대련리 유적에서 나온 금제굵은고리귀걸이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굵은 고리 아래에 동그란 구형(球形) 장식, 원뿔 장식을 매단 고구려 귀걸이와 유사한 금귀걸이가 경북 포항에서 발견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화랑문화재연구원(원장 오승연)은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5세기 후반에 고구려 귀걸이 제작 기법을 모방해 신라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한 쌍을 수습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른바 '태환이식'(太環耳飾)이라고도 하는 굵은고리귀걸이는 돌방 길이가 5.3m, 너비가 1.8m인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굴식돌방무덤)에서 나왔다.

포항 대련리 유적 4호 횡혈식 석실묘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연구원은 이번에 횡혈식 석실묘 6기와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했는데, 무덤 대부분은 도굴됐으나 4호 횡혈식 석실묘는 무너진 뚜껑돌이 부장품을 덮어 귀걸이 등이 발굴됐다.

이 고분은 시신을 두는 받침인 시상(屍床)이 상하 두 겹으로 겹쳐진 상태였다. 아래쪽 시상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쌍,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 은제 팔찌 1쌍이 나왔고, 위쪽 시상에서는 또 다른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물 제작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됐다.

조헌철 화랑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주검받침이 두 번에 걸쳐 만들어졌고, 귀걸이가 여러 점인 사실로 미뤄 시차를 두고 주검 3구 이상을 묻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굵은고리귀걸이는 길이가 5㎝, 무게는 18.5g이다. 통통한 고리 아래에 원을 연결해 만든 듯한 구형 장식이 있다. 다만 고구려 귀걸이와는 달리 장식 중간에 눈금을 새긴 굵은 선 형태의 각목대(刻目帶)가 있다. 구형 장식 아래에는 원뿔형 장식이 존재한다.

충북 청원 상봉리 유적 출토 금귀걸이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조 연구원은 "이 같은 귀걸이는 충북 청원 상봉리, 서울 능동, 강릉 병산동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며 "고구려 귀걸이에는 구형 장식과 원뿔형 장식 사이에 원반 장식이 있지만, 대련리 유적 귀걸이에는 없다"며 고 말했다.

이어 "신라 유적인 황남대총 북분에서 고구려산 귀걸이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련리 유물은 전형적인 고구려 귀걸이와는 차이가 있어 고구려 제작 기법을 본뜬 신라산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귀걸이가 나온 무덤 구조에도 주목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횡혈식 석실묘는 고구려 영향으로 신라에 유입됐다고 본다"며 "그 시기를 수도인 경주는 6세기 전반, 지방은 5세기로 추측해 왔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신라 지역 5세기 횡혈식 석실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이 매우 드문데, 대련리에서는 6기나 나왔다"며 "일부 학자는 무덤 조성 시기를 5세기 초중반으로 올려 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포항 대련리 유적에서 나온 금제가는고리귀걸이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세환이식'(細環耳飾)이라고도 불리는 가는고리귀걸이는 중심 고리 아래에 원통형 중간 장식, 나뭇잎 형태 장식이 차례로 달렸다. 원통형 장식에는 줄무늬와 뚫어서 새긴 무늬가 있고, 넓적한 나뭇잎 형태 장식에는 작고 오목한 다른 나뭇잎 장식 2개를 추가했다.

가는고리귀걸이 중 한 쌍은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나, 나머지 한 쌍은 나뭇잎 장식이 사라졌다. 온전히 보존된 귀걸이는 길이가 4.9㎝, 무게가 7g이다.

이러한 귀걸이는 경주 천마총·서봉총·보문리 부부총과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나왔다고 알려졌다.

조사단은 이외에도 4호 석실묘 돌방 남쪽 부장품 공간에서 기대(器臺·그릇받침),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고배(高杯·굽다리접시) 등 형태가 다양한 토기 수십 점을 찾았다.

조 연구원은 "이번에 나온 유물들은 경주 외곽에 해당하는 포항 일대의 횡혈식 석실묘 수용 시기와 경로, 신라와 고구려 교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포항 대련리 유적에서 나온 은제 팔찌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psh59@yna.co.kr

 

 

90년전 경주의 문화재 사진들이 대거 공개됐다.

경주학연구원은 일본 나라시 아스카엔(飛鳥園)에서 보관해 오던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의 한국 관련 문화재 유리건판 필름 700여장을 재촬영해 공개했다고 1일 밝혔다.

일본인 노세 우시조(能勢丑三, 1889~1954)씨가 일제강점기에 경주 등지를 방문해 유리건판에 남긴 이 사진은 당시 우리 문화재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정비되기 전의 실태를 확인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주학연구원은 지난 2014년부터 아스카엔 측과 교섭한 끝에 지난해 12월 유리건판 3700여장을 복제 촬영했다. 이중 700여장이 한국과 관련한 사진과 실측도면이며, 그외 일본과 중국의 문화재 사진인 것으로 밝혀졌다.


노세 우시조는 1926년 경주 서봉총 금관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수행단 일원으로 처음 경주에 왔다. 당시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던 그는 37세였다. 이 짧은 경주 방문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 경주의 문화유산에 흠뻑 빠지게 된다. 특히 십이지신상에 매료돼 12지와 관련된 국내 유적지는 모조리 찾아다니며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사비를 털어가며 촬영과 발굴, 복원까지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교토의 재력가 자제였기 때문이다. 고대학협회 이사장이자 동료 학자였던 쓰노다 분에이(角田文衛)은 ‘고고학 교토학파'라는 글에서 “노세는 열정적으로 조선 고고학과 일본 석조공예사, 회화사를 연구했다”며 “특히 그는 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을 해서 당시 경주에서의 애칭이 ‘감격선생’으로 불리었다”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된 사진을 보면 1928~1931년 원원사(遠源寺) 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벼랑 아래로 방치돼 있던 삼층석탑재를 수습하고 탑지를 발굴 조사한 뒤 이를 바탕으로 복원하는 전과정을 도면과 함께 유리건판에 남겨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서 석탑 터를 실측하고 발굴한 모습과 각종 부재를 모아 놓은 사진, 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고 가조립한 장면, 노세가 직접 그린 평면도와 석탑 모형도까지 원원사터 관련 사진만 300여장에 달한다.


이밖에 헌덕왕릉과 구정동 방형분, 진평왕릉, 흥덕왕릉, 경덕왕릉, 성덕왕릉, 김유신장군묘 등 신라 왕릉을 비롯해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해 사진으로 남겼다. 경북 예천 개심사지 석탑, 전남 구례 화엄사 석탑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였다. 노세는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연구자였던 것이다.

노세 우시조가 원원사 석탑 복원에 얼마나 정열을 쏟아 부었는가는 그의 조사행적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주 황복사지 십이지상과 헌덕왕릉 십이지상을 수차례 걸쳐서 발굴조사를 했다. 원원사 십이지상과 관련해서 예천 개심사지 석탑, 구례 화엄사 서탑, 경주시 미방리 폐동곡사지, 암곡리 무장사지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 우시조였다. 또 경주의 십이지상뿐 아니라 개성의 고려시대 왕릉 및 중국과 일본의 십이지상을 망라해서 비교 검토했던 것도 그의 연구 업적의 하나이다.


이번 사진자료 발굴은 지금처럼 정비·복원되기 이전의 신라 왕릉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의 경주 유적이 처한 상황을 입증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향후 문화재 연구를 위해 보고서 발간 및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경주=장영태 기자 3678jyt@segye.com

 

신라 황금보검은 로마 문화에서 비롯됐다?

'신라와 서역' 세 가지 쟁점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3.07.08. 03:04
 
 

서양식 황금보검, 로마풍(風)의 대형 유리병, '서역인(西域人)' 무인석상….

신라가 중국 대륙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했다는 사실은 유물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와 서역의 교류 실상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는 관련국 학자들이 신라와 서역의 교류에 대한 의문점을 따져보는 자리였다.

 

①신라 왕실의 뿌리는 중앙아시아?

4~6세기 신라 왕실의 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廓墳)은 고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족의 무덤 쿠르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신라 왕실이 이 지역에서 온 유목·기마 민족이라는 학설이 제기된다.

신라 고분의 서역 관련 유물들. 왼쪽은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황금보검, 가운데는 황성동 석실 고분에 부장된 토용(土俑), 오른쪽은 괘릉 앞 무인 석상이다.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은 "쿠르간은 중앙아시아에서 2~3세기에 사라지고, 몽골초원 등 중간 지대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양자를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신라 왕실의 기원을 중앙아시아나 흉노와 연결하는 것은 비학문적"이라고 말했다.

반면 사마세프 카자흐스탄학술원 고고학연구소 이스타나분소장은 "중앙아시아의 쿠르간은 4~5세기에도 나타나고 두 지역의 유물이 비슷하기 때문에 연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은 "4세기 이후 신라에서 금 제품이 많고 김씨(金氏) 왕조가 성립하는 것은 금을 중시하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이주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②괘릉 무인석상은 서역인?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 앞의 '서역인' 석상(石像)에 대해 아나르바예브 우즈베키스탄학술원 고고학연구소 부소장은 석상과 사마르칸트 벽화의 유사성을 들어 "석상의 주인공은 사마르칸트에서 온 소그드인(人)"이라고 주장했다. 7~8세기 실크로드 전역에서 활동했던 소그드인의 일부가 신라에 들어와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해서 석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반면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소그드인이 2만명이나 됐던 당나라도 황제릉 앞에 서역인상은 없었다"며 "당보다 폐쇄적이었던 신라가 왕릉 앞에 외국인 석상을 세웠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성왕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사찰의 금강역사와 사천왕상은 서역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③신라 문화는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 고분의 유물 중 가장 이색적인 황금보검과 로만 글라스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요시미즈 쓰네오 일본 노도지마글라스공방 회장은 "황금보검은 양식·문양·재질로 보아 중부 유럽에 살았던 켈트족 왕이 선물한 것"이라며 "신라 왕관의 형태(수목관·樹木冠), 로만 글라스, 각배(角杯), 사슬 장신구도 신라가 로마 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황금보검의 양식은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서 출토된 단검과 비슷하고 기술은 동로마에서 기원했다"며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집단이 동유럽의 장인에게 주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대로마서 제작→실크로드→신라 유입 추정

1973년 6월, 경북 경주의 대릉원 옆으로 계림로를 개설하는 공사를 하다가 6세기 신라 고분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배수로를 파면서 우연히 무덤으로 보이는 돌무지가 삽에 걸리는 바람에 발굴이 이루어졌지요.

 

▲ 로마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635호 황금 장식 보검. 이밖에 금령총 출토 청색 반점무늬 유리잔은 옛 로마식민지인 독일 쾰른 지방이 원산지이고,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봉황머리 모양 손잡이 병은 서방유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제공

 

‘계림로 14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은 길이 3.5m에 너비 1.2m로 대릉원 일대에 있는 고분으로는 크기가 작았지만 왕릉에 버금갈 만큼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봉분이 흔적도 없이 깎여나간 위에 민가가 지어져 있었기에 오랜 세월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무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출토품은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황금 장식 보검이었습니다. 길이가 36㎝에 이르는 이 보검은 황금으로 장식하고 군데군데 홍마노를 깎아 넣어서 격조 높은 색조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당시 보검의 출현에 학계는 긴장했습니다. 너무나도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기 때문이지요. 보검을 자세히 보면 테두리와 내부가 수많은 금 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그리스 로마 양식인 누금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 보검이 외래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제작된 것인지, 수입품인지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은 외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2001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신라황금’특별전에 출품되었을 때도, 아예 ‘외래품(Imported Goods)’ 코너에 진열되었으니까요.

신라는 서역과 문물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만큼 계림로 14호분 자체가 외국인의 무덤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해외에도 유례가 드문데, 카자흐스탄의 보로로에 지역에서 출토된 칼과 중국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주에 있는 키질 제69굴의 벽화에 그려진 무사의 칼이 가장 비슷합니다. 모두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이 보검의 제작지를 로마 세계와 직접 연결시킨 사람은 일본학자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입니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2002년 국내에서도 번역된 ‘로마 문화 왕국, 신라’에서 일찍부터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다뉴브강 남부 트라키아 지방의 켈트족이 이 보검을 만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요시미즈는 켈트 지배자의 사신이 직접 신라로 가져왔거나 신라의 사절이 그곳에서 하사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크로드 상인이 신라의 고위층에게 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 정도의 최상급 의례용 보검이라면 상거래 대상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라키아는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 즉 흉노의 근거지입니다. 유럽을 100년 동안이나 공포로 몰아넣은 아틸라의 본거지이지요. 게다가 장식 보검은 아틸라가 유럽을 제패한 시기, 로마와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신라·서역교류사’를 쓴 정수일 교수는 4∼6세기 신라와 로마 사이에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만남이 있었던 것은 흉노 등 실크로드로 서역과 교류하던 유목민족 국가가 통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황금 장식 보검이라는 것입니다.
dcsuh@seoul.co.kr

 

 

 

기사입력 2010/02/07 [19:46]

신라 '황금보검'의 실체와 주인은 누구?: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잃어버린 70년…‘딱’ 맞았네! (hani.co.kr)

  • 수정 2019-10-19 11:23
  • 등록 2007-07-12 18:17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두개의 돌조각은 삼릉계삼층석탑의 2층탑신석과 기단석 일부로 밝혀졌다. 위는 이번의 돌조각이 발견된 추정탑지.


신라인들의 불국토를 향한 염원이 집적된 경주 남산. 작은 돌조각에서부터 아름다운 마애불에 이르기까지 남산이 다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지난 5월 20일께. 남산 삼릉계석불좌상의 남서쪽 아래. 표토를 걷어내던 최성우씨는 조그만 돌덩이 두개를 발견했다. 네모로 다듬은 3개의 석재 틈에서 하나, 그 옆에서 하나. 화강암 육면체의 한쪽 모서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했다. 다듬은 3개의 석재는 탑재를 놓기 위해 사각형으로 다듬어 둔 흔적이 뚜렷해 탑자리임이 틀림없었다.

“나머지는 어디 갔을까?”

경주문화재연구소 소속 연구원인 최씨는 4월부터 삼릉계석불좌상 유적지 발굴팀에 소속돼 일해 왔다. 팀은 팀장 최장미씨, 최씨와 박영호씨가 연구원, 그리고 인부 8명으로 된 단촐한 구성. 이번 발굴조사는 복원정비가 시급한 남산 일대의 불교문화재에 대한 복원정비 사업에 따른 학술조사의 하나였다.

작업장은 마을에서 15분거리. 평소 등산객이 많은 곳이었다. 발굴지를 지나가던 남산유적지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 경주박물관 뜰에 삼릉계삼층석탑이 있다는 내용. 하지만 그게 그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발굴팀은 문헌를 뒤지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의 불적>(1940, 조선총독부)에서 기단석으로 보이는 파편이 있어 석탑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1930년대에 일제가 남산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했고 유물을 옮겼을 가능성을 확인한 것. 몇해 전 타계한 경주지킴이 윤경렬씨의 저서에서 “666호 좌상 앞 탑자리에 석탑이 있었는데 1930년대에 없어졌다”는 구절도 발견했다. 그리고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뜰에 있는 ‘삼층석탑’에 대한 유물기록에서 ‘1930년 10월 본관 유물번호 11981번 국가귀속’이란 구절도 확인했다.

6월14일. 최성우씨는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뜰에 가서 문제의 석탑 사진을 찍었다. 깨진 부위를 중심으로 찍어온 사진을 현상해 발굴한 돌덩이와 대조해보니 한눈에 이거다 싶었다. 남은 것은 맞춰 보는 일. 나흘 뒤인 18일 최장미 팀장과 박영호 연구원은 돌덩이 두개를 차에 싣고 25분거리 떨어진 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파편을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부에 대어보니….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길이 22cm, 두께 10cm의 사각뿔은 상대 갑석의 모서리에, 높이 16cm, 너비 18cm 가량의 삼각형 조각은 2층 옥개석 아래의 우주에 딱 들어맞았던 것. 천재일우, 전혀 다른 운명의 길을 걷던 문화재의 조각이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70여년 땅 속에 묻혔던 돌조각은 70여년 더 공기에 노출된 탑신과 풍화의 정도가 다르고 흙색깔이 배어 색깔에서 조금 달랐지만 서로의 윤곽이 맞춘듯이 들어맞았다. 막연히 삼릉계삼층석탑으로 알려진 박물관 앞뜰 석탑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복원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석탑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 중요한 거죠. 막연하게 삼릉계삼층석탑으로 불리던 유물이 제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잃었던 이름을 찾은 겁니다.” 최 팀장의 말이다.

석탑이나 석등 등 돌로 된 유물은 무너져 훼손된다고 해도 자체의 무게 때문에 대체로 그 권역에 머물게 마련. 천룡계 천룡사지 석탑의 1층 탑신석 조각은 지난해 6월 배수로 정비공사를 하다가 80미터 떨어진 석축에 끼어있던 것을 찾아냈고 열암곡의 불두는 2005년 10월 30~40미터 떨어진 아랫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경주 남산이 급경사인 점을 감안하면 큰물에 밀려내려간다 해도 이동거리는 100미터 안팎이 대부분이다. 삼릉계석탑처럼 장거리이동은 1930년대의 기록이 남아있고 그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위치 파악이 가능했다. 지난 달에는 불두 복원 공사를 하던 중 천년 이상 엎어져 땅 속에서 잠자던 마애불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조사가 신중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거죠. 모르는 것도 예상외로 많고요. 이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완전한 모습을 찾아가야죠.” 이주헌 경주문화재연구소 실장의 말투에 감회가 어렸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경향신문 선임 기자입력 2020. 7. 27. 09:00수정 2020. 7. 30. 09:19

잃어버릴 뻔했다가 되찾은 1400년전 '신라의 미소'..얼굴무늬 수막새의 조각가가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명작의 비밀㉕]|신동아 (donga.com)

“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명작의 비밀㉕]

표정과 몸짓으로 만들어낸 ‘소리 없는 아우성’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 입력2021-04-10 10:00:01
  • kpleedonga@hanmail.net
 
  • 당대 신라인 모습 꾸밈없이 담아낸 토우
  • 죽은 사람과 함께하는 부장품으로 주로 쓰여
  • 토우로 소박하게 신라인 생활상 담아내
  • 단순한 형태로 삶과 욕망 내밀히 표현

1926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신라시대 토기와 토우가 대거 발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土偶裝飾長徑壺)는 모두 2점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경북 경주시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신라 토기다. 높이 34cm. 항아리의 목 부분엔 5cm 내외의 각종 토우가 붙어 있다. 가야금을 타고 있는 배부른 임신부,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 그리고 새·오리·거북 등의 토우다.

그 중에도 사랑을 나누는 남녀 토우가 단연 돋보인다. 한 여인이 엉덩이를 내민 채 엎드려 있고 그 뒤로 한 남자(머리와 오른팔이 부서져 있다)가 과장된 성기를 내밀며 다가가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도 적나라할 수 있을까. 그 과감한 표현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여인의 얼굴 표정이다.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 이 여인은 히죽 웃고 있다. 보는 이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1500년 전 신라의 남녀는 남이 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욕망과 쾌락을 숨기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인지, 능청스러움 혹은 뻔뻔함인지. 신라인들은 왜 저렇게 대담할 수 있을까.

1926년 모습 드러낸 신라 토우

성에 개방적인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토우. 사랑을 나누는 연인(왼쪽), 큰 성기를 내놓은 남성을 나타낸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26년 5월 경주 도심 황남동. 대형 신라 고분 사이에서 인부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경동선(慶東線) 경주역 확장공사에 필요한 흙을 채취하고 있던 것이다. 당초 계획은 고분 주변의 흙을 파서 약 1km 떨어진 경주역 현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땅을 파는 과정에서 소형 고분들이 확인됐다. 고분 내부에서 토기와 토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부들은 조선총독부에 이를 신고했고 조선총독부는 즉각 공식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토우는 대부분 토기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뚜껑의 손잡이 주위에 많이 붙어 있었다.

공사 도중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낸 신라 토우. 그 발굴 현장은 지금의 대릉원(大陵苑) 내 황남대총 바로 옆이다. 토우와 토우 장식 항아리들은 1926년 7월부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에서 전시되며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 후 1970년대에 경주 황남동과 용강동 지역의 고분에서 토우가 추가로 발굴됐다.



신라 토우는 5, 6세기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대개 2~10cm 정도. 신라 토우는 토기에 장식물로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인물을 형상화한 토우를 보면 바지 저고리 입고 상투 튼 남자, 주름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여자, 사냥하거나 고기 잡는 사람, 춤 추는 사람, 노 젓는 사람, 가야금·비파·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곡예를 하는 사람, 짐을 지고 운반하는 사람, 출산 중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커다란 성기를 드러내놓고 있는 사람, 성행위를 하는 사람 등 무척이나 다채롭다. 저 토우들을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일상과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동물이나 집, 생활도구 등을 본떠 만든 것도 토우의 범주에 들어간다. 토우의 역사는 길고도 광범위하다. 중국·일본·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석기시대 무렵부터 토우가 등장했다. 고대인들은 다산(多産)이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람 대신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한 목적에서 토우를 만들었다. 또는 죽은 자의 영생을 바라며 무덤의 부장품용으로 토우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조몬(繩文)시대부터 토우가 만들어졌는데 이 무렵의 토우는 약간 무서운 모습에 신체의 치장이 화려하다. 엉덩이가 큰 여인의 토우는 다산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무서운 얼굴의 토우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주술용·제의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4~ 5세기 고훈(古墳)시대에 들어서면 하니와(埴輪)라는 독특한 그릇이 나타나는데 그 표면을 다양한 토우로 장식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시황릉의 도용(陶俑) 역시 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기에 토우에 포함된다. 중국의 토우는 죽은 자의 영원한 삶을 기리는 의미에서 무덤의 부장품용으로 만든 것이 많다.

신라인들의 대담한 성적 표현

신라 토우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성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의 남녀 토우에서 잘 드러나듯 신라 토우의 가장 큰 특징은 대담한 성적 표현이다. 성기를 과장해 표현하거나 성적 욕구를 과시하고 남녀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토우가 상당히 많다. 힘껏 껴안고 있는 남녀, 한 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 성기와 가슴이 과장된 남녀 등. 절제와 감춤의 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라 토우의 이러한 면모는 파격이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500년 전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우선 토우들이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우는 무덤의 부장품이었다. 성은 쾌락이고 욕망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성기를 과장하거나 성 행위를 드러낸 모습으로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생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문화에서 이러한 성적인 표현은 대체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이 같은 문화가 신라에도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토우를 볼 때마다 의문이 남는다. 성적인 표현을 온전히 ‘다산과 풍요와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만 해석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는 이런 모습의 토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성적 표현의 토우가 왜 이렇게 유독 신라에서 성행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신라인들의 ‘개방적인 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의 지증왕 대목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돼 훌륭한 배필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들여 황후로 봉하니….” 지증왕의 음경이 한 자 다섯 치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크기가 40cm가 넘는다. 참 재미있는 기록이다. 성기를 과장해 표현한 토우를 보면 지증왕에 관한 이 기록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렇게 상황이 비슷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신라 문화의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사실, 신라의 성 문화는 대담하고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증왕 얘기도 그렇고, ‘화랑세기’ 등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근친혼 얘기도 그렇다. 신라 화랑들이 여자 못지않게 예쁘게 치장하고 화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황들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비해 성이 개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신라의 성 문화가 토우의 대담한 성적 표현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일상과 낭만 그리고 미니멀리즘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수(射手)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앞서 말했듯 신라 토우에는 다양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짐을 나르는 모습, 말 탄 모습, 노 젓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등등. 토기 뚜껑에 붙어 있는 활 쏘는 사람 형상도 인상적이다. 그 앞에 어미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사냥을 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활 쏘고 사냥하는 모양새가 단순하지만 힘 있게 표현돼 있다. 활 쏘는 사람이 메고 있는 화살통이 엉덩이까지 내려온 모습도 흥미롭다.

신라 토우에서는 모자, 바지. 치마 등 신라인의 복색도 볼 수 있다. 인물들의 얼굴 표정도 무척이나 다채롭다. 그 모습과 표정은 단순하지만 생생하게 다가온다. 할아버지 얼굴 토우를 보자. 쓱쓱 주무른 흙덩이에 눈과 입을 슬쩍 파놓고 수염 몇 가닥 그어 노인의 얼굴을 완성했다. 단순한 형태의 토우지만 노인의 푸근한 얼굴이 그대로 살아서 전해온다. 노래하는 토우, 연주하는 토우도 흥겹고 익살맞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약간 치켜든 채 목청껏 노래 부르는 모습, 엉거주춤 서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 신라인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난다.

신라 토우는 적나라한 성을 표현한 것이든 일상을 표현한 것이든, 동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든 하나같이 단순하다. 신라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쓱쓱 손질 몇 번으로 완성했다. 몇 번 주무르고 손톱으로 구멍을 내어 눈과 입을 만들어 감정을 담아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에 붙어있는 나체 남성 토우는 쓱 내민 혓바닥 하나로 노젓기의 피곤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라인들은 단순함 속에 그 특징을 잘 드러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표정과 내면은 어떠한지 등을 최소한의 표현으로 절묘하게 보여준다. 얼굴만으로는 남녀 구분이 잘 되지 않지만 가슴이나 엉덩이 등을 과장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여성임을 나타낸다. 얼굴에 표정이 없을지라도 상체를 쪼그려 엎드린 모습이나 머리를 푹 숙인 자세만으로 주인공이 슬픔에 빠져 통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 토우의 이런 특징을 두고 미니멀리즘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5~10cm 정도로 작지만 생명력이 넘친다. 단순한 형태에도 활력이 느껴지는 표현은 삶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토우는 결국 삶에서 나온 것이다. 삶에 기초한 미니멀리즘. 토우의 또 다른 미학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

주검 앞에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왼쪽)과 출산 중인 여인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찮아 보이는 저 작은 인형들. 토우는 한반도 고대국가 가운데 신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집어넣는 건 신라의 독특한 문화였다. 신라 토우에는 신라인의 일상과 풍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탄생과 죽음에 관한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라인들은 탄생의 순간과 죽음의 순간을 모두 토우에 담아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었다. 신라인들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탄생이나 죽음과 관련해 토우에 나타난 표정과 몸짓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뚜껑 위에 드러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배부른 여인, 출산 직전 또는 출산 중인 여인, 시신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그 모습은 강렬하며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출산 중인 여인 토우는 입과 눈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출산의 고통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출산은 인간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성(聖)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고통의 과정이면서 내밀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출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 표현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달랐다. 출산의 장면을 감춤 없이 드러냈다. 그 과감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신선한 감동을 준다.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토우를 보자. 사실, 이것이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지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어느 토우의 경우,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앞의 작은 천 조각은 죽은 이의 얼굴을 가린 것으로 추정되고,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죽은 자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으리라.

작은 흙 인형을 통해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니, 그것은 분명 철학적 성찰의 과정이다. 또한 단순한 흙 인형의 차원을 넘어선다. 용도로만 따져보면 무덤의 부장품이겠지만, 철학적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토우는 단순한 부장품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신라 토우를 볼 때마다 궁금증이 남는다. 성적 표현과 인간적인 일상의 모습들. 그 두 측면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전혀 다른 세계로 느껴진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 속의 인물들을 다시 보자. 임신부가 가야금을 타고 있고, 그 옆에선 두 남녀가 적나라하게 성행위를 하고 있다. 엎드려 있는 여성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낯선 풍경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1500년 전 그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신라인들에겐 간극이 아니라 풍요로운 공존이었다.

신라 고분에서는 금관, 금귀고리, 금제 허리띠, 둥근 고리 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 수입한 로마 유리그릇 등 화려하고 값비싼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익숙하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토우는 작고 초라하고 볼품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라 토우 앞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보고나서 돌아서려 하면 다시 발길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거기 신라인들의 욕망과 쾌락, 다산과 영생에 대한 기원,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숨 쉬고 있다.

신라 토우의 표정과 몸짓. 그것은 우리의 판에 박힌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놓는다. 신라 토우를 보면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들은 표정과 몸짓만으로 그들의 삶과 내면과 욕망을 웅변하고 있다.

1926년 당시 일본인 발굴자의 증언에 따르면 “대체로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등의 어깨, 목 또는 뚜껑에 붙어 있었고, 더러 그릇 받침에도 부착돼 있던 것을 발굴 당시 뜯어낸 것”이다(‘신라토우, 영원을 꿈꾸다’, 국립중앙박물관, 2009). 토기에 붙어 있던 것을 뜯어냈다고 하니, 그건 분명 유물 파괴 행위였다. 토우는 아주 많았고, 많다 보니 발굴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수습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서글픈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토우들은 살아남아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신라 토우가 모습을 드러낸 지 100년이 돼 간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 입력 2018-12-18 11:31

<지식카페>얼굴 붉어지는 솔직한 性표현… 신라·로마는 ‘로맨스 왕국’?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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