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총은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되어서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식리총은 금동 장식신발(식飾 장식, 리履 신)이 확인되어서 '식리총'(장식신발총),

금령총은 금방울(금金, 령鈴 방울)이 출토되어서 '금령총'(금방울총),

서봉총은 스웨덴(전·瑞典)의 황태자(아돌프 구스타프 6세·재위 1950~73)가 황(鳳凰) 장식이 달린 금관을 수습해서 '서봉총',

호우총은 청동제 그릇(호壺 병, 우杅 사발)이 출토되어서 '호우총'(병사발총),

천마총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이 출토되어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왕가의 무덤’으로 꼽히는 대릉원 지구에는 60여기의 고분(형태가 남아있는 고분만)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고분의 90% 이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넣는 나무 덧널(목곽)을 놓고, 그 주변에 돌을 쌓은 뒤(적석),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로 조성됐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고분 안에 묻힌 주인공들은 누구일까요?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입니다. 지증왕 연간(503)에 중국식 칭호인 왕(王)으로 바뀌었으니 마립간 시대는 356~503년 사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황남대총 남북분(98호분)과 봉황대(125호분), 130호분 같은 초대형 고분의 주인공은 그 6명 중 세 분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봉황대와 130호분은 미발굴 고분이라 주인공을 더욱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정식 발굴이 끝난 고분에서는 뭔가 주인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선 금관 및 금동관과 출토 도기 등을 토대로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를 추정한다면 ‘4세기말~6세기초’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더 좁혀보자면 황남대총 남분(5세기 2/4분기)-황남대총 북분(5세기 3/4분기)-금관총·서봉총(5세기 4/4분기)-천마총·금령총(6세기 1/4분기) 등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연 3만6000여 명 동원된 신라 고분…‘타원형’ 작도법으로 설계됐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기자2024. 9. 13. 06:00

1호부터 155호까지…. 일제가 1915년부터 이른바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경주 시내 고분에 붙인 일련번호이다.

이중 125호분과 106호분은 예부터 봉황대(125호분)와 전 미추왕릉(106호분)으로 알려져 왔다.

단독분으로서는 가장 큰 125호분은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고분이라기보다는 경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알려져왔다. 106호분 역시 어느 시점부터 제13대 미추왕(262∼284)의 무덤으로 지목되어 왔다.(그러나 106호분은 4세기 이후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 고분은 그저 번호로만 지칭되었다.

1921년 금관총 이후 100여년 동안 경주 시내 중·대형 고분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작업이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금관총(1921)-금령총 및 식리총(1924)-서봉총(1926)-호우총(1946)-천마총(1973)-황남대총(1973~75) 등에서 굵직굵직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

 

■무덤인가 전망대인가

그러다 1921년 주막집 확장공사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금관이 출토된 ‘128호분’에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었다.

이후 금동 장식신발(식리·飾履)이 확인된 ‘126호=식리총’(1924), 금방울(금령·金鈴)이 출토된 ‘127호=금령총’(1924)이 새 이름을 얻었다. 스웨덴(서전·瑞典)의 황태자(아돌프 구스타프 6세·재위 1950~73)가 봉황(鳳凰) 장식이 달린 금관을 수습한 ‘129호=서봉총’(1926)도 이채로웠다.

 

해방후인 1946년 이뤄진 140호분 발굴 결과 ‘광개토대왕’ 명문이 담긴 청동제 그릇(壺杅·호우)이 출토된 1고분과 은방울(은령·銀鈴)이 나온 제2고분이 붙어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140호분이 황남대총 남북분처럼 일종의 표주박 형태였음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140호분은 호우총(제1고분)과 은령총(제2고분)으로 구분됐다. 지금 이 순간까지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와, 관련 연구서에서 140호분 인근에 있는 139호분을 은령총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139호분과 은령총은 전혀 별개의 고분이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설명)

또 1971년 발굴에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등이 출토된 155호분은 ‘천마총’, 1973~75년 금관 및 금동관 등 5만6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진 ‘98호분’은 ‘황남대총(남북분)’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1915년부터 고적조사사업을 펼치면서 경주의 고분에 임의로 일련번호를 매겼다. 동→서로 이어졌는데, 1호(황오리)부터 155호(천마총)까지 번호를 붙였다. 이 중에는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고분이 아닌 전망대로 잘못 알려진 봉황대(125호분)와 전 미추왕릉으로 전해졌던 106호분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 가운데 ‘왕가의 무덤’으로 꼽히는 대릉원 지구에는 60여기의 고분(형태가 남아있는 고분만)이 집중되어 있다. 담으로 둘러쌓인 대릉원 안쪽에 23기, 그리고 이른바 ‘대릉원 지구’로 묶인 외곽지역에 40여기 등이다.

그 고분의 90% 이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넣는 나무 덧널(목곽)을 놓고, 그 주변에 돌을 쌓은 뒤(적석),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로 조성됐다.

이런 돌무지덧널무덤의 규모는 소형(밑지름 10m 이내)에서 초대형(80m 이상)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경주에서 소문난 포토존이 된 황남대총(지름 80~120m, 높이 22~23m)도 초대형(쌍분)이다. 주인공이 홀로 묻힌 단독분인 봉황대(지름 86.6m, 높이 21.4m)와 130호분(서봉황대·지름 79.9m, 높이 21.3m)의 규모도 엄청나다.

신라 왕가의 무덤인 대릉원 지구에서 파괴되지 않은 고분만 50~60기에 이른다. 이중 작게는 지름 10m에서 크게는 지름 80m에 달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 제공

 

■타원형의 작도원리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이 어마어마한 고분을 어떻게 조성했을까.

우선 경주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의 80% 이상은 타원형으로 조성되었음이 확인됐다.(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 이 타원형 고분의 축조에 정교한 수학적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성했을까. 심현철 연구원의 설명으로 알아보자. 타원형은 2개의 점(초점)을 이용해서 그린다. 신라인들은 무덤을 조성할 바닥에 정한 두 개의 초점에 줄을 고정했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무덤주인공을 안장한 목관 등을 놓고 돌과 흙을 두텁게 쌓아 조성한 고분형태이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그런 다음 그 줄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막대기를 줄에 걸쳐 움직이면서 그렸다. 그렇게해서 정확한 타원형 고분이 완성됐다. 고분의 크기는 초점 2개의 거리에 달렸다.

소형분은 짧게, 중대형분은 길게 그렸다. 예컨대 소형분은 묘광(무덤의 관·곽을 넣으려고 판 구덩이)의 양 끝점에, 중·대형분은 돌무지(적석)의 양 끝점에, 각각 두 개의 초점을 설치했다. 신라인들은 이렇게 1500년 전 타원의 형태와 작도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덤 설계에 적용했다.

동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타원형 구조의 고분을 축조한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수학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국에서조차 타원과 같은 기하학은 중세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경주 시내의 돌무지덧널무덤의 절대다수가 타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제공

 

■5t트럭 2만2500대분

그렇다면 돌무지덧널무덤을 쌓는데 얼마만큼의 돌과 흙이 사용됐을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020년 경주 쪽샘 44호분을 쌓는 데 필요한 돌무지의 양을 계산한 바 있다. 쪽샘 44호분의 봉분 규모는 중형급(지름 30m)이었다.

그러나 돌무지의 규모(16~19m)가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왕릉급 고분과 맞먹었기에 한번 추산해본 것이다.(발굴 당시 돌무지는 3/4 정도 남아있었다) 돌의 표본(1㎥=수량 298개, 무게 1814.1㎏)으로 계산해보니 전체 쌓인 돌의 수는 16만4198개(부피 551.34㎥) 정도였다.

타원형이 작도법. 경주 돌무지덧널무덤이 바로 이러한 타원형 작도법에 의해 설계됐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제공

 

그것을 무게로 잴 경우 992.41t(5t 트럭 198대)에 이르렀다. 돌 한 개당 무게는 7~8㎏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깎여나간 봉분(흙)은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대형 고분은 어떨까. 1973~75년 사이에 발굴된 황남대총(남·북분)을 살펴보자.

계산해보니 봉분(흙)의 경우 10만8000t(남분 6만3822t+북분 4만4271t) 가량 쌓여 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t(남분 2340t+북분 2037t)에 달했다. 만약 5t트럭 기준으로 흙은 2만1600대, 돌은 875대가 실어날라야 할 천문학적인 분량이다.

고분의 크기는 2개의 초점의 거리에 달려있다. 소형분은 묘광(무덤의 관·곽을 넣으려고 판 구덩이)의 양 끝점에 초점 2개를 설치해서 타원을 그렸다. 중대형분의 경우 두 초점을 돌무지의 양끝점에 놓고 타원을 그려 고분을 설계했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제공

 

■공사인원 3만6000여명

그렇다면 인력은 얼마나 투입되었을까. 황남대총 남북분 가운데 먼저 조성된 남분의 경우를 살펴보자.

황남대총 발굴단(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계산 결과 남분의 경우 6만6162t(흙 6만3822t+돌무지 2340t)을 실어나르는데 필요한 인원은 2만7141명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오늘날의 토목공사 시공에 연결지을 경우 고르기, 다지기, 쌓기 등에 필요한 인원은 운반인원의 약 3분의 1정도인 9144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황남대총 남분을 쌓는데 필요한 연인원은 약 3만6285명 정도였을 것이라는게 발굴단의 추산이었다. 그렇다면 작업일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1인당 작업 면적(보통 16㎡)을 남분의 평면적(5625㎡)으로 계산하면 전체 면적에 352명 정도가 들어가 일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대략 하루 300명 정도가 작업했다면 어떨까. 연인원 3만6000여명이 동원된 것을 감안한다면 전체 작업일수는 약 121일 정도(3만6285÷300)가 된다.

물론 이 계산은 어디까지나 추산일 뿐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돌과 흙으로 쌓았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도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파기만 하면 흙과 돌이 무너져내리는데 어떻게 도굴할 수 있단 말인가.

돌무지가 4분의 3정도 노출된 경주 쪽샘44호분. 돌의 표본(1㎥=수량 298개, 무게 1814.1㎏)으로 계산해보니 쪽샘 44호분에 쌓은 돌의 수는 16만4198개(부피 551.34㎥) 정도였다. 무게로 재면 992.41t(5t 트럭 198대)에 이르렀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유력후보는 마립간 6명

그렇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고분 안에 묻힌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을 가리킨다. 지증왕 연간(503)에 중국식 칭호인 왕(王)으로 바뀌었으니 마립간 시대는 356~503년 사이를 의미한다.

그러니 황남대총 남북분(98호분)과 봉황대(125호분), 130호분 같은 초대형 고분의 주인공은 그 6명 중 세 분일 가능성이 짙다. 봉황대와 130호분은 미발굴 고분이라 주인공을 더욱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식 발굴이 끝난 고분에서는 뭔가 주인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선 금관 및 금동관과 출토 도기 등을 토대로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를 추정한다면 ‘4세기말~6세기초’로 특정할 수 있다. 더 좁혀보자면 황남대총 남분(5세기 2/4분기)-황남대총 북분(5세기 3/4분기)-금관총·서봉총(5세기 4/4분기)-천마총·금령총(6세기 1/4분기)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73~75년 사이에 발굴된 황남대총(남·북분)에는 봉분(흙)의 경우 10만8000t(남분 6만3822t+북분 4만4271t) 가량 쌓여 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t(남분 2340t+북분 2037t)에 달했다. 5t트럭 2만2500대 분량이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금동관 남성의 정체

우선 1973~75년 사이 정식 발굴된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은 누굴까.

발굴결과 금관이 출토된 북분에는 여성의 지표유물인 가락바퀴(방추차·실을 뽑는 도구)와 굵은 고리가 달린 귀고리 및 장식 드리개가 확인됐다.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서는 ‘부인대(夫人帶)’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금관 쓴 여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

황남대총 남북분에서 먼저 조성된 남분 축조에는 연인원 3만6000여명이 투입되어 121일간 공사를 벌인 것으로 추산됐다.|국립문화유산연구원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금동관이 나왔다. 목관 안에서 출토된 인골의 아래턱뼈를 분석해보니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남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눌지왕(417~458)설이 유력했다가 최근에는 ‘내물왕(356~402)’설이 새롭게 등장했다.

만약 부부가 묻혔다면 남북분의 주인공은 ‘눌지왕(남분)-아로부인(북분)’이나 ‘내물왕(남분)-보반부인(북분)’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왕이 분명한 남분의 주인공이 왜 금동관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남분의 ‘금동관 남성’은 북분의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혹은 왕족)이었단 말인가. 남성 임금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좀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최상위 유물인 금관과 함께 주인공이 여성임을 짐작케하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금관 쓴 여성은 과연 누구일까.

 

■이사지왕의 누구?

1921년 발굴된 금관총(지름 45m)의 주인공은 알 수 있을까. 금관과 함께 고리자루큰칼 등이 확인되었으니 ‘주인공=남성 왕’으로 추정됐다. 2013년 7월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는 고리자루큰칼을 보존처리 하다가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명문을 확인했다.

이 명문을 보고 ‘소지왕’(재위 479~500)을 떠올리는 연구자(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있었다. ‘이사지왕’의 이(尒)’자는 ‘그(其)’, 혹은 ‘이(此)’의 사전적 의미일 수 있지 않은가.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다. 또 목관 안에서 확인된 인골의 아래턱뼈를 분석해보니 60대 남성으로 밝혀졌다.

그러니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지왕’은 ‘소지왕’과 동일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기록이나, 그 어떤 금석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닌 왕족일 가능성도 있다. 신라에서는 ‘갈문왕’이나 ‘차칠왕등(此七王等)’처럼 왕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기 때문이다.

1921년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에서 확인된 고리자루큰칼. 보존처리과정에서 ‘이사지왕(?斯智王)’이라고 새겨진 명문이 나왔다. ‘이사지왕’이 소지왕(479~500)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서둘러 끼워넣은 5살 왕자?

3년 뒤(1924년) 발굴된 금령총(지름 28.2~29.8m)의 주인공은 누굴까.

이 고분에서도 금관을 비롯, 귀고리·허리띠·목걸이·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다.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국보)도 2점 나왔다. 또 금관총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금방울(금령)이 출토됐다. 그래서 이 고분을 ‘금령총’이라 했다. 주인공의 머리쪽에는 ‘가는고리 귀고리’가, 허리춤에는 ‘장식 둥근고리 큰칼’이 보였다. 남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관·금허리띠 등 모든 유물의 사이즈가 작았다.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90㎝를 넘지 않았다. 주인공의 키가 90㎝ 안팎이었다는 의미다.

1924년 발굴된 금령총의 경우 무덤 주인공의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90㎝를 넘지 않았다. 주인공의 키가 90㎝ 안팎이었다는 것이다. 나이는 5~6세 정도로 추정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연구자들은 그동안 축적된 인골(혹은 미라)의 발굴 결과 금령총 주인공의 나이는 5~6세 정도로 추정했다. 또 이 금령총에는 순장자가 보이지 않았다. 신라에서 순장이 국법으로 금지된 것은 502년(지증왕3)이었다. 따라서 금령총 주인공은 6세기초 재위한 지증왕(500~514)과 관련된 어린 왕자나 왕족일 가능성이 있다.

최근 흥미로운 발굴성과가 나왔다. 금령총은 가장 큰 단독고분인 봉황대와 붙어있다.

그런데 그 금령총이 봉황대와, 금령총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두 고분(127-1, 127-2호) 사이에 끼워 넣은 흔적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왜 5살 어린 왕자의 무덤을 봉황대와 다른 고분들 끼워넣었을까. 마립간(왕)의 무덤이 분명한 봉황대 주인과 금령총의 요절한 어린 왕자, 그리고 127-1호와 127-2호의 주인공은 어떤 관계였을까. 새로운 수수께끼가 생겼다.

일제는 1926년 서봉총을 발굴하면서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이던 아돌프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에게 금관 발굴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0월10일 발굴 현장에 도착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흙속에 묻힌채 살짝 노출되어 있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손수 발굴했다.|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스웨덴 황태자와 조우한 신라 여성

1926년 발굴된 서봉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당시 발굴자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막 금관이 노출되고 있을 무렵 잔머리를 굴렸다.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재위 1950~1973))에게 금관 수습의 대미를 장식하도록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고고학자 출신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발굴현장을 누볐던 황태자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10월10일 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이롭다!”를 연발하며 흙속에서 살짝 노출된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손수 발굴했다. 그런데 서봉총 고분에서는 금관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금관을 비롯, 모우 1만2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천마총의 시그니처는 역시 천마도 등이 그려진 6정(3마리분)의 말다래였다. 그래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연수원년(延壽元年)’, ‘태왕(太王)’, ‘신묘(辛卯)’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 은제그릇이 출토됐다.

고구려 장수왕(412~491)의 연호가 ‘연수’라는 것, 또한 고구려왕을 지칭한 ‘태왕’ 명문이 나온 것, 또한 신묘년이라는 간지…. 종합하면 은합의 제작연대는 연수원년이자 신묘년인 451년(신라 눌지왕 35)일 수밖에 없다.

또 서봉총에서는 굵은고리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 그리고 의류와 같은 섬유제품이 다수 출토됐다. 때문에 서봉총의 주인공은 5세기말이나 6세기초에 살았던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금관이 나왔으므로 아무래도 왕의 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1946년 해방 후에 이뤄진 140호분 발굴에서 뜻밖에 고구려 정복군주인 ‘광개토대왕’ 명 청동그릇이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천마도’ 말다래 탄 신라 왕은?

1973년 발굴 당시 숱한 화제를 뿌린 천마총은 어떤가. 일제가 1915년 일련번호(1~155호)를 붙일 때 동→서로 차례를 정했다.

따라서 가장 서쪽에 있던 천마총은 맨 마지막 번호인 155호를 받았다. 천마총, 즉 155호분 조사는 황남대총(98호분) 발굴의 전초전으로 진행됐다.

당시 정부는 경주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 후 복원 공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황남대총 발굴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광개토대왕’ 명 청동그릇과 관련해서는 412년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418년 귀국한 ‘복호’ 왕자가 주목을 끈다. 호우총이 복호나 그 후손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단 황남대총 인근에 있는 중형급 고분(지름 47m·155호분)을 발굴해본 후 그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황남대총 발굴에 돌입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발굴이 시작되자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됐다. 7월25일부터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 무려 1만1526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이 고분에서는 천마가 그려진 말 다래가 6장(3마리분)이나 확인됐다. 그래서 155호분은 천마총이 되었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천마총의 주인공은 6세기 초 재위한 지증왕(500~514)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21년 금관총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00년 이상 경주 시내 돌무지 덧널무덤을 발굴조사해왔다. 그러나 주인공을 특정할 수 있는 명문과 같은 물증이 나오지 않는한 역부족이다.

 

■광개토대왕 유품을 가져온 신라왕자?

이밖에 ‘광개토대왕’ 명문 청동그릇이 출토된 호우총(140호분)은 어떨까. 유력한 주인공 후보로 내물왕(356~402)의 아들이자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생몰년 미상)가 꼽힌다.

<삼국사기>는 “412년(실성왕11)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복호가 418년(눌지왕2) 나마(17관등 중 11등) 박제상(363~419)과 함께 귀국했다”(<삼국사기>)고 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명문이 찍힌 청동용기를 가져온 인물도, 이 무덤(호우총)의 주인공도 복호일 가능성이 있다.

1946년 해방 후 첫 발굴이 이뤄진 140호분에서 연접된 두 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광개토대왕’명 청동그릇(호우)이 출토된 호우총과, 은방울(은령)이 나온 은령총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140호분과 가까운 곳에 있는 139호분을 은령총으로 잘못 소개되었다. 140호분(호우총+은령총)과 139호분은 전혀 별개의 고분이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설명)|국립박물관의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보고서>(1948)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있다. 호우총의 연대가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명문이 찍힌 청동용기의 제작시기(415년)와는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복호설’을 따른다면 어떨까. 조상인 복호의 유품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던 직계 자손 무덤일 수도 있다. 이처럼 1921년 이후 100여년간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 조성된 수수께끼 같은 고분(돌무지덧널무덤)을 조사해왔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릉처럼 무덤 주인공을 알리는 명문이 나오지 않는 이상 주인공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모두 소설의 영역이다.

어쩌면 파면 팔수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만 하나 둘 씩 던져주기에 더욱 매력적인 주제가 아닐까.(이 기사를 위해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1)

<참고자료>

심현철, ‘적석목곽묘의 분형과 봉분설계원리’, <한국고고학보> 109집, 2018

심현철, ‘신라 적석목곽묘 연구’, 부산대 박사학위 논문, 2020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묘’(기자간담회 자료집), 2020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황남대총 남(북)분 발굴조사의 기록>, 2021·2024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남분 발굴조사보고서>(본문 및 도판·사진), 1993·94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북분 발굴조사보고서>, 1985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용산 개관 5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2010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줄서는 왕릉뷰’ 포토존…신라 쌍무덤 ‘금관 왕비, 금동관 왕’의 정체[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기자2024. 7. 25. 05:00
 

‘니들이 주인공을 알아?’ 얼마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펴낸 자료집(<황남대총 남분, 발굴조사의 기록>)을 보았다.

웬 뜬금없는 얘기냐 싶겠지만 새삼 2019년 9월에 방영된 KBS 프로그램(‘슈퍼맨이 돌아왔다’ 296회)이 떠올랐다.

축구선수 박주호씨의 자녀인 ‘건후와 나은’이 ‘왕가의 무덤’인 대릉원 대형 고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관람객 사이에서 천진난만 뛰노는 장면이다. ‘건나블리(건후·나은)’가 뛰놀던 그곳은 이미 경주의 소문난 ‘포토존’이었다.

남북 표주박 형태의 대형 고분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평일에도 수십미터씩 줄을 서는…. 그 배경 속 대형고분이 ‘황남대총’이다. 그렇지만 이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단언컨대 아마도 없을 듯 싶다. 그 이유를 ‘썰’로 풀어보자.

1973~75 경주 황남대총 남북분의 발굴조사에서 무덤의 두 주인공이 온갖 황금유물을 착장한 모습으로 현현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소문난 경주 포토존의 비밀

1971년 6월 “경주 관광 개발계획을 마련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마련된 개발계획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가장 큰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인 98호분(황남대총·높이 22~23m, 밑지름 80~120m)을 발굴조사한 뒤 그 내부를 관광자원으로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는 그렇게 큰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서 인접한 155호분(천마총)을 시험 발굴해본 뒤 황남대총을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5~6세기 신라 왕과 왕족이 묻힌 경주 대릉원 속 소문난 포토존. 가장 큰 고분(표형분)인 황남대총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들이 평일에도 줄을 서는 곳이다.|오세윤 사진작가 제공

 

천마총 발굴(1973)로 경험을 축적한 발굴단(경주고적조사단)은 1973년 7월부터 황남대총 발굴에 돌입했다. 북분부터 시작된 발굴의 성과는 대단했다.

북분 주인공이 누워있던 곳에 마디마디에 달린 투명한 ‘비취 굽은옥’과 달개가 영롱한 출(出)자형 금관이 놓여 있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경주관광개발계획에 따라 1973~75년 사이 이뤄졌다. 황남대총 남북분 축조에 소요된 흙과 돌은 11만t이 넘었고, 5t 트럭 분량으로 2만2500대 분량에 달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가슴 쪽은 금판띠를 군데군데 배치한 유리구슬로 장식된 목·가슴걸이(경흉식)로 덮여있었다. 또 금제 허리띠 장식 및 띠드리개, 양 손목에 각 5점씩 찬 금팔찌, 열 손가락에 모두 끼웠던 금반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금제 굵은고리귀고리 등….

오죽하면 당시 발굴자(조사보조원)가 “황남대총 북분, 그곳은 누런 황금밭이었다”(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 회고했을까. 처음보는 유물이 많았다. 왼손목 끼워진 팔찌를 보자. 넓은 금판에 금 알갱이를 붙여 기하하적 무늬를 만들고 옥을 박아넣은 팔찌였다.

이 팔찌는 훗날 흑해 연안에서 들어온 서역계 유물로 밝혀졌다.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말갖춤새(마구)도 발굴자의 눈을 현혹시켰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관을 포함해서 모두 3만5675점에 달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 등 황금유물을 포함해서 모두 3만5000여 점이 출토되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왕의 무덤’ 속 여성의 향기?

이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을 가리킨다.

지증왕 연간(503) 중국식 칭호인 왕(王)으로 바뀌었으니 마립간 시대는 356~503년 사이를 의미한다.

온갖 황금 제품으로 치장한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마립간’ 6명 중 한사람으로 해석됐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투명한 ‘비취 굽은옥’과 달개가 영롱한 출(出)자형 금관이 놓여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그런데 발굴 과정에서 수상쩍은 유물이 보였다. 기하학 무늬를 새긴 채화 가락바퀴(실을 뽑는 도구)가 여럿 확인됐다. 또 무덤 주인공이 착장한 귀고리와 장식 드리개는 모두 굵은고리귀고리였다.

고고학에서는 보통 ‘굵은고리 귀고리와 작은 칼(은장도), 가락바퀴’ 등은 여성, ‘가는고리 귀고리’와 ‘둥근고리큰칼’ 등은 남성의 지표유물로 해석한다.

무덤 주인공의 성별을 결정짓는 유물이 더 확인됐다.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꾸미개가 보인 것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금관 쓴 여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 그러나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7세기 전반(632~647)에 등장했다. 그럼 이 분은 대체 누구인가.

금관이 출토됨에 따라 마립간(임금)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던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여성의 지표 유물인 가락바퀴가 여러점 나왔다. 또 주인공은 여성임을 암시하는 굵은고리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은 어디에?

관심의 초점은 1974년 8월부터 본격 발굴이 시작된 남분으로 옮겨졌다. 우선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조성한 것으로 파악됐다. 발굴단의 기대는 컸다.

여성의 무덤(북분)에서 금관이 확인되었다면 남성, 그것도 임금의 무덤이 확실한 남분에서는 얼마나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역시나’였다.

남분에서도 북분에 필적할만한 2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웃옷을 벗은채 춤을 추는 여성 흙인형과, 영롱한 빛깔의 비단벌레 날개 장식 말갖춤새, 여러 점(북분보다 많은)의 로만그라스 유리잔, 아가리가 봉황 머리 모양이면서 손잡이에 금실이 감긴 봉수형 병 등이 나왔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3세기 바둑 기성인 ‘마랑(馬朗)’ 이름을 새긴 칠기 그릇도 특이했다. 남분의 주인공이 ‘중국 바둑 영웅’의 이름을 새긴 바둑통을 애장했다는 얘기다. 남분의 주인공 역시 온갖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남성의 상징인 ‘가는고리 귀고리’를 달고, 둥근고리큰칼도 차고 있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부인대’ 명 허리띠 장식.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진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60대 남성과 15세 여성

목관 안에서 출토된 인골의 아래턱 뼈 등을 분석해보니 주인공은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목관 밖 석단에서 보인 인골의 주인공은 15~20세 가량의 여성으로 분석됐다. 이 여성 외에도 무덤 안에서는 상당량의 귀고리가 보였다.

한 연구자는 60대 주인공과 함께 순장된 이가 10명에 이를 것이라 분석했다.(북분에서도 10명 정도의 순장자가 보였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2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6세기 왕(마립간)의 위상에 걸맞은 유물이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이는 “(502년 순장이 폐지되기) 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기록과 부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기대했던 금관이 보이지 않고, 금동관이 노출되었다.

어찌된걸까.

남분의 금동관 남성은 북분의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혹은 왕족)이었단 말인가. 남성 임금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다른 해석도 있다.

북분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남분은 금관 제작 기술이 갖춰지기 직전에 조성된 고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심쩍은 추정이다. 황남대총 남분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교동 금관’이 있으니까.

남분에서는 웃옷을 벗은채 춤을 추는 여인 흙인형이 이채롭다. 또 서역에서 수입된 것이 분명한 로만그라스와 금실을 손잡이에 둘둘 감은 봉황머리 형태의 병(봉수형 병)도 출토됐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마립간 시대의 신라

여기서 그 시대의 신라를 반추해보자.

356년 내물왕이 마립간 시대를 열었을 때 대외 정세는 엄청 불안했다.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백제가 가야와 왜를 앞세워 신라를 위협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기댔다. 399년 백제·왜 연합군을 격파한 고구려(광개토대왕)는 신라의 요청에 따라 군사 5만을 보내 가야와 왜를 크게 물리쳤다.(400)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내물왕이 죽자(402)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10년만에 돌아온 실성이 마립간이 되었다. 당시 서거한 내물왕에게는 아들(눌지·미사흔·복호·미상의 아들) 등 4명이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다.

무덤 주인공과 순장자의 인골을 분석해보니 60세 가량의 남성(주인공)과 15~20세 가량의 여성(순장자)으로 밝혀졌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때문에 내물왕의 사촌이면서 동서인 실성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정변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내물왕은 부모와 부인이 모두 김씨였지만 실성왕의 모계는 석씨였다. 계통이 달랐던 것이다.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두 아들인 미사흔과 복호를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예전(392년)에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한 것이다. 실성왕의 뒤끝은 대단했다.

실성왕은 인질 시절 친분을 쌓었단 고구려인을 몰래 불러 내물왕의 맏아들(눌지)을 죽이려 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눌지는 도리어 실성왕을 죽이고 마립간이 되었다. 정변을 정변으로 되갚은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눌지왕은 아들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제도를 다져 놓았다.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433) 그의 뒤를 이은 자비왕은 신라에 주둔 중이던 고구려군을 완전히 몰아냈다.(464)

소지왕은 왕경에 시장을 열어 물자가 유통되도록 했다.(490) 지증왕은 재위 4년 만(503)에 나라 이름을 ‘신라’로, 마립간의 호칭도 중국식 ‘왕’으로 확정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기대했던 금관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금동관 만이 모습을 드러냈다.|국립경주문화유산 연구소 제공

 

■유력했던 ‘눌지왕’설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왕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다.

연구자들은 경주 대형고분의 배치를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구분한다.

대체로 왕성(월성)과 가까운 119호-106호-황남대총-125호-130호-134호의 ‘남-북’ 축과, 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의 ‘동-서’ 축을 상정한다. 중심고분인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이 눌지왕이냐, 내물왕이냐에 따라 배치도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북분에서 금관이, 남분에서 금동관이 나오자 학계가 술렁댔다. 금동관 남성이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지금까지는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눌지왕(458년 서거)’설이 유력했다.

‘눌지왕’설에 따르면 대형고분의 출발점인 119호분을 마립간 시대를 연 내물왕릉일 가능성을 개진한다. 또 119호(내물왕)-황남대총(눌지왕)으로 연결되는 ‘남-북’ 축선은 북쪽의 초대형 고분인 125호분(자비왕)-130호(소지왕)-134호(지증왕)로 이어진다. ‘황남대총 남분=눌지왕’설에 따르면 ‘동-서 축선’(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눌지 마립간의 형제들인 미사흔·복호 등이 ‘동-서’ 축선에 묻혔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 축선은 내물왕-눌지왕-자비왕-소지왕-지증왕 등 왕위를 이은 내물왕계가 차례로 묻혔고,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한 동-서축(39호·90호·천마총)은 눌지왕(황남대총 남분)의 형제(미사흔·복호) 등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내물왕의 사촌이자 동서인 실성은 내물왕이 죽자(402년) 내물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의 어머니는 김씨, 실성왕의 어머니는 석씨였다. 계통이 달랐던 내물왕계와 실성왕 사이에 정변이 이어졌다. 결국 내물왕의 맏아들인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새롭게 대두된 ‘내물왕’설

1990년 이후 ‘황남대총 남분=내물왕릉’이라는 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 경우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 축의 왕릉배치가 달라진다. 즉 대형고분의 조성순서가 동→서 방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39호와 90호에 내물왕의 조부(39호)와 부(父·90호)가 묻혔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북쪽에 집중된 초대형 고분의 배치에도 차이가 생긴다.

눌지왕릉이 가장 큰 단독분인 ‘125호분(봉황대)’이 되고, ‘130호분=자비왕’, ‘134호분=소지왕’ 순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릉원의 ‘왕의 무덤’들은 그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다만 연구자들은 대체로 왕성(월성)과 가까운 119호-106호-황남대총-125호-130호-134호의 ‘남-북’ 축과, 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의 ‘동-서’ 축을 상정한다. 신라인들이 이 남-북, 동-서 축으로 대형고분을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황남대총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106호(전 미추왕릉)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지증왕의 조부(내물왕의 아들)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연구자가 있다. 즉 내물왕-눌지왕-자비왕으로 이어진 왕통은 소지왕을 끝으로 다른 내물왕자의 후손인 지증왕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오래전에 조성되었던 할아버지의 무덤을 크고, 보기좋게 고쳐 쌓았을 것이다. 그 고분이 바로 미추왕릉으로 알려진 106호 고분이라는 것이다.

내물왕설에 따르면 지증왕의 무덤은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6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천마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증왕이 내물왕의 증손자(<삼국사기>)로서 ‘내물왕계의 적통’임을 강조한 배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눌지왕릉’이라면 내물왕릉은 월성과 가장 가까운 119호분일 가능성이 크고, 남북 축선을 따라 자비왕(125호)-소지왕(130호)-지증왕(134호)로 이어졌을 것이다. 또 황남대총과 동서 축선에 놓은 39호분과 90호분, 천마총은 눌지왕의 형제들 무덤일 것이다.

 

■실성왕설? 미사흔설?

그렇다면 실성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을 실성왕으로 보는 연구자는 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417년 정변을 일으켜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한 눌지왕이 뭐가 예뻐서 선왕(실성왕)의 무덤을 호화찬란하게 꾸며주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황남대총과 멀리 떨어진 119호분이나 143호분을 실성왕릉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물론 연구자 가운데는 황남대총이 왕릉이 아니라고 보는 이도 있다. 최근 황남대총 남분을 433년에 죽은 미사흔(눌지왕의 동생)으로 보는 견해가 등장했다.

미사흔의 부인은 일본에 와서 그를 구출한 제상의 딸이다. 그후 미사흔의 딸은 차기왕인 자비왕의 부인이 된다. 미사흔은 왕족 가계에 있어서 최고의 혈통이자, 눌지왕이 가장 아꼈던 동생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 자격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이 내물왕릉이라면 동 서 축인 39호와 90호에 내물왕의 조부(39호)와 부(父·90호)가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또 눌지왕릉이 가장 큰 단독분인 ‘125호분(봉황대)’이 되고, ‘130호분=자비왕’, ‘134호분=소지왕’ 순이 이어진다. 천마총은 지증왕릉이, 106호분은 지증왕의 조부일 가능성이 있다.

 

■여성 상위 시대?

그럼 여성으로 짐작되는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표주박 형태의 고분은 부부묘일 가능성이 크다.

왕-왕비라면 내물왕-보반부인, 실성왕-아류부인, 눌지왕-아로부인 등이 그 후보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견해가 있다.

초기 마립간 시기의 임금인 내물왕-실성왕-눌지왕이 부계로 이어지지 않고 왕비를 기준으로 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을 실성왕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황남대총과 멀리 떨어진 119호분이나 143호분을 실성왕릉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즉 최초의 김씨 임금인 미추왕(262~283)과 광명부인의 예를 보자. 미추왕은 광명부인(조분왕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즉위할 수 있었다.

또 미추왕-광명부인의 딸인 보반부인(내례희부인·내물왕비)과 아류부인(실성왕비)은 자매 사이이며, 그들의 남편인 내물왕과 실성왕이 즉위했다. 또 아류부인(실성왕비)의 딸인 아로(눌지왕비)-치술부인(박제상의 부인)도 자매 사이이다.

그런데 눌지왕이 모계가 아니라 장자의 왕위계승을 추진하면서 양상이 다소 바뀐다. 눌지왕 이후 왕위가 아들인 자비왕-소지왕으로 이어진다.

소지왕의 뒤를 이은 지증왕의 어머니(조생부인)는 눌지왕비인 아로부인의 딸이다. 정리하자면 자비왕-소지왕은 부자계승을, 내물왕·실성왕·눌지왕·지증왕은 왕비나 왕모의 계보와 관련이 있다.

마립간 초기 임금인 내물왕-실성왕-눌지왕은 부계로 이어지지 않고 왕비를 기준으로 관계가 설정된다. 그런데 눌지왕부터 자비왕-소지왕까지는 장자의 왕위계승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지증왕 때 다시 잠깐 모계로 바뀐다. 지증왕의 어머니(조생부인)는 눌지왕비인 아로부인의 딸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여사제?

또 신라 왕비의 이름에 ‘광명(빛)’, ‘새(鳥)’, ‘ar계(아로 등)’가 들어있는게 심상찮다.

아달라왕비인 내례부인, 지마왕비인 애례부인, 조분왕비인 아이금부인, 미추왕비인 광명부인, 내물왕비인 내례희부인(보반부인), 실성왕비인 아류부인, 지증왕의 어머니인 조생부인 등이 그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기원전 53년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즉 알영이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었다”고 했다. 또 <삼국사기> ‘잡지·제사’조는 “남해왕이 왕비(혹은 동생)인 아로(阿老·혹은 아루)에게 제사의 주관을 맡겼다”고 기록했다.

또 박제상(369~419)의 부인(눌지왕-아로부인의 딸)이 치술령의 신모로서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삼국유사>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당대 신라에서 왕비와 왕실 여성은 나라 제사를 주관하거나 신앙의 대상이 된 여사제의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이 금동관이 나온 남분보다 위계가 높았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 ‘제사지는 “제2대 남해왕(4~24)이 왕비(혹은 동생)인 아로(阿老·혹은 아루)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기록했다.

 

표형분의 주인공을 여사제(왕비)로 본 연구자는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을 눌지왕(남분)과 아로부인(북분)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라면 ‘내물왕+보반부인’이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이라 풀이할 수도 있겠다.

그럼 남아있는 다른 표형분의 주인공도 ‘실성왕+아류부인’이나 ‘박제상+치술부인(눌지-아로부인의 딸)’, ‘습보+조생부인’(지증왕의 조부모) 등으로 비정할 수도 있다.

단독분으로 조성된 125호(봉황대)와 130호(서봉황대)의 주인공은 부자 계승에 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른 자비왕(125호)과 소지왕(130호)으로 추정할 수 있다.

표주박 형태 쌍무덤은 왕-왕비 무덤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왕비가 국가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의 직분을 맡았다면 위계가 왕보다 오히려 높을 수도 있다. |김재홍의 논문을 바탕으로 재구성

 

■5t트럭 2만5000대 분량 흙

이 대목에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황남대총 남·북분에는 10만8000t(남분 6만3822t+북분 4만4271t) 가량의 흙이 쌓여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t(남분 2340t+북분2037t)에 달한다.

5t트럭 기준으로 흙은 2만1600대, 돌은 875대가 실어날라야 할 천문학적인 분량이다.

1500~1600년 전 이런 말도 안되는 흙과 돌을 나르느라 생고생 했을 신라백성들의 고초를 떠올려본다. 당대 경주 주민들 뿐인가.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이오’하고 선언하는 명문을 남겼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엄청난 규모의 무덤에, 온갖 황금유물을 모두 쏟아넣고는 아니 그래 무덤의 주인공을 알리는 이름 석자 하나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으니 1500~1600년이 지난 후학들이 무덤 주인공을 두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저 경주 대릉원의 소문난 포토존으로만 알고 있던 황남대총엔 이렇듯 무궁무진하고 복잡한 스토리가 묻혀있다.(이 기사를 위해 정인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이희준 전 경북대 교수, 김용성 전 한빛문화유산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고 오세윤 사진작가, 권종원 경주시청 영상담당이 사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2)

<참고자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황남대총 남분-발굴조사의 기록>(학술연구총서 182), 2024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북분-발굴조사의 기록>(학술연구총서 160), 2021

김용성,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와 피장자 검토’, <한국상고사학보> 4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3

김재홍, ‘신라 마립간시기 왕위 계승과 적석목곽묘의 조성 원리’, <한국상고사학보> 117호, 한국상고사학회, 2022

이은석, ‘신라 도성의 성립과 전개’, 일본 센슈대(專修大) 박사논문, 2024

이희준, ‘경주 황남대총의 연대’, <영남고고학> 17권1호, 영남고고학회, 1995

최병현,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형성과정과 신라 마립간시기 왕릉의 배치’, <한국고고학보> 90호, 한국고고학회, 2014

함순섭, ‘황남대총을 둘러싼 논쟁-또하나의 가능성’, <황금의 나라 신라왕릉 황남대총 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0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

 

(1) 연 3만6000여 명 동원된 신라 고분…‘타원형’ 작도법으로 설계됐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2024. 9. 13.

 

 

 

(2) ‘줄서는 왕릉뷰’ 포토존…신라 쌍무덤 ‘금관 왕비, 금동관 왕’의 정체[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4. 7. 25.

 

 

 

<참고자료>

 

 

 

1600년 깊은 잠 깬 비단벌레 장식… 영롱한 빛깔에 숨이 멎었다|동아일보 (donga.com)

 

 

 

황남대총의 정체불명 유물은 '살아있는 화석으로 만든 이백의 술잔'이었다 (daum.net)2019. 12. 11. 이기환 선임기자[경향신문]

 

 

 

"황남대총 칠기에 등장하는 마랑(馬朗)은 중국 바둑고수" | 연합뉴스 (yna.co.kr)2018-11-07 

 

 

 

金 장신구 나온 신라 무덤 주인은 10대女…옆엔 3세 순장 흔적 (daum.net) 2024. 9. 14.  

 

 

 

신라시대 철갑기병, 3800장 미늘 엮은 갑옷·투구로 중무장 (daum.net) 도재기 기자2024. 3. 28. 

 

 

 

 


'무게 28t' 신라 말갑옷 덩이는 어떻게 통째로 보존됐나(종합) | 연합뉴스 (yna.co.kr)
2020-04-07 

 

 


이것이 신라 기마무사의 갑옷 - 매일경제 (mk.co.kr) 2013-04-24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 발굴현장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14-03-25

 

 

 

삼국시대 최전방 강릉에서 신라 장수가 입었던 갑옷이 출토됐다 - 경향신문 (khan.co.kr)2018.11.01이기환 선임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