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에 발굴한 경주 천마총을 알아봅니다.

 

천마총에서 금관,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관리가 쓰던 모자), 금제 허리띠, 금팔찌, 금귀고리, 금반지, 유리잔,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판) 국보 4점·보물 6점 총 1만1천526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천마총 금관 발굴은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 이어 4번째이자 해방 후 첫 번째로 수확한 금관입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급 무덤은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천마총(3장)과 금령총(1장) 등 모두 4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전호태교수는 천마총 천마도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이 배어 있거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천마총에서 나온 ‘백화수피 말다래 천마도’는 이마에 갈기와 비슷한 뿔 같은 게 높이 솟아 있는 게 특징이다. 뿔과 갈기, 꼬리의 표현은 특별한 기운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몸의 초승달 무늬와 다리 사이로 뻗은 고사리 꼴 표현도 온몸에서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확실하다. 입에서 끝이 말리며 길게 뻗은 것도 혀라기보다는 특정한 기운에 가깝다. 백화수피의 천마가 이런 형상으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마에 뿔이 난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기린은 태평성대, 곧 성인이 나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알리는 상상의 짐승이다. 서아시아와 남유럽에서는 ‘유니콘’으로 불리는 신성한 짐승이다. 말이라는 정체성에 상서 관념이 덧입혀진 만큼 천마인 페가수스와 함께 성스러운 동물로 존중됐으며, 외뿔의 말인 유니콘의 이미지는 동아시아의 기린 이미지와도 통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린은 사슴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말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두 가지 이미지가 섞인 게 안악1호분의 기린이다. 신라가 5세기 내내 북방 고구려 문화의 세례를 많이 받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천마총의 유물 장식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이 배어 있거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고구려의 천마도, 기린도의 이미지가 신라 천마도에 섞여 있다고 해서 기이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천마총 천마도의 머리에 솟은 뿔은 유니콘의 경우처럼, 뿔 달린 말에서 뻗어나오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염두에 둔 장식 덧입히기의 결과다. 이는 전통적인 천마 관념에 상서동물로서의 기린의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신라 사람들의 의지가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6세기 전후 신라에서는 시조 왕에 대한 신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시작되어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천마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기린과 같은 상서동물의 이미지를 더하는 회화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4)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한 고분이라는 학설이 맞다면 지증왕(재위 500~514)이 해당되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천마총 발굴 50년] ① '연습'으로 발굴한 155호 고분…1천500년 전 신라와 만나다

김예나2023. 4. 3. 07:03
1973년 시작한 천마총 발굴 조사, 올해 반세기 맞아…'천마도' 등 유물 대거 출토
실측 본격 도입·조사 보고서도 체계화…"문화재 복원·정비·활용의 출발점"
경주 천마총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지난달 23일 찾은 경주 천마총 입구 모습. 2023.4.3 yes@yna.co.kr

 

[※ 편집자 주 = 신라 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경주 대릉원 일원에서 잘 알려진 무덤 중 하나가 바로 천마총(天馬塚)입니다.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경험을 쌓고자 시작한 조사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를 비롯해 금관, 금 허리띠 등 1만1천5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오는 6일 천마총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 50년이 됩니다. 연합뉴스는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천마총 발굴 반세기를 맞아 그 의미를 되짚고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단원의 소회, 특별전시 계획 등을 다룬 기사 3꼭지를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오늘은 날씨도 청명했지만, 아침부터 현장은 다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1974년 발행된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의 발굴 일지는 1973년 8월 22일을 이렇게 전한다.

발굴 조사 전 천마총의 모습 사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 보고서에 실린 내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해 4월부터 시작한 발굴조사가 한창이던 그날, 조사단원이 장니(障泥·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으로 말다래라 함)를 들어내자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천마'가 나타났다.

조심스레 주변을 정리하자 나온 그림, 신라 회화로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급 무덤은 이듬해' 천마총'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유적 발굴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된 천마총 발굴은 이후 문화유산 발굴 조사와 복원·정비 사업의 기준점이자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대통령도 찾은 발굴 현장…국보급 유물 1만1천526점 쏟아져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우리 대표 문화유산인 천마총이 올해로 발굴 50년을 맞는다.

1973년 7월 수장궤 유물이 발견된 모습 사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 보고서에 실린 내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천마총은 1971년 청와대 주관으로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 4월 6일 발굴을 시작했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이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을 조직해 시행한 국가 주도의 첫 번째 '기획 발굴' 사례이다.

그러나 당초 정부가 고려한 발굴 대상은 천마총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가 마련한 종합계획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98호분 즉, 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이를 복원해 내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는 그 정도로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규모도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발굴조사를 해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좀 작은 고분'을 선택한 곳이 바로 천마총이었다. 일종의 '시험 발굴'인 셈이다.

김정기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단장으로 꾸린 조사단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천마총 피장자가 착용한 유물 모습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지난달 23일 찾은 경북 경주시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피장자가 착용한 모습이 전시된 모습. 실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해당 유물은 복제한 것이다. 2023.4.3

 

간단한 위령제를 올리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12월까지 약 8개월간 신라 금관을 비롯해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관리가 쓰던 모자), 금제 허리띠, 팔찌, 유리잔 등 1만1천526점(보고서 기준)의 유물을 찾아냈다.

주요 유물이 나올 때마다 언론이 앞다퉈 소식을 전했고, 주요 외신은 '한국 고고학 발굴의 큰 사건'이라며 주목하기도 했다.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주요 유물 공개 설명회가 열릴 정도였다.

7월 3일에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 관심이 쏠렸다. 국가 원수가 발굴 현장을 찾은 첫 사례로, 당시 그는 현장을 둘러보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조사가 모두 끝난 건 12월 4일. 조사단원을 비롯해 총 3천451명이 투입돼 이뤄낸 작업이었다.

 

고고학에 획기적 변화 이끈 천마총 발굴…최초로 내부 공개해 의미

천마총 발굴은 신라 고분은 물론,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부 조사 모습 길게 이어진 부분은 토양을 고분 아래로 내리기 위해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연결한 것이다. 조사단장이던 고(故) 김정기 박사의 아이디어로 천마총 현장에서 처음 도입됐다고 한다. 사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 보고서에 실린 내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각종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실측'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천마총이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실제로 천마총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보고서에 각종 실측 자료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서 해발 고도가 같은 지점을 연결한 등고선(等高線)으로 표시되며, 각종 실측 도면도 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발굴 이듬해인 1974년 11월 47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펴낸 점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기존에는 고분을 발굴했다 하면 유물을 꺼내는 게 다였지만 구조나 축조 기법까지 다 조사한 계기가 천마총 발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 고고학이 체계화되는 기점도 천마총 발굴"이라며 "유적을 구간별로 나눠 (측량하고) 차례로 발굴하는 기법도 천마총 이후 일상화됐다. 학문적 진일보에도 크나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당시 기술의 한계를 보완한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보고서에 남은 사진에는 고분 능선을 따라 반으로 자른 드럼통이 길게 연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사를 하면서 제거한 토양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장치로, 고(故) 김정기 박사가 직접 고안했다고 한다.

경주 천마총 내부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지난달 23일 찾은 경주 천마총의 내부 전시 모습. 2023.4.3 yes@yna.co.kr

 

발굴 현장에서 실측을 도맡았던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은 "당시 흙 나르는 기계가 없어서 흙을 퍼내 (드럼통으로 된) 관로로 보냈다"며 "3차원(3D) 스캔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회상했다.

천마총은 내부를 전시관으로 꾸며 국민들에게 공개한 첫 시설로도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은 천마총 발굴 50년 기념 공식 누리집에서 "1976년 복원과 정비를 거쳐 개방한 천마총 공개시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분 공개시설로, 문화재 복원·정비·활용 사업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학계 전문가들은 출토된 황금 유물이나 무덤 크기 등을 고려할 때 왕릉급 무덤일 것이라 추정한다.

천마총 내부 전시관에서는 '무덤에 묻힌 사람은 황금으로 치장한 고대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보인다'며 왕이나 왕에 준하는 인물로 설명했으나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1)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사람이 박 전 대통령. 사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 보고서에 실린 내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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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선 안 될 천마가”…‘기린총’ 될 뻔한 천마총[이기환의 Hi-story](55)

2022. 10. 27. 07:19
“7월 25일… 예상했지만, 곡옥이 달린 나뭇가지 형태의 세움장식이 확실한 금관 일부를 확인했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경주 155호분(천마총)의 발굴일지 7월 25일자 내용입니다. 어찌 좀 이상하죠. 명색이 신라 금관을 발견했는데, 흥분감과 짜릿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마총에서 확인된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모두 3장이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그린 2장 외에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에 표현한 1장이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 이어 4번째이자 해방 후 첫 번째로 수확한 금관이잖아요.

발굴일지의 ‘예상했던 대로’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해방 후 첫 발굴한 왕릉급(높이 12.7m·밑지름 47m)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내심 금관 출토는 시간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차에 금관이 보이자 ‘짜릿한 흥분’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후 한 달 가까이 지난 8월 22일 무덤 부장품을 한곳에 담아놓은 상자 안에서 ‘말다래’ 3벌(6장)이 나왔는데요. 금관보다는 말안장의 부속구인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가 155호분의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시험발굴이 대박 발굴로 내년(2023)이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이하는데요. 며칠 전 문화재청이 발굴 50주년을 앞둔 ‘천마총의 우리말 의미와 상징, 표어를 공모한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기회에 알아보려고요.

총 1만1526점의 유물이 쏟아진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요.

사실 155호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천마총은 시험용 발굴 대상이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년 7월) 후 11개월 만인 1971년 6월 경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관광 개발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마련된 개발계획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높이 22~23m, 밑지름 80~120m)을 발굴조사한 뒤 그 내부를 관광자원으로 공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고고학계로서는 그렇게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98호분(황남대총)과 인접한 155호분을 시험 발굴해 경험을 축적한 뒤 98호분을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1973년 4월 6일부터 시작된 ‘시험용 발굴’이었지만 학계의 기대는 컸습니다. 과연 기대한 대로 7월 25일부터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이 보였습니다.

말 3마리분의 장신구 발굴은 8월 14일부터 주인공의 머리맡에 놓인 부장품 상자로 이어졌는데요. 상자 안에 뒤섞여 있던 천 조각과 나무 썩은 물질 등을 제거하자 뜻밖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말 안장 위에 가지런히 놓은 2장의 말다래가 보인 겁니다.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였습니다.

당시 발굴단은 이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에 ‘천마’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나무 삿자리나 금동판 모두 심하게 부식돼 바삭바삭 부서져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발굴단은 이렇게 부식된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원상태로 수습해야 했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조치란 유물에 약품을 뿌려 굳게 만드는 경화 처리였습니다. 분무기와 이발소용 드라이기를 사용해 경화 처리용 약품을 ‘금동판 말다래’에 뿌리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강렬한 색깔의 천마가! 돌발변수가 생겼습니다. 경화 처리를 끝낸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들어올리는 순간, 그 밑에서 또 하나의 심상치 않은 물체가 살짝 보였습니다.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에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발굴단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부식물질이 가득 차 있어 바로 그 아래의 유물도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8월 22일 ‘금동판 말다래’를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자작나무 껍질’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2장이 겹쳐진 또 한벌의 말다래였습니다. 판 위의 부식물질을 제거해나가자 강렬한 채색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뿔싸!’ 탄성이 터졌습니다.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의 일부가 훼손돼 있었습니다. ‘금동판 말다래’의 경화 처리 때 뿌린 약물이 ‘자작나무 말다래’에까지 침투한 겁니다. 밑까지 스며든 약물이 자작나무판과 그 위의 부식물에 엉겨붙어 까맣게 변한 거죠. 훼손된 윗부분 말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1924년 금령총 출토품 중에 금동장식으로 분류된 유물 역시 말다래에 표현된 천마로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렇게 노출한 자작나무판 말다래 1벌은 길이 각 75㎝, 너비 각 56㎝, 두께 각 6㎜ 정도였는데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겹 겹쳐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습니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고요. 가장자리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습니다.

만지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김정기 발굴단장(1930~2015)의 낯빛이 달라졌습니다. 금관 출토 때에도 자못 ‘쿨’한 표정으로 작업을 지시했던 김 단장은 천마도 말다래가 출토되자 직접 붓과 솔을 잡았습니다. 당시 발굴단원은 “김 단장은 말다래의 부식물을 털어내면서 입을 앙다물었다 풀었다 하고, 끙끙 신음을 내기도 하고, ‘하~하~’ 하는 감탄사를 숨기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라의 회화 솜씨를 알 수 있는 그림이 처음 현현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천마총 후속발굴에서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와 말 탄 인물을 그린 ‘기마인물도’ 채색판이 나와 흥분은 더해졌습니다.

그런데 김정기 단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와서는 안 될 게(천마도) 나왔어!”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유물의 보존처리 기술이 일천했던 1970년대에 ‘천마도’ 같은 부식된 유기물이 출토됐으니까요.

발굴단장으로서 얼마나 긴장했으면 “나오지 말아야 할 게 나왔다”고 토로했을까요.

딴은 그렇습니다. 천마도 말다래는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것이고요. 땅속에서 무려 1500년 가까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출토 당시에는 나무껍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모두 부식돼 있었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오래 공기에 노출되면 큰일이 납니다. 유물 틈에 녹아든 습기가 말라버리면 색깔도 금방 옅어지고, 갈라지고, 쪼그라들고 맙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 말다래를 어떻게 빨리 들어내 무사히 옮길 것인가, 발굴단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묘안을 짜냈습니다.

얇고 긴 대칼과 함석판, 켄트지(그림 그리기용 빳빳한 종이) 등을 이용해 2장이 겹쳐진 자작나무 말다래를 살짝 들어올린 뒤 조심스레 옮겼습니다. 한쪽에서는 6~7명이 빙 둘러서서 대칼에, 합판에, 함석판에, 켄트지까지 동원해 살살 들어올려 구령에 맞춰 옮겼습니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꺼질세라’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천마도’ 2장은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보존 상자로 옮겼습니다.

정리하자면 천마총에서 ‘대나무 삿자리 금동판제’ 1벌(2장), ‘자작나무 껍질제’ 1벌(2장) 외에도 ‘옻칠판제’ 1벌(2장) 등의 말다래가 확인됐는데요. 모두 6장이니까 3마리분의 말다래가 세트로 나온 셈이죠.

‘말다래’는 말 안장 양쪽에서 배 아래로 늘어뜨린 부속구인데요. ‘말이 달릴 때 진흙(니·泥)이 기수의 가랑이에 튀는 것을 막아주는(장·障) 역할을 해준다’는 뜻에서 ‘장니(障泥)’라고도 합니다. 발굴 당시에는 말다래 3벌(6장) 가운데 ‘자작나무’ 2장에서만 ‘천마도’가 보였습니다.

전화국 교환수가 누설한 발굴기사 발굴 후일담도 기가 막힙니다. 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 때 몰려드는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수습하는 불상사를 겪었죠.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천마총 발굴현장은 비공개로 했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이 누구입니까.

망원경까지 동원해 발굴현장을 스캔한 것은 애교였고요. 낮은 포복으로 잠입해 발굴 사진을 찍어간 기자도 있었답니다. 기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발굴단은 중요 조사 상황을 유선상으로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으로 보고했는데요.

어찌된 일인지 보고사항이 매일매일 현장중계하듯 특정신문에 보도되곤 했답니다. 자연히 발굴단 내부에 ‘기자 끄나풀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당시는 전화국의 교환수를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절인데요.

알고 보니 그 전화국 교환수가 모 신문기자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보고내용이 고스란히 이 교환수를 통해 기자에게 알려졌던 겁니다.

 

시험발굴형식이었지만 천마총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 화려한 장신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고분의 시그니처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천마도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천마총’과 ‘기린총’ 논쟁 훗날 ‘천마도’와 관련해 인구에 회자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견해가 나온 겁니다. ‘기린’은 예부터 성인의 세상에서 출현한다는 상상의 동물인데요.

후한(25~220) 시대의 자전인 〈설문해자〉는 “기린은 어진 짐승이고, 말의 몸에 소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뿔이 하나 솟아 있다(麒麟仁獸也 馬身牛尾一角)”고 했습니다. 연구자는 “이른바 ‘천마도’의 동물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돼 있고 입에서 신기를 내뿜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화질로 찍은 ‘천마도’ 사진에는 ‘머리 위에 두꺼운 모양의 반달형 뿔(혹은 갈기)’이 보였는데요. 이것을 뿔로 확신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린총’ 견해는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요. 명칭을 ‘천마총’에서 ‘기린총’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발굴 4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유의미한 분석결과를 밝혀냅니다. 1973년 발굴된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금동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천마’ 그림을 확인한 겁니다.

또 1924년 금령총 출토품 가운데 막연하게 ‘말모양 금동 장식’으로 명명했던 유물은 확인결과 천마총 출토 ‘대나무제 금동판’과 흡사한 ‘말다래’였습니다.

박물관의 분석결과를 종합하면 지금까지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천마총(3장)과 금령총(1장) 등 모두 4점인 셈이죠.

천마총 말다래 가운데 남아 있는 ‘대나무제 금동판제’ 1점과 ‘옻칠제’ 2점 등에서도 천마가 그려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낙 부식이 심해 확인하지는 못했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이런 분석결과를 토대로 천마총에서 확인되는 동물은 말이 분명하다고 단정했습니다. 즉 말 머리 위의 반달문양은 기린의 상징인 뿔이 아니라 말의 갈기 묶음(말상투)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같은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역시 자작나무 껍질로 제작된 채색판에 그려진 ‘말을 탄 인물상’이 있는데요. 하늘을 나는 백마입니다.

자작나무판 말다래 1벌(2장)은 길이 각 75cm, 너비 각 56cm, 두께 각 6mm 정도였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다. 가장자리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무엇보다 천마총(5세기 말~6세기 초)보다 시기가 앞선 고구려 덕흥리 고분(408년 조성)에도 ‘천마지상(天馬之象)’이라는 명문과 함께 천마가 그려져 있는데요. 이것이 ‘천마도’의 천마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천마총 주인공은 지증왕인가 왜 천마일까요. 〈삼국유사〉 ‘박혁거세’조를 볼까요.

“나정 곁에… 백마 한마리가 꿇어앉아 절하고 있었다. 그곳에 알이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에서 단정한 동자(박혁거세)가 나왔다.”

어떻습니까. 신라에서 말이 제왕의 등장을 알리는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얘기죠. 따라서 왕이나 왕족의 무덤이 확실한 천마총 출토 말다래에 새겨진 동물은 ‘천마’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기린이냐, 천마냐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린이든, 천마든 무덤 주인공을 영원한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신령한 안내자나 조력자의 역할을 했을 테니까요. 어떻든 ‘천마총=기린총’설은 학계에 건전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문제 제기였던 것 같습니다.

천마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한 고분이라는 학설이 맞다면 지증왕(재위 500~514)이 해당하는데요.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주인공이요!” 하고 손들고 나서지 않았으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2)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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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천마총 금관에 손을 뻗는 순간…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10월 5일 16시 17분 
 

<17> 천마총 발굴한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서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이 43년 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광복 이후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건 제게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 선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3·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푸른 뗏장을 입은 고총(古塚)을 바라보며 4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71년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1973년 천마총, 1988년 창원 다호리 고분까지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그는 한국 발굴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그는 “졸속으로 진행된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천마총은 제대로 발굴하려고 애썼다”고 술회했다.

○‘정말 하늘이 노(怒)한 것인가…’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은 광복 이후 처음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이다. 
 
 
1973년 7월 초순 천마총 발굴 현장.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바쁘게 움직이던 조사원들이 일손을 잠시 멈추고 숨을 죽였다. 목관 머리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색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건져낸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총이나 서봉총 금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들이 찾아냈다. 관테부터 영락까지 흙에 묻힌 금관 전체를 대칼과 붓으로 노출시키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지건길(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사)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신라 금관 발굴이었다.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영물(靈物)을 건드리면 천기운행도 상서롭지 않게 되는가. 금관을 들어올리기 직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경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이날도 종일 하늘이 쨍쨍하던 터였다. 강풍으로 봉분 위에 쳐놓은 텐트가 날아가려고 해 조사원 여럿이 붙들고 간신히 버텼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2년 전 무령왕릉 발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낮엔 맑았는데 야간 발굴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어요. 무령왕릉 내 연도를 따라 석실 안으로 들어차는 물을 빼내려고 조사원들이 사투를 벌였습니다. 무덤 발굴이 왕의 넋을 노하게 한 건가 싶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관을 나무상자 안에 옮겨놓자마자 뇌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쳤다.

○ 발굴 초창기 열악한 환경

천마총 내 부장궤 안에서 발견된 천마도 말다래. 신라시대 채색화로는 처음 출토됐다. 
 
천마총 발굴은 최대 규모의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기획된 일종의 테스트베드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되자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김정기 발굴단장은 “황남대총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발굴 경험이 일천하니 이보다 작은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0년대 국책 발굴사업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렸다. 초창기였던 만큼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지름 60m, 높이 13m에 이르는 거대 봉분의 흙을 퍼내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굴착기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기계를 동원할 수가 없어 드럼통을 반으로 쪼갠 뒤 이를 이어 붙인 관로(管路)를 직접 만들었다. 봉분 꼭대기에서 삽으로 퍼낸 흙을 관로로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지건길은 “그때의 원시적인 작업 광경을 요즘 고고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 1500년을 품은 천마도의 신비한 색(色)

1973년 천마총 발굴팀이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를 현장에서 수습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덤 이름이 천마총이 된 것은 목제 부장궤 안에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말다래(말을 탈 때 흙이 다리에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건길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최고로 꼽는 천마도는 처음 발견된 신라시대 채색화다. 그는 “외부 공기에 닿아 변색이 일어나기 직전의 천마도는 너무도 생생한 빛깔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천마도는 보존 처리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유물 수습과 동시에 아직 부식되지 않은 부장궤 일부 나무판재를 약품 처리했다.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의 조언에 따라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가열해 녹인 뒤 붓에 묻혀 판재에 꼼꼼하게 발랐다.

 부장궤 내부 상황은 더 까다로웠다. 금동장식의 말다래 밑에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 두 겹이 깔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돌에 눌린 채 맞물려 있는 말다래들을 훼손하지 않고 안전하게 분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처음에 말다래 사이에 합판을 넣으려다 실패했지만 함석판을 끼워 넣어 가까스로 분리했다. 수습 이후 박물관에서 시행한 보존 처리도 자외선 차단용 커버를 씌우고 30분 간격으로 가습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무령왕릉과 달리 8개월에 걸쳐 진행된 천마총 발굴이지만 후회는 남았다. “칠기(漆器)처럼 외부에 노출되면 금방 부식되는 유기물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점이 늘 아쉽습니다. 천마총의 정확한 축조 연대를 규명해 무덤의 주인을 알아내는 게 남은 과제일 겁니다.”(3)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고] 신라 ‘천마총 말’에 뿔이 달린 이유는 뭘까

기자2023. 4. 5. 03:02

1973년 4월6일은 경주 ‘천마총’ 발굴 조사의 첫 삽을 뜬 날이다. 천마총이 발굴된 지 올해로 50년이 된 것이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천마총에서는 1500여년 전 신라시대의 회화작품인 ‘천마도’를 비롯해 금관·금제 허리띠 등 국보 4점·보물 6점 등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그야말로 신라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천마총이 위치한 대릉원은 이제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등과 함께 인기 높은 국민 관광지이자 수학여행지이기도 하다. 천마총은 최근 젊은 세대가 꼽는 여행지 1순위로 인식되고, 해마다 1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문화유산이자 지역경제 활성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역사는 천마와 함께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조 왕 박혁거세는 알을 낳고 하늘로 올라간 흰 말의 자손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마총에서 발굴된 유물들 가운데 말다래 장식인 ‘천마도’들은 의미가 깊다. 천마총에서는 대나무에 금동장식을 한 ‘죽제 말다래 금동투조장식 천마도’와 함께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에 그린 천마도(‘백화수피 말다래 천마도’)가 발굴됐다. 이들 천마도는 신라 사람들이 상상하고 기억하는 천마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신라의 천마도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두 차례 등장하는 천마도보다 힘 있고 강하게 표현됐다. 금동투조장식 천마도의 경우 재료의 특성상 고구려 천마도 수준의 회화적 세련도는 부족하더라도 신라 장인 특유의 미감과 예술적 표현의지가 보인다. 고구려의 천마도는 ‘안악1호분’과 ‘덕흥리 벽화분’ 벽화에서 각각 보이는데, 안악1호분 벽화의 천마에는 날개가 있지만, 덕흥리 벽화분의 천마에는 없다. 물론 두 천마는 모두 무덤칸 천장 고임에 그려진 점에서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관념과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천마총 천마도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천마 두 마리가 보여주는 각각 다른 이미지이다. 안악1호분 천마의 경우 머리는 사슴을, 몸통은 말을 연상케 한다. 덕흥리 벽화분의 천마는 날개가 없이 전형적인 말 이미지다. 이 천마의 머리 앞에는 ‘天馬之象’(천마지상)이라는 묵서명도 있다. 삼국시대를 통틀어 ‘천마(天馬)’라는 글자가 남은 유일한 사례다. 흥미로운 것은 안악1호분에는 천마와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이마에 뿔이 있는 기린도 그려져 있는데 말의 이미지가 잘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천마총에서 나온 ‘백화수피 말다래 천마도’는 이마에 갈기와 비슷한 뿔 같은 게 높이 솟아 있는 게 특징이다. 뿔과 갈기, 꼬리의 표현은 특별한 기운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몸의 초승달 무늬와 다리 사이로 뻗은 고사리 꼴 표현도 온몸에서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확실하다. 입에서 끝이 말리며 길게 뻗은 것도 혀라기보다는 특정한 기운에 가깝다. 백화수피의 천마가 이런 형상으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마에 뿔이 난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기린은 태평성대, 곧 성인이 나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알리는 상상의 짐승이다. 서아시아와 남유럽에서는 ‘유니콘’으로 불리는 신성한 짐승이다. 말이라는 정체성에 상서 관념이 덧입혀진 만큼 천마인 페가수스와 함께 성스러운 동물로 존중됐으며, 외뿔의 말인 유니콘의 이미지는 동아시아의 기린 이미지와도 통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린은 사슴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말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두 가지 이미지가 섞인 게 안악1호분의 기린이다. 신라가 5세기 내내 북방 고구려 문화의 세례를 많이 받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천마총의 유물 장식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이 배어 있거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고구려의 천마도, 기린도의 이미지가 신라 천마도에 섞여 있다고 해서 기이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천마총 천마도의 머리에 솟은 뿔은 유니콘의 경우처럼, 뿔 달린 말에서 뻗어나오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염두에 둔 장식 덧입히기의 결과다. 이는 전통적인 천마 관념에 상서동물로서의 기린의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신라 사람들의 의지가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6세기 전후 신라에서는 시조 왕에 대한 신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시작되어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천마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기린과 같은 상서동물의 이미지를 더하는 회화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4)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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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천마총 발굴 50년] ① '연습'으로 발굴한 155호 고분…1천500년 전 신라와 만나다 (daum.net)2023. 4. 3.

 

 

(2) “나와선 안 될 천마가”…‘기린총’ 될 뻔한 천마총[이기환의 Hi-story](55) (daum.net) 2022. 10. 27.  

 

 

(3)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천마총 금관에 손을 뻗는 순간…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동아일보 (donga.com)

 

 

(4) [기고] 신라 ‘천마총 말’에 뿔이 달린 이유는 뭘까 (daum.net) 2023. 4. 5.  

 

 

 

<참고자료>

 

 

 

1천500년전 신라 황금 무덤이 눈앞에 펼쳐지다 | 연합뉴스 (yna.co.kr) 2018-07-27

 
 

역사기행 그곳’ 왕 중의 왕 ‘마립간’, 금관·천마도의 주인…그 실체는? | 서울경제 (sedaily.com) 2017-05-27 

 

 

 

 

 

 

 

 

 

 

 

 

21세기 첨단과학, 황금天馬를 되살리다 (chosun.com) 2014.03.05. 03:07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2)발끝에 걸린 신라 적성비 - 경향신문 (khan.co.kr)

 

 

 

아무도 기대 안한 폐고분서 국내 최초로 토용 수십점 발굴|동아일보 (donga.com)

 

 

 

30t 심초석 들어올리자 생각도 못한 유물 3000점이 우르르|동아일보 (donga.com)

 

 

 

천오백년 견딘 신라 목간 308점, 석성의 진짜 주인 밝히다|동아일보 (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경주 경마장 부지에서 신라 숯-토기가마 무더기로 쏟아져|동아일보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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