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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 고고학 (5) 경주 금령총

대야발 2024. 10. 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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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이 2018년 9월 6일 오후 4시 경주 대릉원 일원의 금령총에서 발굴조사를 위한 개토제를 개최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특이한 금제방울이 출토돼 이름이 붙여진 금령총의 이번 발굴조사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수집 자료 정리 사업의 일환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대형고분의 미진한 조사 내용을 보완하고, 전체 유적 현황을 파악해 기존에 정리되지 않은 자료와 추가 발굴 및 일제강점기 보고 자료를 포함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고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경주=뉴시스】 이은희 기자 = 경주 대릉원 일원의 금령총. 2018.09.05.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photo@newsis.com

 

 

 

 

금령총은 인접한 식리총과 함께 1924년에 조사됐다. 당시 금관(보물 제338호), 금제허리띠, 감옥팔찌(嵌玉釧) 등의 장신구를 비롯해 기마인물형토기(국보 제91호), 채화칠기, 유리용기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경주=뉴시스】 이은희 기자 =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현장. 2018.09.05.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photo@newsis.com

 

 

 

당시 조사 내용은 1930~1931년에 보고서로 발간됐으나, 고분 축조과정 및 유물의 해석, 의례 행위와 관련한 종합적이면서도 정밀한 조사보다는 훼손된 봉토와 적석부를 걷어내고 매장주체부만 노출한 뒤 다량의 부장품을 수습하는 방식으로 단 22일 만에 조사가 완료됐다.

(출처; 일제가 파헤친 경주 금령총, 94년 만에 재발굴 (daum.net)뉴시스. 2018. 9. 5. )

 

 

 

 

 

 

 

1924년 5월 경북 경주 노동동의 한 고분에서는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일본인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주도한 이 조사는 22일간 진행됐지만, 그 성과는 놀라웠다. 작은 금관이 나왔고 금제 허리띠, 장신구, 신라 토기 등이 출토됐다.

무엇보다 무덤 속에 있던 금방울(金鈴·금령)은 당시 조사단이 '그 우아함에 사랑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딸랑딸랑 소리를 내던 금방울 한 쌍은 그렇게 무덤의 이름이 됐다.

 
 
 
주요 전시품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금방울, 금 허리띠, 금반지, 금 가슴걸이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립경주박물관은 2018∼2020년 약 3년에 걸쳐 금령총을 재발굴한 성과와 보존처리 결과 등을 소개하는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특별전을 2022년 11월 22일부터 선보인다고 21일 밝혔다.

 

6세기 초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어린아이의 무덤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나온 금관은 높이 27㎝, 지름 15㎝로,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옥 장식이 없다.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작고 장식이 단순한데, 다른 꾸밈 장식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보물 금령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는 금관, 금방울, 기마인물형토기 등 3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금령총으로의 여정을 안내한다.

1924년 금령총이 세상에 드러났을 당시를 전한 첫 부분에서는 유리잔, 종 모양 말방울, 둥근 말방울 등 당시 열차 칸 1량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던 발굴품을 엄선해 보여준다.

 

이어진 '내세로의 여정을 같이하다'에서는 무덤 주인이 누워 있던 관과 껴묻거리용 상자를 주목한다.

보물로 지정된 금관, 금팔찌, 금허리띠, 금반지 등 출토품의 크기와 이들이 놓인 간격을 고려하면 금령총의 주인은 키가 1m 안팎인 어린아이였으리라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왕실의 아이로 보기도 한다.

 

각각 두 점씩 쌍으로 나온 토기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국보이자 신라 토기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기마인물형 토기는 흔히 주인상과 하인상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가는 하인상으로 알려진 토기는 오른손에 방울이 꽂힌 막대를 들고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무덤 주인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제사장 또는 무당일 수도 있다고 한다.

배 모양 그릇과 등잔 모양 그릇 역시 망자의 여정을 함께하는 껴묻거리로 추정된다.

금령총에서 나온 기마인물형 토기 [문화재청 제공]

 

 

 

박물관은 "배 모양 그릇은 저승에서 만날 물길을 무사히 건넜으면 하는 마음, 등잔 모양 그릇은 어두운 공간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부모의 걱정이 스며든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약 100년 만에 이뤄진 재발굴 성과도 찬찬히 짚는다.

 

금령총은 당초 발굴되기 전에 크게 파괴돼 남북 길이 약 13m, 높이 약 3m의 반달형으로 남아 있었지만,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크고 지름이 30m 정도였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금동 장식으로 꾸민 천마(天馬) 말다래 장식, 2019년 무덤 둘레에 쌓는 돌인 호석(護石) 바깥쪽에서 나온 높이가 56㎝에 이르는 말 모양 토기 등이 관람객의 시선을 끌 법하다.

말 모양 토기는 현존하는 발굴 수습품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재발굴 과정에서 나온 말 도용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마치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있는 듯한 말 모양 토기는 등과 배 부분이 깔끔하게 절단된 듯한 흔적이 있어 학계에서는 의례 과정에서 고의로 깨뜨려 부장한 것으로 추정해왔다.

 

재발굴 조사를 통해 역사의 퍼즐을 맞춘 부분 역시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박물관은 재발굴 조사를 하면서 긴목항아리의 굽다리 파편 2점을 확인했는데 이 가운데 1점은 1924년 조사했던 껴묻거리용 상자 주변에서, 다른 1점은 호석 주변에서 각각 발견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1924년에 발굴한 몸통과 2019년, 2020년에 발굴한 파편을 언급하며 "재발굴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쳤을 것으로 재발굴이 가져온 1천500년 만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출처; 금방울 한 쌍과 함께 떠난 어린 영혼…다시 들여다보는 금령총 (daum.net)연합뉴스.2022. 11. 21.)

 

 

 

 

 

 

황남대총, 천마총, 호우총, 금관총, 서봉총….

신라를 대표하는 여러 능묘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의외로 금령총(金鈴塚)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라의 금관이 나온 무덤, 유리잔이 출토된 무덤 중 하나로 금령총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22일 개막하는 특별전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근 100년간 연구해왔으나 여전히 잘 모르는 금령총에 대한 정보를 바로잡고 설명하는 자리다.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전시의 깨어진 토기들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21일 공개된 국립경주박물관의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전시장 모습. 토기 파편들이 수습된 모습을 볼 수 있다. 2022.11.21 yes@yna.co.kr

 

 

 

무덤의 이름이 된 금방울, 금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금령총에는 두 종류의 금방울이 나왔다. 하나는 무덤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허리춤에 매달렸고 다른 하나는 금관에 달려 있다.

 

 

신광철 학예연구사는 21일 열린 설명회에서 "금령총이란 이름은 금관보다 먼저 발굴된 허리춤 금방울 때문에 지어졌다"며 "1924년 조사에서는 발 부분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발굴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금령총의 금방울 한 쌍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금방울 각 쌍을 놓고 봐도 차이점은 분명하다.

허리춤에 달려있던 금방울은 지름이 1.4㎝에 불과하지만 가는 금띠를 마름모 모양으로 붙인 뒤 구획을 15개로 나눴다. 구획의 중앙에 둥근 모양의 자리를 만들어 파란 유리로 속을 채웠다.

 

반면, 금관에 달린 금방울은 별도 구획 없이 금띠를 두 번 돌렸고 가운데를 유리로 마감했다.

허리춤에서 나온 금방울이 더 정교하고, 흔들었을 때 '딸랑딸랑' 소리도 난다.

같은 유물이 쌍을 지어 '세트'로 나온 점도 눈에 띈다.

 

보통 무덤 안에는 주인공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물건뿐 아니라 장례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만든 물건도 함께 묻는데 금령총에서는 비슷한 유형의 유물이 쌍을 이룬 채로 나왔다.

 

껴묻거리를 넣은 상자 가장 위쪽에 있었던 마구 이른바 '말 갖춤 세트'는 최소 3개 세트나 된다. 재질이나 문양은 일부 다르지만, 처음부터 하나의 세트를 구성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주요 전시품 왼쪽부터 배 모양 그릇, 등잔 모양 그릇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금방울보다 더 잘 알려진 대표 유물 기마인물형 토기도 비슷하다.

말을 탄 사람 모습을 본뜬 토기는 1924년에 배 모양 토기와 함께 나왔다. 두 점으로 된 이 토기는 주인과 하인으로 추정하는데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쌍을 이룬 토기는 주술적인 목적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이 토기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해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신 학예연구사는 "유물의 수량보다는 유물이 어떤 조합으로 있는지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물 등의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 토기는 두 점이 한 번에 확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경주 덕천리 유적의 경우, 하나의 유적에서 11점의 오리 모양 토기가 출토된 적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유물 못지않게 깨진 파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진주'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21일 공개된 국립경주박물관의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전시장 모습. 금령총에서는 진주로 보이는 유기물 10여 점이 확인된 바 있다. 2022.11.21 yes@yna.co.kr

 

 

2018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진행된 재발굴 조사에서는 무덤 둘레에 쌓는 돌인 호석(護石) 바깥쪽에서 30여 점에 달하는 대형 토기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같은 지점에서 나온 토기 조각들이 붙지 않아 당시 조사팀이 애를 먹기도 했다.

각 토기가 묻힌 뒤 깨진 것이 아니라 먼저 깨뜨린 뒤 무던 주변에 골고루 뿌렸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출토 지점과 상관없이 토기 조각을 복원한 결과 수습한 조각들이 하나로 붙었다고 한다.

 

신 학예연구사는 "제사가 끝난 뒤 각종 공헌물과 그릇을 담았던 커다란 항아리를 깨뜨려 무덤 주변에 골고루 뿌렸음을 알 수 있다"며 "작은 그릇뿐 아니라 커다란 항아리도 대상임이 밝혀진 것"이라고 말했다.

금령총에서 진주가 출토됐다는 점 역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다.

 

이번 전시에는 진주로 보이는 유기물 10여 점도 함께 공개됐는데, 지름이 0.3㎝에 이를 정도로 작다.

박물관 측은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단 6세기대 자료로서 당시 진주의 생산과 교역, 활용 등 삼국시대 진주 연구에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입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출처; 신라금관·유리잔 나온 무덤이라고?…알고 보면 더 중요한 금령총 (daum.net)연합뉴스.2022. 11. 21)

 

 

 

 

 

 

‘딸랑딸랑 금령총 이야기’…. 2023년 3월5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이 열고 있는 특별전 이름은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어린 영혼의 길동무’라는 수식어와 함께 경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의 연계프로그램(‘딸랑딸랑 금령총 이야기’)에 시선이 꽂히더라구요. 뭔가 연상이 되죠. ‘딸랑딸랑 금방울(금령), 어린 길동무’ 등의 단어는 모두 어린이와 관련이 깊죠.

 

그렇습니다. 이 금령총의 주인공은 약 1500년 전인 5세기말~6세기초에 살았던 왕자인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5~6살 무렵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구요. 이 요절한 왕자 이야기를, 그 왕자를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신라 마립간(왕)의 심정으로 풀어봅니다.

 

 

https://youtu.be/mOc5eApLAiE

 

 

 

 

 

1500년전 신라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 그중 주인상의 얼굴은 오뚝한 콧날에 뾰족한 턱이 인상적이며, 살짝 감은 듯한 두 눈 등이 사실적인 조각상이다. 이 인물상의 모델이 바로 무덤의 주인공인 어린 왕자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하인상의 인물은 주인을 저승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가. 그러나 손에 제사의식에 쓰이는 방울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장례의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이라는 설도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혈안이 된 일제의 ‘보물찾기’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인 1924년 5월 10일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일인 학자들이 경주 노동리에 있던 반쯤 무너진 고분 2기(126·127호분)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고분은 경주에서 가장 큰 단독분인 봉황대(125호분·지름 82m, 높이 22m)에 딸린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습니다.

 

이 두 폐고분에 눈독을 들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3년전인 1921년 주막집 확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 있죠. 바로 금관을 비롯한 온갖 금제유물이 터져나온 금관총입니다. 그러나 금관총 발굴은 경주 현지의 아마추어들이 서둘러 유구와 유물을 파헤치는 바람에 학술적인 정보를 거의 잃은채 졸속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말탄 주인상의 얼굴은 다른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토우 등과 사뭇 다르다. 대충 새긴 흙인형에 비해 사실적으로 빚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에 일본학자들은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齋藤實·1858~1936)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 두 폐고분 조사에 나섰답니다. 학술조사 명목이었지만 금관총에서처럼 온갖 황금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일종의 ‘보물찾기’ 차원이었습니다.

 

그 예상이 맞았습니다. 126호분에서는 금동신발 등 각종 금은 제품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는 ‘식리총(飾履塚·장식 신발 무덤)’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127호분에서는 더욱 놀라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3년전 금관총에서 첫 발굴된 금관을 비롯해 귀고리, 허리띠, 목걸이, 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습니다.

 

또 금관총에서는 없는 유물인 금방울(금령)이 출토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을 ‘금령총’이라 했습니다.

이어 ‘작은 고리를 장식한 굵은 칼’도 노출되었구요.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발굴자의 호미 끝에 걸린 유물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옆으로 넘어진채 발견된 기마인물형토기 2점(국보)이었습니다.

 

 

 

금령총 주인공이 썼던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비해 작다. 머리 크기가 작은 어린 왕자라는 추론이 가능하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앙증맞은 금관, 금허리띠의 크기

어떻게 이 고분의 주인공을 5~6살 어린이, 그것도 왕자로 판단할까요.

먼저 왕자로 추정하는 근거를 알아볼까요. 신라 고분 주인공의 성별은 주로 ‘귀고리와 큰칼(대도)’의 착장여부로 판단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는고리-큰 칼=남성’으로, ‘굵은 고리 귀고리=여성’으로 추정하거든요. 그런데 금령총 주인공의 머리에는 가는고리 귀고리가, 허리춤에는 장식이 달린 둥근고리 큰칼이 보였답니다. 그래서 남성으로 추정한 겁니다.

주인공의 나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선 목관(길이 150㎝, 너비 60㎝)이 작았구요.

 

 

 

금령총 허리띠의 과판(과板·꾸밈 쇠붙이)은 23점에, 길이는 74㎝ 정도이다. 동시대에 제작된 천마총 금허리띠(과판 44점, 길이 125㎝)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또 주인공이 누워있던 자리에서 노출된 각종 장신구로 몸집을 추정할 수 있죠. 그렇게 보니 금관과 금허리띠의 간격은 약 30㎝에 불과했습니다. 금허리띠와 발찌(구슬)의 간격 역시 30㎝ 였구요.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90㎝ 정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후하게 봐도 주인공의 키는 90~100㎝ 정도라는 얘기죠.

 

금관의 크기를 볼까요. 주인공이 착장한 상태의 금관 지름(15㎝)이 다른 고분의 출토품(천마총 20㎝, 금관총 19㎝, 서봉총 18.4㎝)보다 작고요. 특히 금령총 금관(관테 53㎝, 높이 27㎝)은 거의 동시대에 조성된 천마총의 금관(관테 64㎝, 높이 32.5㎝)보다 훨씬 작습니다. 한마디로 머리통이 작다는 얘기죠.

 

 

 

1924년 발굴된 금령총의 나무곽 내부 상황. 무덤주인공의 착장상태와 출토유물의 사이즈 등을 검토했을 때 신장이 90~100㎝의 요절한 어린 왕자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금관과 족옥을 양끝 기준으로 해서 허리띠가 있는 부분을 토대로 신체비율을 따졌을 때 3세 아이(5등신) 비율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금령총의 금허리띠를 봐도 그렇습니다. 허리띠의 과판(과板·꾸밈 쇠붙이)이 23점에, 길이는 74㎝ 정도인데요. 천마총 금허리띠(과판 44점, 길이 125㎝)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죠. 천마총은 왕 혹은 왕족인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거든요.

그렇다면 비슷한 시대에 조성된 금령총이 어린 나이에 죽은 왕자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키(90㎝ 정도)를 한번 살펴볼까요. 지난 2001년 경기도 양주에서 17세기 중엽 미라 한 구가 발굴됐는데요. 미라 신장은 99.4cm, 치아로 측정된 연령대는 5.5세 전후로 밝혀졌습니다. 어린이가 자라는 환경이 시대에 따라 다를지라도 신라 금령총 주인공의 신장이 90~100cm 정도라면 어떨까요. 역시 5~6살 무렵의 왕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 이 어린왕자의 오른쪽 허리춤에 찬 ‘큰칼(대도)’를 허투루 넘겼는데요. 국립경주박물관 김대환 학예연구사가 귀띔해주더라구요. “이 어린왕자가 왼손잡이였을 것”이라구요. 그러고보니 그렇다라구요. 왼손으로 오른쪽 허리춤의 칼을 뽑았을테니까요.

 

 

 

금령총(127호분)은 식리총(126호분)과 함께 경주에서 가장 큰 단독분인 봉황대(125호분·지름 82m, 높이 22m)에 딸린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보통 30살은 넘긴 신라 임금들의 평균수명

이렇게 금관과 금허리띠 등 각종 순금제 장신구를 착장한 이 어린 왕자는 누구일까요.

이 고분의 뒤에 버티고 있는 가장 큰 단독분인 봉황대(신라왕)에 딸린 무덤(배장묘·陪葬墓)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물론 봉황대의 주인공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서도 보이지 않구요.

 

다만 봉황대 및 금령총의 추정연대(5세기말~6세기초)로 가늠해볼까요. 일단 자비왕(458~479)과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 등이 떠오르는군요. 이때는 이미 장자(맏아들) 승계 원칙이 제도화했는지 자비왕은 눌지왕(417~448)의 장자로서, 소지왕은 자비왕의 장자로서 왕위를 나란히 이었구요. 지증왕은 아들이 없던 소지왕의 6촌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른 분이죠.

 

 

 

금령총의 뒤에 서있는 봉황대의 주인공은 추정연대(5세기말~6세기초)로 미루어보아 자비왕(458~479)과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 중 한 분으로 추정된다.

 

 

 

봉황대의 주인공이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 중 한 분이라면 어떨까요. 금령총 주인공은 이 세 분 중 한 분이 낳은 아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죠. 여기서 신라 상고기(기원전 57~기원후 514) 임금들의 평균 수명을 정확히 알 방법은 없어요.

 

그러나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벌휴왕(184~196)과 기림왕(298~310)조차 13년간 왕위에 있었거든요. 또 상고기 22명의 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20년이 되지 않는 왕은 6명에 불과합니다. 그 시대 신라 임금들의 수명이 대체로 30세 이상으로 봐도 무리가 아니겠네요. 그렇다면 금령총 주인공처럼 유아 시절에 사망하는 사례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될까요.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조선총독부 소속 일인학자들이 학술발굴차원에서 조사했다. 그러나 3년전(1921년) 발굴된 금관총 금관 등을 기대한 보물찾기 차원의 조사였던 측면이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8년부터 국립경주박물관이 금령총을 재발굴했습니다. 그 결과 봉황대와, 기존에 이미 조성되어 있던 고분 2기(127-1호, 127-2호) 사이에 금령총을 비집고 끼워 넣은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이상하죠. 지름 30m에 이르는 고분(금령총)이 왜 그 비좁은 틈에 굳이 ‘입주’했을까요.

 

금령총 주인공, 즉 어린 왕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봉황대의 주인공(자비왕·소지왕·지증왕)이 엄청 사랑했던 왕자(정궁의 소생이든 후궁의 소생이든)가 갑작스럽게 죽자 자식사랑을 듬뿍 담아,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지내준 것일 수 있답니다. 기존에 조성된 127-1, 2호보다 앞서 끼워넣을 만큼….(금령총 재발굴 결과 이 3기의 고분이 조성된 후에도 3기의 고분, 즉 127-3, 4, 5호가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또 어떤 왕자 혹은 왕족이 더 묻혔을까. 이 부분의 해석은 훗날로 미뤄야 한다.)

 

 

 

2018~2020년 사이 국립경주박물관의 재발굴 결과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 보다 먼저 조성된 무덤이 2기(127-1호, 127-2호)가 확인됐다. 금령총을 이 두 무덤 사이에 비집고 끼워넣은 것으로 파악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기마인물의 비밀

그렇다면 안타깝게 요절한 이 어린 왕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상당수 연구자들이 하나의 단서로 꼽는 것이 있는데요.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말 탄 인물상’ 두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중 한 점은 주인상(높이 26.8㎝)이라고 하구요. 다른 한 점은 그 주인을 따르는 하인상(높이 23.4cm)이라고 하는데요.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모를 쓰고, 다리 위에 갑옷을 늘어뜨렸습니다.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윗옷을 벗은 맨몸입니다. 등에는 봇짐을 메고 오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길 안내를 맡고 있는 듯합니다.

주인의 말에는 이마의 귀 사이에 뿔 같은 장식이 튀어나오고 각종 말갖춤새가 표현돼있습니다. 반면 하인의 말에는 장식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기마인물형 도기와 함께 상당량의 말갖춤새가 보인다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신라 국왕의 무덤인 봉황대와, 기존에 조성되어 있던 두 고분(127-1, 2호분)보다 나중에 조성된 금령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봉황대 주인공인 신라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어린 왕자가 죽자 급히 봉황대와 기존의 두 고분 사이에 끼워넣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즉 재갈과 안장, 발걸이, 말띠꾸미기, 말다래, 말방울(마령), 발종방울(마탁), 치렛걸이(행엽) 등을 갖춘 최소 3세트의 말갖춤새였습니다. 이 가운데 말 탄 이의 체구를 짐작할 수 있는 안장과 발걸이가 소형인 것이 특징인데요.

 

‘주인공=유아’임을 유추할 수 있는 또다른 단서죠. 또 남은 높이가 56㎝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말모양 도기도 출토되었는데요. 이 말은 ‘메롱’하듯 혀를 쑥 내밀고 있어요. 꼭 어린왕자와 장난을 치듯이 말입니다.

 

5~6살 어린 왕자의 무덤에 웬 말 관련 장신구가 이리 많다는 말입니까. 상상해볼까요. 요즘도 남자 아이들이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 신라의 어린왕자도 당대의 자동차인 말을 엄청 좋아했을 수 있죠. 이 꼬마가 생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말 관련 용품들을 넣어주었겠죠. 연구자 중에는 “어린 왕자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갑작스레 사망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 또하나의 말모양 도기가 출토됐다. 남은 높이가 56cm에 달하는 토제마(흙으로 만든 말)는 마치 ‘메롱~’하듯이 혀를 쑥 내밀고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가장 오래된 초상화?

그런 측면에서 이 기마인물형 도기의 주인상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꽤 있습니다.

왜냐면 다른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토우의 얼굴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똑한 콧날에 뾰족한 턱 때문인지 인상은 다소 날카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살짝 감은 듯한 두 눈과 펑퍼짐한 말을 보면 금세 친근감이 배어난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꼭 누군가를 모델로 만든 느낌이 든답니다. 그렇다면 모델 후보는 무덤의 주인공이 아닐까요.

 

저도 ‘주인=요절한 어린 왕자’라는 견해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요. 어떤 연구자의 말처럼 이 기마인물상은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아닐른지요. 또 주인 옆을 지킨 하인상은 어떨까요. 이번에 발간된 특별전 도록은 “오른손에 장례 의식에 사용되는 방울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례 행위를 주관하는 제사장일 수 있다”고 풀이했습니다. ‘배 모양 그릇’과 ‘등잔 모양 그릇’ 등도 의미심장한 유물입니다.

 

 

 

어린 왕자의 무덤인 금령총 유물 가운데이 고분의 시그니처인 금방울(금령)이 확인됐다. 어린 왕자는 금방울을 허리춤에 찼고, 금관에도 달았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딸랑딸랑 금방울, 흙방울

모든 출토양상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즉 말을 무척 좋아했던 어린 왕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신라왕)는 최고의 장례의식을 마련해주었다, 당대 최고의 장인에게 명하여 왕자와, 그를 저승길로 안내할 하인(혹은 제사장)의 얼굴을 조각한 도기를 만들었다, 저승에서 만날 물길을 무사히 건넜으면 하는 마음으로 ‘배모양 그릇’을, 어두운 공간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말라는 심정으로 ‘등잔 모양 그릇’까지 넣어주었을 것이다, 뭐 이렇게요.

 

유물의 전반적인 사이즈가 앙증맞은 금령총에서는 금방울·흙방울 등 뭔가 아이와 관련된 유물들이 더러 보이는데요.

금령총의 이름이 된 금방울(금령)이 그중 하나입니다. 금방울은 주인공의 허리춤에 매단 것과 금관에 달린 것, 두 종류가 있는데요. 허리춤의 금방울은 표면에 가는 금띠를 마름모 모양으로 붙여 15개의 구획으로 나누었구요. 금관의 금방울은 별도의 구획 없이 금띠를 두 번 돌린 뒤 가운데를 유리로 마감했습니다.

 

 

 

금령총에서 확인된 흙방울 10여점. 10여점 모두에게 아래 위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흙방울도 10점 정도 확인됐습니다. 10점 모두 위 아래를 관통하는 구멍이 있었구요.

CT(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소리를 내는 용도의 흙 구슬이 들어 있었습니다. 말 탄 사람 모양 주자의 오른손에 든 방울 모양과 비슷합니다. <삼국지> ‘동이전·한조’는 “소도(신성한 공간)에서 하늘제사를 지낼 때 북(鼓)과 방울(鐸)을 사용했다”고 했거든요. 고대의 방울은 정치나 의례의 중요한 도구로 쓰였다는데요. 그러나 저는 그냥 어린 왕자가 흔들고 놀았던 금방울, 흙방울로 해석하고 싶어요. 어떻든 늦가을~겨울을 거쳐 내년 새 봄(3월5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금령총 특별전을 1500년전 어린 왕자를 둔 부모의 심정으로 한번 관람해보시기 바랍니다.(이 기사를 위해 국립경주박물관 함순섭 관장, 김대환·이현태·조효식·신광철·곽홍인 학예연구사, 이성현 선생 등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아라키 준·김대환·강정무·이현정·이현우·김현희·김도영·김대욱·김재열·김은경·고은별·이희경·이진옥·오대영,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신라 능묘 특별전 도록 4), 국립경주박물관, 2022

김대환, ‘금령총 발굴조사의 의의’, <신라능묘 특별전 4 금령총 학술 콜로키움>, 국립경주박물관, 2022

김재열, ‘금령총의 장신구 그리고 사람들-현재 관점의 장신구 검토 및 장신구 이용자에 대한 접근’, <신라능묘 특별전 4 금령총 학술 콜로키움>, 국립경주박물관, 2022

이현태, ‘마립간 곁에 묻힌 어린 왕족’,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신라 능묘 특별전 도록 4), 국립경주박물관, 2022

(출처; 요절한 '5살' 어린 신라 왕자의 '초상'?…금령총 주인공은 왼손잡이였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 경향신문.2022. 11. 28.)

 

 

 

 

 

 

 

 

 

금령총은 1924년 일본강점기 때 처음 발굴했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에 걸쳐 재발굴했습니다.

금령총에서는 금관, 금드리개, 가슴걸이, 가는 고리 금귀걸이, 금은팔찌, 금반지, 금허리띠, 고리자루 큰 칼(환두대도), 금방울(금령), 흙방울, 기마인물형도기 2점(국보), 각 종 말과 무기 관련 유물, 말모양 도기 등이 나왔습니다.

 

 

 

쪽샘44호분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에 걸쳐 발굴했습니다. 쪽샘44호분에서는 금동관, 금드리개, 가슴걸이, 굵은 고리 금귀걸이, 금은유리팔찌, 금은반지, 은허리띠, 은장도, 행렬도 도기, 바둑돌, 비단벌레 장식 말다래, 머리카락, 삼색 직물, 돌절구와 공이 등이 나왔습니다. 

 

 

 

금령총의 주인공은 키가 90cm정도인 5~6살 무렵의 왕자로 추정해 볼 수 있고요, 지증왕(재위 500~514) 연간의 왕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쪽샘44호분의 주인공은 키가 130㎝정도인 ‘5세기 말 사망한 10세 가량의 신라공주’로 특정되고요, 소지왕(재위 479~500)대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얼마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쪽샘 44호분의 10년 발굴성과를 정리한 시사회를 열었는데요.

2014년 시작된 발굴은 황남대총 조사(1973~75) 이후 40여년만에 진행된 장기프로젝트였죠.

 

신라의 독특한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완전해체하고 그 전모를 밝혀보겠다는 야심찬 학술조사였습니다.

한 고분을 10년간 발굴한 것도, 발굴현장을 돔으로 씌워 현장을 보호하고, 일반 공개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조사된 금령총은 5세 전후의 어린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4~2023년 조사된 쪽샘 44호분은 10세 전후의 공주 무덤으로 판단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라 공주의 현현

발굴이 진행되면서 노출유구와 출토유물은 건건이 화제를 뿌렸습니다.

2019년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안악3호분·무용총)을 연상케하는 행렬도가 새겨진 도기가 출토되었습니다.

1년 뒤(2020)에는 더욱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죠.

금동관(1점)·금드리개(1쌍)·금귀고리(1쌍)·가슴걸이(1식)·은허리띠 장식(1점) 등 장신구 세트가 주인공이 착장한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고분의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돌무지의 규모(16~19m)가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왕릉급 고분과 맞먹을 정도거든요. 돌무지의 무게가 5t 트럭 198대분(992.41t)에 이릅니다.

 

 

 

불과 340m 떨어져 조성된 금령총과 쪽샘 44호분. 쪽샘 44호분은 5세기 말, 금령총은 6세기 초에 조성된 고분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게다가 금동관에 매달린 순금의 드리개 장식은 ‘왕릉이 확실한’ 황남대총 남분에서 보입니다.

쪽샘 44호분의 출토품은 한결같이 ‘아담사이즈’였습니다. 금동관의 높이(23.2㎝)와 지름(15㎝)가 그렇습니다.

 

황남대총 북분(높이 27.3㎝, 지름 17㎝)·금관총(27.7㎝, 19㎝)·천마총(32.5㎝, 20㎝·이상 금관) 등에 비해 상당히 작은 편이고요. 출토된 허리띠의 좌우 폭(34㎝) 역시도 ‘스몰사이즈’입니다. 여성의 표지유물인 은장도도 출토됐습니다.

 

그래서 2020년 당시에는 주인공을 ‘150㎝ 안팎의 공주’로 추정했습니다.

공주 추정 인물의 발치 쪽에서 확인된 바둑돌 860여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죠.

 

저도 각종 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공부해가며 ‘신라 바둑공주의 존재 가능성’을 기사로 작성한 바가 있습니다. 지난해(2022) 4월에는 발굴 현장에서 ‘천년수담-신라바둑 대국’ 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10살 가량의 공주무덤으로 추정되는 쪽샘 44호분과 5살 가량의 왕자무덤으로 판단되는 금령총의 비교표. 봉분 크기가 비슷하고, 유구와 유물 사이즈가 작은 것을 빼면 무덤구조와 출토유물의 구성과 내용이 완전히 상반된다.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 제공

 

 

 

■신라 공주의 헤어스타일

이런 ‘발굴 히스토리’가 있었는데요. 요 며칠전 10년의 발굴을 끝내고 성과를 총정리한 시사회가 열린겁니다.

그동안 출토된 유물을 보존처리해서 완벽하게 복원한 결과물이 눈에 띄더군요.

그중 ‘비단벌레 꽃잎장식 직물 말다래’가 돋보이더라고요. 엄청 화려합니다. 그러나 복원품을 보면 175개의 금동달개가 들뜬채(튀어나오게) 매달려 있습니다. 생전에 말을 타면서 밑에 깔아둔 실용품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각종 유물에 사용된 직물의 복원품도 화려합니다.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3가지 색상으로 무늬를 만든 삼색경금(三色經錦)이 돋보였습니다.

 

 

 

쪽샘 44호분의 출토품은 한결같이 ‘아담사이즈’였다. 금동관의 높이(23.2㎝)와 지름(16.5㎝)은 5살 가량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을 제외하고는 작은 편이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러나 이번에 새롭게 밝혀낸 연구 성과 중 으뜸은 역시 ‘주인공’ 이야기라 할 수 있어요.

우선 금동관 주변에서 폭 5㎝ 가량의 머리카락 다발을 확인했습니다. 분석결과 황(S)성분이 검출됐고, 주변에 두개골 조각을 확인했습니다. 헤어스타일도 파악했습니다. 1cm 내외 두께로 모발을 모아 직물로 감거나 장식한 흔적으로 보입니다.

 

 

또 2020년에는 주인공(신라 공주)의 키를 150㎝ 정도로 추정한 바 있는데요. 당시에는 장신구의 착장 상태로 얼추 계산한 건데요. 이번에 목관 바닥 등을 정밀조사해서 주인공의 키를 130㎝로 수정했습니다. 출토 유물의 크기 등을 종합한 결과 나이는 ‘10세 전후’로 추정했습니다. 쪽샘 44호분의 주인공은 ‘5세기 말 사망한 10세 가량의 신라공주’로 특정된 겁니다.

 

 

 

■불현듯 소환되는 5살 왕자

‘10세 신라공주’라는 대목에서 불현듯 떠오른 경주 고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금령총입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6세기초 사망한 5살 가량의 어린 왕자’로 추정됩니다. 금령총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발굴됐는데요.

놀라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금관을 비롯해 귀고리·허리띠·목걸이·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습니다.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국보)도 2점 나왔습니다. 또 금관총(1921년 발굴)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금방울(금령)이 출토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 ‘금령총’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금령총=5살 어린 왕자’로 특정한 근거가 뭘까요.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비단벌레 장식 말다래. 화려하지만 실용적이지는 않았다. 금동달개 장식을 세워 장식한 것이 그 증거다. 장례용으로 묻어주었을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우선 신라 고분 주인공의 성별은 주로 ‘귀고리와 칼’의 착장여부로 판단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는고리 귀고리-큰 칼=남성’, ‘굵은고리 귀고리-작은 칼(은장도 등)=여성’으로 추정합니다.

금령총 주인공의 머리쪽에는 ‘가는고리 귀고리’가, 허리춤에는 ‘장식달린 둥근고리 큰칼’(환두대도)이 보였답니다.

그래서 남성으로 추정한 겁니다. 금령총 주인공의 나이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주인공이 누워있던 자리에서 노출된 각종 장신구로 몸집을 추정할 수 있죠. 쪽샘 44호분처럼….

그러고보니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90㎝를 넘지 않았습니다.

 

 

 

금동관, 은허리띠, 팔찌, 금동신발, 말다래 등에서 확인된 직물. 그중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등 3가지 색으로 무늬를 만든 삼색경금이 화려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인공의 키가 90㎝ 안팎이었다는 겁니다. 금관의 크기도 작았습니다. 주인공이 착장한 금관 지름(15㎝)이 다른 고분의 출토품(천마총 20㎝, 금관총 19㎝, 서봉총 18.4㎝)보다 작았습니다. 머리통이 그만큼 작았다는 겁니다.

 

금령총의 금허리띠를 봐도 그렇습니다. 허리띠의 ‘꾸밈 쇠붙이’가 23점에, 길이는 74㎝ 정도인데요. 천마총 금허리띠(과판 44점, 길이 125㎝)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죠. 천마총은 왕 혹은 왕족인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거든요.

 

 

그렇다면 천마총과 비슷한 시기(6세기초) 조성된 금령총이 어린 나이에 요절한 왕자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여기에 90㎝ 정도의 키를 토대로 나이를 추론해볼까요. 2001년 경기 양주에서 17세기 중엽 미라 한 구가 발굴됐는데요.

 

미라 신장은 99.4cm, 치아로 측정된 연령대는 5.5세 전후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환경은 달라지겠죠.

그러나 금령총 주인공의 키(90cm)라면 5~6살 무렵의 왕자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쪽샘 44호분 공주(추정)의 머리맡에서 나온 머리카락. 분석결과 황(S) 성분이 검출됐고, 주변에 두개골 조각이 확인됐다. 1㎝ 내외 두께로 모발을 모아 직물로 감거나 장식한 흔적으로 보인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순장이 있고(금령총), 없고(금령총)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10살 공주(쪽샘 44호)와, 5살 왕자(금령총)의 무덤을 비교해볼까요. 두 고분은 340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무덤 조성 시기는 대체로 ‘5세기말(쪽샘 44호)’와 ‘6세기초(금령총)’로 추정됩니다.

출토 토기류와 금관(금동관)의 양식 등으로 가늠해본 연대입니다.

 

 

 

쪽샘 44호 공주(추정) 무덤에서는 주인공의 곁에 조성된 빈공간에는 귀고리가 수습됐다. 순장자의 것일 가능성이 짙다. 그 뿐이 아니라 주인공의 주변 석단에서도 금귀고리와 칼 등이 흩어져 있었다. 다른 순장자의 것이 분명하다. 순장자는 5명 이상에 이를 수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엇보다 연대를 가르는 극적인 지표가 있는데요. 순장 유무입니다. <삼국사기>는 “502년(지증왕3) 국법으로 순장을 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금령총에는 순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쪽샘 44호분에서는 5~6명이 희생된 것 같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옆자리에 공백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귀고리가 보였습니다. 누군가 순장된 흔적이죠.

 

 

생전에 주인공을 키우거나 돌본(모신) 유모(혹은 보모)나 시종(시녀)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머리맡 석단에서도 금귀고리 등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순장자의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쪽샘 44호의 주인공이 조금 더 살아 502년 이후에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5~6명이라는 아까운 인명이 ‘순장’이라는 야만적인 풍습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겠죠. 주인을 위해 속절없이 따라죽어야 했을 가련한 순장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쪽샘44호분의 주인공은 유물조합이나 순장유무 등으로 가늠해보면 5세기 말의 공주급으로 추정된다. 그 경우 소지왕(재위 479~500) 연간의 공주가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소지왕의 딸과 지증왕의 아들

‘10살 공주’와 ‘5살 왕자’가 어느 임금의 자녀였는지 특정할 수 있을까요.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무령왕이요”하는 명문 지석이 나왔다면 또 모르죠. 그러니 100% ‘누구의 왕자, 공주’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쪽샘 44호분이 5세기말 조성되었다면 그 시대를 다스린 임금이 누구냐, 그 분은 소지왕(재위 479~500)입니다.

5세기 후반 21년이나 신라를 다스렸다면, 쪽샘 44호분은 소지왕대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금령총의 주인공, 즉 ‘5살 왕자’는 누구였을까요. 순장제도를 국법으로 금한 지증왕(500~514)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증왕이 순장제를 없앤 뒤 시범케이스로 단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는 무덤(금령총)을 조성했을 수 있습니다.

 

 

 

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령총의 주인공은 지증왕 연간의 왕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진자료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사고사한 5살 왕자, 병사한 10살 공주

또하나 의미심장한 착안점이 두 고분에 있다는군요. 즉 금령총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고요.

반면 쪽샘 44호분의 10살 공주는 그래도 죽음을 준비할 시간 여유를 갖지 않았을까, 즉 병으로 죽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2018년부터 금령총을 재발굴했는데요.

그 결과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커서 왕릉이 분명한 봉황대(고분)와 기존에 조성된 고분 2기 사이에 금령총을 비집고 끼워 넣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상하죠. 지름 30m에 이르는 고분(금령총)을 왜 그 비좁은 틈에 굳이 ‘입주’시켰을까요.

 

 

 

금령총에는 순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증왕이 순장을 국법으로 금한 직후 시범케이스로 조성한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사진자료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게다가 그 정도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라면 돌무지를 조성할 때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 기둥 시설을 박아놓는데요.

그러나 금령총의 경우 그런 기둥시설이 없었습니다. 급히 조성했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금령총 주인공, 즉 어린 왕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즉 봉황대의 주인공(소지왕?)이 사랑했던 왕자(정궁의 소생이든 후궁의 소생이든)가 갑작스럽게 죽자 자식사랑을 듬뿍 담아,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지내준 것일 수 있답니다. 기존에 조성된 127-1, 127-2호의 앞에 끼워넣을 만큼….

 

반면 쪽샘 44호분은 주변의 고분과 중복없이 안정적으로 조성되었는데요. 비록 10살 안팎의 어린 공주였지만 죽음을 맞이할 시간이 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병사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정해진 엄격한 매뉴얼에 따라 무덤을 조성하고 유물을 차곡차곡 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금령총’ 재발굴 결과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 보다 먼저 조성된 무덤이 2기(127-1호, 127-2호)가 확인됐다. 금령총을 이 두 무덤 사이에 비집고 끼워넣은 것으로 파악됐다. 무덤주인공이 사고사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바둑돌과 돌절구

같은 왕자·공주라도 신분은 왕자가 더 높았을까요.

5살 왕자(금령총)는 금관을, 10살 공주(쪽샘 44호)는 금동관을 쓰고 나왔으니까요.

또한 두 고분의 ‘시그니처 유물’도 흥미롭습니다.

쪽샘 44호분의 경우 앞서 밝힌 ‘행렬도 토기’와 ‘바둑돌’, ‘비단벌레 장식 말다래’, ‘1500년전 머리카락’, ‘삼색 직물’ 등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중에는 10세 공주 무덤에서 출토된 다소 의외의 유물인 ‘바둑돌’이 눈에 띕니다.

 

 

 

쪽샘 44호분은 주변의 고분과 중복없이 안정적으로 조성되었다. 비록 10살 안팎의 어린 공주였지만 죽음을 맞이할 시간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병사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요즘 세계바둑계를 풍미하고 있는 최정 9단이 연상되는데요. 신라판 ‘최정 9단’이라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잖아요.

발굴단에서 ‘미는’ 유물이 더 있는데요. 그것이 돌절구와 공이입니다. 돌절구는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출토예가 있는데요.

물론 돌절구의 크기와 함몰부의 용량으로 보아 상징적 의미로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러나 약제를 조제하는데 사용한 약용 절구였다면 어떨까요. 결국 병 때문에 죽은 어린 공주를 위해 생전에 약제를 조제할 때 사용했던 절구와 공이를 묻어준 것이 아닐까요.

 

 

 

금령총의 특징 유물인 금방울과 흙방울. 5세 왕자가 흔들고 놀았을 장난감이 아니었을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기마인물형 도기의 모델

5살 왕자의 무덤인 금령총은 어떨까요. 첫번째 특징적인 유물이 금령, 즉 금방울입니다.

금방울은 주인공의 허리춤에 매단 것과 금관에 달린 것, 두 종류가 출토되었는데요.

금관의 금방울은 금띠를 두 번 돌린 뒤 가운데를 유리로 마감했습니다. 흙방울도 10점 정도 확인됐습니다.

10점 모두 위 아래를 관통하는 구멍이 있었구요. 그 속에 소리를 내는 용도의 흙 구슬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5살 어린 왕자가 흔들고 놀았던 금방울, 흙방울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금령총 만의 시그니처 유물은 ‘기마인물형(말탄 인물상) 도기’일 수도 있습니다.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형 도기(국보) 중 주인상이 금령총의 주인공인 5세 어린왕자를 모델로 제작했다는 연구가 있다. 따라서 이 도기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왕자와 그를 저승길로 안내할 하인(혹은 제사장)의 얼굴을 빚은 것으로 파악하는 연구가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5살 어린 왕자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기마인물형 도기는 두 점입니다. 한 점은 주인상(높이 26.8㎝)이라고 하구요. 다른 한 점은 그 주인을 따르는 하인상(높이 23.4cm)이라고 하죠.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모를 쓰고, 다리 위에 갑옷을 늘어뜨렸습니다.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윗옷을 벗은 맨몸입니다. 등에는 봇짐을 메고 오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이 기마인물형 도기가 마치 누군가를 모델로 만든 인상이 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델은 금령총의 주인공은 5살 어린 왕자일 가능성이 있다는거죠. 저승으로 떠나는 왕자를 하인이 안내하며 따라가는 형국이죠. 국법으로 엄금한 순장제도를 이런 식으로 대체했을 수도 있습니다.

 

 

 

쪽샘 44호분의 특징유물 중 바둑돌 860여점이 눈에 띈다. 공주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배운 것일까. 돌절구와 공이가 출토됐다. 약절구일 가능성이 있다. 병 때문에 죽은 어린 공주를 위해 생전에 약제를 조제할 때 사용했던 절구와 공이를 묻어준 것일 수도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판 자동차 말을 사랑한 왕자?

또하나 금령총에서는 유독 말과 관련된 유물이 많았는데요. 재갈과 안장, 발걸이, 말띠꾸미기 등 최소 3세트의 말갖춤새가 부장되어 있었죠. 이 가운데 말 탄 이의 체구를 알 수 있는 앞가리개(안장)과 발걸이가 소형인 것이 특징인데요.

이 말갖춤새의 주인공이 어린아이였음을 알 수 있는 또하나의 단서죠. 또 남은 높이가 56㎝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말모양 도기도 출토되었습니다. 이 말은 ‘메롱’하듯 혀를 쑥 내밀고 있어요. 꼭 어린왕자와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요즘도 남자 아이들의 경우 자동차나 중장비를 엄청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 5살짜리 어린왕자도 말을 엄청 좋아했을 수 있죠. 이 꼬마가 생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말 관련 용품들을 넣어주었겠죠. 그래서 “어린 왕자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갑작스레 사망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물론 고고학 유물을 토대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두 무덤은 공간으로는 340m, 시간으로는 30~40년의 간격을 두고 조성됐죠. 그러나 10살 공주, 5살 왕자의 그 짧디짧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1500년 시공을 초월해서 고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참 10년 발굴이 끝났다는데 발굴현장을 보호하고 일반공개의 장이 되었던 돔구조물은 어찌 되는 건가요. 묻고 싶습니다.

(이 기사를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최장미 학예연구관·심현철 특별연구원·정인태 학예연구사,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쪽샘 44호분>(발굴조사자료집), 202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묘>, 기자간담회 설명 자료집, 2020

김대환, ‘금령총 발굴조사의 의의’, <신라능묘 특별전 4 금령총 학술 콜로키움>, 국립경주박물관, 2022

김재열, ‘금령총의 장신구 그리고 사람들-현재 관점의 장신구 검토 및 장신구 이용자에 대한 접근’, <신라능묘 특별전 4 금령총 학술 콜로키움>, 국립경주박물관, 2022

신광철, ‘재발굴을 통해 본 금령총의 구조와 성격’, <국학연구> 77집,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2021

이현태, ‘마립간 곁에 묻힌 어린 왕족’,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신라 능묘 특별전 도록 4), 국립경주박물관, 2022

 

 

 

(출처; "5살 왕자는 낙마사, 10살 공주는 병사"…금령총·쪽샘 44호 주인공의 사인[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3.7.24.)

 

 

 

 

 

<자료출처>

 

 

 

 

 

경주 금령총서 최대규모 56㎝ '혀 내민 말 모양' 토기 발굴 - 경향신문 (khan.co.kr)2019.09.30 

 

 

 

신라금관·유리잔 나온 무덤이라고?…알고 보면 더 중요한 금령총 (daum.net)2022. 11. 21

 

 

 

금령총 기마인물상은 요절한 어린 왕자?[이기환의 Hi-story](60) (daum.net)2022. 11. 29.

 

 

 

요절한 '5살' 어린 신라 왕자의 '초상'?…금령총 주인공은 왼손잡이였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2. 11. 28. 

 
 

 

 


코로나를 쓴 신의 대리인 ‘샤먼’ (hani.co.kr)2020-03-27

 

 

 

신라 황금 보검이 왜 카자흐스탄에서? (hani.co.kr)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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