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신라(사라) 고고학 (6) 경주 월성유적 본문
경주 월성유적은 둘레 2340m, 면적 20만㎡이고 101년 축조해 935년 통일신라가 무너질 때까지 800여년 동안 왕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1915년 처음으로 성벽 일부가 발굴된 이후,
2014년 12월12일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단이 발굴을 시작하여 안팎에서 학술적 의미가 큰 명문 있는 목간·기와·토기부터 배·방패·그릇·국자·빗 등 목제품, 토우, 금동 장식물, 철제물, 육지와 바다동물 뼈까지 3~10세기 유물 10만여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벽은 석회와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는데요, 서쪽 성벽에서 발견된 남녀 인골 2구는 ‘인주 설화’를 보여주는 첫 사례입니다.
반달 모양을 닮아 반월성으로도 불린 월성 전경.
신라 건국 후 첫 궁성(宮城)은 ‘금성(金城)’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기원전 37년 금성을 쌓았다고 한다. 금성 위치를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월성이 축조되자 금성은 점차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월성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에 남아 있다. 성을 쌓은 시기와 관련, <삼국사기>에는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이라 했다” “파사왕 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 혹은 재성(在城)이라 불렀는데 그 둘레가 1023보다”라고 기록돼 있다.
‘파사왕 22년’은 101년에 해당한다. 또 <삼국유사> 등에는 보수·수리 기록도 보인다. 물론 월성 안팎에는 왕궁과 각종 행정기관, 문, 누각 등 여러 용도의 건물이 있었다. 신라의 핵심공간이던 월성은 신라가 무너지면서 시나브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반달을 닮은 지형으로 반월성 등으로도 불린 월성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처음으로 성벽 일부가 발굴된 이후 성벽과 해자(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바깥을 따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 또는 연못) 등에 대한 부분적 조사가 이어지다 2014년 마침내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성벽·해자는 물론 월성 내부도 조사 대상이다. 주변에 국립경주박물관, 월지(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이 있는 월성은 현재 바깥 둘레가 2340m, 면적 20만㎡다.
월성은 101년에 쌓아 935년 통일신라가 무너질 때까지 800여년 동안 왕들이 있던 곳이다. 그동안 신라시대 왕릉·무덤·사찰터 등이 조사돼 많은 유물·유구가 나왔다. 하지만 천년왕국 신라 왕경의 최고 중심지인 월성, 특히 성 내부는 정작 발굴된 적이 없다. 엄두를 내기 힘들어서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조선시대에 월성이 ‘방치’되면서 신라 역사문화가 땅속에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에 걸맞게 월성 안팎에서는 3~10세기에 이르는 10만여점의 다양한 유물, 왕궁·관청으로 보이는 건물터들이 확인되고 있다.
■ 빗·목간·인골·씨앗·벼루·토우…
신라인들이 기와·토기에 새겨놓은 글자(명문)는 귀중한 사료다.
그동안 월성 해자와 성벽, 내부 일부에선 10만점이 훌쩍 넘는 유물이 출토됐다. 우선 명문이 보이는 목간·기와·토기류가 있다. 금·옥 등으로 만든 장식물과 달리 대중적 관심은 적지만 명문 자료는 신라인들이 당대에 쓰거나 새긴 1차 사료여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
종이가 귀해 나무조각에 문자를 쓴 6~7세기대 목간이 해자에서 많이 나왔다. 목간 내용은 세금 징수나 행정 명령, 불경, 물품표, 사람 이름과 관직 등 다양하다.
그중 한자를 우리말로 표기한 이두가 적힌 목간, ‘병오년’(526년 또는 586년)이란 제작 시기 등이 기록된 목간은 지방 사람을 동원했다는 내용으로 당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도 소중하지만 명문이 있는 토기, 기와는 가치가 더 크다. 막새, 귀면(도깨비)기와 등 여러 종류의 기와가 나왔는데 귀면기와의 존재는 격이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뜻한다.
또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명 기와는 의봉사년(679년·문무왕 19년)이라는 제작 시점을 알려주고, ‘재성(在城)’명 기와는 <삼국사기>에 월성과 함께 언급됐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사용했을 토기도 쏟아졌다. 3~10세기에 제작된 토기들은 당대 생활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다. 그중에는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말하는 ‘동궁(東宮)’, 사람 이름으로 보이는 ‘도부(嶋夫)’ 등 갖가지 명문 토기편들도 있다. 4~5세기대의 가야·일본계 토기와 비슷한 토기도 출토돼 교류 결과물인지 자체 생산품인지 궁금증을 더한다.
의례용으로 사용된 배 모양 목제품.
신라인이 쓰던 머리 빗.
배·방패 모양은 물론 그릇과 국자, 빗, 건축부재 등 목제품들도 귀한 자료다. 길이 38.6㎝, 폭 5.0㎝, 높이 4.2㎝ 크기로 실제 배를 축소한 배 모양 목제품은 불에 타거나 가공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방패 모양 목제품은 2점인데 이중동심원·띠 모양을 그린 후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채색을 했다. 의례용으로 보인다.
당시 중앙정부가 인공조림까지 하며 관리하던 잣나무로 만들어진 이 작은 유물들은 1600여년 전 월성에서 벌어진 어떤 의례에 사용됐을까? 상상력을 자극한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의 다리들.
최상위 계층이 사용한 벼루도 주목받는다. 그동안 신라 벼루는 토제·석제·옻칠을 한 목제 등으로 30여곳에서 발굴됐는데, 월성 내부 한 건물터에서는 조각을 포함해 토제 벼루 120여점이 무더기로 발견돼 해당 건물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토성인 월성 성벽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성벽 발굴도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성벽의 견고함을 위해 석회와 식물성 재료 등을 사용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올리는 등 여러 방안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월성 성벽에서 발굴된 신라인 남녀 유골.
특히 2017년 서쪽 성벽 기초부분 속에선 1600여년 전 살았던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문헌으로 전해오던 ‘인주 설화’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첫 사례로 여겨져서다.
인주(인간 기둥) 설화는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묻거나 기둥으로 세우면 건물 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역사서 <고려사>에 언급돼 있다. 인골들 발치 쪽에선 5세기 전후 만들어진 토기 4점이 나와 성벽 축조 시기 등도 확인됐다.
천년왕국 신라의 왕들이 대를 이어 머물던 왕궁 터인 경주 월성(사적 16호) 안팎에서는 10만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흙으로 인물·동물 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든 토우들이다. 토우는 1600여년 전 신라 사람들의 생활문화상을 엿보게 한다.
흙으로 만든 인물상인 토우들도 흥미롭다. 춤을 추거나 말을 탄 사람,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이나 염소·돼지 같은 동물상 등 다양한 형태의 토우들은 신라인들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우 중 화제를 모으는 것은 터번을 쓴 토우다.
학계에서는 고대 중앙아시아를 근거지로 한 상인들로 동서문명을 오간 소그드인으로 본다. 5세기 중후반~6세기대 제작된 토우는 신라와 서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이 밖에도 월성 안팎에서는 금동불상 등 금동장식물과 도끼·칼 같은 철제물, 가락바퀴·그물추 등 직물 제작이나 어로 활동 관련 유물, 벼와 밀·콩·조 등의 곡류와 복숭아·자두·머루 같은 과실류 등 갖가지 식물의 씨앗도 나왔다.
또 곰·멧돼지·소·개·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상어·돌고래류·참돔 같은 해양생물 뼈도 확인됐다. 신라인의 먹거리 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런 작은 유물들까지 확인되는 것은 발굴조사단이 발굴 현장에서 나오는 모든 흙을 물로 체질까지 하며 세심하게 살핀 덕분이다.
소그드인으로 보이는 토우.
■ 어떤 유물이 얼마나 있을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월성 내부의 경우 A~D 4개 구역으로 나눈 뒤 C구역 발굴을 먼저 시작했다. 10여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에서 건물지가 집중 분포돼서다.
2015~2016년에는 월성 내부 지층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시굴갱(테스트피트) 조사를 했다. 지표에서 약 3m 깊이에서 9개층이 나타났는데 그중 무려 7개가 문화층(자연적 퇴적층과 달리 인공적 활동으로 유물·유구가 있는 층)이다.
3~10세기 전후로 통일신라~신라시대 문화층이 존재하는 것이다. 불과 지표 30여㎝ 아래에 조선·고려시대 문화층은 없이 곧바로 1000여년 전 통일신라 말기 건물터가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에서는 여러 건물터와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3호 건물터는 회랑까지 있는 대규모다. 당시 우물터도 확인돼 나무 두레박 2점을 비롯, 토기·기와·구슬 등이 발굴됐다.
문헌상으로 볼 때 월성은 소지왕·진평왕·문무왕 등 여러 대에 걸쳐 증축·보수 등이 이뤄졌고, 영토 확장 등으로 행정업무가 급증하면서 월성 바깥에도 건물들이 들어섰다.
(출처;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 발굴조사 5년째..오늘은 또 뭐가 나올까 [도재기의 천년향기] (daum.net)경향신문. 2019. 11. 8.)
월성 조사구역 도면. 모두 네개 지구로 나뉘어지는데, 에이(A)지구 측면의 서성벽 서문터(점선 부분)에서 인골이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출처; 신라 성벽 속에서 ‘인간 제물’ 흔적 또 나왔다 (hani.co.kr)한겨레. 2021-09-08)
(출처; 30여년전 경주 월성서 나온 인골 20여구 미스터리 풀리나 (daum.net)연합뉴스.2021. 9. 7.)
2024년 10월 2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소장 황인호)는 최근 경주 교동 42번지 일대(월정교 옆)의 월성 서남쪽 지점에서 발굴 조사를 벌여 3세기대 선조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던 취락의 흔적들과 건물 자리 조성 공사의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4~10세기 신라의 왕성이 들어섰던 경북 경주 월성 유적(국가사적)에서 신라의 모태인 3세기 사로국의 건물 터가 처음 발견됐다. 월성에서 발견된 건물 터 중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월성 성곽을 본격적으로 쌓기 전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모래땅 위에 터를 닦는 토목공사 자취도 드러났고, 제례의 희생물로 쓰였다고 추정되는 수캐 한마리 온전한 골격까지 나왔다.
연구소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중엽까지 경주 일대에서 존속한 초기국가 단계의 작은 나라로 진한 12국 중 하나였던 사로국 사람들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로국 시기 거주 형태가 월성 내부에서 조사된 것은 최초의 사례라는 설명이다.
불탄 의례 유적 안에서 발견된 수컷 개의 뼈. 머리와 몸 전체 골격이 온전한 상태로 출토돼 제례를 치르면서 희생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반도 고대 유적에서는 개를 제물로 바친 전례가 없어 눈길을 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조사가 진행된 구역은 ‘월성 에이(A)지구’로 불리는 월성 유적 서남쪽 가장자리다. 원래는 월성 유적을 끼고 흐르는 남천 기슭의 연약한 지반에 모래층이 쌓인 곳이었다. 조사단은 발굴 과정에서 3세기 초중반 이 지점에 취락을 만들기 위해 높이 1.5m가량 흙을 쌓고 다지는 성토 작업이 진행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벼의 겉껍질, 식물 종자, 조개껍질 등이 뒤섞인 유기 물질을 성토 공사 작업 공정별로 달리 투입해 썼다는 것도 드러났다.
장기명 연구사는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월성 성벽은 4세기 축조됐다는 게 확실하게 입증됐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그보다 100여년 앞선 시점에 이미 권력층이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지반 흙을 다지는 대규모 토목작업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3세기 사로국 시대에도 월성 일대가 경주에서 중심 구역이었음을 일러주는 중요한 근거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월성 서남쪽 지점의 발굴 유적을 공중에서 내려다본 전경 사진. 북쪽의 의례 유구에서 개뼈가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취락 유적 들머리에서는 특별한 의례를 치른 뒤 불 질러 태운 것으로 보이는 건물 공간 흔적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온전한 골격을 갖춘 수컷 개 한마리의 뼈들이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의례용 건물 터는 직경 6m가량의 동그란 평면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들었고, 내부는 화재로 새카맣게 탄 모습을 띠고 있다.
출토된 개뼈는 놓임새로 보아 의례용 제물로 바친 정황이 분명하다고 조사단은 추정했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성곽이나 수로 등 도시 유적에 제사를 지낼 때 소와 말을 제물로 쓰는 사례가 종종 발견되지만, 개를 제물로 쓴 유례는 거의 없다.
불탄 의례 공간 추정 터에서 나온 토기들. 종류별로 2~3점씩 짝을 맞춰 15점이 나왔는데, 의례 용도로 짐작된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출처; https://v.daum.net/v/20241002154521400 한겨레. 2024. 10. 2.)
<참고자료>
신라 천년 왕성, 사람을 제물로.. 성벽서 인골 출토 (daum.net)2017.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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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41024050002582 경향신문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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