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신라 고고학 (3) 경주 금관총 본문
금관총 금관은 1921년 발굴된 첫번째 금관(국보 87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발견된 경주 '금관총 금관'(국보 제98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1921년 금관총 발굴은 초기에 고고학자 대신 일반인이 유물 수습에 나서 유물 배치도마저 작성되지 않는 등 부실하게 이뤄졌다.
1921년 사상 처음으로 발굴된 신라금관. 이 발굴은 당시 경주에서 대서소를 운영하던 모로가 히데오(오른쪽)의 주도로 3~4일간 졸속으로 마무리됐다.|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 제공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발굴은 대서소 주인이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오른쪽 사진)이 주도했다. 1921년 10월19일 경북도지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보고서는 이미 ① 9월27일 현장을 발견한 뒤 ②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맡겨 ③채굴(발굴)을 시작하고 ④29일까지 모든 채굴을 끝냈다고 적시했다.|국립중앙박물관의 <경주 금관총>(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22집), 2016에서
1921년 9월24일 아침 경주 노서리 박문환씨의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 발견모습을 그린 삽화. 이곳에서 사상 최초로 금관이 확인됐다.|<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1926년)에서
그러면서 발굴품 목록을 보고했는데, ‘59개의 굽은 옥이 달린 순금제 보관(금관) 1점과, 39개의 장식이 달린 허리띠 1조, 순금제 반지 12점, 순금제 귀고리 5점, 순금제 띠드리개 1점 등…’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금관총 발굴현장. 아마추어가 발굴을 주도했기 때문에 현장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유물 출토 상황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금관총 보고서에서
이렇게 ‘아마추어’끼리 지지고볶은 위험천만한 발굴은 단 3~4일 만에 끝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거죠. 뒤늦게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정식발굴작업이 펼쳐졌는데요. 발굴 후 총독부가 펴낸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1926년) 역시 이런 사실을 적시합니다.
“우연히 발견되어…모로가 히데오(비전문가)의 감독 아래…풍부한 유물이 겨우 1~2평 남짓되는 곳에서 쌓여있는 것을 단시일 내에 캐내야 했기에…출토상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유물이 적지 않았다.”
또 “(주로 경험이 일천한 발굴자인) 모로가와 오사카 등의 기억과 각서에 의존해서 되살렸지만 각자의 소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 이 획기적인 발굴은 이렇게 ‘비전문가의 손에서 뚝딱 해치운’ 졸속 발굴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안게 됩니다.
금관총에서 확인된 금관 이외의 순금제 유물들. 이중 금제 허리띠는 국보 88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대구의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소장한 금관총 유물 8점. 금관총 발굴책임자가 모로가였기 때문에 모로가가 금관총 유물의 반출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출처; 사상 첫 신라 금관 발굴자는 아마추어 '대서소' 주인이었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경향신문.2021. 3. 8.)
○ 무덤 주인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동안 학계에서는 금관총에서 주로 여성이 착용하는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태환이식)'가 나온 데다 남성이 착장하는 '둥근 고리 큰칼(環頭大刀·환두대도)'이 허리 부위가 아닌 목관 위쪽에 따로 부장된 점을 들어 무덤의 주인이 여성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봤다.
그러나 2013년 7월 중앙박물관이 우연히 금관총 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무덤의 주인이 남자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 금석문 등을 뒤져봐도 금관총이 만들어진 마립간 시대(내물왕∼지증왕)에 여자에게 왕 칭호를 붙인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또 태환이식이 여성용이라는 것도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신라 남성들도 귀고리를 착용한 흔적이 있다"며 "시신을 여자로 보면 이사지왕의 칼이 고분 안에 왜 들어갔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금관총에서 발굴됐던 둥근 고리 큰칼 끝(아래 사진 원 안)에서 2년 전 발견된 이사지왕(尒斯智王·위 사진)이란 글자. 이 때문에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 금관총=이사지왕릉?
경주평야에서 숱한 신라 고분이 발견됐지만 피장자를 밝혀주는 명문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금관총 등 일부 신라 고분은 왕의 무덤이 맞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환두대도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 맞다면 금관총이란 이름은 이사지왕릉으로 바꿔야 한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환두대도가 피장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부장된 점과 이사지왕이 남성 왕의 호칭인 점을 감안할 때 환두대도는 이사지왕의 것이지만 금관총 피장자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사지왕이 자비왕이나 소지왕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반면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윤 교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관 장식에 적힌 '夫' '十'자와 같이 금관총의 이사지왕 명문과 함께 발견된 '尒' '十' '八'자도 왕의 존칭을 축약해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피장자가 이사지왕이라 해도 실제 신라의 왕(마립간)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사지'라는 이름의 신라 왕은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금관총의 크기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등에 비해 왜소하다.
윤 교수는 "신라 때 왕이라는 명칭은 마립간뿐만 아니라 유력한 왕족도 사용할 수 있었다"며 "법흥왕의 동생으로 왕위계승 서열 2위였던 사부지왕이 갈문왕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 금관총에서도 순장 있었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에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 지증왕(437∼514)이 금지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문에 지증왕 재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금관총에도 순장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목관 서쪽 끝에서 순장자의 유품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팔찌와 옥, 귀걸이 등이 발견됐다.
윤선태 교수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상 재발굴 시 쌓인 돌(적석) 사이에서 다른 유골이 수습된다면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봉황대 주인과 가족관계?
학계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드러나는 고분들의 분포를 볼 때 금관총이 봉황대의 '딸린무덤(陪塚·배총)'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배총은 부부나 형제, 군신 관계의 시신을 근처에 묻는 것을 말한다. 봉황대와 가까운 금관총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근거가 된다.
김재홍 교수는 "만약 이번 재발굴에서 금관총과 봉황대를 잇는 묘도(墓道·묘 사이를 잇는 길)가 나오면 무덤의 주인이 봉황대 피장자의 아내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출처; 금관총 주인은..? (daum.net)동아일보. 2015. 2. 26.)
지금도 무덤 주인이 왕인지 귀족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등을 놓고 고고학자들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 금관총(국가사적)이 발굴 101년 만에 돔으로 덮인 첨단 유적 전시관으로 탈바꿈한다.
오늘날 신라문화의 우뚝한 대명사가 된 금관은 1921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 출토된 곳은 경북 경주읍 노서리 한 주막집 뒤편 언덕 땅속이었다. 주인이 집을 넓히려고 파헤친 것이 대발굴의 서막이 됐다. 5~6세기 신라 황금문화의 실체를 처음 알린 금관총 고분의 발견이었다. 이 무덤은 발굴 90년이 지난 2013년 놀랍게도 출토품 일부인 고리자루큰칼 표면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란 새김 명문까지 드러나면서 다시금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4~6세기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쌓았던 고대 토목공사 실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적 무대로 변신시킨 것이 리모델링의 뼈대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 재발굴 조사로 드러난 575㎡(173평)의 무덤 내 돌무지 잔존 유적 위에 전면 창을 내 높이 8m, 최대 직경 48m의 황동 지붕 돔 구조물을 씌웠다. 동원건축사사무소와 아이앤건축사사무소가 공동 설계한 나선형 지붕의 돔 구조물은 돌무지 덧널무덤의 모양새를 본 떠 만들었다고 한다.
나선형 지붕 모양의 돔 구조물을 덧씌운 전시관 모양으로 정비된 경주 노서동 금관총 유적. 오른쪽에 내년 3월 개관 예정으로 짓고 있는 고분정보센터 건축물이 보인다. 경주시 제공
돔이 감싼 무덤 안 돌무지 유적 위에는 신라인들이 돌무지 덧널무덤을 쌓을 때 설치한 큰 나무 가구 구조물이 처음 실물로 재현됐다. 당대 신라 무덤 내부 얼개를 만드는 양상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게 된 셈이다. 소나무 원목을 쓴 구조물은 높이 4.7m, 평균 굵기 20㎝에 달한다. 발굴 당시 돌무지에 남은 나무 기둥 자국의 크기에 맞춰 만들었다. 2015년 재발굴을 벌인 박물관 조사단은 바둑판 모양의 대형 나무 구조물(목조가구)들을 틀처럼 짜서 무덤 중심부 덧널 주위를 촘촘히 둘러쌌던 흔적인 나무 구조물 기둥의 구멍들을 돌무지 곳곳에서 찾아낸 바 있다. 나무 가구들로 짠 구획 안에 정연하게 강돌을 채워 넣고 돌무지를 쌓은 자취를 확인했던 성과를 이번에 되살린 것이다.
리모델링 된 금관총 유적 전시장. 2015년 재발굴 당시 노출된 돌무지 한쪽 위에 구획틀 구실을 했던 거대한 나무 가구(왼쪽)를 실물 크기로 올렸고, 한가운데 관 자리와 이중 목곽을 재현해놓았다. 경주시 제공
무덤 바닥 가운데는 관 자리와 이를 두 겹으로 둘러싼 길이 6.4m, 폭 4.2m의 장대한 목곽(덧널)을 고증해 설치했다. 재발굴 조사에서 덧널 범위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추정한 것보다 훨씬 크며 덧널도 한개짜리 단곽식이 아니라 외부에 하나 더 있는 이중 곽임이 드러난 데 따른 것이다. 경주시 쪽은 “고고학, 문헌사 등 학계 전문가들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들의 자문과 고증을 여러 차례 받으며 콘텐츠를 구성했다. 유적 내부는 오랜 기간 경화 처리 작업을 벌여 구조 안정성도 보강했다”고 설명했다.
밤에 본 금관총 유적 전시장의 외관. 돌무지 유적 위에 전면 창이 난 돔 형태 구조물을 덧씌운 모습이다. 경주시 제공
또 다른 볼거리는 돔의 전면 창과 유적 사이 회랑 복도에 설치된 모니터 영상들이다. 두대가 비치된 43인치 화면의 증강현실(AR) 모니터가 우선 눈길을 끈다. 잠망경처럼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전면의 돌무지 곳곳을 비추면 목가구 구획틀 안에 돌들을 넣어 무덤 내부를 쌓는 신라인들의 축조 과정을 디지털 그래픽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두대의 65인치 대형 엘이디 화면 모니터는 1921년 금관총의 첫 발굴부터 재발굴을 거쳐 돔 전시관으로 탈바꿈하기까지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3대의 터치스크린에서는 이사지왕 명문 등 무덤 주인 정체를 둘러싼 여러 논쟁을 요약한 다큐 영상들을 선택해 볼 수 있게 해놓았다.
금관총 출토품의 고갱이인 금관과 금제 허리띠 같은 주요 금 공예품들은 국립경주박물관 상설관에서 볼 수 있다. 이사지왕 명문이 온전하게 새겨진 큰 칼 한점은 현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명문이 일부 남은 칼 두점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2015년 금관총 재발굴 현장. 무덤 중심 둘레에 정연하게 쌓은 돌무지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출처; 101년 전 신라금관 처음 나온 금관총…‘첨단 돔’ 전시관 탈바꿈 (hani.co.kr)2022-08-15)
<자료출처>
사상 첫 신라 금관 발굴자는 아마추어 '대서소' 주인이었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경향신문.2021. 3. 8.
금관총 주인은..? (daum.net)동아일보. 2015. 2. 26.
101년 전 신라금관 처음 나온 금관총…‘첨단 돔’ 전시관 탈바꿈 (hani.co.kr)2022-08-15
<참고자료>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확인(종합2보) | 연합뉴스 (yna.co.kr)2013-07-03
신라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의 수수께끼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2013.07.25
금관총에서 또 다시 '이사지왕도' 명문 출토 (daum.net) 노컷뉴스2015. 7. 30.
[한국사 Live] 신라 왕(王)은 `King`이었을까 - 매일경제 (mk.co.kr)2016. 3. 23.
칼집 새겨진 ‘이사지왕’ 신라 금관총 주인이십니까 (hani.co.kr)2019-10-19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무덤에서 신라왕 이름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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