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신라 (2) 마립간시대 본문
마립간시대는 서기 356년부터 서기 513년까지로서, 내물마립간이 즉위하면서 통치자의 이름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는데,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훨씬 더 권위를 갖는 이름이었다.
내물마립간 이전에는 박씨 · 석씨 · 김씨 세 성이 왕위를 맡았으나 내물마립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이것도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내물마립간은 안으로는 덕치를 베풀면서 밖으로는 백제 · 고구려 · 전진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너무 크게 팽창한 고구려의 압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실성과 복호를 볼모로 보내는 등 고구려에 신속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서기 427년에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펴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였다.
소지마립간은 백제와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가야와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라정에 신궁을 짓고 반월성을 수축하여 왕이 그곳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려주고 죄수들을 사면하는 한편, 농업생산을 장려하고 백제와는 혼인동맹을 맺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지증마립간은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소지마립간이 닦은 정치적 · 사회적 기반 위에서 국가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첫째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명확히 하고 통치자 이름을 왕으로 바꾸었다.
둘째로 상복법을 제정하여 예제를 바로 세우고 주 · 군 · 현의 행정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돈하여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셋째로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실직주에 군주를 두는 등 국토방위를 강화하였다.
넷째로 해운업에 관한 제도를 마련하고 도읍에 동시를 설치하는 등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 정책을 폈다.
다섯째 순장을 금하고 농사를 권장하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소경을 설치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마립간시대는 신라 사회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그러한 기반 위에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은 지증마립간 시대에 종합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력 신장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기간에 축조된 황남대총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출처;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450-451쪽)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백제 양국 관계와 비밀동맹의 성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네이버 지식백과] 이사부·거칠부 등의 집권과 신라·백제 양국의 동맹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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