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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19)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년)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1. 신라(19)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년)

대야발 2026. 1. 13. 15:43

 

 

 

 

《삼국사기》 卷第 新羅本紀 第 善德王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선덕왕이 미리 안 세가지 일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만(万)이라고도 한다 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며 이에 씨를 정원에 심도록 명하였다.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이고, 이후 [백제]병사 1천 2백인이 오자 역시 쳐서 모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 월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하였다. 군신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어느 곳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다.” 하였다. 모 월일에 이르러 과연 왕이 승하하시므로 신하들이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창건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제(唐帝)가 나의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모두 감복하였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아마도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 바로 이들이다. 당제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2)

 

 

 

<자료출처>

 

(1)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