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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21) 29대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 654∼661년)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1. 신라(21) 29대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 654∼661년)

대야발 2026. 1. 13. 15:59

 

 

 

 

《삼국사기》 卷第  新羅本紀 第 太宗 武烈王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대왕(太宗大王)

 

태종 춘추공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 龍樹 ;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막내누이이다.

 

 

춘추공이 보희의 꿈을 산 문희와 사랑을 나누고 선덕여왕의 명으로 결혼하다

처음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수도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꿈 이야기를 누이에게 했더니 문희가 이야기를 듣고 “내가 이 꿈을 사겠어요.” 하였다. 언니가 말하기를 “어떤 물건을 주겠느냐?” 하자 문희가 “비단치마[錦裙]를 주면 되겠지요.” 하니 언니가 승낙하였다. 문희가 치마폭을 펼쳐 꿈을 받을 때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의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문희는 비단 치마로써 그 꿈을 갚았다.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忌日 ; 앞의 사금갑조에 자세히 보이며 최치원의 견해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축국(蹴鞠) ; 신라인들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축국이라고 하였다.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저고리 고름[襟紐]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저의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하니 [춘추]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옷고름을 달아 드리라[奉針]”고 명하니 아해는 “어찌 사소한 일로써 가벼이 귀공자와 가깝게 하겠습니까.” 하고 사양하였다고본에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다. [춘추]공이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문희와 [정을] 통하였는데,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은 아지가 임신한 것을 알고 그녀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하고 이에 온 나라에 말을 퍼뜨려 아지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둥할 때를 기다렸다가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무슨 연기인가?” 하고 묻자 좌우에서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누이를 불태우려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아뢰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그것은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그것을 보고] 왕이 말하기를 “이는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그녀를 구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 떳떳이 혼례를 올렸다.

 

 

무열왕은 유신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기에 묘호를 태종이라 한다

진덕왕(眞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에 [춘추공이] 즉위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째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 661)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계책과 큰 힘[戮力]으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사직에 큰 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문희는 꿈을 산 대가로 춘추공과 혼인하고 6명의 아들을 두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았으니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이와 같이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이고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이다.

 

 

무열왕은 대식하였고 성군의 시대를 열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무열왕이 청병 입당하였을 때, 당 황제의 시위 요청을 거절하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병사를 청하러 당에 들어갔다. 당의 황제는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기어이 머물러 시위(侍衛)를 삼으려 했으나 극구 청하여 돌아왔다.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태종(太宗)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 경신(庚申)에 인문(仁問)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좌호위대장군형국공 소정방(左虎衛大將軍荊國公 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左衛將軍 劉伯英)자(字)는 인원(仁遠) 과 좌호위장군 풍사귀(左虎衛將軍 馮士貴)좌효위장군 방효공(左驍衛將軍 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벌케 했다향기(鄕記)에 이르기를 군사는 12만 2천 7백 11인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사(唐史)에는 상세하게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지휘하여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니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김유신이 겁먹은 소정방을 독려해 백제를 공격하다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津口)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니 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인하여 천시(天時)를 어길 수 있으리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강의 왼쪽으로 나와서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백제군과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王師]가 조수를 타고 배와 배가 꼬리를 물고 서로 잇달아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나아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성중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막았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2)

 

 

 

신라의 태종 칭호를 당이 참칭이라 했지만 신라가 거부하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성고(聖考)는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하였기에 태종 황제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명호를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신라왕이 글을 올려 답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기를 그가 저이(儲貳 ;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에 꺼내어 그것을 살펴보니 놀랍고 두렵기 그지없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아니하여도 된다 하였다.

 

 

국가를 위해 황산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을 위해 왕이 사찰을 세워 명복을 빌다

 

장춘랑 파랑 長春郞 罷郞 ; 비(羆)라고도 한다

처음에 백제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에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는데, 후에 백제를 토벌할 적에 태종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신 등은 이전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버리었고 지금은 백골이 되었으나 나라를 수호하고자 하여 군행(軍行)에 따라 나가기를 나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 남의 뒤만 쫓아다닙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저희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주십시오.”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두 혼령을 위하여 하루 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을 설하고 또한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이로서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3)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김유신(金庾信)

 

 

김서현의 아들 유신이 칠요의 정기를 품고 태어나다

 

김유신(金庾信)

호력 이간(虎力 伊干)의 아들 서현 각간(舒玄 角干) 김씨의 큰 아들로 이름은 유신이며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해(阿海)이다.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文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고 또한 신기하며 기이한 일이 많았다.

 

 

유신공이 백석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하자 호국 삼신이 돕다

나이가 18세가 되던 임신(壬申)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는 일로써 밤낮으로 깊이 모의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제가 공과 함께 은밀히 저들의 나라에 들어가 먼저 정탐을 한 연후에 그 일을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청하였다. [유신]랑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유신]랑을 따라 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나타나 이르렀다. [유신]랑이 세 여자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세 여자가 맛있는 과일을 낭에게 대접하였다. [유신]랑이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마음을 서로 허락하고 즐겁게 담소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여인들이 말하기를 “공이 말씀하신 바는 이미 들어서 잘 알겠사오나, 원컨대 공이 백석을 떼어놓고 우리와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가시면 그 때 사실을 다시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으로 변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유신]랑을 유인하여 데리고 가는 데도 공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말리려 이곳에 온 것입니다.” [신들은] 말을 마치고 나서 사라졌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어져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館)에 숙박하였을 때 백석에게 말하기를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청컨대 자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오자.” 하였다. 마침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자 백석을 붙잡아 결박하고 사실을 물었다. [백석이] 말하기를 “저는 본시 고구려 사람으로고본(古本)에는 백제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또한 음양을 거스르는 것도 역시 보장왕(寶藏王)의 일이다 우리나라[고구려]의 여러 신하들이 ‘신라의 유신은 바로 우리나라의 점쟁이[卜筮之士] 추남(楸南)이다.’라고 말합니다고본에 춘남(春南)이라 쓰기도 하나 잘못이다. 나라의 경계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어서혹은 숫컷과 암컷이 자주 바뀌는 일이라고도 한다 왕이 그에게 이에 대한 점을 치게 하였습니다. [추남이] 말하기를 ‘대왕의 부인께서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징조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으며 왕비도 몹시 노하여 이것은 필시 요사한 여우의 말이라고 하며 왕께 고하기를 ‘다른 일로써 그를 시험하여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에 담아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고 물었습니다. 추남이 나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쥐인데 그 수가 여덟 마리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말이 틀린다 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 하니 추남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리라.’ 하였습니다. 추남의 목을 베고 쥐의 배를 갈라 그 안을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어 그제야 그의 말이 적중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대왕께서 추남이 신라 서현공(舒玄公)의 부인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추남이 맹세를 하고 죽더니 과연 그러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어 여기에 와서 유신공을 도모케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몸을 나타내어 흠향하였다.

 

 

재매곡과 송화방

김씨 종가의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의 상곡(上谷)에 묻고 재매곡(財買谷)이라 하였다. 매년 봄철에는 그 종가의 남자와 여자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입구에 암자를 짓고 그런 까닭에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였는데 후에 원찰로 삼았다.

 

 

경명왕이 유신공을 추봉하여 흥호대왕으로 삼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호대왕(興虎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4)

 

 

 

《조선상고사》

 

■ 김춘추의 보복운동

 

 

김춘추는 신라 내성사신 김용춘(백제 무왕과 동서 전쟁을 시작한 사람)의 아들이다. 김용춘이 죽자 김춘추가 지위를 승계하여 신라의 국정을 장악하고 무왕과 혈전을 벌였다. 무왕이 죽은 뒤에 의자왕은 성충의 계책에 따라 대야주를 쳐서 김품석 부부를 죽이고 관내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때 김춘추가 어찌나 통분해 했는지, 그 흉문을 듣고 기둥에 기대선 채 사람이나 개가 지나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붉게 피어오른 얼굴빛으로 먼 곳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기둥을 치며 "사나이가 어찌 앙갚음을 못 하리오!" 하고 일어섰다. 기둥을 친 뒤에 김춘추가 내린 결론은 "신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약하니 무엇으로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겠는가. 오로지 외부의 지원을 청하는 것뿐이다"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간 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 백만 대군을 격파한 유일한 강대국이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유일한 거인이었다. 그런 연개소문과 사귀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김춘추는 신라 · 고구려 동맹의 이익을 연개소문에게 제시했다. 동맹이 거의 성사되려던 찰나에 백제 사신 상좌평 부여성충이 이런 사실을 알고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옥리하 일대의 영토를 요구했다.

 

김춘추는 은밀히 수하를 보내 고구려왕의 총신인 선도해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연개소문 천하에 고구려왕의 총신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마는, 선물에 탐이 난 선도해는 "내가 공을 살릴 수는 없지만, 공이 살아나갈 방략은 가르쳐줄 수 있다"며 당시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귀토담》(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_옮긴이)이란 책자를 전달했다. 김춘추가 책자를 받아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거북의 꾐에 빠진 토끼는 벼슬을 얻고자 거북의 등에 업혀 용왕국에 들어갔다. 가서 보니, 벼슬을 주려던 게 아니었다. 토끼의 간이 병에 걸린 용왕에게 약이 된다는 생각에 거북을 보내 토기를 유인한 것이었다. 토끼는 용왕을 속이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신은 달의 정기로 태어난 지손이라서 달을 보고 잉태합니다. 보름 이전에 달이 차는 동안에는 간을 내어 놓고, 보름 이후에 달이 기우는 동안에는 간을 다시 넣어둡니다. 신이 대왕의 나라에 들어올 때는 보름 이전이라서 간을 내어 놓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간이 신의 뱃속에 있지 않고 금강산의 나무 밑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을 보내 주시면 간을 가져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거북의 등에 업혀 육지로 돌아온 뒤에 토끼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을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 아나! 옜다! 간 받아라! '라고 말하고는 깡충 뛰어 달아났다."

 

선도해의 뜻을 알아차린 김춘추는 고구려왕에게 거짓으로 글을 올려 "욱리하 일대를 고구려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와 맹약한 뒤, 김춘추를 석방시키고 귀국을 허용했다. 국경에 당도한 뒤 김춘추는 고구려 사신을 돌아보며 "땅은 무슨 땅이냐? 어제의 맹약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라고 말하고는 토끼같이 뛰어서 돌아왔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실패하고 돌아왔으니, 신라는 고구려 · 백제 사이에서 고립되는 약소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바다 건너 당나라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들어가 당태종에게 신라의 위급한 형세를 하소연했다. 그는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비굴한 언사와 예법을 보이며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당나라 군주와 신하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들 법민 · 인문 등을 당나라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또 자기 나라의 의관을 버리고 당나라의 의관을 쓰고, 진흥왕 이래의 자기 나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를 쓰며,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와 당태종이 가감한 《사기》 · 《한서》 · 《삼국지》 등을 가져가 자기 나라에 그대로 전파했다. 이 책들 속에는 조선에 대한 모욕적 언사가 많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그는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5)

 

 

■ 김유신의 등용

 

김춘추가 한창 복수 운동에 열중할 당시, 그를 보조하던 명물 하나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유신이다.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표 인물이고 부여성충이 백제의 대표 인물이었다면, 신라의 대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 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 역사가들은 연개소문과 부여성충에 관한 자료를 말살하고 오직 김유신만을 찬양했다. 그래서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김유신 한 사람의 전기가 을지문덕 이하 수십 명의 전기보다도 훨씬 더 길다. 부여성충 같은 이는 열전에 실리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김유신열전〉 속에 과장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을 거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사리에 부합하는 것만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김유신은 신가라 국왕인 김구해의 증손이다. 5가라는 신라와 혈전을 벌이다가 망했다. 하지만 신가라는 한 차례 전쟁도 없이 신라에 나라를 넘겼다. 그래서 골품을 따지는 신라였지만 감사의 표시로 김구해에게 식읍을 주고 준귀족 대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해의 아들인 김무력은 장군 · 대관이 되어 구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격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신라 귀족들은 김무력이 외래의 김씨라 하여 3대 성씨 중 하나인 김씨와 구별하고 3대 성씨와의 혼인을 불허했다.

 

김무력의 아들인 김서현은 여행 중에 3대 성씨의 일원인 김숙흘종의 딸 김만명을 만났다. 김만명의 아름다움을 보고 욕망을 금치 못한 그는 추파를 던지고 정을 통했다. 이렇게 해서 임신한 아들이 김유신이다. 김숙흘종이 대노하여 김만명을 가두었지만, 김만명은 금물내(지금의 진천)에 있는 김서현의 처소로 달아나 부부의 예를 거행하고 김유신을 낳았다. 아버지 김서현은 일찍 죽고 어머니 김만명이 김유신을 길렀다.

 

김유신은 처음에는 방탕하고 무절제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의 가르침에 감동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열일곱에 화랑에 들어갔다. 그 뒤 중악산 · 인박산 등지에 들어가서 구국의 기도를 올리고 검술을 익히면서 점차적으로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김유신은 자신이 가라 김씨인 까닭에 특별한 연줄이 없으면 나라에 중용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왕의 총애를 받는 내성사신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와 사귐으로써 출세의 발판을 얻고자 했다.

 

김유신은 자기 집 부근에서 김춘추와 제기를 차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단추를 차서 떨어드렸다. 그런 뒤 김춘추를 집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막내 누이를 불러 단추를 달도록 했다. 막내 누이 김문희가 담박한 화장과 간편한 복장으로 바느질 도구를 갖고 나왔다. 그 얼굴과 겉 모습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이 김춘추의 눈을 호렸다. 결국 김춘추는 청혼을 했다. 이로써 김춘추가 김문희의 남편이 되고 김유신의 매부가 되었다.

 

김용춘이 죽고 김춘추가 정권을 잡자, 김유신은 장군감에 걸맞은 능력에 더해 김춘추의 후원까지 받게 되어 신라의 군주軍主 자리에 올랐다. 김춘추가 왕이 되자 그는 소뿔한(관직명으로 장군과 재상을 겸한 칭호)의 지위를 얻어 신라의 군사대권을 장악했다.(6)

 

 

 

 

<자료출처>

 

(1)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3)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4)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5)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480-482쪽(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1. 김춘추의 보복운동)

 

(6)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482- 484쪽(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2. 김유신의 등용) 

 

(7)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484-487쪽(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3. 김유신 전공 기록속의 숱한 조작)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487-490쪽(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4. 김유신의 특기인 음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