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1. 신라(22) 30대 문무왕(1)(文武王, 661-681년)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1. 신라(22) 30대 문무왕(1)(文武王, 661-681년)

대야발 2026. 1. 13. 17:51

 

 

《삼국사기》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文武王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문무왕이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하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이르기를, “문호왕 즉위 5년 을축(乙丑) 가을 8월 경자(庚子)에 왕은 친히 대병을 이끌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융(扶餘隆)과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을 하였다.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연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백제의 선왕이 반역과 순응에 어두워서 함부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치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또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읍락을 파괴하고 도성을 무너뜨려 항상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는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 입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누차 명을 내려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는데도 험함을 구실로 삼고 멀리 있음을 믿어 매번 하늘의 도리[天經]를 거슬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해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서 한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다. 마땅히 궁택(宮宅)을 무너뜨려 연못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삼고 폐해의 근원을 뽑아 버려 후손에게 교훈을 남길 것이나, 복종하는 자는 회유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하는 것이 선왕의 법도이며, 망한 것은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은 잇게 함이 옛날 성인들의 일반적 규범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함이 여러 이전의 책에 전해옴으로써 전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前百濟王 司稼正卿 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산천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동반국[與國]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제거하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라.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영원토록 번복(藩服)이 되어라.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右威衛將軍 魯城縣公 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와서 권유하여 황제의 결의를 자세히 선포한다. 혼인으로써 이를 약속하고 맹세로써 이를 펼치며 희생을 잡아 피를 바르고 함께 시작과 끝을 도탑게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구할 것이며, 은혜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실추치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한 다음에는 함께 오랫동안 보존토록 할 것이다. 만약 어기거나 배반하여 그 덕을 갈라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하면 신명이 이것을 보고 백가지 재앙을 바로 내리시어 자손은 기르지 못하고 사직은 잇지 못하고 제사는 끊어져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맹문을]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만대 감히 어기지 말 것이며, 신은 이를 들으시고 제물을 향유하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난 다음 폐백은 단의 북쪽 땅[壬地]에 묻고 맹세한 글은 대묘(大廟)에 간직하여 두었다.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帶方都督 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의 당사(唐史)를 살펴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수도로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 부여왕 융이 회맹했다고 일컫는 것은 바로 당 황제가 융을 용서하여 백제로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문에서 명확히 말하니 이것으로써 증명이 된다.” 하였다.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당군을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또한 신라고전(新羅古傳)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하고 또 은밀히 신라까지 토벌하려 계속 머물렀다. 이때 유신이 그 음모를 간파하고 당나라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독주를 먹여 모두 죽이고 그들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상주(尙州) 외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라 한다당사(唐史)를 살펴보면 정방이 죽은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역시 [당나라에서] 꺼린 것일까? 향언(鄕言)이 근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임술년(壬戌年)에 고구려의 토벌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인들이 정방의 군사를 죽여 버렸다면 이후인 총장 무진년(戊辰年, 668)에 어떻게 [당나라에] 병사들을 청하여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이로서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고구려의 땅을 멋대로 점령하였을 뿐이지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산성이 위태로울 때 김유신이 신술을 써서 고구려군을 물리치다

당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미 돌아간 뒤에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잔적을 쫓아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케 하니, 고구려 말갈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하여 서로 싸웠다.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는데 5월 11일부터 6월 22일(661)에 이르러 우리 군사가 매우 위태로웠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묻기를 “무슨 좋은 계책이 없느냐?” 하면서 오히려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달려와서 아뢰기를 “상황이 급박하니 인력으로는 불가하고 오직 신술(神術)로써만 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성부산(星浮山)에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자 홀연히 큰 항아리만한 광채가 단 위로부터 나오더니 이내 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로 인하여 성부산이라 명명하였는데 산 명칭에 또 다른 설이 있다. 이르기를 산은 도림(都林)의 남쪽에 있는데 특이하게 튀어나온 한 봉우리가 이 봉우리이다. 서울에서 관직을 얻으려 모의하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큰 횃불을 만들어 밤에 이 산에 올라 그것을 들도록 시켰다. 그날 밤 서울 사람들이 그 불을 보고 모두 말하기를 “괴이한 별이 산봉우리에 나타났다.” 하였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걱정스럽고 두려워, 그것을 없앨 사람들을 모으게 하였다. 그 아비가 장차 모집에 응하려는데 일관(日官)이 나와 아뢰기를 “이것은 커다란 변괴가 아닙니다. 다만 어느 한 집안의 아들이 죽어 아버지가 울 징조일 뿐입니다.” 하였으므로 결국 푸닥거리를 행하지 않았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는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아니하니 원망하며 서로 바라보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적병이 공격을 서두르고자 하였는데 홀연히 광채가 남쪽 하늘로부터 순식간에 오더니 벼락이 되어서 포석(砲石) 30 여 개소를 때려 부수고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과 도끼를 부러뜨렸다. [적군이] 모두 땅에 엎어지더니 오랫동안 지난 후에 문득 깨어나 달아나듯 흩어져 돌아갔다. 아군도 곧 돌아왔다.

 

 

당태종은 상서로운 돼지를 얻어 천하를 병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신라는 자장의 요청으로 진덕여왕대에 당의 의관과 아홀을 수용하다

[당]태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머리는 하나에 몸은 둘이고 다리는 여덟 개인 돼지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천하를 병합[六合]하는 좋은 징조입니다.” 하였다. 이 왕대에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2)

 

 

 

<자료출처>

 

(1)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참고자료>

 

 

김유신이 흉노의 후예라고?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2015.01.05

 

 

김유신,영웅인가 모략가인가 | 세계일보 (segye.com) 2007.10.17

 

 

"김유신은 7세기 동아시아의 유명인" (mediawatch.kr) 2007년 10월 16일

 

 

"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 | 연합뉴스 (yna.co.kr)200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