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린 신라인의 후예" 한국이 무시한 '오랑캐'의 진실 (daum.net)

 

2.  마의태자, 청 황실의 시조?..이상훈 소설 '김의 나라' (daum.net)

 

3.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신동아 (donga.com)

 

4.  “한국史 시야 金-淸 역사로 확대해야”|동아일보 (donga.com)

 

5.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 (daum.net)

 

6.  금나라의 정사 금사(金史) 일부 번역 (daum.net)

 

7.  "금나라는 우리 역사, 요하문명은 '고조선문명'" | 연합뉴스 (yna.co.kr)

 

8.  "여진족 역사, 한국사에 넣어야" (daum.net)

 

9.  북방 야인(여진족)의 후예 太祖 이성계 (chogabje.com)

 

10.  太祖 이성계 父親의 여진계(女眞系) 이름은 '울르스불카' | Save Internet 뉴데일리 (newdaily.co.kr)

 

11.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예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12.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daum.net)

 

13.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skyedaily.com)

 

14.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15.  금(金), 청(淸) 황실이 믿고 있던 그들 조상의 원류

 

16.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금의 건국 (naver.com)

 

 

 

김종성입력 2023. 8. 6. 10:21

"우린 신라인의 후예" 한국이 무시한 '오랑캐'의 진실 (daum.net)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연인>

 

[김종성 기자]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지난 4일 첫 방송을 탄 MBC 사극 <연인>은 동아시아 최강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다. 17세기에 벌어진 그런 변화 속에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여진족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그 시기에도 조선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오랑캐로 치부했다. 제1회 방영분의 37분경에 묘사된 장면이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주인공 유길채(안은진 분)의 첫사랑이자 전도유망한 청년 유생인 남연준(이학주 분)이 지역 선비들에게 상소문을 올리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모이셨으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중원에서 명나라와 후금 오랑캐가 싸우고 있는 것을 다들 아시지요? 헌데 오랑캐왕이 우리 임금께 보낸 글에 자신을 대청 황제라 칭하더니, 조선을 너희 나라라 불렀다 합니다.

헌데 조정에서는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와 싸우기는커녕 오랑캐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 스승님께서도 허락해주신 바, 우리들의 뜻을 모아 전하께 상소 올리고자 합니다."

이 장면은 훗날 한국에서 청나라로 불리게 될 대청(大淸)이란 국호가 사용된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해는 광해군 집권기인 1616년이고, 그 아들 홍타이지(청태종)가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해는 인조 집권기인 1636년이다.

선비 남연준의 제창에 대해 청년 유생들은 격한 찬동을 표시했다. "너희 나라?", "뻔뻔한 오랑캐놈들 같으니!",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에게 본때를 보여야지!" 등의 발언들이 튀어나왔다.

딱 한 사람, 이장현(남궁민 분)은 남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그의 입에서는 "명나라가 반드시 오랑캐를 이긴다는 보장이 있소?"라는 말이 나왔다.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맹국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여진족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여진족을 혐오하고 야만시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한국 문화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위와 같은 드라마 장면뿐 아니라 영화나 서적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처럼 비하하는 여진족이 실은 우리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고대에 이들은 우리와 동족이었고 발해 멸망 이전만 해도 한민족과 함께했던 말갈족의 후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그는 여진족이 한민족과 하나의 '아'를 형성한 시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동족인 여진족"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신채호는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어족과 중국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면서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민족·흉노족은 전자에 속한다"라고 한 뒤 "조선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발해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시기에, 말갈족에 들어가 이들을 여진족으로 재편한 인물이 있다. 신라 왕족 출신인 김함보가 그 주인공이다.

여진족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청나라가 편찬한 <만주원류고>는 여진족 시조인 김함보가 신라인이라고 알려줬다. 청나라 정부가 관찬 역사서를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후예'라고 공식 인정했던 것이다.

여진족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은 몽골 원나라도 인정했다. 위의 <금사>는 금나라 정부가 편찬한 책이 아니라, 몽골 정부가 중국어로 편찬한 금나라 역사서다. 이 <금사>에 "금나라 시조는 김함보라고 불린다. 고려에서 왔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신라 출신인 김함보는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 말갈족에 들어갔다. 그래서 "신라에서 왔다"라고 하지 않고 "고려에서 왔다"라고 서술한 것이다.

이처럼 말갈족은 서기 10세기에 여진족으로 재편되면서 주류 한민족과 좀더 가까워졌다. 말갈족일 때보다도 여진족일 때에 혈통적으로 더 가까워졌던 것이다.

여진족 천대했던 한국인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시하고 천대한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의 위 장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은 친숙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진족은 한없이 무시했다. 여진족이 고대 한민족에서 분리됐을 뿐 아니라 고구려·발해 때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에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야박한 대우였다.

한국인들이 여진족을 배척하는 것은 금나라와 청나라에 눌린 굴욕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업구조나 경제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문명을 발달시킨 주류 한민족과 달리 여진족은 농경문명보다는 유목문명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한민족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라며 그들을 천시했다. 수렵문명보다는 유목문명이 선진적이고 유목문명보다는 농경문명이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이런 관념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해버리기에는 그들이 이룩한 객관적 결과물이 너무 거대하다. 김함보의 후손들이 왕실을 형성한 여진족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도 진출하지 못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해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금나라는 중국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사회를 이끌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금나라를 능가하는 결과물을 구축했다. 청나라는 북중국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통할했다. 13세기에 몽골 기마병이 동유럽과 중동까지 휩쓴 이후부터 1840년 아편전쟁에서 서유럽이 중국을 꺾기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최강국의 권위에 필적할 강대국이 여타 지역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여진족 청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끌었다. 1840년 이전까지는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나라는 그런 결과를 거두는 과정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치욕과 상처를 조선왕조에 안겼다. 그 이전의 금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왕조에 상당한 아픔을 안겼다. 그래서 금나라와 청나라의 성과를 평할 때는 그것이 고려와 조선에 미친 부정적 영향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 해도, 금나라나 청나라가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과 말갈족(여진족)은 갈라졌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926년이다. 앞으로 3년 뒤면 1100주년이 된다. 한민족과 말갈족이 갈라진 것은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민족이나 문명의 분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이처럼 '불과' 천년 전만 해도 한 식구였던 여진족이 지금은 남남이 되어 있다. 오늘날 그들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여진족의 역사도 자기네 역사였다면서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이 유목민이고 전쟁의 상처를 입혔다는 등등의 이유로 한민족이 그들을 남남으로 다루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남남처럼 인식되는 현상은 동족이 남남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연인>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연인이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은 같은 민족일지라도 어느 순간 이민족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다. 하나였던 민족이 갈라져 남남처럼 지내는 일은 대륙에서 당기는 힘과 해양에서 당기는 힘을 함께 받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는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창우입력 2020. 4. 21. 17:15

마의태자, 청 황실의 시조?..이상훈 소설 '김의 나라' (daum.net)

중국 동북공정 허구성을 꿰뚫는 역사 미스터리 완결판


[나주=뉴시스] 이창우 기자 =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부이·溥儀)의 성씨는 왜 아이신줘러(애신각라·愛新覺羅)일까. 애신각라가 정말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풀릴 듯 풀리지 않고 있는 사학계의 미스터리다. 중국 역사서는 청 황실의 뿌리가 신라에서 왔다고 밝히고 있긴 하지만 속 시원한 봉인 해제는 아니다.

 

이런 가운데 전남 나주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전문예술극단 예인방 예술감독인 작가 이상훈의 장편소설 '김의 나라'가 미스터리 추적에 나섰다.

'김의 나라'는 '한복 입은 남자', '제명공주'로 이어진 이상훈 역사소설 3부작의 완결판이다.

소설은 신라의 종말을 떠올리는 '포석정의 눈물'에서 시작한다. 서라벌과 화랑을 호령하던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은 아버지 경순왕의 굴절된 처세와는 달리 고려에 끝까지 맞서며 투쟁한다. 김일은 마의태자로 불린다.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려 하자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다가 생을 마쳤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생몰연대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의태자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야기도 후대의 전승에서 비롯됐다는 소설 속 인물로 치부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마의태자 전설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태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충주를 더듬는다. 마의태자는 서라벌을 혼자 떠난 게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 부흥운동에 나서는 인물로 역사에 그렇게 등장한다. 북방으로 올라간 마의태자는 고려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애절한 사랑에 빠지며 새로운 터전을 닦는다. 발해를 일궜던 후예들을 만나고, 여진족과 힘을 합쳐 새로운 대제국을 건설하는 발판을 다진다.

소설의 주인공 진국은 10년째 마의태자의 북행루트를 좇아온 다큐멘터리 프로듀서(PD)다. 인제의 한계산성과 경주의 문무왕릉비 등을 뒤지고 중국의 '금사(金史)'와 조선시대 김정희의 '해동비고(海東碑攷)'를 연구하지만 역사적 고증에 부딪치면서 방송제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던 중 영화 '마지막 황제'를 관람하다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성씨가 애신각라였다는 사실에 문득 의문을 품게 된다.

이상훈 작가


청나라 황제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애신각라를 성씨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진국은 베이징 특파원 선배인 명대의 도움과 국내 역사학계에서 이단아로 취급받는 차경일 박사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 급기야 진국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진국은 여진의 시조인 함보의 흔적을 추적한다. 기나긴 역사의 비밀은 결국 금나라가 곧 김의 나라였음을 밝히면서 하나하나 풀어진다. 청(후금)을 건국해 금의 불씨를 되살린 누르하치 역시 여진족의 후예였고, 푸이가 애신각라라는 성씨를 사용한 봉인도 자연스레 벗겨진다.

 

진국은 다큐멘터리 말미에서 '금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며 중국이 진행 중인 동북공정의 허구를 고발한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단순히 신라인의 후예가 금제국을 건설했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200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역사전쟁, 즉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역사관인가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상훈 작가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우리 역사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현재, 나아가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일"이라며 "마의태자의 미스터리한 역사적 발자취에서부터 애신각라 푸이까지 이어지는 추적 작업이 중국의 야심찬 동북공정 역사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시발점이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 작가는 KBS와 SBS PD를 거쳐 예인방 예술감독과 박스미디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lcw@newsis.com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신동아 (donga.com)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 박성수
  • 입력2006-10-25 13:41:00
 
신라 최후의 왕 김부(金傅,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경순왕이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신라 천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하며 살다가 죽었다는 인물이다.

생몰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인 마의태자는 일반적으로 개골산, 그러니까 지금의 금강산에 숨어 살다가 자결한 것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가지 않고 설악산에 갔다! 일찍부터 이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은 서울 보성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했던 김종권씨였다. 이미 작고했는데, 일찍부터 이 사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분이었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건, 설악산에 갔건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저기 다리 품을 팔면서 외치고 다녔을까? 한때 필자도 김종권 선생을 한심한 재야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연히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다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죽으러 갔다는 뜻이고, 설악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국권을 왕건 같은 반역자―당시 왕건은 일개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설악산이 가지는 상징 코드를 해석해내면 마의태자와 관련한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 명분을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국권을 평화적으로 양도받아 은근히 고려 건국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미하려 했다.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차기 대권 후계자인 태자가 경순왕의 양국(讓國)에 반대한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중신들과 상의했을 것이고, 중신들이 “간단합니다. 태자를 마의태자라 부르게 하시고 금강산에 죽으러 갔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란 이런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왕건도 이 소리를 듣고 탄복했을 것이고 “그리 하거라” 했을 것이다. 당시 금강산은 그곳에 유배될 경우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

인제 김부리 지명의 유래

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 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마의태자 유적지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왕릉 터가 없어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순간이었다.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 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甲)자에 진 칠 둔(屯),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는 전설은 너무 유명하고,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이 있는데,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을 거쳐 이 마을에 왔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 가운데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왕각(大王閣) 동제(洞祭)에서는 제상에 꼭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았다는데, 마의태자가 이 곳에 와서 특히 좋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제례 때는 절을 네 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천자(天子)가 아니면 4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이러한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 동안 몰래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볼 때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마의태자라 하지 않고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썼을 것이다.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족 몰살의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 후 200년 만에 영남지방에서 신라 유민들이 항려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무신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신라 유민들은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는 두 사람이었다”

마의태자는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라벌을 떠났고 뜻을 같이하는 충신열사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였다.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또 통일의 꿈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 신라가 아무리 타락하고 나약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는 화랑답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권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마의태자 아니던가. 그런 자리를 한마디로 반역자이자 역적인 왕건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무조건 항복에 극력 반대했다고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의젓하고 화랑다운 말인가. 태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나 아직 충신과 의사가 많이 남아 있다. 둘째, 신라의 민심이 흩어졌다고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셋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그만둘 일이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

한편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버렸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사(官史)인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고 마의태자 한 사람만 반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신라의 왕손인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전에 두 부인(석씨와 박씨)이 있었고 그 사이에 왕자를 여덟 명이나 두었다. 이들 여덟 명의 왕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광복운동을 하러 입산했다는 말은 안 하고, 죽으러 갔다고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덜기 위해 다른 일반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이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경주김씨 내부에도 이견이 있는 것이다. ‘삼성연원보’를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경순왕의 둘째 왕비 박씨부인만 인정하고 그 맏이인 김일이 마의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신라삼성연원보’와 같은 내용의 족보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순왕의 첫째 부인 석씨의 존재가 재확인되고 있다. 일제시기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남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첫째 부인 석씨가 빠진 데 비해 북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석씨가 기록돼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의태자 후손으로 보이는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이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가는 경순왕의 일행은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나 이어졌다고 하는데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순왕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마의태자 일행을 보는 군중의 눈에서는 망국의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깊은 산골인 ‘하늘 아래 첫 동네’를 택했을까. 바로 그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이라는 이름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한계산성은 인제현 동쪽 50리 거리에 있다. 산성은 둘레가 6278척, 높이가 4척의 석성(石城)이다. 지금은 퇴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한계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인제군 북면 한계 3리 1번지다. 인제읍에서 원통 면사무소를 지나 오른쪽 44번 국도로 꺾으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면 향토공원이 나오고 옥녀탕이 보인다. 거기서 하차하여 가파른 산길을 기어가다시피해 30분 정도 올라가면 평탄한 능선에 오르게 되고 이윽고 아름다운 성벽이 나타난다. 성안에서는 냇물이 흘러 소리가 요란하다. 냇물을 건너가면 성의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 자리가 해발 1000m라 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서 성벽에 올라섰으나 병사 500명이 들어설 수 있다는 넓이 600여 평의 대궐 터와 절터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외성이고 훨씬 더 올라가면 내성이 또 있는데, 그곳에 대궐 터가 있다는 것이다. 내성은 너무 험해서 산악 전문가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내성에 우리가 찾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필승을 다짐했다. 한계산성의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단(三神壇)’이다. 또 거기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되었다고 한다.물론 세 사람이 어느 시기의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간지의 정확한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의선운장이란 의병장을 말하는 것이니, 김성진과 김세진은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김씨 아니었을까.

간지의 연대도 마의태자 때라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 뒤가 된다.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에 올라서서 동쪽을 보면 한계령 고갯길이 눈 아래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동해안 쪽에서 한계령을 너머 침입해오는 고려군을 감시하고 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개성에서 인제 땅은 너무 멀다. 이곳을 공격하자면 육로보다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는 것이 훨씬 쉽다. 지금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이 있는데 진부령의 본시 이름은 김부령(金富嶺)이었다는 말이 있다.

한계산성에도 전설이 많다. 이 험한 산에 성을 쌓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돌을 손에서 손으로 넘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계산성 아래 동네 총각에게는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왜 그런 말이 돌았을까. 마의태자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원도 인제에서는 마의태자가 설악산에 들어와서 광복운동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인제 땅은 본래 신라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였다. 그래서 고구려 말로 구토(舊土)회복이라는 단어인 다물(多勿)이 이곳에 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일설에 한계산성은 맥국(貊國)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산성이었다고도 하니 일찍부터 인제 땅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산성 같은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 마의태자가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금강산 구경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동해안 쪽으로 가서 외금강을 보고, 금강 중의 금강이라 하는 내금강(內金剛)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금강산은 철원 쪽에서 들어가서 단발령을 넘어 먼저 내금강을 본 다음에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보는 것이 구경의 원칙이다.

개골산이 금강산인가

그러니 지금 가는 금강산 유람으로는 내금강을 못 볼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유적도 볼 수 없다. 비로봉 밑에 있다는 전설의 태자릉(太子陵)도 못 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태자릉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실제로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금강산은 그 봉우리가 모두 1만2000봉이나 되는데 비로봉이 제일 높다고 하며 골짜기마다 108개나 되는 불사가 산재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강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경작지가 전혀 없어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바위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천길 만길이라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도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흙 한 줌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나 짐승과 같이 거처하지 않는 한 하루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은 최남선의 말처럼 커다란 바윗 덩어리요, 온갖 기묘한 변화를 나타낸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금강 없는 금강산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산속으로 태자 일행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에 가보면 마의태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금강산의 이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즉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을 삼국시대에는 상악(霜岳) 또는 설악(雪岳)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대에 조작된 금강산 태자 유적지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 보면, 금강산에는 이름이 다섯가지나 있다고 기술한다.

“산 이름이 다섯 있는데 첫째 금강, 둘째 개골, 셋째 열반, 넷째 풍악, 다섯째 지달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풍악이지만 중 무리는 금강산이라 한다. 이 금강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시대에는 상악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불렀지만 일반인은 풍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골산도 풍악이란 이름과 함께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금강산과 설악산이 연접돼 서로 암수 하는 사이이고 보니 혼동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국시대의 상악(금강산)과 설악(설악)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학자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등산, 태자 유적지를 보고 ‘금강예찬(金剛禮讚)’(1927년)이란 기행문에서 이것은 가짜라고 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태자 유적들이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최남선 특유의 지명학(地名學)을 터득해야 한다. 본시 금강산은 예국의 영산(靈山)이었다. 신라가 이를 계승하여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골짜기마다 불사가 들어서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불단으로 변하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불교 이름이 지어지고 말았다.

태자 유적지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태자성은 둘이나 있고 망군대와 장군봉이 모두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으로 이름지어졌다. 심지어 단발령까지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멀리 금강산 절경을 보고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금강산의 전설은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

여하간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도 설악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같이 마의 초식하다가 춥고 배고파서 죽은 무기력한 마의태자상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 광복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다 죽은 씩씩한 태자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의태자가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정의에 불타는 전설 속의 대장부였다면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으로 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여진으로 떠난 마의태자 후손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금나라 세워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입력 2006-09-15 03:02업데이트 2009-09-29 08:54

“한국史 시야 金-淸 역사로 확대해야”|동아일보 (donga.com)

 
중국 동북공정의 연구결과를 종합평가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고구려연구회 학술토론회에서 한국사의 시야를 금과 청의 역사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다.

14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 학술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동북공정 배후의 역사관에 대응할 한국의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이날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중국의 역사침탈이 왜곡단계를 넘어서 주변지역 역사를 아예 말살하는 4단계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 서경대 교수는 “몽골에서는 우리가 중국사라고 생각하는 원제국의 역사뿐 아니라 흉노, 선비(연·진·양·북위), 돌궐, 위구르, 거란(요)의 역사를 모두 자신들의 역사로 간주한다”며 “한국도 중국에 들어선 모든 왕조사를 중국사로 인정하는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고구려, 발해의 뒤를 이어 그 땅에 나라를 세운 금과 청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금사를 전공한 김위현 단국대 명예교수는 “여진이 세운 금의 역사에는 금의 왕족이 고구려 또는 신라에서 왔다는 내용이 있고,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가 ‘여진과 발해는 본동일가(本洞一家)’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며 이를 뒷받침했다.

발해사 전공자인 한규철(고구려연구회 회장) 경성대 교수는 “여진은 고구려인의 후손인 발해 주민과 헤이룽(黑龍) 강 유역에 있던 흑수말갈이 합쳐져 이뤄졌다”며 “요·금의 주민 대다수도 발해인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발해와 통일신라만 남북(南北)국시대로 볼 것이 아니라 발해의 뒤를 이은 요·금과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 역시 남북국시대로 봐야 한다”며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에만 갇혀 있던 한국사의 시야가 새롭게 개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 2006. 9. 22. 09:13수정 2006. 9. 22. 09:13

 
 
▲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이사장
 
ⓒ2006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열린 '동북공정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는 금·청나라 역사를 한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강단사학계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오마이뉴스>는 20일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를 만났다.

서 교수는 "중국은 한국사 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전통사관"이라며 "25사에 들어있는 원나라는 몽골사지 중국사가 아니다, 요·금·원·청을 다 중국사로 인정한다면 이제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지적에 대해 서 교수는 "그들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가 있는 면도 있다"며 "강단사학계는 재야사학자 등의 주장을 학술적으로 검증해야지 아예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주장은 사실 유득공부터 시작해 신채호·장도빈 선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했던 말이다.

서 교수는 "일본 밑에서 반도사관을 주재했던 사람이 해방 뒤 주도권을 잡으면서 반도사관이 굳어졌다"며 "우리 학계는 재야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열린 사학계가 아니다, 이러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으며 닫힌 반도사관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원자바오 총리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동북공정 문제를 잘 다루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는 "중국의 외교적인 언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절대 속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고구려 역사재단 해체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구려 역사재단의 공과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북아역사재단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지난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 토론회에서 금·청나라 역사의 한국사 편입을 주장했는데….

"그동안 중국의 역사침탈 대응 논리를 개발하는데 국내 학계가 한계가 있었다. 고구려는 지방정권이며, 고구려 멸망 뒤 백성들이 다 중국 땅에 들어갔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논리적 대응을 했다. 그러나 고구려 이후 금·원·명·청 시기에 대한 연구가 안돼 있다.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민중사적으로 봤을 때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뒤 민중들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깊이있는 연구를 해야하고, 그 후손들이 누구와 친연성이 많은 지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 문제 등을 정확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 중국이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있었나?

"사실 없었다. 일단 금나라는 중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역사다. 여러 사서에 금나라의 시조인 김함보가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나라는 몽골이 자국사로 본다.

명나라의 경우 만주를 완전히 지배했는지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지난해 말 강원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남의현 교수는 명나라는 요동반도만 차지한 것으로 보고있다.

명나라는 요동반도의 오른쪽은 새외(塞外)로 봤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요동변장을 세워 관리를 했는데 나중에는 거의 안됐고 결국 여진족이 중국 전체를 차지했다. 중국에서조차 원나라와 청나라는 정복 민족이라고 했지 자기 민족 역사로 보지 않았다."

-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해서 금나라 사람들이 한민족이 될 수는 없다는 견해가 있다.

"민중사적인 정체성을 보면 된다. 왕조가 망했다고 만주에 살던 고구려·발해 사람들이 어디 가겠나? 백제사람이 신라인 되고 이들이 고려인되고 조선인되고 한국인이 됐다."

- 사실 1911년 신해혁명 때 구호가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이었다.

"중국은 1980년대 들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해 만주족 역사를 자기 역사로 편입했다. 이전에는 자신을 정복한 나쁜 민족에 불과했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자인 탄치양에 의해서 청나라 영토에 속한 모든 민족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로 보는 개념이 생겼다."

- 중국 25사에 금나라·원나라의 역사가 들어있지 않나?

"동양사 전공하는 분들이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중국적 사고방식이다. 원나라가 어떻게 중국 역사인가? 세계사적으로 새롭게 조명하지 않은 것이고 사대주의적 전통사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것이다. 요·금·원·청을 다 중국사로 인정한다면 이제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 14일 토론회 뒤 기존 학계에서는 반응은 어떤가?

"문제는 기존 학계의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고구려연구회 홈페이지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일부 글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관련 전공자가 올린 것 같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도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게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histholi'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금·청사의 한국사 편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우리말로 지금의 만주족과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대해 '금사연구'라는 아이디이 네티즌은 "그러면 한족(漢族)과 만주족은 대화할 수 있는가? 한족은 만주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지만 조선어는 만주어의 문법과 구조가 같아 우리 나라사람들은 만주어를 단기간에 바로 배울 수 있다"고 답글을 달았다. - 편집자 주)

- 이런 주장은 재야사학자들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반박이 나올 것 같다.

"나는 강단 사학계 쪽이 더 반성을 해야한다고 본다. 우리 학계는 재야사학자들의 논리라는 이유로 얘기를 못 꺼내고 있다. 재야사학자들의 논리가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가 있는 면도 있다.

재야와 강단은 적이 아니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재야사학자는 자기들의 주장을 당당히 얘기하고 강단은 이른바 학술적으로 증명된 부문만 얘기하면 된다. 사실 발해사가 우리 역사가 되는 것에 강단 사학자들은 절대로 반대했다. 발해사가 우리 역사가 된 것은 북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의 공이 컸다. 북한 학자들이 과감하게 주장했고 결국 교과서에 들어갔다."

- 발해사, 금·청사 등과 관련한 주장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이런 문제는 유득공의 '발해고'부터 시작해 단재 신채호 선생, 장도빈 선생 등이 다 얘기했던 것이다. 이런 분들이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다면 당연히 국사책에 들어갔을 것이고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반도사관, 반도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뤘던 것이다.

해방 뒤 일본 밑에서 반도사관을 주재했던 사람이 결국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우리는 반도사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이나 우리 주장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열린사학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닫힌 반도사관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 중국이 만주족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만주족이 같은 민족이면 나중에 한국과도 합치자"고 한다면?

"일단 만주족이 중화민족에 속하느냐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중국이 언제 만주족을 자기 민족으로 봤나? 그런 논리는 중국의 주장은 언제나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 서 이사장의 주장은 중국사 해체 작업인데….

"중국이 한국사를 해체하고 있는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다시 보자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25사의 열전에 들어있는 것도 모두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나는 25사의 체계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원사가 25사에 들어있다고 곧 중국사인가? 원사는 몽골사가 분명하다."

- 김한규 교수는 요동사를 주장했는데….

(요동은 중국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아닌 제3의 역사공동체로 존재해왔다는 설-편집자 주)

"요동이 중국과 상관없다고 본 것은 성과이지만, 만주와 연관있는 모든 세력을 다 무시하는 것은 문제다. 예를들어 만주국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그들이 요동사의 주체가 됐을 것이고 만약 우리가 그들과 통일을 한다면? 지금 청나라는 없어지고 원래 관계도 없던 중국과 러시아가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있다."

- 일부에서 한-몽골 연합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연합이라는 말을 몽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전혀 고려가 없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지금 양국의 국력에 큰 차이가 있는데 과연 몽골이 국가 연합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런 얘기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이라고 본다.

현재 몽골은 요나라를 자기 역사라고 하는데 한국이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몽골 학자들 가운데 한자로 된 원전을 읽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인들은 몽골에 가서 '어글리 코리언' 행동만 하지말고 장기적으로 상호 호혜의 입장에서 교류하고 입장을 가져야한다."

- 지난 16일 베이징대 역사학과 쑹청유 교수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외국의 역사라는 것이 베이징대 역사학과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나?

"지금까지 중국 내부에서 동북공정에 대한 반론이 없었는데 최초의 이견을 내놓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고려해 볼 점이 있다. 우선 그의 말은 학술적인 논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따라서 (10월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온 립서비스인지, 정말 활자화된 논문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또 '중국 내부에도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변강사지 연구중심의 연구성과가 모두 순수 학술적 차원이고 학술적 의견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를 반증해주는 효과를 노린 것일 수 있다. 베이징대 교수가 직접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동북3성 학자들처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다. 그러면서 실제 돈은 변강사지연구중심에 들어간다.

중국의 '고구려 지방정권론'은 조공-책봉 논리가 유일한 근거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 일본 등과 분쟁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을 수도 있다. 조공-책봉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조사를 해보니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장수왕 때 조공을 제일 많이했다."

- 원자바오 총리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동북공정 문제를 잘 다루도록 지시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은 중국의 외교적인 언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절대 속아서는 안된다. 중국은 문제가 생기면 지방정부 차원이라고 주장하고, 지방정부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라면서 서로 핑퐁 게임을 한다. "

- 국내 학계에서 국사해체론이 나오는데….

"중국과 일본이 국사해체를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그 쪽은 더 강화하는데 우리만 해체하자는 것은 국제정치의 역학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 홍산문화 등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텐데….

(홍산문화는 기원전 3500년 께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석기 문화-편집자 주)

"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 문화는 모두 고조선 관련 문명이다. 황하 상류인 내몽골 지역에 많은 석성이 있다. 그런데 이 석성이 중원으로 퍼지지 않고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후 고구려에 등장하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문화의 흐름이다."

/김태경 기자

 

입력 2007. 1. 10. 08:52수정 2007. 1. 10. 08:52

금나라의 정사 금사(金史) 일부 번역 (daum.net)

 
재야사학자 윤명수씨 "금나라는 신라김씨가 세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115년 건국해 동아시아 세계를 호령하다가 119년만인 1234년에 멸망한 금(金)나라 왕조 역사를 정리한 방대한 분량의 정사인 금사(金史) 중 일부가 국내 재야사학자에 의해 국한문 대조 형식으로 번역됐다.

경복고와 한국외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으며 현재는 금융감독원에 근무하는 윤명수(尹明洙)씨가 그 주인공. 윤씨는 금사의 본기 일부분과 열전 일부분을 옮긴 '금사'(완안출판사)를 최근 펴냈다.

 

번역 대상은 본기에서는 태조ㆍ태종ㆍ희종ㆍ해릉왕 대목이며, 열전은 완안종필, 장호, 대고, 고표 부분이다. 종래 금사는 금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고려사를 정리한 '고려전'(高麗傳)만 역주가 이뤄진 정도이며, 윤씨가 번역을 시도한 부분은 모두 국내 초역이다.

윤씨는 2004년 중국 측의 동북공정에 분개해 종래에는 여진족이 세운 왕조라고 알려진 금나라가 실은 신라김씨가 세운 국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런 사실을 담고 있는 금사 관련 부분을 역주하는 한편, 금사를 파고든 '금사연구서'를 이번에 같이 출간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간도 관련 자료집과 그 연구서를 겸한 '간도의 비밀'도 함께 내놓았다.

금사는 중국의 역대 왕조 정사를 통칭한 25사(二十五史) 중 하나로서 본기(本紀) 19권ㆍ지(志) 39권ㆍ표(表) 4권ㆍ열전(列傳) 73권으로 구성된다. 금나라를 멸한 원(元)나라에서 탁극탁(托克托) 등이 칙명을 받들어 1343년에 완성한 기전체(紀傳體)다.

윤씨가 이번 번역본과 그 연구서에서 거듭 강조하듯이 금나라 건국시조는 신라종실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이 금사 뿐만 아니라 북방계 왕조의 기록에는 자주 나온다. 이에 주목해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박은식이나 해방 이후 신민족주의를 제창한 손진태 등의 역사학자는 금나라를 한국사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동북공정의 대항논리 중 하나로 그런 주장이 다시금 등장하며, 윤씨 또한 그런 흐름에 적극 동참한다. 248쪽. 3만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송고시간2012-10-31 11:52

"금나라는 우리 역사, 요하문명은 '고조선문명'" | 연합뉴스 (yna.co.kr)

한중연, '한국사 시공간적 범위·정체성' 세미나 개최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금나라는 어느 모로 보나 고구려와 발해 못지않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와 함께 3국 정립시대에 한 축이었으며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을 이루었다. 또 금나라는 고려와 다시 남북국을 이루었다."(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만주와 몽골초원 더 넓게는 중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넓혀서 교류와 이동의 역사관으로 새롭게 바라보아야한다."(우실하 항공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한민족공동체연구소가 다음 달 2일 주최하는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와 정체성을 재검토하는 연속 세미나'에서 발표될 연구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중국이 동북공정 등을 통해 역사 왜곡의 강도를 높여나가는 지금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역사학계에는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에 대해 주류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이른바 '비주류 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 비주류 학자들은 주류학계 관점이 식민사학이 만든 틀 안에 갇혀 한민족 역사의 전모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중연은 31일 "비주류 학자들의 이론과 입장을 중심으로 토론의 자리를 만들고 한국사의 진정한 범위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단절되지 않았으며 금나라도 우리나라 역사의 범주 내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는 '요하문명과 한민족 고대사 - 단군신화 다시 읽기와 고대사 연구방향'이란 연구논문에서 "이제까지 신화로만 보던 '단군시대'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홍산 문화의 토템은 곰"이라면서 홍산 문화의 주도세력인 곰 토템족이 단군신화의 웅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중국은 최근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 지역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그는 "요하일대에 중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제5의 문명권이 있었다"면서 "그 주도 세력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바탕으로 동북 고대사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수 천 년 전 요하문명이 탄생할 때에는 중국도 한국도 없었으며 요하문명은 동북아 모든 국가의 '공통의 시원(始原) 문명'으로 봐야 한다고 우 교수는 분석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복식과 예술로 본 홍산문화와 고조선'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소하서 문화의 뒤를 이은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낸다"면서 "이 문화유적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은 옥기와 새김무늬 질그릇으로, 신석기 초기부터 한반도지역의 유물과 성격을 같이해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요하문명을 '고조선 문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yunzhen@yna.co.kr

 

 

황윤정입력 2012. 7. 15. 07:38수정 2012. 7. 15. 07:38

이도학 교수 주장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장백산 문화론'을 내세워 고구려·발해사가 여진족(만주족)의 금·청나라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펴는 가운데 여진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오는 2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적·문헌적 범위'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연구논문 '한국사의 확대과정과 여진사(女眞史)의 귀속 문제'를 발표한다.

 

이 교수는 이 논문에서 청나라 이전의 여진족의 역사는 중국사로 볼 수 없다면서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만주 지역에서 생성과 성장·소멸을 거듭했던 종족의 역사 가운데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한국사에 편입됐는데 동일하게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여진족의 역사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여진족의 역사는 숙신(肅愼)→읍루(邑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산해관 이남으로 진격해 중원 대륙을 제패하고 청(淸)이 되었을 때는 중국사인 것이 분명하다"면서 하지만 그 이전의 여진사는 "중국사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사료와 문헌을 제시하면서 12세기 이후 정치적으로 만주 지역의 지배 종족이 된 여진족의 국가 기원이 한국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려사'는 물론 '이역지'(異域志)와 '신록기'(神麓記) 등 중국 문헌들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역사학자 손진태가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의 역사 인식을 이어받아 금나라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시켰지만 이러한 역사 인식이 계승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여진의 존재는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의해 우리 역사로 인식됐으며 해방 후 출간된 손진태의 저작물에선 숙신 이래 여진의 금사(金史)까지 한국사에 편재했다"면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후금의 역사까지도 한국사 체계에 편제하는 작업이 유효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간도 문제와 엮어져 있는 이 사안과 관련해 후금의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yunzhen@yna.co.kr

 

 

[ 2007-07-17, 15:58 ]

북방 야인(여진족)의 후예 太祖 이성계 (chogabje.com)

"여진은 조선을 대함에 있어 '타민족'이 아닌 동일 민족으로 보았다"
김관웅 박사 

 

개요: 북한함경북도와 간도두만강연안에서 조선민족들가운데서 만주와 관련된 고기와 형태의 전설이 가장 많다. 고고학자료에 따르면 청조의 누르하지부족의 발상지는 북한함경북도의 3진과 간도지역으로 이씨조선왕실의 조상과 누르하지의 조상은 매우 밀접한 혈육관계가 있다고한다. 그러나 조선전설은 중화(대중국)사상으로 여진(麗地고려-고구려-부여의 준말여땅의 발음그대로 부른것의 변화라한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편견으로 인한 분열임을 알수 있다.
  
  
   1) 여진과 두만강연안 및 조선왕실과의 조상혈통
  
   처음에 여진은 당조시기 예맥(貊貉-黑水靺鞨이라고도 하는데 濊貊의 한갈래)에서 발전하여 나온것이며 발해가 거란에 망하면서 송화강 흑룡강(중-러북부변경의 강)과 러씨아 연해주에서 생활하면서 남자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위주로하고 여자들은 돼지(도야지)를 기르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고구려시기에는 고구려에 최하층으로 “15만의 군을 동원하여 고연수의 영도하에 당나라에 대항하여 안시성에서 싸웠다.) 발해당시 왕족은 고구려귀족이듯(원성은 고씨인데 대진국을 세워 대씨성을 가졌다는 설이 있듯이 아버지는 고고중상으로 사서에 기록)이 여진이 금나라를 세울때 왕실은 고려인 김한보(함포, 조상은 신라인)와 형 아구시(김한구씨-씨는 형이므로 존경해서 부른것 아닌가 생각한다) 동생 아고내(김한곤)는 모두 왕고려에서 왔으며 여진인백성들은 대부분이 왕고려에 귀속되여 살았다[1].。
  
   (12세기초),김한보의 후손 아구다(김구가 이름이고 다는 우리말 맺음말 이다의 다가 아닌가)는 여진인부락을 통일하여 금나라(1115—1234)를 건립하였다。금나라는 강성할때 중원을 정복하고 장강이북의 지역을 100년정도 통치하였다. 그들은 문자를 창제하여 중국인과의 융합을 방지하였다. 후에 몽골의 원나라가 통치할 때 合兰部、水达达等의 관할을 받았다。
  
   중국의 명조시기 여진은 건주여진(두만강) 해서여진(송화강) 야인여진(흑수에서 북극부근의 캄챠카반도까지)등으로 나뉘였다.건주여진은 조선왕조와 관계가 밀접하였으며 建州란말도 간도州에서 기원하였다한다. 후에 명나라(중국)는 만주에 눌간도를 설립하였고 1403년에 두만강을 눌간도 건주위에 편입시켰으며 아합출(李합죽-우리말로 합죽은 어떤사람을 지칭한는것 다알지요)을 지휘사로 임명한다.
  
   1410년에서1412년사이 또 오늘의 중국길림성 훈춘과 오늘의 조선함경북도경원 회녕일대에 건주좌위를 설립하고 멍구태물을 지휘사로 임명한다.。 건주여진(일명 간도여진)이 두만강에 대한 통치는 고려공민왕시기(1356년)부터이며 후에 이씨조선왕조의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지춘이 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있으면서 시작된다.
  
   이성계도 공훈을 세웠는바 조선왕조를 건국한 초기 조선의 관할범위는 두만강하류지역까지 달하였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우디하 우량하 어내물세개의 큰부락이 대치상태에 있었는데 세종대왕시기에 적극적인 북진정책으로 1432년부터 1449년까지17년간 간도6진(6개의 도시를 지칭)을 설립하였다。후에 건주좌위(建州左卫)의 여진인은 간도6진의 압박을 피하여 백두산 남쪽푸주강(오늘 중국혼강 고구려발상지)에 거주하는 이만주(이합죽의 후손1407-1467)의 요청으로 대부분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연변의 훈춘지역에서 생활하는 만주인들은 그때 당시 따라나서지 않고 여전히 남아서 생활한 사람들의 후손(진짜 이성계가문?)이다.。두만강지역에서 이주한 건주와위의 여진인들 중에서 후날 청왕실의 왕족이 나타났으며 두만강지역에서 현재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한 건주좌위여진인들은 만주족을 형성하였다。
  
   누르하지의 선조인 멍구태물(?—1433)은 명나라에 의하여 현재의 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지역의 건주좌위도지휘사로 임명되였었다。멍구태물은 명나라와 조선왕조의 변경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434년 우디하부락의 습격으로 사살되였고 조선회녕에서28키로되는 현재 북한 양강도풍산군에 다가“화장하고 골회는 땅에 묻었다”.[2](P329)。
  
   풍산군은 자고로 여진족이 생활한 지역으로 풍산개는 영리하고 사냥하기로 소문높다.。멍구태물이 소속된 어들이부락의 주력이 푸주강일대로 이주하게된시기는 멍구태물이 죽은후 얼마되지 않은 때이며 멍구태물의 6세손 누르하지는 오늘의 요녕성신빈지역으로 이주한후 태여났다.
   아신제로는 만청 건국자 누르하지의 가족성씨이며 “아신”은 황금(그래서 신라도 김씨성 택한가?)이란 뜻이고 “제로”는 성씨이다.
  
   만주황실의 아신제로 성씨유래는 시조 부구리(북고려)옹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사람(옹순)은 몽골 원나라 시기 설립한 어두린만호(들판의 만호)의 제1임만호이다고 인정한다.。즉 누르하지의 선조는 두만강지역에서 생활한 어두리(들판의)부족임을 알수 있다.。
  
   일부학자들은 어두린은 원나라가 오늘의 흑룡강의란현일대에 설립한 5개여진부락”군민만호부”로서 후에 남으로 이주하여 오늘의 길림성훈춘과 조선 함경북도 회녕일대에 왔다고 주장한다。[3](P89) 그러나 많은 역사기록은 만청왕실의 누르하지의 시조부족의 발상지는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간도)지역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하기에 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간도)지역의 조선족들속에는 누르하지와 그의 사적과 연관된 전설이 많이 전해져내려오고있다。뿐만아니라 이러한 전설중에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이성계의 조상이 함께 등장한 다.。실례를 들면 두만강하류 함경북도 경원군에 전해지는 전설《赤池 (적지)》에서 이성계의 5세조인 목조와 6세조는 몽골원나라시기에 따루하지 (达鲁花赤-달로화적)로 되였다.
  
   이는《룡비어천가(龙'134;御天歌)》 제4장의 기록에 어울린다.。이는 이러한 전설의 대부분이 역사사실을 시본적으로 반영하며 결코 민간의 어느사람이 임의로 지은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경원군에서 생활한 이성계의 고조 안사(安社)는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떄 쌈지대왕(散吉大王)에게 투항하여 중국남경을 통치하는 오동(斡东)5000가구의 따루하지로 되여 수천가구의 여진인을 통솔하였다。
  
   안사(安社)의 아들 행리는 비록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기로 되여있었으나 전란으로 인하여 오늘의 함경북도경흥지역에서 함흥 영흥지역으로 피난하였다。1335년 영흥에서 출생한 이성계는 고려공민왕5년(1356)부터 종군하여 해마다군공을 세우고 고려신우8년(1382)고려동북방명의 지휘사로 되였다.이성계는 날로 성장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씨조선왕조를 건국하기위하여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때그의 신변에 동두란이라는 용장이 있었는데 그가 누르하지의 조상으로 조선왕실의 조기역사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중국의 일부학자는 이성계가 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만주의 기원전설과 함경북도의 연관성
  
   만주인의 기원설에 따르면 만주인의 발상지는 백두산의 동부지역이다. 《장백산(백두산)동남에 부꾸리(북고려)산아래어 못이 있었으니 이름을 부래호(발해호)라 한다.전설에 따르면 세선녀가 이못에서 미역을 감고있는데 하늘까치가 날아와서장백산의 동북쪽폭포아래에 선녀가 셋이 내려와 모욕하게 되였는데 큰언니는 이름이 은실이(恩石倫 은시리) 둘째언니는 정실이(正石倫정시리) 셋째는 분실이(佛石倫 분시리?) 이다.
  
   그들이 미역을 마치고 떠나려는데 하늘까치(神鵲) 날아와서 입에 물고있던 붉은 과일(朱果-혹은 주몽의 후손을 암시한걸가?)를 셋째 분실이의 옷에 떨어뜨리였다. 분실이는色彩鲜妍한 과일을 손에서 떼려 하지 않다가 입에 물었는데 그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모두들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분실이만 돌아갈수 없게 되였는데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분실이의 몸을 검사해보고 “이는 하늘이 너에게 임신하도록 하였으니 아이를 낳은후 몸이 가벼워져 가히 돌아갈수 있다.这是天授妊娠于你,等你生产以后,身子轻了再回去罢。”고 하였다.
  
   그리하 분실이는 출산하게 되였는데 체격이 괴상한 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선녀는 朱果에 깃든 사연을 알려주고 성씨를 아신제로라 하고 이름을 부구리(북고려)옹순이라 지어주고는 하늘로 날아버렸다. [4]이렇게 되여 남자아기는 배를 얻어타고 강물살따라 하류의 나루터에 도착하였고 언던에 올라가서 버들나무와 갈때로 걸상을 결어 앉아 있었다.
  
   당시3성(三姓)지역의 사람들은 왕위를 쟁탈하기위하여 싸움이 끊이지 않았는데 한사람이 강에 물길으러 왔다가 남자아기를 보고 이상히 여기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 모두들 보니 남자애는 과연 비범한지라 “천지신의 아들이네. 어떻게 여기까지 온거요?”하니 남자애가 “천지신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여 3성(三姓)지역의 전란을 평정하라고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말에 사람들은 남자애를 가마에 태워3성(三姓)지역으로 모셨다.북구려 옹순은 장백산(백두산)의 동부오무해평원(오목해—분지라는말인가?) 오두리성(들의城-벌판의 도시)에서 전란을 평정하고 국호를 만주(曼珠혹은滿珠-만조선의 의미가 아닐가)라고 하였다.》
  
       이전설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이는 흑룡강성이북이라는 설이 있고 어떤이는 흑룡강의 애훈현(러씨아)이라고 하고 어떤이는 연변(간도)의 돈화시 오동성이라고 한다.《흠정만주원류(钦定满洲源流)》卷8권《강역(疆域)》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만주인의 조상은 장백산 동부의 오무해(오목해) 평원오두리성에서 생활하였다. 이도시는 흥경에서 동으로 1500리되는곳으로 녕고탑성 서남330리의 리뿌싼강 서쪽 연안에 있다. 》  
  
   그위에 얘기한 건주좌위 여진족은 원나라말기에 흑룡강 의란현의 五个“军民万户侯”의 하나인 오두리부(鳌朵里部)이며 원나라 말기에 남하하여 목단강동안으로 이주하였다.。명나라시기에 또 돈화로 이주하여 누르하지의 6세조멍구태물이 돈화에서 출생한것이다。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오두리성이 연변의 돈화시오동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돈화시는 백두산 북쪽이며 북구려옹순의 전설에는 “백두산동쪽”이라고 한것과 틀리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없고 三姓地区를 찾을 수도 없다。중국의 근대 청나라 역사학의 정초자인 맹삼(孟森1868—1937)은《明清史论著集刊正续编》에서: “북구려 영웅은 타국의 왕으로 되여 대조(청제국)의 판도내에 있으나 천자를 배알하지 않으니 부하들을 다스릴수 있겠는가。그들이 차지한 지역은 오목해의 오두리성이다. 오목해는 후에 어묵해로 개명하고 오목한곳이라고 하며 오두리는 후에 어두리라고 개명하고 오다리鄂多里라고도 불리우는 데 백두산동남쪽이다”。
  
   《实录》에는 또경조이후 헤투알라에 거주하였는데 오두리성에서西천오백리(1500리)된다고하였고《东华录》에서는 西자가四자로(4500리)되였는데 어느것이 틀리는지 알수 없다. 청제국의 여러황제들은 조상의 뿌리를 찾기위하여 요동과 송화강유역에서 임의로 장소를 선택하여 어목해어두리로 지정하고 실제지역이라 하였다.
  
   또 3성(三姓)에 따라 송화강이북을 3성지역이라고 억지로 갖다맞추었다.。그러나 억지로 지어낼수로 더욱 부합되지않는법이다.사실은 처음에 전설을 기록한《实录》은 수정을 하지 않은 원본으로 “어목해지역의 어두리성은 백두산동남임”이 확실하다.그러나 후에 남(南)자 한 글자를 빼버리였는데 사실은 고려경내이지 송화강지역이 아니다.(중국측주장)
  
   “일본고고학은 조선종성의 오목해(斡木河)가 실제 《청실록(清实录)》에서 말하는 어목해이다고 하였는데 가장 정확하다.”[5](P65-66) “청나라가 중원에 진출하기전에 여진본인들은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시조의 고향인 오두리가 백두산동쪽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중원으로 진출(入关)이후 순치황제나 강희황제시기에 이미 원로들은 모두 없어지고 문자고증은 모두 중국한족손으로 하였기에 명나라사람들의 안광으로 조선과의 변계를 보았기에 함경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믿고 자기들의 조상의 지역을 버리고 백두산이서라고 주장하면서 흥경을 뿌리고 삼았다.[5](P73)
  
      두만강지역과 건주좌위 여진 즉 누르하지의 조상과 밀접한관계가 있다고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두만강지역의 조선함경북도와 연변(간도) 조선민족의 전설과 지리명칭에서 단서를 찾아본다.
  
   3) 두만강지역의 조선민족 전설속에서 누르하지
  
   두만강지역의 조선민족전설중에서 함경북도 회녕군과 경원군에서 전해지는《청태조전설(清太祖传说)》[6](P34-40) 중에서 누르하지의 이미지와 연변용정에서 전해지는《누르하지출생전설(努尔哈赤诞生传说)》및《한왕산전설(汗王山传说)》비교[7]
  
   《청태조(清太祖传说)》과《누르하지(努尔哈赤诞生传说)》전설은 모두 후백제의 견훤전설과 일본의 《三轮山传说》과 유사한바 모두 “夜来者型传说”이다。중국의 민간문학연구학 ㄱ종경문이 수집한 조선족의《清太祖》传说:  
  
   조선회녕의 두만강변에 이좌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결혼나이를 넘은 딸이 있었는데 결혼하기전에 임신하였다.이일을 알고 부모들은 매우 노여워서 딸을 고문하였더니 밤마다 어떤남자가 자기방에와서 자고는 새벽이면 떠나간단다.。부모님은 이 괴한의 정체를 알기위하여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서 딸보고 남자의 옷에 꽂으라고 하였다.。
  
   이튿날아침 날이 밝자 실따라 찾아가니 명주실은 강을 건너 산속에 들어갔다. 알고보니 명주실은 산속의 고성(古城)의 못에 들어갔다。못의 물을 다 퍼내자 몸에 바늘이 꽂힌 수달(水獭)한마리가 못속에 엎디여 있었다. 이좌수의 딸은 남자아기를 낳았으니 이아기는 머리카락과 눈 및 피부가 모두 누르스름하였다.그래서 누르하지(누르스레와 누르하지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중국은 주장)라고도 불리웠다.
  
   이아기가 후에 어떤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은 3형제낳으니 그가운데 셋째가 청태조 황태극이다.
  
   조선회녕군과 경원군에서 전하는《청태조(清太祖)》전설은 상기의 소재외에 또”풍수선생”소재와 “천자의검”소재 “이적夷狄”소재가 더 첨가되여 있다.
  
   중국 연변(간도)용정시 삼합 등지의 조선족들속에 전해지는 《누르하지전설》은 비록 함경도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갖고 온 전설이지만《한왕산전설(汗王山传说)》부분이 첨가되여 회녕군의 《清太祖》중의 “강을 건너 이전의 3성(三姓)지구에서 누르하지의 부친 수달을 발견하였다는 소재와 연관이 있기에 흥미롭다.
  
   한왕산은 중국용정시 부유향조동촌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회녕과 강을 사이두고 마주있다.。산위에는 산성(山城)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한왕 누르하지가 세운 것이며 한왕산이라고 한다.。일찍 누르하지가 산성에 있을 때에 주변에 두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3형제가 대치하고 있었다.。한왕누르하지는 힘이 장사여 보검과 준마를 갖고있었기에 두장군은 적수가 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满族源流考》에서 말하는“만족의 북구려옹순은 오목해평원의 오두리성에 자리잡고 3성(三姓) 즉 여진인3부락을 평정하였다는 주장과 부합된다. 연변대학 崔羲秀교수는 이러한 전설에 근거하여 누르하지의 선조발상지는 회녕부근이라고 하였다.
  
   언어학으로 고찰하면 이 주장의 정확함을 알수있는 흥미로운 일이다.。
  
       조선의 회녕은 백두산 동쪽이며 만족이 말하는 방위와 일치하다.。특히 전설속의 세 성씨가 생활한지역은 회녕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만주어에서 “삼三”ilan(여진말로도 ilan)。“성姓”은hala이다。그러므로 三姓은 만주어로 “ilanhala”。부분학자들이 만주족의 발상지가 흑룡강 이란현이라는 원인도 만주어의ilan(三)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어“ilanhala”는 합성어로서 만일 앞의 단어 이란ilan을 한족말로 번역하고 뒤의 단어hala를 그대로 발음하면“三hala”즉 삼하라“三哈拉”이다。“삼하라三哈拉”는 변이되여 삼하“三哈”로 또다시 삼합“三合”으로 변하는것은 아주 가능한 것이다。“三合”마침 회녕과 마주하고선 중국의 三合镇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용정시三合镇의 三合가 실제 만주어 절반과 중어 절반으로 된 지명이다.。누르하지의 출생전설은 조선 회녕 중국 삼합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한왕산은 삼합의 서쪽에 있다.그러므로 한왕산의 산성이 오두리 산성이다.[7](P12)
  
   그때 조선반도 함경북도에 번호-“성아래 야인”이 살고 있었다.。소위 “성아래 야인”이란 명나라 이전에 이곳에서 생활한 여진인 후예와 명나라 초기에 이곳으로 이주온 오두리 우량하 우디하부락을 지칭하는 데 와르크라고도 한다. 1609 년 누르하지는 명나라에 상서하여” 린국 조선경내의 오르크인은 모두 우리에게 예속되므로 조선에 거주하는 자를 조사하여 돌려달라”고 하였다.[8]
  
   그러나 이들 여진인은 1945년 8.15광복을 맞으며 대부분 조선내지인 이남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은 동부기원설을 부인하고 북부 흑룡강기원설을 주장하는데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 전후(약15세기전후) 조선회녕과 용정시 삼합일대가 누르하지의 조상의 주요 활동지역이였다. 만족의 기원전설도 이지역을 배경으로 산생한것이다.
  
   4) 두만강지역의전설에서이성계의 여진인이미지
  
   두만강연안에서 함경북도 6진(6개군읍)과 간도지역에서 비중이 가장 큰것이 조선왕조 이성계에 대한전설이다. 예를 들면 경원군에서 전하는 《적도赤岛》 《적지赤池》、《명사수善射手》、《천자와 국왕을 출생시키는 풍수명소 能出天子和国王的'118;水宝地》[6], 그리고 허해룡이 함경남도 북청 함경북도 명천에서 전해지는 전설《이성계와동두란李成桂和佟道兰》전설을바탕으로 한《李成桂》[11](P1-107)등에 많은 여진인이 등장한다.
  
   《이성계李成桂》에 따르면 이성계가 젊었을때 동두란이라는 여진인 출신의 딱친구가 있어 이성계의 한쪽어깨처럼 도와주었다. 이 작품은 허구가 아니며 전설을 바탕으로 한 야사형식의 역사소설이다.。이소설에서 나오는 동두란은 누구인가(작가가 동佟도랑을 잘못기술한것이 아니고 함경북도명천에서 줄곧 동두란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주해에서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을 동멍구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명실록》에는 “신종만력17년 9월 신미에 건주의 오랑개(獒琅开)추장인 동누르하지를 개원도독감사로 봉한다(童努尔哈赤为开元道督监使)”고 기록 되어 있다. 이로 부터 청태조 누르하지는 성이 동(童)이다.
  
   《동이고략东夷考略》는“누르하지 성은 동씨이다(努尔哈赤姓佟)。”佟씨는 여진인가운데 대가족에 속하며 童과佟은 음이 같으므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즉 청왕실의 성씨가 동임은 확실하다[10](P156) 사실은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은 명나라 관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로부터 만호로 책봉되였고 세조는 또 그를 상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명나라 선덕8년(1433년), 멍구태물과 그의 아들 아구는 다른 여진인 칠성부락에 의하여 사살되였다. 요행 생존한 다른 한 아들 동창(童仓)과 범철(凡察)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이성계의 관계가 밀접함을 제시해준다. <<이성계>>에서 등장하는 여진인 동두란은 실재인물로 고려말기의 장군이며 조선왕조초기의 개국공신이며 젊은시절에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1331—1402)이다.
  
   이지란의 원래성은 동씨이고 본명은 고려둘한태물(古论豆兰帖木儿-구룬도란테무얼)이다. [12](《李之兰》,P255》태물은 몽골이름으로 대다수 여진인들은 이름뒤에 태물이라고 붙이였다. 이성계의 조부인 이춘의 몽골명은 부연태물孛'068;帖木儿 마찬가지로 태물이라는 말이 뒤에 붙는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몽골이름은 우루사불화吾鲁思不花이다.
  
   그러므로 古論은 고려를 의미하는것이 아닐까 고려의 장수로 있었으니 둘한(두란)은 당연히 이름이며 그래서 그의 고향인 함경남 도북청에서 전하는 전설에는 동두란으로 전해지고 있는것이다.[6] (P70-72) 이지란은 이성계를 따라 남정 북벌하면서 무수한 공을 세웠으며 건국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날로 팽창하는 권세욕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전하는<<황제와 국왕을 산출하는 풍수지리>>[6](P32-33)라는 전설에는 동해의 가운데 돌섬이 있는데 룡의 기운이 가득하여 황제를 산출하고 국왕도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 섬을 발견하였으나 수영을 모르기에 동두란을 시켜 건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누르하지가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신빈현의 압록강변의 평안북도의 전설에는 누르하지와 관련된 전설이 한편도 없다.
  
   이는 두만강 회녕일대가 누르하지의 조상이 발원한곳임을 제시한다. 상기의 전설들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소위의 문명의 편견으로 인한 야이-여진인에대한 잘못된 태도로서 이러한 진정한 원인은 중국의 한족문화에서 기원한것으로 소중화주의 관념으로 인한 누르하지에대한 차별이다. 사실은 여진인과 조선인은 인종적으로 유전적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깊은 혈연적관계를 갖고 있다.
  
   여진인들은 조선인을 대함에 있어서 “非我民族 타민족”이 아니라 동일한 민족으로 보았으며 사실또한 본질적으로 보면 동일한 민족이나 분업으로 인한 문화상 잠시적으로 낙후할뿐이였다. 누르하지는 만주를 통일한 후에도 만주8기 한족8기 몽골8기를 두었으나 유독 조선인을 모두 만주8기에 편입하였다. 이는 현재 신빈일대의 만주인이 사실상 고려말기 이주해 온 조선인이라는 것을 통해 알수 있다.
  
  필자: 김관웅(연변대학 교수, 문학박사)
  
       参考文献:、
       [1]金史·世纪·卷1[A].姜龙范,刘子敏.明代中朝关系史[M].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9.
       [2]姜龙范,刘子敏.明代中朝关系史[M].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9.
       [3]斡朵怜[A].辞海·民族分册[Z].上海:上海辞书出版社,1982.
       [4]满洲源流考·卷1[A].姜龙范,刘子敏.明代中朝关系史[M].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9.
       [5]孟森.明清史论著集刊正续编[C].石家庄:河北教育出版社,2000.
       [6][韩]韩国传说·咸镜北道篇、咸镜南道篇、江原道篇[A].林锡载全集(4)[M].汉城:平民社,1989.
       [7]崔羲秀.朝鲜民族传说中的努尔哈赤[J].艺术世界,1993(1).
       [8]董万伦.东北史纲要[A].姜龙范,刘子敏.明代中朝关系史[M].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9.
       [9]吉林省文物志编辑委员会.延吉市文物志[Z].1986.
       [10]吕思勉.中国民族史略[M].北京: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1987.
       [11]许海龙.李成桂[A].许海龙.第三个秘密[M].延吉:延边人民出版社,1990.
       [12]韩国精神文化研究院.韩国民族文化大百科辞典[Z].
       [13]黄枝莲.天朝统治体系研究(下)[M].北京:中国人民大学出版社,1995. 

 

 

 

입력 2015-03-11 11:38  수정 2015-03-11 18:33

太祖 이성계 父親의 여진계(女眞系) 이름은 '울르스불카' | Save Internet 뉴데일리 (newdaily.co.kr)

김필재

太祖 이성계 父親의 여진계(女眞系) 이름은 '울르스불카'


祖父 이춘(李椿)의 이름은 '바얀 티무르(Bayan timur)'

 

여진족(女眞族)은 중국의 요령성·길림성·흑룡강省과 러시아 연해주·하바로프스크·아무르州, 그리고 한반도 북부(함경도) 지방에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의 북방민족이다. 사실상 부여·고구려·발해·신라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이들 여진족은 淸 황제의 명에 따라 훗날 만주족이 된다.
 

▲ 태조 이성계

 
여진족의 ‘여진(女眞)’ 또는 ‘숙신(肅愼)’은 ‘주센(주셴, jusen)’을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 합의된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여진족을 jurchen이라하는데, 이는 몽골어에서 여진족을 부를 때 사용했던 ‘주르첸(jurchen)'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朝鮮이라는 국호도 사실 ‘쥬신’, ‘여진’, ‘숙신’을 한자로 표기(예: 징기스칸→성길사한·成吉思汗)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女眞族들은 朝鮮 건국 후 대거 한반도 북부에 들어와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帖木兒’(첩목아=‘티무르’)가 들어가는 여진족 이름이 총 343건이 검색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성계(李成桂)의 할아버지 李椿의 원래 이름(Bayan timur)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문: 度祖諱椿, 小字善來, 蒙古諱孛顔帖木兒, 受宣命襲職。(해석: 도조(度祖)의 휘(諱)는 이춘(李椿)인데, 어렸을 적의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蒙古)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이다. 선명(宣命)을 받아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재미삼아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李子春) 이름을 찾아 보았다.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원문: 桓祖諱子春, 蒙古諱吾魯思不花。 齠齕異凡兒, 稍長善騎射, 及其襲職, 士卒樂附。 咬住稍長, 桓祖欲以職事歸之, 咬住讓而不受。 咬住後從桓祖, 來見恭愍王, 王屬之亏多赤, 官至中順軍器尹。(해석: 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 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군기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李成桂의 조상이 모두 북방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祖父의 이름에는 역시 ‘티무르’가 들어가 있었으며, 父親의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중국 홈페이지에서 吾魯思不花의 영어발음을 검색해 보니 ‘Ulus-Buqa’로 원래 발음은 ‘울르스불카’였음을 알 수 있다.
투르크語 ‘티무르-테무르’는 ‘쇠’(鐵: 철)를 의미
‘티무르’는 매우 흔한 북방민족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몽골 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였던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이름이 바로 ‘티무르’(재위기간: 1370~1405년)였다. 북방 민족들은 고대로부터 철을 잘 다뤘는데, 투르크語 ‘티무르’ 또는 ‘테무르’가 바로 '쇠'(鐵: 철)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내몽골대학 교수는, 1392년 朝鮮을 건국한 이성계는 몇 대에 걸쳐 성장한 고려계 몽골 군벌 가문 출신으로 원(元)나라의 직할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서 거의 100년간 몽골 관직을 맡아 세력을 쌓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성계의 휘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다. 세종 19년 8월 7일자(1437년 9월 6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최측근인 여진족 이지란(퉁두란, 쿠란투란 티무르)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 외에도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등을 비롯한 10여 명 이상의 여진족 세력가들이 이성계를 보필했다. 
바타르 교수는 이성계 가문은 직계 4대조까지 모두 북방 민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성계 자신도 북방민족 계통의 원래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필재(金泌材, 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관련 글] 女眞의 영웅 新羅 출신 김함보(金函普)

▲ 건륭황제, 이름은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즉 김홍력(金弘曆)이다. / Puyi's younger brother changed his name from Aisin-Gioro Puren (愛新覺羅溥任) to Jin Youzhi (金友之) and his children in turn are surnamed Jin. /푸이(金溥儀) 황제의 동생은 훗날 이름이 김우지(金友之)가 됐다는 의미.

 
金의 조상이 신라 출신이라 해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지않은 한국의 識者층은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주> 
만주지역에 거주했던 민족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역사에서 이들은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Jurchen, 쥬신), 그리고 만주로 불렸다. 만주족이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된 이유는 이들의 역사를 漢族이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들 민족은 현재 북한과 만주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한민족의 고대왕조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후손이기도 하다. 한국인과 만주족은 모두 백두산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으며, 백두산은 이들 민족의 성지이다.
고대 삼국시대 신라 출신 김함보가 북방으로 진출해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규합해 金나라(愛新, 아이신)의 시조가 됐다. 金의 후손들은 이후 後金을 세워 스스로를 '만추'(Manchu)라고 칭했다. 이후 이들은 국호를 대청제국(大淸帝國)으로 바꾸었다. 金과 淸을 건국한 여진족은 자신들의 기원을 '신라'에서 찾았고, 朝鮮族은 자신들의 기원을 '고려'에서 찾았다.
1777년 淸제국은 건륭황제(Qianlong Emperor)의 명을 받들어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를 편찬했는데, 만주족의 기원을 밝힌 이 史書는 고대 한반도 국가인 고구려를 만주의 일원으로 보았다. 만주원류고는 자신들의 기원을 新羅라고 밝히고 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Korean connection to Manchus
출처: ‘알타이 위키’ 영문페이지
Peoples living in Manchuria were called in many different names: Suksin (Sushen), Eupru (Yilou), Mulgil (Wuji), Malgal (Mohe), Jurchen (Yeojin/Nyeojin, Nuzhen/Ruzhen, Jusin/Jushen/Juchen), and Manchu (Manju) in history.
They were the peoples living in current North Korea and Manchuria. They were also the peoples of ancient Korean kingdoms: Go Joseon (2333 BC - 108 BC), Goguryeo (37 BC - 668), and Balhae (698 - 925). Both Korean and Manchus explained their origins from Baekdu Mountain (Chanbai, Golmin Šanggiyan Alin), and regarded the mountain as a sacred place.
After the Later Three Kingdoms period (892 - 936) of Korea, a people led by Hambo moved from Silla to northern Korean peninsular, and founded Jin (Aisin) dynasty (1115 - 1234) unifying Jurchen tribes. When their descendants restored Jin dynasty in 1616, they coined the term Manchu referring to themselves. (It's said that the term Manchu originated from Manjusri in Buddhism.) They changed the name of their dynasty from Jin to Qing in 1636.
[원문] 金史: 本紀第一, 世紀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栗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傳十余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於高麗。嘗以兵十五萬眾助高麗拒唐太宗,敗於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於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裡俱。始祖居完顏部僕干水之涯,保活裡居耶懶。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蓋自謂阿古乃之後。石土門、迪古乃,保活裡之裔也。及太祖敗遼兵於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斡荅刺招諭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始祖至完顏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哄斗不能解。完顏部人謂始祖曰:「若能為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當以相配,仍為同部。」始祖曰:「諾。」乃自往諭之曰:「殺一人而斗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無'717,而且獲利焉。」怨家從之。乃為約曰:「凡有殺傷人者,征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即兩解,不得私'717。」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既備償如約,部眾信服之,謝以青牛一,並許歸六十之婦。始祖乃以青牛為聘禮而納之,並得其貲產。後生二男,長曰烏魯,次曰斡魯,一女曰注思板,遂為完顏部人。天會十四年,追謚景元皇帝,廟號始祖。皇統四年,號其藏曰光陵。五年,增謚始祖懿憲景元皇帝。
Jurchen people (especially who founded Jin and Qing) claimed the successor to Silla, while Joseon people claimed the successor to Goryeo.
 Qing government published the history book called Researches on Manchu Origins (滿州原流考) under the supervision of Qianlong Emperor in 1777. It's about their origin to define Manchu tribes, and included ancient Korean kingdoms except Goguryeo as members of Manchu. In this book, Manchus explained their origin from Silla.

 

 

  • 입력 2016.04.05 11:31 수정 2018.11.19 23:04
  • 기자명신완순 
금나라는 대륙 북부를, 청나라는 모두 차지했다.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여진 금(金)나라...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소위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의 이분법적 세계관 틀 속에서 모든 사물과 역사를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주의에 몰입된 비자주적이며 편협한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으며 우리의 역사와 얼의 싹을 잘라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광복 70 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중국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자기들이 천하의 중심인 중화이며 우리는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라고 부르고 야만인이라 생각하는 흉노나 선비, 거란, 말갈 등을 우리도 중국이나 우리보다 못한 천박하고 비루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여진(女眞)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에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내몰고 아홉 성을 쌓은 곳이 두만강 이북 7백리 선춘령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여진이라는 말의 뜻이나 여진의 역사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다. 여진하면 함경도 일대부터 그 북쪽 변경에 살던 부족으로 고려를 괴롭힌 오랑캐 정도로 인식하는 막연한 역사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진, 고조선 후예.... 야만스런 오랑캐 아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나라의 본래 이름은 주루준(珠嚕凖)이었는데 설음(舌音)이 와전이 되어 여진이 되었으며 혹은 루르진(魯爾錦)이었다고 한다. 혹은 발해의 별족(别族)이라고도 하고 또는 삼한의 하나인 진한(辰韓)의 후예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대금국지>에서 주리진(珠里眞)이라 하였다. 만주어에 소속(所屬)을 주신(珠申)이라 하는데 주리진과 음이 서로 가까우며 완급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모두 숙신(肅愼)이 바뀐 음이다. 후에 여진 혹은 려진(慮眞)으로 와전이 되었다. 숙신의 후예이며 발해의 별족이다.”라고 하여 여진이라는 말의 유래와 뿌리를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북애자가 편찬한 <규원사화>에도 “여진은 숙신의 후예이다. 그 옛 풍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믿음에 예의와 정성으로 한다.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여진이 야만스런 오랑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옛 성스러운 임금’은 단군을 말한다. 그런데 청나라 서건학(徐乾學)이 편찬한 <자치통감후편>과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 대신 ‘개출자연(皆出自然)’이라 바뀌어 있다. 개출자연은 “대개 자연스럽게 생긴 풍속”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골타(阿骨打, 1068년 ~ 1123년)이며 <요사>와 <송사>는 아고달(阿古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만주어 ‘아구다(Aguda)’를 가차한 것이며 ‘너그럽고 넓은 아량이나 모양(寛濶)’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구다는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9년(1115년 ~ 1123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한자식 휘는 민(旻)이다. 그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이었으며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하고 요나라를 공격하였다.

▲금나라 태조 김아구다의 모습. 조우(鳥羽)로 된 모자 깃이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임을 말해 주고 있다.

 

신라의 9주, 현 만주 지역 포함

금나라의 시조에 대하여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는 “<통고>와 <대금국지>에는 모두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요사>나 <금사>에서는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덧붙여서 “사전(史傳)의 기록으로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여 온 것인즉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건국한 나라의 이름 또한 당연히 이것을 취하였다. <금사지리지>에서 나라 안에 금이 있는 물줄기가 있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며, 전거로 삼기에 부족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금나라의 시조와 국명의 연원이 신라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이처럼 금나라의 연원이 신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부족’편과 ‘강역’ 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9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사습유(遼史拾遺)>와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録)>을 인용하여 신라산(新羅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동주(同州)에 이르면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보이는데 신라산이며 산의 깊은 곳과 더불어 고려와 경계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이 신라산은 오늘날(청나라 건륭제 당시)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의 사이’라고 하고 있어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으며 고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를 뜻하는 ‘계림(鷄林)’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한자 독음으로는 ‘길림’과 ‘계림’이 서로 다르지만 현 중국어 발음으로도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다. 김함보가 추장으로 있었으며 아구다가 금나라를 세운 요나라의 완안부가 신라의 강역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완안(完顔)’이라는 말은 <대금국지>에서 한어(漢語)로 왕(王)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신라왕의 후손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금나라의 시조인 김함보는 신라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라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도 <금사>에서 “완안부 사람들이 밝은(白) 것을 숭상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금(金)을 취하여 ‘대금(大金)’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어 성(姓)과 그 뜻을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금나라, 대부분 고구려와 발해 부족들로 구성

완안부 세력을 규합하고 금나라를 세운 태조 김아구다(완안아골타)는 요(遼)나라를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서성의 대동(大同), 하북성의 연경(燕京)으로 진출하였다.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하남성의 변경(卞京)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임금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나라는 만주 전역과 내몽골, 하북성, 하남성, 섬서성, 산서성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제3대 희종(熙宗,재위 1135∼1149)때에 회수(淮水), 섬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남송의 임금은 신하의 예로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 필을 매년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의 대부분과 만주와 유라시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금나라의 강역을 표시한 중국역사지도집 -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금나라가 이처럼 요나라에 이어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금나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군사 조직으로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는 맹안모극을 군사 행정 제도로 실시한 금태조의 강력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금나라의 군사제도는 후대에 금나라를 이었다고 하여 후금(後金)으로 불린 청나라의 8기(旗) 군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1115년 건국하여 1234년 몽골에게 망할 때까지 120년간 존속한 금나라는 정복전쟁만 일삼은 것이 아니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문화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제5대 세종(世宗, 재위 1161∼1189)때는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였으며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여진 문자는 1119년에 태조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존속기간 만에 금나라가 멸망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규원사화>의 ‘만설’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나라의 폐단은 한 때의 이익에 급급하여 오랜 폐악을 답습한데 있었으니, 그 중엽에 이르러 요(遼)의 검소하고 소박함을 깔보고 송(宋)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글을 따랐으며, 송(宋)의 너그럽고 부드러움은 제재하고 요(遼)의 엄격한 정치만을 더하게 되었다. 이는 두 나라의 장점을 버리고 그 단점들을 아울러 쓴 격이다. 그러한 까닭에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기승을 부리니 재정은 바닥이 나고, 엄격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백성들은 피해를 입었다. 무릇 나라의 살림이 고갈되고 백성의 마음이 떠났는데 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여 같은 고조선의 후예인 금나라 멸망을 한탄하고 있다.

금나라가 흑수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요동과 만주를 석권하고 장성을 넘어 변경을 도륙한 뒤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내쫓았다. 그랬더니 송나라의 군신이 신하를 자칭하고 목숨을 구걸하고 아첨을 떤 일은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을 통탄한 것이다.

 

여진이던 말갈이던 우리의 '사둔(一家)'

금나라는 멸망 이후 4백 년이 흐른 17세기 중반에 청나라의 중원대륙 제패로 다시 한 번 부활하였으나 금나라를 바라보는 고려의 시각이나 청나라를 바라보는 조선의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부모의 나라에서 형제의 나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청나라의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진 말 중에 ‘사둔(Sadu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친척 집안(親家)’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사둔’ 또는 ‘사돈’과 음과 뜻이 같은 말이다. 원래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사돈을 맺는다.’는 말로서 남녀 개인 간의 결합뿐만이 아닌 다른 집안끼리 친척이 되기로 맺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한집안(一家)이 되는 것이다. 말갈이라 부르든 여진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배달 고조선 고구려를 거쳐 이어온 같은 강역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는 ‘친척 집안’이며 일가(一家)이다. 금나라의 뿌리가 신라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이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었고 그 땅이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전향적인 연구와 인식이 절실하다.(완)

*글 :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입력 2018. 3. 10. 03:36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유학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유학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동이족 여러 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로 보이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요, 금, 청 백성들은 모두 고구려와 발해 백성들 후예였으니 이들 역사가 우리 역사일 수밖에 없다.

 

신라와 발해, 금과 고려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서로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의 대상으로 보았다. 요는 송(宋)을, 청은 명(明)을 정복하기 전에 배후 정지 작업으로 각각 고려와 조선에 침입했다. 3차에 걸친 요의 고려 침입은 실패했다. 조선과 청나라는 전쟁 없이 공존할 길이 있었다. 광해군이 실제 그런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과 조선 사이에는 병자호란이 있었고 조선이 항복했다. 조선의 자업자득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기 1623년 인조반정 명분은 사실상 망한 명(明ㆍ1368~1644)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였다. 인조 정권은 힘도 없으면서 사대주의에 찌들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명을 멸망시킨 불구대천 원수로 삼았다. 그러니 청은 조선을 손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국제 정세에 어둡고 사대주의 명분론이 불러온 참화였다. 그러나 청은 조선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 조선 지배층은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1910년 일제에 나라가 망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사림 영수로서 태두가 된 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창하는 힘으로 애국의 의리를 주창했다면 어찌 나라가 망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반성이다. 그랬기에 ‘꿈에 금 태조 아골타를 뵙고 절하다’(夢拜金太祖)라는 글을 남겼다.

사대주의는 중국인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자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여진족 금 태조 아골타가 박은식 선생에게 우리의 영웅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교헌 선생은 조선이 1910년에 일제에 망하고 청나라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하자 “배달민족 국가가 남북조에 걸쳐 한꺼번에 끊어짐은 초유의 일이다”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을 개척했고 대종교 2세 교주로서 대일항쟁 선두에 서신 분이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역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자 오랑캐 역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역사가는 광복 후 남북 분단을 남북국 시대로 부를 것이다. 지난 세월 남한과 북한은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보다 더 심한 이념 대결로 일관해 왔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도 있었다. 최근 극우 정권은 남한과 북한 관계를 6·15 선언 이전 대결 국면으로 돌려놓았다.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여 평화와 공존을 이룩한 우리 선조의 남북국 시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결과다.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 간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남북한이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서로 인정하여 공존하면 전쟁 위험은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남과 북의 동질성이 회복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먼저 남북국 간에 오고 감에 제한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평화적 공존을 통해 번영하는 신남북국 시대를 기대해 본다.

 

 

입력 2013-08-12 00:02:18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중국의 통일왕국 송나라의 두 황제를 사로잡아 무릎 꿇린 여진족의 금나라는 당시 중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각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조선왕조 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했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서는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의 항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엄연한 단군의 후예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리(高句麗)의 후예가 대진국(발해)이고 또 대진국의 후예가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이며, 금나라를 이은 것이 청나라인데 어찌 대진국(발해)까지만 우리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록의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금나라의 뿌리는 우리와 같다
 
<금사세기>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신라)에서 왔다”고 했으며, 금 태조 아골타가 요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 발해인을 초유하면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사강목>에 고려의 윤관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공적문에 “여진은 본시 고구리의 부락이다. 본디 고구리가 영유한 곳이어서 옛날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고 돼 있어 고려에서도 여진이 고구리의 후예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사세기>에 “금의 선조는 말갈로부터 나왔다. 옛 숙신의 땅이다. 5대 때에 거란에 복속되었다. 강의 남쪽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어 숙여진이라 불렀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 지역은 이른바 백산과 흑수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생(生)과 숙(熟)은 곧 신(新)과 구(舊)의 뜻이라고 한다. 
 
 ▲ 금나라 황실 가계도 및 금 태조 아골타의 동상. <사진=필자제공>

말갈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를 구성하는 주요부족이었다. 그렇기에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말갈은 15만 군대로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과 함께 싸웠던 것이며, 고구리가 망하자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는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리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왕의 성은 대씨이다”라는 기록과, <요동행부지>에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있으며 실제로는 말갈의 속말부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대진국(발해)가 말갈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말갈에 대해 <대금국지>에는 “여진은 말갈의 후예이다. 북위·제·주나라 때에는 물길로 불렸고 수나라에 이르러 말갈로 불렀다. (중략) 거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말갈은 옛 숙신씨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원사지리지>에 “흑수말갈이 발해에 복속되고 발해가 약해지자 흑수가 다시 그 땅을 회복하니 금나라 시조의 부락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금국지>에는 “금나라 시조 1세 함보(函普)는 처음에 신라에서 왔고, 완안부에 살았기에 성을 완안(完顔)씨라 했다. 신라왕의 성은 김씨로 수십 대를 이어졌다.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나라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따왔다”라는 기록과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珠里眞)으로 숙신(肅愼)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것이 뒤에 잘못 전해져 여진(女眞, 慮眞)으로 불렸으며 숙신씨의 후예로 발해의 별족이다.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어 2세 오로, 3세 아랍, 4세 소혁, 5세 실로, 6세 호란, 7세 화륵박으로 이어졌고, 8세인 금 태조 아골타는 화륵박의 둘째 아들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이다. 1115년 태조가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고치고 연호를 천보(天輔)라고 했다가 수국(收國)으로 바꿨다. 이후 금나라는 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 송나라를 공격해 두 황제를 사로잡는 전성기를 누리다 건국 120년 후인 1234년 칭기즈칸의 몽골에게 멸망당한다.
 

 ▲ 감숙성 경안현에 있는 금태조 아골타의 4째 아들 김올출의 비문 .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서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했다”고 말하고 있다. 금 태조의 4째 아들 완안올출의 후손들이 현재 감숙성 경안현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모시는 사당의 비석에는 ‘김올출’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금나라 황족은 김씨였으며, 감숙성 경안현까지 금나라 영토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에 누루하치라는 만고의 영웅이 나타나 1616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나라를 세우고는 금(金)이라 했다가 아들 태종 때 대청(大淸)으로 바꾼다. 태종은 명나라를 도모하기 전 후한을 없애고자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임금에게 항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청 태종이 인조임금을 죽이고 조선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은 서로 동족이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어 처음으로 일어났던 동방은 왕조를 일으킨 기반으로서 땅이 신령하고 상서롭다”고 하면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말갈, 발해, 신라, 백제, 금을 만주족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즉, 그들의 조상이 우리와 같다는 말이다.
 
책 서두에 있는 황제가 내리는 유지에서는 당시 한족들이 명나라를 없애고 들어선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반청의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건륭황제는 “그렇다. 우리는 소위 너희가 말하는 동이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순임금과 주무왕도 모두 이족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너희가 존경하는 맹자가 직접 ‘순임금은 동이사람이요, 주무왕도 서이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건륭황제는 “즉 동이·서이는 단지 동서 지역을 가르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명나라 출신들은 주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니 서이사람이고, 우리 청나라 사람들은 동이사람이다. 동이사람 순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서이의 후예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말했다.
 
 ▲ 동이족의 땅이었던 산서성 남부 명조가 원의 1시 방향에 그려져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건륭황제 유지의 근거로는 맹자가 <이루장구 하>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라고 했으며, 또한 맹자가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사람이었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족들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로 흔히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만주어로 애신은 금이라 금원(金源) 또는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즉 우리말로 ‘김씨네“라는 뜻이다.
 
 ▲ 건륭황제의 7대손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약 300년간 중원을 지배했던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문을 닫는다. 이는 대제국 고구려가 그때까지 이어지다가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려면 고구리와 대진국의 후예인 요, 금, 청나라의 역사를 잘 밝혀야 할 것이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  홍원탁
  •  승인 2005.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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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258년의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一然, 李奎報, 李承休, 柳得恭 등의 글은 요동을 포함하는 고구려의 만주 전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동부 만주 삼림족이 서부 만주 유목민을 대체: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서울대 교수 홍원탁

 

금사(金史): 완안부 시조는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다

 

 

1034-44년이 되자 북동 변방지역에서 발해 유민, 생 여진족, 고려인 등이 합세하여 거사를 한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고, 거란족의 요 조정은 토벌 원정군을 계속 보내야만 했다. 1 거란족은 (발해 주민을 구성했던) 말갈-여진 사람들을 요 나라의 구성원으로 흡수했었다. 그래서 요의 통제를 받게 된 여진족은 '길들여진' 여진족이라 불렀고, 그 밖의 여진족은 '생' 여진족이라 불렀다. 2 동북방에서의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전쟁은 요 나라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1125년, 동부 만주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접수했다.

 

금 나라(1115-1234)를 세운 아골타(阿骨打)는 고려와 접경한 산악지대의 완안 부족(完顔部) 지도자였다. 아골타는 이미 11세기에 다른 생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지배 영역을 확장시켰다. 금사 본기 제1권을 보면, 금의 시조(900년 경의 인물인 완안부의 시조 函普를 의미)는 본래 고려에서 왔다(혹은 고구려 출신이다)고 말한다. 또 태조 아골타가 일찍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가족이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3

 

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 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이었다고 말한다. 만주원류고는 금사가 금 시조를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을 했지만, 요사와 금사는 종종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된 것이며, 김(金)이라는 신라 왕들의 성은 이미 수 십대를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면서 신라 왕성을 본따 국명을 금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4

 

동 만주의 삼림족

 

목초지의 유목민과는 달리 여진족은 사냥과 고기잡이에 못지않게 농업에 의존했다. 여진족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등의(반 유목, 반 농경) 혼합 경제를 영위했다. 그들은 삼림족이면서도 훌륭한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고유의 부족 조직과 사냥을 통해 숙달된 활 쏘기 말 타기 등은 주변의 유목민에 전혀 손색없는 군사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 부족 가구들은 세습적 지도자의 휘하에 모여 무리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변변치 않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들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해야 했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리품을 얻기 위해 마치 가족 내 일인 듯 싸움에 총력을 집중했다. 

 

여진족은, 항복한 한족이나 거란족까지 포함해,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들 본래의 부족장의 지휘 하에 새로운 군대 단위조직을 만들어 흡수했다. 일찍이 (349-410 기간 중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 명칭으로 등장했던) 선비족 연 왕조는 북중국을 통일한 또 다른 선비족인 탁발족 북위(386-534)에게 망한 것이다. 700여 년 후, 거란족의 요 나라는 (북송으로부터 중원을 빼앗아) 북중국 전체를 차지한 또 다른 만주족인 여진족에게 망한 것이다.

 

2원 통치제도의 답습
 
여진족 금 나라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의 2원 통치조직을 답습했다. Twitchett and Tietze는 금 나라의 "정부 행정 조직의 기본적 체제는 여진족 고유의 전통과 요 나라로부터 물려 받은 제도와 한족 송 나라 영향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여진족 금 나라의 사회-군사 조직은 만주족 [청 나라] 팔기군 조직의 선구자였다"고 말한다. 5

 

여진족은 1126년에 송의 수도 개봉을 포함해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양자강 남쪽 항주에 송 나라의 새 수도가 세워졌다. 1141년, 송 조정은 화이강(淮河) 이북의 전 지역을 정식으로 떼어주고 금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신속(臣屬)하기로 약속했다. 6 북중국을 모두 상실하기 이전의 송을 북송(960-1126)이라 부르고, 남으로 쫓겨난 후의 송을 남송(1127-1279)라고 부른다.

선비족 정복 왕조의 지배 귀족 씨족 출신인 수와 당 왕조의 창건자들은 팽창정책과 대국의 위세를 천하에 과시할 수 있었다. 당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송 나라는 당의 잔해를 거두어 나라를 세웠으나, 317년에 진 나라 지배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듯이, 여진족 금에 의해 중원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송은 달리(大理), 월남 등을 포함한 수많은 남방 영토를, 몽골에게 멸망되기 오래 전에, 상실했다. 7

 

여진족 조정은 1153년에 수도를 하얼빈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1161년에는 개봉으로 옮겼다. 금 나라 지배자들은 많은 여진족들을 북중국 정복지로 이주시켜 수비대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족들은, 금 나라 시대 내내, 만주에 그대로 남아 옛 전통적 생활을 계속했다.

 

여진족 금나라는 유목민 고유의 기병대에 손색없는 기병을 보유하는 전방 수비대들을 유지했다. 세습적인 여진족 군호(軍戶)들은 한족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농토와 노예들을 배정 받았고, 한족들과는 분리되어 정착시켰다. 하지만 여진족 병사들이 영농-수비대 생활방식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8

 

금의 정복을 피해 달아난 일단의 거란 귀족들은 서방으로 계속 이동을 하여 서요 왕조(흑거란, 1124-1211)를 수립했다. 9 다분히 몽골적인 이들 거란족이 몰려와 돌궐 유목민들을 복속시킨 것은, 100여 년 후, 징기스칸의 진짜 몽골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도 자신들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고 수도 개봉에 여진 언어 학교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10 금의 세종(世宗, 1161-89)은 여진족 지배층에게 전쟁과 사냥 훈련을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수도 개봉을 떠나 내몽골 혹은 만주 땅에 천막을 치고 혹독한 생활로 단련을 하면서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연마토록 강요되었다. Crossley(1997: 23)에 의하면, "세종의 실험은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후에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되는 만주족 황제들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경고도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족에 파묻혀 버린 여진족 이주민들의 중국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려와 금이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

 

요와 북송(960-1127)을 정복한 후, 금 나라 지배자들은 고려 조정에 신하-주군 (臣屬)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영토 보전의 대가로 금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고려는 본래의 영토를 보전하는 동시에 압록강 아래 땅을 추가할 수 있었다. 송 나라가 여진족에게 북중국 전체를 빼앗긴 반면, 고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여진족의 침략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송 왕조는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계속 남쪽으로 쫓기어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했는데, 놀랍게도 고려 왕조(918-1392)는 거란의 요(916-1125), 여진의 금(1125-1234), 몽골의 원(1206-1368) 등을 모조리 겪으면서 이들 모두보다 더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모두 다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비록 영토는 압록강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생왕국 명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 창건자는, 왕건 보다는 한 발 늦었지만, 실제로 그 넓은 만주 전 강역을 점령했고, 금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에서 왔다고 (혹은 고구려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일찍이 발해는 일본열도의 야마도 왕국과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자신을 고려라 불렀다. 11 금 나라를 세운 완안 씨족의 국가수립 이념은 생 여진족을, 고구려 사람을 선조로 하는, 발해의 유민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2

 

1136년, 고려 조정에서는, (묘청의 故土수복 이념-요즘의 평양인 西京이념-으로 대변되는) 고구려 법통을 신봉하는 파가(한반도 지배만으로 만족하는 신라 귀족 후손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신라 후계자임을 신봉하는 유학(儒學)파와의 싸움에서 패했다.13 이 싸움에서 유학파의 승리는 1170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문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고려를 한반도에 한정된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 신라 (677-935) 258년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발해와 신라를 북조와 남조로 설정

 

일연(一然), 이규보(李奎報), 이승휴(李承休), 유득공(柳得恭) 등의 글은, 고구려의 정신적 후계자들이 김부식의 왜곡을 교정하고 요동을 포함하는 옛 고구려의 만주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14 유득공은 고려 조정이 발해와 신라의 역사를 "북조와 남조의 역사"라는 구도로 편찬을 하지 못한 사실을 개탄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웅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웅거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웅거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들이 삼국을 이루어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들이 남북국을 이루었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물리치고 이전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 김씨의 땅은 전부 거두었지만, 북쪽 대씨의 땅은 모두 거두지 못했다. 일부는 여진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고, 일부는 거란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 발해가 요 나라에 멸망되었어도 … 발해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 장건상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편찬 했는데, 고려 사람은 어찌 발해 역사를 편찬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동아시아 역사 강의: 3-3 (2005. 8. 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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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Barfield (1989: 176-8) 참조.

2. 당 나라 때에는 “야만”의 생 여진족을 흑수 말갈이라 불렀다.

3. 金史 卷一 本紀 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兄…留高麗不肯從…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 涯 … 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금사는 고구려를 고려라 쓰기 때문에 이 기록의 고려도 고구려로 간주할 수 있지만, 函普가 900년경 전후의 인물인 것으로 보면 이 기록의 고려는 고구려가 아니라 신생 고려(918-1392)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금사 기록의 고려를 분명히 고구려로 간주한다.

4.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金之先出靺鞨氏古肅愼地也…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新羅 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金史 地理誌 乃云以國有金水源爲名 史家附會之詞未足憑耳  居完顔部
卷七 部族 完顔 遼 祥符三年 契丹征高麗道由女眞 女眞復與高麗合兵拒之 契丹大敗而還 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哈富生… 生…次太祖次太宗 …國號大金
卷七 部族 元  … 金始祖 本從 新羅來 號完顔氏 所部稱完顔部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出

금사 지리지를 보면 금이라는 국가 명칭은 송화강 하류로 흘러 드는 “아시”라는 강의 여진 명칭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금 조정은 이 외지고 작은 강 유역에 상경을 설치했었다. Janhunen (1996: 155) 참조. 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청 나라 황제들은 명백히 금 나라 시조가 자신들의 직계 선조라고 믿었다.

欽定滿洲源流考 卷首諭旨 上諭頃閱金史世紀云 金始祖居 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本朝肇興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5. Franke and Twitchett (1994: 265 and 273) 참조. Twitchett and Tietze는 여진족이 “요 나라와 접촉을 하면서 좀더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정부 형태를 인지하게 되자 전통적인 부족 조직 만으로는 거란족과 겨루어 볼 수가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Franke and Twitchett (1994: 220).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은 “요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한족과 유목민을 포괄하는 금 제국은 초원의 말과 북중국의 곡물을 통합 하고 송을 공격해 남쪽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6. Jagchid and Symons(1989: 134-5)은 “25만 량의 은과 25만 필의 비단을 매년 바치고, 남송 스스로가 금의 제후라 선언했다”고 말한다. 남송 황제는 여진족 금 나라의 지배자를 숙부 황제라고 불렀다.

金史 卷六 本紀 第六 世宗上 五年正月 宋…以國書來… 稱『姪宋皇帝』 稱名『再拜奉書于叔大金皇帝』

7. Hsiao (1978: 6-7)에 의하면, “8세기가 시작되면서 징집된 병사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용병들은 송 대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100만이 넘는 용병들은 북송, 남송 양 대에 걸쳐 정부 재정의 80% 이상을 이상을 소모시켰으나, 용병의 구성내용을 보면 대부분 굶주린 부랑자, 무위도식 꾼들, 그리고 범죄자들로 채워졌었다.

8. Hsiao(1978: 29)에 의하면, “여진족 병사들은 농경을 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받은 농토를 한족에게 소작을 주다가 마침내는 모두 팔아버렸다.” Hsiao(1978: 9)에 의하면, 1187년 호구조사에 등록된 450만 인구 중 45%가 세습 여진족 군호에 속했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에 의하면, 금 나라 때, [노예를 포함해] 여진족은 600만, 요 나라로부터 존속하는 거란족이 400만, 그리고 정복된 북중국의 한족이 3천500만으로 추계되었다.

9. Grousset (1970: 186) 참조. 서요(西遼) 왕조는 발카쉬 호수 남쪽 무슬림 투르케스탄에 위치 했으며, 영토가 하미로부터 아랄 해에 달하여, 카쉬가르, 탈라스, 타쉬켄트 등을 포함했다. 서요는 트랜스-옥시아나와 이란을 지배하고 있던 무슬림 돌궐족의 호와리즘 제국과 서쪽 국경을 이루었다. 몇몇 거란 부족들은 계속 서방으로 이동을 하여, 11세기 중엽, 우랄과 볼가강 지역에 이르러, 당시 러시아 초원을 지배하던 킵챡 돌궐족 지배층에 합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10.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참조. Crossley(1997: 21)는 여진족이 거란 문자를 약간 변형시켜 자신들의 말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고구려를 단순히 고려라고 기록한다.

12. Rogers (1983: 159) 참조.

13. Ledyard (1983: 152)는, 신생 고려 왕국의 군 출신 지도자들은, 멸망한 신라의 귀족들이 오랜 기간 체득한 전문적인 국가 경영 기술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고, 결과적으로 신라인의 정서가 수도 개성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4. 대략 1281-3년 기간 중에 편찬된 삼국유사, 이규보가 1193년에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東明王) 편, 이승휴(1224-1300)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 유득공(1748-1807)이 1784년에 완성한 발해고(渤海考) 등을 참조.

15. 柳得恭  渤海考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曰高句麗 夫餘氏居于西南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 是矣 及夫餘氏亡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爲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 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 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 渤海爲遼所滅 ...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其書矣 ... 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금(金), 청(淸) 황실이 믿고 있던 그들 조상의 원류

  •  홍원탁
  •  승인 200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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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강의(2)

 

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 편집자 주

 

East Asian History: A Korean Perspective                     Vol. 1. No. 2. 2005. 1. 1.

 

금(金), 청(淸) 황실은 그들 조상의 원류(源流)를 어디서 찾았는가?

 

청(淸)의 건륭제(1736-96)는 삼한(三韓)의 명칭에 대한 중국 기록들의 혼란상에 주목하였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한(韓)"은 분명히 지도자-통치자라는 의미의 칸(汗, Khan)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중국 역사가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건륭제는 “중국대륙 동북방의 만주족과 그들의 선조들은 중국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이런 식의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고 역설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1636년까지도 그들 자신의 왕조를 후금(後金)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금(1115-1234) 왕실의 직계 후예라 천명했다. 건륭제는 1777년 9월 20일 자로 유지(諭旨)를 내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토록 했다. (6년 후인 1783년에 완성.) 건륭제는 그 유지에서 만주족의 유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신이 읽은바 금나라 역사(金史)에 의하면, 금 왕실의 선조들은 옛 숙신(肅愼)지역 내에서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지역은 장백산과 흑룡강이 위치한 곳이고, 바로 만주족이 일어선 고토(古土)라는 것이다.

 

청나라 황족은 자신들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쓴다. 만주어로 아이신(愛新)은 "금(金)"을 뜻하는데, 건륭제 생각에는 바로 이 사실만 해도 청 황실을 여진족 금나라 황실의 직계후손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청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족의 원류를 숙신-말갈-여진 퉁구스족은 물론, 예맥 퉁구스족의 삼한(三韓), 신라, 백제뿐만이 아니라, 범 퉁구스의 발해까지 포함시켜 추적을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퉁구스족의 공통점으로서, 뛰어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와 싸움 잘하는 능력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선비-거란과 고구려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선비족들은 청조 통치자들이 생각하는 만주족의 원류와 명백히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발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 존재로 팽창했었던 고구려를 만주원류고에서 배제한 이유는 다르다. 예맥 퉁구스인 고구려의 부각은 숙신-말갈-여진 퉁구스가 만주역사를 주도했다는 그들의 이념에 상당한 손상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서구 혹은 한족 전문가들은 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중요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금사(金史)에는 금 나라의 시조가 고구려로부터 왔다고 기술되어있으나,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의 시조가 본래 신라에서 왔으며, 그 부족 명칭이 완안(完顔)이라고 기록되어있다는 사실. 또 금(金)은 본래 신라에서 수십 세대를 걸쳐 내려온 왕성(王姓)이기 때문에 금 나라의 국명이 되었다는 만주원류고의 기록. 금 왕조의 창시자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을 만주원류고가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또 만주원류고의 서문 역할을 하는 건륭제의 그 짧은 유지(諭旨)의 1/4이 한반도 사람들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등.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금의 건국 (naver.com)

쇠퇴하는 송나라, 금에 의해 멸망하다

요약 1115년, 여진족 최초의 국가 금이 건설되었다. 금은 요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며 세력을 떨쳐나갔다. 이 무렵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는데 형세를 오판해 금과 손을 잡고 요를 협공하였고, 이때 금의 지원을 받은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송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된 송의 약속 파기로 격분한 금은 송나라(북송)를 멸망시켰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126년 : 이자겸의 난이 일어남
1135년 : 묘청, 서경에서 대위국 세움; 김부식이 평정함
1145년 : 김부식, 《삼국사기》 50권 편찬
1170년 : 정중부 등, 무신난(경인의 난)을 일으킴; 이후 100년간 무신집권
1198년 : 만적의 난

여진 부족의 통합, 금나라를 건국하다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 부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발해 멸망 이후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 이미 요의 지배하에 편입된 세력은 '숙여진', 그렇지 않은 부족들은 '생여진'으로 불리었다. 생여진 중에 하얼빈 남쪽 아십하()강 유역에 거처하던 완안부()가 추장 완안아구타를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하여 12세기 초 동아시아에 돌풍을 몰고 왔다.

금대의 교초 흥정보천금왕조는 해롱왕 시대부터 교초를 발행, 동전과 함께 사용했다. 흥정보천은 2관이 은 1냥에 상당하며 위조자는 사형에 처했다.

 

여진 부족의 통합은 아구타의 할아버지 오고내 때 시작되어 숙부인 영가() 때 가속화되었다. 아구타()는 취약한 요의 내부를 간파한 후 마침내 1115년, 여진족 최초의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대금이라 하니, 그가 금 태조이다. 금은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요의 진압군에 연전연승하였으며 요동 · 요서로 남하하여 종횡무진으로 세력을 떨쳐나갔다. 요나라 황제인 천조제 야율연희는 70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당시 요나라는 서하와의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도 치열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금 태조는 이를 틈타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맹안모극제, 사회 · 행정조직과 군대를 일치시키다

태조는 여진 전통의 씨족 구조인 맹안 · 모극 제도를 군사조직으로 재편함으로써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맹안은 1000을 뜻하는 여진어의 '민간', 모극은 100을 뜻하는 '무게'의 음역이다. 태조는 300호를 1모극, 다시 10모극을 1맹안으로 삼아, 1모극에서 100명의 군사를 뽑아 1모극군을, 10모극군을 모아 1맹안군을 만들었다. 맹안모극제로 사회 · 행정조직과 군대가 일치되고 유목민 특유의 강한 결속력이 가미되어 금군은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금 태조여진족 최초의 국가 금나라를 세운 금 태조 아구타.

송나라의 쇠퇴,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를 협공하다

한편, 이 무렵 송나라는 왕안석의 개혁도 실패하고 당쟁은 격화되어 급격하게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휘종은 정치에는 뜻이 없어 그가 신종의 아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틈에 채경 같은 처세술에 능한 관료가 환관 동관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휘종은 도성 동북 면에 인공산을 만들고 향락생활에 빠져 들었고 채경과 동관은 이를 부추겨 전국의 기화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게 되니, 이를 운반할 때 민간집의 담장이나 집이 방해가 되면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휘종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나 정치에 뜻이 없어 송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황제 휘종.

 

신흥국 금나라의 소식을 접한 송은 형세를 오판하여 연운 16주를 회복할 심산으로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를 협공하게 된다. 1120년의 이 동맹은 육지의 요를 피해 해상으로 사신을 교환하였기에 '해상의 맹약'으로 불린다. 금 태조는 요의 수도 상경과 중경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대승을 올렸으나 송은 연경 공격에 연패하여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지경이 되었다. 송은 방납의 난이 일어나 그 군대를 국내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방납은 강남의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 한때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한편, 산동의 양산박에서는 송강의 난이 일어나 관군을 크게 괴롭혔는데, 이들이 바로 유명한 《수호지》에 등장하는 양산박 108명 호걸들의 모델이다.

송강산동의 양산박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수호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호걸.

 

해상의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장성 이북의 땅을 모조리 점령했지만 송나라는 연경조차 점령하지 못했다. 송의 요청으로 연경마저 점령한 금군은 연경 출병 대가로 은 20만 냥, 비단 30만 필, 전 100만 관, 군량 20만 석을 요구했고 송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나라와 북송의 멸망, 남송 시대가 시작되다

금군은 거의 독자적 힘으로 요의 본거지를 석권했다.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하여 한때 서하에 몸을 의탁했지만, 1125년 금나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첫 번째 정복왕조 요는 건국 이래 210여 년 만에 멸망했다. 요의 귀족들이 서쪽으로 도망하여 요나라를 재건하였는데 이를 서요라고 부른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송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단 회군했던 금군은 다시 남하하여 송의 수도 변경을 향해 밀어닥쳤다. 당시 금의 군대가 도성에 육박했다는 보고를 들은 휘종은 신하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금나라가 설마 우리 도성을 공략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기절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채경 등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결사대를 결성하여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당황한 휘종은 스스로 퇴위하고 장남인 조환을 즉위시키니 이가 흠종이다. 흠종도 두려움에 떨며 마지못해 도성에 머무를 뿐이었다.

결국 송은 금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굴욕적 조건들인 황금 5백만 냥, 백은 5천만 냥, 비단 1백만 필, 우마 1만 마리 등을 바치기로 하고, 흠종이 금나라 황제의 조카가 될 것 등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금군이 철수하자 다시 이를 파기함으로써 금군을 격분시켰다. 금의 대군이 또다시 쳐내려와 수도 변경을 함락시키니 송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때가 1127년이다. 후대의 사가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변경에 도읍했던 북송은 멸망했다. 휘종과 흠종, 3,000명의 종실들은 포로로 잡혀 옛 땅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때마침 금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떠나 있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왕이 금의 추격을 피해 강남으로 이동하여 임안(항주)을 수도로 삼고 송의 피난정권을 수립하였다. 그가 고종이다. 남송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중국과 금의 대치, 화의를 통해 종결하다

이제 중국은 북중국을 완전히 빼앗기고, 회하를 경계로 금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없이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화북지방에도 여러 의병장들이 활약했다. 송은 주전파와 강화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강화파 진회가 악비, 한세충 등 명장들을 제거하고, 1142년 다시 금과의 화의를 수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때 송이 금에게 제출한 서약서에는 대대로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는 약조가 담겨져 있었다. 이전까지의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영원한 민족의 영웅 악비와 매국노 진회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던 중국인들에게 악비는 영원한 민족의 영웅으로 두터운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투옥한 후 끝내 옥사시켰던 진회는 대표적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진회는 주전파였으나 북송 멸망 당시 금의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후부터 강화파로 돌변함으로써 세간의 의심을 받았다. 악비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남송 때 무한과 양양을 거점으로 대군벌이 되어 유광세, 한세충 등의 군벌과 힘을 합쳐 금군을 회하 진령에서 저지하는 등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강화파인 재상 진회가 악비의 군대지휘권을 박탈하여 중앙군으로 개편하고 저항하는 악비를 무고한 누명을 씌워 투옥한 뒤 살해했다.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진회가 죽은 후 명예회복 되었으며 중국인들의 중원 복귀의 꿈을 상징하는 인물로, 구국의 영웅으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관우와 함께 무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무묘에 합사되었다.

악비여진족에 끝까지 맞서 싸우며 중국 민족의 영웅이 된 악비 상.

금나라, 중국문화에 동화되다

한편 금나라는 연운16주를 지배했던 요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대한 지역, 화북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점차 여진족 고유의 질박함을 잃어버리고 중국문화에 동화되었다. 대체로 북방민족 중에서 여진족이 거란이나 몽골에 비해 중국화 경향이 더 컸다.

여진족 전사만주에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다 12세기 초 돌풍을 일으킨 여진족의 전사.

 

중국화를 가속시킨 왕은 4대 해릉왕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중국식 국가조직과 황제독재체제를 수립하고 한인들을 중용하였으며, 수도도 발상지인 상경 회령부에서 오늘날의 북경인 중도로 옮기고 여진인을 대거 화북에 이주시켰다. 그는 1161년 무리하게 남송까지 지배하려 친정을 일으켰다가 남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참패한 후 훗날 부장에게 살해당했다.

세종, 여진족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해릉왕 이후 집권한 세종은 내치에 힘쓴 명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가난한 여진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으며, 여진족 고유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여진 문자를 장려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여진 문자는 태조 때 완안희윤이 거란문자를 참고하여 여진 대자를, 희종 때 희종 스스로 여진소자를 만들었다. 명나라 때까지도 쓰이다가 사라져서 청나라 때는 몽골문자를 차용하였다.

금나라의 몰락, 건국 120년만에 막을 내리다

금나라의 몰락은 몽골 초원에서 새로이 일어난 강력한 영웅, 칭기즈칸에 의해 재촉되더니 마침내 건국 120년 만인 1234년에 마지막을 맞았다. 훗날 그들의 후손들은 다시 금나라를 세워 한인들을 아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청나라가 바로 그 나라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의 건국 - 쇠퇴하는 송나라, 금에 의해 멸망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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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역사의 계승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금나라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역사의 계승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금지(金志)  (元)宇文懋昭 撰 (원나라때 우문무소가 씀) ●初兴本末 金国本名朱里真,蕃语舌音讹为女真,或曰虑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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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금나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여진 (naver.com)

 

여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여진족의 발전 (naver.com)

 

금 (naver.com)

 

금의 사회 (naver.com)

 

 

금의 문화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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