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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 고고학(23) 백제 목간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3. 백제 고고학(23) 백제 목간

대야발 2026. 1. 27. 17:38

 

 

 

 

 

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목간 '빅5'를 아십니까[이기환의 Hi-story]

2023. 10. 5. 16:18

 

 

https://youtu.be/iUNbhsJmloM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1400년전 백제인의 ‘삶의 애환’을 전해주는 ‘빅5’ 목간. 구구단 목간,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이 보인다. 2022년 부여 동남리 출토된 목간을 두고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인을 기리기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금을 납부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진제공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조선시대 명문 목간은 730여점 되는데요. 그중 오늘의 주인공인 백제영역에서 출토된 명문 목간은 100여점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빅4’ 목간이 있습니다. ‘구구단 목간’과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입니다.

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은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이 쓰여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구구단’ 자료였죠.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구구단 목간은 아닌 것 같고요. 관청에서 물품을 출납하면서 썼던 ‘실용 구구단 목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기자의 모습. 목간에 글을 쓰고 있다. 기원후 105년 무렵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나무 에 글을 쓰는 목(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로 쓰였다. |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

 

 

 

능산리에서 출토된 ‘남근형 목간’(22㎝)도 시선을 잡아 끌었죠. 목간에 새겨진 명문 중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특히 남우세스러웠습니다. 가뜩이나 남근 형태의 목간인데, 또 굳이 ‘길에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고 세번이나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연구자들이 머리를 싸매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즉 남근형 목간은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는데요.

그렇다면 백제인들이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사비(부여)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겁니다. 예부터 남근은 나라의 안녕과 악신 및 질병의 추·예방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거든요.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러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2022년 충남 부여 동남리 아파트 공사장에서 출토된 목간. 5점 중 3점은 단순한 물품꼬리표였고, 2점은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백제 가요’에 ‘신세한탄 인사청탁’ 목간까지

또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확인된 ‘좀 있어 보이는’ 목간인데요.

“숙세결업(宿世結業) 동생일처(同生一處) 시비상문(是非相問) 상배백래(上拜白來)”라는 명문이 돋보였어요.

공식적으로는 ‘숙세(전세)에 업을 맺었기에 (현세에) 함께 같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잘잘못을 서로 물어(논하여) 우러러 절 올리며 사뢰옵니다’라고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국문학자(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은 색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 살아가는데 세속의 시비 쯤이야 가려서 무엇하겠소.”

국문학자다운 맛깔스러운 해석이죠. 이렇게 되니 백제인 특유의 여유를 담은 소박한 가요로 읽힙니다.

 

 

 

최근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한 논문이 발표됐다. 특히 이 목간의 내용과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의 상관관계를 논증했다.(출처:손환일, ‘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

 

 

 

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의 가요라는 겁니다. 이 ‘숙세가’ 목간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백제 시가’라 할 수 있어요.

또 2010년 부여 구아리에서는 신세한탄과 함께 인사를 청탁하는 편지 목간이 확인됐는데요.

편지는 “이 몸이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於此貧薄 一无所有)”라고 신세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인사청탁으로 이어져요.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달라(不得仕也 莫瞋好邪)”는 당부와 함께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다(荷陰之後 永日不忘)”하는 읍소로 마무리합니다.

문맥을 보면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선물(혹은 뇌물)까지 함께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당서> ‘동이전·백제’조는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한다”고 했거든요. 만약 백제의 사법당국에 이 목간이 적발되었다면 해당관리는 평생 금고형을 받았겠네요. 재미로 따지면 이 ‘신세한탄’ 목간은 백제의 ‘빅4’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동남리 출토 ‘목간1’에 등장하는 간지는 ‘갑술’(554년)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인다고 했다. 이 경우 ‘성련금’, 즉 ‘잘 정련된 금’으로 읽을 수 있다. ‘보도자료’ 발표 당시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

 


■난수표 같은 목간의 출현

지난 2022년 3~4월 부여 동남리 아파트 건설공사장에서 명문 목간 5점이 확인되었습니다.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였고요. 다른 2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문서용으로 보이는 이 2점에는 마치 난수표처럼 무언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4번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와 판독회를 거쳐 겨우 단서를 찾았답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볼까요. ‘목간1’에서는 ‘날짜(12월10일)’와 ‘금(金)’자, 중량 단위를 뜻하는 ‘주(主)’자가 파악됐습니다.

‘주(主)’와 관련해서는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에서도 ‘230주(主)’라는 중량 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출납’을 의미하는 ‘내(內)’와, ‘물품의 이동’을 뜻하는 ‘보낼 송(送)’ 혹은 ‘맞이할 역(逆)’자가 보였습니다. ‘재고 없음’을 지칭할 수 있는 ‘망(亡)’자도 파악됐습니다.

 

 

손환일 소장은 동남리 ‘목간1’에서 ‘망(亡)’과 ‘부(夫)’를 붙여 ‘망부(亡夫)’로, ‘역(逆)’과 ‘금(金)’을 붙여 ‘역금’으로 읽었다. 그러면 ‘목간1’은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손환일 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

 

 

‘목간2’는 곡물의 일종인 ‘피(稗·고대 작물의 일종)’와 함께 ‘이동(送 혹은 逆)’, ‘연령 등급(丁)’, ‘사람 이름’, ‘용량 단위(斗)’ 등의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자료는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백제의 도량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했습니다.

이 명문 목간에는 대중의 시선을 끌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세로로 쓴 문서 행간의 빈 공간에 이음표(′)를 표시한 뒤 그 다음 줄에는 글자를 180도 돌려 거꾸로 써내려갔다”고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장 관리가 문서를 써내려가다가 공간이 없으면 빈쪽을 찾아 거꾸로 써서 이어나갔다는 뜻이죠.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는 ‘목간1’은 금의 출납과, 출납된 금으로 제작된 완성품(금공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는 현장 관리의 개인 업무일지(메모장)으로 파악했다.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을 임금으로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용현 교수의 논문을 토대로 정리

 

 

■“금 줄테니 금제품 만들라”는 의미?

동남리 목간은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속 발표되는 연구자들의 발표논문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명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워낙 소략한 일종의 메모 형식이었거든요.

연구자 나름대로 글자를 판독하고, 해석했지만 볼수록 미궁에 빠지더라고요.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할 깜냥이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의 논문(‘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보였는데요.

 

동남리 목간은 발표 당시 부터 목간 전체를 빽빽하게 활용했고, 돌려서 거꾸로 쓴 부분도 보여서 화제를 뿌렸다. 백제인들의 알뜰함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바쁜 업무현장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울산문화재연구원·국립부여문화재연구원 제공

 

 

먼저 ‘목간2’에는 ‘피역(稗逆)’이라는 제목 아래 ‘와진(瓦進)+인명(人名)+정(丁·성인남성)+5두(五斗)’의 서식으로 모두 8명(앞·뒷면 각 4명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와진(瓦進)’은 기와를 제작하는 실무 일꾼을 뜻하고요. 따라서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메모장이라는 거죠.

그럼 ‘목간1’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금공품 담당 관리가 금(金)의 출납과 사용처를 기록한 문서라 해석합니다.

앞면은 ‘날짜(월일)과 망(亡·금이 출납되어 없어짐)+부역(夫逆·기술자인 부가 수령해감)+금(金)+양주(兩主·금의 수량 단위)’ 형식과, ‘날짜(월일)+내납(內納·금이 납입됨)’ 형식으로 되어 있고요.

 

 

 

돌려쓰기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다. 나중에 헷갈리지 않게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것이다.|이용현 교수 논문에서

 

 

뒷면은 ‘물품명+작용(作用·만드는데 소요된)+금(金)’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물품을 만드는데 쓴 금이 얼마’라는 내용인데요. ‘금으로 만든 제품’이니 ‘어떤 물품=금공품’이 된다는 겁니다.

이 ‘목간1’에는 금의 출납과, 제작 완성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습니다.

그때마다 ‘릴레이식’으로 기록했고, 쓸 공간이 모자라면 옆의 빈자리를 찾아 ‘돌려쓰기’ 했다는 겁니다.

이용현 교수는 “각 행의 기록마다 서체와 붓의 농담(짙고 옅음)이 약간씩 다르다”면서 “이것이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나눠 썼음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동남리 목간에서는 금의 중량단위를 나타내는 주(主)자가 보인다.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비 은팔찌에서도 230주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주(主)가 백제 시대 중량을 표시하는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돌려쓰기 신공’ 발휘

이용현 교수의 설명 중에 웃음보가 터진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정말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습니다.

나중에 볼 때 헷갈리지 않게 ‘내가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겁니다.

1400년전 백제인의 ‘깨알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용현 교수의 논문에서 대중성의 일단을 보았습니다.

 

 

관산성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이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해 백제 좌평(장관급) 4명과 3만명에 달하는 군사가 전사했다.

 



■급히 소환된 ‘관산성 전투’

얼마전 서체연구자인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이 학술지(‘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에 실렸는데요. 논문의 부제(‘관산성 전투와 백제급료 지급 기록’)가 제 눈길을 잡아 끌더군요. 먼저 관산성 전투를 살펴볼까요. 워낙 유명하죠. 신라에게는 영광을, 백제에게는 악몽을 안겨준 전투였죠.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성왕(523~554)은 신라 진흥왕(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룬 고토수복의 꿈은 산산조각나죠.

 

 

특히 동남리 목간에 등장하는 망부 4인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일 가능성을 개진됐다.|손환일의 논문에서 정리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했답니다.

이때 원로대신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라 하면서 출전을 고집했답니다. 급기야 554년 7월 태자가 가야 연합군까지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는데요.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신주 주둔의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습니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는데요. 하지만 성왕은 관산성 근처에서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7월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천신만고 끝에 사지를 빠져나온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가 창왕(위덕왕·554~598)이었습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절터의 탑지에서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위덕왕) 13년(567), 왕의 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명문이 나왔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창왕(위덕왕)은 즉위 후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쓴다. 사찰 창건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 ‘부’보다 ‘망부(죽은 남편)’

대체 이 동남리 명문 목간과 관산성 전투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손환일 소장은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해나갔는데요. 출토된 목간 5점 가운데 가장 핵심인 ‘목간1’을 중심으로 볼까요.


판독결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간지, 즉 ‘갑술(甲戌)’을 읽었답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갑(甲)’ 자 다음의 글자는 초서체로 쓴 ‘술(戌)’자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목간의 제작연대는 ‘갑술년’이라는 얘기죠.


역시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이고요. 그에 따라 ‘성련금(成鍊金·금을 정련했다)’는 의미로 고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보도자료에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습니다.


사실 한문은 어디서 끊어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천양지차가 됩니다. 동남리 목간의 경우 그동안 ‘망(亡)’과 ‘부(夫)’자를 떼어놓고 ‘망’은 ‘재고없음’, ‘부’는 ‘기술자’로 따로따로 해석했고요. ‘역(逆)’자 역시 ‘송(送)’자로도 읽혀 물품의 출납을 의미하는 ‘돌려받다(逆)’와 ‘보내다(送)’ 등으로 해독되었는데요.

 

그런데 손환일 소장은 ‘망부(亡夫)’를 문자 그대로 ‘죽은 남편’으로 해석했고요. ‘역(逆)’은 ‘금(金)’자와 붙여 ‘역금(逆金·정련되지 않은 금)’으로 판단했습니다.

 

 

창왕(위덕왕)은 45년간 즉위하면서 능사를 세우고, 국찰인 왕흥사를 창건하는 등 갖가지 불사를 일으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부=관산성 전사 좌평 4명?’

그래놓고 ‘목간1’을 해독하면 대강의 내용이 파악됩니다.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 ‘사경 제작은 국가주도로 이뤄졌다’(국경)”는 겁니다.

목간에는 부인 4명이 두 달 사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바친 금의 양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적게는 2냥(26g)에서 많게는 5냥(65.25g)까지 차이가 납니다. 모두 합하면 12냥13주(166g)에 이르죠.

 

사비 백제(538~660)의 도읍인 충남 부여 동남리에서 출토된 목간 5점. 6~7세기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궁금하죠. 왜 이 부인 4명은 죽은 남편 4명을 위해 이만한 금을 국가에 바친 걸까요. 이 대목에서 554년, 바로 ‘갑술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가 소환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성왕’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했죠. 이 대목입니다. 좌평 4명…. 동남리 목간의 ‘망부’ 4명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명’일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물론 100% 맞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어느 사료에도 정답이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출토된 5점 명문목간 중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의 성격이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난수표 목간’이 ‘빅4 목간’으로?

그러나 성왕의 뒤를 이은 창왕(위덕왕)이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창왕은 관산성 전투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할 분입니다. <일본서기>는 “왕위에 오른 뒤 패전을 자책하던 창왕은 555년 8월 신하들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잘못을 뉘우쳤으면 됐다”면서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고, 왕은 갖가지 공덕을 이루라”고 달래죠. 출가를 단념한 창왕은 잇달아 사찰을 창건하고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씁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그 증거가 나왔죠.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국~조선시대 목간은 730여점에 이른다. 주로 저습지에서 출토되거나 물 속에서 인양됐다. 그중 백제 목간은 100여점에 달한다.|‘경북대 인문학술원의 <한국목간총람>, 주류성, 2022’ 자료를 토대로 정리

 

 

이 절은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합니다. 동남리 명문 목간 역시 창왕의 불사와 연결지을 수 있답니다.



창왕이 관산성 전투(554년 7월)에서 순국한 원혼을 달래려고 ‘국가 주도의 사경 불사’(국경·國經)를 위해 금을 모았고요. 그때 전사한 4좌평의 부인이 거액의 금을 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라면 동남리 출토 목간은 백제의 ‘빅4’ 목간에 꼽힐 수도 있겠네요. 뭐 어떤 분은 그러실 지 모르겠네요.



난수표 같은 글자 몇 자로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토유물을 단서로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또한 연구자나 기자의 몫이죠. 시쳇말로 얘기가 되는 논문이나 거리가 되는 주장 및 견해가 있다면 저는 냉큼 받아 소개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와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 고상혁 동국대WISE캠퍼스 겸임교수, 황창한 울산문화재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1)

<참고자료>
손환일, ‘부여 동남리 출토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
이용현, ‘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부여 동남리49-2 유적 목간1, 2의 분석시론’,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
고상혁, ‘부여 동남리 49-2번지 신출토 목간 소개’, <신출토 문자자료의 향연>(한국목간학회 38회 정기발표회), 2023
울산문화재연구원, <부여 동남리(49-2번지) 공공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시굴·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
정훈진, ‘사비도성에서 발견된 구구단 백제 구구표 목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32호, 2016년 6월
김영욱, ‘백제 이두에 대하여’, <구결연구> 제11집, 태학사, 2003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목간>, 소장품조사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8

(1)

 

 

 

 

특히 3, 4면의 경우 문구 사이 띄어쓰기가 되어있고 띄운 공간에 각주로 추정되는 먹 자국도 보이는 점이 주목됐다. 백제인이 <논어>를 자체적으로 번역해 새겨 읽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윤선태 동국대교수는 “한문을 번역할 때 우리식 어법에 맞게 띄어서 읽는 방식이 구결의 시초인데, 이번에 나온 논어 목간은 한반도 구결역사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단독] 1400년전 '논어' 구절·궁궐명 적힌 백제목간 나왔다


한겨레, 창원/노형석 기자, 2018. 7. 12. 

 

부여 쌍북리 백제 왕경유적에서 나온 <논어>목간. ‘학이편’ 1, 2장 구절들을 선명한 먹글씨로 적었다.

 

 

 

'논어' 구절, 궁궐명 적은 백제목간
부여 쌍북리 왕경유적서 출토
12일 한국목간학회 워크숍서 공개
'목간밭' 왕경유적 보존가치 커질 듯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중국 성인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첫머리 ‘학이(學而)’편 1·2장의 유명한 문구가 1400년전 백제인의 나무쪽 문서인 목간에 선명한 붓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12일 낮 경남 창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워크숍은 열기로 가득했다. 7세기 백제 사비시대 왕경 유적이 처음 드러난 충남 부여 쌍북리 56번지 한옥마을조성터(<한겨레>5월16일치 26면 참조)에서 <논어> ‘학이’편 1, 2장의 구절과 당대 궁궐명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적힌 목간 등이 잇따라 출토된 사실을 이날 자리에서 처음 공개했기 때문이다.

 

 

2017년 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유적을 발굴한 울산발전연구원의 한지아·김성식 부연구위원은 이날 판독 내용을 담은 출토 목간들의 내역을 조심스럽게 소개했다. 연구원의 보고문을 보면,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은 모두 17점으로, 문자가 일부라도 판독된 것은 5점이다. 연구원 쪽은 <논어>의 ‘학이’편 구절이 적힌 사면 목간을 비롯해, ‘丁巳年(정사년)’이란 연대명과 ‘岑凍宮(잠동궁)’으로 자체 판독된 목간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논어>목간은 길이 28cm에, 너비가 각각 1.8cm, 2.5cm로 ‘학이편’ 1장 전체와 2장의 서두 일부분을 적었다. 1면은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란 뜻의 ‘자왈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면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란 뜻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면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란 뜻의 ‘인부지이불온불역(人不知而不? 不亦(君))’ 구절이 말미 한두글자가 빠진 것을 빼고는 온전하게 씌어 있다. 4면은 ‘유자가 말하기를, 사람됨이…’이란 뜻의 ‘자호유자왈기위인야(子乎 有子曰 其爲人也)’란 구절만 남았다.

 

 

특히 3, 4면의 경우 문구 사이 띄어쓰기가 되어있고 띄운 공간에 각주로 추정되는 먹 자국도 보이는 점이 주목됐다. 백제인이 <논어>를 자체적으로 번역해 새겨 읽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윤선태 동국대교수는 “한문을 번역할 때 우리식 어법에 맞게 띄어서 읽는 방식이 구결의 시초인데, 이번에 나온 논어 목간은 한반도 구결역사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출토 목간의 ‘학이편’ 첫구절에 나오는 ‘기쁠 열(悅)’자는 백제 특유의 표기 방식으로, 고대 일본의 <논어>목간의 글자 표기와 똑같다. 중국 산동반도 일대의 고대 제나라 강역의 <논어> 표기와도 연관성이 보여 중국서 전래된 <논어>를 백제가 다시 일본에 전파했다는 실증적 근거로 볼 수 있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했다.

 

 

한반도의 고대 <논어>목간은 1990년대 평양 정백동 낙랑계 고분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논어> 죽간(대나무 문서)이 가장 오래된 유물로 꼽히는데, 전한시대 중국인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에서는 2000년 경남 김해 봉황대 출토품과 2005년 인천 계양산성 출토품이 있는데, 모두 신라시대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선문대가 발굴한 계양산성 목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5세기 한성백제 토기와 목재조각들이 출토층에서 나온 점을 근거로 조사단 쪽이 국내 최고의 <논어>목간으로 단정한 보고서를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논어>목간은 백제인이 쓰고 읽은 사실이 이론의 여지없이 확인되는 최초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는게 연구자들의 견해였다.

 

‘정사년’이란 연대와 ‘잠동궁’이란 궁궐명칭이 처음 확인된 쌍북리 출토 목간.

 

 

 

발표회에서는 ‘정사년(丁巳年) 10월20일’이란 연대명과 백제 궁궐명이 확인되는 다른 목간의 문구를 놓고도 논란이 오갔다. 연구원 쪽은 궁궐명을 ‘잠동궁(岑凍宮)’으로 판독했으나, 공개된 확대사진을 검토한 학자들은 획 상태로 미뤄 ‘잠동’이 아닌 다른 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목간에는 ‘먹는 쌀 일곱석 여섯두’라는 뜻으로 보이는 ‘飡米七石六斗□(찬미칠석육두)’란 글귀도 판독돼 곡물 입출고 내역 등을 적은 장부였을 것으로 연구원 쪽은 추정했다.

 

 

정사년의 연대도 사비시대의 597년(위덕왕 44년)과 657년(의자왕 17년)의 두 가설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연구원은 657년이 유력하다고 봤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필체가 6세기 무령왕릉의 묘지석과 비슷해 597년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마을 이장으로 추정되는 ‘里後(이후)’, 농가로 추정되는 ‘田舍(전사)’ 등 옛 문헌에 거의 보이지 않는 한자어가 들어간 목간들도 눈길을 모았다.

 

 

목간이 나온 쌍북리 한옥마을조성터는 학계에서 사비도읍의 백제 관청가이자 물류거점으로 유력시되어 왔다. 2000년대 이래 부근에서 대규모 생산유적, 도로터는 물론, 백제시대 구구단표와 춘궁기 구황사업을 기록한 장부인 ‘?‘좌관대식기’ 등의 중요 목간들이 잇따라 출토됐기 때문이다.

 

 

<논어>목간과 궁궐명 목간의 추가발굴로 이곳이 백제 생활사 타임캡슐인 목간들의 ‘밭’이란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부여군은 이곳을 부여 도심 발굴대상터 주민들의 이주단지로 개발한다는 방침을 사실상 굳힌 상황이어서, 유적 보존을 둘러싼 학계와 당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 울산발전연구원 제공(2)

 

 

 

 

한국문화재재단은 2016년 1월 16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2012년 백제 사비성터인 충남 부여읍 쌍북리 일대의 옛 관청터를 발굴조사할 당시 나온 6~7세기께 목간들의 정밀판독 결과를 공개하고, 이들 가운데 1점에서 구구단 일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단독] 구구단 적힌 1500년전 나무문서 발견

 

한겨레, 노형석 기자 2016. 1. 18. 01:36

문화재재단 판독결과서 첫 확인
4년전 백제 사비성터 발굴 유물

 

 

구구단 목간 전면(왼쪽)과 숫자공식이 보이는 중간부분.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이라고 쓰여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곱셈 기초공식 ‘구구단’을 써넣은 1500여년 전의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처음 확인된 수학 공식을 써넣은 고대 문서이자 국내 최고의 수학사 관련 유물이다.

 

 

재단 쪽 자료를 보면, 구구단 목간은 길이 30.1cm, 너비 5.5cm로 칼 모양이다. 전면에 희미하게 먹글씨로 쓴 수십여개 숫자들이 보인다. 재단과 학회 연구진이 판독한 결과 목간 맨 위와 중간 아래 부분에서 각각 ‘九(구) 六(륙) 五十四(오십사:9×6=54)’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 등의 구구단 공식이 확인된다.

 

 

이 목간은 맨위에서 9단 공식이 먼저 시작되고, 아래로 그보다 적은 숫자의 단으로 읽어내려가는 순서여서 오늘날과 정반대 순서로 구구단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정훈진 연구원은 “애초엔 물품 수량 등을 적은 하찰로 봤으나, 정밀판독해보니 상하 네개 숫자를 한 단위로 삼아 구분선을 횡으로 긋고 공식을 되풀이하는 구구단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학계는 확인된 구구단 목간이 옛 백제 관청터에서 나온 점으로 미뤄 관리들이 세금용 곡식의 수량을 재는 계산도구로 활용하거나 암기용 교재로 삼았을 것이란 추정을 내놓았다. 여느 목간과 다른 칼 모양이어서 계산 도구로 쓴 뒤 다시 깎아 제의용구로 재활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삼국시대 선조들이 수학을 생활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획기적 유물”이라며 “백제인들이 구구단으로 숫자를 셈하면서 건축이나 측량에 활용할 만큼 상당한 수준의 수학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중국, 일본에서는 구구단 목간이 종종 출토된다. 중국 실크로드 유적인 신장위구르자치구 니야 유적과 간쑤성 거연 유적에서 기원전 시기의 구구단 목간이 나왔고, 일본에서도 7~8세기 옛 도읍 나라 등에서 출토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일본에선 이번에 부여에서 나온 구구단 목간과 비슷한 모양새와 내용의 목간이 출토된 바 있어 시기가 앞서는 백제 구구단 목간이 그대로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한국문화재재단 제공(3)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