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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74) 제6공화국 : 이명박정부(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 2009년 1월 20일 용산 철거민 참사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

대한민국 (74) 제6공화국 : 이명박정부(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 2009년 1월 20일 용산 철거민 참사

대야발 2025. 7. 18. 12:31

 

 

 

 

 

 

 

 

2009년 1월20일 오전 7시20분께, 망루 틈새로 한줄기 불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더니, 갑자기 불길이 확 올라왔고, 불길은 망루 전체를 덮쳤다. 망루 안에서 농성자들이 신나 등이 든 것으로 보이는 통을 밖으로 내던졌고, 사람들이 망루 창으로 뛰어내렸다.

 

불길에 휩싸인 망루는 쓰러지고, 망루에서 탈출한 두명이 건물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망루에서 빠져나온 철거민 지석준씨는 불길을 피해 건물 4층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팔에 힘이 빠져 그대로 추락했다. 바닥은 매트리스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이었고, 크게 다쳤다.

 

현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불탄 망루가 쓰러져 건물 위에 걸쳐져 있었다. 저 망루 안에서 사람이 6명(철거민 5명·경찰 1명)이나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 피켓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만약 진압이 아니라 구조였다면 살릴 수 있었다.” 처참한 폐허의 현장에 저녁 시간에 천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분노의 말들을 쏟아냈다. 시민들은 명동까지 행진해가면서 이명박 정권의 ‘살인 진압’을 규탄했다.

 

 

 

■ 불타는 망루 “여기 사람이 있다”…용산 참사의 진실 찾기

한겨레2025. 2. 17. 19:00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40화 ‘용산 참사’ 책임 규명

남일당 건물 망루 농성하던 철거민
경찰특공대 진압 맞서다 화재 발생
철거민 5명·경찰 1명 숨진 ‘용산 참사’

순천향병원 주검 밤중에야 신원확인
철거민 유족들 울부짖던 처참한 밤
“이명박 정권 무리한 진압에 참사”

검찰·여당, 철거민·용역만 책임 묻고
경찰엔 면죄부…철거민 ‘테러범’ 몰아
용산범대위 구성…참사책임 규명 나서
참사 6개월째 장례도 못 치르고 투쟁

 

 

경찰특공대가 2009년 1월20일 오전 철거민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농성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 건물 옥상 위에서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탄 채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당시 불이 난 망루가 쓰러지자 철거민들이 열기를 피해 옥상 난간을 붙잡은 채 서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09년 1월20일, 대한이었다. 며칠 전부터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루 전날인 1월19일, 서울 용산역 건너편 한강대로변 남일당 건물 옥상에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망루를 세우고 농성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다. 경찰특공대는 새벽 3시 반쯤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전 7시 전에 경찰특공대가 망루에 진입했다. 옆 건물에서 물대포가 파란색 양철로 만든 4층짜리 망루를 향해서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크레인에 매달아 올린 컨테이너 박스로 망루를 치고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가 망루를 칠 때마다 망루가 쓰러질 듯 휘청했고, 그런 위태한 상황에서도 컨테이너 박스 안에 탑승한 특공대원들은 망루 안으로 최루액 호스를 집어넣고, 쇠갈퀴 같은 것으로도 망루를 공격했다. 너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오전 7시6분께. 1차 화재가 났다. 망루 안으로 들어와서 마지막 층으로 올라오던 특공대원들이 갑자기 망루 밖으로 빠져나간 이유였다. 다행히 화재는 쉽게 꺼졌다. 이미 망루 안은 유증기(휘발유나 신나 등이 엎어지면서 수증기 상태가 되어 있었고, 언제고 불꽃 하나만으로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다)가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그들이 잠시 쉬고 있을 때 무전기에서는 “진압”을 독촉하고 있었다.

 

 

철거민 농성 강제진압…대규모 참사로

 

오전 7시20분께, 망루 틈새로 한줄기 불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더니, 갑자기 불길이 확 올라왔고, 불길은 망루 전체를 덮쳤다. 망루 안에서 농성자들이 신나 등이 든 것으로 보이는 통을 밖으로 내던졌고, 사람들이 망루 창으로 뛰어내렸다. 불길이 거세게 타오를 때 현장을 생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리포터가 다급하게 외쳤다.

 

 

“망루 안에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있어요.”

 

불길에 휩싸인 망루는 쓰러지고, 망루에서 탈출한 두명이 건물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망루에서 빠져나온 철거민 지석준씨는 불길을 피해 건물 4층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팔에 힘이 빠져 그대로 추락했다. 바닥은 매트리스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이었고, 크게 다쳤다.

 

 

나는 다급한 일들을 처리한 다음, 저녁 참사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불탄 망루가 쓰러져 건물 위에 걸쳐져 있었다. 저 망루 안에서 사람이 6명(철거민 5명·경찰 1명)이나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 피켓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만약 진압이 아니라 구조였다면 살릴 수 있었다.” 처참한 폐허의 현장에 저녁 시간에 천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분노의 말들을 쏟아냈다. 시민들은 명동까지 행진해가면서 이명박 정권의 ‘살인 진압’을 규탄했다.

 

 

그때 한 언론사 기자에게서 제보가 왔다. 한남동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주검들이 있는데, 곧 다른 병원 장례식장으로 분산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경찰이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해놨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제보 내용은 사실이었다. 부검을 마친 철거민들 5명의 주검이 그곳 영안실에 있었다. 시민들이 달려와서 영안실을 막았다. 밤중까지도 주검의 신원 확인이 안 되면서 정확하게 사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의 허락이 떨어진 게 자정 무렵이었다. 실종자 가족들과 의사 우석균 등 몇사람이 영안실에 들어가 주검을 확인했다.

 

 

영안실에 들어갔던 가족들이 울부짖었다. 실종자 가족에서 유가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철거민들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울부짖었다. 사망 철거민들은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씨였다. 70살 이상림씨와 양회성씨는 용산의 세입자였다. 동네에서는 사장님으로 불리던 분들이었고, 이들은 은행 대출을 받아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철거민이 되어 버렸다. 비슷한 처지의 전철연 회원들이었던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씨는 용산4구역 투쟁에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들이었다.

 

 

철거민 농성 강제진압 과정에서 ‘용산 참사’가 발생한 서울 용산 국제빌딩 4구역 내 남일당 건물 앞 도로에서 2009년 1월20일 저녁 추모대회가 열리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용산 참사’ 무리한 진압 진실 찾기

 

다음날 오전에 용산역 인근 철도회관에서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다. 회의 사회를 보게 된 나는 마이크를 잡는 순간 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날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를 구성했고, 나는 대책위의 공동집행위원장을 진보네트워크 대표였던 이종회 선배와 함께 맡았다. 상황실장은 노동전선의 김태연이 맡았다.

 

 

검찰은 사건 당일부터 정병두 서울지검 차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대규모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검사만 20명이 넘었고, 수사관들까지 100명이 넘는 규모였다. 수사본부는 유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강제부검을 진행했다. 그들은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들의 화염병으로 규정했고, 철거민들과 용역업체 직원 몇명만 구속했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경찰은 모두 무죄였다. 당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경찰청장 내정자)이 특공대를 투입하는 무리한 진압을 지시했음에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급하게 진압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청와대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소속 신지호 의원 등은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범으로 몰아갔다.

 

 

아무리 전철연이 폭력투쟁을 했더라도, 안전 대책을 마련한 뒤에 경찰이 진압에 나섰더라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용산범대위는 “여기 사람이 있다”란 구호를 내걸고 싸웠다. 용산 참사가 광우병 촛불시위처럼 대규모 항의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이명박 정권은 추모대회마저 가로막았다. 용산범대위는 2009년 2월 말까지 주말마다 도심에서 경찰과 싸우면서 추모대회를 강행했다. 그런 일로 나와 이종회 공동집행위원장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졌다. 전철연 남경남 의장까지 우리 셋은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혔다. 경찰들은 1계급 특진이 붙은 우리 셋의 얼굴이 담긴 전단을 들고 24시간 장례식장을 감시했다.

 

 

3월 초 나는 문정현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다. “신부님, 도와주세요.” 전화를 받고 올라오신 신부님은 용산 남일당을 거쳐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오셨다. 오셔서는 유가족들을 붙잡고 서럽게 우셨다. 문정현 신부님이 오시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들과 수녀들이 같이 왔다. 그리고 사건 현장인 남일당에서 매일 저녁 미사를 올리고 문화행사가 진행되었다. 남일당이 투쟁의 거점이 되어갔다.

 

 

남일당이 포함된 용산4구역에서는 3월 들어서부터 철거를 진행하려는 철거업체와 그를 비호하는 경찰들, 이를 막으려는 용산범대위 간 싸움이 매일 벌어졌다. 그들은 천주교 신부라고 봐주지 않았다. 매일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고립되고 있었다.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과 유족들이 2009년 7월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서 희생자 5명의 주검이 든 관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옮기기 위해 영안실로 가려다 이를 막아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용산범대위 이끌다 수배령에 고립

 

참사 6개월이 지난 2009년 7월20일, 용산범대위는 철거민들의 관을 만들어 서울시청으로 나가려고 했다. 시민들에게 용산 참사의 진실을 알리는 시위를 기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철통 같은 봉쇄로 병원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장례식장에는 하루 종일 유가족들의 통곡과 시위대의 분노에 찬 구호가 울렸다.

 

 

이튿날 새벽 4시께, 세명의 수배자는 탈출을 시도했다. 장례식장 옆 미군들의 관사가 있는 공터를 통해 탈출할 계획이었다. 완강기 밧줄을 몸에 걸친 내가 먼저 장례식장 4층 우리가 머물던 방의 창 옆으로 난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갔다. 장례식장과 옆 공터 담 사이에 설치된 비 가림막을 딛고, 공터 쪽 담 위의 철조망을 잘라낸 다음에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비 가림막을 디뎠을 때, 갑자기 뿌지직하면서 가림막이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러자 경찰 두명이 뛰어왔다. 장례식장 담 옆, 어둠 속에 붙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들도 당황했을까?

 

 

“아저씨, 저 위에서 내려오는 거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거요?” 그들이 물어왔다. 반대편에서는 전경들이 뛰어왔다. 여기서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공터 쪽 담을 박차고 올라왔다. 경찰이 나를 잡으려고 했으나 나는 겨우 벗어났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1)

 

 

 

용산 참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온라인으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철거 용역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묵인했던 공권력, 아니 어떤 경우에도 철거 용역의 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토건 자본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었던 공권력이었다. 철거 용역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망루를 짓고 올라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었다.

 

 

■ 불공정 재판·테러범 몰이 언론…용산 참사 법정은 가혹했다

한겨레2025. 2. 24. 19:00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41화 ‘용산 참사’ 책임 규명 ②

 

철거민들 국민참여재판 요청 불허
검찰수사 기록 3분의 1 열람도 금지
불공정 재판 항의해 변호인 사퇴도

용산범대위, 남일당 지키며 투쟁
수배자 3명 장례식장 갇혀 지내다
특수분장 도움받아 여장하고 탈출
명동성당 보호처 삼아 싸움 이어가

현실 법정 맞서 국민법정 연 그날
강제진압 진실 규명 요구 판결 ‘땅땅’
현실에선 철거민들에게 중형 선고

 

 

2009년 10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가톨릭회관 강당에서 열린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에서 변호인단이 변론을 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는 국민법정 준비위원회가 선정한 각계각층 시민 배심원단 50명과 희생자 유가족 등이 참석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용산 참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온라인으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철거 용역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묵인했던 공권력, 아니 어떤 경우에도 철거 용역의 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토건 자본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었던 공권력이었다. 철거 용역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망루를 짓고 올라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었다.

 

 

재판도 철거민들에게 불리하게만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 요청을 불허했다. 검찰이 수사기록 1만쪽 가운데 3천쪽가량을 열람조차 못 하게 했지만, 재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공개된 3천쪽의 수사기록은 사건 초기에 경찰에 연행된 관련자들의 진술이 담겨 있었다. 특히 현장의 경찰들은 최초의 진술에서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못 봤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오로지 모든 죄를 철거민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이런 진술이 공개되면 불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과정에 항의해 권영국 변호사팀이 사임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선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맡길 수는 없어서 천주교인권위원회의 김형태 변호사에게 사건을 부탁했다. 어려운 일을 맡아달라 했지만, 김형태 변호사는 변론 팀을 꾸려서 사건을 맡아주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당시 민주당을 비롯한 야 4당으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범’으로 몰아가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의 공세를 이겨내진 못했다. 뉴타운 바람이 몰고 온 재개발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도 성과가 없었다.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는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자고 정치권에 요구했다. 그 법안은 발의는 되었지만 심의로 가지 못했다.

 

특수분장으로 수사망 피하다

용산범대위는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을 지키면서 대정부, 대정치권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힌 우리 수배자 세명은 용산범대위의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탈출만이 답이었다. 완강기 밧줄을 걸치고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갔던 첫번째 탈출극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는 특수분장으로 벗어나고자 했다.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함께 맡았던 진보네트워크 대표 이종회 선배가 아는 인맥을 동원했다. 영화 하는 사람들, 방송 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몇팀이 다녀갔지만, 장례식장을 경찰이 철통 감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 없어 했다. 그러다가 영화 특수 분장 전문팀이 왔다. 그들이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 수배자들 사진을 찍어갔다. 그걸로 연구를 한 모양이다.

 

 

9월 초의 어느 날, 먼저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 의장은 완전 백발노인으로 변했다. 남 의장 옆을 따라갔던 전철연 사람들도 그 사람이 남경남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다음은 이종회 선배였다. 대머리의 중년 남자가 되어 선배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앞의 두사람이 분장할 때는 한 사람당 2시간 이상 걸려서 완전히 딴 사람을 만들어냈다. 분장 팀은 내게는 여자로 변장하자고 했다. “누가 박래군씨가 여장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자는 것이었다. 가발을 뒤집어쓰고, 브래지어를 착용한 뒤 수건을 넣어 가슴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 상복을 입었다. “절대 고개 들지 말고, 남편 잃은 여자처럼 고개를 숙여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후문 쪽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를 타고 나가면 된다고 했다. 전철연 두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가 후문을 열었더니 마침 승용차가 있었다. 차 문을 잡아당겼는데, 안 열렸다. 알고 보니 약속했던 전철연 회원이 겁이 나서 차를 대지 않았던 것이었다. 2인 1조 경찰들이 10m 간격으로 양쪽 길가에 서 있었다. 거기서부터 병원 정문까지는 150m였다. 가슴이 쪼였다. 옆에 나를 부축하는 전철연 여성들이 더 떨었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젖어서 우는 여자처럼 행세했다. “그만 울어. 어떻게 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차가 다니는 길까지 어찌어찌 나왔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활동가가 우리 앞에 차를 댔다.

 

 

우리는 서울 명동의 천주교인권위로 들어갔다. 6개월 만에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우리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본당 신부님이신 몬시뇰께서 영안실을 내주었다. 옛 계성여고 후문 담 옆에 지하 영안실이 있었다.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 준비위원회’의 조희주 위원(마이크 잡은 이) 등이 2009년 10월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용산 참사 현장 인근에서, 같은 달 18일 열린 국민법정의 판결문을 발표하고 있다. ‘시민 배심원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용산 참사 관련 책임자 20명에게 유죄를 평결했으며, 준비위는 철거민과 유족을 위한 사죄와 손해배상을 촉구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용산 참사 국민법정’을 열다

 

경찰은 우리가 탈출한 것을 다음날까지 전혀 몰랐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을 정리하고, 남일당 현장으로 유가족들도 갔다. 이후 용산범대위는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중 하나는 10월18일에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연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 국민법정’이었다. 전국을 돌면서 기소인들을 모았고, 배심원들도 모아서 하루 종일 재판을 열었다. 말하자면, 모의법정이었다.

 

 

재판부는 이명박 대통령,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관련자 20명에게 “피고인들은 용산 참사에서 자행한 강제 진압의 실체를 한점 의혹 없이 밝히고 유가족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판결했다. 또 “망루 농성에 참여한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범이 아니라 기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것인 바, 그들의 명예를 모두 회복시키고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라”고도 판결했다. 특별검사에 의한 재수사와 용산 4구역 세입자에 대한 재정착 지원, 피해배상, 재개발 관련 법 개정 등도 권고했다. 우리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판결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법정은 냉혹했다. 10월28일 1심 재판부는 아버지를 망루에서 잃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 이충연씨에게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것을 비롯해 7명에게 5~6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구속되어 있던 2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철거민들의 주장은 일축하고, 검사의 공소장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판결문이었다. 법정에서 선고를 들은 유가족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2009년 10월20일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문규현 신부님의 집도로 추모미사가 열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단식하다 쓰러진 문규현 신부

 

용산범대위는 남일당 현장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현장에서는 매일 저녁 천주교 미사가 열렸고, 문화제가 열렸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우리의 집회가 불법이라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가 매일 속출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을 문화적인 공간으로 계속 바꾸어갔다. 문학인들은 시를 짓고 낭독회를 했고, 화가들은 ‘파견 미술팀’을 만들어서 철거 현장을 꾸며 나갔다. 종교계에서는 천주교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매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현장을 지켰다. 남일당을 본당이라고 하면서 본당 신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의 이강서 신부를 세웠다. 불교계에서는 명진 스님이 천일기도를 마치고 거액의 후원금을 갖고 방문하기도 했다. 기독교, 원불교까지 종교계는 용산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용산범대위는 참사를 외면하는 정부를 향해 단식 투쟁을 결의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대표단이 단식을 하다가 끌려갔지만, 남일당 현장에서 단식을 이어갔다. 우리 수배자들도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단식 투쟁에 합류했다. 단식 열하루날 새벽, 문규현 신부님이 쓰러져 병원에 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 신부님은 단식을 하면서도 일정을 모두 소화하느라 무리를 했다. 문 신부님은 이틀이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노심초사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초조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기도했다. 다행히 사흘 만에 신부님이 깨어나셨다. 나는 “신부님이 부활하셨다”고 기뻐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2)

 

 

 

장례식은 2010년 1월9일로 정해졌다. 장례위원을 모집했더니 순식간에 8천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날 영하의 날씨에 바람도 불고, 눈발도 날렸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출발한 장례행렬은 명동을 거쳐서 영결식장인 서울역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이 서울역을 가득 메웠다. 그 장면을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봤다. 노제는 남일당 앞에서 있었다. 눈발은 더욱 세차게 날렸다. 그들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355일 만이었다.

 

 

■ 355일 만에 언 땅에 용산 철거민들을 묻다

한겨레2025. 3. 3. 18:30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42화 ‘용산 참사’ 책임 규명 ③

참사 그해 연말 서울시 협상 제의
이듬해 지방선거 등 고려한 듯
용산범대위-재개발조합 협상 타결
‘정부 사과’는 미흡한 수준 그쳐

1월 초 355일 만에 장례식 엄수
눈발 세찬 날 남일당 앞에서 노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서 영면

활동가들 장례 뒤 감옥행…보석 석방
생존 철거민, 이명박 정권 내내 옥살이
참사책임 김석기 사과 없이 ‘3선 의원’

 

‘용산 참사 장례식’을 마친 유족과 시민 3천여명이 2010년 1월9일 오후 눈이 내리는 가운데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앞에서 노제를 열고 있다. 철거민 희생자 5명은 이날 저녁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끌어낸 사안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인권 분야에서 진보가 이루어지던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 급격한 인권 후퇴가 일어났다. 국제사회가 우려하던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용산 참사였다. 6월에는 유엔 주거권 특별보고관이 방문했고, 10월에는 국제앰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이 찾아왔다. 이들은 남일당 현장을 찾았고, 유가족들을 만나고 우리 수배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11월24일,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강제퇴거는 오로지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될 것” 그리고 “사전 통지하지 않거나 임시 주거를 제공하지 않은 채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권고했다.

 

 

‘용산 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 앞에서 2010년 1월9일 오후 노제를 지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355일 만에 치른 장례식

 

그해 추석에 정운찬 국무총리가 다녀갔다. 그는 이 사건을 풀기 위해서 나름 노력을 했다. 용산 참사는 정부에도 부담이 되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압력도 있었고, 2010년에는 지방자치선거도 치러야 했다.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울시가 다급하게 협상을 제안해왔다. 며칠 동안 비공개로 서울시의 주선으로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와 용산4구역재개발조합 간의 협상이 진행됐다. 유가족과 용산범대위의 위임을 받은 천주교인권위의 김덕진과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의 성낙경이 협상 실무를 맡았다.

 

 

12월30일, 용산범대위와 재개발조합 간의 협상이 타결되었다. 유가족 위로금, 용산4구역 철거민에 대한 피해보상금, 장례비용을 재개발조합이 부담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용산범대위는 마지막까지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정부를 대표하여 정운찬 국무총리는 “‘용산 참사’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농성자 다섯명과 경찰관 한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은 우리 시대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데 대해 총리로서 책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유족 여러분들께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미흡했지만, 더 이상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례식은 2010년 1월9일로 정해졌다. 장례위원을 모집했더니 순식간에 8천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날 영하의 날씨에 바람도 불고, 눈발도 날렸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출발한 장례행렬은 명동을 거쳐서 영결식장인 서울역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이 서울역을 가득 메웠다. 그 장면을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봤다. 노제는 남일당 앞에서 있었다. 눈발은 더욱 세차게 날렸다. 그들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355일 만이었다.

 

 

1월11일, 삼우제를 마친 유가족들과 대책위 관계자들이 명동성당으로 왔다. 이제 우리가 나갈 차례였다. 명동성당의 몬시뇰님을 비롯해 신부님, 수녀님들이 우리가 나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잠시 (감옥에) 다녀오겠습니다. 355일 만에 장례를 치렀지만,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3명의 수배자는 이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을 한명 한명 안았다. 그들은 벌써 울고 있었다.

 

“공집장님(유가족들은 공동집행위원장인 우리를 이렇게 불렀다)들이 왜 감옥에 가요. 어떡해요.”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마지막까지 참았다. 성당 앞에는 우리가 타고 갈 경찰차가 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가슴이 아팠지만, 차를 타면서는 밝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0개월간의 기막힌 수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일당 현장에서는 1월25일까지 모두 철수했다.

 

 

‘용산 참사’로 수배됐다가 2010년 1월11일 경찰에 자진 출석하는 박래군(오른쪽부터)·이종회 ‘용산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과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회 의장.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구치소 1.5평 독방

 

나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네번째 감옥이었다. 내 방은 1.5평이었다. 그런데 그 방이 넓게 느껴졌다. 내 몸은 20대에 처음 감옥에 갔던 0.75평 또는 1평의 방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수세식 좌변기와 수도도 있었고, 방에는 난방이 들어왔다. 감옥 생활은 힘들지는 않았다. 용산범대위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수배를 당하면서 지도부 일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어서일까, 마음은 오랜만에 평화로웠다.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시간을 아껴서 살아냈다.

 

 

1주일에 한번씩 아내와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딸이 면회를 왔다. 수배당한 다음에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으로, 명동성당으로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몇시간 동안 내 곁에서 머무르다 돌아가곤 했다.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명동성당 들머리 끝에서 안타깝게 포옹을 하고 손을 흔들어서 보내곤 했다.

 

 

구치소 면회는 겨우 10분이었다. 우리 사이를 투명 아크릴판이 막고 있었다. 손도 잡을 수 없으니 그 투명 아크릴판 안팎에 손을 대고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들어가.” 매번 아내는 내가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다가 딸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4월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일반도로교통법 위반 등등으로 기소되어 있었다. 재판기록은 1만쪽 정도가 되었다. 두차례인가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내 49번째 생일날인 4월30일, 갑자기 보석 결정이 내려져 석방되었다. 14개월 만에 세상에 돌아왔다.

 

 

감옥에 갔던 망루 생존자들은 이명박 정권 임기 종료 직전이 2013년 1월31일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들은 대한문 앞 환영 문화제에서 “다른 용산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용산범대위의 후속 기구인 ‘용산 참사 진상 규명 및 재개발 제도 개선 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감옥에 같이 갔던 이종회 선배와 다시 맡았다. 대표는 용산범대위의 공동대표였던 조희주 대표가 이어받았고, 사무국장은 지금은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이원호가 맡았다.

 

 

우리는 용산 참사 주범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집요하게 싸웠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를 거쳐서 오사카 총영사를 지내다가 2013년 10월에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공항공사가 있는 김포공항에서 노숙 농성을 하면서 싸웠고, 그가 2016년 경주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20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도 싸웠다. 유가족들을 포함해 우리는 다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재판을 받았다. 김석기는 3선 의원이 되었다.

 

지금도 쫓겨나는 사람들

용삼 참사 현장인 남일당 자리는 2016년 11월 공사가 재개될 때까지 공터였고, 주차장이었다. 사람이 6명이나 죽은 그 현장에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가 들어섰다. 센트럴파크 오른쪽에 6층 건물은 공공시설동으로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이 있고, 그 안에 ‘2009년 용산 참사(기억과 성찰) 기억관’이 들어서 있다.

 

 

2018년 8월,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 위원회에서는 용산 참사를 조사한 뒤에 “경찰 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진압 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당시 민갑룡 경찰청장은 유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9년 만이었다. 반면, 김석기는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현재 경찰도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개의 문’이 개봉된 것은 2012년 6월이었고, 또 다른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은 2018년에 개봉되었다. 두개의 작품 모두 영상집단 ‘연분홍치마’가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용산 참사에 대한 기억을 일깨웠다.

 

 

용산에서 생존권, 주거권을 주장하던 철거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망루에 올랐던 지석준, 김영근은 그때 당한 부상으로 오래도록 고생했다. 망루 생존자 김대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김주환은 집 밖을 나오지 못한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한다.

 

 

시인 나희덕은 “새로운 도시가 생겨날 때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 지상의 어떤 방도 그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신정 6-1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는 시를 썼다. 지금도 여전히 재개발 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된다. 여전히 철거민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3)

 

 

 

<자료출처>

 

(1) 불타는 망루 “여기 사람이 있다”…용산 참사의 진실 찾기

 

 

(2) 불공정 재판·테러범 몰이 언론…용산 참사 법정은 가혹했다

 

 

(3) 355일 만에 언 땅에 용산 철거민들을 묻다

 

 

 

<참고자료>

 

 

용산 참사 발생 - Daum 백과

 

 

[용산 철거민 참사] 철거민 강경 시위 왜?.. "보상금으론 생계·주거 막막"

 

 

[용산 철거민 참사] 보상비 놓고 건물주-세입자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