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2) 26대 영양무원호태열제(영양제, 영양왕, 590년-618년) 연호; 홍무, 598년 제1차 고수전쟁, 612년 제2차 고수전쟁, 613년 제3차 고수전쟁, 614년 제4차 고수전쟁(1) 본문
1. 고구려(22) 26대 영양무원호태열제(영양제, 영양왕, 590년-618년) 연호; 홍무, 598년 제1차 고수전쟁, 612년 제2차 고수전쟁, 613년 제3차 고수전쟁, 614년 제4차 고수전쟁(1)
대야발 2025. 11. 28. 16:37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嬰陽王)
영양왕이 즉위하다 ( 590년 10월 )
영양왕(嬰陽王)은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원(元) 대원(大元)이라고도 한다.이고,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당당하고 호쾌하였으며,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평원왕 재위 7년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32년에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수가 영양왕을 책봉하다 ( 590년 )
〔원년(590)〕 수(隋) 문제(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벼슬을 내려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를 삼고, 요동군공(遼東郡公)의 관작을 이어받게 하였으며, 옷 한 벌을 주었다.
수에 사신을 파견하다 ( 591년 01월 )
2년(591)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수(隋)에 가서 표(表)를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헌상하며 왕(王)으로 봉해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수가 영양왕을 책봉하다 ( 591년 03월 )
〔2년(591)〕 3월에 〔수 문제가 왕을〕 책봉하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다
수에 사신을 파견하다 ( 591년 05월 )
〔2년(591)〕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수에 사신을 파견하다 ( 592년 01월 )
3년(592)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수(隋)에 가서 조공하였다.
수에 사신을 파견하다 ( 597년 05월 )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수(隋)에 가서 조공하였다.
요서를 공격하고 수와 전쟁을 시작하다 ( 598년 )
9년(598)에 왕이 말갈(靺鞨)의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隋) 문제(文帝)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명을 내려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나란히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水軍)과 육군 300,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수가 왕의 관작을 삭탈하다 ( 598년 06월 )
〔9년(598)〕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수군이 고전하다 ( 598년 06월 )
〔9년(598) 6월에〕 한왕(漢王) 〔양〕량(楊諒)의 군대는 임유관(臨渝關)을 나갔는데, 장마를 만나 군량 운반이 이어지지 않아 군중(軍中)에 먹을 것이 떨어졌으며, 거듭 전염병을 만났다. 주라후(周羅睺)는 동래(東萊)에서 바다로 나가 평양성(平壤城)으로 향하였는데,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대부분 표류하거나 침몰하였다.
수군이 철군하다 ( 598년 09월 )
〔9년(598)〕 가을 9월에 〔수의〕 군대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10명 중에 8〜9명이었다. 왕 역시 몹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表)를 올려 ‘요동(遼東) 더러운 땅[糞土]의 신하 모(某)’라 칭하였다. 황제가 그제서야 군사를 물리고 처음처럼 대하였다.
백제 변경을 치다 ( 598년 09월 )
〔9년(598) 9월에〕백제왕 창(昌)이 〔수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군의 길잡이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타이르기를,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으니 칠 수 없다”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우하여 보냈다. 왕이 그 일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쳤다.
수에 사신을 파견하다 ( 600년 01월 )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수(隋)에 가서 조공하였다.
신집을 편찬하다 ( 600년 01월 )
〔11년(600) 정월에〕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조서를 내려 옛 역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국초(國初)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실[事]을 100권으로 적고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줄여 정리한 것이다
북한산성에서 신라에 패배하다 ( 603년 08월 )
14년(603)에 왕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왕이 병사를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너오자, 성 안에서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은 많고 우리가 적어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퇴각하였다.
돌궐의 장막에서 수 양제와 마주치고 입조를 요구받다 ( 607년 )
18년(607) 애초에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하였는데,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 사신과 함께 황제를 만났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황제를 달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땅으로, 한(漢)·진(晉)대에는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신하〔의 도(道)〕를 지키지 않고 별개의 다른 지역(異域)이 되어버렸는데, 선제(先帝)가 그들을 정복하려 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내었지만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절을 맞이하여 어찌 취하지 않아 예의가 바른 지역[冠帯之境]을 끝내 오랑캐의 소굴이 되게 하겠습니까? 지금 저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들어〔수를〕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몹시 두려워함을 이용해 사신을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우홍(牛弘)에게 칙서를 내려 널리 선포하며 말하기를,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우리〕 나라[隋]를 받들었기 때문에 친히 그의 장막에 왔는데,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는 날에 그대의 왕에게 말하여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와서 조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오. 살피어 길러주는 예는 마땅히 계민과 같게 할 것이오. 만약에 혹여 조알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은 번(藩)의 예가 자못 이지러져서 황제가 토벌해올까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송산성과 석두성에서 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다 ( 607년 05월 )
〔18년(607)〕여름 5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대를〕 옮겨서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였는데, 남녀 3,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 608년 02월 )
19년(608) 봄 2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8,000명을 사로잡았다.
신라로부터 우명산성을 빼앗다 ( 608년 04월 )
〔19년(608)〕여름 4월에 신라 우명산성(牛鳴山城)을 쳐서 빼앗았다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선언하는 조서를 내리다 ( 611년 02월 )
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수의 군대가 탁군에 집결하다 ( 611년 04월 )
〔22년(611)〕여름 4월에 거가가 탁군(𣵠郡)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자, 사방의 군사가 모두 탁군에 모였다
수양제가 조서를 반포하고 출정하다 ( 612년 01월 )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와 갈석[碣]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가 주륙을 거듭하여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막힌 곳이 많아지니 종족과 부락이 다시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모으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니 오늘날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華壤]을 돌아보니 잘라져서 오랑캐 부류가 되었고, 여러 해의 지남이 오래되어 악의 쌓임이 이미 가득 찼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시작되었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도덕과 의리를 그르침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고 사특함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오히려 날이 부족하다. 문서로 알리는 엄함을 면대하여 받은 적이 없고,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가고 배반한 자들을 꾀어서 받아들임에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가득 채워 봉화대를 매우 수고롭게 하니, 관문의 빗장과 딱따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이미 하늘이 친 그물에 빠져 있어서 이미 앞에 사로잡은 자의 죽음을 늦추어주고 아직 뒤에 항복한 자의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품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이에 거란의 무리를 합쳐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靺鞨)의 일을 익혀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는 모두 공납을 행하고 벽해(碧海)의 물가에서는 함께 정삭(正朔)을 받았는데, 〔그대[고구려]가〕결국 다시 보물을 강제로 빼앗고 왕래를 막아 끊어서 학대가 죄 없는 사람에게 미치고 성실한 자가 화를 만나게 되었다. 천자의 뜻을 받든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海東)에 다다르면 정절(旌節)이 머무는 곳은 그 길이 번경(藩境)을 지나게 되는데, 〔고구려가〕 도로를 막고 왕의 명령을 받는 사람을 막아 거절하며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라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무엇인들 용인할 수 없겠는가? 또한 법령이 가혹하며 세금을 거두는 데 번잡하고 무거우며, 힘 있는 신하와 호족이 모두 나라의 권력을 쥐고 붕당은 한패가 되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며,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함을 알릴 수가 없다. 여러 해 재난과 흉년이 거듭되어 집집마다 기근이고 전쟁은 쉬지 않으며 요역은 기한이 없어서 힘은 수송하는 데 다 쓰고 몸은 도랑을 메우고 있다. 백성은 근심으로 괴로워하니, 이에 누구를 맞이하여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는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니 그 폐단을 이길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각 생명을 보존할 대책을 품고, 노인과 아이는 모두 혹독함의 탄식을 느꼈다. 풍속을 살피고 먼 북방[幽朔]에 이르면서 억울한 사람을 위문하고 죄를 저지른 사람을 문책하며 다시는 거가가 가는 일이 없으리라. 이에 친히 6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펼침으로 그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하늘의 뜻을 복종하며 좇아 이 달아나는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계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법령을 내려 행군을 시작하고 군대를 나누어 〔정해진〕 길에 이르는데, 발해(渤海)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扶餘)를 지나면 번개같이 쓸어버릴 것이다. 방패를 나란히 하고 갑옷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고, 세 번 영(令)을 내리고 다섯 번 훈계하여 반드시 승리함을 기약한 후에 싸울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 ․개마(蓋馬)․건안(建安)․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玄莬)․부여(扶餘)․조선(朝鮮)․옥저(沃沮)․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고,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肅愼)․갈석(碣石)․동이(東𦖮)․대방(蔕方)․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아가되, 진군을 멈추지 않고 길을 인도하여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라고 하였다. 모두 1,133,800명인데 2,000,000명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 상건수(桑乾水) 가에서는 토지의 신[社]에게 의제[宜]를 지냈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는 상제(上帝)에게 유제[類]를 지냈으며, 계성(薊城) 북쪽에서는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친히 지휘관을 임명하였는데, 각 군마다 상장(上將)·아장(亞將) 1인을 두었다. 기병은 40대(隊)였는데, 대마다 100명이 있었고, 10대는 1단(團)이 되었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었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인이 있었다. 그 갑옷․투구․영불(纓拂)․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달리 하였다. 매일 1군씩 보냈고, 서로 간의 거리는 40리였으며, 진영을 잇달아 점진적으로 나아가니, 마침내 40일 만에 출발하는 것이 다하였다. 선두와 후미가 계속 이어져 북과 호각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御營) 안은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여 내(內)․외(外)․전(前)․후(後)․좌(좌)․우(右) 6군에 나누어 배속시켜 차례로 출발하니 다시 80리에 뻗어 있었다. 과히 멀지 않은 즈음에 군대 출정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적은 없었다.
수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다. ( 612년 02월 )
〔23년(612)〕 2월에 황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요수(遼水)에 이르렀고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강에 접근해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의 병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隋)의 군사가 건널 수 없었다. 황제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을 내려 요수 서쪽 언덕(岸)에서 부교(浮橋) 세 개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윽고 완성되자 다리를 끌어서 〔요수〕 동쪽 언덕에 대고자 하였는데, 짧아서 한 장 남짓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의 군사가 대거 이르니, 수의 군사 중에 날래고 용감한 자가 다투어 물에 들어가 접전을 펼쳤다. 우리의 군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들을 공격하니 수의 군사가 언덕에 오를 수 없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병사를 거두고 다리를 끌어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수 양제는〕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을 내려 다리를 연결하게 하였는데, 〔하조가〕 이틀 만에 완성하였다. 여러 군대가 차례로 계속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우자, 우리의 병사가 대패하면서 죽은 자가 10,000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요동성(遼東城)으로 나아가 포위하였는데, 바로 한(漢) 양평성(襄平城)이다. 거가가 요(遼)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었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을 내려 요〔수〕 좌측[遼左]의 백성을 위무하면서 10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서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을 지켜내다 ( 612년 05월 )
〔23년(612)〕 여름 5월에 처음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오는데, 황제가 타이르며 말하기를, “모든 군사(軍事)의 나아가고 멈춤은 모두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리고 멋대로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요동성(遼東城)은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이에 성을 둘러서 굳게 지켰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여러 장수에게 칙서를 내려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위무하며 받아들이고, 군사를 멋대로 내버려두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여러 장수가 〔수양제의〕 뜻을 받들어 감히 제때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수 양제에게〕 달려가 아뢰고자 하였다. 빈번히 회답이 이를 즈음이면 성내의 방어 또한 정비되어 적절하게 나가 막아 싸웠다. 이처럼 두세 번 하였는데 황제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고, 그러는 동안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수 양제가 요동성으로 행차하다 ( 612년 06월 )
〔23년(612)〕 6월 기미(己未)에 황제가 요동성(遼東城) 남쪽으로 행차하여 그 성곽과 해자[城池]의 형세를 보고, 이로 말미암아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공들은 자신의 관직이 높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음으로써, 나를 사리에 어둡고 나약한 사람으로 대하려 하는 것이오? 황도[都]에 있었을 때 공들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음은 병통과 폐단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일을 보고 공 그대들의 목을 베려함이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렵고 무서워 벌벌 떨며 얼굴색을 잃었다. 이어서 황제가 성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육합성(六合城)에 거둥하였지만, 우리의 여러 성은 굳게 지키며 함락되지 않았다.
평양성에서 내호아의 군대에게 승리하다 ( 612년 06월 )
〔23년(612) 6월에〕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배들이 수백 리 꼬리를 물고 바다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 패수(浿水)로 들어갔다. 평양(平壤)에서 60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나아가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그 성으로 향하였는데,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만류하며 여러 군대가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아가자고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군사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다. 우리의 장수는 나곽(羅郭) 안의 빈 절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별도의〕군사를 보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였다. 〔내〕호아는 이들을 추격하여 성으로 들어와 군사를 풀어 놓고 약탈하느라고 대오를 갖추지 않았는데, 매복해 있던 병사가 나타나니 〔내〕호아는 대패하여 가까스로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 중에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이었다. 아군이 배가 있는 곳까지 쫓아갔으나, 주법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니 아군은 이에 퇴각하였다. 〔내〕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바다 어귀에 주둔하였는데, 감히 다시 머물면서 여러 군대와 접촉하지 못하였다.
수의 군대가 압록수 서쪽에 주둔하다. ( 612년 06월 )
〔23년(612) 6월에〕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아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아가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莬道)로 나아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아가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아가고, 탁군태수(涿郡太守)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아가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아가서 모두 압록수(鴨綠水)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鎭)에서 사람과 말 모두 100일치 양식을 보급 받았고, 또 방패․갑옷․창․옷감․무기․화막(火幕)을 지급받았는데, 사람마다 〔짊어져야 할 무게가〕 석 섬 이상으로 무거워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쌀과 조를 버리는 자는 참할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사졸들은 모두 장막 아래에 땅을 파고 그것을 묻었다. 겨우 행군이 중간지점에 이르렀는데, 양식은 다 떨어지려고 하였다.
을지문덕이 수군 진영의 동정을 살피다 ( 612년 06월 )
〔23년(612) 6월에〕 왕이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허와 실을 살피고자 한 것이었다. 우중문(于仲文)은 앞서 은밀히 조서를 받들었는데, “만약 왕과 〔을지〕문덕이 와서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그들을 사로잡아라.”라고 하였다. 〔우〕중문은 그를 잡으려 하였으나, 위무사(慰撫使)인 상서우승(尙書右丞) 류사룡(劉士龍)이 굳게 그만두라고 하니, 〔우〕중문이 마침내 〔류사룡의 말을〕 받아들여 〔을지〕문덕이 돌아갔다. 이윽고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에게 속여 말하기를,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되돌아오시오.”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수(鴨渌水)를 건너갔다.
유인전술을 펴서 수의 군대를 공격하다 ( 612년 06월 )
〔23년(612) 6월에〕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이미 〔을지〕문덕을 놓쳐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거듭 그를 만류하자, 〔우〕중문이 노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도 작은 도적을 격파할 수 없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뵐 것이오? 또한 〔나〕 중문은 이번 행군에 처음부터 공(功)이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옛 훌륭한 장수가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군중(軍中)의 일이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적에게 승리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때 황제는 〔우〕중문에게 계획이 있다고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우중문에게〕 묻고 보고하여 지휘를 받도록 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부득이하게 그를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그들을 피곤하게 하고자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 〔우문〕술은 하루 중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으므로 누차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 쫓겨, 이때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군대를 돌린다면 마땅히 왕을 섬겨 행재소(行在所)로 조알하겠소.”라고 하였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폐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았으며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그 거짓 항복을 따라 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진(方陣)을 치고 행군하자 아군이 사방에서 습격하였는데,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살수에서 승리하고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 ( 612년 07월 )
〔23년(612)〕 가을 7월에 〔수의〕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대가 반쯤 건너자 아군이 뒤에서 그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는데,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 때 여러 군대가 함께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 낮 하룻밤만에 압록수(鴨渌水)에 이르렀으니, 행군한 것이 450리였다. 장군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殿]이 되어 아군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 역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에 아홉 개의 군이 요(遼)에 이르렀으니 모두 305,000명이었는데, 요동성(遼東城)으로 돌아온 이는 오직 2,700명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군수와 기계는 잃어버려 완전히 없어졌다. 황제가 대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璋)이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그들에게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장은 우리와 몰래 내통하였다. 수의 군대가 출병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수(隋)에 들어가 출병시기를 청하였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후하게 상을 내리며,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보내 백제로 가서 시일과 모일 날짜를 알려주었다. 수의 군대가 요(遼)를 건너자 백제도 국경 근처에서 군대를 엄하게 하였는데, 말로는 수를 돕는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두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는〕 이 전쟁에서 오직 요수(遼水) 서쪽의 우리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다 ( 613년 01월 )
24년(613)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로 삼았으며, 요동의 옛 성[遼東古城]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논의하다 ( 613년 02월 )
〔24년613)〕 2월에 황제가 시종하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라는 작은 오랑캐가 상국을 거만하게 업신여기고 있소.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는 일도 가히 바라면 해낼 수 있는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라고 하고, 이에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며 말하기를, “오랑캐가 예(禮)를 잃음은 신하의 일이고, 천균(千鈞)의 쇠뇌는 생쥐 때문에 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친히 천자의 자리[萬乗]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는데, 황제가 듣지 않았다.
수의 군대가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 613년 04월 )
〔24년(613)〕 여름 4월에 거가가 요수[遼]를 건넜고, 우문술(宇文述)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 평양[平壤]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왕인공(王仁恭)이 부여도(扶餘道)에서 나아가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 수만 명이 대항하여 싸웠다. 〔왕〕인공이 굳센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격파하자, 아군은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을 내려 요동성[遼東]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함을 허락하였다. 비루(飛樓)․충차[橦]․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방에서 함께 진격하고 밤낮을 쉬지 않았으나, 우리가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여 그들을 막으니 20여 일동안 빼앗기지 않았고, 아군과 적군 가운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 장대의 길이는 15장(丈)으로, 효과(驍果)인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고 아군과 싸우는데, 짧은 무기로 접전을 벌이면서 〔고구려군〕10여 명을 죽였다. 아군이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떨어뜨려도 땅에 이르기 전에 마침 장대에 드리워져 있는 줄이 있어 〔심〕광이 잡아서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멀리서 보고 장하다고 하여 바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제수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는 베자루 백여만 개를 만들어 흙을 가득 채우고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넓이는 30보이고, 높이는 성과 나란하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도록 하였다. 또 팔륜루거(八輪樓車)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제작〕하여서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쏘게 하였다. 〔수의 군대가〕기일을 정하고 공격하려고 하여 성 안이 위태롭고 긴박하였다. 〔그런데〕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도착하였다. 황제는 크게 두려워하였고 또 고관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의 처소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걱정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은 본래 〔양〕현감과 친해서 속으로 불안하였는데, 〔이에 고구려로〕 도망쳐왔다.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 ( 613년 04월 )
〔24년(613) 4월에〕 황제가 밤에 비밀리에 여러 장수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기계․공격도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군영의 보루와 장막은 평온하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뭇사람의 마음은 두렵고 염려되어 다시 부대를 이루지 못하며 여러 길로 나누어 흩어졌다. 아군은 즉시 이를 알아차렸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午時)에 이르러 바야흐로 차츰 밖으로 나갔는데, 여전히 수(隋)의 군대가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천 병사를 내어 추격하였으나, 수의 군대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항상 서로 80~90리 떨어져 있었다. 요수(遼水)에 이르려고 하자, 어영(御營)이 다 건넌 것을 알고 비로소 후군(後軍)에 가까이 가는 것을 감행하였다. 이때 후군은 오히려 수만 명이었는데, 아군이 따라가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수의 군대가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 614년 02월 )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다시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였고,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였다.
수에 항복을 청하다 ( 614년 07월 )
〔25년(614)〕 가을 7월에 거가가 회원진(懷遠鎭)에 머물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 징발된 병사 대부분이 날짜를 어기고 이르지 못하였으며, 우리나라도 피폐하였다.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는데, 〔내〕호아가 이를 쳐서 이기고 평양을 향하고자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보냄에 따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내〕호아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 ( 614년 08월 )
〔25년(614)〕8월에 황제가 회원진(懷遠鎮)에서 군대를 돌렸다.
입조 요구를 거부하자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다 ( 614년 10월 )
〔25년(614)〕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斛斯政)을 대묘(大廟)에 알리고 이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에게 칙서를 내려 장비를 엄하게 하고 후에 거병할 것을 다시 도모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영양왕이 사망하다 ( 618년 09월 )
29년(618) 가을 9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이름을 영양왕이라 하였다(1)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 9년(598년)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 · 노 · 오 · 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그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 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으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정되고 해성이 평온해졌다.
이해(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 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루하다 뻐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가,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2)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 갈래는 현도길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길로 유주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 · 건창 · 백암 · 창려 등 여러 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 · 탁성 · 신창 · 용도 등 여러 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 평곡 · 조양 · 루성 ·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 분주 · 환주 · 풍성 · 압록은 임황에 속하게 되어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양광이 임신(612)년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우리는 조의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뒤에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맹과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3)
영양무원호태열제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614)년에 양광이 또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을 겹겹이 포우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려 하거늘, 열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를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를 꺼내 쏘아 가슴을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이 양광을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으로 철병하기를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뒷 사람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해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지라.
문무에 뛰어나신 우리 선조 환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으셨네.
고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네.
유유 · 일인 · 양만춘은
저들이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 왔으니
저 유철 · 양광 · 이세민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구나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 자나 되고
온갖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4)
■ 고구려의 신라 공략과 바보 온달의 전사
『훗날 영양왕이 즉위했다. 온달은 "계립령(조령_옮긴이)과 죽령의 이서 지방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신라에 빼앗긴 뒤로 그땅 인민들은 늘 통한으로 여기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대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하지 않으시고, 군대를 내주시면 한 걸음에 그 땅을 회복하리이다"라고 아뢰었다. 영양왕은 허락했다. 출정하기 전에 온달은 군영에서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영토를 빼앗았다. 만약 이번에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고 맹세했다. 그는 아차성(지금 경성 부근 광나루 옆의 아차산) 아래서 신라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구려 병사들은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려고 온달의 시신을 영구에 넣었지만, 영구가 땅에 꽉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따님이 직접 와서 울며 "국토를 못 찾고 임이 어찌 돌아가랴. 임이 아니 돌아가는데, 이 첩이 어찌 호로 돌아가리오"하고 졸도한 뒤 못 깨어났다. 그러자 고구려인들은 따님과 온달을 그 땅에 함께 묻었다.
영구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온달의 영구를 갖고 돌아가려 할 때,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가 고구려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던 말이 생각나 온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해서 차마 영구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영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의 끝부분에서는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결판났으니, 아아 갑시다'라고 하자 비로소 (관이)들리고 하관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공주가 '삶과 죽음이 결판났다'는 말만 하고 울었다면, 공주가 국토에 대한 열정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애정도 박약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온달의 영구가 그 말에 움직였다면, 온달은 국토의 회복을 위해 죽은 게 아니라 상사병에 걸려 죽은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사서 온달을 가르친 공주의 노력은 무엇이 되고 안온한 부귀를 버리고 전쟁에 나선 온달의 진심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룰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세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했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낮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
정약용 · 한진서 선생은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영토를 빼앗았다"는 온달의 말을 근거로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해본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계립령과 죽령의 이서 지방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라는 온달의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의 몇 년 동안과 안장왕 이후의 몇 해 동안에 한수 이남을 점령했던 것은 명백하다. 온달이 말한 '한수'는 지금의 한강이 아니라 양성의 '한래'다.
몇 해 전에 일본인 이마니시 류는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의 할 때 〈온달열전〉을 실제 역사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무식한 말이다. 온달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 · 신라 동맹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 · 고구려 동맹이 성립하여 삼국 흥망의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이런 온달에 관한 기록을 남긴 〈온달열전〉은 삼국시대의 몇 안 되는 글이다. 김부식의 가감삭제를 통해 사료의 가치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으리라는 점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5)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수당전쟁 1편 수나라 백만 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https://youtu.be/zq_ulX5Gn0g?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자료출처>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85~587쪽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81~583쪽
(4)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77~579쪽
(5)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359~361쪽(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354~359쪽(《조선상고사》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군의 쟁탈 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6. 고구려의 신라 공략과 바보 온달의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