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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3) 26대 영양무원호태열제(영양제, 영양왕, 590년-618년) 연호; 홍무, 598년 제1차 고수전쟁, 612년 제2차 고수전쟁, 613년 제3차 고수전쟁, 614년 제4차 고수전쟁(2)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1. 고구려(23) 26대 영양무원호태열제(영양제, 영양왕, 590년-618년) 연호; 홍무, 598년 제1차 고수전쟁, 612년 제2차 고수전쟁, 613년 제3차 고수전쟁, 614년 제4차 고수전쟁(2)

대야발 2025. 11. 29. 18:02

 

 

 

 

 

■ 고 · 수전쟁의 원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상호 충돌하는 것이 공리요 정리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종족이 상호 대결했지만, 이들은 거의 다 무식하고 미개한 유목민이며 야만족이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했을 뿐, 문화가 취약했기 때문에 뿌리 없는 나무같은 종족들이었다. 그래서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설 터전을 잃고 말았다. 토착 민족으로서 장구한 역사와 선진적 문화를 가진 것은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중국과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었다. 그러니 둘이 만날 때에 어찌 충돌이 없었으랴. 간혹 충돌이 없는 때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양쪽이 각각 내부의 분열 및 불안으로 통일 문제가 더 시급할 때였다.

 

상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건국 이래 조선은 봉건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내부 열국의 상호 침공때문에 대외정복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중국은 한나라의 통일을 계기로 대외정복의 힘이 넉넉했기 때문에, 한나라 때는 고구려를 가장 많이 침략했다. 

 

태조 · 차대 두 대왕 때는 고구려가 조선 전체를 통일하지는 못했어도,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강성했기 때문에 조선 안에서는 고구려에 필적할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한나라를 쳐서 요동을 점령하고 직예 · 산서 등지도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왕위쟁탈전이 혼란스러워지다가 결국 고발기가 요동을 바치고 공손탁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인민이 가장 많고 토질도 비옥한 만주 땅을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고구려가 약소국의 지위를 면하고자 조조의 후손인 위나라와 모용씨의 나라인 연나라처럼 중국 북방의 국가들에 도전하는 사이에, 남방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일어나 고구려와 맞설 만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고국양 · 소수림 · 광개 세 명의 고구려 태왕이 등장하여 요동을 쳤다. 이때 고구려는 서북쪽으로 거란족을 정복하고 열하 등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등장한 장수태왕이 70년간 국부를 비축하니, 인구가 증가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중국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방 4개국이 고구려에 맞서 공수동맹을 체결하자, 고구려는 후방에서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장수태왕 이래로 고구려는 서진주의를 버리고 남방 통일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만약 이런 때에 중국 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한층 더 빈번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도 남북으로 분립하여 산해관 동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위 탁발씨가 백제를 침입한 일이나 북주 우문씨가 고구려를 침입한 일처럼 일시적 침입은 있었어도, 상호 간의 흥망을 다투는 장기적 혈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기 589년에 북주 우문씨의 황위를 빼앗은 수나라 문제 양견이 진나라(중국 강남지방의 왕조)를 병합하고 전 중국을 통일했다. 강력한 제국을 이룬 수나라는 중국 이외의 나라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북방의 돌궐이나 그보다 남쪽인 토욕혼은 쇠약해서 중국에 신하의 예를 취할 뿐이었다. 동방의 고구려라는 제국만이 강성하여 홀로 중국과 대항했으니, 저 오만한 중국의 제왕이 참을 수 있었으랴(수나라 황족과 신하들은 거의 다 선비족이었지만 한족에 동화된 지 이미 오래였다). 이것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제1요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간 풀지 못할 원수가 되었지만, 갑자기 장인-사위의 나라가 되어 상호 화해하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양국은 항상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쳐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고구려 국정의 허와 실을 이따금 수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수나라 군주와 신하들의 야심을 자극했다. 이것이 수나라 침공의 제2요인이었다.

 

훗날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고 구차한 반 독립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년간 전개된 고구려의 강인한 저항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 의해 망했다면,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의 군현이 되고 말았을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역사책을 읽을 때, 신라 · 백제가 수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보고서 책을 덮고 한숨을 쉬게 된다.

 

2. 수문제의 모욕적 서한과 강이식의 북벌론

 

서기 597년은 고구려 영양대왕 8년이다. 또 이해는 수나라 문제가 진나라를 병탄하고 중국을 통일한 지 9년 뒤였다. 이즈음 수나라는 풍년이 계속되고 갑옷과 병장기도 매우 풍족했다. 그러자 고구려와 자웅을 겨룰 목적으로, 기만과 오만으로 가득한 모욕적인 서한을 보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짐이 천명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고 왕(영양태왕_옮긴이)에게 변경 구석을 맡긴 것은, 원로방지가 교화를 통해 하늘의 특성을 닮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항상 사절을 보내 조공하고 (다른 나라에서 중국에 사절을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춘추시대 이래의 습성이다. 상대국이 대등한 나라인 경우에는 국서에는 조공이라고 쓰지 못하고 역사서에만 그렇게 썼다. 고구려를 자극해서 전쟁을 일으킬 생각에 고의적으로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또 번부로 자처하지만, 왕은 성의가 부족하다. 왕은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닮아야 한다. 그런데도, 왕이 말갈을 압박하고 거란을 가두어 왕의 신하로 만들고 또 그들이 짐을 알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선한 자들이 의를 사모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니, 어찌 이처럼 해독을 끼칠 수 있는가. 짐의 태부에는 기술자가 적지 않으니, 왕이 필요하다고 주청만 하면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다(부강을 과장하는 말).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은밀히 재화를 움직이고 아랫사람들을 이용해서 노수(화살을 연속 발사하는 쇠뇌를 쏘는 사수_옮긴이)를 양성하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 너희 나라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을지라도, 만약 짐이 왕을 쫓아내게 되면 ...... 반드시 다른 관헌(고구려왕을 대신할 인물_옮긴이)을 보낼 것이다. 왕이 마음을 씼고 행동을 바꾼다면 짐의 좋은 신하가 된다는 뜻이니, 이렇게 한다면 어찌 다른 관헌을 보내리오. ...... 왕은 요하가 양자강보다 얼마나 넓다고 생각하는가? 고구려 군대가 많다 한들, 진나라보다 많겠는가? 짐이 만약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왕의 죄과를 책망하고자 한다면, 장군 한 명만 보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 무슨 큰 힘이 들겠는가마는, 일단은 열심히 왕을 깨우쳐 왕이 스스로 새롭게 되기를 바라노라."

 

 

《삼국사기》에는 평원왕 32년에 수문제가 평원왕에게 이 글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수서》에는 수문제 때인 개황 17년에 평원왕에게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평원왕 32년은 수문제 개황 17년보다 훨씬 빠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서 연도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 또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사망한 지 7년 뒤다. 따라서 《수서》에서는 고구려왕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사망 연도를 실제로 사망 연도가 아닌 부고가 들어온 연도로 기록함으로 인해 사건의 발생 연도가 바뀌는 것은 《춘추》이래로 중국에서 항상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수서》에서도 이같은 오류가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는 평원 · 영양왕의 연도는 《고기》에 의거해서 기록하고, 중국과 관련된 사건은 순전히 《수서》에 의거해서 기록했다. 《수서》에서 위의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니까, 《삼국사기》에서는 이 글이 평원왕 32년에 보낸 글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건에 관계괸 인물까지 잘못 기록하게 된 것이다.

 

 

영양대왕은 모욕적인 글을 받고 분노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답변 서한을 준비하려고 했다. 이때 강이식이 "이같이 모욕적이고 무례한 글에 대해서는 붓으로 답변할 게 아니라 칼로 답변해야 합니다"라면서 개전을 주장했다. 이 말을 반긴 대왕은 강이식을 병마원수(총사령관_옮긴이)로 삼고 정예병 5만과 함께 임유관을 향하도록 했다. 그는 또 예족(《수서》의 말갈족) 군대 1만 명을 보내 요서 지방을 침공하여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도록 하는 한편, 거란군 수천 명을 보내 바다 건너 산동을 치도록 했다. 이로써 양국의 제1차 전쟁이 개시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이란 세 글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책이 《수서》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대동운해》에서는 강이식이 살수 전투 때의 병마도원수라고 했고, 《서곽잡록》에서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때의 병마원수라고 했다. 살수 전투 당시 왕제 고건무가 해상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강이식이 병마도원수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서곽잡록》을 따르기로 한다.

 

 

3.임유관 전투

 

이듬해(영양태왕 재위 9년, 서기 598년_옮긴이)에 고구려 군대는 요서를 침공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요서 총관인 장충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임유관으로 물러갔다. 그러자 수문제는 한왕 양량을 행군도총관으로 삼고 30만 대군과 함께 임유관으로 가도록 하고,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고 바다로 나가게 했다. 주라후는 공개적으로는 평양으로 향하는 것처럼 했지만, 실은 양곡 선박을 인솔하고 요해로 들어갔다. 양량의 군대에 군량을 대줄 목적이었던 것이다.

 

강이식은 수군을 보내 바다에서 수나라의 양곡 선박을 격파하도록 하는 한편, 전군에 명령을 내려 요새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도록 했다.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6월 장마를 만났다. 이로 인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수나라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했다. 추격에 나선 강이식은 유수에서 그들 대부분을 섬멸하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장비를 획득한 채로 개선했다.

 

《수서》에서는 "양량의 군대는 장마 중에 질병을 겪고, 주라후의 군대는 풍랑을 만났다. 수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사망자가 열의 아홉이나 됐다"고 했다. 자연적인 불가항력 때문에 패배한 것이지 고구려에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의 체면을 세우고자 치욕을 숨기는 이른바 춘추필법에 따른 것이다. 임유관 전투는 물론이고 다음 장에 나올 살수 전투에 관한 기록에도 춘추필법에 의거한 것들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전투 이후를 계기로 고구려를 무서워하게 된 수문제는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양국은 휴전 합의를 맺고 상품 교역을 재개했으며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 없이 지냈다.

 

 

제2장 살수 전투

 

1. 고 · 수 전쟁 재발의 원인과 계기

 

장수태왕 이래로 남진주의를 취한 고구려는 서북방의 중국과는 친교하고, 남방의 신라 · 백제와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남북 중국을 통일하자, 두려움을 느낀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멸하고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에 남방 정벌군을 자주 일으켰다.

 

한편, 동서 전쟁을 계기로 상호 화합의 여지가 없어진 신라와 백제는 매년 창과 방패로 항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북방 고구려의 침략으로 국력이 피폐해져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자, 양국은 각각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임유관 싸움에서 패한 뒤로 고구려를 가벼이 볼 수 없었기에 그런 요청을 거절했다.

 

이런 상태에서 수문제가 죽고 수양제가 즉위했다. 당시 수나라는 매녀 풍년이 계속된 덕분에 전국이 풍요로웠으며 각지의 창고에 미곡이 넘쳐났다. 수양제는 지방 순행을 좋아하여, 지금의 직예성 통주에서부터 황하를 넘어 지금의 절강성 항주까지 3천 리의 운하를 판 뒤 용주(임금이 타는 배_옮긴이)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이때 수나라는 토욕혼(지금의 티베트 바로 위), 서돌궐(지금의 몽골), 돌궐(지금의 몽골 동부) 등의 조공을 받았다. 수나라는 하늘 아래에서 오직 자국만이 강력한 제국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수나라가 해결해야 할 것은 동방의 고구려뿐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보다 영토가 좁은 나라였다. 하지만 인구가 많고 병사들이 용감하여 수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때 병마도원수로서 강남의 진나라를 평정했다는 이유로 무공을 자랑하며 헛된 야심을 품은 수양제가 이런 고구려를 어찌 잠시인들 그냥 둘 수 있으랴. 그의 야심이 폭발하지 않은 것은 그가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607년(수양제가 즉위한 지 3년 뒤), 양제는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림(지금의 산서성 영하)에 있는 돌궐족 계민가한의 장막에 행차했다. 이때 돌궐은 수나라에 신하국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강성한 고구려가 두려워 고구려에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양쪽 모두에 속국의 예를 다했던 것이다. 때마침, 이때 고구려도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이를 알아챈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을 불러달라고 계민가한을 위협했다. 수양제가 총애하는 배구는 "고구려의 땅은 거의 다 한사군의 땅이니, 중국이 이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선대 황제가 일찍이 이를 멸하려고 했지만, 양량이 재능이 없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것을 쉽게 잊으실 수 있습니까?"라며 수양제를 부추겼다.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왕이 내게 알현하지 않으면, 짐이 반드시 직접 나가볼 것이다"라며 조롱했다. 사신이 수양제에게 뭐라고 답변했는지, 사신이 귀국한 뒤에 고구려 조정에서 어떤 회의를 했는지는 역사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배구는 《동번풍속기》 30권을 지어 수양제에게 올렸다. 그는 평양의 아름다움과 개골산(금강산)의 수려함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다. 이것은 순행을 좋아하는 수양제의 침략 야욕을 한층 더 고무시켰다. 이리하여 수양제는 평범한 무명의 병사들을 대거 동원하여 동양 고대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2. 수양제의 침입과 전략

 

음력으로 대업 7년 2월,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는 전국의 군대를 이듬해 음력 정월까지 탁군(지금의 직예성 탁현)에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유주총관 원홍사에게 동래(지금의 연태) 해구에서 병선 300척을 건조하라고 시켰다. 음력 4월에는 강남과 회남의 선원 1만 명 및 노수 3만 명과 영남의 배찬수(작은 창을 사용하는 병사_옮긴이) 3만 명을 동원하여 수군을 증강했다. 음력 5월에는 하남(황하 이남_옮긴이)과 회남에 조서를 내려 전쟁용 수레 5만 대를 만들어 군복 · 무기 · 군막을 수송하도록 했다. 음력 7월에는 강남 · 회남의 장정과 선박을 동원해서 여양창 · 낙구창 등에 비축된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도록 했다. 강과 바다에서는 선박이 항상 천여 리나 이어지고, 육지에서는 수십 만 일꾼 들이 떠들며 운반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음력으로 이듬해(대업 8년_옮긴이) 정월에 수양제는 탁군에 가서 전군을 통수했다. 그는 좌와 우에 각각 12군을 배치하고, 각 군에 대장과 부장을 1인씩 두었다. 기병은 40대로 나누었다. 100인을 1대로 하고, 10대를 1단으로 했다. 전체를 4단으로 나눈 것이다. 보병은 80대로 나누었다. 20대를 1단으로 했다. 이 역시 전체를 4단으로 나누 것이다. 보급병과 산병도 각각 4단으로 나누고, 보병의 사이에 끼워 넣었다. 갑옷과 군기의 색깔은 각 단마다 달랐다. 진격 · 퇴각 · 정지 · 행군의 형세가 정연했다. 이것이 전체 24군의 모습이다. 각각의 군이 40리나 이어지고, 매일 1개 군씩 출발하니, 40일 만에 전체가 다 출발하게 되었다. 선두에서 후미까지 쭉 이어지고 북과 뿍소리가 산하를 울리며 깃발이 960리나 휘날렸다. 황제 직할부대가 맨 나중에 출발하니, 추가적으로 80리가 더 늘어났다. 정규군은 도합 113만 3,800명이었다. 그래서 200만 군대라고 불렀다. 여기에다 수송부대가 400만이었으니, 중국 역사상 미증유의 대규모 군대 동원이었다.

 

수양제의 출동 명령이 《수서》 에 기록되어 있다. 좌군 12군(軍)은 루방(鏤方) · 장잠(長岑) · 명해(溟海) · 개마(蓋馬) · 건안(建安) · 남소(南蘇) · 요동(遼東) · 현토(玄莬) · 부여(扶餘) · 조선(朝鮮) · 옥저(沃沮) · 낙랑(樂浪) 방면으로 진군하고, 우군 12군은 점선(黏蟬) · 함자(含資) · 혼미(渾彌) · 임둔(臨屯) · 후성(候城) · 제해(提奚) · 답돈(踏頓) · 숙신(肅愼) · 갈석(碣石) · 동이(東暆) · 대방(蔕方) · 양평(襄平) 방면으로 진군하여, 모두 평양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명해는 지금의 강화도, 옥저는 함경도 및 훈춘 등지, 임둔과 동이는 지금의 강원도이니, 평양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군이 훈춘이나 함북 또는 평양 이남으로 갈 이유가 있었을까? 《자치통감》에 기록된 각 군이 진군 상황에 따르면, "죄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 방면으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 방면으로, 좌효위대장군 형원향은 요동 방면으로, 우효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 방면으로,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토 방면으로,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 방면으로,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 방면으로, 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 방면으로, 우어위호분장군 위문승은 증지 방면으로 가서, 모두 압록강 서쪽에서 집결하라"고 했다. 낙랑 · 현토의 경우에는 한나라 이래로 요동에 임시로 설치한 북낙랑 · 현토가 있었으니 압록강 서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옥저가 어찌 압록강 서쪽이 될 수 있으랴? 이처럼 거의 다 임시로 만든 지명이고, 고구려의 본래 지명이 아니니, 이것으로는 행군 경로를 자세히 밝힐 수 없다.

 

전쟁 상황을 근거로 추론하면, 수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그는 24군을 수륙 두 방면으로 나누었다. 육군은 다시 두 방향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어영군과 10여 개의 군이었다. 수양제는 이들을 직접 지휘하여 요하를 건너 요동의 각 성을 치기로 했다. 또 하나는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등이 이끄는 9개 군이다.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참모를 맡고 우문술이 지휘를 맡아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을 침공하기로 했다. 수군은 수만 명이었다.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 래호아와 부총관 주법상이 군량 수송선을 이끌고 해로로 대동강에 들어가 우문술과 합류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했다.

 

태조대왕 때 왕자 수성(차대왕)이 한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끊고 한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로, 고구려가 북방의 침입에 맞설 때마다 이 같은 책략을 쓰면 반드시 승리했다. 북방 침입자들도 이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래서 수양제는 육군에게 행군 중에 먹을 양식만 갖고 목적지인 요동성과 평양서에 가도록 하고, 그 뒤에는 수군이 운송한 양식을 먹으면서 두 성을 포위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지구전을 벌여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3. 고구려의 방어와 작전계획

 

후세 사람들은 살수 전투가 거의 전적으로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또 을지문덕이 고작 수천 명의 병력으로 수나라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멸망 당시에 고구려의 상비군은 30만 명이었다. 그러니 영양대왕의 전성기인 을지문덕 당시에는 30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또 "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렸다"고 한 광개토태왕릉비문이나 "고구려가 거란과 함께 우리의 해상 경비병들을 죽였다"고 한 수양제의 선전포고문에서는 고구려 수군의 존재가 드러난다. 따라서 수군도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30여 만 명 중에서 몇 만 명은 남방의 백제와 신라를 막는데 투입되고, 그 나머지 20여 만 명이 수나라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수륙대원수는 당연히 영양대왕이었다. 수군원수는 왕제인 고건무이고, 육군원수는 을지문덕이었다. 수나라 군대가 수륙 양방향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고구려 군대는 수륙 양쪽의 방어에 균형을 맞추면서 선수후전을 지향했다. 육상의 장수들은 인민들에게 양곡을 거둬 성 안에 들어가 살도록 했고, 수군도 요새 항구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전투를 회피했다. 수나라 군대의 양식이 떨어지면 공격을 개시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4. 고구려 군대의 패강 승전

 

수나라 군대를 안쪽으로 유인할 목적으로, 을지문덕은 요하 북서쪽에 있던 군대를 요하에 배치했다. 대업 8년 3월, 수나라 군대가 요하에 당도했다. 서쪽 연안의 수백 리에 상하로 길게 진을 치자, 그 모습이 마치 우글우글한 벌떼같았다. 각 단의 장비와 깃발은 울긋불긋하게 햇빛에 반사됐다.

 

수나라 군대에서 가장 용맹한 선봉장 맥철장이 부교를 동쪽 강안에 대려 하자, 을지문덕은 장수들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고구려군은 맥철장 등 장수 수십 명과 병졸 만여 명을 죽이고 부교를 끊어놓았다. 수나라 병사 중에서 잠수나 헤엄을 잘하는 자들은 포상에 욕심이 나서 물에 뛰어들어 부교를 다시 연결했다. 을지문덕은 예정된 작전에 따라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면서 퇴군했다. 그러자 수양제는 전군을 동원해서 요하를 건넜다. 수양제는 어영군과 좌익위대장군과 왕웅 등에게 요동성을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좌둔위대장군 토우서 등의 10여 개 군에게 요동성 부근의 성들을 포위하라고 명령했으며,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등의 9개군에게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평양을 치라고 명령했다.

 

이보다 앞서, 수군총관 래호아는 양자강 · 회수 수군 10만여 명과 함께 양곡 수송선을 타고 동래에서 출발하여 창해(발해)를 건너 패강 입구에 들어섰다. 왕제인 고건무는 수군을 외진 항만에 숨겨 놓고, 평양성 밖 민가들에 재물과 비단을 늘어놓도록 지시했다. 그런 뒤 수나라 군대가 상륙하는 것을 방치했다. 래호아는 정예병 4만 명을 평양성으로 돌진했다. 수나라 군인들이 재물과 비단을 약탈하느라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건무는 결사대 500명을 평양성 외성의 빈 절에 숨겨 놓았다가 수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전군에 추격 명령을 내리자, 곳곳의 수군도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강 입구도 달려가 서로 먼저 배에 올라타려고 다투었다. 그러다 보니 밟혀 죽는 자가 매우 많았을 뿐만 아니라 양곡 수송선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래호아는 자기 혼자 몸으로 작은 배를 타고 도주했다.

 

 

양곡 수송선이 침몰했으니, 그 뒤 평양에 침입한 우문술 등의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겠는가. 이미 이때부터 고구려는 승자의 위치를 굳혔다. 만일 전공의 등급을 매긴다면, 왕제 고건무가 을지문덕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왕제 고건무의 공이 큰데도, 대부분의 역사 독자들이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사마광의 《통감고이》에서는, 양곡 수송선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문술이 살수에서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맞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5. 고구려 군대의 살수 승전

 

요하에서 퇴각한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약점을 탐지하고자 항복사신이 되어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서 내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우문술 등은 그의 당당한 모습에 놀라 "이게 고구려의 대왕이냐 대대로냐?"라며 그를 사로잡지 못하고 돌려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다시 만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미 을지문덕은 패강의 첩보를 듣고 우문술 등의 부대에서 굶주린 기색을 발견했다. 필승의 계산이 이미 섰는데 무엇하러 호랑이 굴에 다시 들어가리. 을지문덕은 급히 말을 달려 돌아왔다. 수나라 군대를 유인할 목적으로 그는 이따금 요새에 머물러 상대방과 접전을 펼치다가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했다. 이렇게 하루 중에 칠전칠패를 하니, 우문술 등은 매우 기뻐하면서 "고구려 군대는 하잘 것 없다"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러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까지 당도했다.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에 도착해 보니, 성 안팎의 민가들이 고요해서 사람의 그림자뿐 아니라 닭이나 개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심이 생긴 우문술 등은 곧장 진격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성문을 두드려보도록 했다. 성 안에서는 "조만간 항복하기 위해 토지와 인구에 관한 장부를 조사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 바깥에서 5일만 기다려달라"고 대답했다. 전보 같은 게 없었던 고대인 까닭에, 래호아가 패전한 사실을 몰랐던 우문술 등은 래호아를 기라렸다가 함께 공격할 생각에 평양성의 거짓 항복을 수락했다. 그러고는 성 부근에 진을 쳤다. 굶주린 병사들이 노략질을 하려고 했지만, 집집마다 텅 비고 물건도 전혀 없었다.

 

5일을 거듭하여 10여 일이 지났지만, 성 안에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우문술은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 바로 그때 성벽의 사면에 고구려 깃발이 동시에 꽂히고 화살과 돌맹이가 비 오듯 쏟아졌다. 을지문덕은 통역을 통해 "너희의 양곡 수송선이 바다에 잠겨 먹을 것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여 뛰어넘을 수 없으니, 너희들이 어찌하겠느냐?"라고 외친 뒤 노획한 수나라 수군 장병들의 직인과 깃발을 던져주었다. 그제야 수나라 병사들은 래호아가 패한 사실을 알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는 싸울 수 없었기에 우문술 등은 철군을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사람들을 보내 모래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은 뒤, 정예병 수만 명을 뽑아 수나라 군대의 뒤를 천천히 뒤쫓도록 했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도착하니,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우문술 등은 수심을 헤아릴 수 없어서 머뭇머뭇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고구려 승려 일곱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물에 들어가서 "오금에도 닿지 않는 물이구나"라고 말했다. 이를 듣고 기뻐한 수나라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물에 뛰어 들어갔다.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차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요동성에 가서 보니 30만 5천 명이었던 우문술 등의 9개 군이 겨우 2,700명밖에 되지 않았다. 100에 하나 꼴도 남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병장기 · 보급품 수억만 개가 모두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다.

 

 

6. 고구려의 오열홀 대첩

 

수양제의 어영군과 그 외의 10여 개 군은 수십만의 대군을 이루어 오열홀과 요동 각지를 쳤지만, 하나도 함락하지 못했다. 오히려 음력 3월부터 음력 7월까지 4,5개월 동안 고구려인의 화살과 돌에 맞아죽은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이 성 바깥에서 산을 이루었을 정도다. 또 양식을 얻지 못한 탓에 장병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에서 우문술 등이 패하고 돌아온 모습을 보니 싸울 생각이 더욱 더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최후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전군을 오열홀성 앞에 집결시켰는데, 을지문덕이 이 부대를 공격해서 대파했다. 사람과 말의 목을 베고, 수많은 병장기와 보급품을 노획했다. 훗날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그곳에 있었던 경관을 헐고 백탑을 세웠다. 사람들은 당태종이 안시성을 침입했을 때 당나라 장수 울지경덕이 이 탑을 쌓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와전된 이야기다.

 

수양제가 오열홀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수나라 24개 군의 수백 만 명이 전멸하고 오직 호분낭장 위문승의 잔여 병력 수천 명만 남았다. 이들이 수양제를 호위하면서 도주했다. 《수서》에서 우문술이 살수에서 패전한 것만 기록하고 수양제가 오열홀에서 패전한 것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존귀한 자를 위하여 숨긴다'는 춘추필법에 따른 것이다. 춘추필법을 알아야만 중국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고구려쪽에서 요하를 건너 00리쯤 가면 유명한 발착수가 나온다. 수가 붙기는 했지만, 실은 강이 아니라 200리에 걸친 늪이다, 그래서 요택이라고도 불린다. 요택에 병사들의 뼈가 묻혔다는 내용이 당태종의 조서에 실린 것을 보면, 수나라 군대가 이곳에서 매우 많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이거슨 고구려군의 추격에 의한 사망일 것이다.

 

이 전쟁의 3대 전투는 패강 ·  살수 · 오열홀 전투다. 맨 처음 공을 세운 것은 패강 전투이고 두 번째로 공을 세운 것은 살수 전투이며 끝맺음을 한 것은 오열홀 전투였다. 그런데도 셋을 전부 합쳐 살수 전투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용적으로 쓰인 표현이므로 이것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제3장 오열호 회원진 양대 전투와 수나라의 멸망

 

1. 수양제의 재침과 오열홀 성주의 방어

 

대업 8년(서기 612년_옮긴이)에 패배하고 돌아간 수양제는 장군 우문술 등에게 패전 책임을 물어 파면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 음력으로 이듬해 정월, 그는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전국의 병력과 군마를 탁군에 다시 집결시켰다. 이와 함께 그는 요동고성(지금의 영평부로 고구려 태조가 요동성을 차지하자 한나라는 이곳으로 요동성을 옮겼다)을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는 "여러 장수들이 지난번에 패전한 것은 군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전쟁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조서를 내리고 장수들에게 직책을 돌려준 뒤 고구려 침공을 준비했다. 그는 요동을 평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을 기습한 것이 전년도의 실책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조서로는 각 장수들의 출정 경로를 전년도와 비슷하게 정했으나, 실제로는 오열홀을 먼저 함락한 뒤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을 하나하나 평정하면서 평양까지 도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수나라는 전쟁에서 대패한 탓에 국고도 비고 군인도 없고 국부도 고갈되고 민심도 불안한 상태였다. 이를 이용해서 반란을 꾸미는 이들이 지은 〈무향요동랑사가〉('요동으로 가지 말라 헛되이 죽으리라'란 의미_옮긴이)란 노래가 나돌았다. 수양제는 이에 개의치 않고 백성의 재산을 강탈해서 군량으로 만들고 장정들을 강제 징집해서 병사로 만들었다.

 

이들을 훈련시킨 지 몇 개월 만에 수양제는 군대를 요동으로 보냈다. 그는 장군 우문술 · 이경 등에게 고구려 구원군이 이동하는 길을 차단하도록 했다. 어영군 장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직접 통솔한 수양제는 오열홀 포위에 착수했다. 당시 오열홀 성주의 이름은 역사책에 나타나지 않지만, 지략과 용기가 대단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성 안의 장병들도 거의 다 숱한 전쟁을 경험한 용사들이었다. 수양제는 높은 누각을 세우고 긴 사다리를 대는 한편, 땅굴을 파고 토산을 쌓는 등의 공성 기술을 있는 대로 다 동원했다. 하지만 성주도 체계적으로 응전했기 때문에, 대치한 지 수십 일 만에 수나라 병사들이 허다하게 죽었다.

 

이때, 수나라 예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별이 왔다. 수양제는 군사 물자 · 병장기 · 공성기구 등을 다 포기하고,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_옮긴이)에 은밀히 장수들을 모아 신속히 철군을 단행했다. 이 사실이 오열홀 성주에게 발각됐다. 이로 인해 수나라 군대의 후미가 고구려 군대의 습격을 받아 거의 사망했다.

 

2. 수양제의 제3차 침입과 노수의 저격

 

수양제는 양현감의 반란을 토벌했다. 하지만 국력의 피폐와 인민의 원한이 이미 극도에 도달한 뒤였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국내의 병력과 군마를 재소집해서 회원진(요하의 서쪽 연안에 있는 도시_옮긴이)에 당도했다. 이미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장병들 중에는 또다시 가면 죽을 줄 아고 도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반란이 일어난 지방 중에는 징집에 불응하는 곳도 있었다.

 

수양제는 이번에도 싸우기 힘들겠다는 것을 깨닫고 중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중국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면 반란을 진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들었다. 그래서 아무 핑계라도 만들어서 휴전하기 위해, 반역자 곡사정의 송환을 유일한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했다. 곡사정은 양현감 당파로 고구려에 투항한 사람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국론은 둘로 갈렸다. 갑파는 "남방의 신라 ·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중국에 대해 겸손한 언사와 공손한 예법으로 화친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이제까지 중국에 대해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수년간의 전쟁을 초래했으니, 앞으로라도 정책을 바꾸어 수나라와 화친을 하자"고 주장했다. 을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천이 험해서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힘들며 인민들도 강고해서 좀처럼 굴복하지 않지만, 중국 대륙은 이와 달리 평원과 광야가 많아 군대를 움직이기 좋고 인민들도 전쟁을 무서워해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동요한다"면서 "장수태왕의 서수남진정책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을파는 "남방에 대해서는 견제만 하고, 정예병을 뽑아 수나라를 친다면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성공하기 쉬울 것이다. 성공한 뒤에 인민을 다독거리고 인재를 채용한다면 전 중국을 통일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양쪽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고 경쟁했다.

 

 

'갑'은 왕제 고건무의 일파였다. 많은 호족들이 이에 가세했다. '을'은 을지문덕의 일파였다. 일부 무장들이 이에 가세했다. 두 사람 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두 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했다. 영양대왕은 을파의 주장에 공감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호족 공화제 국가였기 때문에 왕일지라도 갑파의 의견을 꺾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수양제가 곡사정의 송환을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하자, 나라 안에서는 갑파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우세를 점령했다. 결국, 가련한 망명객인 곡사정의 송환을 수락한 고구려는 국서를 받든 사신을 수영제의 진영에 보냈다.

 

이에 분노한 어떤 장사는 쇠뇌를 몸속에 품고 수행원을 가장해서 사신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수양제의 가슴을 쏘고 달아났다. 이것으로 화친을 깨뜨리지도 못하고 곡사정의 송환을 막지도 못했지만 수양제의 혼을 빼고 고구려의 기개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화살을 맞고 돌아간 수양제는 병을 앓았다. 그는 분노도 심했다. 이런 상태에서 나라가 한층 더 혼란스러워지자 수양제는 몇 년 못 가서 암살을 당했다. 결국 수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이 전쟁을 설명하는 기회에 안정복 선생은 영양왕이 살수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수양제의 아버지 시해를 벌주지 못하고 을지문덕 같은 장수들을 내세워 수나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하지만 수양제가 아버지를 시해했다는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수나라 궁중비사에 속하는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인들도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해상잡록》에는 이 전쟁 뒤에 을지문덕 일파가 중국 정벌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도 선생은 이것을 《동사강목》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 비사의 설을 정사에 실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사인 《삼국사기》 · 《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에 입각한 기록이다. 이런 책들은 중국과의 전쟁과 관련해서는 오로지 중국 측의 기록만 인용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비사가 정확한 자료에 근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책에서는 이를 채택한다.(1)

 

 

 

<자료출처>

 

 

(1)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379~406쪽(《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의 대 수나라전쟁 제1장 임유관전투 1. 고 · 수전쟁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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