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4) 27대 영류제(영류왕, 618년-642년) 622년 당과 전쟁 포로를 교환함, 624년 02월 당에 역서의 반포를 요청함, 625년 당에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구함, 628년 09월 당에 봉역도를 보냄, 631년 02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함,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함.(1) 본문
1. 고구려(24) 27대 영류제(영류왕, 618년-642년) 622년 당과 전쟁 포로를 교환함, 624년 02월 당에 역서의 반포를 요청함, 625년 당에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구함, 628년 09월 당에 봉역도를 보냄, 631년 02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함,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함.(1)
대야발 2025. 11. 30. 10:38
《삼국사기》 권 제20고구려본기 제8 영류왕(榮留王)
영류왕이 즉위하다 ( 618년 09월 )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이고성(成)이라고도 한다.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서거하자 즉위하였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19년 02월 )
2년(619)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 619년 04월 )
〔2년(619)〕여름 4월에 왕이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의 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졸본에서 돌아오다 ( 619년 05월 )
〔2년(619)〕 5월에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21년 07월 )
4년(621)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당과 전쟁 포로를 교환하다 ( 622년 )
5년(622)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당 고조(高祖)는 수나라 말에 이곳[고구려]에 억류된 전사(戰士)가 많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왕에게 조서 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온 세상에 군림하며, 삼령(三靈)을 공손히 순종하고 만국(萬國)을 회유하였소. 널리 천하에 정을 고루 나누어 어루만지고 돌아보았으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마다 모두가 평안토록 하였소. 왕은 요동[遼左]을 도맡아 다스렸는데 대대로 번복(藩服)에 살면서도,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 것을 생각하였고 멀리서 직공(職貢)에 순종하였소. 그러므로 보낸 사자가 산천을 넘어왔으니 정성을 펼친 것을 짐은 매우 훌륭히 생각하고. 이제 천하[六合]가 편안해졌고 사해(四海)가 태평해져 옥백(玉帛)이 이미 통하였고 도로에는 막힘이 없어졌소. 바야흐로 화목함을 펼쳐 길이 돈독히 하고, 각자 강역을 지킨다면 어찌 크게 아름답지 않겠소. 다만 수 왕조의 말년에 전쟁이 연이었으니, 공격해 싸운 곳마다 각자 그 민을 잃었소. 마침내 골육이 이별하게 하여 가족이 흩어졌으니, 여러 해가 지나도록 한이 깊어진 채 풀리지 못하였소. 지금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였고, 의리에 의심함이 없어졌으니, 이곳[당]에 있는 고구려인들은 이미 찾아 모으도록 하였고, 곧 돌려보낼 것이오. 그곳[고구려]에도 우리[당]의 국인이 있으니 왕은 놓아 보내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는 방책에 힘을 다하면서 함께 인서(仁恕)의 도리를 넓히면 좋겠소.” 이에 모든 화인(華人)을 찾아 모아서 보냈으니, [그] 수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23년 12월 )
6년(623)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당에 역서의 반포를 요청하다 ( 624년 02월 )
7년(624) 봄 2월에 왕이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역서(曆書)의 반포를 요청하게 하였다.
당의 책봉을 받고 『도덕경』 강의를 듣다 ( 624년 02월 )
〔7년(624) 2월에〕〔당 고조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삼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가서 우리를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국인(國人)이 이를 들었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24년 12월 )
〔7년(624)〕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당에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구하다 ( 625년 )
8년(625)에 왕이 사람을 당에 보내 불교·도교의 교법(敎法)을 배우기를 요구하니, 황제[당 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당에 신라·백제와 화평하기를 청하다 ( 626년 )
9년(626)에 신라와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당 고조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이 입조할 수 없으며, 또한 자주 침략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산기시랑(散騎侍郎)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가서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왕은 표(表)를 올려 사죄하고, 두 나라[신라·백제]와 화평하기를 청하였다.
당에 봉역도를 보내다 ( 628년 09월 )
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격파하다 ( 629년 08월 )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와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낭비성(娘臂城)을 격파하였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29년 09월 )
〔12년(629)〕 9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당이 경관을 허물다 ( 631년 )
14년(631)에 당이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의 해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당시에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하다 ( 631년 02월 )
〔14년(631)〕 봄 2월에 왕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 리(里) 남짓이었다. 모두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 638년 10월 )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하였다.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이를 막아,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의 군사가 패배하였다.
당에 태자 환권을 보내 조공하다 ( 640년 02월 )
23년(640) 봄 2월에 세자 환권(桓權)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니, 태종이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요청하다 ( 640년 02월 )
〔23년(640) 2월에〕왕이 자제를 당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
태양이 3일 동안 빛을 잃다 ( 640년 09월 )
〔23년(640)〕 가을 9월에 태양에 빛이 없어 보였다가 3일이 지나서 다시 밝아졌다
당의 진대덕이 사행을 와서 염탐하다 ( 641년 )
24년(641)에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으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노고에 회답하였다. 〔진〕대덕은 〔고구려의〕 경내에 들어와서 이르는 곳의 성읍마다 관리에게 무늬가 있는 비단을 후히 주고 말하기를, “내가 평소 산수[의 경치]를 좋아했습니다.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내가 그곳을 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방 관리가 좋아하며 그를 인도해 유람하도록 하여 〔진대덕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진대덕은〕 그[고구려 각지]의 세밀한 사정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또한〕 수 왕조 말년에 종군하였다가 〔고구려에〕 억류된 화인(華人)을 보면, 친척의 생사를 말해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런 까닭에 〔진대덕이〕 이르는 곳마다 남녀가 도로의 양측에서 그를 보았다. 왕은 군대의 호위를 성대히 펼치고 〔당의〕 사신을 안으로 들여 만났다. 〔진〕대덕은 사신의 명을 받아와 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이 당 태종에게 사행을 보고하다 ( 641년 )
〔24년(641)에〕〔진〕대덕이 돌아가서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그 나라[고구려]는 고창(高昌)이 망한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일 따름이오. 내가 병졸 수만을 징발하여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이를 구하려 할 것이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보내 동래(東萊)에서 출발하여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도록 하여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면, 그[고구려]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소. 다만 산동(山東)의 주현(州縣)이 피폐해져서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 할 뿐이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42년 01월 )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 642년 01월 )
〔25년(642) 1월에〕 왕이 서부(西部) 대인(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하여 장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다 ( 642년 10월 )
〔25년(642)〕겨울 10월에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당 태종이 왕의 서거를 애도하다 ( 642년 11월 )
〔25년(642)〕11월에 [당] 태종이 왕의 서거를 듣고 [황궁의] 어원(御苑) 안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려 물건 300단(段)을 보내고,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조문·제사하도록 하였다.(1)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고구려 좌장 고성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자상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 하였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는데 부여현에서 남해부까지 그 거리가 천여리였다.
이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셨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고, 휘하 군사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열병식을 보자고 하니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 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시고 말았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이고,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연개소문은 홍무 14년(603) 5월 10일에 태어났고 아홉 살에 조의 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 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주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해의 용신이 다시 화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고성제(영류제)를 내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종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되었다. 또한 세 마을에 전을 두고 조의선인들에게 계울을 지키게 하였다.(2)
<자료출처>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87~591쪽
<참고자료>
고구려 사신 그려진 우즈베키스탄 궁전벽화 과학적 분석 마무리 | 연합뉴스 (yna.co.kr)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