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5) 27대 영류제(영류왕, 618년-642년) 622년 당과 전쟁 포로를 교환함, 624년 02월 당에 역서의 반포를 요청함, 625년 당에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구함, 628년 09월 당에 봉역도를 보냄, 631년 02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함,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함.(2) 본문
1. 고구려(25) 27대 영류제(영류왕, 618년-642년) 622년 당과 전쟁 포로를 교환함, 624년 02월 당에 역서의 반포를 요청함, 625년 당에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구함, 628년 09월 당에 봉역도를 보냄, 631년 02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함,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함.(2)
대야발 2025. 12. 1. 22:13
■ 연개소문의 출생과 소년 시절의 서쪽 여행
『연개소문은 고구려 900년의 전통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장수태왕 이래로 철석같던 서수남진 정책을 남수서진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는 국왕 이하의 대신 및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고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었으며, 서국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고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시도했다. 그의 행동이 정의로웠는지, 그의 판단이 옳았는지에 관계없이, 그는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방아시아 전쟁에서 유일무이한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에 관한 기록은 고작 〈김유신열전〉에서 "개금이 김춘추에게 숙소를 마련해주었다"라고 언급한 것뿐이다. 그 외의 기록은 순전히 《신당서》 · 《구당서》 · 《자치통감》 같은 중국 역사책에서 베낀 것들이다. 중국 역사책이라는 것은 연개소문의 숙적인 당태종과 그 신하들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을 소재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성이 매우 낮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에서 대대로 자리를 잡은 귀족의 일원이었다. 서부의 명칭이 연나라서 연이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그의 성을 천씨로 표기한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당고조의 이름인 연을 피하고자 '연' 대신 '천'을 썼기 때문이다.
당나라 사람 장열이 규염객이란 인물에 관해 서술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서 중국 태원에 왔다. 여기서 이정과 사귀고 이정의 아내인 홍불기와 남매의 의를 맺었다. 중국의 제왕을 꿈꾸던 규염객은 당공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당태종)을 보고 그의 뛰어난 기개에 눌렸다. 그래서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이 되겠다는 생각을 끊고, 귀국하면 난을 일으켜 부여국의 주인이 되겠다'고 말했다."(《규염객전》의 대강만 간추렸다.)
선배들은 부여국은 고구려를 가리키고 규염객은 연개소문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기개에 눌려 중국의 제왕이 되려는 생각을 버렸다는 것은 '제왕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므로, 알량한 머리를 가진 자가 함부로 넘볼 자리가 아니다'라는 중국 소설가의 권선징악적 필법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연개소문이 중국을 침략하기 전해 그곳 정세를 탐지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한 차례 여행을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중국에 전해지는 《갓쉰동전》도 이와 같은 종류의 설화다.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
이 이야기의 뒤에는, 귀국한 갓쉰동이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일, 영희와 결혼한 일, 달딸을 토벌한 일 등등이 나오지만 이것들은 모두 생략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중국을 정탐한 연개소문 전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믿는다.
갓쉰동은 개소문과 같은 표현이다. 개蓋 는 '갓'으로 발음하고 소문운 '쉰'으로 발음한다. 연국혜는 연남생의 묘지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다. 연국혜란 것은 실명이거나 자字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설 작가가 만들어낸 이름일 것이다. 달딸국 왕은 당고조이고 제2공자는 당고조의 셋째 아들인 당태종이다.
당고조와 당태종을 달딸왕과 달딸공자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염집 부녀자들이 읽는 우리말 서적은 언문책이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 그런데 수백 년간 사대주의 세력에 눌린 탓에, 언문책에서조차 중국 댉의 정통 제왕을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기피 사항이얶다. 그래서 당나라를 달딸로, 당고조를 달딸왕으로, 당태종을 달딸왕 제2공자로 고친 것이다.
연개소문이 병력을 동원해서 임금과 대신 · 귀족 수백 명을 죽인 사실이 《갓쉰동전》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옛 소설의 권선징악주의 때문에 빠졌다. 또 연개소문 시대의 조선에서는 과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갓쉰동전》은 이처럼 엣 소설을 새 관념에 맞게 가감한 소설이다. 그래서 이 내용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규염객전》과 《갓쉰동전》에는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를 추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가 수양제의 수백만 대군을 대파하자 전 중국이 크게 진동했다. 당고조 당태종 부자는 수양제 치하의 태원에서 작은 공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정은 태원의 하급 관리였다. 태원은 예로부터 고구려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고구려를 상당히 경계했을 것이다. 특히 당태종은 안으로는 중국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고구려를 침략할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항상 고구려나 고구려인들의 동태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런 당태종이 가복들 틈에서 고구려인 연개소문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경악했겠는가. 《당서》(《구당서》와 《신당서》를 합한 표현_옮긴이)에서도 연개소문의 외모가 괴이하고 호방하다고 했다. 연개소문을 발견했을 때, 당태종은 미래의 강적이 수중에 잡힌 것을 행운으로 여겨 기뻐했을 것이다. 놀람과 기쁨에 빠진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이런 이치로 추론해보면, 《갓쉰동전》은 믿을 만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당태종의 말을 인용해서 "개소문은 방자하다"느니 "개소문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느니 "개소문은 어수선하고 야심이 많다"느니 하고 말했다. 이런 말은 모두 연개소문을 혐오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연개소문을 꺼리고 어려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태종이위공문대》에서는 막리지 연개소문이 스스로 병법을 안다는 말을 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것은 연개소문을 욕하기보다는 존경하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기운에 눌려 동쪽으로 떠났다니,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다른 기록과 대조할 때 《규염객전》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규염객전》을 버리고 《갓쉰동전》을 선택하기로 한다.』(1)
■ 연개소문 귀국 후의 국내외 정세
『연개소문이 중국에서 귀국한 것은 대체로 서기 616년경이다. 《갓쉰동전》에 따르면, 연태조 부부는 등에 새긴 이름을 보고 아들을 찾았고, 만 리 밖으로 떠난 정혼자를 기다리던 류씨 집안의 영희도 신랑과 재회했다. 이 기담은 고구려 안에서 순식간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런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연개소문이 귀국한 뒤, 수양제는 신하인 우문화급(살수에서 패하고 돌아간 우문술 장군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시기에 수나라에서는 군웅들이 일어나 우열을 다투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마치 끓는 국처럼 부글부글했다. 얼마 후 당공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 즉 당태종도 아버지 이연을 협박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처음에는 수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했지만, 마침내 군웅을 모두 토벌한 뒤에는 아버지 이연을 당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이 권력 다툼을 벌이자, 이에 분노한 이세민은 병력을 이끌고 이건성과 이원길을 기습해서 살해했다. 그 뒤 아버지 이연을 압박해서 제위를 빼앗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당태종은 연호를 정관으로 정하고, 15년간이나 정치투쟁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명한 신하들과 명석한 재상들을 모아 각종 문화사업을 벌였다. 또 국가사회주의에 입각해서 토지를 모두 공전으로 만들고 백성들에게 비교적 평등하게 분배힜다. 또 16위를 설치했다. 이뿐 아니라 고구려의 징병제를 참고하여 상비병 이외에 후비병을 두어 인민이 농한기에 기마와 활쏘기를 익힐 수 있도록 했다. 또 이정 · 후군집 등의 장수들을 보내 돌궐(지금의 내몽골), 서돌궐(지금의 서몽골), 철륵(지금의 외몽골), 고창 토욕혼(지금의 신장위구르)을 정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그는 내치와 전쟁에서 모두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중국사에서 가장 요란하게 말하는 정관지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귀국한 이듬해, 수가 망한 뒤로부터 정관 15년때까지 도합 26년 동안 고구려의 내정은 어떠했을까? 왕제 고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양대 공신이지만, 을지문덕은 서진남수주의를 취하고 고건무는 서수남진주의를 취한지라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이런 상태에서 618년에 영양왕이 죽고 고건무가 즉위했다. 이로 인해 그의 주의는 한층 더 견고해졌다. 을지문덕 일파의 신하들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흥하는 과도기를 틈타 서북으로 강토를 넓히자고 주장했지만 왕은 이를 억누르고 듣지 않았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수나라 말에 포로로 잡은 중국인들을 모두 송환했다.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다시 강화한 그는 병력을 동원해서 신라와 백제를 자주 쳤다. 연개소문은 이를 반대하며 "고구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나라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닙니다. 지난날 신라와 백제가 동맹해서 우리나라 영토를 침탈한 일은 있자만, 지금은 정세가 변해서 신라와 백제의 원한이 깊어져 두 나라가 화친할 가망은 없습니다. 그러니 국가적으로 남방을 지키기 위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견제하든지 아니면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견제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두 나라가 서로 싸울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남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당나라와 결전을 벌여야 합니다. 서국이 잠시도 우리나라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은 지난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명확합니다. 지난날 나라에서 수백만의 수나라 군대를 격파할 때에 곧바로 대군을 동원하여 그들의 뿌리를 토벌했다면, 그들을 평정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었다는 것은 지사들로서는 통한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도 좀 늦기는 했지만, 저 이가의 형제들이 서로 반목하여 이건성은 이세민을 죽이려 하고 이세민은 이건성을 죽이려 하며 이연은 혼미하여 둘 사이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우리나라가 대군을 동원해서 저들을 친다면, 이건성이 반란을 일으켜 우리나라에 붙거나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우리나라에 붙든가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들이 수나라 말에 대패하고 수년간의 재앙을 입은 데에다가 국부가 아직 소생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국력도 아직 회복되지 못했으므로, 우리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을 것이니 지금은 매우 특별한 호기입니다. 만약 저들 형제 두 사람 중에서 하나가 죽고 나머지 하나가 권력을 독점하고 세력을 통일한 뒤에 정치적 폐단을 고치고 군사 제도를 바로잡은 다음에 우리나라를 침범한다면, 영토의 크기나 인민의 숫자로 볼 때 우리가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니 우리가 무엇으로 저들에게 대항하겠습니까. 나라가 흥하고 망할 운명이 여기에 있는데도 신하들과 장군 · 재상들 중에 이를 아는 자가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이렇게 극력으로 당나라 정벌을 주장했지만, 영류왕과 대신들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서기 626년이 됐다. 당나라 무덕 9년인 이 해에 아버지의 황위를 빼앗은 당태종은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가 서로 싸우지 말 것을 권고했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을지문덕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쌓은 경관이 양국의 평화에 장애물이 된다며 철거를 요구했다. 크게 놀란 영류왕은 조만간 당나라의 침략이 반드시 가시화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도 영류왕은 서수남진정책을 고수하고 남방에 대한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국내의 남녀 백성들을 징발하여 북부여성에서 지금의 요동반도 남단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 이 공사는 거의 16년 만에야 끝났다. 기술자를 포함한 백성들이 노동력을 제공한 것이 전쟁에 동원된 것보다 규모 면에서 훨씬 더 컸다. 이로 인해 남자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여자들은 양잠을 하지 못하니, 국력이 매우 피폐해졌다. 《삼국유사》에서는 장성 건축이 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연개소문이 노자의 형상과 도사들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처럼 근거 없는 허위 주장이다.』(2)
■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 살육
『서기 646년경, 서부의 살이인 연태조가 죽자 연개소문이 살이 지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항상 격렬하게 '당나라를 치자'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영류왕과 모든 대신 · 호족들은 연개소문이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그의 승계를 허가하지 않았다. 연개소문의 정치 생명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연기소문은 자존감이 강해서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굽힐 데에 굽힐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직위 승계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하자 그는 4부의 살이와 호족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개소문이 비록 불초하지만 여러 대인께서 더는 죄를 묻지 않고 고작 직위 승계권만 박탈하시니, 이 정도만으로도 은혜가 넘칩니다. 오늘부터 개소문은 힘써 회개하고 여러 대인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대인들께서는 개소문이 직위를 세습케 하셨다가 불초한 일이 생기면 직위를 박탈하소서"라고 호소했다. 대인들은 그를 안쓰럽게 여겨 서부 살이 직위를 관장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며, 북방에 가서 북부여 장성의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
연개소문은 수하 장사들을 거느리고 "대왕의 긴급명령이 있다"는 핑계로 성문을 통과해서 궁궐 문 앞까지 당도했다. 못 들어가게 막아서는 경계병을 칼로 벤 그는 궁중으로 뛰어 들어가 영류왕을 찔러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 시신을 칼로 쳐 두 도막을 내고 수채 구멍에 던져 버렸다. 대왕의 근위병들은 연개소문의 당당한 모습과 신속한 행동에 놀라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20년 전에 패강 입구에서 수나라 장수 래호아의 수십 만 대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지략과 용기가 천하에 최고라고 소문난 영류왕이 뜻밖에도 연개소문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인 고보장을 대왕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신크말치라 칭하여 대권을 장악했다. 고보장은 비록 왕이라하지만 아무런 실권이 업었다. 연개소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실권을 가진 대왕이었다.
신크말치는 태대대로란 뜻이다. 고구려는 처음엔 세 명의 재상을 두고 이들을 각각 신가 · 말치 · 불치(크말치)로 불렀다. 이것들을 이두로 표기하면 상가 · 대로 · 패자다. 신가는 처음엔 행정권과 병권을 총괄했지만 권력이 과중해지자 나중엔 이름까지 폐지되고, 말치 · 크말치만 남게 되었다. 말치와 크말치는 병권 없이 왕을 보좌하고 백관을 총괄하는 수석대신일 뿐이었는데, 이제 연개소문은 크말치 앞에 '신'을 더해 신크말치라고 하고, 신크말치가 행정권과 병권을 총괄하도록 했다. 또 살이의 세습을 폐지하고 연개소문의 측근들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4부 살이의 평의회도 폐지하고 관리의 인사와 국고의 출납 및 선전 · 강화 등의 국사도 모두 신크말치의 전권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왕은 국새만 찍을 뿐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900년 역사에서 장군 · 재상 · 대신뿐 아니라 제왕들도 갖지 못한 권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3)
KBS 역사스페셜 – 연개소문은 왜 투르크에 사신을 보냈나
https://youtu.be/mBTQEf9aIL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자료출처>
(1)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09~418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여행과 혁명 1. 연개소문의 출생과 소년 시절의 서쪽여행)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18~422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여행과 혁명 2. 연개소문 귀국 후의 국내외 정세)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22~427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여행과 혁명 3.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 살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