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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27) 28대 보장제(보장왕, 642년-668년) 연호; 개화, 645년-668년 고당전쟁(2)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1. 고구려(27) 28대 보장제(보장왕, 642년-668년) 연호; 개화, 645년-668년 고당전쟁(2)

대야발 2025. 12. 9. 16:44

 

 

 

 

 

《삼국사기》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寶藏王) 

 

당 태종,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다 ( 647년 02월 )

6년(647) 태종이 다시 군사를 보내려고 하니 조정이 의논하기를,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빨리 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앞서 천자의 수레가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은 경작할 수 없었으며, 함락시킨 성도 실은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소규모 부대를 자주 보내어 번갈아서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이 명을 받아 바삐 움직여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 년 사이에 천리가 매우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이반할 것이니, 압록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에 따랐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만여 인을 동원하여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진입하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000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진입하게 하였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세적 당군이 남소성 등을 공격하다 ( 647년 05월 )

〔6년(647)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여러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가〕모두 성을 등지고 대적하여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성 바깥 주위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우진달 당군이 석성과 적리성을 공격하다 ( 647년 07월 )

〔6년(647)〕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모두 백여 차례 싸워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아래에 이르렀다. 우리 병력 만여 인이 성을〕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공격하여 물리쳤다. 아군의 죽은 자가 3,000명이었다.

 

 

고구려 원정을 위한 군선을 건조하다 ( 647년 08월 )

〔6년(647)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고구려 막리지 고임무가 당에 사절로 가다 ( 647년 12월 )

〔6년(647)〕 겨울 12월에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다 ( 648년 01월 )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 인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당의 장수 고신감이 역산을 공격하다 ( 648년 04월 )

〔7년(648)〕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병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우리 보병과 기병 5,000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고구려군]를 격파하였다. 그날 밤에 아군 만여 인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이 병사를 숨겨놓았다가 출동시켜 패하였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논의하다 ( 648년 06월 )

〔7년(648)〕 황제가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하였다고 하여 명년에 300,000명의 무리를 동원하여 한 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대군이 동으로 정벌하려면 모름지기 한 해를 견딜 식량을 준비하여야 하고, 가축과 수레로는 실어 나를 수 없으니 배를 갖추어 물길로 운반해야 합니다. 수나라 말에 검남(劍南)은 도적의 피해가 없었고, 때마침 요동 원정에도 검남은 참여하지 않아 그 백성들이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따랐다.

 

 

기이한 일이 일어나다 ( 648년 07월 )

〔7년(648)〕 가을 7월에 왕도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당 태종이 군선을 제작하여 내주에 결집시키다 ( 648년 07월 )

〔7년(648) 7월에〕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 길이가 100척(尺)이나 되고 너비는 그 반이었다. 별도로 사신을 보내 물길(水道)로 가서 무협(巫峽)에서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萊州)로 나가게 하였다.

 

 

기이한 일이 일어나다 ( 648년 09월 )

〔7년(648)〕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가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가는 것이 사흘이나 끊이지 않았다.

 

 

설만철이 박작성을 공격하고, 당군이 군량을 준비하다 ( 648년 09월 )

〔7년(648) 9월에〕 태종이 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 쳐들어왔다.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도달하여 멈추어 진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설〕만철(萬徹)이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이기니, 우리 병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병력을 보내 성을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험준한 산에 의지하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지만 빼앗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병사 3만여 인을 거느리고 나와 지원하였는데, 둘로 나누어 진을 쳤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아군이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는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양곡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당 태종이 죽다 ( 649년 04월 )

8년(649) 여름 4월에 당태종이 죽었다. 요동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하였다.

 

 

김부식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비판하다

논하여 말한다.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일을 일으키려 할 때 말리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성에서 군대를 돌린 후에는 스스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전쟁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정벌하려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표(表)를 올려서 간(諫)하여 말하기를,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위엄있는 명성과 공덕이 이미 충분하다고 할 수 있고, 토지를 개척하고 강역을 넓혔으니 또한 그만둘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고 음악을 중지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죄가 없는 사졸들을 몰아서 창칼 아래에 내버려두어 간과 뇌장을 길에 쏟아내며 비참하게 죽게 하는 것은 불쌍하지 아니하십니까? 지난번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도 옳으며, 백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소란하게 했다면 멸망시켜도 옳으며, 나중에 중국의 근심이 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죄목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니,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하여 복수한다고 하지만 어찌 얻는 것이 적고 잃는 것은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제 스스로 지난 허물을 뉘우쳐 깨닫고 새 길로 들어서도록 허락하시고, 파도를 헤치고 갈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華)와 이(夷)가 기뻐하며 의지할 것이며 먼 지방에서는 공경하고 가까운 지방은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梁公)이 죽으려 할 때 한 말이 이처럼 간곡하였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쓸쓸하게 만들어 자신이 즐거워하려다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기를,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세우는 것을 즐거워하여 멀리 전쟁을 하도록 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말하기를, “주필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니 사방 40리(里)여서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군이 고구려에 패하여 거의 떨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시중드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라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마침내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당서』『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보덕이 남쪽으로 옮겨가다 ( 650년 06월 )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으로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재이로 백성이 굶주리다 ( 650년 07월 )

〔9년(650)〕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쳐 백성이 굶주렸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52년 01월 )

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조공하였다.

 

 

마령 신인이 고구려 멸망을 말하다 ( 654년 04월 )

13년(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마령(馬嶺) 위에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그가〕말하기를, ‘너희 임금과 신하가 사치스러움에 정도가 없으니 곧 패망하리라.’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고구려군이 거란군과 신성에서 싸우다 ( 654년 10월 )

〔13년(654)〕겨울 10월에 왕이 장군 안고(安固)를 보내 [고구려〕군사와 말갈 병사를 출동시켜 거란을 공격하였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막아 신성에서 아군을 크게 패퇴시켰다.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 ( 655년 01월 )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당 고종이 정명진 등에게 고구려 공격을 명하다 ( 655년 02월 )

〔14년(655)〕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정명진 당군이 침공하다 ( 655년 05월 )

〔14년(655)〕여름 5월에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왔는데 우리측 사람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맞아 싸웠다. 〔정〕명진 등이 분발하여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고, 그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왕도에 재이가 일어나다 ( 656년 05월 )

15년(656) 여름 5월에 왕도(王都)에 쇠처럼 강한 비가 내렸다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 656년 12월 )

〔15년(656)〕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였다.

 

 

정명진 등 당군이 침공하다 ( 658년 06월 )

17년(658) 여름 6월에 당의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기이가 일어나다 ( 659년 09월 )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설인귀 등 당군이 침공하다 ( 659년 11월 )

〔18년(659)〕 겨울 11월에 당의 우령군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군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재이가 일어나다 ( 660년 07월 )

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사흘이나 핏빛이었다.

 

 

당이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다 ( 660년 11월 )

〔19년(660)〕 겨울 11월에 당이 좌효위(左驍衛)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左武衛)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병력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당이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다 ( 661년 01월 )

20년(661) 봄 정월에 당이 하남·하북·회남의 67주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의 진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위구르(回紇) 등 여러 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당 고종이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고 친정을 중지하다 ( 661년 04월 )

〔20년(661)〕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蕭嗣業) 및 여러 오랑캐 병력과 함께 모두 35군이 바다와 육지로 길을 나누어 나란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몸소 대군을 거느리려고 하자, 울주(蔚州)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여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어뜨릴 일이 있겠습니까? 〔혹〕 만약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반드시 병력을 내어 지켜야 합니다.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니, 이는 천하〔의 백성〕을 나라를 지키러 옮겨 다니는 일로 피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諫)하니 황제가 그제야 중지하였다.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 661년 05월 )

〔20년(661)〕 여름 5월에 왕이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10일이나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에서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이 치고 비가 오고 벼락이 치니 뇌음신 등이 의심하고 놀라서 물러났다.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 661년 08월 )

〔20년(661)〕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아군을 패강에서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남생이 당군에게 패하다 ( 661년 09월 )

〔20년(661)〕 9월에 개소문이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 병력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글필하력이 도착하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아군이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명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가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몸을 피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있어서 바로 돌아갔다.

 

 

당군이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다 ( 662년 01월 )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개소문과 싸워 전군이 죽고 〔그는〕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앞뒤의 행군이 모두 큰 공이 없이 물러났다.

 

 

태자 복남이 태산 제사에 참석하다 ( 666년 )

25년(666) 왕이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 한다.을 보내 당에 가서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고, 아들들이 다투다 ( 666년 )

〔25년(666)〕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맡고 여러 성에 나아가 순행하면서, 그의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동생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동생이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알리기를, “두 동생은 형이 돌아와 그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남생이 몰래 친한 사람을 보내 평양에 가서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붙잡았다. 이에 왕명으로 남생을 불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병력을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에게 당에 나아가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남생이 당에 항복하다 ( 666년 06월 )

〔25년(666)〕 6월에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그를 맞아들이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으로 달아났다.

 

 

남건이 막리지가 되다 ( 666년 08월 )

〔25년(666)〕가을 8월에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내외의 병마 업무를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당 고종이 남생을 책봉하다 ( 666년 09월 )

〔25년(666)〕 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당 고종이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다. ( 666년 12월 )

〔25년(666)〕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 소상백(少常伯)인 안륙(安陸)의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고,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아울러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병전량사(水陸諸軍摠管幷轉糧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처분을 받게 하였다. 하북(河北) 여러 주(州)의 조세와 공부(貢賦)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

 

 

이적 당군이 신성을 빼앗고 천남생 군과 합하다 ( 667년 09월 )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李勣)이 신성(新城)을 빼앗아 글필하력에게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하를 건너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방의 요새이므로 먼저 그곳을 빼앗지 못하면 나머지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성을 공격하니 그 성의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이〕적이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龐同善)과 고간(高侃)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천남건(泉男建)이 병력을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쳐부수었다. 〔고〕간이 진격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아군과 싸워 패하였다. 아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북으로 쫓았는데 설인귀가 병력을 이끌고 옆에서 공격하여 아군 5만 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세 성을 빼앗고 천남생 군대와 합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이 수군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해서 평양에 다다랐다.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식량과 무기를 싣고 가서 공급하게 하였으나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대가 굶주림으로 고생하였다. 〔곽대봉이〕글을 지어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 그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군사 일(軍事)이 매우 급한데 어찌 시로써 하는가? 반드시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해석하니 〔이〕적이 이에 다시 식량과 무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말하기를, “압록의 요해를 지킬 줄 모른다.”라고 하니, 천남건이 답하여 말하기를, “삼가 명을 듣겠다.”라고 하고 즉시 병력을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의 병력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이를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아래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아군 30,000명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접의자[床]에 앉아 마른 밥을 먹으려다가 정예를 골라 아군을 쳐서 패배시켰다.

 

 

유인궤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다 ( 668년 01월 )

27년(668) 봄 정월에 당이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김인문(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이적의 당군이 부여성을 빼앗다 ( 668년 02월 )

〔27년(668)〕 2월에 이적(李勣) 등이 우리의 부여성을 쳐서 빼앗았다. 설인귀(薛仁貴)가 이미 금산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이용하여 3,000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은 병력이 적음을 이유로 만류하였다. 〔설〕인귀가 말하기를, “병력은 많을 필요는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달려있을 뿐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아군과 싸워 이겨서 아군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쳐서 빼앗으니, 부여천(扶餘川)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요동에서 돌아가니 황제가 묻기를, “군대 안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가언충이〕대답하여 말하기를, “필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태종]께서 죄를 물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군대에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생의 형제가 서로 싸워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서 오랑캐의 진정과 거짓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며 병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신이 처음부터 ‘필시 이긴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말하기를, ‘900년이 되기 전에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대에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오랑캐는 거듭되는 흉년으로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두려워하고 놀라니, 이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천남건이 다시 병력 50,000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맞붙어 싸워서 패배하여 죽은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재이가 나타나다 ( 668년 04월 )

〔27년(668)〕 여름 4월에 혜성이 필성(畢星)과 묘성(卯星) 사이에 나타났다. 당의 허경종(許敬宗)이 말하기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나니 고구려가 망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평양성이 함락되다 ( 668년 09월 )

〔27년(668)〕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쳐서 빼앗았다. 〔이〕적이 이윽고 대행성을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만나 진격하여 압록책(鴨淥柵)에 이르렀다. 아군이 막아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쫓아 달려와서 욕이성(辱夷城)을 쳐서 빼앗으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착하니 이적의 군대가 뒤따랐다.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자, 보장왕이 천남산을 보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白旗)를 가지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하였는데, 이적은 이들을 예로써 접대하였다. 천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병력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이 군사에 관한 일을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이 소장(小將)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비밀리에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닷새가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병력을 풀어놓아 성에 오르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성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를 찔렀으나 죽지 못하였다.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당군 이적이 장안으로 개선하다 ( 668년 10월 )

〔27년(668)〕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하니 고종이 〔그에게〕 명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므로, 〔이적이〕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쳤다.

 

 

당 고종이 고구려 정복 의례를 행하다 ( 668년 12월 )

〔27년(668)〕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다. 왕이 정사는 자신이 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용서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천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으로, 천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다. 이적 이하〔의 사람들〕은 차등을 두어 책봉하고 상을 주었다. 천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를 보냈다.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이를 통치하게 하고,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화인(華人)과 함께 다스리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설인귀를 검교(檢校) 안동도호로 삼아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래게 하였다. 이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이었다.(1)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 평양성을 치게 했지만 실패하다

7년 壬戌에 당나라 황제는 명을 내려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가 바로 평양도(平壤道)로 고쳤다. [소정방은]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탈취하여 군영으로 삼고, 이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로 삼아 토번(吐蕃)을 평정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 [소정방이] 죽자 당 황제는 매우 애도해 하며 좌효기대장군유주도독(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다이상은 唐史의 내용이다.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신라의 김유신이 군량을 전해주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만약 총장 무진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아래 글에 보이는 소정방은 오류이다. 만약 정방이라면 연호가 마땅히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662년)에 해당하니 [고구려에] 와서 평양을 포위한 때이다에 [신라]나라 사람들이 청병을 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 달라.” 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까지 이르기는 그 형세가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다하여 요청하는데 군량을 보내지 않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나와 아뢰기를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전해 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하고자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와 병천(兵川) 등 두 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犢] 두 가지 물건을 그려 돌려 보내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청해 묻자, [법사가] 이를 해석하여 “속히 병사를 돌이켜라. 송아지와 난새를 각각 그린 것은 두개로 끊어짐을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강(浿江)을 건너려 할 적에 “오늘 뒤에 쳐져서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절반 정도 건넜을 즈음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다음날 유신이 거꾸로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하였다.(2)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왕개보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자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한 데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꺾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때는 개화 16년(657년) 10월 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3)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4)

 

 

 

■ 연개소문의 행적에 관한 허구

 

신라 때는 연개소문을 백제를 지원한 인물로 인식했고, 그 후에는 유교 윤리적 관점에서 군주를 시해한 역적으로 보거나 사대주의를 거역한 죄인으로 인식했다.그래서 항상 그를 박대하고 그에 관한 전설이나 역사유적을 소멸시켰다. 도교 수입과 천리장성 축조만을 연개소문의 업적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 《당서》에서 만들어낸 허위이며 사실은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통해 이것이 허위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당서》에 따르면, 수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에 측근무장 중에 양명이란 이가 있었다. 자기 군대에 불리해지자 그는 죽음에 임박하게 되었다. 죽기 전에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총애 받는 신하가 되어 저 나라를 멸하겠다'고 맹세했다. 개盖씨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에 개盖를 성씨로 삼은 것은, 양명이 그렇게 기원한 것이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고려고기》(전하지 않는다_옮긴이)에 따르면, 수양제는 대업 8년인 임신년에 30만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침공했다. 대업 10년 갑술년에 ...... 황제는 군대를 되돌리기 전에 측근들에게 '짐은 천하의 주인으로서 소국을 직접 침공했는데도 승리하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이때 우상인 양명이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황제가 죽은 뒤에 (그는)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이 되자,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무양왕(영류왕)이 그의 지혜를 듣고 데려다가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개盖라는 성을 쓰고 금金이란 이름을 썼다. 직위는 소문에 이르렀다. 이것은 시중 직책에 해당한다. 개금이 왕에게 '솥에 발이 세 개 있듯이, 나라에도 세 개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이 나라를 돌아보니, 유교와 불교만 있을 뿐 도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라고 아뢰자, 왕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당나라에 그것을 요청했다. 태종이 서달을 비롯한 도사 여덟 명을 파견하자, 왕은 기뻐서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바꾸고 도사를 우대하는 한편, 이들을 유교 선비의 위에 두었다. ...... 개금은 또 주청을 올려 동북쪽과 서남쪽에 장성을 쌓도록 했다. 이로 인해 남자들은 부역을 나가고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다. 공사는 16년 만에 끝났다. 보장왕 때에 당태종이 직접 6개 군을 거느리고 침공해왔다."

 

양명의 후신이 개씨가 됐다는 것은 요설이고, 연개소문을 두고 '개盖라는 성을 쓰고 금金이란 이름을 썼으며, 직위가 소문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망언이니, 이런 것들은 변론할 필요조차 없다.

 

도교를 수입했다느니 장성 축조를 건의했다느니 하는 것도 조작이다. 수양제는 서기 617년에 죽었다. 영류왕 즉 무양왕이 노자교를 수입한 것은 《당서》에 따르면 당나라 고조 때인 무덕 7년 즉 서기 624년이다. 연개소문은 수양제가 죽은 뒤에 태어났고 영류왕이 노자교를 수입할 당시에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러니 "열다섯 살이 되자 ...... 신하로 삼았고 ......당나라에 그것을 요청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됐다. 16년 만에 끝났다면 보장왕 5년 즉 당태종 침략 이듬해에 끝났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공사는 16년 만에 끝났다. ...... 당태종이 직접 6개 군을 거느리고 침공해왔다"고 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영류왕은 서수남진주의에 따라 당나라와 화친하고 신라 백제를 공격하려 한 사람이고, 연개소문은 남수서진주의에 따라 백제와 손잡고 신라를 견제하고 당나라를 공격하려 한 사람이다. 당나라 황제가 이씨이고 도교 시조인 노자도 이씨라는 이유로, 당나라 왕조는 노자가 황실 혈통의 선조라고 허위 선전을 하면서 도교를 극도로 숭상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하겠다는 생각에 당나라 선조인 노자의 가르침과 그 교도인 도사들을 맞이했다. 종교적으로 신수두를 신봉하고 정치적으로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연개소문이 어찌 자기 나라 종교를 버리고 적국 당나라의 선조인 노자의 가르침을 환영했겠는가. 또 장성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으로 쌓은 것이다. 이것은 북방을 지키고자 하는 영류왕이나 쌓을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북방 공략을 주장하고 이것을 실천하고자 한 연개소문이 원성을 살 만한 방어용 장성의 축조를 위해 국력을 소모할 까닭이 있었을까. 연도도 틀리고 사리에도 맞지 않으므로 두 가지가 다 조작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유 · 불 · 도 3교는 솥의 발과 같아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며 '당나라에서 도교를 수입하자'고 왕에게 주청한 때가 보장왕 2년이므로, 《삼국유사》에서 연개소문이 도교 수입을 요청했다고 한 것은 연도만 틀릴 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것을 《고려고기》에서 인용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삼국사기》 역시 같은 《고려고기》에서 인용했음이 명백하다. 《고려고기》에서는 "개금이 무양왕(즉 영류왕)에게 당나라에서 도교를 수입하자고 주청했다"고 했다. 이 점을 본다면, 《삼국사기》 작자인 김부식이 연도를 바꿔 보장왕 2년의 일로 기록했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김부식은 각종 고기와 중국사를 이용해서 《삼국사기》를 지었다. 그는 연도가 모호한 기록이 나오면 사실 관계 유무를 세밀히 살피지 않고 연월을 마음대로 바꾼 경우가 많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 수입을 요청했다고 운운한 것도 한 가지 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도교 수입과 장성 축조를 건의했다는 두 가지 기록은 더는 물을  것도 없는 허위의 조작이다.

 

그렇다면, 조작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고려고기》라는 말이 된다. 《고려고기》가 사실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고기》는 신라 말의 불교 승려가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중국의 북위 세조와 당나라 무종은 도교 진흥을 위해 모든 불교 사찰을 철거하고 불교 승려들을 살해했다. 그래서 당시 어느 나라 승려이든지간에 다들 도교에 대해 이를 갈고 원한을 품었다.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 한 인물이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온갖 말을 다해 연개소문을 비난했다. 《고려고기》 작자는 책을 지을 때 《당서》를 참조했다. 거기에는 "영류왕이 도교를 수입했다"는 내용과 "장성을 축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을 본 그는 도교를 증오하는 마음에서 《당서》를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하고, 중생을 구재한다면서 법라를 크게 불어댔다.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는 고구려처럼 나라가 망한다. 도교를 수입하여 우리의 정신적 생명을 없애려 하고 장성 공사를 제안하여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없애려 한 자는 바로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적 심리를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도교를 배척한 것이다. 하지만, 연도나 실정이 맞지 않으니, 이것이 조작임은 자명하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는, 명칭과 사실 관계를 거의 다 바꾸어서 기록한 《갓쉰동전》 외에는, 다들 위작들뿐인가. 나는 20여 년 전에 서울 명동에서 노상운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며, 병법 분야에서는 예나 지금을 통틀어 최고다. 그가 지은 《김해병서》는 송도 시대에 왕이 각 지역에 병마절도사를 임명할 때마다 한 벌씩 하사하던 책이었다. 이 병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의 이정을 가르쳤고, 이정은 당나라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이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이정이 연개소문한테서 병법을 배운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배하는 뜻을 담은 구절이 많다.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들은 연개소문 같은 외국인을 스승으로 받들고 병법을 배워 명장이 된 것은 중국의 치욕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그 병법을 없애버렸다.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법》는 후세 사람의 위작이다. 이 책의 서두는 '막리지는 자기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말했다'라며 연개소문에 대한 폄하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선생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역사학에 어두웠던 당시의 나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요양 · 해성 · 금주 · 복주 등지에 연개소문에 관한 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의 개소산에 연개소문 기념비가 있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블나고베시첸스크'로 가는 바닷길에서 종종 그 산이 보인다고 한다. 훗날 혹시라도 그 비문을 찾아 연개소문에 관한 기록을 변증하고, 빠진 부분을 보충할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5)

 

 

■ 연개소문 사망 연도의 10년 오차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개소문 이야기가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등을 베낀 것이라는 점은 이미 설명했다.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등에서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가 당나라 고종 때인 건봉 원년이라고 했다. 당고종 건봉 원년은 보장왕 25년(서기 666년)이므로, 《삼국사기》에서도 보장왕 25년을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로 기록해놓았다.

 

하지만 만약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에 사망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이전에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했고,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이 멸망 전에 소정방에게 포위를 당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랬다면 당태종과 이정 등이 무엇때문에 고구려를 두려워하고, 소동파와 왕안석 등이 무엇때문에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인정했을까?

 

나는 연개소문의 사망 연고가 백제 멸망 이전의 어느 해였을 것이라고 가정을 세워보았다. 이런 가정에 따라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조사했지만, 오랫동안 확증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이른바 천남생 묘지가 최근 하남성 낙양의 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지에 따르면, 남생 형제의 분쟁이 건봉 원년 즉 서기 666년 이전의 일이라는게 명백하다.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몇 년에 죽었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남생이) 24세 때 막리지를 맡고 삼군대장군을 겸했으며, 32세 때 태막리지 지위가 더해져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게 되어 아형 원수(아형은 재상을 기리키는 표현_옮긴이)라고 불렸다"고 했고 "의봉 4년 정월 19일 병에 걸려 안동부 관사에서 죽으니 춘추 46세였다"고 했다. 당고종 때인 의봉 4년은 서기 679년이고 그때 남생은 46세였다. 그렇다면 남생이 24세였을 때는 서기 657년이었다는 말이 된다. 남생이 24세 즉 서기 657년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다는 것은 서기 657년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 지위와 직책이 남생에게 승계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남생이 태막리지가 되던 해인 서기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 지위와 직책이 남생에게 승계됐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나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이나 〈천남생 묘지〉에서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였다고 했다. 또 〈개소문 열전〉에서는 서부대인 겸 대대로인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직위를 세습했다고 했고, 〈천남생 묘지〉에서는 증조부인 지유(연개소문의 조부)와 조부인 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막리지를 맡았다고 했다. 이처럼 갑 책의 '막리지'가 을 책에서는 태대대로나 대대로로 표기됐고, 병 책의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가 정 책에서는 막리지로 표기됐다.

 

대로의 대對은 '마주'라는 뜻이다. 이두에서 대對라는 글자를 뜻에 근거해서 발음하면 '마'가 된다. 막리지의 '막'을 음을 근거로 발음하면 '마'가 된다. 막리지의 '리'와 대로의 '로'를 음을 근거로 발음하면 'ㄹ'이 되니, '막리'나 '대로'는 '말'로 읽어야 한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에서는 '말치'가 장군과 재상을 겸해 초기의 신가처럼 되었다. 말치는 이두로 '대로' 혹은 '막리지'로 표기했다. 대로지라 하지 않고 '대로'라고만 한 것은 약자로 표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말치가 취임한 지 몇 년이 되면 태대 혹은 대大 칭호를 덧붙여 태대대로지 혹은 태막리지라고 불렀다. 태대막리지라 하지 않고 대막리지라고 한 것은 약자로 표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말치' 즉 '대로지'와 태대막리지는 직위는 동일하지만, '신크' 즉 '태대'는 공적과 덕성을 기리는 품계다.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각간 김유신이 전략을 주도한 것을 포상하고자 각간 앞에 '태대' 두 글자를 붙여 태대각간 지위를 부여한 것과 같다. 이것은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서기 657년 즉 24세 때에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는 확증이 되는 것이므로, 이 해에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로와 막리지가 동일한 말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천남생 묘지〉에서 "증조부인 지유와 조부인 태조와 아버지인 개금이 모두 막리지를 맡았다"라거나 "증조부 지유와 조부 태조와 아버지 개금이 모두 태대대로를 맡았다"라고 하지 않고, "증조 지유와 조부 태조는 모두 막리지를 맡았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를 맡았다"고 함으로써 막리지와 대대로를 구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천남생 묘지〉의 윗부분에서는 연남생이 중리위진대형이 된 뒤 태막리지가 되었다고 하고, 아랫부분에서는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한 뒤에도 태대형이란 기존 관직을 받았다고 했다. 태대형은 중리위의 진대형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리킨 것이다.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기 때문에 묘지명에 쓰인 관명을 거의 구분할 수 없다. "모두 막리지를 맡았다. ...... 태대대로를 맡았다"의 다음 문장에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았으며 병권까지 아울러 쥐고 다들 정권을 독재적으로 장악했다"고 했으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병권과 정권을 장악한 최고의 수석대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서》 〈고려열전〉에서는 "대대로는 국정을 총괄한다"고 하고 《당서》 〈개소문 열전〉에서는 "막리지는 당나라의 중서령 병부상서와 같은 직잭이다"라고 했으니, 양자가 장군과 재상을 겸한 최고 고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 657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이 죽고 장자 연남생이 말치가 되어 아버지 연개소문의 지위를 승계했다가 9년 뒤에 신크란 칭호가 덧붙여져 신크말치라고 불렸음이 틀림없다. 기존 역사서를 근거로 서기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며, 〈천남생 묘지명〉 속의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된 해를 근거로 서기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분명히 서기 657년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구당서》 《신당서》 에서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늦추어 서기 666년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며, 〈천남생 묘지〉에서 아버지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말한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당태종이 눈알을 잃고 죽은 것은 연개소문 때문이다. 또 당나라의 영토 일부는 연개소문에게 빼앗겼다. 그렇게 때문에 춘추대의로 말하자면, 당나라 신하들은 한시도 쉬지 말고 복수를 꾀했어야 한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가는데, 연개소문 생전에는 고구려의 침략만 받고 고구려 땅을 한 치도 침략하지 못했다. 이것은 연개소문이 무서워서 군주의 복수를 잊었다는 뜻이 되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런 수치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 생전에도 당나라 군대가 평양을 포위한 것처럼 보여줄 목적으로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10년이나 늦춰서 역사책에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설명하는 바와 같이 부여복신이 사망한 달을 늦춰 잡은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 기록이 많지 않아서, 민간인들은 이웃나라 유명인의 생사에 관한 한 관방의 발표에 따라 정보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관한 허위 기록이 중국에서 실제 사실처럼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6)

 

 

 

■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평가

 

기존 역사가들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또는 ‘흥했나 망했나’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우열을 판단하거나 유교적 윤리관으로 사람의 시시비비를 판단했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본인은 성공했지만 불초한 자식들이 유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춘추필법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배척하고 연개소문을 흉적으로 몰며 모독과 치욕을 가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진보의 의의를 가진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어느 날 어느 때고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느 날 어느 때고 간에 혁명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역사를 다 혁명의 역사라고 해야 하지만,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어휘를 특히 중시하여 문화적·정치적으로 시대를 구획할 만한 진보적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의 정치적 혁명가를 찾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 역사에서 이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한양의 이씨가 송도의 왕씨를 대체한 것과, 이씨 조선의 이시애·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외형상의 성과는 다르지만 두 가지 다 정권찬탈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내란이나 역성()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해온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만대의 행복을 유지하지 못했다. 불초한 자식들에게 대권을 맡기는 바람에 결국 성과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야심은 많았지만 덕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 기록이 없는 탓에 오로지 적국의 붓으로 전해지는 기록만을 갖고 연개소문을 논평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의 전말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점 하나로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노예적인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좁쌀과 팥알처럼 작은 자기 눈알에 보이는 대로 연개소문을 수백 년간 혹평해왔다. 그들은 ‘신하는 충성으로써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불완전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고 ‘대국을 섬기는 소국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인물의 시체를 한 점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통한한다. 이 때문에 몇 구절의 논평을 더했다.(7)

 

 

 

<주>

 

(1)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87~591쪽

 

(4)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7쪽

 

(5)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52~458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3장 안시성 전투  6. 연개소문의 행적에 관한 허구)

 

(6)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59~464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3장 안시성 전투 7. 연개소문 사망 연도의 10년 오차)

 

(7)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464~465쪽(《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나라 전쟁 제3장 안시성 전투 8.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평가)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