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8) 670년 04월 검모잠이 부흥군을 일으키다, 677년 02월 보장왕이 부흥을 꾀하다 본문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寶藏王)
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 669년 02월 )
〔당 고종 총장〕2년 기사년(669) 2월에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 고종이 고구려 유민을 사민시키다 ( 669년 04월 )
〔당 고종 총장 2년(669)〕 여름 4월에 고종이 38,300호를 강남(江南)·회남(淮南) 및 산남(山南)·경서(京西)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검모잠이 부흥군을 일으키다 ( 670년 04월 )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牟岑)이 국가를 부흥하려고 하여 당(唐)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安舜)「신라기(新羅紀)」에는 승(勝)이라 되어있다.을 세워 임금을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안시성 부흥군이 패배하다 ( 671년 07월 )
〔당 고종 함형〕2년 신미년(671) 가을 7월에 고간이 안시성에서 남은 무리를 격파하였다.
부흥군이 백수산에서 패배하고, 신라가 구원하다. ( 672년 12월 )
〔당 고종 함형〕3년 임신년(672)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우리 무리를〕 패배시켰다. 신라가 병력을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는데 고간이 이를 쳐서 이기고 2,000명을 사로잡았다.
고구려 부흥군이 패배하다 ( 673년 05월 )
〔당 고종 함형〕4년 계유년(673) 여름 윤5월에 연산도(燕山道)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濾河)에서 우리 병사[我人]를 쳐부수고 수천 인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보장왕이 부흥을 꾀하다 ( 677년 02월 )
의봉(儀鳳) 2년 정축년(677) 봄 2월에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에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나머지 무리를 모으게 하고, 동쪽 사람으로 여러 주에 먼저 와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왕이 요동에 이르러 반란을 꾀하고 몰래 말갈과 통하였다
보장왕이 공주로 옮겨지다 ( 681년 )
〔당 고종〕개요(開耀) 원년(681)에 〔왕을〕불러 공주(邛州)로 돌아오게 하였다
보장왕이 죽다 ( 682년 )
〔당 고종〕영순(永淳) 초년(682)에 〔왕이〕 서거하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당의〕 수도로 옮겨 힐리(頡利)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에 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에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이따금 신라로 달아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말갈과 돌궐로 흩어져 들어갔다. 고씨의 임금이 마침내 끊어졌다
고보원을 조선군왕에 책봉하다 ( 686년 )
〔당 무후〕 수공(垂拱) 2년(686)에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고보원을 책봉하다 ( 698년 )
〔당 무후〕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진급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다 ( 699년 )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당에 악공을 바치다 ( 818년 )
〔당 현종〕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악공(樂工)을 바쳤다.(1)
■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정
『고구려 최후의 역사는 지금까지 《당서》의 허위 기록을 근거로 전해졌다.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늦추고 연개소문이 요하 이서의 영토를 획득한 사실을 없앴으며, 연개소문의 생전과 사후에 있었던 고구려 대 당나라의 관계를 위조함으로써 고구려 멸망의 진상을 잘 알 수 없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도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연개소문이 서기 657년에 죽었다는 점은 제10편에서 이미 설명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그 뒤를 승계한 것은 아들 연남생이다. 연남생의 묘지문에서는 "(연남생이) 아홉 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의 일원이 되고, 아버지의 추천으로 낭관이 되었으며 중리대형 · 중리위두대형의 요직을 역임한 뒤 스물네살 때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직했다"고 했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연남생이 지위를 승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가 어땠는지에 관해서는 역사책에 명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구당서》 · 《신당서》의 〈고려열전〉이나 〈정명진 열전〉에서는 당고종 영휘 6년에 "정명진 · 소정방 등이 고구려를 쳤다. 5월에 요하를 건너 귀단수에서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고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했고, 《구당서》 〈유인궤 열전〉에서는 당고종 현경 2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보좌하여 귀단수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삼천 수급을 베었다"고 했다.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에게 패해 돌아간 뒤, 화살에 맞은 눈의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 따라서 친아들인 고종과 신하들인 이적 · 소정방 등의 복수심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여러 해 동안 한 차례의 전쟁도 일으키지 못한 것은 그만큼 연개소문의 위세가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귀단수 전쟁을 일으켰다면, 모종의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회란 무엇일까?
현경 2년은 서기 657년이며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다.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죽음을 기회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럼 《당서》 〈고려열전〉과 〈정명진 열전〉 등에서 귀단수 전쟁을 영휘 6년 즉 서기 655년의 사건, 다시 말해 연개소문이 죽기 2년 전의 사건으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장례식을 틈타 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당나라 사관들이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늦추고 보니, 전쟁의 발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맞게 그들은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신라 태종이 즉위한 원년이자 신라 사신이 구원병을 요청한 연도를 이 전쟁이 일어난 해로 위조하여 각 열전에 기록한 것이다. 우연히도 〈유인궤 열전〉을 쓸 때는 이 점을 확인하지 못하고, 전쟁의 발생 연도를 사실 그대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연개소문 사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벌인 제1차 전쟁이다. 승패가 어떠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연개소문이 점령한 산해관 이서의 영토 즉 당나라의 고토를 당나라가 회복하고 요하 이동을 여러 차례 침입하다가 패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당나라 사람들은 당나라만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와 연합하여 좌우로 협공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 북쪽 변경으로 자주 출병했다. 그래서 새로 즉위한 신라 태종은 태자 김법민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태종은 김법민을 통해, 백제 충신 성충이 죽고 의자왕이 교만하고 난폭한 탓에 백제가 겉으로는 강성한 듯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양국 군대가 협공하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당나라 군주와 신하들은 매우 기뻤다. 그래서 13만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멸한 것이다.
백제 멸망에 관한 사실을 앞의 장에서 약술하기는 했지만, 백제가 망할 때 연남생이 구원병을 백제에 보내지 못한 것은 매우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 당나라 군대가 철수하고 백제 의병이 봉기할 때에라도, 고구려 군대가 곰나루 · 솝울 등지로 가서 복신 · 자진 등과 연합해서 혈전을 벌였다면, 백제가 충분히 되살아났을 것이다. 백제가 살아났다면, 신라를 충분히 견제하고 당나라 군대에 대한 군량미 공급을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지원하는 군량미가 없었다면, 고구려에 연개소문 · 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나라 군대가 평양까지 침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령 침입했다 하더라도 수영제의 군사들처럼 궤멸됐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안전을 기약하려면 백제의 멸망부터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역사서에 따르면 신라 ·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는 고작 소수의 병력을 보내 칠중성(지금의 적성)만 함락하고 그냥 돌아갔다. 또 부여복신이 기병하여 백제 전역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고구려는 겨우 수천 명을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했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런 사실 외는 고구려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으니, 연남생은 훗날 매국의 죄를 짓기 이전에 나라를 잘못 운영한 죄도 적지 않게 지은 셈이다. 이처럼 용렬한 연남생에게 정권을 넘기고 죽었으니, 연개소문에게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2)
■ 평양의 당나라 군대와 웅진의 신라 군대의 대패
『서기 662년 당나라는 장군 임아상 · 계필하력 · 소정방 · 설인귀 · 방효태 등에게 35곳의 길을 통해 고구려로 진군하도록 했다. 또 하남 하북 및 회남에 있는 67개 주의 병력을 증각하여 평양을 침입하도록 했다. 또 낭장 유덕민을 합자도 총관으로 임명하고 신라에 보냈다. 그의 임무는 신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고 신라의 군량미를 평양에 보내는 것이었다. 새로 즉위한 신라왕인 중종문무왕(김법민)은 태종(김춘추)의 장례식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김유신 · 김인문 · 김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전국 병력을 총동원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형 수레 20냥을 만들어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평양의 당나라 군영에 보낼 준비를 했다.
이때 백제 의병이 태산에 기지를 두고 부여복신을 지원하고 있었다. 당나라 웅진도독 유인궤는 중종에게 사람을 급히 보내 "만일 태산의 백제군을 그대로 둬서 세력이 공고해지도록 놔둔다면, 군량미 운송로가 끊어져 군영에 머무는 1만 7천 명의 양국 군사들이 다 아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고,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겁니다. 백제가 회복되면 고구려를 도모하기가 힘들어질 겁니다. 그러니 먼저 태산을 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중종은 김유신 등의 장수들과 함께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5일_읆긴이) 태산성 앞에 가서 항복을 권유하면서 재물로 유혹했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간 의병들은 "성은 비록 작지만 장병들은 다들 의롭고 용맹하다. 싸우다가 죽은 백제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사는 신라인이 되지는 않겠다"고 대답하고 항전에 나섰다. 8일 만에 성안의 수천 병력이 모두 전사하고 성은 함락됐다.
신라군은 더 나아가 우술성(지금의 회덕)을 포위했다.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의 군량미 수송로를 끊기 위해 장수를 보내 지킨 곳이었다. 수십 일간 대치한 끝에 성안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내응하는 바람에, 성안 의병 1천 명이 모두 전사하고 성도 함락됐다. 이렇게 해서 신라가 웅진으로 군량미를 수송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평양의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에 대패했다. 패강도총관 임아상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옥저도총관 방효태는 열세 명의 아들과 함께 사수(지금의 보통강)에서 패배했으며, 그가 이끄는 전군도 몰살됐다. 한편, 한시성(지금 평양부근의 서서촌)에 진을 친 소정방 등의 부대는 양식이 끊어졌다. 그래서 신라의 공급을 애타게 기다리며 사람을 계속 신라에 보냈다.
신라 대장군 김유신은 부대를 둘로 갈라, 한쪽은 자신이 직접 인솔하여 평양까지 군량미를 수송하고 또 한쪽은 김흠순이 인솔하여 웅진까지 양식을 운송하도록 했다. 그런데 칠중하(임진강_옮긴이)에 당도한 뒤로는 장수들이 다들 겁을 내며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김유신은 "고구려가 망하지 않으면 백제는 부활하고 신라가 위태해질 텐데, 우리가 어찌 위험을 꺼리랴!"라고 말한 뒤 장수들과 함께 샛길을 따라 이동해서 물을 건넜다.
김유신 부대는 고구려인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산에서 험하고 가파른 데를 골라 이동한 탓에 수십 일 만에 평양에 당도했다. 그런 다음에 소정방에게 군량미를 공급했다. 실컷 배를 불린 소정방 군대는 이미 싸움에 졌기 때문에 또다시 싸울 수 없다면서 해로를 통해 달아났다. 신라군이 남아서 싸우려고 했지만, 수적으로 고구려의 상대가 될 수 없어 달아나기로 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추격해올 가능성이 있었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자, 김유신은 군영에 깃발을 그대로 꽂아두고 소와 말의 꼬리에 북과 북채를 매어 놓았다. 북과 북채가 서로 부딪혀 소리가 나는 사이에 군사들은 조용히 빠져나와 돌아왔는데,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발새했다. 그리고 칠중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추격을 받았으나 요행히 빠져나왔다. 웅진에 군량미를 공급한 신라 병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폭설을 만났을 뿐 아니라 백제군의 포위 공격까지 당해 살아서 돌아간 자가 100명에 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부여복신은 다시 곰나루성에 가서 성의 사방에 목책을 세우고 신라 · 당나라 군대와 외부의 교통을 차단했다. 그러자 백제 전역이 다 호응했다. 백제인들은 신라 · 당나라가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자신들이 직접 관리를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부여복신의 지휘하에 모두가 통합되니, 백제의 다물 사업이 완성됐다고 할 만했다.』(3)
<주>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509~512쪽(《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6장 고구려의 당나라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융성(부여복신의 역사) 1.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정)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513~515쪽(《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6장 고구려의 당나라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융성(부여복신의 역사) 2. 평양의 당나라 군대와 웅진의 신라 군대의 대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