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시간2014-10-29 10:08

"제주 돌하르방-중국 요나라 석인상 매우 유사" | 연합뉴스 (yna.co.kr)

우실하 항공대 교수 "돌하르방 기원 재검토 필요"
제주 돌하르방과 닮은 중국 요나라 시대 석인상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요나라 시대 석인상(왼쪽)과 제주 관덕정 앞 돌하르방. 2014.10.29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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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제주 돌하르방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중국 요(遼)나라(907~1125년) 시대 석인상(石人像)이 만주에서 발견돼 돌하르방의 기원과 관련된 논란이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한국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최근 중국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 젠핑(建坪)현 젠핑박물관의 전시물 가운데 제주 돌하르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사암(砂巖)으로 조각한 이 석인상은 2011년 12월 젠핑현 헤이수이(黑 水)진에서 발굴됐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 몽골(1206~1368년)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됐다는 '북방설'과 동남아 일대에서 유사한 석인상들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한 '남방설', 조선시대 때 자체적으로 세웠다는 '자생설' 등이 팽팽히 맞서왔다.

우 교수는 "그동안 여러 주장에서 근거로 제시된 석인상들이 제주 돌하르방과 비슷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번 요대 석인상처럼 '똑같다'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면서 "제주 돌하르방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이 발견된 이상 최소한 그 외형은 몽골 이전의 요나라 시대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 교수는 또 "기존 학자들은 유라시아 석인상의 기원을 청동기시대로 봤지만,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석인상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 시기를 신석기시대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가장 이른 시기의 석인상들은 모두 1980년대 이후 중국 요서(遼西)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견된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 등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만큼 유라시아 석인상의 기원은 요하(遼河)문명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에서 총 47기가 발견된 돌하르방은 키 136~181㎝의 석인상으로, 제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며 성문 앞에 세워져 있었던 탓에 경계표지 또는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종교적 기능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 교수는 "제주 돌하르방이 몽골을 통해 왔다고 할지라도 그 외형은 최소한 요대부터 시작됐고 요대 석인상의 외형이 몽골시대로 이어져 몽골 지배기에 제주까지 전해졌다고 봐야 한다"면서 "한반도 지역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석장승', '미륵불'이라고 불리는 석인상들도 앞으로 더 상세한 연구를 통해 그 시기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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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시킨 거란(요)은 발해 이은 후예국 (skyedaily.com)

성헌석의 ‘대고구리’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7-29 01:37:32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최근까지 사화산으로 알려져 왔던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예측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북한정권이 그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천년 전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일본 나고야대학교 연대측정종합연구센터 연구팀은 백두산에서 용암과 화산재로 쓰러진 고목을 채취해 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929~945년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폭발이 문헌상 발해가 거란족의 요(遼)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에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내 화산학계의 권위자로 알려진 모 교수는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3년 후에 일어났으나, 그 전조증상이 미리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로 인해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거란에게 멸망당한 것이다”라고 이상한 설명을 하면서, <요사 야율우지전>에 “민심이 이반하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화산학계에서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을 연계시키는 근거 역시 바로 이 기록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선 백두산에 엄청난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 백두산의 폭발영향. <이미지=필자제공>

 

당시 화산폭발지수가 7.4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수가 4이상이면 대규모 폭발에 속하며, 8을 최대로 지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7.4의 강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폭발이다. 수년 전 발생한 아이슬란드의 화산지수가 4정도라고 한다. 천년 전의 백두산 폭발은 그의 1000배에 해당하는 화산재를 분출했을 것이므로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재앙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특히 일본열도에 주었을 것이다.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발해)의 동북 변방

 

백두산이 대폭발한 적이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이렇듯 확실하나, 폭발했다는 역사기록이 어떠한 사서에도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백두산 일대가 대진국(발해)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대진국의 도읍이 그 일대에 있었다면 위에서 모 교수가 말한 전조증상으로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요나라에게 쉽게 망했다는 이상한 주장도 어느 정도는 수긍될 수 있다. 게다가 곧 화산이 폭발할 발해 땅을 얻기 위해 거란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다시피, 대진국의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북부 하남성 일대로, 남으로 황하에서부터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동만주까지 9000리가 해동성국 대진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의 중심이 아니라 수천 리나 떨어진 동북단 변방의 외지이기 때문에 백두산 대폭발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대진국(발해) 멸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류의 흐름 때문에 오히려 일본열도가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을 것이다.

 

대진국(발해) 멸망 원인은 내부 쿠데타

 ▲ 대진국의 강역은 하남성 황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9000리. 백두산 폭발과 대진국(발해) 멸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지=필자제공>


먼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멸망 장면을 보기로 한다.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 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지 3일 만인 1월 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이 발해의 도읍 홀한성을 향해 질주하는 도중에 발해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9일 홀한성을 포위하고, 3일 후인 12일 발해의 마지막 왕에게 항복하라는 의사를 전한다. 이틀 뒤 14일 대인선은 흰 소복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중론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망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위 <요사>의 내용보다도 축약되어 있고, 다른 점은 대진국이 건원칭제했다는 사실 뿐이다.

 

 ▲ 백두산 화산폭발시 예상 피해지역. <이미지=필자제공>


너무도 허망한 멸망으로 솔직히 뭔가가 이상한 기록이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대진국(발해)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대제국이 채 보름도 못돼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거란족이 쳐들어왔는데 겨우 3만 병력으로 저지했다가 패하자 도성이 포위되어 왕이 항복했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9000리 대제국 대진국의 진짜 멸망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리국지(高麗國志)>와 <고리사력(高麗史歷)>라는 역사책이 있는데, 이 책들은 대진국의 역사실록으로 <요사>가 왜곡하고 있는 대진국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서로 현재 소장처는 일본(고려국기 28권)과 러시아(고려사력 16권)이다. 이 책에는 대진국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고리국지>의 거란에 대한 기록

 

契丹を属国にしたし部族民たちを受け入れ、中央管理に登用した。その中に耶律阿保机は5城大将軍に封じてたし、契丹軍を担当する役割を果たした。契丹軍は輪に忠誠することができる10万の兵がいた

 

(해석)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았고 부족민들을 받아들여 중앙관리로 등용하였다. 그 중에 야율아보기를 ‘5성 대장군’에 봉했고 거란군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거란군은 (대진국에) 충성할 수 있는 10만의 군사가 있었다.

 

2. <고리사력>의 거란에 대한 기록

 

Император 916 лет aejong генералов и пять генералов бывшего вассаль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будет goguri из yayul просмотра голосовых связок yowang стержней.

 

(해석) 916년 애종 황제는 고구리(=대진)의 종속국인 거란 출신의 장군 야율아보기를 5성대장군과 요(遼)왕에 봉하였다. (※ 거란의 요왕은 대진국 황제의 제후임이 명백히 밝혀진 기록)

 

3. <고리국지>의 대진국 멸망 기록

 

大将軍 耶律阿保机が 上京城に入城して宮城を襲撃して皇帝を捕虜とした。新しい高句麗は遼国に千人おり震国の管理をそのまま登用した。

 

(해석) 대장군 야율아보기가 상경성에 입성하여 궁성을 습격하였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새로운 고구리(=대진국)는 요(遼)나라로 천명했고 진국의 관리를 그대로 등용하였다.

 

※ 대진국의 임금을 황제라 표현했고, 진국이라는 국호도 나온다.

 

4. <고리사력>의 대진국 멸망 기록

 

Путаница дела вождя 926, № 5 yayul капитализированных привел армию в 100000 был введен в sanggyeongseong Вынужден отречься от престола императора принять naeeotda печати

 

(해석) 926년 5호대장군 야율아보기가 혼란한 국정을 틈타 10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성에 입성하였다.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인새를 받아내었다.

 

5. <고리사력> 거란의 대진국 황족 처우에 대한 기록

 

Ko, которая для лиц в качестве королевских семей бывших аристократов daessi и Принцесса и брака было укрепление системы управления.

 

(해석) 전 황족인 대씨와 공주와 혼인하였고 고씨 황족들을 고관으로 기용하여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 대씨와 고씨를 황족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구리와 대진국은 황제국

 

6. <왜인흥망사(倭人興亡史)> 의 기록

 

926年 耶律阿保机は上京城に入城した後ホール忽汗城に療養がある皇帝に譲位を強要した。

 

(해석) 926년 야율아보기는 상경성에 입성 후 홀한성에서 요양 중인 있는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대진국이 왜 멸망했는지 확실해진다.

 

“황제국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아 야율아보기를 대장군 겸 제후인 요왕에 봉한다. 야율아보기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애제를 체포하고 양위를 강요했다. 애제가 양위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고, 요나라가 새로운 고구리가 되어 대진국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고구리는 대진국을 거쳐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 --> 청나라로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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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5천년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통일국가는 한·송·명 세 나라로 이들의 존속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천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즉, 중국 역사의 대부분이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왜 수·당나라가 포함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비록 수·당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으나 한족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수·당의 왕실이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봄으로서 과연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중국의 역사인지 우리와 동족의 역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통일국가 송나라(960~1279)의 역사
 
통일국가였던 당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5대 10국 시대가 된다. 그 중 5대 최후의 왕조였던 후주(後周)의 근위대장군이었던 조광윤이 왕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세운다.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이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송나라의 북방 요나라와 서쪽 위구르에 탕구트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가 통일국가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은 당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강화도 마니산 개천각에 모셔져 있는 금태조 아골타. 개천각은 환웅, 치우,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 24분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 아골타가 포함돼 있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1004년 북쪽에 있던 요나라가 공격하자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굴욕적인 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개조이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또한 송나라는 서쪽 탕구트족이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공격하자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는다.
 
여진족은 처음에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이라 했다. 송 휘종은 종전에 요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금나라로 보내면서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자, 금나라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1126년 멸망시킨다. 당시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했다. 워낙 전투력이 없었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자 금나라가 분노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다. 그러자 송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떠넘긴다. 휘종은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 군대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약조가 잘 지켜지지 않자 다시금 금나라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126년 11월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만다. 금나라는 송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무릎을 꿇리고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라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 금나라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이미지=필자제공>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고종이다. 1127년 금나라에게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를 남송으로 구분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아비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지위에 올라있던 터라 형인 흠종은 포로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친다.
 
남송은 장군 악비의 선전으로 한때 금나라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으나 힘이 부친 남송은 전쟁 대신 강화를 간절히 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강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금나라의 강압에 남송의 진회는 악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린다. 악비가 죽고 얼마 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조건이 남송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1.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할 것
2.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할 것
3.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칠 것
4.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할 것
 
이로써 남송은 생명을 140여년 더 연장하지만, 결국 금·송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요나라의 1차 침입과 서희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을 무너뜨린 요나라는 2대 황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 들어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연의 맹’의 대가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하여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 때 고려를 3차례나 공격했다. 993년 1차 침입 때 요나라 장수 소손녕에게 고려군의 선봉이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파와 땅을 분할하여 요나라에게 주자는 파로 갈리게 된다. 그러자 서희가 항복이나 땅을 주는 것은 만고의 치욕이라고 하면서 먼저 자신이 나서 일전을 겨룬 후로 그 결정을 미루어달라고 하고는 요나라 진영으로 달려갔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에게 상견의 예를 청하자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는 당장 뜰에 엎드려 절을 올려라”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양국의 대신 간에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高句麗 땅은 우리가 다 소유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땅을 침식하는 것이며, 또 너희 나라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해(海)를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너희 고려가 땅을 분할하여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요를 철군시키고 강동6주까지 반환받는다. <이미지=필자제공>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뒤를 이었기에 국호도 고려이며 도읍지도 평양에 정한 것이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 준다면 어찌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서희의 논리가 정연하고 강경하여 소손녕은 더 이상 강압이 불가함을 알고, 군대를 돌릴 것을 결정하고는 연회를 베풀어 서희를 위로한 후 돌려보냈고, 강동 6주까지 반환받게 된다.
 
이렇듯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는 高句麗의 정통성을 누가 가졌느냐를 놓고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요나라의 역사가 어찌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진국의 오성장군 겸 요왕에 봉해진 야율아보기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을 내부쿠데타로 무너뜨리고는 高句麗와 대진국(발해)의 황족과 대신들을 중용해 국가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요나라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돌아간다. 막강했던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와 군사를 잃고는 국력이 약해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승전파티를 송의 수도 개봉에서 연다.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고려는 하남성 개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고, 아마 송이 고려의 속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 고려가 송나라 수도에서 요나라와의 전쟁 승전파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2005년 08월 01일 (월)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한가지 이유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송나라 대신들 상당수가,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선비(鮮卑) 후예인 거란족의 요(遼)

 

                                                              홍원탁 (서울대 교수)

 

 

당 왕조의 쇠망

 

지중해, 북아프리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300-400년 사이와 800년을 전후해서 두 차례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개시설에 의존해 농사를 지어오던 지역들 중 많은 곳이 장기간의 가뭄 결과로 유기되었다. 1 당나라의 쇠락과 멸망은 8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현종 (713-55) 치하의 당나라는 웅장한 위엄과 번영을 과시했지만, 당시 위구르의 카간들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과 공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2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피를 반반씩 받은 안록산은 북서쪽 변방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 칭하였다.

 

아버지 현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숙종(肅宗, r.756-62)은,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위구르 돌궐족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땅과 백성은 명목상 나의 소유이지만, 옥과 은, 어린 사내와 여자 아이들은 위구르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당나라의 중앙권력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당나라는 위구르의 군사적 지원 덕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Barfield(1989: 151)는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보다 야만적인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고 말한다. 당나라와 위구르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이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야율(耶律) 부족의 지도자 아보기(阿保機)는 10개의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만들고, 요서의 초원지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요하 유역의 몇 개의 도시를 장악 함으로서 요 나라(916-1125)의 기초를 닦았다. 5 거란족 본거지의 핵심은 요서의 초원지대 특히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었다. 거란족은 바로 이 장소에 상경(上京)과 중경(中京)을 세웠고, 요하(遼河)의 강 명칭을 취해 그들 왕조의 이름을 지었다. 6 아보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926년에 발해를 정복하였다. 중세 유럽인들이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 나라는 만주, 몽골, 그리고 북중국의 일부를 정복하여, 대동(大同)에는 서경(西京)을, 오늘날 북경이라고 부르는 전방 수비대 주둔 지역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했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遼)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7

 

요 나라도 이원(二元)제도를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문관을 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의 군사를 동원 해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동원된 거란 부족들은 (영어의 "hord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르도”라 부르는 단위 부대에 복무했다. 요나라는 실제로 이원제 국가이었다. 남부의 북경 주변 16개 현(송나라에는 300개의 현)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의 중국인들은 중국식 관료제로 다스리고, 북방에 사는 백만여 명의 거란족들은 전통적인 부족 법으로 다스렸다. 8

 

몽골 초원지대 혹은 만주로부터 온 정복자들은 이원제를 통해 자기들 자신의 중국화를 방지하려 했다. 그들 자신은 부족 전통을 계속 지키면서, 한족은 그들 고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dyard (1983: 346)는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압록강 북쪽의 강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발해의 멸망을 전환점으로 한국은 오늘날까지 만주 역사에서 제외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9

 

전연(前燕, 349-70)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요서와 요동 지역만을 점령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한 반면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당 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송(宋)

 

907년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도 당나라는 이미 반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당 멸망 이후 전개된 북 중국에서의 오대(五代, 907-60)와 중부와 남부 중국에서의 십국(十國, 902-79)의 상황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특히 317년에 서진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439년에 탁발 북위(北魏)에 의해 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10 북 중국에서는 대부분 비 한족 출신의 장군들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 한데 반해, 남쪽은 한족 제후들이 분할 점거 하였다. Ledyard (1983: 323)는 “그러나 오호십육국 당시에는 온갖 명칭의 (선비족) 연(燕) 나라가 고구려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대치했었지만, 오대십국 당시의 거란은 재빨리 (926년에) 동부 만주의 경쟁자 발해를 처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만주 대륙 전체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 중국에서는 5개의 왕조가 빠른 속도로 교체되다가, 960년에 와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송 태조(960-76)의 선조들은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조광윤은 젊은 시절부터 승마와 궁술에 매우 능했다.

 

거란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거란은 북경과 대동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11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963년 이후, 난폭한 군 지휘관들이 장악하던 송 나라 지방정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개봉(開封)에 수도를 둔 북송(960-1127)의 167년간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중의 하나였다. 12

 

한반도

 

Ledyard(1983: 323)에 의하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는 만주에 있는 북방 영토에 대해 자신이 적법한 소유권을 가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고려는 옛 발해의 압록강 이남의 땅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993년부터 1018년까지 지속된 고려와 요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영역 다툼이었다” 13

 

1005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송과의 전투가 종료되자, 요는 1010년부터 10년 동안 고려(918-1392)와 전면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10년에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요 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특별히 얻은 것도 없이 갑자기 철수하였다. 거란은 1018년에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강감찬 장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공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으나, 고려 조정은 1020년에 거란에게 더 이상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요 나라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북송 (960-1127) 조정은 신생 고려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해, 고려와의 통상과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켰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개입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송나라 조정이 고려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edyard (1983: 347)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대부분의 송나라 대신들은 여전히,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후피를 대변자로 하는 다른 그룹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려가 만주 세력에 대항하는 믿을 수 있는 실질적 적대세력이며, 북방의 적들에 대항해 중국적인 문명을 수호하는 한반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동파 등 주류의 견해가 대세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한족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와 금 나라는 ‘야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요와 금의 외교와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체제이었다. 그들은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역법을 만들고, 사신을 교환하며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과 전례(典禮) 절차를 따랐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2 (2005. 7. 30.)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출처; 업코리아

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7276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거란의 건국 (naver.com)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가 되다

요약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인 거란의 건국은 북방 유목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영역을 차지한 최초의 사건으로 가능했다. 송은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6대 성종 대에 이르러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거란은 전연의 맹을 이뤄내며 중국과 거란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976년 : 전시과 실시
993년 : 고려, 거란의 1차 침입을 격퇴(서희의 담판)
998년 : 목종, 개정전시과 시행

북방 유목민족, 중국을 정복하기 시작하다

중국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립은 역사상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일찍이 진한 대에 유목민족 최초로 제국을 이룬 흉노와의 전쟁은 중국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북조 시대에 시작된 호한융합의 정권은 수당에 이르러 더욱 개방적인 문화를 이끌었다.

거란인몽골 아오한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림 속 거란인의 모습.

 

그런데 당말 오대의 변혁기에 이르러 새로이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크게 일어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중국을 정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목민족들이 지속적으로 남하한 원인으로는 당시 동아시아의 연평균 기온이 계속 낮아진 이유도 있었다.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원()으로 이어지는 유목민 정복왕조의 행렬은 중국의 일부, 절반, 끝내는 중국 전역을 송두리째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사에서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 왕조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영역을 점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잇따른 전쟁 속에서 각국의 민족주의는 더욱 고양되었으며 송 대의 중국은 남북조 이래 다시 한 번 유목민족들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목축과 수렵활동을 하던 북방 유목민족의 이동생활

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부, 건조한 기후대를 따라 목축과 수렵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막 속에서 살았고 목초지를 따라 이동 생활을 했다. 이들의 재산이라면 수백, 수천의 양떼와 말에 불과했다. 말은 여름철에 수많은 양떼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했으며 겨울에는 부족원들의 사냥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매 사냥유목민족 거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매 사냥 그림.

 

'그 옛날, 흰 말을 탄 신인이 토하(랴오허 강) 상류로부터 내려오고, 검은 소달구지를 탄 선녀가 황허(시라무렌 강)의 상류로부터 내려왔다. 마침내 두 남녀는 두 강의 합류점인 목엽산 기슭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고,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이들이 각각 거란 8부의 조상이 되었다.'

거란의 건국신화이다. 거란족은 만주 시라무렌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계 종족으로 8개의 대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사서에는 이미 4세기부터 등장한다. 유목민족인 그들에게 말이나 소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을 터이고, 아마도 수말과 암소를 토템으로 하는 집단이 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과의 접촉기에 강성했던 두 성씨, 즉 야율 성과 심밀 성은 각기 말과 소를 상징하는 씨족명의 한자 표기이다.

거란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연운 16주를 획득하다

916년 부족연합의 대칸이었던 야율 성의 아보기()가 세습적인 지위를 확보하여 전제국가 체제를 갖추고 '거란국'을 건설했다. 도읍은 현재 내몽골 자치구인 소오달맹으로 920년에는 거란문자를 창제해 보급하였다. 탕구트와 위구르의 부족들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926년에는 만주에 약 230년간 군림했던 해동성국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

발해의 유적인 청해 토성동서 500m, 남북 340m 정도의 장방형으로 생각되는 이 성벽은 높이 2m의 토두이다. 발해는 926년 거란에게 멸망당했다.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은 태종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영역을 넓혔다. 그 첫 번째가 연운 16주의 획득이다.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이 땅을 넘기기로 하고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석경당은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세운 이다. 거란의 연운 16주 획득은 북방 유목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영역을 차지한 최초의 사건으로 우리가 거란을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로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야율아보기와 이극용요나라를 건립한 요태조 야율아보기와 돌궐족 최대 군벌 이극용의 석상.

 

연운 16주는 북경과 대동을 중심으로 한 화북의 일부 지역으로 이 중원의 땅이 이민족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중국인들로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송은 이 실지의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 무렵 거란족은 농경민으로부터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다. 약탈보다는 농업이나 수공업 기술자의 획득에 치중하여 국력을 다져가고 있었다.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에도 많은 도시적 집락이 만들어졌고, 가구 수는 연운지방의 호수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전연의 맹, 송과 전연에서 화의하다

거란의 국력은 6대 성종() 대에 이르러 최고수준에 달해 동아시아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성종은 12살 나이로 황위에 올라 소태후()의 섭정 기간 동안 대대적 국정 개혁을 통해 다져진 국력으로,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략하게 하고 직접 송을 공격하여 송나라 조정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송 조정에서는 천도론까지 대두했으나 재상 구준이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여 진종이 마침내 친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황하를 사이에 두고 요군과 대치하게 된 진종은 전쟁터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에 떨며 일말의 전의도 없이 화의만을 모색할 뿐이었다. 한편, 보병 위주의 송군은 초원의 야전에서는 기마병인 요군을 당해내지 못했으나 성을 거점으로 싸울 때는 완강한 저항력을 보였다. 때마침 송과의 교전에서 명장을 잃은 요군은 사기의 하락을 우려하여 전연에서 화의에 응하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전연의 맹()', 1004년의 일이었다.

요나라 영역요나라의 전성기인 1000년경의 영토.

 

이 조약에서 송은 형의 나라라는 명분은 얻었으나, 요에게 연운 16주의 지배를 인정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바치기로 했다. 이로써 거란의 재정은 풍족해지고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한 반면, 송의 국력은 크게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는 빈번한 전쟁보다는 나은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하나 다른 유목민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선례가 됨으로써 송의 재정을 압박했다. 진종은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글을 위조하여 봉선례의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으나 송의 실추된 권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중국과의 일체화를 도모한 거란, 국가적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거란은 이미 태종 때 후진의 수도 개봉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민족 색채가 강한 거란국의 명칭을 '대요'로 바꾸었고, 장성 이남의 화북 농경지대에는 한인 관료에 의한 중국식 군현제를 유지시키는 남면관,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에는 거란의 관습에 따라 통치하는 북면관 제도를 시행하는 이원적 지배체제를 취하였다. 또한 불교를 도입하여 중국인과 거란인의 일체화를 도모하고, 대장경의 간행 등 불사를 활발히 일으켰다. 불궁사 석가탑은 중국 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목탑으로 유명하다.

불궁사 석가탑요나라 시절 건립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높은 목탑.

 

그럼에도 요나라의 중심은 명백히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였으며, 그곳에서 거란족 독자의 체제를 구축하여 중국과 구별되는 민족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그들의 민족의식은 그들이 창제한 거란 문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한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거란 문자는 대자와 소자로 나뉘는데, 표의 문자인 대자는 야율아보기가 920년 공표했고, 표음문자로 보이는 소자는 그의 동생 야율질라()가 위구르 문자를 참조하여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여진 문자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겨진 자료가 적어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은 상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란의 건국 -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가 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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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황수()의 남쪽, 황룡()의 북쪽 지역인 선비족()의 옛 영토에 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5,300 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해국(), 남쪽으로는 영주()와 북쪽으로는 실위()에 다다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냉형산()이 위치하고 해국의 서산(西)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영역은 사방 2,000리이다. 사냥을 일삼아 왕래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군장()의 성씨는 대하씨()이다. 정예병사 43,000명인데 8부족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만약 군사의 징발이 있으면 각각의 부족에서는 모두 반드시 합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거병을 할 수 없었다. 수렵은 각 부족별로 행하였으며 전쟁은 각 부족이 함께 수행하였다. 본래 돌궐()에게 신속하였으나 해와 함께 싸우기를 좋아하여 불리하면 청산()이나 선비산()에 숨어 들어가 보존하였다. 풍속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무덤을 만들지 않으며 시신은 마차나 수레로서 대산()으로 보내 나무위에 걸어 두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기간은 없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 저녁으로 이를 슬퍼하여 곡을 하지만, 반면 부모가 죽으면 자손은 곡을 하지 않는다. 그 밖의 풍속은 돌궐과 같다. 무덕() 초에 자주 당나라 변경을 침략하였다. 무덕 2년(619) 평주()를 침략하였다. 무덕 6년(623) 거란의 군장 돌라()가 사신을 보내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 2년(628)

거란의 군장 마회()가 부족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이 사신을 보내어 양사도()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본래 다른 부류이다. 지금 나에게 항복해 왔으데 무슨 연고로 (돌궐은 거란을) 찾는냐? 양사도는 본래 중국인으로 우리의 영역을 점거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다. 돌궐이 아무 연고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있어 우리 군대가 가서 토벌하니 구원을 요청하였다. 생각건대 오래지 않아 저절로 사로잡혀 망할 것이다. 설령 그렇게 안되더라도 결코 거란과 바꾸지 않겠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영주에 이르러 거란의 군장과 노인 등을 만나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고, 군장 굴가()를 좌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정관 22년(648) 굴가 등의 부족이 모두 당나라에 복속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좌령군장군() 겸 송막도독부·무극현남()으로 임명하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현경() 초에 다시 굴가를 좌감문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굴가의 증손 호막리()는 측천무후() 때 좌위장군() 겸 검교탄한주자사()·귀순군왕()을 역임하였다.

또 거란의 다른 부족의 추장으로 손오조()가 있었는데 처음 수()나라 때 금자광록대부(祿)를 지냈고, 무덕 4년(621) 말갈() 추장 돌지계()와 함께 사신을 보내 복속하였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영주성 근처에 안치하도록 하고 운휘장군()·요주총관()을 제수하였다. 증손 손만영()에 이르러 수공() 초에 우옥검위장군()·귀성주자사()에 임명하고 영락현공()에 책봉하였다. 만세통천() 연간에 손만영이 매부 송막도독() 이진충()과 함께 영주도독() 조홰()에게 모욕을 받아 두 사람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굴가의 후손으로 우무위대장군() 겸 송막도독을 역임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의 반란에 분노하여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로 고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진멸은 곧 스스로 무상가한()으로 자칭하고 손만참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선봉에서 노략질하도록 하니, 전진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켜 10일만에 병사가 수만명으로 불어나 단주()까지 육박하였다. (측천무후는) 조서를 내려 우금오대장군() 장현우()

사농소경() 마인절()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섰다. 서협석곡(西)에서 손만참과 싸웠지만 관군이 대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이 사로잡혔다. 다시 하관상서() 왕효걸()·좌우림장군() 소굉휘()에게 7만을 거느리고 계속 토벌하게 하였다. 손만참과 동협석곡()에서 싸웠지만 왕효걸은 진중에서 사망하고, 소굉휘는 갑옷을 버리고 도망갔다. 손만참은 승승장구하여 유주()까지 쳐들어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청변도대총관()·건안군왕() 무유의()가 부장을 보내 토벌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좌금오대장군()·하내왕() 무의종()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 누사덕()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사탁충의()를 전군() 총관으로 삼아 30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후 이진멸이 죽고 손만참이 대신 무리를 이끌었다. 손만참은 다시 별도로 낙무정()과 하아소()를 유격대 선봉으로 삼아 기주()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관리의 자녀 수천명을 도륙하였다.

얼마후 해와 돌궐의 무리가 배후를 습격하여 노약자를 약탈하였다. 손만참이 무리를 버리고 경기병() 수천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전군부총관() 장구절()이 수백기를 거느리고 매복하였다가 맞아 싸웠다. 손만참이 곤궁에 처하여 노비와 경기병 몇몇과 달아아 노하() 동쪽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안장을 풀고 쉬고 있을 때 노비가 목을 베었다. 장구절이 그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부터 잔당들이 모두 돌궐에 항복하였다. 개원() 3년 (715) 거란의 수령 이실활()이 돌궐의 묵철가한()이 쇠퇴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로 항복해 왔다. 이실활은 이진충의 사촌 동생이다. 이에 다시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실활을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 겸 송막도독에 임명하였다. 그가 거느리는 8부락은 예전 우두머리를 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장군 설태()로 하여금 감독하고 진무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이실활이 입조하자, 종실의 질녀 양씨()를 영락공주()로 삼아 시집보냈다. 개원 6년(718) 이실활이 죽자

현종이 애도를 표하고 특진()에 추증하였다. 이실활의 사촌 동생 사고()가 무리를 대신 다스리자 사신을 보내 책봉하고 형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대신 가돌우()는 날래고 용감하여 무리의 환심을 얻으니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도독 허흠첨()이 설태에게 용감한 군사 500명을 거느려, 해왕() 이대보() 및 사고의 무리를 징발하여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관군이 불리하여 사고와 이대보는 진중에서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영주 도독부가 크게 놀라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유관()으로 후퇴시켰다. 가돌우는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를 임금으로 삼았다. 얼마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죄를 청하니 현종이 울우를 책봉하고 사고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고 가돌우의 죄를 용서하였다. 개원 10년(722) 울우가 입조하여 청혼하였다. 현종이 다시 사촌 누이의 남편인 솔경령( ; 당나라에서 황족의 서열과 형법을 관장하는 솔경시의 장관) 모용가빈()의 딸을 연군공주()로 삼아 시집보냈다. 아울러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원외대장군

겸 정석군경략대사(使)에 임명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울우가 돌아간 후 가돌우가 내조하니 좌우림장군에 임명하였다. (가돌우는) 현종의 병주() 행차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울우가 병들어 죽자, 동생 토우()가 대신 무리를 다스렸다. 당나라에서는 형의 관작을 계승하고 연군공주로 다시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그런데 토우와 가돌우는 서로 시기하여 개원 13년 (토우가) 공주와 함께 도망와서 돌아가지 않았다. 당나라는 그를 요양군왕()에 책봉하고 숙위(宿)로 머물게 하였다. 가돌우는 이진충의 동생 소고()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 현종의 어가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소고가 행재소에 와서 태산까지 수행하였다. (현종은 그를) 좌우림군원외대장군·정석군경략대사로 임명하고 다시 광화군왕()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사촌 외질녀 진씨()를 동화공주()로 책봉하여 시집보냈다. 소고가 돌아가고 다시 가돌우가 입조하여 토산품을 바쳤다. 중서시랑() 이원굉()이 예우하지 않자 가돌우가 불만을 품고 돌아갔다. 좌승상() 장열()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두 오랑캐(거란과 해)는 반드시 모반할 것이다. 가돌우는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지녔으니 오직 이익만 바라본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니 만약 우대하며 기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개원 18년(730)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자기 부락과 협박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동화공주는 평로군()으로 투항하였다. 이에 중서사인() 배관()·급사중() 설간() 등이 수도와 관내()·하동()·하남()·하북()에서 나누어 용사들을 모집하고, 충왕준()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군대가 끝내 출동하지 못하였다. 개원 20년(732) 예부상서() 신안왕() 위()를 행군부대총관()으로 삼아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장사() 조함장()과 함께 장성을 넘어 격파하였으니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가돌우가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니 해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위는 곧바로 회군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다시 노략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이 부장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을 보내 정예병 만명과 항복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군대가 유관()의 도산()의 아래에 이르자

가돌우가 돌궐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관군에 저항하였다. 해의 무리가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관군이 대패하니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달아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중에서 사망하였고 휘하의 6,000명은 모두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서를 내려 장수규()를 유주장사 겸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여 경략하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점차 장수규에게 핍박받아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얼마후 미혹함에 빠져 갈팡질팡하다 무리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향하여 돌궐로 향하려고 하였다. 장수규가 관기() 왕회() 등을 부락으로 보내 설득하였다. 이때 거란의 관리 이과절()이 가돌우와 군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서로 협동하지 못하는 정황이 되자, 왕회가 몰래 유혹하였다. 그래서 이과절이 밤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돌우와 무리 수십명을 죽였다. 개원 23년 가돌우의 머리를 낙양에 전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과절을 북평군왕()에 책봉하고 특진()·검교송막주도독()을 제수하고 비단 옷 한 벌과 은 그릇 10개, 그리고 비단 3,000필을 하사하였다. 그해 이과절이 가돌우의 잔당 이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아들도 다 죽었는데 날건()만이 안동도호부로 도망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천보() 10년(751) 안록산()이 거란 추장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유주·운중()·평로()의 군대 수만명을 동원하여 황수( ; 시라무렌) 남쪽에서 거란과 싸웠는데, 안록산이 대패하여 돌아왔으니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12년에 다시 항복하여 왔다. 정원() 연간까지 격년으로 사신을 보내어 복속국의 예를 다하였다. 정원 4년(788) 해와 함께 당나라 진무()를 침략하여 사람과 가축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갔다. 9년과 10년 다시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 대수령() 회락예하() 이하에게 각각 관직을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11년 대수령 열소() 등 25인 내조하였다. 이후로 원화()·장경()·보력()·대화()·개성() 연간까지 때때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회창() 2년(842) 9월 제서를 내려 ‘거란의 새로 즉위한 왕 굴술()에게 운휘장군()·수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을 줄 만하다’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使) 장중무()가 상소하여 “굴술 등이 ‘거란은 예부터 회흘()의 도장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 간청하여 아뢰며 나라에서 인장을 내려주기를 간청합니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그 도장에는 ‘봉국거란지인()’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거란()은 황수()의 남쪽, 황룡()의 북쪽 지역인 선비족()의 옛 영토에 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5,300 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해국(), 남쪽으로는 영주()와 북쪽으로는 실위()에 다다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냉형산()이 위치하고 해국의 서산(西)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영역은 사방 2,000리이다. 사냥을 일삼아 왕래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군장()의 성씨는 대하씨()이다. 정예병사 43,000명인데 8부족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만약 군사의 징발이 있으면 각각의 부족에서는 모두 반드시 합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거병을 할 수 없었다.

수렵은 각 부족별로 행하였으며 전쟁은 각 부족이 함께 수행하였다. 본래 돌궐()에게 신속하였으나 해와 함께 싸우기를 좋아하여 불리하면 청산()이나 선비산()에 숨어 들어가 보존하였다. 풍속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무덤을 만들지 않으며 시신은 마차나 수레로서 대산()으로 보내 나무위에 걸어 두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기간은 없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 저녁으로 이를 슬퍼하여 곡을 하지만, 반면 부모가 죽으면 자손은 곡을 하지 않는다. 그 밖의 풍속은 돌궐과 같다. 무덕() 초에 자주 당나라 변경을 침략하였다. 무덕 2년(619) 평주()를 침략하였다. 무덕 6년(623) 거란의 군장 돌라()가 사신을 보내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 2년(628)

거란의 군장 마회()가 부족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이 사신을 보내어 양사도()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본래 다른 부류이다. 지금 나에게 항복해 왔으데 무슨 연고로(돌궐은 거란을) 찾는냐? 양사도는 본래 중국인으로 우리의 영역을 점거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다. 돌궐이 아무 연고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있어 우리 군대가 가서 토벌하니 구원을 요청하였다. 생각건대 오래지 않아 저절로 사로잡혀 망할 것이다. 설령 그렇게 안되더라도 결코 거란과 바꾸지 않겠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영주에 이르러 거란의 군장과 노인 등을 만나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고, 군장 굴가()를 좌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정관 22년(648) 굴가 등의 부족이 모두 당나라에 복속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좌령군장군() 겸 송막도독부·무극현남()으로 임명하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현경() 초에 다시 굴가를 좌감문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굴가의 증손 호막리()는 측천무후() 때 좌위장군() 겸 검교탄한주자사()·귀순군왕()을 역임하였다.

또 거란의 다른 부족의 추장으로 손오조()가 있었는데 처음 수()나라 때 금자광록대부(祿)를 지냈고, 무덕 4년(621) 말갈() 추장 돌지계()와 함께 사신을 보내 복속하였다.(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영주성 근처에 안치하도록 하고 운휘장군()·요주총관()을 제수하였다. 증손 손만영()에 이르러 수공() 초에 우옥검위장군()·귀성주자사()에 임명하고 영락현공()에 책봉하였다. 만세통천() 연간에 손만영이 매부 송막도독() 이진충()과 함께 영주도독() 조홰()에게 모욕을 받아 두 사람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굴가의 후손으로 우무위대장군() 겸 송막도독을 역임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의 반란에 분노하여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로 고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진멸은 곧 스스로 무상가한()으로 자칭하고 손만참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선봉에서 노략질하도록 하니, 전진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켜 10일만에 병사가 수만명으로 불어나 단주()까지 육박하였다.(측천무후는) 조서를 내려 우금오대장군() 장현우() 사농소경() 마인절()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섰다.

서협석곡(西)에서 손만참과 싸웠지만 관군이 대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이 사로잡혔다. 다시 하관상서() 왕효걸()·좌우림장군() 소굉휘()에게 7만을 거느리고 계속 토벌하게 하였다. 손만참과 동협석곡()에서 싸웠지만 왕효걸은 진중에서 사망하고, 소굉휘는 갑옷을 버리고 도망갔다. 손만참은 승승장구하여 유주()까지 쳐들어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청변도대총관()·건안군왕() 무유의()가 부장을 보내 토벌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좌금오대장군()·하내왕() 무의종()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 누사덕()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사탁충의()를 전군() 총관으로 삼아 30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후 이진멸이 죽고 손만참이 대신 무리를 이끌었다. 손만참은 다시 별도로 낙무정()과 하아소()를 유격대 선봉으로 삼아 기주()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관리의 자녀 수천명을 도륙하였다.

얼마후 해와 돌궐의 무리가 배후를 습격하여 노약자를 약탈하였다. 손만참이 무리를 버리고 경기병() 수천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전군부총관() 장구절()이 수백기를 거느리고 매복하였다가 맞아 싸웠다. 손만참이 곤궁에 처하여 노비와 경기병 몇몇과 달아아 노하() 동쪽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안장을 풀고 쉬고 있을 때 노비가 목을 베었다. 장구절이 그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부터 잔당들이 모두 돌궐에 항복하였다. 개원() 3년(715) 거란의 수령 이실활()이 돌궐의 묵철가한()이 쇠퇴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로 항복해 왔다.

이실활은 이진충의 사촌 동생이다. 이에 다시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실활을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 겸 송막도독에 임명하였다. 그가 거느리는 8부락은 예전 우두머리를 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장군 설태()로 하여금 감독하고 진무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이실활이 입조하자, 종실의 질녀 양씨()를 영락공주()로 삼아 시집보냈다. 개원 6년(718) 이실활이 죽자 현종이 애도를 표하고 특진()에 추증하였다. 이실활의 사촌 동생 사고()가 무리를 대신 다스리자 사신을 보내 책봉하고 형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대신 가돌우()는 날래고 용감하여 무리의 환심을 얻으니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도독 허흠첨()이 설태에게 용감한 군사 500명을 거느려, 해왕() 이대보() 및 사고의 무리를 징발하여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전투에서) 관군이 불리하여 사고와 이대보는 진중에서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영주 도독부가 크게 놀라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유관()으로 후퇴시켰다. 가돌우는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를 임금으로 삼았다. 얼마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죄를 청하니 현종이 울우를 책봉하고 사고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고 가돌우의 죄를 용서하였다.

개원 10년(722) 울우가 입조하여 청혼하였다. 현종이 다시 사촌 누이의 남편인 솔경령( ; 당나라에서 황족의 서열과 형법을 관장하는 솔경시의 장관) 모용가빈()의 딸을 연군공주()로 삼아 시집보냈다. 아울러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원외대장군겸 정석군경략대사(使)에 임명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울우가 돌아간 후 가돌우가 내조하니 좌우림장군에 임명하였다.(가돌우는) 현종의 병주() 행차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울우가 병들어 죽자, 동생 토우()가 대신 무리를 다스렸다. 당나라에서는 형의 관작을 계승하고 연군공주로 다시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그런데 토우와 가돌우는 서로 시기하여 개원 13년(토우가) 공주와 함께 도망와서 돌아가지 않았다. 당나라는 그를 요양군왕()에 책봉하고 숙위(宿)로 머물게 하였다.

가돌우는 이진충의 동생 소고()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 현종의 어가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소고가 행재소에 와서 태산까지 수행하였다.(현종은 그를) 좌우림군원외대장군·정석군경략대사로 임명하고 다시 광화군왕()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사촌 외질녀 진씨()를 동화공주()로 책봉하여 시집보냈다. 소고가 돌아가고 다시 가돌우가 입조하여 토산품을 바쳤다. 중서시랑() 이원굉()이 예우하지 않자 가돌우가 불만을 품고 돌아갔다. 좌승상() 장열()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두 오랑캐(거란과 해)는 반드시 모반할 것이다. 가돌우는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지녔으니 오직 이익만 바라본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니 만약 우대하며 기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개원 18년(730)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자기 부락과 협박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동화공주는 평로군()으로 투항하였다. 이에 중서사인() 배관()·급사중() 설간() 등이 수도와 관내()·하동()·하남()·하북()에서 나누어 용사들을 모집하고, 충왕준()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군대가 끝내 출동하지 못하였다.

개원 20년(732) 예부상서() 신안왕() 위()를 행군부대총관()으로 삼아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장사() 조함장()과 함께 장성을 넘어 격파하였으니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가돌우가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니 해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위는 곧바로 회군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다시 노략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이 부장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을 보내 정예병 만명과 항복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군대가 유관()의 도산()의 아래에 이르자 가돌우가 돌궐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관군에 저항하였다.

해의 무리가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관군이 대패하니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달아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중에서 사망하였고 휘하의 6,000명은 모두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서를 내려 장수규()를 유주장사 겸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여 경략하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점차 장수규에게 핍박받아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얼마후 미혹함에 빠져 갈팡질팡하다 무리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향하여 돌궐로 향하려고 하였다. 장수규가 관기() 왕회() 등을 부락으로 보내 설득하였다.

이때 거란의 관리 이과절()이 가돌우와 군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서로 협동하지 못하는 정황이 되자, 왕회가 몰래 유혹하였다. 그래서 이과절이 밤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돌우와 무리 수십명을 죽였다. 개원 23년 가돌우의 머리를 낙양에 전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과절을 북평군왕()에 책봉하고 특진()·검교송막주도독()을 제수하고 비단 옷 한 벌과 은 그릇 10개, 그리고 비단 3,000필을 하사하였다. 그해 이과절이 가돌우의 잔당 이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아들도 다 죽었는데 날건()만이 안동도호부로 도망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천보() 10년(751) 안록산()이 거란 추장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유주·운중()·평로()의 군대 수만명을 동원하여 황수( ; 시라무렌) 남쪽에서 거란과 싸웠는데, 안록산이 대패하여 돌아왔으니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12년에 다시 항복하여 왔다. 정원() 연간까지 격년으로 사신을 보내어 복속국의 예를 다하였다. 정원 4년(788) 해와 함께 당나라 진무()를 침략하여 사람과 가축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갔다.

9년과 10년 다시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 대수령() 회락예하() 이하에게 각각 관직을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11년 대수령 열소() 등 25인 내조하였다. 이후로 원화()·장경()·보력()·대화()·개성() 연간까지 때때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회창() 2년(842) 9월 제서를 내려 ‘거란의 새로 즉위한 왕 굴술()에게 운휘장군()·수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을 줄 만하다’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使) 장중무()가 상소하여 “굴술 등이 ‘거란은 예부터 회흘()의 도장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 간청하여 아뢰며 나라에서 인장을 내려주기를 간청합니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그 도장에는 ‘봉국거란지인()’이라고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당서 거란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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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미지
  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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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본래 동호()의 종족으로 그 조상은 흉노()에 격파되어 선비산()을 지키고 살았다. 위()나라 청룡() 연간에 부족의 추장 비능()이 점점 흉폭하고 오만해져 유주자사() 왕웅()에게 피살되었다.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 남쪽과 황룡()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위() 때에 스스로 거란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오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해(), 남쪽으로는 영주(), 북쪽으로는 말갈()과 실위()에 이른다. 냉형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하며 산다. 사냥을 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 임금의 성씨는 대하()이다. 정예병사는 4만이나 되는데 8부족으로 나뉜다. 돌궐()에 신속하여 (돌궐에게) 사근()이라는 관직을 임명받는다. 군대를 징발하여 공격할 때에는 모든 부족이 회합하지만,

사냥을 할 때에는 부족별로 행동한다. 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매번 싸웠지만 불리하여 선비산으로 달아났다. 풍속은 돌궐과 대략 비슷하다. 사람이 죽어도 묘를 쓰지 않으며 마차에 시체를 실어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걸어놓는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아침 저녁으로 울어대지만,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은) 그렇게 하지않으며 추도하는 기간도 없다. 무덕() 연간에 거란의 대추장 손오조()와 말갈 추장 돌지계()가 함께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하였지만, 다른 추장들은 간혹 소규모로 변경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2년 뒤 군장이 사신을 보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 2년(628) 마회()가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이 주변의 이민족이 당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당나라에) 양사도()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같은 부류가 아니며, 지금 우리에게 항복해 왔는데 어떻게 요구하는냐? 양사도는 본래 당나라에 속해있던 백성으로 지방을 침략하는데, 돌궐이 도리어 원조를 하고 있다. 나는 장차 (양사도)를 사로잡을 생각이니 항복해 온 거란과 바꿀 수 없다" 이듬해 마회가 다시 입조할 때 북과 깃발을 하사하니 이로부터 (거란의) 공물이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거란의 추장과 해의 수령을 모두 징발하여 종군토록 하였다. 당 태종이 귀환할 때 영주()를 들러

추장 굴가()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차등 있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굴가를 좌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거란의 대추장이며 (돌궐의 관직인) 욕흘주()인 곡거()가 다시 무리를 이끌고 귀속하니, (당나라에서는) 그 부족을 현주()로 삼고 곡거에게 자사()를 제수하고,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얼마후 굴가가 부족을 이끌고 복속해 오니 (당나라에서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사지절(使)·10주제군사()·송막도독()에 임명하고 무극남()에 책봉하고 이씨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달계부()는 초락주(), 흘편부()는 탄한주(), 독활부()는 무봉주(), 분문부()는 우릉주(), 돌편부()는 일련주(), 예해부()는 도하주(), 추근부()는 만단주(), 복부()는 필려주()와 적산주()로 삼아 모두 송막도독부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돌궐에서 욕흘주()를 받았던 추장들을 당나라의 자사로 임명하였다. 굴가가 죽고 거란이 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행군총관() 아사덕추빈()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를 사로잡아 낙양에 바쳤다. 굴가에게는 자손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막리()로 좌위장군()․탄한주자사()에 임명되어 귀순군왕()에

귀순군왕()에 책봉되었다. 다른 하나는 진충()으로 좌위대장군()·송막도독()에 임명되었다. 또 손오조()에게는 자손이 있었는데, 손만영()으로 귀성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주도독() 조문홰()가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니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손만영은 본래 인질로 당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어서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았다. 그래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이진충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이라 칭하고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이주일도 되지 않아 무리가 수만명이나 되었지만 거짓으로 십만이라고 하였다. 숭주()를 공격하여 토격부사(使) 허흠적()을 사로잡았다. 측천무후()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 조인사()․금오대장군() 장현우()․우무위대장군() 이다조()·사농소경() 마인절() 등 28명의 장수들에게 토벌케 하였다. 한편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使), 납언() 요숙()을 부사(使)로 삼고,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로 고쳐불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西)의 황장곡()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장현우와

마인절은 모두 사로잡혔다. 거란군이 평주()로 진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측천무후는 다시 우무의대장군() 건안왕() 무유의()를 청변도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거란을 공격토록 하였는데, 이때 노비 가운데 용감한 자를 관청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주고 모집하여 군대에 충원하였다. 손만영이 말에 재갈을 채우고 밤에 단주()를 습격하였는데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이 결사대 수백명을 모집하여 육박전을 벌이니 손망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후 이진충도 죽으니, 돌궐의 묵철가한()이 거란의 부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손만영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세력을 떨치며 별장() 낙무정()과 하아소()가 기주()를 공격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수천명을 약탈하였다. 측천무후는 이진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 왕효걸()과 우림위장군() 소굉휘()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여 동협석()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패하고 왕효걸이 죽었다. 손만영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드디어 유주()를 도륙하였다. 무유의가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니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에서 다시 우금오위대장군()·하내군왕() 무의종()을 신병도대총관(),

우숙정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 우무위위대장군() 사탁충의()를 청변중도전군총관()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토벌케 하였다. 손만영의 부대 기세는 날카로와 북을 울리며 남진하며 영주()의 속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니 방자함이 거리끼는 바 없었다. 이때 신병도총관() 양현기()가 해의 군대를 이끌고 그 후미를 공격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하아소를 사로잡았고 별장 이해고()와 낙무정이 항복하였으며, 거란의 병장기를 산더미처럼 수습하였다. 손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다시 패잔병을 모아 해와 싸웠다. 해가 사방에서 공격하자 크게 괴멸되어 손만영은 왼쪽으로 말달려 나갔지만 장구절이 세 방면에서 매복하여 기다렸다. 곤궁해진 손만영은 가노 및 경기병과 함께 노하() 동쪽으로 달아났다. 피곤하여 숲속에서 잠시 누운 참에 가노가 그 머리를 베어버렸다. 장구절이 손만영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니 잔당들이 모두 괴멸되었다. 무유의가 개선가를 부르며 귀환하니 측천무후가 기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신공()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당나라에 패한 후) 거란은 자립할 수 없어 드디어 거란에 복속되었다. 구시() 원년(700) 조서를 내려 좌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우무위위장군()

낙무정()에게 거란을 토벌케 하니 격파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거란 출신의 용맹한 장수로서 일찍이 당나라 변방을 습격하여 자주 당나라 군대를 곤궁케 하였던 자들인데, 이때 이르러 공을 세웠다. 개원() 2년(714) 이진충의 사촌 동생인 도독 실활()이 돌궐의 묵철가한()이 쇠락한 틈에 부락과 힐리발이건철()과 함께 (당나라에) 귀속하여 오자, 당나라 현종()이 단서()와 철권()을 하사하였다. 2년뒤 다시 해의 군장 이대포()와 함께 오자, 조서를 내려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실활을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송막도독부에 정석군()을 설치하여 실활을 경략대사(使)로 삼고, 휘하의 8부족의 추장을 모두 자사로 임명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장군 설태()를 압번락사(使)로 삼아 이들을 감독․위무케 하였다. 현종이 동평왕()의 외손 양원사()의 딸을 영락공주()로 삼아 실활에게 시집보냈다. 이듬해 실활이 죽자 특진()을 추증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보내어 실활의 동생인 중랑장() 사고()에게 관작과 관할 영역을 계승토록 하였다. 이듬해 사고가 공주와 함께 내조하니 연회를 더욱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가돌우()가 정석군 부사(使)로서

용맹하여 무리의 신뢰를 얻어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가돌우가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첨()이 중무장한 병사 오백명과 해의 군장 이대보의 병사와 함께 가돌우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고와 이대보 모두 죽었다. 허흠첨이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유관()으로 들어와 버렸다.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를 군장으로 추대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보내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가돌우를 사면하였다. 울우가 내조하자 솔경령()을 제수하고 종실의 여자인 모용()을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도 내조하자 좌우림우장군()을 제수하였다. 울우가 죽고 동생 토우()가 즉위하였는데 가돌우와 사이가 틀어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달아나니, 요양군왕()에 봉하여 숙위(宿)로 머무르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이진충의 동생 소고()를 받들어 무리를 통치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왕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하였다. 천자가 봉선()할 때 소고가 여런 주변민족의 군장들과 함께 행재소까지 수행하였다. 이듬해 좌우림위대장군()을 제수하고 새로이 광화군왕()에 봉하였다. 종실의 여자인

진()을 동화공주()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냈다. 조서를 내려 그 부족의 추장 백여명에게 관직을 내리니, 소고는 아들을 입시()토록 하였다. 가돌우가 다시 왔는데 재상 이원굉()에게 예우받지 못해 불쾌하게 돌아갔다. 장열()이 말하였다. “저들은 금수와 같은 마음이라 오직 이익만 좇는다. 또한 한창 국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복속하고 있다. 예로써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이다” 삼년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굴열()을 왕으로 삼고 해의 무리를 협박하여 함께 돌궐에 투항하니, 공주는 평로군()으로 달아났다. 조서를 내려 유주장사()․지범양절도사() 조함장()이 격퇴하도록 하였다. 다시 중서사인() 배관()과 급사중() 설간()을 보내어 크게 장사들을 모집하였다. 충왕() 준()을 하북도행군원수(), 어사대부() 이조은()과 경조윤() 배주선()을 부장으로 삼고, 정백헌()·장문엄()·송지제()·이동몽()·조만공()·곽영걸() 등 여덟 총관()의 병사를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케 하였다. 얼마후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를 겸하게 하였지만, 충왕이 가지 않았다. 예부상서() 신안군왕() 위()가 지절(

하북도행군부원수()에 임명되어 조함장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가돌우가 달아났고 해의 무리는 항복하니, 충왕이 두 종족의 포로와 수급으로 여러 사당에 (승전 사실을) 고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변방을 침략하니, 유주장사 설초옥()·부총관()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이 1만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도산()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대로 오니, 해가 두려워하여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오지의와 나수충이 패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전사하니, (가돌우가) 당나라 병사 만여명을 죽였다. 현종이 장수규()를 유주장사로 발탁하여 대응케 하였다. 장수규는 뛰어난 장수인지라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서북쪽으로 달아나 돌궐에게 의탁하였다. 거란의 관리 이과절()은 가돌우에 불평을 품고 있었다. 장수규가 부하 왕회()를 보내 몰래 그를 회유하고 군대로 가돌우를 포위하였다. 이과절이 즉시 밤에 가돌우와 굴열 및 부하 수십명을 죽이고 귀속하였다. 장수규가 이과절에게 그 부족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낙양으로 전하였다

원문

거란()은 본래 동호()의 종족으로 그 조상은 흉노()에 격파되어 선비산()을 지키고 살았다. 위()나라 청룡() 연간에 부족의 추장 비능()이 점점 흉폭하고 오만해져 유주자사() 왕웅()에게 피살되었다.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 남쪽과 황룡()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위() 때에 스스로 거란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오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해(), 남쪽으로는 영주(), 북쪽으로는 말갈()과 실위()에 이른다.

냉형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하며 산다. 사냥을 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 임금의 성씨는 대하()이다. 정예병사는 4만이나 되는데 8부족으로 나뉜다. 돌궐()에 신속하여(돌궐에게) 사근()이라는 관직을 임명받는다. 군대를 징발하여 공격할 때에는 모든 부족이 회합하지만, 사냥을 할 때에는 부족별로 행동한다. 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매번 싸웠지만 불리하여 선비산으로 달아났다. 풍속은 돌궐과 대략 비슷하다. 사람이 죽어도 묘를 쓰지 않으며 마차에 시체를 실어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걸어놓는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아침 저녁으로 울어대지만, 부모가 죽으면(자식들은) 그렇게 하지않으며 추도하는 기간도 없다.

무덕() 연간에 거란의 대추장 손오조()와 말갈 추장 돌지계()가 함께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하였지만, 다른 추장들은 간혹 소규모로 변경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2년 뒤 군장이 사신을 보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 2년(628) 마회()가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이 주변의 이민족이 당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당나라에) 양사도()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같은 부류가 아니며, 지금 우리에게 항복해 왔는데 어떻게 요구하는냐? 양사도는 본래 당나라에 속해있던 백성으로 지방을 침략하는데, 돌궐이 도리어 원조를 하고 있다. 나는 장차(양사도)를 사로잡을 생각이니 항복해 온 거란과 바꿀 수 없다" 이듬해 마회가 다시 입조할 때 북과 깃발을 하사하니 이로부터(거란의) 공물이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거란의 추장과 해의 수령을 모두 징발하여 종군토록 하였다. 당 태종이 귀환할 때 영주()를 들러 추장 굴가()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차등 있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굴가를 좌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거란의 대추장이며(돌궐의 관직인) 욕흘주()인 곡거()가 다시 무리를 이끌고 귀속하니,(당나라에서는) 그 부족을 현주()로 삼고 곡거에게 자사()를 제수하고,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얼마후 굴가가 부족을 이끌고 복속해 오니(당나라에서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사지절(使)·10주제군사()·송막도독()에 임명하고 무극남()에 책봉하고 이씨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달계부()는 초락주(), 흘편부()는 탄한주(), 독활부()는 무봉주(), 분문부()는 우릉주(), 돌편부()는 일련주(), 예해부()는 도하주(), 추근부()는 만단주(), 복부()는 필려주()와 적산주()로 삼아 모두 송막도독부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돌궐에서 욕흘주()를 받았던 추장들을 당나라의 자사로 임명하였다. 굴가가 죽고 거란이 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행군총관() 아사덕추빈()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를 사로잡아 낙양에 바쳤다. 굴가에게는 자손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막리()로 좌위장군()․탄한주자사()에 임명되어 귀순군왕()에 귀순군왕()에 책봉되었다.

다른 하나는 진충()으로 좌위대장군()·송막도독()에 임명되었다. 또 손오조()에게는 자손이 있었는데, 손만영()으로 귀성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주도독() 조문홰()가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니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손만영은 본래 인질로 당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어서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았다.

그래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이진충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이라 칭하고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이주일도 되지 않아 무리가 수만명이나 되었지만 거짓으로 십만이라고 하였다. 숭주()를 공격하여 토격부사(使) 허흠적()을 사로잡았다. 측천무후()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 조인사()․금오대장군() 장현우()․우무위대장군() 이다조()·사농소경() 마인절() 등 28명의 장수들에게 토벌케 하였다.

한편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使), 납언() 요숙()을 부사(使)로 삼고,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로 고쳐불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西)의 황장곡()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장현우와 마인절은 모두 사로잡혔다. 거란군이 평주()로 진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측천무후는 다시 우무의대장군() 건안왕() 무유의()를 청변도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거란을 공격토록 하였는데, 이때 노비 가운데 용감한 자를 관청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주고 모집하여 군대에 충원하였다.

손만영이 말에 재갈을 채우고 밤에 단주()를 습격하였는데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이 결사대 수백명을 모집하여 육박전을 벌이니 손망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후 이진충도 죽으니, 돌궐의 묵철가한()이 거란의 부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손만영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세력을 떨치며 별장() 낙무정()과 하아소()가 기주()를 공격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수천명을 약탈하였다. 측천무후는 이진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 왕효걸()과 우림위장군() 소굉휘()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여 동협석()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패하고 왕효걸이 죽었다. 손만영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드디어 유주()를 도륙하였다.

무유의가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니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에서 다시 우금오위대장군()·하내군왕() 무의종()을 신병도대총관(), 우숙정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 우무위위대장군() 사탁충의()를 청변중도전군총관()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토벌케 하였다. 손만영의 부대 기세는 날카로와 북을 울리며 남진하며 영주()의 속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니 방자함이 거리끼는 바 없었다. 이때 신병도총관() 양현기()가 해의 군대를 이끌고 그 후미를 공격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하아소를 사로잡았고 별장 이해고()와 낙무정이 항복하였으며, 거란의 병장기를 산더미처럼 수습하였다. 손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다시 패잔병을 모아 해와 싸웠다. 해가 사방에서 공격하자 크게 괴멸되어 손만영은 왼쪽으로 말달려 나갔지만 장구절이 세 방면에서 매복하여 기다렸다. 곤궁해진 손만영은 가노 및 경기병과 함께 노하() 동쪽으로 달아났다. 피곤하여 숲속에서 잠시 누운 참에 가노가 그 머리를 베어버렸다. 장구절이 손만영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니 잔당들이 모두 괴멸되었다. 무유의가 개선가를 부르며 귀환하니 측천무후가 기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신공()으로 연호를 바꾸었다.(당나라에 패한 후) 거란은 자립할 수 없어 드디어 거란에 복속되었다.

구시() 원년(700) 조서를 내려 좌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우무위위장군() 낙무정()에게 거란을 토벌케 하니 격파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거란 출신의 용맹한 장수로서 일찍이 당나라 변방을 습격하여 자주 당나라 군대를 곤궁케 하였던 자들인데, 이때 이르러 공을 세웠다. 개원() 2년(714) 이진충의 사촌 동생인 도독 실활()이 돌궐의 묵철가한()이 쇠락한 틈에 부락과 힐리발이건철()과 함께(당나라에) 귀속하여 오자, 당나라 현종()이 단서()와 철권()을 하사하였다. 2년뒤 다시 해의 군장 이대포()와 함께 오자, 조서를 내려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실활을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송막도독부에 정석군()을 설치하여 실활을 경략대사(使)로 삼고, 휘하의 8부족의 추장을 모두 자사로 임명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장군 설태()를 압번락사(使)로 삼아 이들을 감독․위무케 하였다. 현종이 동평왕()의 외손 양원사()의 딸을 영락공주()로 삼아 실활에게 시집보냈다. 이듬해 실활이 죽자 특진()을 추증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보내어 실활의 동생인 중랑장() 사고()에게 관작과 관할 영역을 계승토록 하였다. 이듬해 사고가 공주와 함께 내조하니 연회를 더욱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가돌우()가 정석군 부사(使)로서 용맹하여 무리의 신뢰를 얻어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가돌우가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첨()이 중무장한 병사 오백명과 해의 군장 이대보의 병사와 함께 가돌우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고와 이대보 모두 죽었다. 허흠첨이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유관()으로 들어와 버렸다.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를 군장으로 추대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보내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가돌우를 사면하였다. 울우가 내조하자 솔경령()을 제수하고 종실의 여자인 모용()을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도 내조하자 좌우림우장군()을 제수하였다. 울우가 죽고 동생 토우()가 즉위하였는데 가돌우와 사이가 틀어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공주와 함께(당나라로) 달아나니, 요양군왕()에 봉하여 숙위(宿)로 머무르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이진충의 동생 소고()를 받들어 무리를 통치하니(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왕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하였다. 천자가 봉선()할 때 소고가 여런 주변민족의 군장들과 함께 행재소까지 수행하였다. 이듬해 좌우림위대장군()을 제수하고 새로이 광화군왕()에 봉하였다. 종실의 여자인 진()을 동화공주()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냈다. 조서를 내려 그 부족의 추장 백여명에게 관직을 내리니, 소고는 아들을 입시()토록 하였다. 가돌우가 다시 왔는데 재상 이원굉()에게 예우받지 못해 불쾌하게 돌아갔다.

장열()이 말하였다. “저들은 금수와 같은 마음이라 오직 이익만 좇는다. 또한 한창 국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복속하고 있다. 예로써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이다” 삼년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굴열()을 왕으로 삼고 해의 무리를 협박하여 함께 돌궐에 투항하니, 공주는 평로군()으로 달아났다. 조서를 내려 유주장사()․지범양절도사() 조함장()이 격퇴하도록 하였다. 다시 중서사인() 배관()과 급사중() 설간()을 보내어 크게 장사들을 모집하였다.

충왕() 준()을 하북도행군원수(), 어사대부() 이조은()과 경조윤() 배주선()을 부장으로 삼고, 정백헌()·장문엄()·송지제()·이동몽()·조만공()·곽영걸() 등 여덟 총관()의 병사를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케 하였다. 얼마후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를 겸하게 하였지만, 충왕이 가지 않았다. 예부상서() 신안군왕() 위()가 지절()· 하북도행군부원수()에 임명되어 조함장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가돌우가 달아났고 해의 무리는 항복하니, 충왕이 두 종족의 포로와 수급으로 여러 사당에(승전 사실을) 고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변방을 침략하니, 유주장사 설초옥()·부총관()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이 1만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도산()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대로 오니, 해가 두려워하여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오지의와 나수충이 패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전사하니,(가돌우가) 당나라 병사 만여명을 죽였다.

현종이 장수규()를 유주장사로 발탁하여 대응케 하였다. 장수규는 뛰어난 장수인지라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서북쪽으로 달아나 돌궐에게 의탁하였다. 거란의 관리 이과절()은 가돌우에 불평을 품고 있었다. 장수규가 부하 왕회()를 보내 몰래 그를 회유하고 군대로 가돌우를 포위하였다. 이과절이 즉시 밤에 가돌우와 굴열 및 부하 수십명을 죽이고 귀속하였다. 장수규가 이과절에게 그 부족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낙양으로 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당서 거란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참고자료>

 

요나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거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거란(契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거란족 - Daum 백과

 

 

분자인류학논단 | 거란족 - Daum 카페

 

 

거란 문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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