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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란)

대야발 2018. 5. 2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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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탁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2005년 08월 01일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한가지 이유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송나라 대신들 상당수가,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선비(鮮卑) 후예인 거란족의 요(遼) 

                                                             

 

 

당 왕조의 쇠망

 

지중해, 북아프리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300-400년 사이와 800년을 전후해서 두 차례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개시설에 의존해 농사를 지어오던 지역들 중 많은 곳이 장기간의 가뭄 결과로 유기되었다. 1 당나라의 쇠락과 멸망은 8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현종 (713-55) 치하의 당나라는 웅장한 위엄과 번영을 과시했지만, 당시 위구르의 카간들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과 공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2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피를 반반씩 받은 안록산은 북서쪽 변방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 칭하였다.

 

아버지 현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숙종(肅宗, r.756-62)은,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위구르 돌궐족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땅과 백성은 명목상 나의 소유이지만, 옥과 은, 어린 사내와 여자 아이들은 위구르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당나라의 중앙권력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당나라는 위구르의 군사적 지원 덕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Barfield(1989: 151)는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보다 야만적인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고 말한다. 당나라와 위구르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이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야율(耶律) 부족의 지도자 아보기(阿保機)는 10개의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만들고, 요서의 초원지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요하 유역의 몇 개의 도시를 장악 함으로서 요 나라(916-1125)의 기초를 닦았다. 5 거란족 본거지의 핵심은 요서의 초원지대 특히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었다. 거란족은 바로 이 장소에 상경(上京)과 중경(中京)을 세웠고, 요하(遼河)의 강 명칭을 취해 그들 왕조의 이름을 지었다. 6 아보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926년에 발해를 정복하였다. 중세 유럽인들이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 나라는 만주, 몽골, 그리고 북중국의 일부를 정복하여, 대동(大同)에는 서경(西京)을, 오늘날 북경이라고 부르는 전방 수비대 주둔 지역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했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遼)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7

 

요 나라도 이원(二元)제도를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문관을 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의 군사를 동원 해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동원된 거란 부족들은 (영어의 "hord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르도”라 부르는 단위 부대에 복무했다. 요나라는 실제로 이원제 국가이었다. 남부의 북경 주변 16개 현(송나라에는 300개의 현)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의 중국인들은 중국식 관료제로 다스리고, 북방에 사는 백만여 명의 거란족들은 전통적인 부족 법으로 다스렸다. 8

 

몽골 초원지대 혹은 만주로부터 온 정복자들은 이원제를 통해 자기들 자신의 중국화를 방지하려 했다. 그들 자신은 부족 전통을 계속 지키면서, 한족은 그들 고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dyard (1983: 346)는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압록강 북쪽의 강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발해의 멸망을 전환점으로 한국은 오늘날까지 만주 역사에서 제외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9

 

전연(前燕, 349-70)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요서와 요동 지역만을 점령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한 반면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당 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송(宋)

 

907년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도 당나라는 이미 반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당 멸망 이후 전개된 북 중국에서의 오대(五代, 907-60)와 중부와 남부 중국에서의 십국(十國, 902-79)의 상황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특히 317년에 서진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439년에 탁발 북위(北魏)에 의해 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10 북 중국에서는 대부분 비 한족 출신의 장군들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 한데 반해, 남쪽은 한족 제후들이 분할 점거 하였다. Ledyard (1983: 323)는 “그러나 오호십육국 당시에는 온갖 명칭의 (선비족) 연(燕) 나라가 고구려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대치했었지만, 오대십국 당시의 거란은 재빨리 (926년에) 동부 만주의 경쟁자 발해를 처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만주 대륙 전체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 중국에서는 5개의 왕조가 빠른 속도로 교체되다가, 960년에 와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송 태조(960-76)의 선조들은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조광윤은 젊은 시절부터 승마와 궁술에 매우 능했다.

 

거란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거란은 북경과 대동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11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963년 이후, 난폭한 군 지휘관들이 장악하던 송 나라 지방정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개봉(開封)에 수도를 둔 북송(960-1127)의 167년간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중의 하나였다. 12

 

한반도

 

Ledyard(1983: 323)에 의하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는 만주에 있는 북방 영토에 대해 자신이 적법한 소유권을 가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고려는 옛 발해의 압록강 이남의 땅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993년부터 1018년까지 지속된 고려와 요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영역 다툼이었다” 13

 

1005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송과의 전투가 종료되자, 요는 1010년부터 10년 동안 고려(918-1392)와 전면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10년에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요 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특별히 얻은 것도 없이 갑자기 철수하였다. 거란은 1018년에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강감찬 장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공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으나, 고려 조정은 1020년에 거란에게 더 이상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요 나라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북송 (960-1127) 조정은 신생 고려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해, 고려와의 통상과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켰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개입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송나라 조정이 고려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edyard (1983: 347)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대부분의 송나라 대신들은 여전히,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후피를 대변자로 하는 다른 그룹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려가 만주 세력에 대항하는 믿을 수 있는 실질적 적대세력이며, 북방의 적들에 대항해 중국적인 문명을 수호하는 한반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동파 등 주류의 견해가 대세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한족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와 금 나라는 ‘야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요와 금의 외교와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체제이었다. 그들은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역법을 만들고, 사신을 교환하며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과 전례(典禮) 절차를 따랐다.”(1)

동아시아 역사 강의: 3-2 (2005. 7. 30.)

 

 

 

 

김운회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중앙선데이
입력 2011.01.15 21:15

한민족에겐 ‘오랑캐의 왕’으로 각인돼 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 )는 요나라의 1대 황제다. 10년(916~926) 재위하면서 거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마치 중국 변방 왕조의 왕 같다. 그런데 그가 이끈 민족이 한민족과 뿌리를 공유한다면 어떻게 되나. 사서는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한민족 북방 역사에서 팽개쳐져 왔다. 사진<1>은 네이멍구(內蒙古) 바린좌기(巴林左旗)에 있는 야율아보기 묘역. <2>는 묘의 안내석. <3>은 요가 고조선 옛땅에서 일어나 법통을 이었다고 기록한 요사의 기록(붉은선 안). 우실하 항공대 교수 제공


①고조선과 요나라
고조선은 BC 2000년쯤~BC 103년까지 존재한 한반도의 뿌리 국가라는 게 한민족의 지식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얘기였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우린 믿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런 믿음을 허문다. 먼지 허옇게 뒤집어쓴 역사책엔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916~1125)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다. 고조선이 오랑캐 나라로 이어졌다면 한민족은 뭐란 말인가. 한민족의 과거는 어떻게 된 걸까.

진나라(265∼419)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의아한 기록이 있다.

모용황(慕容<76A9>)은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용외가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때 연호) 초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 전쟁을 했다. 그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으며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 [慕容<76A9>字元眞, <5EC6>第三子也. …建武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末,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5EC6>卒, 嗣位(晉書 卷 109)]

우리가 대표적 오랑캐로 알고 있는 동호(東胡·후일의 남부의 거란계, 북부의 몽골계를 형성)의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니(당시 조선은 오늘날 요동·요서다). 조선은 한민족의 단어 아닌가.

 

역시 오랑캐인 거란족의 나라 요의 요사(遼史)에도 난감한 기록이 있다.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이다.

요가 고조선을 승통한 것은 영역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패수(浿水) 문제이다. 즉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어디인지에 따라 고조선의 ①대동강 중심설, ②요동 중심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20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이나 한족(漢族)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엔 삼국사기와 수경주(水經注·중국 북위 때 저술된 중국의 하천지)의 주석자인 력도원(<9148>道元·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현에서 흘러나오고라는 말을 중시하여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이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패수는 대동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수경 원문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鏤芳縣)에서 나온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사서들에서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紫蒙縣. 本漢鏤芳縣地. [(遼史 卷 38 地理志2 東京道)]고 나온다.

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黎 等城, 蓋平州之界 契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진서에는 모용외가… 자몽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는 기록이 나온다(晉書 卷 108)). 이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동호(요나라의 선민족)의 중심지가 일치하며 후대 요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동호, 즉 고조선이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는 고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본다.

이젠 다른 문제, 즉 신화를 살펴보기 위해 시기를 더 거슬러서 1세기 후반의 진수의 삼국지를 보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하여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즈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옛날 고리(<69C0>離) 왕의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닭 알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아이를 갖게 됐다고 했다. 시녀가 아이를 낳자 왕이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가 부여를 세워 다스렸다(三國志魏書 扶餘傳)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秦開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90E4>千餘里(史記 卷110 匈奴列傳)]고 하는 기록이 있다.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鹽鐵論 卷 8 伐攻篇)라고 표현된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한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三國志 卷30 魏書30)]. 즉 고조선은 동호다. 이 동호는 어떤 존재일까.

사기흉노열전에는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東夷)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695B>矢)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 황제의 찬사로, 요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李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東胡)=맥(貊)으로 보고 맥(貊)과 예(濊)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東胡)와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진서요사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
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사만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2)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4930869

 

 

 

 

성헌식

 

 

발해 멸망시킨 거란(요)은 발해 이은 후예국

성헌석의 ‘대고구리’

2013-07-29 01:37:32

 

최근까지 사화산으로 알려져 왔던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예측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북한정권이 그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천년 전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일본 나고야대학교 연대측정종합연구센터 연구팀은 백두산에서 용암과 화산재로 쓰러진 고목을 채취해 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929~945년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폭발이 문헌상 발해가 거란족의 요(遼)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에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내 화산학계의 권위자로 알려진 모 교수는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3년 후에 일어났으나, 그 전조증상이 미리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로 인해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거란에게 멸망당한 것이다”라고 이상한 설명을 하면서, <요사 야율우지전>에 “민심이 이반하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화산학계에서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을 연계시키는 근거 역시 바로 이 기록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선 백두산에 엄청난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 백두산의 폭발영향. <이미지=필자제공>

 

당시 화산폭발지수가 7.4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수가 4이상이면 대규모 폭발에 속하며, 8을 최대로 지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7.4의 강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폭발이다. 수년 전 발생한 아이슬란드의 화산지수가 4정도라고 한다. 천년 전의 백두산 폭발은 그의 1000배에 해당하는 화산재를 분출했을 것이므로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재앙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특히 일본열도에 주었을 것이다.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발해)의 동북 변방

 

백두산이 대폭발한 적이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이렇듯 확실하나, 폭발했다는 역사기록이 어떠한 사서에도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백두산 일대가 대진국(발해)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대진국의 도읍이 그 일대에 있었다면 위에서 모 교수가 말한 전조증상으로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요나라에게 쉽게 망했다는 이상한 주장도 어느 정도는 수긍될 수 있다. 게다가 곧 화산이 폭발할 발해 땅을 얻기 위해 거란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다시피, 대진국의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북부 하남성 일대로, 남으로 황하에서부터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동만주까지 9000리가 해동성국 대진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의 중심이 아니라 수천 리나 떨어진 동북단 변방의 외지이기 때문에 백두산 대폭발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대진국(발해) 멸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류의 흐름 때문에 오히려 일본열도가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을 것이다.

 

대진국(발해) 멸망 원인은 내부 쿠데타

 ▲ 대진국의 강역은 하남성 황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9000리. 백두산 폭발과 대진국(발해) 멸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지=필자제공>


먼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멸망 장면을 보기로 한다.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 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지 3일 만인 1월 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이 발해의 도읍 홀한성을 향해 질주하는 도중에 발해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9일 홀한성을 포위하고, 3일 후인 12일 발해의 마지막 왕에게 항복하라는 의사를 전한다. 이틀 뒤 14일 대인선은 흰 소복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중론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망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위 <요사>의 내용보다도 축약되어 있고, 다른 점은 대진국이 건원칭제했다는 사실 뿐이다.

 

 ▲ 백두산 화산폭발시 예상 피해지역. <이미지=필자제공>


너무도 허망한 멸망으로 솔직히 뭔가가 이상한 기록이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대진국(발해)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대제국이 채 보름도 못돼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거란족이 쳐들어왔는데 겨우 3만 병력으로 저지했다가 패하자 도성이 포위되어 왕이 항복했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9000리 대제국 대진국의 진짜 멸망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리국지(高麗國志)>와 <고리사력(高麗史歷)>라는 역사책이 있는데, 이 책들은 대진국의 역사실록으로 <요사>가 왜곡하고 있는 대진국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서로 현재 소장처는 일본(고려국기 28권)과 러시아(고려사력 16권)이다. 이 책에는 대진국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고리국지>의 거란에 대한 기록

 

契丹を属国にしたし部族民たちを受け入れ、中央管理に登用した。その中に耶律阿保机は5城大将軍に封じてたし、契丹軍を担当する役割を果たした。契丹軍は輪に忠誠することができる10万の兵がいた

 

(해석)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았고 부족민들을 받아들여 중앙관리로 등용하였다. 그 중에 야율아보기를 ‘5성 대장군’에 봉했고 거란군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거란군은 (대진국에) 충성할 수 있는 10만의 군사가 있었다.

 

2. <고리사력>의 거란에 대한 기록

 

Император 916 лет aejong генералов и пять генералов бывшего вассаль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будет goguri из yayul просмотра голосовых связок yowang стержней.

 

(해석) 916년 애종 황제는 고구리(=대진)의 종속국인 거란 출신의 장군 야율아보기를 5성대장군과 요(遼)왕에 봉하였다. (※ 거란의 요왕은 대진국 황제의 제후임이 명백히 밝혀진 기록)

 

3. <고리국지>의 대진국 멸망 기록

 

大将軍 耶律阿保机が 上京城に入城して宮城を襲撃して皇帝を捕虜とした。新しい高句麗は遼国に千人おり震国の管理をそのまま登用した。

 

(해석) 대장군 야율아보기가 상경성에 입성하여 궁성을 습격하였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새로운 고구리(=대진국)는 요(遼)나라로 천명했고 진국의 관리를 그대로 등용하였다.

 

※ 대진국의 임금을 황제라 표현했고, 진국이라는 국호도 나온다.

 

4. <고리사력>의 대진국 멸망 기록

 

Путаница дела вождя 926, № 5 yayul капитализированных привел армию в 100000 был введен в sanggyeongseong Вынужден отречься от престола императора принять naeeotda печати

 

(해석) 926년 5호대장군 야율아보기가 혼란한 국정을 틈타 10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성에 입성하였다.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인새를 받아내었다.

 

5. <고리사력> 거란의 대진국 황족 처우에 대한 기록

 

Ko, которая для лиц в качестве королевских семей бывших аристократов daessi и Принцесса и брака было укрепление системы управления.

 

(해석) 전 황족인 대씨와 공주와 혼인하였고 고씨 황족들을 고관으로 기용하여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 대씨와 고씨를 황족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구리와 대진국은 황제국

 

6. <왜인흥망사(倭人興亡史)> 의 기록

 

926年 耶律阿保机は上京城に入城した後ホール忽汗城に療養がある皇帝に譲位を強要した。

 

(해석) 926년 야율아보기는 상경성에 입성 후 홀한성에서 요양 중인 있는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대진국이 왜 멸망했는지 확실해진다.

 

“황제국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아 야율아보기를 대장군 겸 제후인 요왕에 봉한다. 야율아보기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애제를 체포하고 양위를 강요했다. 애제가 양위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고, 요나라가 새로운 고구리가 되어 대진국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고구리는 대진국을 거쳐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 --> 청나라로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3)

 

 

 

 

우실하

 

 

 

우실하 항공대 교수 "돌하르방 기원 재검토 필요"

제주 돌하르방과 닮은 중국 요나라 시대 석인상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요나라 시대 석인상(왼쪽)과 제주 관덕정 앞 돌하르방. 2014.10.29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수 제공 >>
smj@yna.co.kr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제주 돌하르방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중국 요(遼)나라(907~1125년) 시대 석인상(石人像)이 만주에서 발견돼 돌하르방의 기원과 관련된 논란이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한국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최근 중국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 젠핑(建坪)현 젠핑박물관의 전시물 가운데 제주 돌하르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사암(砂巖)으로 조각한 이 석인상은 2011년 12월 젠핑현 헤이수이(黑 水)진에서 발굴됐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 몽골(1206~1368년)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됐다는 '북방설'과 동남아 일대에서 유사한 석인상들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한 '남방설', 조선시대 때 자체적으로 세웠다는 '자생설' 등이 팽팽히 맞서왔다.

우 교수는 "그동안 여러 주장에서 근거로 제시된 석인상들이 제주 돌하르방과 비슷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번 요대 석인상처럼 '똑같다'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면서 "제주 돌하르방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이 발견된 이상 최소한 그 외형은 몽골 이전의 요나라 시대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 교수는 또 "기존 학자들은 유라시아 석인상의 기원을 청동기시대로 봤지만,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석인상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 시기를 신석기시대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가장 이른 시기의 석인상들은 모두 1980년대 이후 중국 요서(遼西)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견된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 등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만큼 유라시아 석인상의 기원은 요하(遼河)문명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에서 총 47기가 발견된 돌하르방은 키 136~181㎝의 석인상으로, 제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며 성문 앞에 세워져 있었던 탓에 경계표지 또는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종교적 기능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 교수는 "제주 돌하르방이 몽골을 통해 왔다고 할지라도 그 외형은 최소한 요대부터 시작됐고 요대 석인상의 외형이 몽골시대로 이어져 몽골 지배기에 제주까지 전해졌다고 봐야 한다"면서 "한반도 지역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석장승', '미륵불'이라고 불리는 석인상들도 앞으로 더 상세한 연구를 통해 그 시기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4)

 

 

 

 

 

 

<주>

 

 

(1) http://hongwontack.pe.kr/

 

 

 

(2)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4930869

 

 

 

(3) 발해 멸망시킨 거란(요)은 발해 이은 후예국 (skyedaily.com)성헌식 2013-07-29 

 

 

 

(4) "제주 돌하르방-중국 요나라 석인상 매우 유사" | 연합뉴스 (yna.co.kr) 2014-10-29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구당서 거란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네이버 지식백과] 신당서 거란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네이버 지식백과] 거란의 건국 -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가 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요나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거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거란(契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거란족 - Daum 백과

 

 

 

거란 문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분자인류학논단 | 거란족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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