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29) 제4공화국 : 최규하정부(1979년 12월 21일~1980년 8월 16일) 1979년 12·12쿠데타 본문
대한민국 (29) 제4공화국 : 최규하정부(1979년 12월 21일~1980년 8월 16일) 1979년 12·12쿠데타
대야발 2025. 6. 21. 15:51

12월12일 오후 7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등은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 33헌병대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한다. 난입한 지 21분께 이들은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오후 9시30분께, 전두환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13일 새벽 5시10분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정 총장의 연행·조사 재가를 내린다. 이날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사태’ 연루 혐의로 정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등이 구속된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후 전두환은 권력 실세가 됐다.
■ 그날 밤 무슨 일 있었나…12·12사태 결정적 장면 6가지
입력2017.12.12 16:19 수정2017.12.12 17:31

1979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밀실에서 10.26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유신 체제는 1972년 유신 헌법 작업이 은밀히 진행됐던 그곳에서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사진은 10.26사건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비상 계엄 상태에서 중앙청 앞에 자리 잡은 탱크. 사진=연합뉴스
38년 전 오늘(12일)은 ‘12·12 사태’가 일어난 날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속해있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치적 실세로 자리를 굳힌 날이다.
전두환은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전직 대통령이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된다. 전두환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된 후 구치소에 수감될 때까지 ‘12·12 사태’의 결정적 장면을 살펴봤다.

12·12쿠데타 때 체포돼 10·26 관련 공판에 출석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사진=연합뉴스
①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작전 모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일으킨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 뒤,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 총장을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전두환(왼쪽)과 최규하(오른쪽)는 1980년 5월 16일 밤 최규하가 귀국한 이래 그다음 날 자정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날을 보내게 된다(1986년 모습, 가운데는 윤보선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② 12월12일 정 총장 보안사로 강제 연행…최규하 대통령에게 조사 재가 요청
12월12일 오후 7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등은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 33헌병대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한다. 난입한 지 21분께 이들은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오후 9시30분께, 전두환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③ 수도 서울을 점령하라
최 대통령이 재가 고심을 하고 있을 당시 수도 서울 한복판에는 ‘하나회’ 일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출동해 자리를 잡는다. 이후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한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후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은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끌고 갔다.
한편 사살된 정 병장의 경우 조선대 2학년을 다니다 입대했다. 그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의 초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정 병장은 제대를 3개월 앞둔 터였다.
④ 최규하 대통령, 정 총장 연행 재가 내려…군 주도권 장악
13일 새벽 5시10분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정 총장의 연행·조사 재가를 내린다. 이날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사태’ 연루 혐의로 정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등이 구속된다. 당시 정 총장은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 국방부 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후 전두환은 권력 실세가 됐다.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전두환, 대통령 선출
이듬해인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은 노태우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통해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같은 날 비상계엄 전국확대 되면서 국회가 군으로 포위된다. 이후 5월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다. 이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는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에 항거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전두환씨/사진=연합뉴스
시위가 확산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탱크 등을 앞세워 무력으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끊겨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께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전두환은 8월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 27일 대통령 최규하에게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전통을 남긴다는 명분 하에 물러 나게 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됐다.
한편 당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은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⑥ 김영삼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전두환·노태우 구치소 수감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과 6월9일 연세대학교 재학생이던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결국 10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내세워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고, 29일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두환과 노태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 각각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 모두 구속한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 같은 해 관훈클럽 토론에서 “노태우 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군인 출신으로서 12·12 사태를 일으켰고, 일선 군부대를 빼내 쿠데타를 한 사람이다.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것은 군정의 연장이다”고 강조한 바 있다.(1)
■ '정보' 장악해 집권한 전두환, 학생들 징집해 '첩보' 강요했다
[손호철의 발자국] 64. 서울 삼청동 :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의 비극을 찾아서
'한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파워 엘리트가 누구인지 찾고 그 이유를 밝혀라.' 미국 유학시절 정치권력론 시간에 교수가 내준 학기 과제였다.
"한국의 파워 엘리트를 어떻게 찾지?" 고민을 하고 여러 문헌을 찾아 알게 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소위 '지위법'이다. 정계는 국회의원 이상, 관료는 차관급 이상, 경제는 10대기업 이사 이상, 문화교육계는 종합대학 학장 이상 등 특정 지위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언론 등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중 영남 출신이 얼마나 되는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출신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하곤 한다. 문제는 이 경우 숨겨진 실세였던 김영삼 정권의 김현철, 박근혜 정권의 최순실은 빠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이 '명성법'이다. 누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명성을 여론지도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정보의 흐름을 추적하는 '네트워크 분석'이다. 중요 정보가 누구에게 흘러가느냐는 분석하는 것이다. 그렇다. '정보가 권력이다'. 아니 정보가 '최고의 권력'이다.
10‧26에서 12‧12, 이어 5‧18로 이어졌던 1979년 말과 1980년 봄, 형식적인 최고권력자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었지만 중요 정보는 그가 아니라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이후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었다)의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흘러갔다.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나아가 육사 출신의 '정치군인'들의 모임인 '하나회'의 우두머리로서 정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그리워서 울던 그 사람'.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에서 박정희,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박정희의 시중을 드는 22살의 미모의 여자대학생 심재순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들이 나누던 이야기는 얼마 전 터진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해 박정희, 차지철이 강경론을 토하자, 잠깐 자리를 비운 김재규는 권총을 챙겨 올라와 이들을 사살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로 가려다가 다른 건물에 초대해 놓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제안에 의해 육군본부로 이동했다.

문제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시신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김재규가 허겁지겁 떠난 뒤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정희의 시신을 챙겨 가까운 삼청동 입구의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이송해 당직 군의관에게 사망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 병원은 보안사령부 영내에 위치해 있었고 전두환은 당직사관을 통해 박정희의 사망 사실을 알게 돼, 육군본부로 이동한 김재규를 체포할 수 있었다. 10‧26 당시 박정희 암살이라는 정보를 쥔 사람이 전두환이었고, 1980년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시 김재규가 박정희의 시신을 챙겨 이동했더라면, 김재규가 육군본부가 아니라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더라면, 80년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무궁화동산. 이제는 단골 시위 장소가 된 청와대 앞 광장 왼쪽에는 무궁화가 만발한 무궁화동산이 있다. 그곳에 서자 김재규의 상황 판단 잘못으로 비극으로 끝난 10‧26 거사가 생각나 가슴이 찡했다. 이곳이 바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알을 맞고 심재순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 곳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청와대로 들어가자마자 박정희가 여성들을 데려다 놓고 술을 마시고 놀았던 "안가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역사적인 10‧26의 현장을 철거해 무궁화동산으로 만든 것이다. 겨울이라 꽃은 피어 있지 않았지만, 무궁화 꽃을 보고 있자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와 그의 지시를 따랐던 수행비서 박홍주 대령, 박정희의 술시중을 들 여인들을 간택하는 채홍사 역을 해야 했던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등 10‧26으로 사형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고 광주학살을 일으키게 만들어준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로 이름이 바뀌고 이전을 해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변했다. 바로 이곳에서 전두환은 보안사의 정보력에 기초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했고 이어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경임해 행정부를 장악하고, 5월 18일 광주학살 작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굴복시킴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정보력, 그리고 박정희가 키운 육사 출신의 정치군인 모임인 하나회의 인적 네트워크였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계엄사령관에 오른 정승화 장군이 주도한 군 지휘관회의에서 다수 지휘관들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에 따른 폐해를 실감한 만큼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의 정치적 야심을 아는 만큼, 그를 한직인 동해경비사령관으로 귀양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촉수인 하나회 출신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이들은 전두환이 지방으로 쫓겨 가기 전에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대통령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였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현장에 있었지만 김재규를 육군본부로 유인해 사태를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이미 수사결과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해 관련조사를 위해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최규하가 체포명령을 수차례 거부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군을 동원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상관인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참군인이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이 쿠데타에 저항했지만 하나회 소속 부하들에게 무력화되었다. 정병주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던 참군인 김오랑 소령은 쿠데타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12‧12를 사람들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는데, 당시 북괴가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노태우의 12‧12를 군사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들을 구속시켜 세상이 충격에 빠졌을 때, 서강대에 특강을 온 한 원로 정치학자가 전두환·노태우를 옹호했다. 그는 노태우 밑에서 고위직을 지낸 '노태우맨'이었다.
"그러니까 노태우 같은 X새끼는 총살시켜야지요!" "아니 손 교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하얗게 질려 물었다. "그동안 그놈들이 항상 북괴의 위협 운운하며 시위하는 학생들 잡아가고 국민들 억압했잖아요. 그런데 노태우 X새끼는 자신들 권력 잡겠다고 북한이 쳐들어 내려오라고 최전방 비우고 9사단 병력을 끌고 나왔으니 총살시켜야지요. 이런 반역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대한민국 지키겠다고 군에 왔다가 이들의 사병으로 끌려가 같은 우리 군에게 총을 쏴야 했던 사병들은 뭐예요? 박정희는 최소한 5‧16 때 이 같은 짓은 안 했어요." 그는 뭐 씹은 표정으로 "전방에 미군이 있었으니 북한이 못 내려왔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다. 이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최전방의 군대를 끌고 내려와 '국민의 군대'를 자신들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이 점에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두환보다 '덜 악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노태우는 전두환 못지않은, 어느 면에서는 전두환 이상의 '반역자'다. 이 같은 슬픈 역사는 모른 채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변한 이곳으로 그림을 감상하러온 미술 애호가들을 보고 있자, 그들의 얼굴이 갑자기 장태완, 정병주, 김오랑으로 보였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우리 역사에 남긴 악행이 5‧18 학살 등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다.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이다.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은 이를 관장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와 사회정화위원회가 삼청동에 있어 생긴 것으로, 신군부는 권력을 잡자 5‧16 쿠데타의 국토건설단을 모델로 사회악을 일소한다며 폭력배 등 2만 명을 잡아다가 군부대에서 4주간 순화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각 경찰서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니 초과달성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도 마구잡이로 잡아 보내 계획의 두 배인 4만 명이 끌려갔다. 정작 조폭 등은 뒷돈주고 빠지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로 잡혀갔다. 여성들도 동네에서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다가 적발되면 붙잡혀 갔다. "이제 민주주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예비역 장군, 노동조합 간부들이 잡아갔다. 하다못해 고등학교별로 2~3명의 할당량을 배정해 담임선생들이 제자 중 대상자를 골라 "새마을교육을 받고 오라"고 보내, 잡혀온 사람 중 4분의 1이 미성년자였다!

이들은 군부대로 보내져 목봉체조 등 살인적인 훈련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고, 상당수는 1~5년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사회주의국가에서나 있는 것으로 배워온 강제노동수용소가 1980년대까지 '자유대한'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음대로 뛰어놀 어린 나이에 이곳에 끌려온 고등학생들은 살인적 훈련과 구타에 시달리며 새마을운동과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같은 위헌적이고 반인류적인 조치로 500명이 죽었고, 2300명이 부상이나 상해를 입었다. 2004년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이 뒤늦게 제정됐고 2018년 대법원도 삼청교육대는 위헌이고 무효라고 판결했다. 삼청교육대를 기획한 국보위가 있었던 옛 중앙교육연수원 빌딩은 이들의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자 우리를 협박하고 우리를 고문했던 당신들, 우리에게 밀고자가 되기를 강요했던 당신들로부터 우리는 살아남았다. (…)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2019년 12월 연희동 전두환 집 앞에 머리가 희끗한 나이 든 사람들이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녹화사업 희생자들의 진상규명 요구였다. 녹화사업하면 대부분 식목일과 나무심기가 떠오르겠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다. 세운상가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 퇴계로를 만나는 곳에 진양프라자라는 낡은 빌딩이 있다. 이곳은 보안사의 또 다른 슬픈 역사인 녹화사업의 현장이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 참여자 등 정권에 비판적인 학생들을 강제징집했다. 이는 박정희 때도 있었던 일이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녹화사업이었다. 녹화사업은 회유, 협박, 고문을 통해 이들을 전향시키는 한편, 이들에게 친구들을 만나 학생운동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오도록 요구하는 등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1984년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폐지됐지만, 선도공작이란 이름으로 명칭만 바꾸어 1989년까지 계속됐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조사에 따르면, 선도공작을 제외한 녹화사업 피해자만 1192명이다. 이 같은 프락치 강요 과정에서 연세대생 정성희 등 9명이 의문사를 했다. 의문사 피해자 이외에도 제대 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전두환이 우리 역사에 남긴 비극은 이처럼 너무도 크다.(2)
<자료출처>
(1) 그날 밤 무슨 일 있었나…12·12사태 결정적 장면 6가지 - 아시아경제 (asiae.co.kr)2017.12.12
(2) '정보' 장악해 집권한 전두환, 학생들 징집해 '첩보' 강요했다 (pressian.com)
<참고자료>
대한민국 제5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5·17 쿠데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980년 '서울의 봄', 막장 광부들이 돌을 들고 싸웠다 (pressian.com)
전두환 사기극의 '끝판왕', 평화의 댐 가보니… (pressian.com)
건망증 한국에 보내는 ‘부메랑 통신’ (hani.co.kr)2008.3.1
“수집한 역사자료 방대…국가가 정리작업을” (hani.co.kr) 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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