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7)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본문
1979년 10월 겨울공화국의 붕괴 :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61년, 4·19민주혁명의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군부정권은 유신헌법을 공포하며(1972년) 1인 영구독재 체제를 획책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 억압 속에서 계속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난관에 부딪친 독재 정권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잔재의 군사 쿠데타 : 신군부의 등장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은 정보·보안·수사 등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군권을 장악하고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노태우 등 하나회라는 군부 사조직을 기반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국가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계획을 실행해 갔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한 정치장교로서, 박정희 사후 등장한 "신군부"이다.
1980년 3~5월 민주화의 열망
국민 대다수는 박정희의 사망으로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실현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기대에 찬 사람들은 1980년 초를 “서울의 봄”, ‘겨울공화국이 끝나고 민주화의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1980년 대학 밖으로 나서는 대학생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1979년 11월경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시작하여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전국의 주요 대학들에 학생회가 구성되며, 4월은 그야말로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며, 대학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전국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동상이몽 속의 정치권
정치권은 최규하 정부 하에서 개헌주도권을 둘러싸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관료집단에 대항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1980년 2월 김대중이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자, 김영삼과 경쟁이 치열해지며 야당인 신민당이 분열 위기에 봉착하였고, 공화당의 김종필은 야당과 신군부의 힘겨루기를 관망할 뿐이었다. 정치권이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신군부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 군을 투입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안개정국
5월 14~15일 서울에 모인 전국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서울역에 모인 1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을 이끌며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지방 24개 대학의 학생들이 각 지역에서 가두시위를 감행하며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이면서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군과 충돌은 현명치 않다는 판단에 정치일정을 관망하고자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16일에도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중심으로 대중 집회를 열고 야간에는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전남대 학생회 역시 계엄 해제와 정치권 일정을 관망하며 19일의 시위를 약속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980년 5월 계엄군 투입
1980년 5월 전남대 정문 앞 시위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1980년 5월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결국 발포하기에 이른다.
고등학생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19일에 사망했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늦은 저녁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지만 시민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학살,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들은 계엄군이 주둔한 전남도청을 찾아 거세게 항의했지만 위정자와 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시민들은 군의 저지선을 넘었고, 계엄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 앞에는 주부, 아주머니, 젊은 여성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980년 5월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 속에서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며 승리감을 만끽하였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청소하였고, 흩어져 있던 시민군을 모아 재편성하여 치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하였다. 그들은 시 외각을 근거지로 매복하여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1980년 5월 광주 공동체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희생자의 시신을 담은 관들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입관하지 못한 시신들은 무명천을 덮어 두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마련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 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다 함께 슬퍼하였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조작 보도하게 하여,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와 묵살하고 계엄군의 살인적 진압을 은폐시켰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의 협상과정에서 내부 의견에 혼선을 갖기도 하였고, 계엄사 정보요원의 교란작전으로 인해, 협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980년 5월 최후 항쟁
그러나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고 만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80년 5월 님을 위한 행진
1980년 5월 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군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글을 뿌리면서 서울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하였다. 이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전국 도처에서 계속되었다.
- 1982년 전남대학교 박관현(1980년 당시 학생회장) 옥중 투쟁 중 사망 1980년 당시 신군부 세력을 직·간접으로 도와주었던 미국에 대한 저항은 1980년 12월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이어졌다.
님을 위한 행진곡 :
1980년 항쟁 당시 도청에서 시민군 대변인을 했던 윤상원과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박기순(1978년 사망)의 영혼 결혼식에 노래가 불려진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묏비나리'를 개작하여 노랫말을 붙이고, 김종률이 곡을 지어 "님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다. 이 노래는 광주에서, 망월 묘지에서, 매년 오월 거리에서 5·18민주화운동과 희생자를 기억하며, 민주화를 위한 열망에서 불려졌다.
1987년 6월 항쟁과 광주청문회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월 항쟁은 전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하였다. 특히 6월 항쟁을 통해 국민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전 사회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다.
노태우는 그동안 ‘광주사태'로 불려오던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종합적인 보상 방안을 발표하였지만, 시민 사회운동 단체들은 학살의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였고, 결국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상황 속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주청문회가 개최되기에 이른다.
광주청문회는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이 전국에 생방송되며, 신군부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의 진상을 전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학살의 책임자들은 사전에 준비된 답변만 반복할 뿐,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광주항쟁 피해자 및 관련단체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광주항쟁과 직접 관련된 인물들을 고소·고발하면서 법적 진실규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법원이 관련사건 및 관련 인물들에 대한 ‘공소권 없음’을 결정하면서 법률을 통한 진실규명이 실행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에 5·18관련단체 및 사회단체 그리고 일반인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 서명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1995년 “5·18관련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였고, 광주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규명작업이 실행되었다.
1995년 12월 책임자 처벌
12월 19일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5·18특별법”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및 12·12 및 5·18사건의 관련자들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라는 죄목으로 사형 및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국민화합”이라는 명목 아래 이들의 특별 사면을 건의·단행하였고, 1998년까지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특별 복권되었다.
1997년 4월 국가기념일 제정
1997년 4월 29일에는 항쟁의 상징인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5월 16일에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5만여 평의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었다. 같은해 5월 18일에는 정부가 주관하는 첫 5·18기념식이 거행 되었다.
2001년 12월 21일에 제정된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2002년 7월 27일에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되어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준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5·18특별법을 토대로 정부는 ‘과거사청산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기관을 설립하였고, 5·18뿐만 아니라 제주4·3사건,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그리고 각종 의문사 등 과거 국가권력 및 군부독재세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만행의 사실관계를 밝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2007년에는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1980년 당시 계엄군이 작성한 많은 기록을 확보하였다.
2011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네스코는 2011년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제10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등재심사소위원회(RSC/Register Sub-Committee)가 각 국이 신청한 84건을 두 차례에 걸쳐 심의하여 권고한 59건(권고 55건, 예비 권고 4건)의 기록물을 최종 심의하여 등재를 권고했으며, 24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서명을 거쳐 2011년 5월 25일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발표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이를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이며, 5·18민주화운동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을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자료출처>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https://www.518archives.go.kr/index.do
<참고자료>
대한민국 제5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8031706558796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0219303333598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0816431816303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0616502074669
5·17 쿠데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건망증 한국에 보내는 ‘부메랑 통신’ (hani.co.kr)2008.3.1
“수집한 역사자료 방대…국가가 정리작업을” (hani.co.kr)한겨레 2008.3.1
‘5·18의 모든 것’ 한 권에 담았다 (hani.co.kr) 한겨레 2008.3.13
‘5·18 비극’ 자식에게…고통 대물림 (hani.co.kr)200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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